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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3.08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가해자들은 시간과 함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는데, 피해자들은 그 때의 기억에 갇혀 괴로워 한다.
 
 
[본문발췌]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 곳에 고정되는 빛처럼. 
그게 너일까, 다음 순간 생각했다. 네가 지금 진동하는 실 끝에 이어져 있나. 어두운 어항 속을 들여다보듯, 되살아나려 하는 너의 병상에서.

아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내가 끈질기게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건천 하류의 어둠 속에서. 아마를 묻고 돌아와 누운 너의 차가운 방에서.

하지만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렀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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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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