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중 잠깐의 걷기를 통해 여유를 느끼거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는데 탈것을 이용한 이동에서는 그 속도감 때문인지 걷기에 비해 풍경을 제대로 바라보고 느끼거나 사유의 시간을 가지기 어렵다.
섬의 어느 길 끝에 펼쳐지는 나무와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다른 섬과 하늘의 풍경!
봄이면 찾곤 했던 사량도 섬산행길 추억을 떠올리는 강제윤 작가의 <섬을 걷다>
[본문발췌]
삶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누구도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삶의 판관일 수 없다. 어제는 어제의 삶을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산다. 너는 너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늘 삶에 대해 서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실수투성이인 것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 또한 처음 살아보는 삶이 아닌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변치 않는 진리일 것이다. 눈에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거기 담겨있는 진실일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움일 것이다.- 발문, 그리하여 아름다운 섦들의 풍경, 박남준(시인)
여행자들은 들떠 있으나 그들은 차분하다. 여행자들이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그들은 지루함에 눈을 감거나 부족한 잠을 청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바다 풍경도 익숙해지면 일상이다. 풍경이 주는 감동의 대부분은 낯설음에 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 한자 길道 자는 辶(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은 "辶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나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도시의 길들은 자동차와 온갖 장애물의 위협으로 인해 더 이상 생각에 몰두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이 길들은 오로지 통로로만 기능할 뿐이다. 이런 오솔길, 흙길,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아닐까. 나는 많은 길들이 '사유의 확장' 기능을 되찾을 때, 이 소란하고 얕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더 깊고 고요해질 것을 믿는다.
실상 삶에는 방향 표지석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삶은 정해진 방향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그저 주어진 삶은 없다. 어디에서도 삶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삶일 뿐이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시작되고, 아침이 와도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달력이 바뀐다고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 아닐까. 그래서 한 해의 첫날 찬바람 속을 걷는 의미는 각별하다. 오늘은 섬의 동쪽으로 간다.
대개 섬에서 사람 사는 마을의 뒤편은 공동묘지다. 볕이 잘 드는 봉분 근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사람은 죽음의 뒷마당에서도 삶의 앞뜰을 생각한다. 죽음 곁에서도 삶은 따뜻하다! 어떠한 삶도 양면이다. 슬픔의 뒷면은 기쁨이고, 상처의 뒷면은 치유다. 실연의 뒷면은 사랑이고, 절망의 뒷면은 희망이다. 어둠의 뒷면은 빛이다.
또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뿐. 그대들은 샘이 가득 찼을 때에도 목마름을 채울 길 없어 목마름을 두려워하진 않는가? - 칼릴 지브란
나누지 못하는 것의 근원은 소유욕이 아니다. 불안이다. 모자랄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다 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않고 자꾸 쌓아 두려 한다.나 또한 그러하다. 배낭 하나 메고 떠도는 삶이지만 나날이 배낭은 무거워진다.
진정한 나눔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쓰고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
돈을 더 많이 번다고 해서 삶에 대한 불안이 줄지는 않는다. 가득 채우고도 늘 모자랄까 두려워한다. 만족을 모르는 삶은 도시와 농어촌이 다르지 않다. 본디 일이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만드는 사회는 사악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국가는, 자본은 개인이 필요보다 더 많이 일하도록 끊임없이 선동한다. 개인에게는 온갖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면서도 개인의 삶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교육, 의료, 노후까지도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사회. 그러니 소득이 늘어도 개인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개인의 불안은 사회의 불안을 잉태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국가 안보와 체제 불안을 조장하는 가장 큰 반국가 세력은 자본과 국가 자신이다!
나는 인간은 '동물' 이라는 사실에 더 주목한다. 다시 말하자면 움직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 이일훈, <모형 속을 걷다>
신들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은 신들의 힘이 아니다. 신을 믿는 자들의 믿음의 깊이다.
옛날 어선들은 눈으로 가늠해 가며 그물을 던졌으나 이제는 어군탐지기로 물고기들이 지나는 길목을 정확히 찾아내 그물질을 하니 치어까지 싹쓸이되고 만다. 어로 기술의 발달이 단기적으로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다의 파국을 앞당기는 독이 된 것이다. 수만 년, 누대에 걸쳐서 나눠 써야 할 자원을 단기간에 고갈시켜 버리는 과학 기술. 인간이 이룬 과학 기술의 발달을 인간이 통제할 수 없게 될 때 과학 기술은 더 이상 인류에게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사물은 객관적이지만 풍경은 주관적이다. 풍경은 속도에 종속된다. 걷는 속도, 탈것의 속도, 바람과 안개와 구름의 속도, 마음의 속도에 지배된다.같은 풍경을 보고 와서도 그려 내는 풍경이 사람마다 제각각인 것은 사물을 관찰할 때의 속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가 놓치는 풍경을 걷기의 속도는 포획해 낸다.
사람의 마음이 늘 무겁거나 가볍기만 하겠는가. 무겁기가만 하다면 가라앉아 버릴 것이고 가볍기만 하다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추가 있기 때문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균형을 잡아 주는 균형추. 마냥 마음의 오고감에 휘둘리며 살 이유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으면. - 버나드 쇼, <존 불의 또 하나의 섬>
역사적으로 폭력 감소의 원인/요소 중 하나로 여성의 이해와 가치를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하는 "여성화"를 이야기하며 "여자와의 결혼이 젊은 남자를 문명화시킨다"는 생각은 진부하고 입에 발린 말로 느껴지지만, 현대 범죄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란다.
[본문발췌]
여섯 가지 경향성
첫 번째 변화는 수천 년의 규모로 벌어졌다. 인류 진화 역사에서 대부분을 차지했던 무정부적 수렵, 채집, 원예 농업(horticulture) 사회들이 약 5000년 전부터 도시와 정부를 갖춘 최초의 농업 문명으로 전이한 사건이다. 이와 더불어 과거 자연 상태의 삶을 특정지었던 만성적 습격(raid)와 혈수(feud)가 줄었고, 폭력적 사망의 비율이 5분의 1로 줄었다. 나는 이런 평화의 부여를 평화화 과정(Pacification Process)이라고 부르겠다.
두 번째 변화는 500여 년에 걸친 과정으로, 유럽에서 제일 잘 기록되었다. 중세 후기부터 20세기까지 유럽 국가들의 살인율은 과거의 10분의 1에서 50분의 1 사이로 낮아졌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고전 <문명화 과정>에서 이 놀라운 감소는 조각조각 나뉘었던 봉건 영토들이 중앙 권력과 상업 하부 구조를 갖춘 큰 왕국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엘리아스에게 동의하는 의미에서 이 경향성을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이라고 부르겠다.
세 번째 변화는 수백 년의 규모로 펼쳐졌고, 17세기와 18세기 이성의 시대 및 유럽 계몽 시대에 시작되었다(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세계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선례들이 있기는 했다.). 전제 정치, 노예제, 결투, 사법적 고문, 미신적 살해, 가학적 처벌, 동물에 대한 잔학 행위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된 폭력을 철폐하려는 조직적 움직임이 이때 처음 등장했고, 체계적인 평화주의도 이때 처음 움텄다. 역사학자들은 이 변화를 인도주의 혁명(Humanitarian Revolution)이라고 부르곤 한다.
네 번째 주요한 변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벌어졌다. 이후 50~60년 동안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목격했다. 강대국들과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축북 받은 정세를 긴 평화(Long Peace)라고 부른다.
다섯 번째 경향성도 전투에 관한 것이지만, 좀 더 작은 차원이다. 오늘날 뉴스 독자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냉전이 끝난 1989년 이래 모든 종류의 조직적 충돌이 - 내전, 집단 살해, 독재 정부의 억압, 테러 - 세계적으로 감소했다. 나는 이 다행스러운 변화의 임시성을 인식하는 의미에서 이것을 새로운 평화(New Peace)라고 부르겠다.
마지막으로, 1948년 세계 인권 선언 발기로 상징되는 전후 시대에는 더 작은 규모의 공격성, 이를테면 소수 집단, 여성, 아이, 동성애자, 동물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5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은 일련의 운동들을 통해서 인권 개념으로부터 파생된 이런 권리를 -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 옹호해 왔다. 나는 이것을 권리 혁명(Rights Revolutions)이라고 부르겠다.
다섯 가지 내면의 악마, 이른바 폭력의 내적 압력 이론을 암묵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내면에는 공격성을 지향하는 추동이 있고 (죽음의 본능 혹은 피에 대한 갈증), 그것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간간이 방출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밝혀낸 폭력의 심리는 이와는 딴판이다. 공격성은 단일한 동기가 아니고, 하물며 점증하는 욕구는 더 아니다. 공격성은 환경적 유발 기제, 내부적 논리, 신경 생물학적 바탕, 사회적 분포가 서로 다른 여러 심리 체계들의 결과물이다. 나는 8장에서 그중 다섯 종류를 설명하겠다. 포식적(predatory) 혹은 도구적(instrumental) 폭력은 단순히 목적에 대한 실용적 수단으로서 동원된 폭력이다. 우세(dominance) 경쟁은 권위, 위세, 명예, 힘의 욕구로서, 개인 간의 마초적 허세로 드러날 수도 있고 인종, 민족, 종교, 국가 집단 간의 패권 경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복수심(revenge)은 보복, 처벌,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주의적 욕구를 부채질한다. 가학성(sadism)은 타인의 괴로움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ideology)는 공유된 신념 체계를 말한다. 보통 유토피아적 전망을 품고 있고, 무제한의 행복(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제한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네 가지 선한 천사,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지는 않지만(선천적으로 악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으로부터 멀어져 협동과 이타성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동기들을 갖고 태어난다. 감정 이입(empathy)은 (특히 공감적 염려라는 의미에서) 우리로 하여금 남들의 고통을 느끼게 하고, 그들의 이해와 우리의 이해를 연결 짓도록 만든다. 자기 통제(self-control)는 충동적 행동의 결과를 예상하게 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절제하도록 만든다. 도덕적 감각(moral sense)은 같은 문화 속 구성원들의 상호 작용을 다스리는 일군의 규범과 터부(금기)를 규정하는데, 그래서 폭력이 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늘 때도 있다(부족적, 권위적, 청교도적 규범일 때). 이성(reason)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반성하게 하며, 더 나아질 방법을 찾게 한다. 그리고 본성의 다른 선한 천사들을 활용할 때 길잡이가 되어 준다. 나는 9장의 한 절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최근 역사가 말 그대로 덜 폭력적인 방향으로 진화했을 가능성, 즉 게놈의 변화라는 생물학적 의미에서 실제로 진화했을 가능성을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환경 변화에 맞춰져 있음을 명심하자. 이 책은 과거의 환경 변화들이 인간의 고정된 본성을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용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섯 가지 역사적 힘, 어떤 외생적 힘들이 인간 내명의 온화한 동기들을 선호함으로써 폭력을 다각적으로 감소시켜 왔는지 살펴보겠다. 이것은 심리학과 역사를 합치는 작업이다. 리바이어던(Leviathan), 즉 힘의 적법한 사용을 독점하는 국가와 사법 제도는 착취적 공격의 유혹을 줄이고, 복수의 충동을 억제한다. 또한 리바이어던은 각자 자기야말로 천사의 편이라고 믿는 이해관계자들의 자기 위주 편향을 피할 수 있다. 상업(commerce)은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포지티브섬 게임이다. 우리가 기술 발전 덕분에 더 많은 교역 상대와 더 멀리까지 물건과 생각을 교환하게 되면, 상대가 죽었을 때보다 살았을 때 내게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타인을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여성화(feminization)는 여성의 이해와 가치를 좀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문화가 변한 것을 말한다. 폭력은 대체로 남성의 오락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힘을 실어 주는 문화는 폭력의 미화에서 쉽게 벗어나며,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젊은 남성들의 위험한 하위문화를 덜 양성한다. 세계주의(cosmopolitanism)의 세력들, 가령 문해 능력, 이동성, 매스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시점을 취해 보게끔 하고, 그런 사람들까지도 공감의 대상으로 아우르도록 공감의 범위를 넓혔다. 마지막으로 인간사에 지식과 합리성을 더 많이 적용하는 능력은 - 이성의 에스컬레이터(escalator of reason) - 폭력의 순환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하고, 자신의 이해를 타인의 이해에 앞세우는 행위를 줄이고, 폭력의 개념을 재구성함으로써 폭력을 경쟁에서 승리해야 할 행위라기보다는 해소해야 할 숙제로 보게 한다.
여행이 우리의 정신을 넓히는 것처럼, 우리의 문화적 유산을 있는 그대로 둘러보는 것은 옛 사람들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싸움(quarrel)은 세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 둘재는 불신(diffidence), 셋째는 영광(glory)이다. 첫째는 이득을 노려 침입하는 것이고, 둘째는 안전을, 셋째는 평판을 노린다. 첫째는 남에게 딸린 일꾼, 아내, 아이, 가축을 자신이 갖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다. 둘째는 그것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다. 셋째는 말, 웃음, 다른 의견, 기타 자신에게 직접 가해졌거나 친척, 친구, 나라, 직업, 이름에 간접적으로 가해진 멸시의 신호 따위 사소한 것 때문에 폭력을 쓰는 것이다.
홉스는 인간에게 특히 세 가지 분쟁(싸움)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득(포식적 습격), 안전(선제적 습격), 신뢰성 있는 억제(평판/보복적 습격)를 추구하기 위해서. 비국가 사회 사람들도 이 셋 모두를 놓고 싸웠다.
모든 폭력 연구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한 가지 현상은 대부분의 폭력을 15~30세 사이의 남자들이 저지른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포유류에서 수컷이 암컷보다 더 경쟁적이다. 게다가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에는 남자가 위계 서열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평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평판은 성인기 초기부터 투자해야 얻을 수 있고 그 후에는 그 보상을 평생 누릴 수 있다. 남자들의 폭력성은 그 정도가 연속적 눈금으로 조절된다. 한쪽 극단은 남자들이 여자를 놓고 서로 겨루는 것이고, 반대쪽 극단은 남자들이 여자에게 직접 구애하고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사이의 연속성 상에서 한 지점을 선택하여 자신의 에너지를 할당할 수 있다. 생물학자들은 가끔 이 연속선을 가리켜 '난봉꾼이냐 아버지냐(cads vs. dads)'라고 부른다. ... 여자와의 결혼이 젊은 남자를 문명화시킨다는 생각은 진부하고 입에 발린 말로 느껴지지만, 현대 범죄학에서는 당연한 상식이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자발성과 개인성의 징후를 모조리 찍어 눌러야만 스스로를 문명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미 비폭력의 규범이 공고해졌기 때문에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일부 금지들은 오히려 어겨도 괜찮다.
문명화된 인간은 미개인보다 더 무례하다. 버릇없이 굴어도 머리통이 쪼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소설가 로버트 하워드
우세 경쟁에서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쟁점은 정보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세는 포식과 구별된다. 우세 경쟁도 치명적 충돌로 격화할 수는 있다. 경쟁자들이 막상막하이고 서로 긍정적 착각에 물들었다면 더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세 경쟁은 과시 행동으로 마무리된다.(인간도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양측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무기를 휘두르고, 서로 벼량 끝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다가 한쪽이 꼬리를 내리면 끝이 난다. 대조적으로 포식에서는 끝내 욕망의 대상을 얻는 것만이 목표이다.
사법 체계는 비싸고, 비효율적이고, 피해자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가해자를 강제로 투옥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폭력적이다. 요즘 많은 공동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때로는 형사 재판을 보완하고, 때로는 아예 대체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조정자 앞에 나란히 앉는데, 가족과 친구가 동행할 때도 있다. 조정자는 피해자에게 괴로움과 분노를 표현할 기회를 주고, 가해자에게는 진심 어린 회한과 피해 보상을 전달할 기회를 준다. 흡사 대낮에 방송되는 진부한 텔레비전 방송처럼 들리지만, 이런 자리는 최소한 진심으로 뉘우치는 가해자에게는 바른 길로 들어설 기회를 주고 피해자를 만족시킴으로써, 너무나 느릿느릿한 사법 체계로 분쟁을 가져가지 않아도되도록 해준다.
비극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해결책이 있고, 체홉의 해결책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결말에서는 무대에 시체들이 나뒹굴고, 아마도 저 높은 곳 어딘가에 정의가 어른거릴 것이다. 반면에 체홉의 비극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환멸을 느끼고, 씁쓸해지고, 상심하고, 실망하고, 철저히 망가진 상태로 끝나지만, 여전히 모두가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셰익스피어식이 아니라 체홉식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 아모스 오즈
인생에는 구속을 벗어나 제 멋대로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점에서, 이성은 우리에게 그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타인이 제 멋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때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