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와 수학은 여러 학문의 기반이 되고 우리 삶과 얼마나 밀접한지 배우지 못하고 일찍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수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는지 천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본문발췌]
우리는 기수에서 서수로 옮겨가는 방법을 매우 잘 익혀놓았기 때문에 두 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 이제는 한 집단의 크기, 즉 기수를 결정할 때 짝짓기를 할 모델 집단을 찾는 일 없이 곧바로 셈을 한다. 수에 이러한 두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수학의 발전이 가능했다. 실생활에서는 기수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기수로는 산술을 구성해낼 수 없다. 산술의 연산들은 항상 한 수에에서 그 다음 수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암묵적 가정에 기초해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사수 개념의 핵심이다. 따라서 짝짓기 자체로는 셈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물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대응과 나열은 모든 수학 분야에, 아니 엄밀한 사고를 요구하는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는 원리이고, 이 두 원리가 씨줄과 날줄처럼 짜여 수 체계라는 직물을 만들어낸다.
문명사의 견지에서 보자면 진법을 바꾸는 일은 아무리 실용적이라고 해도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사람들이 열을 단위로 셈을 하는 한, 자신의 열 손가락을 보면 인간 정신 활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사람이 몸에서 비롯되었음을 상기할 것이다. 따라서 십진법을 다음 명제의 살아 있는 기념비가 되게 하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사람의 삶은, 몽테스키외의 명언을 빌리자면 헛된 희망과 근거 없는 두려움의 연속일 따름이다. 오늘날까지도 모호하고 막연한 종교적 신비주의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러한 희망과 두려움은 예전에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별과 바위, 짐승과 풀, 낱말과 수는 인간 운명을 내다보게 하는 전조이자 동시에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였다. 과학의 뿌리는 마술적 힘을 지닌 이러한 대상물들에 대한 관심과 숙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점성술이 천문학보다 앞서 나왔고 화학은 연금술에서 발전되어 나왔으며 정수론이 있기 전에는 일종의 수비학이 있었다. 수비학은 오늘날까지도 설명할 수 없는 예언이나 미신의 형태로 남아 있다.
가장 허무맹랑하면서도 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수비학이 이른바 게마트리아Gematria이다. 히브리 글자나 그리스 글자에는 음가뿐만 아니라 수치도 부여되었다. 낱말의 글자들이 나타내는 수를 모두 더한 값이 그 낱말의 수이다. 게마트리아에서는 두 낱말의 수가 같을 때 둘은 서로 동등하다고 말한다. 게마트리아는 예로부터 성서 구절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서 저자들도 게마트리아를 사용한 증거들이 있다. 예컨대 아브람이 조카를 구하러 갈 때 엘리에셀이 318명의 노예를 이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브리 말 엘리에셀의 수가 318인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게마트리아의 예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영웅들의 이름 파트로클로스, 헥토르, 아킬레우스의 수는 각각 87, 1225, 1276이다. 사람들은 아킬레우스가 셋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영웅인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구상이 항상 추상보다 앞서 나온다. 바로 그 때문에 정수론이 산술보다 먼저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성은 과학의 발견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개별적 수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로 인해 집단 이론, 즉 산술의 발전이 저해되었다. 이는 별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이 과학적 천문학의 출현을 늦추었던 사정과 똑같다.
초기의 무한 개념에서 무한은 셈할 수는 있지만 미처 셈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마지막 수는 인내와 참을성을 의미했으며 인간에게는 그런 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수에 대한 탐구는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한 바벨탑 이야기와 동일한 전개 순서를 밟았다. 마지막 수는 천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속한다. 질투로 가득한 분로 하나님은 야심적으로 탑을 쌓아올리는 자들의 언어를 뒤섞어 놓는다. 그런 언어의 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무한과 관련하여 제논의 논증에서부터 칸트와 칸토어의 모순에 이르기까지 온갖 역설이 수학에서 생겨났다.
반복적 추론 원리를 최초로 분명하게 체계화한 사람은 페르마와 동시대인이자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블레즈 파스칼이었다. 파스칼은 1654년에 출간된 <산술 삼각형>이란 소책자에 그 원리를 명기해놓았다. 후일 이 책자의 핵심 내용이 노름 문제를 두고 파스칼과 페르마 사이에 오고간 서신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확률론을 생겨나게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느 바로 그 서신 말이다. 순수 수학의 기초가 되는 반복적 추론 원리와 모든 귀납 과학의 기초가 되는 확률론이 두 노름꾼 사이의 배당을 다루는 문제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반복적 추론 규칙은 모순율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 경험으로부터 도출되지도 않는다. 경험은 열 개 혹은 백 개에 대해서만 이 규칙이 참임을 알려준다. 무한정한 수열에 대해서는 확증을 해주지 못하고 다만 수열 가운데 일부, 그것도 다소 개수가 클 수는 있지만 항상 제한된 개수에 대해서만 확증을 해준다. 유한한 대상에 대한 문제라면 모순율로도 충분하다.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많은 수의 연역을 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의 식에 무한히 많은 수의 연역을 포함시키는 문제가 될 때 논리학의 원리는 쓸모없게 되며 이때는 경험도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반보적 추론 규칙은 그토록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것은 무한정 반복되는 동일한 행위를 인간 정신이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표명이기 때문이다. 반복적 추론과 흔히 사용되는 귀납법 사이에는 두드러진 유사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본질적 차이가 있다. 자연과학에서 사용되는 귀납법은 항상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해 있고 그 질서는 인간 정신 외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학적 귀납법, 즉 반복적 추론은 인간 정신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에 필연적 명제로 모습을 드러낸다. 수학적 귀납법으로만 우리는 비상할 수 있다. 이 규칙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 수학적 귀납법은 물리학적 귀납법과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수학적 귀납법을 사용하지 않고 연역법만으로 과학을 구성해내기란 불가능하다. 끝으로 수학적 귀납법은 동일한 연산이 무한정 반복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체스는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 체스 경기에서 연이어지는 수들은 서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대수학은 기호들의 연산을 다룬다. 대수학은 모든 수학 분야에 스며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형식논리학과 심지어 형이상학에까지 뻗어나가 있다. 더욱이 그런 식으로 정의하면 대수학은 일반 명제를 다루는 인간의 능력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즉, '일부'와 '모두'를 구별하는 인간의 능력만큼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훨씬 더 제한된 의미로서의 대수학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 분야는 방정식 이론이라는 매우 적절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처음에 대수학이란 말은 그런 좁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기호는 단순히 형식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기호야말로 대수학의 본질이다. 기호가 없다면 대상물은 인간의 지각 내용이되며 따라서 다의적이고 모호한 것이 된다. 하지만 대상물을 기호로 바꾸면 대상물은 완전한 추상적 존재가 되고 주어진 연산에 종속되는 피연산 대상이 된다.
형식주의자들은 후자, 즉 직관적 개념이 수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단어를 골라낸다고 해도 이들 단어 배후에 숨어 있는 의미가 우리들의 추론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의 문제점은 그 안에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인데, 수학의 목적은 순수한 형태의 사고를 구성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인간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답은 바로 기호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공간, 시간, 연속 등의 모호한 관념은 직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면서 순수 이성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모호한 관념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기호 언어를 사용할 때에만 수학을 탄탄한 논리적 기초 위에 세우는 일을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주장이 형식주의 학파의 기본 강령이다. 형식주의 학파는 이탈리아 수학자 페아노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를 대표하는 근래의 인물로 버트런드 러셀과 A. N. 화이트헤가 있다. 두 사람이 쓴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이들은 명확하고 기초적인 가정에서 추발해 엄격한 논리학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현대 수학의 기초를 재구성하고자 노력했다. 엄격하게 기호를 사용하여 인간 언어의 모호함이 들어설 여지를 없애려고 했다.
뉴턴의 이론은 연속인 양을 다루지만 공간과 시간을 무한히 자를 수 있다고 가정한다. 또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치 순간순간의 도약들로 연이어져 있는 것처럼 다루었다. 이 때문에 유율 이론은 2000년 전에 제논이 제기한 반론에 취약한 상태였다. 수학은 인간 감각의 가공되지 않은 실제와 합치되게 해야 한다는 '실제론자'와 실재는 인간 정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관념론자', 이 둘 사이의 오래된 반목이 다시 재연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실용 부문에서 무한 과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산술을 기하학, 역학, 물리학, 그리고 통계학에 응용할 때에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무한 과정이 수반된다. 간접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 분야에서 무리수와 초월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 분야에서 사용되는 기본 개념들이 무한 과정 없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한 과정을 없애면 순수 수학이나 응용 수학이나 모두 피타고라스 이전 시대의 상태로 격하되고 만다.
사람들은 수학은 비계를 사용하지 않고 한 층 한 층 차곡차곡 쌓아올린 구조물이라 여긴다. 순수 이성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 구조에는 어떤 결함도 없으며, 또한 벽돌을 쌓을 때에도 실책이나 오류 없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진행했기 때문에 어떤 충격에도 견뎌낸다고 생각한다. 이 모두 인간의 직관이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반인의 눈에는 수학이라는 구조가 쉽사리 오류를 범하는 인간 정신의 소산이 아니라 절대무류의 신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비친다. 그러나 수학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수학은 의외의 사건과 우연한 발견에 좌우되었고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 발전해왔으며 또 그러한 발전 과정에서 인간의 직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멀리 전초기지를 확보하고 난 연후에 본토와 기지 사이에 놓여 있는 영토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또 전초 기지를 세워놓고도 그 중간에 새로운 영토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직관의 몫이었고 그 형식을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권리는 논리가 쥐고 있었다. 따라서 논리는 그 형식의 출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사의 판결은 항상 더디게 이루어졌다. 논리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세상에 출현한 새로운 형식들은 무성히 자라났고 또 수많은 자손을 남기며 번성했다.
과학이 인류의 삶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리는 물리학과 화학을 떠올린다. 산업 및 운송수단을 혁신적으로 바꾼 기계 발명품은 그런 변화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전기를 사용하면서 단조로운 가사 일을 크게 줄일 수 있었고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도 일찍이 꿈꿔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빨라졌다. 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쓸모없던 물질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온갖 편익을 가져다주는 유용한 재료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과학적 성과에 사람들은 경외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수학은 광범위한 영역에 두루 퍼져 있기 때문에 삶에 가져다주는 수학의 혜택은 그처럼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문명의 이기를 가능하게 한 이론뿐만 아니라 갖가지 발명품의 개발에서도 수학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전문가들만이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이다. 물을 구성하는 원소에 대해 안다든가 혹은 단파와 장파의 차이를 이해한다든가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하학이나 미적분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행복한 삶에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학의 여러 눈부신 성과 가운데는 직접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에서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만큼 사람들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런 종류로 예컨대 자리 표기법이 있다. 자리 표기법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직접적 유용성을 지닌 또 다른 예로 대수학의 기호 체계, 그 가운데서 특히 비에타의 '아름다운 산술'을 들 수 있다. 비에타 시대 이전까지는 일반 관계에 관한 축약형 기호를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나 새로운 기호 체계 덕분에 누구나 쉽게 기호를 다루게 되었다. 또 데카르트가 만들어낸 그래프도 빼놓을 수 없는 예이다. 데카르트의 그래프를 이용하면 어떤 현상을 규율하는 규칙이나 연관된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 혹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등을 일목요연하게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대중들이 널리 사용한 수학적 고안물이 순수 수학 발전에도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자리 표기법이 아니었다면 영을 사용하지 않았을 터이고 그렇다면 음수의 개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영이 있었기 때문에 방정식을 표준 형태, 즉 한 변이 영인 형태로 변형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인수정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문자를 기호로 사용하면서 수학은 특수한 대상의 연구에서 일반적 대상의 연구로 옮겨갔고 불가능한 양에도 기호를 부여함으로써 일반적 수 개념을 낳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데크라트의 그래프는 해석기하학이라는 중요한 분야를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뉴턴, 라이프니츠, 오일러, 베르누이 일가 등에게 문제를 공략할 수 있는 무기를 쥐여 주었는데, 일찍이 아르키메데스와 페르마에게는 그런 무기가 없었기에 자신들의 심오하고 중요한 생각을 분명하게 전개해낼 수 없었다.
복소수의 기하학적 표현과 더불어 모든 대수방정식과 다수의 초월방정식이 복소수체에서 해를 갖는다는 증명이 나오면서 수학 분야에는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해석학 분야에서는 코시, 바이어슈트라스, 그리고 리만을 비롯한 사람들이 무한 과정을 복소수체로 확장했다. 이로써 복소변수 함수론이 확립되었고 복소변수 함수론은 다시 해석학, 기하학, 수리물리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기하학 분야에서는 퐁슬레, 폰 슈타우트 등이 복소수를 출발점으로 하여 일반 사영기하학을 확립했다. 로바체프스키, 보야이, 리, 리만, 케일리, 클라인 등은 다양한 종류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들어냈다. 무한소 기하학에 복소수가 응용되었고 결국 현대 상대성이론의 기초가 되는 미분기하학으로 발전해갔다. 수론에서 쿠머는 복소수 인자 방법을 만들어냈고 이로써 페르마 문제 및 관련 문제 연구를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힘이어 수를 더욱 일반화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복소수는 애초에 허구적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로 출발했으나 수학 개념을 구성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도구이자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수단, 그리고 여러 수학 분야를 긴말하게 이어주는 가교로 탈바꿈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허구란 적절히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하나의 형상이다.
자유가 바로 수학의 본질이다. - 게오르크 칸토어
오늘날 실재성을 갖고 있는 대상물이 과거에는 환영에 불과했었다. 그 환영이 살아남아 실재성을 갖게 된 이유는 우리들의 경험을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의 삶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니체의 다음 말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허위라는 이유를 들어 어떤 판단을 배격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개념이 과연 인류의 삶을 얼마만큼 보존하고 증진시키느냐이다. 잘못된 개념들 - 선험적 종합판단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다 - 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다. 논리적 허구 없이는, 절대적이며 불변한다고 믿는 허구의 세계 안에서 실재성을 판단하고 측정하지 않는다면, 수라는 도구로 우주라는 허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인간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잘못된 판단을 배격하는 것은 삶을 배격하는 것이고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수학적 개념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것은 직접적 감각 증거도 아니고 논리 법칙도 아니다. 문제는 그 개념이 인류의 지적 생활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느냐로 모아진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견해를 내놓아도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환상에 대한 타당성의 기준은 소급 기준이다. 인류의 삶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개념은 번창하고 성장하며 그 결과로 실재성을 얻는다. 하지만 인류의 삶에 해가 되거나 쓸모가 없는 것은 형이상학이나 신학 교과서에나 실리는 길을 택한다. 따라서 그런 개념들 역시 헛된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실험 증거와 논리적 필연만이 실재라는 이름의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고 잇는 것은 아니다. 관찰과 실험을 인도하는 수학적 필연도 있다. 논리적 필연은 수학적 필연의 일면일 따름이다. 또 다른 일면은 불명료하고 모호한 것으로 어떤 규정도 불가능한데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무한의 개념은 실험적 필연도 아니고 논리적 필연도 아니다.
무한의 개념은 바로 수학적 필연이다. 한 번 행한 것은 항상 다시금 반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허구일지 모른다. 하지만 편리한 허구이며 따라서 필요한 허구이다. 이 개념 덕분에 특수한 경우를 일일 점검하는 수고가 덜어진다. 또 그 덕분에 우리가 주장하는 명제에 일반성이란 옷을 걸칠 수 있는데 그러한 일반성이 없이는 어떤 과학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곅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연속적으로 변해간다는 개념과, 띄엄띄엄한 대상을 셈하면서 생겨난 수 개념,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무한 개념은 메워준다. 그러나 무한이란 진리 탐구 과정에서 택할 수 있는 여러 우회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단순성, 동일성, 균질성, 불변성, 인과성 등과 같이 수학적 직관이 내놓은 또다른 우회로들이 있다. 절대 진리라는 신기루를 좇게 만들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의 지적 유산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학적 직관이다. 하지만 신기루를 지나치게 좇아 지적 유산을 위태롭게 할 때에 그런 무모함을 제지하는 것도 역시 수학적 직관이다. 이때 수학적 직관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다. "추구하는 대상과 추구하는 자가 서로 닮아 있으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이러한 창조적 직관의 원천은 무엇인가? 인간의 체험을 조직화하고 인도하며 혼돈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이러한 필연은 과연 무엇인가? 돌처럼 딱딱하고 활기 없고 무기력한 논리에 생명을 불어 넣어 일으켜 세우는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파도는 영원을 속삭인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고 구름은 정처 없이 흘러간다. 별들은 차가운 빛을 발하며 무심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우둔한 자는 그의 답을 기다린다.
그러면 현명한 자는 어떨까? 현명한 사람은 내일에는 실재가 될지 모를 허구를 오늘 찾는다. 그리고 개념의 원칙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저 아득한 봉우리를 바라보며 위대한 스승의 말을 읊조린다. "어디에서 발원하는 지는 몰라도 냇물은 계속 흘러간다."
수학은 대상물을 다루지 않고 대상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따라서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대상물을 다른 대상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수학자들은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형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 푸앙카레
우리의 의식은 현재의 순간을 응시한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의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러한 과거의 순간들은 점점 빛이 바래 마침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서로 중첩되어 아련해져가는 이런 순간들을 한 개체에 귀속시키는데, 우리는 그 개체를 '나'라고 지칭한다. 몇 년이 지나면 우리 몸의 세포는 모두 바뀐다. 우리의 생각, 판단력, 감정, 열망 역시 비슷한 변화를 겪는다. 그렇다면 '나'라고 지치오디며 항구성을 부여받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는 기억이라는 줄에 순간이라는 구슬을 엮어 만든 것일까? 직관적 시간은 외삽된 시간이다. 어렴풋한 기억의 편린을 넘어 과거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동시에 현재를 지나 무한한 미래로 나아간다. 그리고 미래 역시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둘로 분할된다. 그 하나는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이다. 둘 사이에는 공통부분이 없으며 이 둘을 모두 합치면 영원이 된다. 우리 마음속에서 현재의 순간이란 과거와 미래를 가르는 분할점일 따름이다. 그리고 과거의 순간들은 각기 한때는 현재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미래의 순간들도 언젠가는 현재의 순간이 되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의 순간들 역시 각각 분할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직관적 시간은 삽입된 신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가까운 두 순간을 떠올려도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우리 의식은 채워 넣는다. 바로 과거의 시간이 연속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의식에 의해 삽입된 시간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도 동일한 연속성을 부여한다. 우리의 의식은 시간을 연속적 흐름으로 파악한다. 이 흐름에 대해서 우리는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부분들만을 체험할 뿐이다. 그러나 직관이 그 빈틈을 채워 넣는다. 직관은 시간을 연속체로 탈바꿈시켜놓는데 이 연속체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연속체의 원형이 된다.
우리는 시간이 지닌 흐름의 성격을 물리 현상에도 부여한다. 빛이나 소리가 되었든 아니면 열이나 전기가 되었든 물리 현상을 분석할 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그 현상을 거리, 질량, 에너지 등을 이용해 나타냄으로써 시간의 함수로 환원되게 한다. 불연속과 연속 사이의 갈등은 단지 학파들 사이의 대립에서 생겨난 산물이 아니다. 실은 그 갈등은 인간이 사고를 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이다. 시간을 연속체로 파악하지만 불연속적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는 순간부터 불연속과 연속 사이의 갈등은 시작된다. 우리의 수 개념은 셈에서부터 연유된다. 불연속적 대상물들을 셈하면서 수 개념이 생겨났다. 반면에 시간을 연속체로 파악하는 우리들의 직관은 모든 현상을 연속적 흐름으로 바라본다.
"꼭꼭 숨겨져 있어 모든 길을 다 가본 후에야 최선의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그런 진리가 있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잘못된 길에 들어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오류를 경험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들이다." -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
가해자는 기억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구성하며 위세를 떨고, 피해자는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는 기억에 아픔이 지속된다.
[본문발췌]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아무것도 읽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허기가 느껴졌다. 어머니가 부쳐준 올배쌀을 공기에 담아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어이, 돌아오소. 어어이, 내가 이름을 부르니 지금 돌아오소, 더 늦으면 안되오. 지금 돌아오소.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봅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합니다.' 심장을 누르듯 가슴 왼편에 오른손을 얹고 나는 걷는다. 캄캄한 도로 가운데에서 얼굴들이 어슴푸레 빛난다. 살해된 사람들의 얼굴, 내 가슴에 대검을 박아넣은 살인자의 공허한 얼굴.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