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을 짓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 미디어나 주변에서 관련된 것들에 관심을 갖고 보게 되는데 내가 보는 것은 결국 외양과 재료에 집중했다.
집을 지으며 집짓는 기술이나 방법, 재료보다 나는 그 집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따라 공간구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소통 이야기....
[본문발췌]
집을 지으며 집 짓는 기술이나 방법을 먼저 택하는 게 아니라 살기의 방식을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짓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먼저 묻는 게 건축이라고 여긴다.
건축은 꿈도 상상도 희망도 현실도 모두모두 구체적 재료와 물리적 구현으로 현시되는 탓에 적지 않은 장애가 현장에서 따릅니다. 조율 중에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건축물을 볼 때 '형태와 재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에 대해 모두 깊게 아쉬워하고 있더군요. 실제 그 건축물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게 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고 모양에 더 많이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안타까웠겠지요. - <건축이란 무엇인가>
집은 삶의 그릇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종합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처음 건축을 볼 때는 기하학 외형이 세련된 건축물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건축물 안에 이런저런 계기로 해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겉보기에 세련되고 여러 기획이 보이지만,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고단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사람 몸에 편하지 않으면 보기 좋은 게 쓸모없구나 생각했지요. 두 번째 단계에서는 몸에 좋은 집을 우선으로 하게 되었지요. 세련된 기하 구성보다는 보기에 적당히 무난하고 몸에 편하면 그게 더 좋다고 여겼지요. 황토에 깊게 마음을 준 때였지요. 그런데 이때도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집 공간이 구성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요. 세 번째 단계에서는 사는 사람의 생활양식에 어울리도록 공간이 구성된 집이 좋은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형태와 소재만 보던 지난 시기를 지나서, 그 집에 사는 사람과 집의 구성이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늘 꼭 같은데 한 해를 마무리 한다는 것 때문에 세상 분위기가 그리 물드는 것이겠지요. 몇 년 전 밀레니움이니 즈믄이니 해서 요란을 떨 때도 그랬습니다. 마치 세상이 새천년이 오면 크게 바뀔 듯이 호들갑이더니 결국 세상은 그냥 그대로입니다. 물은 얼면 얼음이 되고 또 더워지면 증기가 되고, 다른 힘이 가해지면 소용돌이가 되기도 합니다. 물질의 바탕은 변하지 않는데 형상이나 작용만 달라집니다. 시간 또한 그리 인식됩니다. 공간 또한 그러합니다. 공간 스스로는 아무것도 표현하지/되지 않습니다. 사용 목적, 입체적 크기, 시간, 빛, 재료 등이 연관되어야 공간은 특정의지를 드러냅니다.
최소주의, 미니멀리즘 건축이 추구한 바가 장식 없애기여서 저는 처음에 그 운동이 검소한 정신과 닿아 있지 않을까 했는데, 르 꼬르뷔제나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가은 초기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지은 집들이 엄청나게 비싸게 지은 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 그게 아니었구나 했습니다. '검소한 정신',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미학적 관점에서 따지는 일이지 경제적 가치를 살피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문양과 장식이 아니라, 평평한 판과 매끈한 기둥으로 간단해 보이는 집을 짓는 데 비싸게 드는 일은, 화려한 꾸밈말로 길게 쓰지 않고 짧고 매끈한 군더더기 없어 간단해보이는 글을 더 큰 노동력을 들여 쓰는 일과 닮았습니다.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일은 땅과 땀이 섞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서둘러서 되지 않고 급하다고 되지 않는 그야말로 스스로 완성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땅과 관계되는 모든 일은 땀이 필요합니다. 농사, 토목, 건축, 광업, 목축, 임업 등이 그러합니다. 땀이 필요한 일에 괴만 부리면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모든 공간은 사연이다. 사연을 알면 알수록 이해하게 되는데 공간과 장소도 다 사연이 있지요. 그러고 보니 공간은 사연이요 기억인 것 아닐런지요. 장소도 결국 마음소에 기억으로 존재하지요. 다시 찾는 장소는 기억을 따라 몸이 옮아간 것이고요.
'이게 좋다더라.'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자기가 그 대상을 아주 잘 알지 못하기에 일어납니다. 앞으로 또 어떤 부분에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일이 비슷한 다른 일이 생겼을 때, 되비쳐보는 기억이 되어서 위험한 선택을 피하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연결의 방법을 소홀히 하는 것은 요즘 세상의 흐름과도 비슷합니다. 필요한 것을 두루 잇는 것보다 정해진 틀에서 짜맞추려는 세태 말이지요. 그래서 집은 세상을 닮나 봅니다.
건축과 관계되어 경험한 미신을 물으셨는데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 미신이란 엉뚱한 것에 대한 현혹도 있겠으나 오류와 오해를 신명처럼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이르겠지요. 풍수를 잘못 이해한 경우도, 특정한 재료를 고집하는 경우도, 특정한 목적의 공간을 특정한 지점에 위치해야 한다는 선입견도 있고, 수맥에 대한 지나친 우려 등 많지요. 하지만 제가 경험한 가장 큰 미신은 자신의 이해와 경험을 최선이라 믿는 독선이 아닐까 싶어요. 개인적 취향을 객관적/물리적 이유보다 앞세우는 경우도 미신과 다름없고, 여행 중에 어딘가에서 본 디자인 요소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도 미신이요, 상황이 전혀 다름에도 특정한 형태를 억지로 구현하려는 무모함도 미신일겁니다. 집 지을 땅이 북향인데 자꾸만 남향을 말하는 경우의 답답함, 천연재료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상, 고층아파트에 살면서 수맥 때문에 동판을 깔아야겠다는 걱정, 로마에서 본 오래된 저택과 지중해의 풍광을 연출해달라는 요구, 외국잡지를 가지고 와서 똑같이 그려달라는 요구, 친환경 재료와 친환경 건축을 말하면서도 지으려는 집은 친환경 개념이 전혀 없는 자세도 미신이라면 미신이겠지요. 정작 큰 미신으 자기 삶의 방식을 설찰하지 않은 집짓기의 욕망이 아닐까요. 이해는 하지만 답답하지요. 미신이 그런 거겠지요. 이해는 되지만 합리성이 결여된 소통의 방식, 그러니 불통의 소통이랄까요.
좋은 의뢰인이란...
좋은 의뢰인이란 건축가를 믿어 주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은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되 결정을 건축가에 맡겨주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사는 사람과 새로 지은 집이 겉들지 않도록 속내를 다 털어 놓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미심쩍은 부분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는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이해가 되어 동의하면 끝까지 응원해주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미흡하거나 아쉬운 부분을 어떻게 고칠까도 상의하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단순히 일과 관계된 업무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서로를 깨우쳐주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일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견해를 나누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건축가가 생각한 것보다 그 집을 더 잘 활요하는 것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자꾸만 건축물보다 주인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겠지요.
좋은 의뢰인이란 건축가에게 그 존재만으로 상상의 에너지를 갖게 하는 사람이겠지요.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건축 얘기를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은 건축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송 선생님의 직접 경험이 녹아 있어 그럴 겁니다. 사실 모든 분야에서 전공과 비전공은 별로 중요치 않아요. 전공자보다 탁견을 가진 비전공자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잖아요. 전공이란 것이 어느 면에선 답답한 한계를 짓는 일인지도 모르지요. 원래 학문과 교육이란 것이 조금만 배워도 세상 이치를 깨치고, 많이 배우면 더 많이 깨치도록 하는 것인데 요즘은 많이 배울수록 세상과 담을 쌓는 현상이 생겨요. 학문을 세분화시킨 제도 때문인데 그 세분화라는 것이 전문화라는 미명하에 다른 분야와의 관계성을 소홀히 하지요.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를 위한 교육, 장사를 위한 교육, 가르치는 사람을 위한 교육에 눈멀고, 배우는 사람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집을 지으면서 살림은 없고 멋진 그림과 이해할 수 없는 주장만 있는 꼴이지요. 그럴 때 전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생업수단이라는 의미나 있을런지요.
억지로 꾸미지 않는 작고 단순함에서 오는 아름다움! 삶은 화려한 꾸밈보다 진솔한 일상이다.
[본문발췌]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해요. 어딘지 부자연스럽죠. 가짜는 필요 이상으로 화려합니다. 진짜는 안그래요. 진짜 지폐는 자연스러워요.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찰리 채플린
질문만으로 현실의 문제를 일시에 해소할 수는 없다. 다만 질문은, 구하는 시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좋은 질문은,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문제를 인식하는 순간이야말로 문제를 해결하는 첫번째 발판인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에 낙원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낙원에 도달하려면 일단 떠나야 한다. 어떻게? 호기심이라는 배에 올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수밖에. 돌이켜보면, 내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질문처럼 절박하고 명확한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걸 따라가는 과정에서 널찍한 신작로는 아니지만 나만의 샛길을 발견하곤 했다.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꽃도 그렇지 않나. 화려하게 만개한 순간보다 적당히 반쯤 피었을 때가 훨씬 더 아름다운 경우가 있다. 절정보다 더 아름다운 건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송나라 때 시인 소옹은 이러한 이치를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 예쁜 꽃 보노라. 반쯤 피었을 때."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기다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바람과 기대를 품은 채 덤덤하게 혹은 바지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때, 만남과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우린 가슴 설레는 상황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체적인 대상이나 특정한 상대를 능동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나를 아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세상을 균형 잡힌 눈으로 볼 수 있고 내 상처를 알아야 남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란 것도 나를, 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시작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때론 훨씬 더 중요하다. 당사자에게 알려지는 것과 당사자에게 알리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시작만큼 중요한 게 마무리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밀도 있는 여행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행旅行. 가슴에 불을 지피는 단어다. 일상의 버거움 때문에 자주 시도하지 못할 뿐이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에 가는 행위를 일컫는다. 하지만 이 정도 설명으로는 여행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단어와 문장의 수집가로 불리기도 하는 소설가와 시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봄 직하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 폴 발레리. 밑줄 그을 만한 문장이다. 이들의 이야기처럼, 우린 목적지에 닿을 때보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더 소중한 것을 얻곤 한다.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 모른다. 그래서 난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비행기보다는 열차에 몸을 싣는 편이다. 기차를 타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찬찬히 응시할 수 있다. 이동의 과정을 음미하면서 멀어지는 것과 가까워지는 것을, 길과 산과 들판이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어디 여행뿐이랴. 인간의 감정이 그렇고 고나계가 그러한듯하다. 돌이켜보면 날 누군가에게 데려간 것도, 언제나 도착이 아닌 과정이었다. 스침과 흩어짐이 날 그사람에게 안내했던 것 같다. 한 번은 여행과 방황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다. 둘 다 '떠나는 일'이란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두 행위의 시작만 비슷할 뿐 마지막은 큰 차이가 있다.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느느 뜻의 라틴어 'tom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행여 여행길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다 해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방황이 끝날 무렵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훗날 그 방황은 꽤 소중한 여행으로 기억될 테니까.
영화 'Youth'.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글쎄다. 어떤 이는 '늙은 젊은이'로 불리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걸 보면 '늙음=나이 듦'이라는 등식이 꼭 성립하는 건 아니다. 늙음은 무엇인가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여전히 나는 답을 하지 못하겠다. 다만 '낡음'이 '늙음'의 동의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