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는 다양성의 배경이 되고, 다양성은 삶을 흥미롭게 만들고 확장하며 발전시킨다.
요즘 일부 정치인, 언론인, 유튜버 등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편견과 불평등, 이분법적 편가르기로 차이를 활용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본문 발췌]
수컷과 암컷의 공격성 패턴이 왜 이토록 서로 다른 취급을 바는지 그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수컷의 공격성만이 사회에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포유류 종에서 수컷은 지위나 세력권을 놓고 다투는 반면, 암컷은 새끼를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런 행동을 우리가 좋게 생각하든 나쁘게 생각하든, 그런 행동이 어떻게 진화하게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양성 모두에게 그런 행동은 늘 유전적 유산을 남기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그런 행동과 아무 관계가 없다.
수컷 영장류가 폭력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공격성과 체격의 우위가 암컷을 지배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암컷을 지배하는 것은 수컷이 살아가는 목표가 아니다. 생태학적 요구를 감안할 때, 최적의 크기로 진화한 쪽은 암컷이다. 획득한 먹이와 이동 거리, 기르는 자식의 수, 피해야 하는 포식 동물을 감안하면, 암컷의 신체가 최적의 크기이다. 진화는 수컷을 이 이상적인 크기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는데, 그 목적은 자기들끼리 싸울 때 우위에 서기 위해서이다. 수컷 사이의 경쟁이 치열할수록 수컷의 신체적 특징은 더 인상적으로 발달했다. 고릴라 같은 일부 종은 수컷의 몸이 암컷에 비해 두 배나 크다. 수컷끼리 싸우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짝짓기 상대인 암컷에게 접근하는 데 있기 때문에, 암컷에게 해를 가하거나 암컷의 먹이를 빼앗는 것은 결코 수컷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사실, 암컷 영장류는 대부분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면서 하루 종일 자기들끼리 먹이를 구하러 다니거나 서로 어울려 지내는 반면, 수컷들은 주변부에 머문다. 전형적인 영장류 사회의 핵심은 나이 많은 가모장이 있끄는 암컷들의 네트워크이다.
모든 문명은 남성들에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최근에 79개 나라를 조사한 결과는 이 차이를 확인해준다. 보편적으로 남성은 독립과 자기 고양, 지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여성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집단의 안녕과 안전을 강조한다.
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주 다르게 대할 때가 많은데, 기분이 상했을 때에는 어머니를 찾는 반면, 놀이를 원할 때에는 아버지를 찾는다. 한 연구 결과는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상호 작용은 보살핌이 주를 이루는 반면, 아버지는 행동학적으로 놀이 상대로 정의된다."라고 요약했다.
양성 사이의 차이는 대부분 쌍봉 분포를 보이는 반면, 젠더 사이의 차이는 스펙트럼 전체에 걸쳐 분포한다.
양성 사이의 차이는 분명한 흑백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다. 그 대신 쌍봉 분포(유명한 종형 곡선)로 나타나는데, 양쪽의 평균에 해당하는 두 봉우리가 있고, 그 사이에 중첩된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남성은 여성보다 키가 크지만, 오로지 통계적 의미에서 그럴 뿐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키가 크지만, 오로지 통계적 의미에서 그럴 뿐이다. 평균적인 남성보다 키가 큰 여성도 있고, 평균적인 여성보다 키가 작은 남성도 있다. 적극성이나 다정함 면에서도 남녀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할 때처럼 행동 특성에서도 동일한 중첩이 나타난다.
젠더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젠더는 사회에서 문화적으로 권장하는 성 역할과 각 개인이 그것을 표현하고, 그것과 일치하는 정도와 관련이 있다. 젠더에 적절한 용어는 '남성male'과 '여성female'이 아니라 '남성스러움masculine'과 '여성스러움feminine'이다. 이 용어들은 쉽게 분류하기 힘든 사회적 태도와 경향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흔히 서로 섞여 양쪽 측면이 한 사람에게서 표출되기도 한다. 어떤 남성이 남성스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측면을 가질 수 있다. 젠더는 깔끔하게 두 범주로 분류되길 거부하며, 양 극단에서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이 위치하고 그 사이에 온갖 종류의 조합이 존재하는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다.
자기 사회화는 본성과 양육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대신에 양자를 결합한다. 자기 사회화는 내부에서 유래하지만, 외부 세계를 길잡이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아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발달해가게 한다.
우리에게 감정이 발달한 것은 타당한 진화적 이유가 있다. 감정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생명체의 행동을 안내하기 때문에, 모든 동물에게 발달했다. 모든 동물은 두려움과 분노, 혐오감, 매력, 애착이 필요하다. 감정은 사치가 아니다. 그 적절성은 젠더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감정은 우리가 자부하는 추론 능력보다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 더 잘 아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성적이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성을 숭상하는 반면 감정을 경시한다. 우리는 감정이 우리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신체("육신은 연약하므로")에 너무 가깝다고 생각한다.
감정에 휘둘리는 정도가 젠더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과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남성이 천성적으로 얼마나 감정적인지는 중요한 스포츠 경기 때 남성이 보이는 행동을 보면 된다. 절제력이 강하다는 네덜란드인조차 오렌지 군단이 잔디밭을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완전히 이성을 잃는다! 젠더 차이는 주로 특정 감정의 유발 요인과 강도, 그리고 그것에 관한 문화적 '표현 규칙display rule'(웃거나 울거나 미소를 짓기에 적절할 때가 언제인지 알려주는)과 관련이 있다. 표현 규칙은 여성에서 슬픔이나 공감처럼 더 부드러운 감정을, 그리고 남성에게는 분노처럼 권력을 강화하는 감정을 잘 표현하게 한다.
과학의 직무는 행동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알파 수컷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영장류학자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다. 알파 수컷은 그저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수컷을 가리킬 뿐이며, 그 수컷이 좋게 행동하거나 나쁘게 행동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집단에는 알파 암컷도 있다. 각각의 성에는 알파가 오직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알파는 약자를 괴롭히는 우두머리가 아니라, 집단을 조화롭게 잘 이끌어가는 지도자이다.
알파는 왜 나머지 구성원보다 친사회적 성향이 더 강할까?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과 비슷하다. 이들은 남들에게 친절을 베풂으로써 정상의 자리에 올랐을까? 아니면 편안한 지위 때문에 기꺼이 자원을 남들에게 나눠주려고 할까? 이유야 무엇이건, 이 발견은 사회적 지배성을 단순히 약자를 괴롭히는 우두머리라고 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훨씬 복잡하고 관대함을 포함한다.
가장 크고 힘센 수컷이 반드시 우두머리 자리에 앉는 것은 아니다. 네트워크와 성격, 나이, 전략 기술, 가족의 연줄 등이 모두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 도움을 준다. 젠더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은 근육이 훨씬 발달한 수컷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암컷 보노보노가 자신의 공동체에서 나머지 모든 보노보노보다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침팬지 사이에서는 심지어 가장 작은 수컷이 알파 수컷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침팬지들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진다. 그 수컷은 자신의 동맹을 행복하게 해야 하고, 그들이 경쟁자와 공모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암컷에게 보호를 제공하고 먹이를 관대하게 나누어주어 암컷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야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알파 수컷 침팬지는 몸집이 작을수록 다른 침팬지들에게 털고르기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알파 유형을 안다.
첫 번째 유형은 "둘 다가 될 수 없다면, 사랑받는 존재보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낫다."라는 마키아벨리의 신조에 따라 살아가는 무뢰한이다. 이 수컷들은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충성심과 복종심을 불어넣는 데 집착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수컷을 우리 종뿐만 아니라 침팬지 사이에서도 너무나도 잘 안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매우 마음이 불편하다.
또 다른 유형의 알파는 진정한 지도자이다. 그는 지배적이며 경쟁자의 도전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지키지만, 남을 학대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지도 않다. 그는 약자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며, 고통을 받거나 곤경에 빠진 동료를 도와주고 안심시킨다. 우리는 싸움에서 진 유인원을 누가 안아주는지 모든 사례를 분석한 결과, 일반적으로 암컷이 수컷보다 남을 더 자주 위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예외는 알파 수컷이다. 알파 수컷은 마치 최고의 치유사처럼 행동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를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위로한다. 싸움이 벌어지면, 모두 알파 수컷이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바라본다. 그는 분쟁의 최종 중재자이다.
성별에 관계없이 많은 알파는 서열 이외의 다른 것에도 많이 신경 쓴다. 그들은 약자를 보호하고, 분쟁을 해결하고, 고통받는 당사자를 위로하고, 화해를 돕고, 안정을 촉진한다. 그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보호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봉사한다. 대다수 알파는 사랑과 공포 사이에서 마키아벨리의 선택을 하는 대신에 두 가지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화해/평화 유지 가설peacemaking/peacekeeping hypothesis, 수컷은 갈등이 분출되었을 때 화해를 하는 데 능숙하고, 암컷은 갈등을 억제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데 능숙하다. 수컷은 싸움과 재결합을 쉽게 넘나들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결 상황을 만든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암컷에게는 갈등이 감정적으로 매우 고통스럽고, 그것을 잊어버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암컷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선제적 태도를 취한다.
"자연은 다양성을 사랑한다. 불행히도 사회는 그것을 싫어한다." - 미국 생식생물학자 밀턴 다이아몬드
신체와 감각이 다목적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면, 행동 역시 그럴 것이다. 그 원래 기능은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쓰일지 늘 알려주는 것은 아닌데, 행동은 '동기의 자율성'을 즐기기 때문이다. 행동 이면의 동기에 그 행동이 진화한 목적이 포함돼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 목적은 진화의 베일 뒤에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양육 경향은 생물학적 자녀를 키우기 위해 진화했지만, 귀여운 강아지에게도 향할 수 있다. 생식은 양육의 진화적 목적이지만 동기는 아니다.
마음은 신성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다. 이 이원론은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며, 주요 관심은 사람의 마음보다는 남성의 마음에 있다. 자신의 지성이 생물학보다 높은 수준에 있다고 굳게 믿으려 한 사람들은 항상 남성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신체가 호르몬 주기를 겪지 않는다면 주장하기가 더 쉽다. 여성의 몸은 피를 흘리는데, 남성은 전통적으로 이를 혐오스럽고 '불순한' 것으로 묘사해왔다. 대대로 남성은 육체(약함)와 감정(비합리적), 여성(유치함), 동물(멍청함)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남성이 여성과 동물만큼 자신의 몸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비는 완전한 착각이다. 그것은 순전히 남성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마음과 뇌와 몸은 하나다. 비물질적인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르투갈 출신의 미국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라고 썼다. "마음은 몸에 의해 매우 면밀하게 형성되고 몸을 위해 일하도록 정해져 있어, 몸속에서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이 생겨날 수 있다."
인생이 재미있고 흥분이 넘치고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우려면 언어와 민족, 나이, 젠더 등이 제각각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함께 일하고 살아가야 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여성과 남성, 아이들의 이러한 혼합은 적어도 삶을 흥미롭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또한 우리가 여기서 큰 즐거움을 얻는다고 믿는다. 내가 항상 생물학적 성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젠더 중립적 사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놀라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주장의 기본 개념은 다른 성이 없거나 적어도 그것에 관심을 덜 기울이면 더 나은 세상이 되리란 것이다. 이 목표는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성이나 젠더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니다. 문제는 성이나 젠더의 존재가 아니라, 그와 관련된 편견과 불평등, 그리고 우리 사이에서 일부 사람들을 배제하는 전통적 이분법의 한계에 있다. 사회는 모든 젠더 표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성적 지향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모든 젠더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매우 심각하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오래된 성 구분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더 깊은 문제인 사회적 편견과 불공정을 해결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태도를 바꾸길 원하는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은 심신 이원론에서 벗어나는 것일 수 있다. 이 교리는 2000년 동안 수많은 남성 사상가들이 자신의 정신이 여성을 포함한 나머지 피조물보다 높은 수준에 있음을 강조하려던 것으로, 젠더 편견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적다. 게다가 심신 이원론은 현대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알려주는 모든 지식과 어긋난다. 뇌를 포함한 몸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핵심이다. 우리의 몸에서 도망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이 반영돼 있다. 생물학은 방정식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의 행동 중에서 엄밀하게 사전 프로그래밍된 것은 거의 없다.
나는 생물학자이지만 인간 문화의 힘을 굳게 믿는다. 나는 젠더 관계가 나라마다 얼마나 다른지 직접 경험했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젠더 관계는 교육과 사회적 압력, 관습, 본보기에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젠더의 몇몇 측면조차도, 한 젠더에게서 다른 젠더와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박탈할 핑계가 되지 않는다. 나는 젠더 사이에 정신적 우월성이나 선천적 지배성이 있다는 개념을 참을 수가 없으며, 그런 개념을 버리길 희망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상호 사랑과 존중, 사람은 평등하기 위해 똑같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의 이해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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