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예측’은 신, 자연의 영역이었다. 샤먼에 의해 신탁, 복점, 예언을 받거나 자연과 사회의 이치를 헤아려 해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해 보는 것이다.
빅 데이터의 시대, 초고속, 초고용량, 초저지연성과 초연결성을 앞세운 5G 시대에 “예측”은 과학기술의 영역이 되었고, 기술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超’ 시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 그리고 생각 너머 자연과 우주의 한계는 아직 그 끝을 모르고,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은 목표에 대해서는 사람의 의사결정을 필요로 하고 때로는 신이나 자연의 섭리에 맡기기도 한다.
우리는 괴테가 파우스트의 입을 빌어 했던 말, “사람들이 흔히 똑똑하다고 불리는 것은 옹졸함이나 허영심인 경우가 많답니다. 겸손과 겸양은 자애롭게 베푸는 자연의 최고의 선물...”에 담긴 겸손함으로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앞에 서면 뭐가 되었든 그 사람보다 앞서고 싶어하지요. 그런 식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살다가, 어느 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사이에도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늘 군림하며 내가 처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게 됩니다.” - 다니엘 코엔, <기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가>
“명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로봇이나 컴퓨터가 우리 인간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단순히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 최종 완제품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할 때는 인간이 필요합니다.” - 다니엘 코엔, <기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가>
“미국의 엘리트들은 사회 불평등에 관심을 갖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정작 계급에 대한 이해는 낮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이유는 본인이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믿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그들이 진정 계급 문제를 이해하려면, 본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3루에 서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3루타를 쳐서 3루까지 달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고, 따라서 날 때부터 타석에 서보지도 못한 사람에 비하면 홈베이스를 밟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말이죠.” - 조앤 윌리엄스,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과학 기술의 발전과 산업화로 과거 어느 시대보다 편리함과 풍요의 세계에 살고 정보통신 기술의 혜택으로 손가락 하나로 원하는 지식을 얻는다. 과거에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얻어야 했다면, 현재는 많은 것들이 전문화, 분업화 되면서 서로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 삶의 가치와 모습도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한 삶의 모델을 닮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지는 않은지?
각자 스스로 삶의 가치와 방향, 삶의 모습을 정하고 주체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 생각이 필요하다.
많은 것들을 외부에 의존하더라도 생각마저 외부에 아웃소싱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생각하는 삶을 위해 생각의 은유, 원리, 문장, 수, 그리고 수사라는 생각의 도구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되어왔고,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이 읽어보면 좋을 만한 책이다.
본문의 내용 중 와 닿는 글 귀들을 발췌해 옮겨 적는다.
모든 생물은 범주화해야 한다. 심지어 아메바도 자기와 마주치는 것들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또는 다가가야 할 대상과 멀리 떨어져야 할 대상으로 범주화한다. 아메바는 범주화의 여부를 선택할 수 없으며 단지 범주화할 뿐이다. 이것이 동물계의 모든 층위에 적용된다. 동물들은 음식, 약탈자, 가능한 짝, 자신들에 소속된 동물 등을 범주화한다. 동물들이 범주화하는 방식은 자신들의 감각기관과 이동능력 및 대상 조작능력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범주화는 우리가 신체화되어 있는 방식의 한 결과다. 우리는 범주화하도록 진화되어왔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조지 레이코프, 마크 존슨, <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저자인 질 포코니에와 마크 터너 같은 인지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컴퓨터에게 지각적 범주화를 하게 하는 일(컴퓨터공학자들은 이 작업을 패턴인식이라고 한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왜 1세 남짓한 아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컴퓨터로는 하기 어렵다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컴퓨터는 범주화의 기준을 유사성similarity이 아니라 동일성sameness으로 삼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오늘날 이미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능력으로 부각되고 있고, 앞으로 점점 더 막강한 권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육에서 창의성이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서로 다른 사물이나 사건들의 유사성(동일성이 아니다!)을 재빨리 간파하는 능력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 다른 무엇보다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따라서 학습을 통해 은유라는 생각의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도록 하는 일은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하다.
아이들이 만드는 은유는 때로는 천재적이고 또 때로는 부적절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은 정말이지 쉴 새 없이 개념들을 연결하고 섞어 은유를 만들어 말하거나 논다. ... 그러다 6세 이후부터 학교에 다니면서 점차 부적절하거나 불합리한 은유를 순화해가는데, 그러면서 은유의 사용도 함께 줄어든다. 왜 그럴까? 그 주된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은유능력이 점차 떨어진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유사성이 아니라 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에 의해 아이들이 점차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고 단지 검색엔진을 돌려 찾아낸 정보와 지식에 의존해 살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게 어때서?'라고 물을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정보와 지식은 어디서든 전송 받을 수 있지만, 진실과 지혜는 아무 데서도 전송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정보와 지식은 검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매 순간, 현장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드러나는 진실과 지혜이고, 우리 사회에 필히 요구되는 것은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의 손에 든 뇌가 아니라, 오직 머리 안에 든 뇌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은 이제, 학자, 전문가, 지도자들이 만들어서 도서관, 강의실, 영화관, 음악당에 쌓아놓은 정보와 지식들을 손에 든 뇌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그리고 머릿속에 든 뇌에는 그것들을 꺼내어 새로운 전망과 판단, 그리고 이에 합당한 지식을 만들어낼 생각의 도구들을 넣어가지고 다니면 된다. 본문에서 살펴본 은유, 원리, 문장, 수, 그리고 수사를 말이다. 이것들은 부드럽고 유연하고 포용적이고 설득적이다. 또 유능하고 창조적이다.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소박하게 먹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삶의 목적을 알고, 가족 이웃들과 교감하며 사는 것. 작고, 단순한 삶. 유연하고 여유 있게 삶 자체를 즐기는 것.
발리 우붓 시장을 지나다가 본 장식품에 적힌 “Karma”가 무엇인지에 대한 글을 실천하며 사는 것.
Karma!
Think good thoughts,
Say nice things,
Do good for others,
Everything comes back.
본문의 내용 중 와 닿는 글 귀들을 발췌해 옮겨 적는다.
감수성이 필요한 시대라고 여기저기 말한다. 그렇다. 나를 깨우고 사회를 사랑으로 연결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감수성이다.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람에 대한 사랑, 고통, 선함, 사랑, 이 모든 것들에게 편견 없는 공감이 필요한 시대이다. 감수성을 회복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에 대한 성찰과 확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감각의 기를 살려 놓아야 한다. 감각의 회복은 일상에서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한다. 사색의 시대는 가고 검색의 시대가 왔다고 걱정한다. 그만큼 우리의 눈은 많은 시간을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으며 손은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바쁘다. 하늘, 구름, 별, 산, 꽃, 물소리, 바람소리, 흙을 멀리한 채 텔레비전과 인터넷, 스마트폰에 오감을 맡기고 있다. 이것들은 표정과 온기가 없다. 표정과 온기 없는 것들을 대하는 우리의 감각은 지극히 건조하다. 소통과 교감이 일어날 수 없다.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청춘들은 오로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앞'과 '위'만을 바라볼 뿐, 우정과 사랑과 진리를 나누기 위하여 '옆'과 '뒤'를 보지 않는다. 학생들의 봉사활동도 사람에 봉사하는 삶의 실천이 아니다. 봉사조차도 입시와 취업을 위한 경력 쌓기의 수단이 되었다. 전제와 원칙, 방향과 과정이 바로 서지 못한 교육의 현실은 인간을 자본의 그물망에 희생시킨다. 또 자본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고 감정을 빼앗아 버린다. 우리 시대 청춘들이 공부하고 일하는 목적이 오직 좋은 정규직을 얻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만약 평생 사람의 꿈을 직업의 이름에 묶어 두려 한다면, 그리고 명사로만 꿈을 묶어 버리는 자본의 음모에 대한 비판 없이 살게 되다면 상생하는 행복의 활로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꿈은 끊임없이 꾸는 것이다. 꾼다고 하는 것은 동사이고 형용사이고 부사이다. 그러므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공부와 일과 삶에 아름답고 굳세고 지혜로운 형용사와 부사를 달아 주자. 그래서 우리 삶에서 꿈이 형용사와 부사의 날개를 달고 인간의 성취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은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주체이다. 주체적인 생명은 남의 삶을 엿보거나 자기 삶을 헛되게 소비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찾아 자기만의 느낌과 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명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꿈꾸고 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접하는 행복의 담론은 거의 모두가 성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공의 척도는 '부자가 되는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하고 고액 연봉을 주는 직장에 취업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이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명문 대학에 입학할 수 있고 그 바탕으로 '가문의 영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국가는 늘 경제대국을 외치며 경제 발전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매진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높은 지위, 많은 돈, 좋은 직장, 드높은 명예 등 이른바 성공의 조건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을까. 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이다. 왜 그런가. 행복하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진실로 행복하다면 이런 것들이 결코 불행의 재료가 될 수 없으며, 거부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이런 것들이 충족되어 있어도 내가 진실로 행복하지 않다면, 이런 것들은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절대적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도 뱅갈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집과 돈과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당신이 이미 행복하다면 그것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듯 행복은 객관적 환경과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행복은 지금, 여기서, 내가, 마음으로, 의미로 구성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달리 말해서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나는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상을 꿈꾸어야 하고 그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 이상은 개인과 사회가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행복의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 과욕에서 소욕지족으로, 경쟁과 상극에서 협동과 상생으로, 획일과 차별에서 평등과 개성으로, 목표와 욕망에서 의미와 나눔으로, 그리하여 동상이몽이 아닌 동몽이상의 화엄세계를 꿈꾸고 실현해야 한다. 이처럼 모두가 긴장과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향 전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현실'이다.
모든 것은 그것 하나로 서 있지 않다. 나무가 산에 의지하여 있고, 산은 나무에 의지하여 있다. 산과 나무는 바람과 햇볕, 물과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것 하나만 살고자 하면 하나도 온전하게 살 수 없다. 내 곁의 것들이 건강하게 살아야 내가 살 수 있다. 자연의 생태계가 그러하듯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생태계 또한 그러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회 생태계의 그물망이 서로 건강해야 인간 개개인의 마음이 청정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산과 빌딩, 자동차와 새 소리, 사람 소리와 물소리, 산바람과 매연, 한적함과 번잡함에 대해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연민과 사랑을 갖겠노라 다짐한다.... 무엇이 있어도 있는 경우가 있고, 무엇이 있어도 없는 경우가 있다. 마음을 열고 눈을 열고 귀를 열면 바로 그 앞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까닭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무의미하고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느끼며' 사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크고 비싼 집과 재물을 갖고 있고,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살아간다 해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느낌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한 송이 꽃과 바람소리, 물소리에 아름다움에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절로 내 가슴에 아픔이 느껴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소박한 음식 앞에서 맛을 느끼는 사람이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서로 만나 웃고 이야기 하며 사랑과 우정의 느낌을 함께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다.
사회와 사람을,다른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또 글을 읽는다.우리의 현재는 보고,듣고,읽을 정보와 영상,책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제대로 이해되고 글과 말로 생각을 공유하고 전달하고 있는가,그리고 그 표현으로 누군가가 상처 받지는 않는지 생각하며 말하고 써야 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 <보다> 중에서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 작가의 말
“분명히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뭔가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뭔가를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미로와 타인이 경험한 미로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부모가 준 사랑을 계량화해서 자식이 되갚을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도운 경험이 똑같은 형태로 내게 돌아오지도 않습니다.” - <읽다> 중에서
“어른들의 바람은 늘 대학만 들어가라, 졸업만 해라, 결혼만 해라, 아이만 낳아라, 그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지만 아무 조건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 <말하다> 중에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납득시키고 그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이 결국에 가서 죽고 그것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 Max Planck, <과학적 자서전(Scientific Autobiography)>
‘과학의 발전은 직선적인 것이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것은 덜 좋은 것에서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의 변화이다. 과학의 발전은 세상에 대한 절대적 진리를 향해서 누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단절적인 변화를 연속적으로 겪는다. 이는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진화론과 유비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치 하나의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진화가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가 아니듯이, 과학의 발전도 궁극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 역자해설
진리는 완벽한 것이 아니다. 진보도 완벽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다. 그 길에는 실패와 좌절, 혼동과 무질서가 난무할지도 모른다. 삥 둘러 돌아가기도 하고 멈춰서기도 하지만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안다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바뀐다'는 뜻이다." - 에마뉘엘 레비나스, 타자의 얼굴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지식과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이 수월해 지는 반면, 무엇을 아는지 또는 모르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아는 것은 어려워 진다.
"환경에 더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자연도태의 메커니즘에 가장 중요한 열쇠는 '적응력의 차이는 돌연변이에 의해 우발적으로 생겨난다'는 점이다. 돌연변이라는 비예정조화적인 변화가 적응력의 차이를 생성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길다. 이 사고방식은 일종의 에러가 일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에러'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는 배제하려 한다. 하지만 자연도태의 메커니즘엔느 에러가 필수 요소로 내재되어 있다. 무언가 긍정적인 에러가 발생함으로써 시스템의 성과가 향상되기 때문이다." -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에러가 당장은 실패일지라도, 진보와 성장, 창조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에 의해서만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다면 어휘력을 길러야 한다." - 페르디낭 드 소쉬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무엇을 알고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남에게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를 설득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 줌으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자가 멸종하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여 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질 때에 비로소 승리한다." - 막스 플랑크 <과학적 자서전(Scientific Autobiography)> 진보와 혁신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로서의 사물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지만, 엄하게 등급이 매겨진 기호 및 차이로서의 사물 앞에서는 전혀 평등하지 않다. 소비는 더 이상 사물의 기능적 사용 및 소요 등이 아니다.… 소비는 더 이상 개인이나 집단의 단순한 위세과시의 기능이 아니다. 소비는 커뮤니케이션 및 교환의 체계로서, 끊임없이 보내고 받아들이고 재생되는 기호의 코드로서, 즉 언어활동으로서 정의된다.” - 본문 발췌
지금의 소비생활은 기본적 생존에 필요한 소비보다 자신의 개성을 돋보이기 위한 소비가 더 크고, 점점 늘어난다.
하지만 개성을 돋보이기 보다는 몇 개의 선택된 모델로 수렴하며 개성을 잃어버리는 모순 속에서 자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난 그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움 그대로가 가장 개성 있는 존재이다.
사용가치 이외의 소비, 기업 또는 개인의 부의 축적, 엄밀히 말해 기호로서 존재하는 돈의 축적은 결국 자연과 환경의 파괴로 얻어진다. 필요에 의한 자연순환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다.
아베와 그 패거리들은 그들의 주장과 행동이 옳다고 말하기 전에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를 되새겨보길 바란다, "어떤 의견이 어떠한 반론에도 논박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와, 애초에 비판을 허용하지 않을 목적으로 미리 옳다고 상정되는 경우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고 자유를 완전히 인정해 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견이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서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전지전능하지 못한 인간은 이것 외의 방법으로는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있는 합리적인 보증을 얻을 수 없다."
더불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일본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한나 아렌트의 이 말을 기억하시길,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는 일이란 일상의 습관 때문에 더 어려워진다. 자기가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는 길들에서만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에 흔히들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데 그토록 힘이 드는 법이다." - 본문 중
<백년의 고독>은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인 상황에서 '삶이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인 진정한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물, 즉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타파하기 위한 지난한 시도인 것이다. - <작품해설: 마꼰도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 대한 탐구>
긴 문장이 많지만 어렵지 않게 읽히는데 문장 속에 어떤 힘이 읽어나가는 속도를 잡는 듯 읽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일상의 습관, 삶의 부딪히는 일들에 대해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로 인해 우리는 길을 잃고, 자유를 잃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든다. 매일 오가는 출근길을 다른 방법, 다른 길을 가보듯이 일상을 벗어나 보고, 자기다움을 찾고, 자신만의 생각의 틀로 세상을 해석해보면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 본문 발췌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있지 않나요? 바로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고 싶은 게 있고, 지금 당장 해 볼 수 있다면 시작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鼓手)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떄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든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천성에 맞는 여러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대신 끌어다댈 수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애를 써서 머리 위에 청색 유리로 된 하늘을 만들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분명 그런 것은 없다는 듯이 그 훨씬 너머로 정기에 가득 찬 진짜 하늘을 바라볼 것인데." - 본문 발췌
우리는 생김새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가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원하는, 사회가 원하는 삶이 가치있는 삶일까요?
자기다움을 찾고 스스로 만족하며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단순하고 작은 삶, 소박하게 먹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삶의 목적을 알고, 가족 이웃들과 교감하며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지금 당장, 하루하루 가슴 설레이는 일들을 만들어 가는 삶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