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에 원리와 이치가 있다. 어떤것은 불변의 것도 있겠지만, 물처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것들도 있다. 나의 운명도 그렇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말은 달라진다.
[본문발췌]
운명이란 인생의 우주적 변곡선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운명을 사유한다는 건 인생과 자연 사이의 상응과 교감을 전제한다. 운명을 안단는 건 '필연지리'(必然之理)를 파악함과 동시에 내가 개임할 수 있는 '당연지리'(當然之理)의 현장을 확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해진 것이 있기 때문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타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아는 만큼 걸을 수 있고, 걷는 만큼 즐길 수 있다. 고로, 앎이 곧 길이자 명이다!
물론 그 운명의 능동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사유의 적극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존의 통념과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전제를 바꾸는 데서부터 공부는 시작한다."(정화스님)
1990년대 중반이후, 더 확실하게는 IMF 이후 이분법의 둑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담론과 가치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 담롬들이 백가쟁명을 이룬 것이다. 그 담론들의 핵심을을 아주 소박하게 간추리면 다양성과 자율성, 이 두가지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식의 차원을 넘어 내용적 측면으로 들어가면 빈곤하기 짝이 없다. 보다시피, 지금 우리의 삶은 다양하지도, 자율적이지 않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의 무한증식 속에서 삶의 가치는 더더욱 균질화되었고, 디지털 문명의 범람 속에서 주체의 자율성이라는 범주는 더한층 협소해진 실정이다.
타인의 행동을 시비선악을 떠나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아주 좋은 공부가 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나에게로 온다. 나의 행동, 나의 인생을 보는 시선도 전혀 달라지게 된다.
음양오행론뿐 아니라 동양의 사유는 이렇듯 철저히 관계의 사유다. 정화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불교에서 '안다'는 건 이웃과 더불어 교류한다는 뜻이다. 세포 하나의 의미와 역할은 이웃한 세포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웃들과 분리되어 있을 땐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동일성을 증식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암세포다. 암세포란 쉽게 말하면 이웃과 단절된 세포의 표현형식인 셈이다.
목(간담)은 분노, 화(심/소장)은 기쁨, 토(비위)는 생각, 금(폐/대장)은 슬픔, 수(신장/방광)은 두려움의 정서를 담당한다.
해당 장기에 문제가 있으면 감정의 균형이 깨어지게 마련이다.
감정의 흐름이 깨져도 장부에 병이 생기고, 거꾸로 장부에 문제가 있어도 감정의 자연스러운 리듬이 깨지게 된다.
스티븐 호킹이 말했듯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주의 끝을 향해 가다 보면 결국 자신이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것뿐이다. 역사적 실천의 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보다 더 혁명적인 실천은 없다!
운명의 지도 역시 카드 자체의 '자성'이 아니라, 그것들의 결합, 배열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르게 작용한다. 문제는 이런 원리가 사회적 조건과 통념에 의해 가려진다는 데 있다. 부귀를 향한 집착, 정상성이라는 척도, 다다익선의 논리 등등에 의해. 이런 통념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팔자를 원망하거나 저주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이 '팔자타령'의 고리를 끊고 자기 운명의 본래면목을 볼 것인가? - 이것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자 소명이다. 고로, 모든 팔자는 평등하다.
"나의 정체성은 수많은 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음양오행은 내 존재의 리듬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시공간적 축이 바로 운명이다. 그런데 시공간은 어떤 사회체와 마주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시대의 표상구조와 욕망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주명리는 철저히 관계와 배치의 철학이다.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되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의 도다!" 등의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아주 역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 가족, 혈연, 국가 등의 표상들이 형성하는 장벽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정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선형성을 탈피해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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