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의 양면처럼 사람은 이타심과 이기심을 동시에 가지며,
이타심이 이기심을 앞서기에 세상은 유지된다.

이기심이 앞서는 소수는 다수를 착취하여 쌓아올린 부와 권력으로 그 다수를 지배한다.
지속가능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의 아름다움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이어야 한다.



[본문발췌]


서문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플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fraternite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담긴 눈물. 인류는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있다면 자유와 평등을 하나 되게 했던 프랑스 혁명 때의 그 프라테르니테fratenite, 관용의 '눈물 한 방울'이 아닌가. 나와 다른 이도 함께 품고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2019년

자신을 위한 눈물은 무력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나와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여백을 살해하라. 흰 종이는 흰고래다. 펜은 작살이다. 나는 에이하브 선장이다.


심심하다는 무위無爲다. 슴슴하다는 무미無味다. 심심할 때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 아무 맛도 없는 음식을 먹는 것. 일상으로부터 도망칠 때이다. 빈 스크린이 있기 때문에 서부 활극을 볼 수 있다. 조용한 공백 속에서 음악이 들려오듯이. 모든 의미는 여백을 살해할 때 출현한다. 여백을 죽인 죄는 크다. 짜고 매운 음식을 만든 죄는 크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마개는 금기이고 뚜껑은 통제다. 열리지 않는 뚜껑, 딸 수 없는 마개라면 브레이크에 걸려 달릴 수 없는 자동차. 제어 장치만 있는 사회, 법, 규제. 딸 수 없는 병, 열리지 않는 솥(냄비) 때문에 목이 타고 배가 고프다.


늙다와 낡다. 오래 산 사람을 늙다고 하고(늙었다고)
노인을 늙은이라고 하면 화를 내지만
오래 쓴 물건을 낡다고 한다(낡았다고).
옷은 낡아도 몸은 낡는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과 물건이 다르다는 뜻이다.
물건은 죽을 수 없다. 산 적도 없었으니까. 생명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 말 하나로 늙은이는 안심해도 좋다. / 낡은 게 아니라 늙은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로봇은 병나지 않고 고장 난다. 부서진다.
물건으론 깨지고 부서지고 바래가는 것이 아니다.
상자가 궤짝이 아니라
상자는 부서져도 상자 속의 공간은 없어지지 않는다.
당당한 살아 있는 생명체로 늙어간다.
비어 있는 것은 영원하다. 시간이 멈춘다.
바위의 이끼처럼.



나는 지금 달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다.
어둠의 바탕이 있어야 하얀 달이 뜬다.

나는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흰 바탕이 있어야 검은 글씨가 돋아난다.

달을 보려면 어둠의 바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책을 읽으려면 백지의 흰 바탕이 있어야 한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려면 밤하늘과 정반대의
바탕이 있어야 한다.
검은 별들이 반짝일 때 밤하늘의 하얀 별들이 성좌를 그린다.

지금까지 나는 그 바탕을 보지 않고 하늘의 달을 보고
종이 위의 글씨를 읽었다. 책과 하늘이 정반대라는 것도 몰랐고,
문자와 별이 거꾸로 적혀 있따는 것도 몰랐다.
지금까지 나는 의미만을 찾아다녔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의미의 바탕을 보지 못했다. 겨우겨우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의미 없는 생명의 바탕을 보게 된다. 달과 별들이 사라지는
것과 문자와 그림들이 소멸하는 것을 이제야 본다. 의미의
거미줄에서 벗어난다.



경험은 점点이다. 점과 점을 이어야 비로소 지식은 창조로 변한다.



내가 노숙자인 까닭.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위에 천장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곁에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하루의 보람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노숙자로 살아야 한다.

노숙자는 노숙자路宿者가 아니라
노숙자露宿者인 게다.
이슬을 맞으며
잠든 사람.

노숙자의 눈물은 눈물이
아닌 게다.
이슬인 게다.



모래가 다 흐르면
뒤집어 놓는다
새로운 시간이 시
작된다. 모래가
다 차면 뒤집어
놓는다. 다시 시
간이 계속된다.



나는 어렸을 때 죽음을 알았고
나는 늙었을 때 생(탄생)을 알았다.거꾸로 산 것이다.




2020년

화폐의 가치, 나를 위해 쓰는 돈이 아깝지 않듯이 너를 위해서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깃털은 흔들린다.
날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공깃돌은 흔들린다.
구르고 싶어서.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내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죽음의 조련사는 없다. 죽음은 길들일 수 없는 야수. 수식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하나의 명사 하나의 동사만 남는다. 죽음, 그리고 죽다.


'거의'라는 말이 좋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기쁨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거의' 다 왔어. 지루한 기차(완행 같은 것) 안에서 영등포역을 지날 때가 제일 즐겁고 기대감이 컸던 기억.

완성 직전. 화룡점정의 점 하나 찍기 직전의 기쁨과 짜릿함. 그
비어 있는 마지막 공간이 있을 때, 삶은 새벽별처럼 빛난다.

용은 날지 않아도 된다. 잠룡
승천하지 않는 용. 이무기
눈알이 찍히지 않은 용들의 비늘
막 바람이 일기 직전의 숲의 이파리(나무)
용의 눈을 찍지 마라.



'아! 살고 싶다. 옛날처럼' 외치다
눈물 한 방울
벌써 옛날이 되어버린 오늘 하루.

코로나만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빠르게 변한다.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누구에게나
남을 위해서 흘려줄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
얼음 속에서도 피는 기적의 꽃이
있다. 얼음꽃




2021년

오래동안 글을 쓰지 않았더니
만년필이 말라 화초에 물을 주듯
물을 뿌려 글씨를 심는다.

'쓴다'와 '심다'. 어느 것이 정말 정확한 표현인지 이상도
글씨를 쓰는 것을 (줄을 맞춰서) 모를 심는 것에 비유한 적이 있었으니까!

낙서의 장소로 가장 이상적인 곳이 뒷간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공간, 그래서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
무소유의 공간 그래서 변소 벽에는 항상 낙서가 무성하다.

사적 공간이면서도 막상 어떤 개인도
소유할 수 없는 공적 공간, 이 아이러니 속에서
탄생되는 낙서 역시 가장 은밀한 것이면서도,
공개된 벽보와 같이 노출되어 있다.

내가 낙서를 다시 계속해가야 할 이유다.



많이 아프다. 아프다는 것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가 멈추고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 우리가 그처럼 두려워하는 죽음인 게다.
고통이 고마운 까닭이다. 고통이 생명의 일부라는 상식을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게다. 고통이 죽음이라고 말이다.
아니다. 아픔은 생명의 편이다. 가장 강력한 생生의 시그널.
아직 햇빛을 보고 약간의 바람을 느끼고 그게 풀이거나 나무이거나 먼 데서 풍기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픔을 통해서다.
생명이 외로운 것이듯 아픔은 더욱 외로운 것.
고통의 무인도에서 생명의 바다를 본다.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하는 파도의 거품들.
그 많은 죽음을 본다.




죽음 앞에 서면
어떤 동사도 움직일 수 없다
어떤 명사도 제자리를 지킬 수 없다.
형용사와 부사는 갈 곳을 몰라 방황한다.

나와 너의 인칭도 구별되지 않고
단수와 복수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글 끝에 보이지 않던
종지부 마침표의 점만이 검은 태양처럼 떠오른다.
두 문자로 시작되었던 낱말들을 태양의 흑점이 삼켜버린다.



신문 없는 날이 좋더라.
새 소식이 없으니
새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신문에도 얼굴이 있어서
면面이라고 부르는데.
아침마다 그 얼굴을 안 보니
잃어버렸던 얼魂이 보이더라.

신문 없는 날은 좋더라.
아무 일도 없으니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그리고 문화마저도 보이지 않으니

하늘이 보이더라.
땅이 없으니
별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해가 떠오르더라.




2022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시간의 덫에 걸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데자뷰라는 현상 속에서 사막에서 혹은
깊은 숲속에서 헤매는 사람처럼 수천 번을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중입니다.

반복의 지루함을 아시지요, 하나님. 시시포스의 형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응징의 법은 바로 반복이었습니다.
이 지겨운 반복의 덫에서,
시간이ㅡ 덫에서 지금 나는 천만 번이나
수억겁 년을 반복할지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
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든가?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지상에는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
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
죽음이 죽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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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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