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사회적 개혁 운동이 대의를 위해 일어섰으나 장애물과 다른 생각을 가진 무리의 공격에 좌절하고 실패하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무관심은 우리를 아둔한 존재의 늪에 빠뜨리는 반면,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다." - 사뮈엘 베케트
[본문발췌]
독견doxa(우연적이고 경험적인 견해나 지혜)과 진리Truth, 혹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지식과 절대적 믿음Faith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선상에서 오늘날의 상식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상식 차원에서 가장 멀리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보수주의적 자유주의뿐이다. 확실히, 자본주의의 대안들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메커니즘이 자신의 토대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은 남아 있다. 이런 위험은 경제적 동력(강력한 국가기구가 시장경쟁 자체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정치적 동력과도 관련된다. 다니엘 벨에서부터 프랜시스 후쿠야마까지 보수적 민주주의자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조건들(오래전 벨이 '자본주의의 문화적 조건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본주의는 자기 책임과 시스템의 '공정함'을 철저히 인식하는 개인들과 그런 개인들을 통해 이뤄지는 사회적 안정을 조건으로 해서만 번창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교육 제도와 문화적 기제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뒷받침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지평에서 제출되는 유일한 해법은 하이에크식의 급진적 자유주의도 아니고 낡은 복지국가 모델에 덜 집착하는 잔인한 보수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에다가 시스템의 과잉에 맞서는 최소한의 '권위주의적' 공동체 정신(사회적 안정과 '가치들'에 대한 강조)이 결합된, 블레어T. Blair 같은 제3의 길 사민주의자들이 개척한 해법이다.
이것이 상식의 한계선이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신념의 도약Leap of Faith, 즉 회의적인 지혜의 지평에서는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Lost Cause에 대한 믿음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신념의 도약에서부터 발언한다. 하지만 왜? 물론, 문제는 위기와 분열의 시대 속에서 지배적인 상식의 지평에 제약된 경험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지혜로는 결코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감히 신념의 도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이 책에서 옹호된 잃어버린 대의의 목록들이 '포스트모던한' 독견의 주장자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악몽의 호려쇼 내지 온 힘을 다해 쫓아내려 했던 유령들이 모여 있는 대기소처럼 보일 것은 당연하다. 전체주의적 정치에 매혹된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하이데거의 정치학, 로베스피에르에서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 오늘날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이것들의 대의를 무시해 버릴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좀더 '부드러운' 형태로 대체하려고 시도한다. 지식인의 전체주의적 참여는 안 돼! 그 대신 세계화의 문제점을 탐구하고 공론장 속에서 인권과 관용을 주장하며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맞서 싸우는 지식인은 좋아! 혁명적 국가 테러는 안 돼! 그 대신 탈-중심적인 다중의 자율-조직화는 좋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안 돼! 그 대신 다양한 행위자들 간의 협력(시민사회 발의 국가 융자, 국가 규제)은 좋아!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 삼는 것이다. 푸코의 정치 참여나 특히 하이데거의 정치 참여는 그 근본적 동기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분명히 '잘못된 방향의 올바른 발걸음'이었다. 혁명적 테러의 불행한 운명은 - 그 테러를 통째로 거부하는 게 아니라 - 그것을 재창안할 필요를 제기한다. 멀지 않은 생태학적 위기는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받아들일 유일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의 주장은, 이것들이 자기 나름의 역사적 실패이자 괴물이지만 (스탈린주의는 인간의 고통이란 측면에서 파시즘보다 더 잔혹했던 악몽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엄밀히 말해서 프롤레타리아가 침묵한 우스꽝스러운 체제를 양산했다...)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 안에는 자유-민주주의자의 거부 속에서 사라진 부활의 계기가 존재한다. 이 계기를 분리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거꾸로, 자유민주주의자들이야말로 더러운 물과 함게 아이까지 버리지 않기를 원하는 자들(순수한 사회민주주의라는 아이는 남겨두고 더러운 테러의 물은 버림으로써)이라고 주장하고픈 유혹을 받지만, 그 속에서 원래 물은 깨끗했다는 사실, 물속의 오물은 아이로부터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가 더러운 똥으로 깨끗한 물을 오염시키기 전에 아이를 버리는 것, 스테판 말라르메의 말을 이용하면, 역사의 욕조 속에 물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자주 인용할 베케트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면, 무관심은 우리를 아둔한 존재의 늪에 빠뜨리는 반면,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다.
교양은 자유로운 행위인-척하는-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의무인 척하는 자유 행위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진정으로 교양 있는 태도는 실제로는 자신의 호의인데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의무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자유를 필연의 인식으로 정의하는 스피노자를 뒤집는 역설에 의해 지탱된다.
헤겔의 용어로 설명하면, 자유는 우리 존재의 윤리적 실체의 의해 지탱된다. 각 사회마다의 특질들, 태도들, 혹은 삶의 규범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식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비-이데올로기적이고 상식적이며 '중립적인' 생활 형식처럼 나타난다. 이데올로기는 (급진적인 종교적 열정이나 정치적 경향에 대한 헌신처럼) 이런 배경으로부터, 그 배경을 토대로 명시적으로 정립된(기호학적으로 '표시된'marked) 입장이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가장 두드러지게(가장 실제적인)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바로 어떤 특질들을 자연발생적인 배경으로 중립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변증법적인 '대립물의 일치'란 이런 것이다. 어떤 관념(이 경우 이데올로기)이 그 대립물(비-이데올로기)과의 일치(보다 정확히, 비-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나타남)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폭력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사회-상징적 폭력은 자신의 대립물 속에서,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숨 쉬는 공기와 같은 자연스러움의 형태로 현실화된다.
다문화주의의 내적 곤경에는 이와 같은 교양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몇 년 전 독일에서 지배문화Leitkultur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추상적인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면서 모든 국가는 자국 내의 다른 문화 구성원들 역시 존중해야 하는 지배적인 문화 공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좌파들은 이런 생각이 명백한 인종주의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최소한 사실에 대한 묘사만큼은 정확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존중은 여성의 완전한 해방이나 종교(와 무신론)의 자유, 성적 지향의 자유 같은 집단의 권리들이 공개적으로 타인과 물건을 공격할 자유를 희생시킨 대가로 얻어진 서구의 자유주의적 지배문화의 핵심요소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무슬림 차별에 대해서는 항의하면서도 자기 본국, 이를테면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종교 차별에 대해서는 하나의 규범으로 인정하는 서구 내 무슬림학자들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허용하는 서구의 지배문화,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자유에 대한 존중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간명하게 말해서, 무슬림을 위한 자유는 살만 루시디가 원하는 것을 쓸 수 있게 하는 자유의 일부이다. 자기에게 맞는 서구식 자유만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서구식 다문화주의는 사실 중립적이지 않으며 단지 특수한 가치들만 특권화할 뿐이라는 통상적인 비판에 대한 응답은 이런 역설, 즉 서구 근대성 안에는 보편적 개방성이 뿌리 박혀 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학 분야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편에는 보다 사회학적인 접근이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문화권이나 직업, 종교, 사회 경제적 집단에서의 행복지수를 측정한 무수한 데이터에 기반한다. 우리는 이런 연구가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행복을 구성하는 개념이 각각의 문화적 맥락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행복을 개인적 성취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단지 개인주의적인 서구 국가들에서만 통용된다.) 또한 그렇게 수집된 데이터가 때로는 매우 흥미롭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행복은 생활에 대한 만족과 같은 것이 아니다. (평균적이거나 평균 이하의 생활 만족도를 보이는 몇몇 국가들은 매우 높은 행복지수를 보인다.) 생활 만족도에서 가장 우수한 나라들 - 대부분 서구 사회나 개인주의적인 집단 - 은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데, 물론 그것은 질투심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보다 타인들이 갖고 있는 게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중산층이 빈곤층보다 만족감이 떨어지는 것은 도달하기 힘든 고수입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상류층을 준거집단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획득 가능한 중간 소득층을 준거집단으로 삼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지과학적 연구나 뉴에이지의 명상적 지혜와 결합되곤 하는 심리학적(오히려 뇌과학적) 접근법이 있다. 이것은 행복과 만족의 느낌을 수반하는 뇌의 활동과정을 측정하는 것이다.
도덕성은 개인적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성은 모든 개인들의 행위에 대해 어떤 것이 허용되고 어떤 것이 허용될 수 없는지를 말해 주는, 즉 행위의 근거를 구성하는 불문율의 집합으로, 헤겔이 '객관 정신'이라 부른 것에 의해 지탱될 때만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 정체성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도덕적 타락의 과정 속에 있다. 권력자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도덕적 중추를 꺽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명백히 시민사회의 가장 위대한 성취인 우리의 자생적 도덕 감각의 성장을 무력화하려 하고 있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쟁취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이성의 주체는 무자비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먼 출현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안전한 거리에서 딸기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 중 하나를 고르는 것과 같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과 충첩된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거는 것일 때 - '달리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행할 때 -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주체를 윤리적으로 행동하게 몰아대는 세 가지 작인을 제시했다. 이상적 자아, 자아 이상, 그리고 초자아가 그것이다. 보통 프로이트는 이 세 가지 용어를 혼용해서 사용하고(그는 자주 '자아 이상 혹은 이상적 자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한 <자아와 이드> 3장 제목은 '자아와 초자아(자아 이상)'이다. 하지만 라캉은 이 세 항을 엄격히 구별한다. '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거나 타인이 나를 이렇게 봐 줬으면 하는 상)를 의미한다. 자아 이상은 그 응시로 나의 자아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작인, 나를 지켜보며 내가 최선을 다하도록 독려하는 대타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 싶어 하는 이상적 '나'이다. 그리고 초자아는 그 작인의 집요하고 가학적이며 징벌하는 측면이다. 이 세 항의 구조화 원리는 명백히 라캉의 상상계-상징계-실재로 이뤄진 삼항구조이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적인 것으로, 라캉이 '작은 타자'라고 불렀던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적인 것으로, 내가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지점, 내가 대타자 속에서 나 자신을 관찰하는(판정하는)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제적인 것으로, 나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퍼붓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의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 그 시선 속에서 나의 '나쁜' 갈망을 억누르고 그 명령에 따를수록 점점 유죄가 되는 작인이다.
역사적 진보라는 비-사건적 시간관 속에서는 결코 혁명적 사건의 '정확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은 결코 혁명적 행동에 '충분할 만큼 성숙할' 수 없다. 행동은 언제나 정의상, '미성숙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거의 패배들이 유토피아적 에너지를 축적하여 최후의 전쟁으로 폭발할 것이다. '성숙함'이란 성숙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객관적' 환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패배들을 축적하는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자기들은 '혁명'보다 근본적인 해방적 정치운동에 결합하고 싶다고 한탄하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그것을 염원하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의지와 힘을 다해 진정으로 그런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공간을 찾아보지 않는다.) 여기에는 진실의 계기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태도 자체가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누군가 혁명적 운동을 '보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당연히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는 결코 혁명을 보지 못할 것이다. 헤겔이 진실한 현실로부터 외관을 분리시키는 커튼에 관해 언급한 것은(외관의 베일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 너머를 추구하는 주체가 갖다 놓은 것 말고는) 또한 혁명적 과정에도 적용된다. '보는 것'과 '원하는 것'은 여기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달리 말해서 혁명적 잠재력은 저기 바깥에서 발견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사실이 아니다. 오직 그것을 '원하는'(운동에 참여하는) 자만이 그것을 '보게 된다'.
행위란 본질적으로 기존의 배경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좌표를 무너뜨리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배경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필수적인 정치적 행위는 배경으로서의 경제가 갖는 위상을 파괴하고 그것의 정치적 속성을 가시화시키는 것이다(이것이 맑스가 정치적 경제학에 대해 쓴 이유이다). 웬디 브라운의 "만약 맑스주의가 정치이론을 위한 분석적 가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자유주의 담론 안에서 암묵적으로 '비정치적'-자연적인-것으로 언명된 사회적 관계 안에 자유의 문제가 내재해 있다는 주장에 있지 않는가?"라는 냉철한 분석을 상기해 보자.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정체성 정치가 일정하게 자본주의의 재자연화를 통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그래서 던져야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단지 '사회주의적 대안의 상실'이나 표면적인 '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근의 대항정치 지형에 의해 일정 정도 배제되고 있는 게 아닐까? 사회 전체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과 총체적 변혁에 대한 그의 전망과 대조적으로 정체성 정치는 자신들이 반대하는 기존 사회의 내재적 기준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자본주의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기준이 아니라, 계급을 보이지 않게 하고 말할 수 없게 하는 기준 말이다. 그것도 어쩌다가 그러는 게 아니라, 풍토평처럼 몸에 배어 있는 듯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배적 관념은 그것이 우연적인 역사적 과정의 결과를 '자연화' 하거나 그 과정을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독제는 사물을 역동적으로, 역사적 과정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오늘날 보편적 역사성과 우연성이라는 관념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이 될 때 우리는 비판-이데올로기의 관점을 뒤집어서 현대 사회의 그 찬탄할 유목적 역학 속에서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물어야 한다. 물론 그 답은 자본주의, 자본주의적 관계이다. 여기서 동일한 것과 변화된 것 간의 관계는 고유하게 변증법적이다.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자본주의적 관계-은 끊임없는 변화를 촉발하는 배치 자체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 자체가 영속적인 자기-혁명의 역할이기 떄문이다. 진실로 근본적인 변화-자본주의적 관계 자체의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삶의 영속적인 사회적 역학을 뿌리부터 잘라내야 할 것이다.
"저항은 스스로를 하나의 탈주exodus로, 세계 바깥으로의 이탈로 제시한다." - 안토니오 네그리,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
이와 같은 새로운 상황에서 우리는 새로운 형식의 정치, '빼기의 정치',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된-이탈된-' 정치적 절차들을 필요로 한다. "당에 의한 봉기 형태와 달리 이 빼기의 정치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파괴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거나 군사적이지도 않다." 이런 정치는 국가로부터 거리를 유지한 채 더 이상 "국가에 의해 확정된 스케줄이나 아젠다에 따라 구조화되거나 분극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국가로부터의 외부성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바디우는 여기서 자신의 핵심적인 개념 구분을 제시한다. 그것은 파괴와 빼기 사이의 구분이다. '(빼기subtraction)는 더 이상 정치적 상황의 현실을 지배하는 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그런 지배적 법들의 파괴로 환원되지도 않습니다. 빼기는 여전히 장소 안에 머물러 있는 상황의 법들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빼기가 하는 일은 자율의 지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정이지만 부정의 파괴적인 측면과 동일시될 수는 없습니다. ... 우리는 지배적인 상황의 법들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기원적인 빼기'를 필요로 합니다.'
빼기는 '부정의 부정'(혹은 '규정적 부정')이다. 달리 말해서, 지배권력을 직접 부정-파괴하는 대신 그 지배권력의 장 안에 남아 있음으로써 그것은 바로 그 장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실정적 공간을 개방한다. 요점은 이런저런 빼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디우가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순수한 빼기로 규정할 때 그 자신은 참으로 증상적인 개념적 후퇴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빼기는 결코 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정체성의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를 빼내는 사람은 '허무주의적인' 테러리스트들이다. 그들 속에서 근본적인 파괴는 근본적인 빼기와 겹쳐진다. 또 다른 '순수한' 빼기는 뉴에이지의 명상적 후퇴로, 그들은 사회적 현실을 내버려 둔 채 자기만의 공간을 창조한다.
빼기는 실제로 언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가? 유일하게 타당한 대답은 이렇다. 그것이 스스로를 빼내는 시스템의 좌표 자체를 무너뜨릴 때, 그 시스템의 '증상적 비틀림'이 지점을 가격할 때이다. 카드로 만든 집이나 나무토막 쌓기를 상상해 보자. 그것은 하나의 카드나 나무토막을 빼내면-배제하면-전체 체제가 붕괴되는 복잡한 방식으로 지어졌다. 이것이 진정한 빼기의 기술이다.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려 보자. 거기서 유권자들은 집단적으로 투표를 거부하고 무효투표를 해버림으로써 정치체제 전체(지배집단과 반대자들 모두)를 패닉 상태로 빠뜨린다. 이런 행동은 그들 자신을 주체에 대한 근본적 책임의 상황으로 던져 놓는다. 그런 행위야말로 가장 순수한 빼기이다. 합법적 의례에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단순한 제스처가 국가권력을 절벽 너머의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들의 행위는 더 이상 민주주의적 합법성에 의해 보호받지 않으며, 권력자들은 돌연 항의자들에게 대답할 선택권을 박탈당한다. "우리를 비난하는 너는 누구냐? 우리는 선출된 정부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선택권 말이다. 합법성을 결여한 그들은 고된 노력을 통해, 그들 자신의 활동에 의해 합법성을 획득해야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비난은 명백하다. 이것은 증가하는 정치적 무관심과 투표 불참이 만연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권력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전복적인 날카로움이 있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대타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표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능동적 행위로 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 의존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투표하지 않아. 나는 나를 대신해서 투표하는 사람에게 묻어갈 거야." 투표-불참은 그것이 대타자에게 영향을 미칠 때만 하나의 행위가 된다.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기저에 깔린 작동 양태이다.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테제는 그것이 다른 독재 형식(들)의 대립물임을 전제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의 전체 장이 독재의 장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독재 형식이라고 지적했을 때 그는 단순히 민주주의는 단지 조작된 외관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비밀 도당이 권력을 장악한 채 상황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민주주의적 선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실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들이 진면목과 독재적 권력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라는 소박한 관념을 제시한 게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 국가의 형식 자체, 그 이데올로기-정치적 전제들 안에 있는 권력의 주권 자체가 '부르주아' 논리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독재'라는 용어를 정확히 민주주의 역시 독재의 한가지 형식이라는 식으로 순전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
투쟁이 투쟁 자체의 장에 관한 투쟁으로 전환할 때 그것의 독재적 성격이 드러난다. 혹은, 자유로운 토론 속의 '독재'는 어떤 '최종 진술'의 환기가 결정의 순간으로 간주되는 방식 속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에서 그것은 유목적인 것 대 고정된 정체성, 변화 대 정체, 다양성 대 일자 등의 대립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독재의 계기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성을 대변하는 '몫 없는 자들'인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몫 없는 자들'이 조성한 보편성의 권력이다. 그들은 왜 평등주의-보편주의적인가? 또다시 순전히 형식적인 이유 때문이다. 몫 없는 자들로서의 그들은 사회적 체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할 특수한 특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 부분집합에 속함이 없이 사회라는 집합에 속해 있다. 그들의 소속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다. 여기서 다양한 특수한 이해와 타협을 통한 이해관계의 중재라는 논리는 한계에 직면한다. 모든 독재는 이와 같은 대의의 논리를 파괴한다.
헤겔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인민'의 대립은 '진정한' 보편성과 '거짓' 보편성 간의 대립니다. 인민은 포함적이고 프롤레타리아는 배제적이다. 인민은 완벽한 자기-확증을 방해하는 침입자나 기생 존재와 맞서 싸운다.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그 핵심에서 인민을 분해하는 투쟁을 강행한다. 인민은 자기 확인을 원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해체를 원한다.
고대 그리스부터 우리는 보편성의 침입에 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처음 나타났을 때 데모스demos(위계적인 사회적 체계 안에서 확고한 자기 자리가 없는 자들)는 단지 권력자들에 맞서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원한 게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을 항의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 영역에서 독재자나 귀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정되거나 포함되기를 원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배제된 자들은 스스로를 사회 전체의 구현체로서, 진정한 보편성을 체현한 존재로 선언했다. "우리-질서 속에서 셈해지지 않은 '아무것도 아닌'nothing-는 인민이다. 자신의 특수한 특권적 이해만을 대변하는 다른 자들과 달리 우리는 전부이다." 정치적 갈등은 고유하게 각각의 부분이 자기 자리를 갖는 체계화된 사회체제와 보편성의 텅 빈 원칙에 의해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몫 없는 자들' 사이의 긴장을 지칭한다. 그 텅 빈 보편 원칙을 에티엔 발리바르는 평등-자유, 즉 말하는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이 지닌 원칙적 평등이라고 불렀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민주주의의 폭발적 분출 자체의 다른 이름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래서 합법적인 국가권력과 불법적 국가권력 간의 차이가 중지되는, 국가권력 자체가 불법이 되는 제로-차원이다. 1792년 생-쥐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왕은 반역자이며 참주이다." 이 구절은 행방적인 정치의 초석과 같은 언명이다. 참주와 대립된 '합법적인' 왕이란 건 없다. 왜냐하면 프루동이 사유재산 자체가 절도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왕이 된다는 것 자체가 권력 찬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 단순하고 직접적인 부정("이 왕은 합법적이지 않다. 그는 참주이다")에서 본질적인 자기-부정('진정한 황'이란 말은 모순 형용이다. 왕이 된다는 것은 가 자체로 권력찬탈이다)으로의 이행을 발견한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이 기괴한 조합은 독재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긴장에 근거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두 가지 기본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정원 외 원소'인 자들에 의한 폭력적인 평등주의적 강제가 한 측면이고, 누가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에 대한 (다소간) 일반적인 선택 절차에 관한 법적 규정이 다른 한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가? 두번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인민의 목소리'를 확증할 법적 절차)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라면, 즉 위계적인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평등주의적 논리의 강제적 부과라는 의미에서, 혹은 이런 과잉을 재가동시켜 그것을 정상적 운동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방어라면? 그래서 문제는 어떻게 폭력적인 평등-민주주의적 충동을 규제/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그것이 두번째 의미의 민주주의(법적 절차)로 타락하는 것을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방법도 없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정상화될 일시적인 유토피아적 폭발로 남게 된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우려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하곤 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해방된 대가가 새로운 지배자의 보이는 손에 의한 통제라면, 우리는 그런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가시적인 손이 '몫 없는 자들'에게 보이고 그들에 의해 통제된다면.
제럴드 코언은 고전적인 맑스주의적 노동계급 개념의 네 가지 특질을 나열한 바 있다. 1)노동계급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2)노동계급은 사회의 부를 생산한다. 3)노동계급은 착취받는 사회 구성원들로 이뤄진다. 4)그 구성원들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맑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의 네 가지 특질은 단일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근거해 있다. 그것들은 동일한 구조적 원인의 네 가지 효과인 것이다. 전 지구적 자본의 끝없는 자기-재생산을 위협하는 네 가지 적대들 역시 동일한 원인으로부터 '연역'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이 과제는 현대 물리학에서 하나의 동일한 특질이나 법칙으로부터 네 가지 근본적 힘(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을 연역해 내는 '통합이론'의 발전만큼이나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아마 우리는 코언의 네 가지 특질을 또 다른 네 항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성' 원칙은 우리 모두와 관련된 논제인 생태학으로 나타난다. '빈곤함'의 특질은 슬럼에 사는 배제된 사람들의 특질이다. '부의 생산' 기능은 점점 더 유전공학 같은 과학기술적 발전에 의존한다. 마지막으로 '착취'는 지적 재산처럼 집합적 노동의 착취로 다시 나타난다. 네 가지 특질은 일종의 기호학적 사각형을 형성하여 두 가지 대립이 사회/자연과 새로운 분리 장벽의 내부/외부 선을 따라 교차한다. 생태계는 자연의 외부를 가리키고, 슬럼은 사회적 외부를, 유전공학은 자연적 내부를, 지적 재산은 사회적 내부를 가리킨다.
왜 이 네 가지 적대의 중첩은 헤게모니 투쟁과정에서 채워지는 라클라우식 텅 빈 기표('인민')가 아닐까? 왜 그것은 억압된 성 소수자, 인종집단, 종교집단 사이의 일련의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에 속하는 또다른 시도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 위치, 즉 '몫 없는 자들'의 위치를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오래된 모델을 원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실한 공산주의자의 동맹, 즉 '노동자, 가난한 농민, 애국적 프티 부르주아, 그리고 정직한 지식인'의 동맹이다.
그래서 포함된 것으로부터 배제된 것을 분리하는 간극과 다른 세 가지 적대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 세 가지 적대들은 하트와 네그리가 '공통성'commons이라고 부른 우리 사회적 존재의 공유된 실체의 세 가지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의 사유화는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해서라도 저항해야 하는 폭력적인 행위이다.
- 첫째는 문화의 공통성, 직접적으로 사회화된 '지적' 자본의 형식으로, 커뮤니케이션과 교육의 수단인 언어(만약 빌 게이츠에게 독점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특정 개인이 우리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망의 소프트웨어 토대를 문자 그대로 소유하게 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질 것이다)뿐만 아니라 공공 운송이나 전자통신, 우편 등과 같은 공공 인프라도 포함된다.
- 둘째는 외부 자연의 공통성으로, 오늘날 오염과 착취로 위협받고 있다(석유에서부터 숲이나 자연 서식지 자체).
- 세번째는 내적 자연의 공통성(인간의 유전자)이다. 이들 공통성의 투쟁은 자본주의의 '인클로저' 논리가 자유롭게 진행된다면 인류 자체의 소멸로까지 전개될 수 있는 파괴적인 잠재성에 대한 각성을 공유한다. 이 '공통성'에 의거하여-사적이지도 않고 공적이지도 않은 이 생산의 실체-공산주의의 부활이 정당화된다. 그래서 공통성은 헤겔이 자신의 <정신현상학>에서 '사태'die Sache, 즉 공유된 사회적 사물-원인으로 제시한 것,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의 일', 끊임없는 주체적 생산에 의해 지속되는 실체와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안전에 대한 절망적인 추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우리가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의 공허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본주의적 혁신의 이면에는 항구적인 쓰레기 생산이 있다. '근대와 탈근대 산업 자본주의의 주된 생산물은 정확히 쓰레기이다. 우리는 탈근대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각적으로 이끌린 소비품 모두가 실제로는 쓰고 버린 것으로 귀결될 것이고, 그런 소비품들이 결국은 지구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모시키고 말 거라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비극의 감각을 상실했다. 당신들은 진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지각한다.'
표준적으로 강요된 선택 상황에서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래서 나에게 남겨진 것은 어떤 경우든 나에게 강요된 것을 마치 자유의지로 행한 것처럼 가장하는 공허한 몸짓이다. 여기서는 정반대다. 선택은 실제로 자유롭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훨씬 더 정말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우리는 우리 삶에 근본적인 영향을 줄 문제에 대해 결정해야 하지만 안정적인 지식 안에 근거해 있지 않은 위치에 던져진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잠정적인 시간 속에 던져졌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전통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떤 미래가 도래할지 거의 모른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자유로운 것처럼 살도록 강요받고 있다.'
과학적 정신은 실제로 불가능한데도 객관적인 위험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공통감각은 재앙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뒤피가 의거하는 복합 시스템 이론에 따르면 시스템은 두 가지 대립적인 특질을 지닌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특성과 극단적인 불안정한 성격을 동시에 지닌 시스템들은 특이한 문턱('임계점')까지는 어떤 교란도 흡수하여 새로운 균형과 안정을 찾을 수 있지만, 그 문턱을 넘어가면 아주 작은 교란조차 총체적인 재난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전혀 다른 질서가 수립될 수 있다. 수세기 동안 인류는 자신의 생산 활동이 환경에 가하는 충격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자연이 인간의 삼림 벌채나 석유, 석탄 사용 등을 자기 시스템 안에 통합하여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다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너무 늦은 시점이 아닌지 우리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뒤피가 지적한 것처럼, 다양한 생태학적 재앙의 위험에 대해 뭔가 해야 한다는 긴박성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위험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행동에 돌입할 것인지(만약 재앙이 안 일어난다면 그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게 될 것이다).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지(재앙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의 선택 상황. 가장 나쁜 선택은 중간자의 입장에서 제한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든 실패하게 된다. (즉 생태학적 재앙이 도래할 때는 어떤 중간적 입장의 여지도 없다. 재앙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예측이나 조심, 혹은 위험 관리란 것은 무의미하게 되기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럼즈펠드식으로 "모르는 무지"unknown unknowns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언제가 임계점이 될지 모를 분 아니라 정확히 우리가 무엇을 알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태학적 위기의 불확정적 측면은 미친 듯이 날뛸 수 있는 소위 '실재 속의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겨울인데도 너무 더울 때 식물과 동물들은 2월의 더운 날씨를 벌써 봄이 온 것으로 오해하여 그에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뒤늦은 추위의 공격에 쓰러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 재생산의 전체 리듬을 교란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르는 앎', 즉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부인된 믿음과 가정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생태주의의 경우 이런 부인된 믿음과 가정은 우리가 재앙의 가능성을 실제로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것을 '모르는 무지'와 결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시계상의 맹점blind spot처럼 기능한다. 우리는 그 간극을 보지 못하고, 그로 인해 전개된 상황은 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뒤피의 요점은 만약 우리가 (우주적, 혹은 환경적) 재난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시간성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도입해야 한다. 뒤피는 이런 시간을 '기획의 시간', 과거와 미래 사이에 닫힌 회로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미래는 과거의 우리 행위에 의해 인과적으로 산출되며, 우리의 행위 방식은 우리의 미래 예견과 그 예견에 따른 반응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앞으로 도래할 재앙에 대면하는 방법으로 뒤피가 제시한 것이다. 우리는 우선 그 재앙을 우리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운명 안으로 던져 놓고 그 견지에서 지금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추정 가능성들을 소급적으로 그 과거(미래의 과거) 속에 삽입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했었따면 지금 우리 속에 있는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뒤피의 역설적 공식이 있다. 우리는 가능성들의 차원에서 미래는 운명 지어져 있어서 재앙은 꼭 발생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이런 수용을 배경으로 우리는 운명 자체를 바꿀 행동을 조직해야 하며, 그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과거 안에 삽입해야 한다. 바디우에게 사건에 대한 충실의 시간은 전미래 시제futur anterieur이다. 자기 자신을 미래로 추월함으로써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이미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전미래 시제의 순환 전략은 대재앙(이를테면, 생태학적 재난)에 마주하여 가장 실제적인 전략이다. "미래는 아직 열려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최악의, 사태를 막을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대신 재앙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소급적으로, "별자 속에 새겨진" 우리의 숙명이 일어나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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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 모든 사람은 사건적 포기에 대해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우리는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에너지 소비량 등의 세계적인 기준을 똑같이 부과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브라질에서 중국까지의 제3세계 국가들이 급속히 성장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공유된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현재 비율로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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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강제적인 환경보호 조치를 위반한 모든 사람에 대한 무자비한 처벌. 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가혹한 제한이나 예상되는 법-위반자들에 대한 기술적인 통제까지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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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주의. 생태학적 재앙의 위험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규모 집단적인 결정을 통해 자본주의적 발전의 '자생적인' 내부 논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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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것들은 인민에 대한 신뢰로 결합되어야 한다. 대다수 인민은 이와 같은 엄정한 조치들을 지지할 것이며, 그 조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여 스스로 그 강제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쪽에 설 것이다. 우리는 평등주의-혁명적 테러의 형상들 중 하나로, 당국자들의 범죄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의 활동을 혁명적 테러와 인민에 대한 신뢰의 결합으로 단어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엔론 비리 사태 때 <타임>은 참으로 정당하게도, 금융 당국자들의 비밀을 폭로한 내부고발자를 공공의 영웅으로 찬미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6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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