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아주 많아야 청춘"이란다.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라고....
어린시절 시간이 하도 많아서 왜 이리 시간은 더디간다고 했을까? 나이 먹어감에 따라 시간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나이의 속도로 시간은 흘러간다.
[본문 발췌]
우리가 서른 살까지만 산다면 재능이니 태어난 환경 같은 게 결정적이겠지만, 대부분은 오래 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건 무의미해지죠. 우연은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이지만 말했다시피 그냥 발생하지 않아요. 복권을 사지 않으면 복권에 당첨될 수가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간절함인데, 그 간절함이 반복적인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죠.
약한 존재를 보고도 돕거나 관용을 베풀지 못한다면, 그건 그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약하기 때문일 테니, 실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든,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든 그건 상관 없다.
열심히 산다는 건 그 많은 나날들을 과거 속으로 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 저는 이처럼 풍요로운데, 왜 한데 묶이지도 않는 미래의 각 순간들을 하나로 묶어놓고 그 순간마다 필요한 돈을 모으려고 애를 쓰겠어요? 한 번에 그 순간 모두를 내가 살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아는 대로 행동하고, 그게 습관이 되면 사람이 바뀌죠. 그때 진짜 지식이 쌓이니까 사람은 나아지겠죠.
마음이 젊다고 해서 청춘일 수는 없어요. 육체적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마음만은 청춘이려면 시간이 아주 많아야만 해요. 저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이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꽃이 피면 그 한 조각 같은 봄이나마 즐기면 되는 일이지, 봄이 짧은 것을 굳이 서러워할 일은 아닌 듯하다.
동양 미술에서 '여백의 美'는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
구체적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상력과 마음의 소통을 여백으로 전달한다고 해야 할까?
불교에서 '空'은 존재의 시작과 끝, 수양으로 다다를 지향점으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하듯, 삶은 '空'에서 태어나 죽어 '空'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선으로 연결한다는 것이겠지.
여백 (餘白) [명사] 종이 따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 자리.
[비슷한 말] 공백, 빈자리, 공란
(네이버 영어사전) blank (space); (페이지 양 옆의 빈 칸) margin
책의 여백마다 메모가 가득 적혀 있었다 Every blank space in the book was filled with jottings.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에서 여백 설정 메뉴가 어디 있지요? In Microsoft Word, where's the menu for setting margins?
문단 사이에 여백을 좀 더 주는 것이 좋겠다 It would be better if you leave a little more space between the paragraphs.
그는 교과서의 여백에 중요한 내용을 적어 두었다 He made notes of important points in the margins of his textbooks.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가 있다 Oriental paintings have beauty of space.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여백'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알렉산더 폰 쇤 부르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편안함은 비좁음을, 우아함은 공간의 여백을 사랑한다.
마셜 매클루언, <미디어의 이해>
시각적으로 조직화된 서양에서처럼 연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禪의 미술과 시는 사이와 틈을 통해서 참여를 창조해 낸다. 동양 예술에서 관람자는, 스스로가 작품 속의 여백을 메워야만 하기 때문에 작가가 되어 버린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깨어 있는 다중의 끝없는 저항만이 우리 삶에 숨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주, <글의 품격>
여백 가장 본질적인 재료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다. 쓰라린 사연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 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여백은 존재가 아닌 부재不在의 결과다. 만나고 헤어져야, 다가왔다가 멀어져야, 소유하던 것을 잃어버려야 여백에 닿을 수 있다. 때론 눈물이라는 열쇠로만 우린 '여백이 문'을 열 수 있다.
"난 공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 수묵화가 김호득의 한 언론 인터뷰 中
글도 그림도 힘을 빼고 여백을 만들어야 지면과 화폭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본질적인 재료는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을 다 채우기보다 적절하게 비워내고 그 비움의 파편들을 모아서 크기와 높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공간을 지을 때, 문장과 문장 사이로 햇빛과 바람을 불러들일 수 있고 글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우린 펜이 아니라 여백을 쥐고 글을 쓰는지 모른다. 빽빽한 활자 사이사이에 삶의 희로애락이 깃든 각자의 공간을 새겨 넣기 위하여....
글쓰기 노하우는 기술보다 습관에 가깝다. 때론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습관이 글을 쓰는 건지 모른다. 습관이 스스로 미끄러지고 번지면서 내 삶의 여백을 진하게 물들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내리는 무수한 판단과 선택,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등이 텅 빈 여백에 점點처럼 찍히고, 그 점들이 모여 일정한 방향의 선線으로 그어질 때 문장마다 고유한 개성이 입혀진다. 그때 비로소 작가의 문체가 솟아난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디지털 기술을 대하는 지금의 사고방식, 즉 네트워크는 절대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시간의 공백이 가진 중요성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시간의 공백은 디지털 도구를 실용적인 도구에서 창조성, 깊이, 초월성의 도구로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시간의 공백은 사람들을 줄 서게 만든 마법의 핵심이다. 시간의 공백 덕분에 나는 지극히 평범한 경험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시간의 공백이 없다면 가치 있는 경험도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공백을 만들기는커녕 점점 더 없애고 있다.
디지털 업무 사이의 공백이 사라지면 깊이의 기회도 사라진다. 갈수록 바빠지고 깊이가 사라지는 스크린 중심의 삶은 정신의 교통 정체와 같다. 또한 내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돌보기 힘들어진다.
어떤 일을 하던 한발 물러나 재충전하고 일상의 균형을 되찾을 시간이 정기적으로 필요하다. 디지털 세상에서 이러한 공백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하지만 공백을 창조하기는 쉽지 않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기다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바람과 기대를 품은 채 덤덤하게 혹은 바지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때, 만남과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우린 가슴 설레는 상황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체적인 대상이나 특정한 상대를 능동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인생에서 뭔가 선택한다는 것은 몇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뽑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한 점 미련을 두지 않고 내가 선택한 것에 최대한 집중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선택은 삶의 여백에 한 번 찍고 마는 점點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힘을 주어 긋는 선線에 가깝다. 다만 선택이라는 선을 그려나갈 때 나침반 역할을 하는 근거와 이유는 그리 정교하거나 또렷하지 않은 듯하다. 우린 종종 "합당한 이유로 선택한 거야"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시간이 흐른 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별다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구체적인 이유 없이 결심을 하면 결심 뒤에 적절한 이유가 뒤따라오거나 빚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그 선택에 집중하기보다 나름의 이유를 더 열심히 찾는 경우도 있다. 훗날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혹은 변명과 핑곗거리를 미리 마련해놓기 위해...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봄비는 윤택해 풀의 싹이 돋는다. 가을 서리는 엄숙해 나무 두드리는 소리에 낙엽이 진다. - <선귤당농소>, 극도로 절제된 표현과 간략한 묘사는 어떤 글보다 강한 여운과 여백의 미를 준다.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선(禪)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일본의 회화는 소위 '여백(餘白, onecorner)' 양식이라 불리는 방법으로 자주 그려졌다. 또한 일본 정원에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부석(敷石)은 극동 문화의 이런 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움 ㆍ 신달자
내 몸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 이동
강판권, <나무 철학>
나무는 잎을 버린 뒤에야 여유를 찾는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풍요롭지만 여유가 없다. 인간도 몸이 가벼워진 뒤라야 여유로울 수 있다. 여유는 비어 있는 여백과 같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 겨울나무는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껴입고 움츠리는 것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도 힘차게 생동한다. 여유가 있어야 자유롭다. 잎 떨어진 나무는 절대 자유 그 자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겨울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우리는 단일 작물만 심어진 광대한 밭에서 자연의 힘이 쇠약해져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일 부류만을 염두에 두어 획일적으로 개발되는 주택지를 보면서도 인간생활의 토대가 탄탄치 못함을 걱정한다. 산업문명이 가져온 획일적 문화에 젖은 우리는 마치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수많은 여백과 다양성을 가진 다목적 풍경이 보여주는 인간성과 자연성을 열망한다. 여백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작업의 종류와 땅의 종류뿐만 아니라 부지를 나누기도 한다. 산울타리 사이의 좁은 길, 강가, 나무가 늘어선 울타리 등등의 여백들은 항상 야생이 소유했으되 인간의 의도에 따라 그 범위가 설정되는 것들이다. 이런 장소들은 동식물과 같은 야생의 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이들이 야외에서 뛰어놀기에도 더없이 좋다. 이런 여백의 장소들로 인해서 인간과 야생 쌍방은 서로의 경계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는 단일 재배의 풍경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명들에게 보다 안전한 조화의 풍경인 것이다. 우리는 단일 문화의 풍경이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반면에 조화의 풍경은 민주적이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영미, <디퍼런트>
희귀한 가치의 제안 : 풍요와 과잉이 세상에서 여백과 침묵의 가치를 제안
미야모토 테루, <금수>
사랑은 환상이다. 모르는 게 많아야 환상은 유지된다. 현실이 개입하면 환상은 힘을 잃고 사랑은 희미해진다. 그러므로 서로 알아 가는 과정, 곧 사랑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사랑을 잃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랑하게 되면 그를 알고 싶어진다. 모르면 내 세계 안에 그를 규정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알아간다는 것은 내 세계 안에 그의 좌표를 그려 넣는 일이다. 불안하지 않으려면 그를 내 세계 안의 어떤 좌표로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안심할 수 있으나 환상은 깨지고 사랑은 멀어진다. 즉, 알아 간다는 것은 그의 공백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인데, 다 채워지면 안정된 관계는 유지되지만 낭만적 사랑은 떠나가는 것이다. 이렇듯 안다는 것과 사랑은 이율 배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낭만적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는 편안함과 안정된 기억이 남는다. 이제 그 기억만으로 살아가야 한다. - <옮긴이 후기> 중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우리는 여행의 속도를 유지할 수 없다. 흔히 삶의 속도를 가속시킨다. 여행을 다녀오느라 비워뒀던 공백을 메워야 하기 때문이다.
한 줄의 글자와 공백으로 구성되는 시구는 인간이 삶을 흡수하고 명확한 말을 되찾아내는 이중의 작용을 한다. 《P.클로델/입장(立場)과 제언(提言)》
통계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의사결정을 해가는 과정 중 가설검정과 같이 경험적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를 통해 검증하는 방법, 탐색적 데이터 분석(EDA, Exploring Data Analysis)과 같이 경험적 가설없이 기초 통계값부터 시각적 데이터 탐색 방법 등을 동원해 정보를 얻고 의사결정에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요즘같이 변화도 심하고,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경험의 범위가 제한적인 경우 탐색적 데이터 분석 또는 정보 탐색의 과정은 '자기객관화' 과정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최근 언론과 검찰의 행태를 보면서, 해주고 싶은 말이다. 언론이 쓰는 기사와 검찰이 행하는 수사에 '자기객관화'를 활용하시라고.....
[본문 발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의사결정을 한 후 빠르게 실행에 옮기고,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끊임없이 의사결정을 조절하라!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재고하고 늘 회의하고 의심해보는 사람, 그래서 결국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길을 잃어본 순간, 우리는 세상에 대한 지도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방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조금씩 나아지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성장하지만,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안하는 사람은 성장 자체가 어렵습니다.
결핍이 욕망을 만듭니다. 뭔가 부족해야 그 결핍 때문에 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요.
죽을 만큼 절박하지 않으면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절박함을 만들어내는 것이 새로고침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첫 단계입니다.
내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이 뭔지를 살펴본 다음에,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결과는 내겠다 싶은 것을 찾아서 선택하는 방법을 '방법 탐색(exporation)'이라고 부릅니다. 한 번도 직접 해보지 않았으니 실패할 가능성이 있겠죠. 그렇지만 문제를 굉장히 잘 해결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예측 가능한 성공이 보장된 건 아닙지만, 우리가 혁신을 이루는 건 방법 탐색 과정 덕분입니다.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는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큰 즐거움과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80~90퍼센트 정도는 기존 방법을 적용하더라도, 10~20퍼센트 정도는 방법 탐색의 전략으로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
인간의 지적 능력은 얼마나 많은 방법을 알고 있느냐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로 알 수 있다. - 존 홀트
지능은 기존 지식과 절차를 빠르게 습득하는 능력이고, 창의성은 지식과 절차를 모를 때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아무리 논의해봤자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잘 안 나오는 겁니다. 나와 다른 경험을 한 사람, 나와 다른 분야에서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 나와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보는 사람들과의 지적인 대화를 즐기세요. 여러분의 인지적인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에 거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이 바로 독서, 여행,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입니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세상으로부터 자극을 받으시라는 겁니다. 의미 있는 세상과의 충돌,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이 세 가지는 자기가 직접 물리적 환경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정해진 답을 남들보다 먼저 찾는 교육이 아니라 나만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능력이 더 존중받아야 합니다.
생물학적 수명은 길어지고 있는데 기계문명에 경쟁력을 갖춘 시기는 줄어들고 있다 보니 사회적 수명이 짧아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술의 수명이 인간 수명보다 길었을 때에는 젊은 시절 배운 기술로 한평생 먹고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기술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행복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편집, 검색, 빠른 모드 전환 등 스마트폰적인 사고를 하는 시간과 책을 읽고 오래 생각하고 멍 때리면서 사색하는 시간 사이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현실은 진실의 적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꿈을 포기하고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미친 짓이겠죠.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찾는 것이 미쳐보이나요? 아뇨!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것이오! 그중에서도 가장 미친 짓은 이상을 외면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오. - 미켈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결정의 순간, 내가 답해야 할 질문은 '내게 있어 인생은 탐험인가, 마라톤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생을 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삶의 코스를 완주하는 게 목표인 마라토너라면 페이스 조절만 잘하면 안전한 삶의 궤적을 그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 주는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열매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가의 기질이 필요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내 삶의 철학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질주의 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
<프레임>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이라는 개념과 통찰을 제공했던 최인철 교수의 <굿라이프>도 일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삶에 대한 통찰과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본문발췌]
행복한 삶이란 가슴에 관심 있는 것 하나쯤 담고 사는 삶이다.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행복을 위한 11가지 활동 : 1) 명상하기, 2) 운동하기, 3) 친절 베풀기, 4) 자신에게 중요한 목표 추구하기, 5) 감사 표현하기, 6) 낙관적 마음 갖기, 7)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8)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9)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기, 10) 스트레스를 이기는 효과적 전략들을 사용하기, 11)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행복한 사람들의 기술
1.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
2. 되어야 하는 나보다 되고 싶은 나를 본다.
3. 비교하지 않는다.
4. 돈의 힘보다 관계의 힘을 믿는다.
5. 소유보다 경험을 산다
6.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산다. 행복한 사람은 돈으로 경험을 사서 삶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장식거리보다는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7. 돈으로 시간을 산다. 부의 증가는 행복을 살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대폭 늘려주었지만, 동시에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결핍을 가져왔다.
8. 걷고 명상하고 여행한다
9. 소소한 즐거움을 자주 발견한다
10. 비움으로 채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채움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비움으로 채우려고 한다. 시간과 돈의 여유가 없어서 나누어줄 수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하소연할 때, 행복한 사람은 나누지 않으면 시간과 돈의 여유는 갈수록 없어진다는 믿음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경험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만족과 기분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기억하는 자기를 위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삶 전체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고 느낄때, 인간은 의미를 경험한다. 일이 잘되면 기분이 좋지만, 그 일이 자기다운 일이면 의미가 경험된다. 우리가 성공, 성취, 효용, 효율 등 무엇을 이루는 것에만 집착하게 되면 순간적인 기분의 행복을 누릴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는 삶을 경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의미 있는 삶이란 자기다움의 삶이다.
좋은 일이란 직업의 종류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주는 일이다. 자신의 일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있다는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삶, 즉 소명이 있는 삶이 굿 라이프다.
"심성구지, 수부중불원의(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비록 적중하지는 못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 <대학>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낄지는 몰라도 이런 반응이 습관이 되면 곤란하다. 이런 일에도 놀라지 않고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남들을 비난하며 우쭐해한다면,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나요?'라는 냉소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1년에 몇 번이나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는가.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 뜬다. 우리가 60년을 산다 할 때 보름달은 몇 번 하늘에 뜨는가. 그 가득 찬 둥근달을 우리는 일생 동안 몇 번이나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승을 떠나는 것일까...' - 조정래, <천년의 질문> 중에서
감동이 사라지는 순간, 삶은 그만큼 삭막해진다. 감동이 있으므로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 G.E.레싱 -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신호와 소음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슈퍼 히어로에 버금갈 힘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소음을 신호로 포장해 잘못된 판단을 유도하는 세력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본문 발췌]
수많은 소음에서 올바른 신호를 가려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인쇄술이 등장 이후로 크게 발전했다. 이제 정보는 예전처럼 희귀한 자원이 아니다.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양의 정보만 유용하다. 우리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주관적으로, 그리고 해당 정보가 유발할 수 있는 왜곡에 그다지 크게 경계하지 않고 정보를 지각한다. 신호는 진리다. 소음은 우리가 진리에 다가서지 못하게끔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한다.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과 절대로 잘못될 수 없는 것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절대로 잘못될 수 없는 것이 잘못될 때에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거나 문제를 바로잡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예측은 빗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얼마나 빗나가는지 그리고 빗나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고, 또 빗나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예측과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하알렉스 오조노프(Alex Ozonoff)
키케로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경고했듯이, '사람은 자기 방식을 좇아서 사물 자체의 목적과는 동떨어지게 사물을 추론한다.' 우리는 자신이 관점을 강화하는 신호에 초점을 맞추거나, 좀 더 낙관적인 결과를 좇는 경향이 있다.
예측은 아주 중요하고, 그 때문에 더욱 어렵다. 소음에서 신호를 분리하려면 과학적 지식과 자기 인식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즉, 객관적 실체와 주관적 실체를 교차시켜야 한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함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즐거움을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은 행동이 없이 머리에만 있고, 좋아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고, 스스로의 충만함을 남과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 즐기는 사람은 왠지 여유가 있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해석을 했다.
독서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Reading is my only[sole] pleasure.
그는 일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He took no pleasure in his job.
봉사 활동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Volunteer work gives me great pleasure.
먹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Eating is one of the great pleasures in life.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꼈다 She took pride and joy in her work.
그는 여행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었다 He got enormous pleasure from traveling.
그는 나를 놀리는 데서 큰 즐거움을 얻는 것 같다 He seems to take great delight in teasing[making a fool of] me.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이다 My greatest happiness[joy] in life is seeing my children grow.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즐거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시간, 즐거움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행복은 내안에 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행복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외부에서 찾은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들은 모두 그 본질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appiness belongs to those who are sufficient unto themselves. For all external sources of happiness and pleasure are, by their very nature, highly uncertain, precarious, ephemeral and subject to chance.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불확실한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을 때 여행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여행의 즐거움은 장애물과 피로감에 있다. 심지어 여행 중에 겪는 위험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언제나 확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이 항상 대기해 있으며 포근한 침대와 멋진 식사가 준비되고 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그런 여행에서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뜻밖의 사건이나 모험거리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너무도 잘 정돈되어 있으니까. - 테오필 고티에르, <에스파냐에서의 산책>
서은국, <행복의 기원>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행복한 사람들은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강판권, <나무 철학>
즐거움은 바로 좋아하는 데서 출발한다.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내가 즐거움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것은 '즐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즐긴다'는 표현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맺을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 심보선
구름과 안개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별 할말이 없다
그 둘을 설파할 때 내 몸은 기분좋은 기괴함에 젖어든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눈부신 곡예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어쩌다 등을 뒤로 굽혀 완벽한 원을 만들게 됐냐고 사회자가 물은 적이 있다
싸는 똥을 바로 받아먹고 싶었죠
즉석에서 시범을 보이자 관객들은 박수 치다 말고 토했다
구름과 안개에 골몰하느라 학업과 노동을 작파한 지 오래
내가 펄쩍 뛰었다 착지한 자리엔 음모가 수북이 쌓이곤 한다
내 몸이 점점 구름과 안개로 화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내 행방을 찾으려거든 땅 위에 떨어진 털들을 따라오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이름이 무엇이고 거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간혹 나는 밤거리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진열장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나 자신이 아득한 심연으로 되비치고
등뒤의 어둠과 눈앞의 환함이 서로를 환대할 때까지
나는 일생에 걸쳐 가장 가난한 표정으로 거기 오래 서 있는다
그러고는 오묘한 정취에 젖어 달이 뜬 쪽을 향해 물구나무로 걸어가는 것이다
자정의 밤거리는 언제나 취객과 창녀로 북적거린다
내 둥근 몸을 통과한 달빛에 젖은 자들이여
나를 비웃든 경외하든, 그대들의 삶에 다산과 다복이 넘치기를
또 간혹 나는 구름과 안개를 뚫고 달리고 또 달린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심심해져서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구름과 안개가 걷힌 거리는
지식 없는 선생이요
표정 없는 얼굴이기에
구름으로 다듬고 안개로 닦아야만 고독은 아름다운 자태를 얻는다고 믿는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굳이 유파를 들먹이자면
마음의 거리에 자우룩한 구름과 안개의 모양을 탐구하는 '흐린 날씨'파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나의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낯선 도시에서 눈썰미와 요령만으로 맛집을 찾는 데 성공하면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다. 혀로 맛보는 기쁨, 배로 느끼는 만족감, 그리고 마음이 누리는 뿌듯함이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호라티우스가 속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이 추구한 쾌락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다시 말해서 충만한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의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도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격적인 즐거움에 의존하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입니다.
김영하, <말하다>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 돈이 들지 않습니다. 성장률이 제로로 수렴하는 저성장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툭하면 0펴센트의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민자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그런 일을 겪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를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임영익, <메타생각>
'창의성은 낯선 것에 대한 즐거움' - 어니 젤린스키
E. F. 슈마허, <자발적 가난>
항상 미래에 닥쳐올 불행을 염려하는 것이 정말로 현명한 것일까?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재앙을 고민하느라고 현재의 즐거움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 과연 신중한 것일까? - 버트런드 러셀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최적 경혐=몰입'에 빠지면 사람은 즐거움과 충족감을 느낀다. 반대로 관심의 대상이 자꾸 변해 하나에 집중할 수 없을 때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낭비한 듯 느끼고 즐거움과 충족감을 얻기 힘들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지성이 깨어날 때의 기쁨은 세상을 얻은 것같이 마음 부자가 된 느낌이고, 영성이 깨어날 때 즐거움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지성이 깨어나면 내 안에 가치 기준이 생겨 더 이상 남들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영성이 깨어나면 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 두 번 다시 현혹하지 않습니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고 옛날 친구들과 때때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새로운 행복을 찾아 누린 사람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활동을 계속한 사람,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노후에는 일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 그 일을 미리부터 준비해두자는 생각이다. 노후를 위해 경제적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일을 준비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페이스북 사무실에 걸린 "빠르게 움직이고 틀을 파괴하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잠시 속도를 늦추고 파괴된 것을 고쳐볼 수는 없을까? 디지털 라이프가 영구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전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아날로그를 선택하고 있다. 기본 설정이 되어버린 디지털 기술에 비해 아날로그는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비용이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찾고 있다. 왜일까? 즐거움이 한 가지 이유다. 아날로그는 물리적인 사물과 경험이 사라져가는 영역에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적 물건을 창조하고 소유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사진관에서 필름을 찾아오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옛 친구들과 새로운 보드게임을 하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일요판 종이 신문이 내는 듣기 좋은 소리일 수도 있고, 내 생각이 펜으로 종이 위에 구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즉각적인 보상일 수도 있다. 그런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두가 값을 매기기 힘든 경험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윤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설명하는 포스트디지털 경제에는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투자자와 소매상, 그리고 기업가가 필요하다. 작은 레코드점을 개장하든 거대한 시계 공장을 시작하든 아날로그에서는 수익이 생긴다. 언론은 실리콘밸리의 성공에 흥분하지만 사실 우리 경제의 절대적인 부분은 아날로그다. 아날로그 경제는 작은 지역에 집중된 디지털 자본에 비해 사회에 광범위하게 이득이 된다. 비즈니스 세계가 점점 더 디지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기술을 새롭고 참신하게 활용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더욱더 돋보이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간의 역할은 더욱 값어치가 올라갈 것이고 아날로그 도구나 활동(가령 화이트보드나 오프라인 매장처럼 디지털 경험을 현실 세계에 옮겨놓는 것)은 선두 기업과 나머지 기업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아날로그는 생산성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최고의 생산성을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사회와 조화를 이룰 때 얻는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이 으뜸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최인철, <굿라이프>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정재승, <열두 발자국>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는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큰 즐거움과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80~90퍼센트 정도는 기존 방법을 적용하더라도, 10~20퍼센트 정도는 방법 탐색의 전략으로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삶의 코스를 완주하는 게 목표인 마라토너라면 페이스 조절만 잘하면 안전한 삶의 궤적을 그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 주는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열매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가의 기질이 필요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내 삶의 철학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질주의 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예술의 목적은 정신적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지만, 두뇌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징화된 정보를 해독하는 것이 두뇌의 주요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전자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유흥산업과 연예잡지, 그리고 소셜네트워크는 앞으로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팽창할 것이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역경 속에도 즐거움이 숨어 있고, 이를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경마저 평범한 일상 중 하나로 여겨야 한다. 조심스럽다기보다는 소심한 성격에 가까운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세계는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재미가 없다. 남들에게 들려줄 만한 실패나, 쉽게 경험하기 힘든 체험이 없어서다. 유난히 재미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또한 시간적으로 고생과 위험 부담을 즐겁게 감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생처럼 정직한 것은 없다. 인생의 재미는 이를 위해 지불한 희생과 위험에 정확히 비례한다. 모험을 택하지 않고서는 사는 재미도 보장받을 수 없다.
코에코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쾌락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뇌가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그만큼 즐거움이 늘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절개고(一切皆苦)'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에 따르면, 한 번 쾌락을 맛본 뒤에는 '좀 더 좀 더' 하고 보다 큰 즐거움을 찾으며, 그 재료가 되는 괴로움을 더욱 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에 대해 누군가 동의해 주면, 이때에도 만의 욕망이 생겨 자아가 자극되고 중독된다. 혹은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괴로워하고 또 다른 분노를 느끼면서, 그것에 자극을 받아 중독된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중국 위나라 사람 동우는 <삼여지설>에서 '밤'과 '비 오는 날'과 '겨울철', 이 세 가지 여분의 시간이야말로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고 말했다. 맑은 날 밤 고요하게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달이면은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간혹 종소리만 들려온다. 이 때 이 아름답고 고요한 정경에 빠져 책을 읽으며 피로를 잊는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몰아쳐 길을 막으면 문을 잠그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고 책만 앞에 가득히 쌓여 있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함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낙엽이 떨어진 나무숲에 한 해가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깊게 눈이 쌓여 있다.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고, 겨울새가 들녘에서 울음 운다. 방 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 있노라면 차 향기에 달콤한 술이 익어 간다. 이러한 때 시와 글을 모아서 엮고 있으면 좋은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마냥 즐겁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허균이 옛사람들의 글을 모아 엮은 <한정록> <정업>편에 나오는 말이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보통 사람들은 주로 재미만 갖고 인생의 즐거움을 삼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뒤에 후회나 허전함, 공허감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한편 또 너무 삶의 의미 같은 것만 찾으면 현재의 삶이 힘들어지고, 스트레스도 많아져 지치기 쉽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가장 좋은데, 바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곧 자기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장 조화로운 상태가 되는데, 우리는 보통 이 둘이 분리된 삶을 삽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우리는 삶을 누리고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도 일평생 동안.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놀이는 아이들만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의 생명력입니다. 놀이는 마음을 젊게 하고, 일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인간관계를 잘 맺게 해줍니다. 또한 젊음을 되돌려 줍니다. 놀이는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놀이는 순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는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놀이는 내면의 기쁨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웃음, 노래, 춤, 수영, 등산, 요리, 달리기, 게임 등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일과 놀이가 완전히 별개의 활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하루를 살아가고 평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목표지향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 불행해집니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동시에, 즐거움으로부터 일을 떼어 놓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은 “나에게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 주는 샘물이다”라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도전 정신을 회복하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생각도 ‘젊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스펙을 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 즐거워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다 보니 / 스펙이 하나둘씩 쌓이도록 하세요. / 과정의 즐거움이 빠지고 결과만 얻으려 하면 / 그게 바로 고통입니다. / 과정을 즐기십시오.
E. F. 슈마허, <굿워크>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이런 방법론의 요구에 또 다른 철학자들은 생각의 나라에서 목표 없이, 때로는 나침반도 없이 걷는 방식들을 맞세웠다. 오직 산책의 즐거움만을 안내자로 삼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고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산책은 규칙도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거니는 것이다. 이 산책은 논증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을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강화한다.
김위찬, <블루오션 시프트>
구매자들은 간편하고, 사용하기 쉽고, 즐거움과 원하는 바를 주기 때문에 이를 좋아한다. 즉 구매자들은 기술이 고객가치의 획기적 향상에 본질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제품과 서비스에 열광한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이니, 삶의 활력과 즐거움도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우리는 질서와 복잡성의 병치에서 생기는 즐거움 밑에서 이와 관련된 건축학적 미덕인 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사치스러운 것과 수수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대립들을 건축가들이 능숙하게 중재할 때마다 아름다움은 피어나는 것 같다.
양재우, <불황을 이기는 월급의 경제학>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전하여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이며, 소중한 시간을 아껴 알차고 의미 있게 활용하여 나란 존재 혹은 내가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할아버린 인생은 되돌릴 수 없으며, 놓쳐버린 사람이 환희는 되찾을 수 없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프로'는 프로페셔녈professional(전문가)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professio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프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도 끝까지 해내는 경향이 있다. 그냥 끝까지 하는 게 아니다. 하기 싫은 업무를 맡아도 겉으로는 하기 싫은 티를 잘 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마무리한다. 왜? 프로니까. 이와 달리 '아마추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 삼아 소일거리고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인지 모른다고. ... 살다보면 프로처럼 임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 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그런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긴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인류는 점차 특권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인정하고 사회가 정해준 생활에 기꺼이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언제 할지를 통제해서 모든 활동을 자기 나름의 속도로 수행하고 예상 밖의 사건과 다양성, 놀라움과 즉흥성에서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상도 크게 달라진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일은 권태를 몰아낸다. 요긴하고 재미있는 일을 할 때 느끼는 권태는 할 일이 전혀 없을 때 느끼는 권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일에는 하나의 공덕이 따른다. 일이 있음으로 해서 후일이 즐거운 것이다. 건강을 해칠 정도의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 시간에 게으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왜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도시로 모여들까요? 거기에는 화폐 문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밖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려함과 즐거움, 다양성,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겨나는 유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분비는 테마파크에 가면 '줄 서지 않고 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텅 빈 테마파크에 가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가오싱젠, <창작에 관하여>
관찰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심미를 획득할 때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 즐거움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열매는 작가가 현실적 공리를 뛰어넘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입니다. 그렇지 않고 현실적 이익이나 효과에 얽매이게 되면 작가는 창작에 필요한 열정과 관찰자적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마이크 비킹, <휘게 라이프>
휘게는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즐거움>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스크린은 개인과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 필요한 업무를 손쉽게 해결해주었다. 편리함과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세상을 한 걸음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한 네트워크가 촘촘해질수록 우리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로 인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바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깊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물건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는 편이 훨씬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 간디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래리 킬리 외 3명,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
고객참여 혁신은 종종 다른 종류의 혁신(특히 브랜드 혁신이나 서비스 혁신)과 함께 수행되어서 발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고객과 상호작용하는 부분에 집중하라. 고객과 어떻게 관게를 맺고 고객에게 어떻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집중한다면 고객참여 혁신을 이룰 수 있다.
해적처럼 생각하라. 해적처럼 생각하는 것이 모든 혁신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흔들림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헌신적으로, 그리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게 혁신하라. 아마 우리보다 더 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정해진 규칙이 있다면 그 규칙에 얽매이지 마라. 오히려 틀에 박힌 규칙에서 벗어남으로써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혁신가가 지녀야 할 자질이다. 해적선을 만드는 것처럼 혁신 계획을 세워라.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종하기 쉽고, 번개처럼 빠른 무서운 해적선을 만들어라. 배를 출항할 때는 늦은 밤, 경쟁자가 지키고 있는 항구로 곧장 가라. 동이 트기 전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의 진영을 파괴할 수 있는 순간을 계획하고 맹렬한 전쟁을 벌여라. 필요한 전술이나 스킬은 무엇이든 사용하고, 타협하지 마라.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 보아 또하나 삶의 즐거움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더라. 잘 익어가자.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부와 사치에만 익숙해지면 소박한 삶을 잊게 되고 내면적인 즐거움과 평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간다고들 말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다. 인생은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도 못할 만큼 짧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 친절한 행동을 하라. ... 인생은 공간이나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영혼 속에 존재한다.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얽힌 것을 풀어헤치고, 곤란한 일을 수월하게 하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 대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소박한 삶을 살면 자신만의 생활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돈과 시간과 자유가 있는 생활을. 일의 즐거움을 되찾는다는 것은 곧 현명하게 일하고, 자기에게 맞는 일정을 세울 자유를 누리고, 일을 놀이처럼 대하는 법을 배우고, 변화 속에서 기회를 찾는다는 뜻이다.
기존의 작은 즐거움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소한 일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얼마나 자주 그 일을 하는가? 그것을 생활 속에 더 깊이 스며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은 즐거움을 찾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날마다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즐거움들을 목록에 정리하는 건 더 좋다.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인적 드문 깊은 산속에서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상을 관조하는 탁족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도락이 아니다.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가치를 아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근 시간에 비례해 몸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깨끗해지는 쇄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도시의 온갖 욕망과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엠 허드슨 박사는 "노화는 육체는 쇠락해도 정신은 성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던가. 나이듦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 자연에서 찾는 작은 즐거움에도 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긍정의 힘이 정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던 걸음이었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여행의 즐거움의 반은 길 잃음의 미학이다. - 레이 브래드버리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비틀거리며 가다>
사람은 자기 장소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는 그만큼, 그는 강하며, 반면에 꼭 돈이 들어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필요한 그만큼, 그는 약하다. - 웬델 베리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걷는 즐거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로움.
최지원, <유학자의 동물원>
생에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생에 알맞지 않은 것은 미워하니,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이름을 준 것이 비록 일곱 가지가 있으나, 기실은 호오뿐이다. 칠정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이다. 감정의 발현에 어찌 이같이 실마리가 많겠는가. 진실로 그 실(實)을 추구해 보면 대개 호오가 있을 뿐이지만, 그 호오의 깊고 얕은 정도가 모두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절박하게 싫어하는 것이 슬픔이 되고 성하고 격렬하게 싫어하는 것이 노여움이 되며, 좋아하는 것이 나타나면 기쁨이 생기고 좋아하는 것이 두드러지면 즐거움이며, 좋아하는 마음이 대상에 결부되면 사랑이고,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욕(欲)이 되는 것이다. - 최한기, <추측록> 제3권, <추정측성>, 칠정(七情)은 호오(好惡)에서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아!"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지나친 자의식 때문에 춤추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도 어리숙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 수업, 시 쓰기, 외국어 배우기, 노래 배우기...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만 빼면 수많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강신주, <철학의 즐거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정지훈, <무엇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
우리는 이제 생산에 투입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가치의 방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나눔의 문화가 확산되고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사람들의 만남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분배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아이들은 가식도 없고 욕심도 없다. 잘 그린다는 기준도 없고 못 그린다는 기준도 없다. 단지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즐거움에 심취한다.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어떤 대가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기술 이상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가들도 나이가 들면 아이들의 그림을 닮아간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 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류콴홍, <철학우화>
생활 속에서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줄 아는 생활의 강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라." - 베토벤
리칭즈, <여행의 속도>
그 지역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는 자신의 두 다리뿐이다. 발자국을 남겨야 비로소 그곳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기도 하다. '길을 잃는' 즐거움을 알아야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조정래, <정글만리>
인생이 뭐고, 사는 게 뭡니까. 인생이란 추억 만들기고, 사는 건 때때로 무슨 계기 찾아가며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 아니던가요?
박웅현, <여덟단어>
萬物 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만물 개비어아의 반신이성 낙막대언) - 맹자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돈은 인간 생활에 중요하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쾌락 역시 인간의 삶에서 제외도리 수 없으나 쾌락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의 영위에 있다. 이해관계와 수지 타산을 떠날 줄 아는 삶, 용도와 유용성을 초월할 줄 아는 삶, 어떤 것을 '소유하기'나 '소유하는 자'를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즐거운joy이다. 쾌락이 자주 존재의 타락을 강요한다면 즐거움은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확장의 경험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투자, 그것이 곧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이다. 이 투자가 있을 때에만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질' 높이기이다. 삶의 질은 향랑의 수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의 수준에 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우이 없다면 인간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시세가 상승하는 증권시장에서 거래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더 많은 주식들이 '큰 손'에서 '작은 손'으로 가게 된다. 즉, 심리적으로 안정된 증권시장 참여자들로부터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증권시장 참여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주식들이 작은 손들 손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가 폭락은 곧바로 눈앞에 닥쳐오게 된다.
투자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호황이 앞서지 않은 주가 폭락이 없고, 주가 폭락으로 끝나지 않는 호황은 없다.
순환과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그리고 장기적 관점 하에서만 큰 돈을 벌 수 있다. 투자자는 사색가여야 하며, 미친 군중과 컴퓨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트, 인문학, 여행의 공통점은 현실을 낯설게 보도록 해준다는 것! 새로운 시각, 창조성과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파리~~~
[본문 발췌]
아트, 인문학, 여행, 이들 셋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건 우리를 성장시켜 현실을 '낯설게 보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여행은 떠남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둘러보고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고 돌아올 때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시야를 갖게 된다. 예술은 예술가의 눈을 빌어 자연이 숨겨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체험이다. 그것에 감동할 때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폭넓고 진지한 통찰을 배우는 것이다. 그 통찰의 맨끝에는 '낯선 나 자신'이 있다. 낯설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익숙한 것들 속에 숨어 있던 새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 말하자면 본질 같은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그림은 내면의 생각을 그리는 것이며, 사진은 외부에서 생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근원은 똑같다. 생각에 따라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현재는 영어로 'present'이다. present는 현재라는 뜻도 있지만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는 곧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를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자유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등 소유와 관련하여 뭔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만들고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라는 것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자유도 활동에 근거하므로, 협업할 때 서로 주체가 된다면 자유와 의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나 보다, 어떻게 해야 잘 버틸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면서 불안을 헤쳐나가는 게 핵심이죠. 내리막 세상이라는 가장 큰 징후는 불안감이에요. 더 많은 돈이 불안을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쳇바퀴 같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될 뿐이죠. 그럴 때 일과 직장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불안감을 없애는 방법으로 적게 벌어도 굶지 않고 잘 사는 삶의 다양한 유형들이 나와야 해요. 많은 이들이 그런 삶을 공유해야죠. 그래야 함께 뭐라도 할 수 있어요." - 롤다 대표 제현주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힘이 곧 공동체의 건강을 보여주는 것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지만 타자를 통해 자기 존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고 존재의 확장이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문을 걸어 잠그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와 적극적으로 만나야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다른 존재되기란 참 멋진 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성격이나 취향이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같이 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낯선 만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뭔가를 함께 도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새로운 존재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주거와 경제 문제를 함께 해결해 주는 우동사 같은 모델이 적게 벌고도 잘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닐까. 그들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도시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재능을 나누고, 덜 소비하며 더 많이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덜어 내고, 너무 끙끙대며 애쓰지 않는 삶, 자연스러운 삶, 그렇게 사는 게 가장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