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악을 저지를까? 악한 사람만이 악을 저지를까? 평범한 사람도 악에 가담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악을 저지르거나 악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평범'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우리도 누구나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악을 저지를 수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 보통 악이라는 것은 악을 의도한 주체가 능동적으로 저지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렌트는 오히려 악을 의도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저지르는 데에 악의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발췌]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악의 평범성과 타자 중심적 윤리, 정화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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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법적 윤리적 이론화 작업이 주요 범주는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 또는 다원성이다. 아렌트 따르면, 인간의 복수성이 없다면 인류 또는 인간성이란 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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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와 말, 이 두 가지의 기본 조건이 되는 인간의 복수성은 평등과 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들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그리고 자신들에 앞서 왔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의 필요를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다르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과 구별되는 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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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에게는 복수성이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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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탄생성)이란 생물학적 현상으로, 각 사람들이 이미 항상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속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출산'(또는 노동)(노동인, homo laborans)의 현상이다. 후자의 '두 번째의 탄생'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의 '생물학적' 탄생과 두 번째의 '상징적' 탄생은 동일한 인간적 공적의 연속이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한다. 아렌트는 <뉴욕 서평>에 하이데거의 팔순 생일에 헌정하는 논문, <90세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기고한다. '생일'은 모둔 문화권에서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해 축하하는 행사이다. 아렌트의 '탄생' 개념은 그녀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탄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인간을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탄생하는 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시작한다. "어떠한 인간의 삶도, 자연 속 광야에서 살아가는 은둔자의 삶조차도, 다른 인간의 현존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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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현존재(Dasein)의 실존의 표지이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기에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죽음은 현존재의 실존의 표지가 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며, 어떤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진정성(Eigentlchkeit)를 입증한다. 죽음, 오직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을 진정한 것으로 만든다.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하이데거의 사상 - 아도르노의 비판적 표현을 빌리자면 - 은 '진정성이라는 특수용어'로 소모되고 선점되어 있다. 따라서 불행하게도 하이데거는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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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차이는 한편에는 '죽음'과 '진정성',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탄생'과 '복수성'으로 이루어진 대립항 사이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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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행위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료들과 어울리게 해주고, 공동의 행위를 하게 해주며, 그 재능 - 새로운 어떤 일을 착수하는 능력(새로운 것의 시작으로서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마음의 욕망은 물론이고 정신의 생각으로도 결코 들지 않았을 일과 목표를 위해 나서게 해준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행위한다는 것은 탄생성의 조건에 대해 인간적인 응답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탄생을 통해 (본질적으로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신참자로서 또 시작으로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탄생의 사실이 없다면 우리는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모든 '행위'는 단순지 행태나 도착적 행동에 불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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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은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책임의 윤리를 실천할 수 없었다. 그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아렌트의 판결은 칸트적인 윤리적 의도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일한 개인이 단독적으로 책임 있게 되는 결과의 원리에서 도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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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특히 미디어 기술이 우리를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심지어 전체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미디어(매체)가 메시지가 되어감에 따라, 간단히 말해, 미디어는 우리를 더욱더 평범하게, 획일적으로, 그리고 생각 없이 만든다.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되어왔고, 또 그렇게 되어가게 될 이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담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 가장 궁극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 두 번째로 궁극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어 보인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인류의 역사-아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임스 조이스의 표현을 사용하자면-는 깨어날 길이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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