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두 식구 가지고 있는 옷과 책을 정리해 보니, 이삿짐 수준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옷을 정리하는 데 다시 한짐이 나온 것을 보고 집을 둘러보니, 집에 소유한 것들을 세어 볼 엄두가 안났다.
문요한님의 <여행의 인간> 중 소유한 물품과 자유의 관계를 적은 글이 있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는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그렇게 보면, 법정 스님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 맞다. 소유물에 구속됨 삶!
소유(所有) 1.명사 가지고 있음. 또는 그 물건.
2.명사 법률 물건을 전면적ㆍ일반적으로 지배하는 일.
[유의어] 보유 소지 소유물
(네이버 영어사전) ownership, (formal) possession, own, have, (formal) possess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소유'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수행자에게 가난이란 맑음 그 자체다. 모자라고 텅 빈 그 속에서 넉넉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수행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욕지족,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적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집 안으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난 창문들을 모두 깨야 한다
그들의 집은 문이 없다
그들의 집은 불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집을 지켜야 한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물질의 세계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하는 순간, 우리 욕망의 그릇은 그만큼 더욱 커져 소유는 늘 불완전할 따름이다. 완전한 소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 세계에서는 다르다. 의식이 경험으로 꽉 채워진 순간, 우리는 그 무엇도 더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소유감을 느낄 수 있다. 완전한 소유의 좋은 점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소유한 것을 나눈다고 해서 나의 소유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함께 나눌 때 더욱 완전한 소유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돈을 주고 살 수 없고 누군가에게 빌려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살아가느냐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시간부자였고 마음부자였다. 여행하는 동안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은 다 내 것이 됐다.
과잉 소유와 과잉 저장은 현대인들의 불안과 공허감 때문이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접한 칼 마르크스의 말에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저장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바로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표적 행위가 여행이라고 본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하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인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불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나고, 잃어버리기 위해 소유하며, 떠나보내기 위해 만난다." 어쩌면 여행은 그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여행이까 말이다.
당신이 항상 가지고 다닐 수 있을 만큼만 소유해라. 언어를 배우고, 국가를 이해하고, 사람들을 받아들여라. 당신의 기억력이 곧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될 수 있도록...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무소유는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 반대로,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데도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 참고 사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작게 살며 크게 생각, 더 적게 소유하고 살아가기는 삶의 철학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의 개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소유보다는 공유 속에 더 큰 행복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생계를 꾸리지만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가짐이 아닌 나눔이다.' - 노먼 매키완(Norman MacEwan)
당신이 소유한 물건이 당신을 소유한다. '우리는 학생들이 바글대는 대학 기숙사에서 아파트로, 다시 단독주택으로 옮겨간다. 아주 돈이 많으면 아예 넓은 땅을 사서 저택을 짓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출세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벽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 에릭 와이너Eric Weiner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할 때만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탈물질주의적 생활방식의 매력도 두드러지게 되죠. 우리는 지금 물건에 부여된 가치와 그 물건을 사용하는 데 드는 비용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고 있어요. 이 균형은 자연히 전보다 덜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을 창출할 테고 그러면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소유중심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는 일도 더 수월해질 거에요.'
인생은 소유물을 늘리는 데만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소중하다.
데니스 웨이틀리, "행복은 이리저리 옮길 수도, 소유할 수도, 돈으로 살 수도 없으며 닳아 해지거나 써서 없어지지도 않는다. 행복은 삶의 매 순간을 사랑, 자비,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체험이다."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피천득, <인연>
미美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 「비원」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소유는 우리의 경제를 공전 궤도 안에 붙잡아 두는 중력장이다. 우리는 그 중력장에 붙들려 금융 과잉과 생태적 과다를 불러오는 행동을 일삼는다.
추출적 소유는 금전적 목적을 갖는다.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목표다. 생성적 소유는 삶을 위한 목적을 갖는다. 삶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이기주, <글의 품격>
욕심의 속성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우린 욕심의 내부로 파고들 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욕심의 번식력은 참으로 왕성해서 소유욕이나 질투심과 함께 버무려지면 마음속에서 다른 감정보다 훨씬 빠르게 퍼져나간다. 더욱이 욕심의 안쪽에는 순찰차처럼 손잡이가 없다. 웬만해선 빠져나올 수가 없다.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다. 쓰라린 사연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 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여백은 존재가 아닌 부재不在의 결과다. 만나고 헤어져야, 다가왔다가 멀어져야, 소유하던 것을 잃어버려야 여백에 닿을 수 있다. 때론 눈물이라는 열쇠로만 우린 '여백이 문'을 열 수 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데키나 오사무 편저, <괴테 청춘에 답하다>
소유의 의미를 깨닫는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소유의 편안함과 고마움을 모른다. 그래서 민주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재산이 쌓이면 지키고 싶어지고, 자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진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는 아무리 다양한 사상에 빠지더라도 나이를 먹으면 예외 없이 귀족주의자가 된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스코트는 생활의 질을 높이기보다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다.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단지 생활하고 소유하는 것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짐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다."
'소유에 의존하는 삶은 일을 하거나 존재를 바탕으로 한 삶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 윌리엄 제임스
어떤 경우에도 되새겨 생각해볼 일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의 소유물은 그 일에 방해가 됩니다.
현대 생활의 신조인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얻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덜 갖되, 더 충실하기'
정철, <불법사전>
'쓰레기통' : 무소유, 차면 비운다.
유발 하라리 외, <초예측>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앞에 서면 뭐가 되었든 그 사람보다 앞서고 싶어하지요. 그런 식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사이에도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늘 군림하며 내가 처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게 됩니다. - 다니엘 코엔, <기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가>
김용규, <생각의 시대>
우리는 이제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지식은 컴퓨터에 내장된 검색엔진을 이용해 어느 때보다 손쉽게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에 도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마치 너무 밝은 빛이 우리의 눈을 실명케 하듯이, 폭증하는 정보와 지식이 우리의 전망과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접속의 대상이 되었고, 교육과 전수의 내용이 아니라 검색과 전송의 내용이 되었다.
E. F. 슈마허 외, <자발적 가난>
욕망은 그것의 충족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그것은 점점 더 자라난다. 따라서 아무도 욕망의 끝을 볼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왕이 된다면 또 다른 나라를 욕심낼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과도 같다. 욕망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욕망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 스리 바바 하리 다스
소유하지도, 소유되지도 않은 사람 - 알칼라바디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사람들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당신은 그들에 대한 모든 지배력을 잃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 한 상대방은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 그러면 상대방의 관심과 욕망의 좌절에서 파생되는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처녀왕의 역할을 수행하라. 즉 상대방에게 계속 희망을 품게 하면서 결코 만족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우리는 그저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아니다. 그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변화하길 바라는 것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행복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감상의 개념으로 본다면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친구와의 우정, 내 아이의 웃음소리, 음악이 선물하는 평온함,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팀 우승이 다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행복 역시 우리가 말하는 소확행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삶을 감상할 줄 아는 태도를 갖추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집이나 차, 옷 같은 것도 아주 잠깐 빌려 쓰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그저 사랑하고 감사해하며 잠시지만 누리세요.
프랑스에선 중산층의 기준으로 소유한 재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하나 할 수 있는지, 악기를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는지, 운동이나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는지, 자신만의 요리를 해서 지인들을 초대할 수 있는지 등을 본다고 합니다. 돈만 많다고 저절로 중산층이 되는 것이 아니라네요.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점점 양심과 도덕적 가치와 질서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우리 젊은이들과 아들딸들이 그런 사회에 살기를 원하는지 묻고 싶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점은 돈과 경제는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관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후진사회에서는 경제 문제 해결이 무엇보다도 선결 조건이다. 그 빈곤 때문에 인간다운 삶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주의 문제는 시급한 과제이다. 그렇다고 해도 돈과 경제는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이며 과정일 뿐이다. 돈과 경제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소유욕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그 사회도 병들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우리가 소유한 바가 우리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지산이 아닌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들지 못했고,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숭고해질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다. 문제를 그렇게 보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조금이라도 행복이나 위안을 주는가? 젊고 앞날이 창창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하듯이 무엇이나 그들 마음대로 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타인의 의지를 끊임없이 고려하거나 계속해서 기도하고, 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북함을 벗어난다는 것이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이란 인간을 위해서 마련된 개념이 아니라 부자연스러운 상태이며, 일시적으로는 괜찮겠지만 끝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이끌어주지는 못할 터이고...'"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사회와 조화를 이룰 때 얻는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이 으뜸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간디는 생산성은 부족함을 매우는 한도 내에서만 유지해야 한다고 거듭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생산 방식은 한계를 모르고 끝없이 증가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을 이제까지 용인해 왔지만, 이제는 사람이 기계에 의존할수록 파멸을 향해 더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사회관계로 규정되는 가난은 계층과 계층,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로 정의된다. 당신은 돈이 있고 나는 돈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소비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신에게서 돈을 얻어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은 나에게 명령하고 나를 이용하고 모욕을 준다. 이 가난은 소유물의 절대적 양이 아니라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가난이다. '부유함'을 뜻하는 영어의 'rich'는 소유물의 절대량이 아니라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의 금을 갖고 있으면 아무도 부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 경영권의 분리.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을 별개의 일로 분리하여 주주에겐 배당금과 기업 자산에 대한 잔여청구권만을 주고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주자는 것이다. 이 제안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된다면,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같은 기업을 두고도 신자유주의자들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를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에 의한 공동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양쪽이 모두 소유에 집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소유를 통해서만 자유를 확보하려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해란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나 권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람들 대다수는 식당에 가서 스스로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어떤 음식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음식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선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자유는 선택에서 시작하지만 소유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이리하여 자유와 소유가 뗄 수 없이 짝을 짓게 된다. 그리고 나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나의 자유의 폭도 넓어지고, 나의 소유가 확장되는 만큼 나의 자유도 확대된다. 만약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면, 나의 자유도 완전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유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이 욕구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달성된다. 상품이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는 내가 소유한 돈으로 환산되고 측정될 수 있다. 돈밖에 모르는 신자유주의자 속물들이 자유를 입에 올리는 것은 적잖이 역겨운 일이기는 하지만 전혀 논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유를 선택의 능력이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경우라면 그 활동은 생산활동이다.
최인철, <굿 라이프,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행복한 사람은 소유보다는 경험을 사는 사람이다. 소유를 사더라도 그 소유가 제공하는 경험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경험보다는 소유를 사는 사람이다. 심지어 경험을 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유화, 혹은 물화(thingify) 해버리는 사람이다.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경험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소유가 대화의 주제가 되면 그 대화는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소유는 비교를 유발하기 때문에 소유에 대한 대화는 관계를 위협한다. 사람들 사이에 '내것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반면에, 경험에 관한 대화는 즐거움을 창출한다. 행복에 관한 연구들은 경험을 나누는 '수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을 먹으며 경험을 나누는 수다가 최고의 행복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돈으로 경험을 산다는 것은 결국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산다는 것이다. 이야깃거리는 관계는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경험이 제공하는 이야깃거리는 관계를 강화시킨다. 우리는 함께 경험하기를 원한다. 설사 혼자서 한 경험이라도 수다를 통해 그 경험을 나누기를 원한다. 경험은 소유보다 훨씬 더 관계지향적이다.
법정 스님, <무소유>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하나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저에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야마시타 히데토 / 오노코로 신페이,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할 필요도 없고,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유욕은 가지면 가질수록 자유를 잃는 정체 모를 욕구입니다. 호흡, 휴식, 수면, 음식, 배설처럼 본능에서 오는 욕구와 달리 이차적 욕구인 소유욕은 생명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만 물건을 갖고 싶어할까요? 타인과 비교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대산하기 위해서? 집에 있는 물건을 차분히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안에 숨은 당신의 진심을 알게 될 테니까요.
전주희 외, <우리는 왜 이런 시간을 견디고 있는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냥 생존만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의미를 같이 누리는 생활이다. 그렇다. 재미와 의미, 이 두 가지는 인간다운 삶의 양대 바퀴다. 자본에 의해 규정된 삶이 소유와 소비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인간다운 삶은 경향적으로 재미와 의미를 추구한다.
소노 이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염려와 공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생겨난다.
정찬주, <길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소유하지 말라. 거듭난다는 건 없던 존재가 새로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 내면을 정화한다는 의미이리라. 우리가 진정 사랑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한번씩 목말랐을 때 온몸으로 사랑해야 한다. 집착과 소유는 사랑이 아니다.
신영복, <담론>
사람의 정체성은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노동'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영위하는 삶에 의해서 자기가 형성되고 표현됩니다. ... 장자의 반기계론은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속도와 효율, 더 많은 소유와 소비라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정치적 자주성, 경제적 자립성, 문화적 자부심)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커지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자신의 욕망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만의 욕망으로 변해서 나타난다. 가족, 친구, 동료, 연인 혹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나를 이렇게 대해 달라, 나를 대할 땐 이러이러한 태도를 갖추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무분별하게 소유하는 물질을 늘려 가면, 반드시 인격도 나빠진다. 결국 자신의 가치를 늘려 안정시키기 위해서 소유하는 물질을 늘리려 했는데, 아이러니학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인격이 점점 불안정 상태가 된다. 일반적으로 호화로운 대저택에 살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사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마음에 항상 괴로움이 있고 시야를 가리를 안개가 걷히지 않기 때문이다.
소유물을 줄이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속을 들여다보기가 더 쉬워진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누군가의 노동의 결과를 강탈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시간을 강탈하고 그에게 다양한 활동을 명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당신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특정한 일 또는 보수가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 일로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직접 정하는 꼴이다. 이런 행위는 .... 부분적으로나마 그들을 당신의 소유주로 만든다. 당신에 대한 소유권을 그들에게 넘기는 행위다. - 로버트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소유하던 것을 잃은 슬픔이 가시고 나면 자신이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을 가볍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더 많은 돈을 소유하거나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외부 환경을 더 잘 통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일시적인 영향력일 뿐입니다. 육체, 직장, 돈, 아름다움 등 우리가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들은 외면적인 힘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식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까요? 왜 그들 나름의 독창성을 발휘해 행동하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들이나 물건들, 또는 사건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을 버릴 때, 인간관계와 삶에서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혼란스러워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런 질서 속에 흐르게 됩니다.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 - Marx-Engels : Gesamtausgabe, I, iii, p.625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부자들이 비교적 부담 없는 삶을 영위할 가능성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사도 바울은 이런 특효약을 2천여 년 전에 간단하게 요약했다. "너희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라!"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이점을 즐 길 수 있다. 첫째로 고상한 취향을 유지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실용적인 면에서도 유익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는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재산을 잃어버려도 생활양식을 바꿀 필요가 없다.
출생과 소유의 모든 특권이 폐지되고 누구나 모든 직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면, .... 사람들은 마음 놓고 무한히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자신들이 위대한 것을 이루라는 소명을 타고났다고 즐겨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날마다 경험을 통해 수정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인 경우에 극심한 불평등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것이 평등한 경우에는 아주 미미한 차이도 마음을 상하게 한다. ... 이것은 민주주의의 주민들이 풍요 한가운데서 기이하게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 나는 부자들이 누리는 것을 희망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는 가난한 시민을 미국에서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 이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 덕분에 특히 처음에 젊은 사람들은 피상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사람과 행운아 들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절망한다. 그들의 영혼은 비통함에 숨이 막힌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서은국, <행복의 기원>
사람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행복의 전제 조건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여러 연구 논문들이 내놓는 결론은 다르다. 결국 둘 중 하나다. '행복은 소유'라는 생각이 틀렸거나 연구들이 엉터리거나.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이 세상의 TV, 라디오, 신문 같은 모든 매체에서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해져야 더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또 그 많은 물건을 넣기 위해서 더 큰 집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더 큰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한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자연을 수탈하는 악순환이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인생에는 돈도, 쾌적한 주거도, 건강하고 풍성한 식사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람은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유가 도를 넘으면 사람은 180도 돌변하여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고 휴식 시간까지 구속당하며, 조직에 조종당하고 끝내는 국가의 구속까지 받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하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진보는 항상 번영과 함께 빈곤을 낳았다. 대다수가 가난하지 않던 시대가 언제였는가? 일부 사람들이 전보다 덜 가난해졌다고 해도 가난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돈이 발명된 이래로 모두가 만족할 만큼 풍족한 적은 없었다. 돈이 충분한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인구의 10분의 1이 부의 85퍼센트를 소유하는 현실을 막지는 못했다. 식민주의가 끝났다고 해도 해마다 수천억 달러가 빈곤국에서 부유한 나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인구의 5분의 4가 여전히 부의 15퍼센트만 소유한 반면에 1퍼센트의 부자가 부의 3분의 1을 소유한다.
손미나,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인생은 모든 순간이 그 고유의 가치가 있는 거란다. 겉으로 보이거나 소유하고 있는 것들과 상관없이 의지를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결국 행복과 건강, 기쁨은 외적인 소유가 아니라 내적인 자각의 결과다. 내가 생각을 옳게 쓰면 나는 생각을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내가 생각을 옳지 못하게 쓰면 생각이 나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는 것도 모두 이 생각의 쓰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이점은 틀림이 없다. 토지는 인간의 삶터이고, 인간이 필요한 물자를 꺼내 쓰는 창고이며, 욕구를 충족시킬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노동을 투입하는 대상이 되는 원료이다. 토지 또는 토지 생산물이 없다면 해산물도 취할 수 없고, 태양열도 이용할 수 없고, 그 밖의 어떠한 자연력도 이용할 수 없다. 우리는 토지에서 태어나 토지로부터 물자를 얻어 살다가 토지로 돌아간다. 인간은 들의 풀이나 꽃과 마찬가지로 흙의 자녀이다. 사람에게서 토지에 속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면 사람은 육체 없는 영혼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에서 부를 생산하는 힘을 보태줄 뿐이다. 따라서 토지가 독점되면 물질적 진보가 고도로 이루어지더라도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노동밖에 가진 것이 없는 계층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질적 진보는 토지가치를 올리고 토지 소유의 힘을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토지소유는 귀족층의 근거이자 거대한 재산의 기초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인도의 최상 계층은 브라만이 오래 전에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건 토지를 소유하는 자에게 토지의 열매가 귀속된다. 하얀 일산과 거드름 피우는 코끼리는 토지 소유의 꽃이다."
현대 문명을 저주하고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는 점을 보았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보았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보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는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두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 그렇다면 현대 문명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악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수 세기에 걸쳐 인간은 다른 사람의 삶을 추종하고 모방해 왔다. 종교와 수행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가 도중에 '기쁨'을 '심각함'으로 잘못 베끼고, '웃음'을 '근엄함'으로 틀리게 적고, '즐거움'을 '죄'로 혼동하지는 않았을까? '예찬'을 '무덤덤함'으로, '행복'을 '소유'로 옮겨 적는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 역시 잘못된 필사본을 후대에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자신의 가치를 소유한 물건이나 타인의 인정 등 외부적인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 삶,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삶이 바로 최소한주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인 것이다.
여유롭고 단순한 삶을 살려면 가장 먼저 소유한 물건부터 버리고 마음도 비워야 한다. 우리는 뭔가를 추구하다 보면 비우기보다 채워 넣는 쪽으로 몰입하기 쉽다. ... 하나를 손에 넣으려면 그 전에 먼저 하나를 버려야 한다. 하나가 내 안에 들어오면 다른 하나를 내려놓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 쓰지 않는 것은 버리고,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생각 외에는 버리는 것이다.
조금만 소유하고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 외면의 욕망이 아닌 내면의 욕망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본질에 충실한 삶. 이것이 바로 미니멀리스트에게 주어지는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닐까.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우리는 갖고 싶은 물건을 손에 넣기 위해, 갖게 된 물건을 보관하고 유지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도구여야 할 물건은 어느새 주인이 되어 버린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역)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결국 네가 가진 물건에 소유당하고 말 거야."
내 사진이나 일기 같은 기록은 나 자신의 과거 자체와는 관계가 없다. 추억이 담겨 있는 사진과 기록을 버렸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있는 기억으로서의 과거는 남아 있다. 물건을 버렸다고 해서 과거를 버렸다는 식으로 과장할 일은 아니다. 만일 잊어버린 추억이라면 잊어도 좋은, 필요 없는 기억일 것이다. 필요한 인생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남아 있기 마련이다. - 나카자키 다쓰야, <소유하지 않는 남자>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만족하느냐 아니냐는 물건의 개수와는 관계가 없다.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물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수많은 물건에 대한 조잡한 의식이 아니라 극히 적은 물건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의식하라. 그렇게 물건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물건을 소유하는 만족감을 두 배, 세 배로 높여준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김화영, <행복의 충격>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 누구나 영원한 봄, 영원한 여름을 프로방스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햇빛이 참으로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이 망상의 근원은 깊게 뿌리박힌 인간의 염원과 공포, 그리고 무지에 있다. 인간은 소유하고 싶은 권력과 아름다움, 완벽한 안전에 대한 이미지를 투영하여 그에 따라 신들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꿈에 노예가 되고 만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주요한 적은 유한한 세계에서 가능한 그 이상을 얻으려는 환상인 과도한 욕망과 삶을 좀먹는 공포이다. ... 실제로는 꿈에 불과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 마음을 파고들며 끝내 전소시키고 마는 그 망상적인 소유욕이 문제인 것이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삶의 방식을 바꾸면 몸과 마음이 바뀐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봐왔던 세상이 새롭게 다가온다. 어떤 하나를 단호하게 바꾸면 내 삶 전체가 변하는 것이다. 오늘 이들이 선택한 불편한 삶은 적은 소유로 넉넉하게 살아가는 소욕지족의 불교 정신과 맞닿아 있다. ... 과다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 관계의 그물망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 부분 그대로가 곧 전체다.
수행은 대안 운동이다. 대안은 '그름'을 물리고 '바름'을 앉히는 일이다. 오염된 마음을 걷어 내고 청정한 마음을 모시는 일이다. 무한 소유와 소비에서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기 보다는 절제와 나눔에서 정신을 성숙시키고 성장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일이 수행이다. 서로를 착취하는 경쟁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생으로 사는 일이 수행이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부나 화려함같이 없어도 될 것을 찾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 육체의 욕구를 들어주면 줄수록 영혼의 힘은 약해진다. 현자와 성인들이 일생을 금욕적으로 살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돈 속에, 돈 자체 속에, 그리고 돈을 취득하고 소유한다는 그 속에 무엇인가 비도덕적인 점이 있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소유의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필요치 않은 물건을 배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그 어떤 물건보다도 우위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소유한 물건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금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 물건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건이 인간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소유하는 공간 자체를 줄이고 쓸데없는 물건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없으면 생활에 지장을 줄 만한 최소한의 물건과 진심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은 물건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될 자신의 친구다. 이것이 바로 심플 라이프의 법칙이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인간의 삶이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소유물이 곧 나 자신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소유하는 것(집이나 직업, 배우자나 자동차)은 오로지 자기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교환될 수 있을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는 끝없는 불만족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경제 과정이다.
제레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과거의 세계관은 자연을 그저 대상으로 보았지만 새로운 세계관은 자연을 관계의 집합으로 본다. 과거의 관점을 특징짓는 것이 분리, 몰수, 해체, 감축이라면 새로운 관점을 특징짓는 것은 결합, 보충, 통합, 전체론이다. 예전의 과학은 자연에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만든는 방법에 몰두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힘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여과의 협력을 추구한다. 과거의 과학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을 중시했지만 새로운 과학은 자연에 참여하는 것을 중시한다. 과거에 우리는 자연을 식민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약탈하고 노예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은 자연을 우리가 함께 돌보고 가꾸어야 할 공동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을 소유하여 개간하고 이용하고 소유할 권리를 지양하고, 자연을 돌보고 존중해야 할 의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연이 지닌 효용적 가치보다는 자연이 지닌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가 점차 주목받고 있다.
3차 산업혁명은 대산업 시대 전설의 마지막 편이면서 동시에 다가오는 협업 시대의 첫 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3차 산업혁명은 경제사의 두 시대, 근면한 행동 방식이 특징이던 시대와 협력적 행동 방식이 특징인 시대를 잇는 과도기를 의미한다. 산업 시대가 규율과 근면한 노동, 권위의 하향식 흐름, 금융자본의 중요성, 시장의 작용, 소유권 관계를 중시했다면 협업 시대는 창의적인 놀이와 피어투피어 상호작용, 사회적 자본, 개방형 공유체 참여, 글로벌 네트워크 접속 등을 보다 중시한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나는 산업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소유를 향해 - 내 집, 내 시간, 내 장래, 내 아이들 - 밀고가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았다. 그리하여, 나는 좌절감 속에서 지냈다. 왜냐하면 확실한 소유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공동체 속에서의 관계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첫째, 모든 것은 순환적으로 움직인다. 계절과 식물과 동물과 사람들도 순환한다. 모든 것은 죽음에 이르지만, 다시 태어남은 되풀이된다.
자연세계의 경이와 신비로움에 일상적으로 접촉하면서, 우리는 '소유'의 세계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통제'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땅과 동물과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을 영위하는 데에는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룬 노동과 보살핌의 섬세한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나는 다만 하나의 피조물일 뿐, 결코 내가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종류의 활동 속에서 우리는 큰 친밀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런 종류의 삶을 통해서 내가 깨닫는 것은 우주의 움직임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고,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사실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일부 회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특정한 부동산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점수를 팔기 시작했다. 점수는 일종의 시간 공유 화폐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단위가 대체 가능한 화폐로 바뀌는 추세는 자원의 희소성보다는 시간에, 소유보다는 접속에 중점을 두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음을 의미한다. 고객은 점수를 산다. 점수는 시간 단위를 나타낸다. 이 점수를 가지고 투숙, 항공 여행, 유람선, 골프장, 자동차 렌트, 그 밖의 여행, 레저, 오락 시설 일체를 이용할 수 있다. 렌트, 시간 공유 콘도 구입, 점수 구입은 모두 <시간화> 사업의 다양한 방식이다. 이제는 부동산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동산의 접속권을 사는 시대다. 아파트, 콘도미니엄, 빌라 같은 시설을 지정된 기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빠르게 부상하는 네트워크 경제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판매자-구매자 관계는 서서히 공급자-사용자 관계나 서버-클라이언트 관계로 바뀐다. 재산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접속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공산품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소유권을 가지는 것이 중요했지만 상업화된 전자 통신 기기와 온갖 종류의 문화 생산과 상품에 의해 점점 지배당하는 글로벌 경제에서는 경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접속을 통한 체험이 재산의 소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새로운 문화의 중개자는 개인과 문화 체험 사이에서 문지기 노릇을 한다.
탈근대에서 사람을 가르는 선은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다.
자유에서 자율성을, 자율성에서 나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능력을 연상하면서 우리가 근대를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의 결실로 얻은 재산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 징표로 여겨졌다.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부터 남을 배제하는 권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개인적 자유를 지키는 최선의 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류시화,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헬렌 & 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류콴홍, <철학우화>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존 로빈스, <인생혁명>
돈 모으기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면 더 위대한 삶, 그저 무언가 소유하고 얻으려 노력하는 삶을 넘어선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강신주, <감정수업>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노동자가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 상품을 만들어 팔 수 있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용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떼어 팔기 싫다면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면 된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여행자는 흔희 두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렵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진실로 가치 있고 유용한 것이란 바로 그 기능을 다해 인간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란 뜻이다. 생명을 향해 끌지 않는 힘의 크기에 비례해서, 혹은 생명으로 끄는 힘이 손실된 정도에 비례해서 가치는 감소된다. 생명의 정반대 방향으로 읶느는 힘이 강할수록 물건은 무가치한 것, 곧 유해한 것이 된다.
따라서 물건의 가치는 그것에 대한 사람의 평판이나 소유된 수량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이 그 물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에 따라, 혹은 그 물건이 사람들의 수중에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 따라 물건의 고유 가치가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물의 조물주에게 부여받은 그 물건 고유의 힘은 인간이 중시한다고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경시한다고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유익하거나 아니면 무익하도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정되었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
로버트 쉴러, <새로운 금융의 시대>
소유가 늘어날수록 그 만족감은 점점 줄어들 뿐이다.
<데일 카네기와의 티타임- '창송'중에서>
사람들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물론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것이고, 온갖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 할 수 있는 한 가지 공
통점은 바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이다.
사람들은 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지
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족을 찾지 못한채 일생을 마
친다.
설령 원하던 바를 얻은 사람이라고 해도 목표를 달성
한 후에는 종종 방향을 잃고 실의에 빠진다.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처해있는 인생의 어려움이다.
그것은 우리가 목표를 찾아나서는 첫 마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기때문이다.
소유는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없다. 우리가 원
하는 것은 그 추구한 바를 즐기며 맛보는 것이다.그것
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자식을 낳아 소유하려고 하면 행복해질 수 없듯이 다
른 대부분의 가치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동안 생의 진정
한 목표를 잊어버린다.
목표가 누리는 것이라면 과정 자체도 당연히 누리고
즐겨야 한다.
자, 그렇다면 늘 기억하자. 목표가 설령 달성되지 않
아도, 또 달성되어도, 매일매일 추구하는 과정을 즐
겨야 한다.
목표를 끝내 획득하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날마
다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과정 자체에서 기쁨을 찾고
즐겨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활에는 두 가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얻고
싶은 것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얻는 것을 충분
히 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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