'2024/06'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4.06.30 싱가폴 산책
  2. 2024.06.15 안도현의 발견 1
  3. 2024.06.08 미생 - 윤태호 1
  4. 2024.06.01 자전거여행2 - 김훈 2

2주간의 Refresh 휴가, 다이빙과 휴식을 위해 발리로 가기 전 3박4일 일정으로 싱가폴을 들렀다.

 

가성비 좋은 동방항공을 이용해 푸동을 거쳐 싱가폴로 향하는 길,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싱가폴 상공에서 air traffic으로 40분 가량 뱅뱅 돌다 착륙한 싱가폴은 깨끗한 도시 그 자체다.

 

보태닉 가든, 마리나베이, 아랍스트리트, 가든스 바이 더 베이 & 클라우드 포레스트, 슈퍼트리 라이트쇼와 리버크루즈 야경, 그리고 불꽃놀이까지 싱가포르는 도시와 자연이 조화롭게 잘 구성된 장소다.

 

더불어 세계 각국의 요리와 싱가포르 전통 음식, 도시 여기저기 있는 미슐랭 맛집 등 미식의 천국이기도 하다.

 

주얼창이
슈퍼트리 라이트쇼
슈퍼트리와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야경
클라우드 포레스트
클라우드 포레스트
클라우드 포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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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뚤어 보아야 가치있는 발견이 있다.


[본문발췌]

바다에 데려간 날 아이가 말했다. "바다가 생각보다 얇네." 아빠가 받았다. "그래? 키가 크면 좀 더 두꺼워 보일거야." 그래서 아빠는 아이를 안고 바다를 보여주었다. - 박성우 시인과 그 딸


버릴 것 버리고, 내려둘 것은 내려두어야 신선의 흉내라도 내볼 텐데, 나도 여전히 속 좁은 인간으로 세상에 갇혀 산다. 삶의 껍질을 벗을 수 없으니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셔야 하나?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저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통찰력이 가미되어야 예술로서 요건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연어 - 문학동네>


"여기까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왔지만 여기서부터 나는 시속 1센티미터로 사라질 테다" <마흔, 김선우>


개발이라는 이름의 굴착기는 모퉁이를 지우는 일에 열심이다. 산모퉁이는 깎아내고 길모퉁이는 반듯하게 바로잡는다. 편리성과 합리를 앞세워 현대적인 것을 추구한다. 현대적인 것은 모퉁이가 없다. 모든 현대적인 것은 그래서 그리움을 용도 폐기했다.


혼자 잘나서 출세하고 이름을 얻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걸 착각하거나 망각하면 오만해진다.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죽은 사람이된다. '너'가 없으면 '나'는 없다. '나'는 '너'로 인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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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보기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발전적 변화로 가는 시작이다.


[본문발췌]

익숙한 것, 친숙한 것으로부터 낯설기. 그것은 곧 다르게 생각하기와 패러다임 변화의 시작이죠. 매일 똑같은 생활과 반복되는 업무는 매너리즘을 동반하고 조건반사형 인간만을 만들어내죠. 우린 좀 더 우리 삶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낯설게 보기를 위해 우리는 공포에서 한 발짝 떨어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포의 대부분은 실체가 없는 비이성적 두려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번져가는 것은 잡념에 빠졌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생각은 타당하고 마땅한 절대수를 보여준다. 오직 한 길이다. 생각과 경험의 최선, 바둑에선 그것을 정석이라 부른다.


빤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눈에 훤히 보이는 길을 너무 뻔해 마다해서 아쉽게 패한 많은 대국이 떠오른다. 사는 게 의외로 당연한 걸 마다해서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 같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어려워도 꼭 해야 하는 것. 쉬워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바둑에 그냥이란 건 없어.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또, 내가 무얼 하려고 할 때는 상대가 어떤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파악해야 해. 그걸 상대의 '의중'을 읽는다라고 해. 왜 그 수를 거리에 뒀는지 말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네가 상대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형세를 분석한 너의 안목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야. 그냥 두는 수라는 건 '우연'하게 둔 수인데 그래서는 이겨도 져도 배울 게 없어진단다.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어. 실패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성공은 뭐냐에도 말할 수 있어야지. 취직해보니까 말야, 성공이 아니고 문을 하나 연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성공은?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문제 아닌가?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내 바둑이니까... -조치훈


들어주는 귀... 바둑을 수담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는 한 수 한 수는 곧 내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행복해야 해. 자기가 행복하지 않으면서 주는 사랑을 행복하게 받을 수 있을까? 


'꿈이 뭔가?', 뜻이 향하는 것. '지향'. 어떤 것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게 되는 근거는 '지향'에 있다. 무엇인가가 되고 싶고 갖고 싶어 그것을 향하게 되고, 그러다 당장의 자신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지향하는 바를 위해 이렇게 저렇게 해도, 지향하는 대로 살기란 매우 어렵고, 지향하는 바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회한과 깊은 고독에 빠진다. 지향은 곧 길이고, 그 길을 걸을 뿐인 누군가는 길의 끝에서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그 거울에서 소박하게 만족한 미소를 띤 누군가가 서 있을 수도, 괴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만날 수도 있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의 <고향> 중에서

어느 시인이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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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며 만나는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들이 사는 삶의 공간이 눈과 마음에 닿고 새겨지는 것은 길을 지나느 속도에 반비례한다.


[본문발췌]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신경준, <도로고(道路考)>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 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신경준의 지리책을 읽을 때, 집에서 길로 나가는 아침과 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은 본래 이처럼 신선하고 새로워야 마땅하다. 신경준의 도로 인식에는 속도의 개념이 빠져있다. 그의 길은 가야 할 곳을 마침내 가는 그 '감'을 도덕으로 인식하는 길이다.


풍수에서, 길의 상징과 물의 상징은 같다. 그것은 모두 공적 소통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길의 표정은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이 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문경새재는 여러 변방 오지에 흩어진 인간의 삶이 당대 현실과 관련을 맺으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로서 영남대로의 중허리를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그 마루턱은 늘 구름에 가려 있는데, 그 너머 아득한 북쪽이 서울이며, 거기가 당대의 핵심부이고, 현실을 만지고 주무르고 죽이고 살리는 일들은 모두 문경새재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영남 유림들에게, 문경새재는 자아와 현실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상처의 고지였다. 그들은 새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갔고, 다시 새재를 넘어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의 지붕은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 검박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여유롭지만 넘쳐나지 않는다. 이 단순성은 위대하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내린 눈발처럼, 그의 마지막 말은 "매화에 물 주어라"는 당부였다.


하회마을 집들은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고 비스듬히 외면하고 있다. 존재의 품격은 이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 그래서 마을의 길들은 구부러져 있다. 길은 그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가 각 집의 대문에 닿는다.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하회의 집들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집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이다. 길이 여러 집을 에돌아서 대문에 당도할 때, 그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익명성에 매몰되어 다만 기계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하회의 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웃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길이다.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는 체증에 막혀 있었고, 교통방송의 내용은 막힘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 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 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버렸으며 인간은 더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련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마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아파트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추사秋史는 대청마루 위에 '신안구가新安舊家'라는 편액을 걸었다. '늙음'이 스며들어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새로워서 번쩍거리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추사의 '구가' 속에는 그가 누렸던 삶의 두께와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오래된 살림집은 깊은 공간을 갖는다. 우물과 아궁이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불을 때지 않을 때 아궁이 앞에 앉으면 굴뚝과 고래가 공기를 빨아들여서 늘 서늘한 바람기가 있다.
 
물과 불은 삶의 영속성을 지탱해주는 두 원소이다. 이 두 원소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다.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그 물을 퍼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가 깊은 곳에 줄을 내려서 거기에 고여 있는, 갓 태어난 원소를 지상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 물은 아파트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익명성의 물과는 수질이 다르다. 아궁이는 땅속과 하늘을 연결하는 바람의 통로이다. 그 통로의 입구이다. 불길은 고래를 따라서 흐르다가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른다.
불길은 흩어져서 없어지고 방바닥에는 온도가 남는다. 그 온도 위에서 사람들은 자식을 낳고 기른다. 사람이 눕는 방바닥 밑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그 통로를 따라 불길이 흐른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 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워 있는 방바닥 밑 땅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과학현상이다.
 
안방은 물, 불, 밥, 생명 같은 원형질의 공간이다. 안방은 땅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밑으로는 하늘과 통한다. 마루는 어떤가. 마루는 고래의 불길이 닿지 않고, 땅으로 부터 일정한 높이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마루는 서늘하고, 불길이 닿지 않아도 습기가 없다. 마루는 안방보다 훨씬 더 사회적인 공간이고, 공적으로 진화한 공간이다. 마루는 움집의 추억이나 땅속의 원형질로부터 먼 거리를 진화해 왔다.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내용은 그 서늘함에 깃든 공적 개방성이다. 그리고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정도는 마루와 땅 사이의 거리, 그 빈공간의 높이다. 사람이 신발을 벗지 않고도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높이에서 마루의 진화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개들은 마루 밑에 들어가서 땅에 배를 깔고 자는 것이 마땅하다.
 
마루 위를 지나는 대들보와 마루 천장에 드러난 서까래는 이 공적 개방성의 공간 위에 논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루는 세상을 맞이하는 공간이며, 더 넓은 공간과 소통되는 공간이다. 비록 작은 평수의 마루라 하더라도, 마루는 그 열려짐의 크기로 세상 전체를 향한다. 그렇게 해서, 안방에서 문지방을 넘어서 마루로 나올 때 우리는 더 크고 더 넓은 삶의 새로운 질감 속으로 들어선다.
 
오래된 살림집이 문짝들은 공간을 구획하고 차별화하지만, 결절시키지는 않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나들 때 사람들의 공간감각 속에서는 이쪽과 저쪽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다. 미닫이 문을 닫을 때, 문밖의 공간은 제거되거나 격절되지 않는다. 문밖의 공간은 당분간 저쪽으로 밀쳐질 뿐이다. 미닫이문은, 열려 있을 때나 닫혀 있을 때나 언제나 문이 갖는 소통의 기능을 수행한다. 미닫이문은 옆으로 포개지면서 열리고 닫힌다. 미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만든 통로가 아니다. 미닫이문은 애초로부터 통로로 태어난 문이다. 이 문이 소통과 구획을 동시에 수행한다.
 
호텔이나 아파트의 여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뚫은 문이다. 이 여닫이 문짝은 문밖의 공간을 완벽히 차단하고 제거한다. 차단 기능이 클수록 좋은 문짝으로 꼽힌다. 아파트의 도어는 사람이 드나드는 순간에만 문이고 닫혀 있을 때는 벽이다. 그러니 문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깝다. 드나들어야겠다는 욕망과 외부를 차단해야 한다는 욕망이 그 문짝 속에 기묘하게도 뒤엉켜 있다. 평생을 이 철벽 같은 문짝 안에 갇혀서 살아왔다. 아름다운 것들은 이제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세상과 떨어져 있다. 이 그림을 다시 삶 속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는 것인가. 그저 뒷짐지고 들여다보기만 해야 하는 것인가. 집 살 때 꾼 돈 이잣날은 흥부네 끼니 돌아오듯이 돌아온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안면의 옛집들을 기웃거릴 때, 오늘의 빈곤은 가슴 아프다. 이 아픔 속에 좀 더 좋은 미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믿어도 좋을 것인가.
 


전남 화순 동복호수에서 출발하여 무등산의 북쪽 산간도로를 따라서 담양 쪽으로 간다. 여기는 순한 땅이다. 산이 마을을 옥죄지 않고 품을 넉넉하게 열어서, 들과 마을은 산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작은 호수들이 많고, 넓은 들 한가운데 우거진 숲들이 많고, 400년이 넘은 오래된 정자들이 많다. 자전거는 정자마다 들러서 놀면서 천천히 가겠다.
16세기 호남의 이름난 누정들은 화순에서 무등산을 넘어 담양으로 가는 887번 지방도로 언저리와 그 인근 야산에 집중되어 있다. 식영정, 소쇄원, 취가정, 죽림재,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독수정, 환벽당...... 조선 중후기의 호남 시인들은 이 이웃한 정자들을 오가며 놀았고, 호남 시단의 문학적 에콜은 정자들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정자는 현실의 중압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이다. 정자는 삶과 격절된 자리도 아니고 살의 한복판도 아니다. 정자의 위치는 세상을 깔보지도 않고, 세상을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정자의 내부구조와 원림 내의 공간 배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않고,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도 않는다. 정자와 세상과의 관계의 본질은 서늘함이다. 정자는 그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자의 것인 동시에,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정자는 '본다'는 행위가 갖는 시선의 일방성을 넘어선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버린다. 더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왕대는 8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듯이 흰 꽃이 핀다. 꽃이 피고 나면 대나무는 모조리 죽는다. 꽃 속으로 모든 힘이 다 들어가서 대나무는 더 살 수가 없다.


기솔리 쌍미륵 목에는 삼도 세줄이 굵고 선명하다. 삼도는 미혹한 생존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중생의 고통이다. 이치와 현상에 대한 미혹이 번뇌도이고, 번뇌가 가져오는 그릇된 언행과  생각이 업도이며, 업도의 과오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 고도이다. 미망과 고통은 서로 손짓해 부르고, 부르면 달려온다.


'태초에는 해도 달도 없어서 세상은 캄캄했다. 인간들은 캄캄해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남방국 일월궁에서 청의동자가 태어났다. 청의동자는 앞이마에 눈이 두개, 뒤이마에 또 눈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옥황상제의 수문장이 지상으로 내려와 청의동자의 눈을 취하여 축수하니 청의동자의 눈이 하늘로 올라가 해가 되고 달이 되었다. 세상은 비로소 밝아졌다.' 
- 제주 서사무가의 얼굴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에 뜨는 달이 모두 인간의 눈빛이며 그 눈빛이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는 힘이다!


얼굴은 내면의 풍경이고 외계로 향한 창구이다. 얼굴의 언어는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언어이다.


자본주의적 대량유통의 특징은 재화의 흐름을 관리하는 기능이 권력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통은 생산과 소비 사이에 끼여서 그 양쪽을 연결시키는 작용일 뿐 아니라, 끼면서 그 양 쪽 위에 군림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간격이 클수록 유통의 이윤은 더욱 커진다. 유통은 생산보다도 민첩하고 소비를 향하여 소비를 이끈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격은 유통이 거두어가는 이윤의 밭이지만 그 간격에 숨어 있는 위험을 유통은 생산과 소비 양쪽으로 재빨리 전가시킨다. 유통의 권력은 제1차 산업의 생산물에 대해서 더욱 지배적인데 농업과 어업에서 생산은 노동이고 유통은 권력이다.
모란시장이 보여주는 유통의 풍경은 권력화되지 않은 교역의 모습이다. 모란시장의 유통은 생산과 소비 양쪽에 대해서 대등하고 그 대등함으로 유통의 활력을 삼는다. 모란시장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잡다하고, 냄새나고, 교역의 신명으로 넘쳐난다. 모란시장은 권력화되지 않은 유통의 활기를 보여준다.


그 옛 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가 없고 단출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그것이 허소치가 말했던 법法이다. "법이 있어야 아름다울 수가 있고 아름다워야 신묘하게 될 수가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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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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