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본 연극 <에쿠우스>와 영화 <82년생 김지영>에는 '인간 관계 속에서 발생한 마음의 병과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들, 나의 아내, 여동생, 누나와 같은 여성들이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로 생기는 상처, 마음에 담고 사는 것이 아픔이 되는 삶을 공감할 수 있었던 <82년생 김지영>...
비정상이라고 규정된 소년 알런 스트랑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는 '정열은 고통으로부터 파생된 단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걸 자기의 것, 자기의 인생이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고통과 싸워야 한다. ... 의사는 정열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친다.
자유를 억누르는 사회화 과정을 거친 사람을 ‘정상’이라고 말한다. 다수가 소수를 구분하는 기준이 항상 옳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회사, 심지어 가정에서까지도 '정상'과 '상식' 이름으로 개성과 다양성을 억누르고 있거나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창조적 혁신은 '정상'보다는 '비정상' 또는 '상식'과는 다른 시각, 접근에서 시작 되는게 대부분입니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관련 책이나 논문에서 많이 인용하지만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많지 않다는 소문의 책!
내용의 방대함과 추상화를 보는 듯한 모자이크적 구성, 한번에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문장들, 끈기를 가지고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64년에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는 직관과 통찰력, 그리고 상상력! 역사, 물리, 수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를 오가며 미디어를 연결짓는 지식의 넓이와 깊이에 혀를 내 두를 정도다.
[본문 발췌]
우리는 미디어를 주로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받아들인다. 매클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육체나 정신이 확장된 것으로 생각했다. 즉 옷은 피부를, 집은 인간 신체의 체온 조절 기제를 확장한 것이라고 파악했다. 말안장, 자전거, 그리고 자동차는 모두 인간의 발을 확장한 것들이다. 어떤 미디어 혹은 어떤 기술이든 그것은 인간의 확장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나르시스의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매클루언은 그 신화가 나르시스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일반적인 설명이 틀렸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은, 물에 비친 이미지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그가 죽게 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든 기술이 지니고 있는 효과, 즉 수용자를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하는, 전형적인 마비 효과에 굴복한 것이다. 기술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환경은 고통을 만들어 내며, 그런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신체의 신경체계는 작동을 중단해 버린다.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혹은 생태적인 흐름은 밀도가 낮은 곳으로 혹은 가장 마찰이 적은 곳으로 흘러가며, 당연히 곡선과 우회의 경로를 통해서 진행한다. 직선으로 가면 최단거리로 진행하는 동안 속도는 얻겠지만, 그 와중에 많은 마찰을 통해 열과 에너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고, 반생태적이고 소모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생태계의 일원인 인간의 경우, 감각을 이런 방식으로 확장하면 불가피하게 마비가 올 수밖에 없다. 중추신경이 마찰을 이기지 못해 절단하게 되는 것이다.
퇴조해가는 기계 시대에는 우리가 그리 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많은 일이 가능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한 반응이 상당한 시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처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행위와 반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는 신화적이고 통합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사고방식은 전기 이전 시대의 낡고 파편화된 공간과 시간에 머물러 있다.
선禪의 미술과 시는 사이와 틈을 통해서 참여를 창조해 낸다. 동양 예술에서 관람자는, 스스로가 작품 속의 여백을 메워야만 하기 때문에 작가가 되어 버린다.
연속성이 순간적인 것에 자리를 물려줄 경우 우리가 구조와 구성의 세계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물리학에서 일어났던 일도 회화와 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등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특수화된 부분들에 주목하다가 이제는 전체적인 장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의 속도와 전체적인 장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 시절 메시지는 곧 '내용'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그림은 무엇에 대한 것이냐고 묻곤 했던 것이다.
문자 문화의 동질화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비연속적인 삶의 형식들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은 간단히 설명하면 미디어에 대한 균형 이론이다. 세분화, 전문화에 대한 폐해로 파괴된 미디어에 대한 균형 잡힌 접근을 전기 시대의 도전에 맞춰 다시금 탐색하려는 것이 그가 이 책을 쓴 목표이기도 하다.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를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와, 텔레비전 같은 차가운 미디어를 영화 같은 뜨거운 미디어와 구별하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다. 뜨거운 미디어란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다. 여기서 고밀도란 데이터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한다. 사진은 시각적인 면에서 고밀도다. 반면 만화는 제공되는 시각적 정보가 극히 적다는 점에서 저밀도다. 전화는 차가운 미디어, 혹은 저밀도의 미디어다. 왜냐하면 귀에 주어지는 정보량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어서 듣는 사람이 보충해야 하는 연설은 저밀도의 차가운 미디어다. 반면에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별로 없다. 따라서 뜨거운 미디어는 이용자의 참여도가 낮고, 차가운 미디어는 참여도가 높다. 당연히 라디오 같은 뜨거운 미디어는 전화 같은 차가운 미디어와는 매우 다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이런 종류의 계획에 자극을 받아 나선적이고 동심원적인 형태를 기초로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했다. 그것은 전기 시대에서는 피해 갈 수 없는 계속 반복되는 형식인데, 그 형식에는 전기 속도가 지니고 있는 순간적인 특성, 그리고 계속 덧씌워진 깊이에 의해 이루어진 동심원적 패턴이 부과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평면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이루어진 동심원적 패턴들은 통찰을 위해 필요하다. 사실 이 동심원적 패턴의 관찰은 통찰의 기법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연구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미디어도 독자적으로는 의미나 존재를 갖지 못하고 오직 다른 미디어와의 지속적인 교섭 속에서만 의미나 존재를 갖기 때문이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기계적, 일방적으로 팽창한다는 낡은 패턴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전기 세계에서는 이제 적절하지 못하다. 전기는 중앙집권화시키지 않고 탈중앙집권화시킨다.
관념과 형식 등이 집중적으로 혼합되고 갈등을 빚을 때, 최대의 사회적 에너지가 배출되고 이로부터 최대의 기술이 발흥된다.
소유주를 대신해 라디오나 신문 혹은 영화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프로그램 내용에 관심을 쏟는데, 이는 운영자 특유의 편견이다. 소유주들은 미디어 자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대중이 원하는 것들' 혹은 몇몇 모호한 공식들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소유주들은 미디어가 권력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 권력이 '내용' 혹은 미디어 내에 있는 또 다른 미디어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서양의학은 'cure'를 강조하고 동양의학은 'healing'을 강조한다고 한다. 서양의학이 인간의 신체를 기능적인 부분들의 결합체로 보고 고장이 나거나 병이 난 부분을 교체 혹은 대체학나 환부를 제거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다면, 동양의학은 병의 원인에 더 집중하여, 전체 신체 기관의 균형을 회복시켜 주려는 경향이 있다. 즉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면, 전체적인 저항력의 증가로 스스로 고쳐 가는 힘을 북돋아 준다는 것인데, 매클루언의 미디어에 관한 설명과 비교해 보면, 깜짝 놀랄 만한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미디어가 우리에게 미치는 힘으로부터 우리가 균형을 잡아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힘, 즉 'heal'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 미디어 시대에는 문제 부위와 환자를 특정하고 파편화해서 'cure'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예화된 사회는 전문화를 통해 지배자들에게 꼭 필요한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전문가의 모습에 노예근성과 소심함이라는 낙인을 찍게 된 것은 아마도 하나의 대응 자극으로서의 전문가주의로 타락해 버린, 인간의 오랜 노예화 과정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구 세계를 관찰해 온 많은 사람들은 서구인들이 전문화된 수요의 증가로 인해 기술에 굴복하게 된 것을 일종의 노예화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파편화는 정복당한 포로들의 의도적인 전문화 전략과 달리 자발적이고 열성적인 것이다.
언어와 지성 사이의 관계는 바퀴와 인간의 발 및 신체 사이의 관계와 같다. 바퀴가 있으면 발과 신체는 보다 쉽게 그리고 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고 한층 적게 몰두해도 된다. 언어는 인간을 확장, 확대시키지만 동시에 인간의 능력을 여러 가지로 분할한다. 언어라는 이 같은 의식의 기술적 확장으로 인해 인간의 집합적인 의식 혹은 직관적 깨달음이 감소하게 된다.
문명은 문자 문화에 바탕을 둔다. 왜냐하면 문자 문화란, 알파벳에 의해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된 시각에 따라 하나의 문화가 일률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부족 문화에서 경험은 시각의 가치들을 억누르고 있는 지배적인 청각 감각적 생활에 의해 얻어진다. 차갑고 중립적인 눈과 달리 청각은 감수성이 고도로 강하고 섬세하며 모든 것을 포괄한다. 구전 문화에서는 행위와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표음적인 문화는 어떤 행위를 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억누르는 수단을 제공한다. 반응 없이 행동하는 것, 관여 없이 행동하는 것은 서구의 문자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고유한 장점이다.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은 구텐베르크 시대를 벗어남에 따라, 점차 우리 문화가 가진 동질성, 획일성, 연속성 등과 같은 특징들을 보다 쉽게 식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는 비문자 문화적인 다른 민족들을 손쉽게 누를 수 있었는데, 다른 민족 혹은 부족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다원주의, 특이성, 불연속성 등을 자신의 특색으로 삼고 있다.
모든 기술들이 힘과 속도를 높이기 위해 우리의 신체와 신경체계를 확장한 것이라는 점은 이 책의 일관된 주제다. 또 그 같은 힘과 속도의 증가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새로운 확장은 일어나지 않거나 폐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 구성 요소들을 배치하든 힘이나 속도의 증가 그 자체는 조직상의 변화를 야기하는 하나의 교란이기 때문이다. 사회 집단의 변화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은 종이 메시지 및 도로 수송에 의한 정보 이동 속도의 증가와 더불어 일어난다. 이같이 속도가 증가한다는 것은 보다 먼 거리에서도 훨씬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형성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붕괴를 의미한다. 파피루스와 알파벳의 사용이 빠르고 견고한 도로의 건설을 촉진하기 전까지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도시 국가라는 것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자연스런 형태였다.
기술적인 가속화 수단으로 인해 마을과 도시 국가들의 독립성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 가속화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중앙집권적 권력이 가능한 한 많은 주변 지역들을 균일화하는 조치를 취한다.
통계에서는 숫자들을 모으거나 결집시키는데, 이 숫자들은 현대의 동굴벽화 혹은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통계학자들의 도표를 만들어 낸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모여진 숫자들은 통계를 통해, 대중적인 취향이나 감정에 관한 원초적인 직관과 마술적인 잠재의식이 사람들에게 새롭게 밀어닥치도록 하는 상황을 제공한다: 그래서 "여러분은 유명 브랜드를 사용할 때 보다 큰 만족감을 느낀다."
"고전 수학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수가 감각 기관들에 '지각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본질이라는 수학의 명제다. 고전 수학은 수를 척도로 규정함으로써, '여기'와 '지금'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인간이 세계 전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척도를 잰다는 것은 가까이에 있고, 우리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잰다는 것이다."
부의 대규모 축적이 갖는 속성과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바깥으로 뻗어 나가려는 "군중 혹은 무리"가 지닌 신비스러운 욕구는, 돈과 수가 사실상 촉각의 힘과 손의 장악력을 확장하는 테크놀로지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란, 그것이 사람의 수든 숫자의 수든 아니면 돈의 단위든, 그 대상을 장악하고 포섭하려는 마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한히 세분화되고 또 반복 가능하다는 이러한 마술은 비대칭적인 것, 휘어진 것, 울퉁불퉁한 것과 같은 비시각적인 것 모두를 시각적으로 평탄하고 직선적이며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같은 식으로, 음성 알파벳은 그보다 수 세기 전에 비문자 문화적인 사람들의 불연속적인 문화에 침투하여, 그들의 구불구불하고 뭉툭한 특성을 서구 세계의 시각적 문화가 이끄는 획일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바로 이 균일하고 연속적이며 시각적인 질서가 아직도 우리의 "합리적" 생활을 이끄는 규범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즉각적이고 비시각적인 상호 관련의 형태를 갖는 이 전기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합리적"이라는 것이 어디서 비롯하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보들레는 도시를 우리 신체 기관들의 통합적인 확장물로 간주해 자신의 <악의 꽃>을 원래는 '가장자리Les Limbes'(역주)라고 부르려 했었다. 말하자면 보들레르는 다양한 기능들의 힘을 증복시키거나 늘리기 위해 우리 자신을 외재화시키는 것, 즉 그래서 나타나게 된 자기 소외를 악이 성장해서 핀 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탐욕과 감각적 충동의 확장으로서 도시는 그에게 하나의 완전한 유기적, 심리적 통일체였다.
피부와 체온 조절 기제의 확장으로서 옷과 주택은 무엇보다도 인간들끼리의 관계 맺음과 공동체의 유형들을 형성하고 재조정한다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미디어다.
문자 문화가 고도로 발전하고 파편적인 사회에서 "시간은 돈"이며 돈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의 축적물이다.
부족사회의 돈은 오늘날 먹을 수 있게 설계된 신종 우주선처럼 먹을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고 입을 수도 있다.
(시각적으로 그리고 단위별로 측정되는) 시간과 (균일하고, 그림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닫혀 있는) 공간은 즉각적 정보가 지배하는 전기공학 시대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각적 정보의 시대가 되면 인간은, 파편화하고 전문화하는 데 몰두하던 자신의 직업에 종언을 고하고 정보 채집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오늘날 정보 채집은 "문화"라는 포괄적 개념을 다시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꼭 원시 시대의 식량 채집자가 자신의 모든 환경과 완전히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일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이 새로운 유목적이고 "노동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절박한 관심사는 인생과 사회의 창조적 과정들에 대한 지식과 통찰이다.
모든 미디어들은 우리 자신의 확장이거나 혹은 우리 일부를 다양한 물질적인 것들로 번역시킨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미디어를 이해하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먼 거리에서 재료를 가져오기만 해도 그 재료에 노동이 더해진 것이다. 그 물건은 거기에 무언가가 더해진 만큼 노동과 정보, 혹은 기술적인 지식을 축적하게 된다. 하나의 물건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 그것은 이미 다양한 사물들을 어떤 공통분모로 번역하거나 환원시키는 화폐의 기능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힘과 정보가 분산되는 전기 시대에 우리는 시계-시간의 균일성 아래에서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공간-시간의 이 시대에 우리는 리듬의 반복성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풍자란 자신의 얼굴을 제외한 모든 얼굴을 보는 거울이다" - 스위프트Swift
'반응 없이 행동할 수 있는 힘'은 뒤에도 설명이 이어지지만, 문자적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적 인간들은 감정과 지식의 분리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일으키는 결과나 그것에 대한 자신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멀리서 그 예를 찾을 것도 없이, 자신이 개발하는 무기나 집행하는 정책 등이 가져올 결과나 효과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반응 없이 행동할 수 있는 힘'을 가능하게 해 준 문자와 그 이후의 기술 덕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반응하지 않고는 행동할 수 없는 시대가 바로 전기 시대인데, 이 시기는 모두에 의한, 모든 일에의 개입이 불가피한 시대다.
서구 문화의 힘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동질화에 의한 확장이라는 원리를 담고 있다. 열린 사회가 열린 까닭은 어떤 집단이건 수량적으로 추가될 경우 무한히 팽창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균일한 인쇄에 의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쇄의 획일성과 반복성은 연속적이고 측정 가능한 양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관념과 힘을 합쳐 르네상스에 스며들었다. 이 관념의 직접적 효과는 자연 세계와 권력 세계 모두 탈신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세분화와 파편화에 의해 물리적 과정을 제어하는 새로운 테크닉은 신과 자연,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켜 놓았다.
모든 기술의 변환은 유기체적 진화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기술들은 우리 신체라는 물리적인 것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새뮤얼 버틀러Samiel Butler는 진화의 과정이 기계적 양상으로 전환됨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되었다고 본 버나드 쇼의 통찰력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쇼는 그 문제를 애매한 상태로 두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버틀러 자신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였다. 기계는, 확장을 통해 자신들을 탄생시킨 바로 그 인간들의 몸에 바로 다시 영향을 줌으로써, 재생산에 있어서 인간을 대신하는 힘을 부여받았다. 우리 자신의 확장된 신체가 지니게 된 힘과 속도에 대한 반응은 새로운 확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든 기술은 그 기술을 만들어 낸 인간에게 새로운 스트레스와 욕구를 일으킨다.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기술에 의한 반응은 우리가 기존의 기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이것은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순간들을 분리해 낸다는 것은 사진만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 중 하나다.
오래된 미디어든 새로운 미디어든 간에, 다른 미디어와의 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와 신경체계의 확장인 미디어는, 새로운 확장이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는 생화학적 상호 작용의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사건을 보도하거나, 또는 전혀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난 사건들에 "색깔"을 입힐 수 있다.
모자이크적인 수단을 가지고, 신문은 공동체의 이미지 혹은 공동체의 특징을 만들어 간다.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항상 대중에게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미디어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 혹은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획일화와 규격화의 메커니즘이 낳은 하나의 뛰어난 작품이며, 그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계급이 없는 사회를 만든 구텐베르크의 기술과 문자 문화에 일치하는 것이다.
어떤 광고도 의식적으로 주목하게 되면 희극적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광고는 의식적인 소비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는 사람들에게, 특히 사회과학자들에게 최면술을 걸기 위해 잠재의식에 작용하는 약과 같은 것이다.
언젠가 역사가와 고고학자는, 지금껏 어떤 사회가 자신들의 모든 일상 활동을 전 범위에 걸쳐 기록한 것보다, 오늘날의 광고가 훨씬 더 풍부하고 충실하게 매일매일의 삶을 반영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집트의 상형 문자도 이 점에서는 훨씬 뒤떨어진다. 영리한 광고주들은 텔레비전을 가지고 모피든 솜털이든,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든 시끄러운 소음이든 자유자재로 이용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스킨 다이빙해 들어간 것이다. 왜냐하면 시청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스킨 다이버이며, 그들은 딱딱하고, 빛나는 표면에 반짝이는 햇빛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고통스럽고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는 계속 견뎌 내야 하지만 말이다.
예술과 게임은 우리를 틀에 박힌 일상과 관습에서 오는 현실의 압력에서 한 걸음 비켜설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을 관찰하고 의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대중적인 예술 형태로서의 게임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의 어느 생활에든 참여할 수 있는 직접적 수단을 제공해 주는데, 그 어떤 단일한 역할이나 직업도 그러한 것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모든 게임은, 모든 정보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개인 혹은 집단의 확장이다. 집단과 개인에 대한 그것의 효과는 아직 그다지 확장되지 않은 개인이나 집단의 부분들을 새롭게 재배치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미치는 효과들을 제외한다면, 그 존재도 기능도 생각할 수 없다. 게임 또는 대중적인 예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인간 공동체를 새로운 관계망과 상태로 설정함으로써 그것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전제를 심어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술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를 발견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시대에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은 언제나 지나간 시대라는 안경을 통해 현재를 바라본다.
오늘날 전체로서의 세계에 반응하도록 우리가 내몰리게 되는 이유는 바로 전기 미디어가 이와 같은 상호 작용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인 의식과 공적인 의식 모두의 통합적 전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기로 인해 만들어진 개입과 관여의 속도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시대'.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전기적 미디어가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상호 작용의 총제적인 장을 즉시 그리고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적 상호 작용의 세계는, 이제까지 우리의 개인적 신경체계만의 특성이었던 통합적 상호 작용이라는 포괄적인 범위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전기가 그 특성상 유기적이고, 또 전신, 전화, 라디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전기적 형식들이 지닌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유기적인 사회적 유대감을 굳건히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신경체계의 특성이기도 한 전기 커뮤니케이션이 갖는 동시성은, 우리를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고 또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전기 시대에 우리가 동시에 모든 곳에서 힘께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적극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소극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쇼를 봄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의식의 경험을 보다 적극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전기 미디어가 인간의 공간적인 조직의 힘을 확장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은 전기 미디어를 잘못 이해해 왔다. 그러나 전기 미디어는 공간 차원을 확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차원을 폐지해 버린다. 전기에 의하여 우리는 작은 규모의 촌락에서처럼 인간 상호 간의 깊은 관계를 어디에서나 되찾게 된 것이다. 그것은 기능과 힘의 이양이 없는 친밀한 관계다.
이전에 "식량을 채집하던 인간"이 뜻밖에도 "정보를 수집하는 인간"으로 다시금 나타난다. 이런 수집의 역할을 하면서, 전자 시대의 인간은 구석기 시대의 조상들만큼이나 유목민의 삶을 산다.
현재 영화는, 책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필사본 단계에 있다. 그리고 곧 영화는 텔레비전의 압력을 받아, 휴대할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쇄된 책의 단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영화는 알파벳이나 인쇄만큼, 다른 문화 속으로 폭발해 들어가는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형식이다. 그 폭발적인 힘은 발성영화에서보다 무성영화에서 훨씬 더 컸는데, 왜냐하면 전자기적인 사운드트랙은 이미 기계적 외파가 전기적 내파로 대체된다는 것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발성영화와는 달리 무성영화는 언어 장벽을 넘어서 즉시 받아들여졌다.
독일과 중부 유럽이 음악, 댄스, 조각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청각적, 촉각적 형태와 같은 풍부한 비시각적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족적 사고방식 덕분에 그들은 새로운 비시각적인 아원자물리학의 세계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는데, 그 세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문자 문화를 누려 왔고 그리고 이미 오랫동안 공업화되었던 사회들은 결정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중립적인 눈에 비해 귀는 과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귀는 완고하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반면, 눈은 개방적이고 중립적이며 연대적이다.
드라마에 소리밖에 주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시각적으로 동작을 상상할 뿐만 아니라, 모든 나머지 감각들을 채워야 한다. 너무도 많은 부분을 "스스로 하기", 혹은 행위의 완성과 "폐쇄"는 젊은 사람들이 주위로부터 벗어나 고립된 태도를 지니게 하고, 그들을 멀리 떨어져 있고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라디오가 주는 소리의 신비로운 병풍 덕분에, 젊은 사람들은 방해받지 않고 숙제를 할 수 있는 프라이버시를 얻고, 부모의 명령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상업적인 오락 전술은 정신생활과 사회생활 모두에 동일하게, 모든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의 속도와 힘의 최대치가 될 수 있게 보장해 준다. 따라서 그것은 변화보다는 영속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희극적 전술이 된다.
모든 사람은 그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경험한다. 게다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이다. 특히 미디어나 테크놀로지와 같은 집합적인 문제들이 관련되는 곳에서, 개인은 거의 불가피하게 자신에게 가해지는 효과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텔레비전은 행위의 미디어가 아니라, 반응의 미디어다.
텔레비전 미디어는 과정에의 참여와 복잡한 반응이라는 주제를 열망하는 미디어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형식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영화가 과정을 훌륭하게 다룰 수도 있지만, 영화 관객은 반응에의 참여자가 되기보다는 행위의 수동적인 수용자가 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문자 문화에서 유래된 연속성, 획일성, 연결성에 대한 시각적인 강조는, 우리를 파편화된 반복 행위를 통한 연속성과 선형성을 실행하는 거대한 기술적 수단과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이러한 수단을 벽이나 도로에 사용하는 벽돌에서 발견했다. 반복적, 획일적인 벽돌은 도시와 제국의 도로나 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는데, 이것은 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시각의 확장이다. 벽돌로 쌓은 벽은 모자이크적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모자이크적 형태 또한 시각적 구조가 아니다. 모자이크적인 것은 춤처럼 눈에 보이긴 하지만, 시각적으로 구조화될 수 없다. 그리고 또한 시각적인 힘의 확장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자이크적인 것은 획일적이지도, 연속적이지도, 반복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촉각적 텔레비전 영상과 비슷하게, 비연속적, 비대칭적, 비선형적이다. 촉각에서는 모든 사물이 갑작스럽고, 뒤집어져 있고, 근원적이고, 따로 떨어져 있고, 불가사의하다. ... 현대 예술의 비시각적인 모자이크적 구조는, 현대 물리학과 전기적인 정보 패턴들처럼, 직접 개입하지 않고 떨어져서 보는 듯한 자세를 허용하지 않는다. 촉각이 그러한 것처럼, 텔레비전의 영상의 모자이크적 형태 역시 존재 전체의 심층적 참여와 개입을 요구한다. 이에 비하여 문자 문화는, 심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시간과 공간의 획일적인 조직화에 이르기까지 시각의 힘을 확장함으로써, 보는 사람에게 관찰 대상으로부터의 분리와 비관여의 힘을 부여하였다.
자동화가 이루어지면, 직능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역할이 다시 나타난다. 교육에서, 그리고 데이터를 정리, 배열하는 것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전문화가 강조되어 왔지만, 전기에 의해 즉시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된 현대에는 전문화가 다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동화는 정보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의 세계에서 직능을 없애 버릴뿐만 아니라, 학습의 세계에서 교과목을 없애 버린다. 그러나 그것이 학습의 세계를 없애지는 않는다. 미래의 노동은 자동화 시대에서 "살아가는 것 배우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기 테크놀로지 일반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것은 문화와 테크놀로지, 예술과 상업, 일과 여가라는 낡은 분법을 없애 버린다. 단편화가 지배적이었던 기계 시대에는 여가가 일이 없는 것, 또는 단순히 놀고 지내는 것이었지만, 전기 시대에는 그 반대가 맞는 말이다. 정보 시대가 모든 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열심히 대상에 관여함으로써 가장 한가하게 여가를 누리게 된다.
화가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기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 말하자면,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물체들이 가진 각각의 특수한 위치를 모두 포함하는, 변화가 가능한 상태라고 말하게 되는 것
매스 미디어 역시 그 수용자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기에 동시에 관여되기 때문에 매스미디어인 것이다.
문자 문화와 인쇄의 오랜 발전과 그것들이 사회적 경험과 조직에 미친 영향을 거꾸로 돌려 보면, 기계 산업에 없어서는 안 될 고도의 사회적 획일성과 동질성을 문자 문화와 인쇄가 어떻게 해서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거꾸로 돌려 보라. 그러면 우리는 익숙한 것들 속에 존재하는,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들이 주는 충격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형식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재료와 모양, 그리고 위치한 주변환경 등 눈에 보이는 요소에 치중한다.
그러나 건축물이 만든 공간, 그리고 그 공간에서 인간들끼리의 관계맺음과 공동체 형성까지 살펴볼 때 건축물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본문 발췌]
한 명의 사람은 그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잘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건축물의 진정한 의미는 건축물이 사람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평등과 전체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목적은 숭고하나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평등을 획일화를 통해 이루려 한다. 평등은 다양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다양성은 행복의 가능성을 높인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학교 건물에서 공부한다고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건축물은 돌, 벽돌, 유리 같은 재료로 만든 무생물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건축물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그 무기질 재료 부분이 아닌 그 부분을 제외한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을 싸고 있는 재료들이 좀 변형되어도 그 안의 빈 공간을 사용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건축물은 다른 물건과는 다르게 사람보다 오랫동안 살아남고 시대에 따라 다른 용도로 변형되면서 다시 사용된다. 건축물 자체를 재사용하는 업사이클링 건축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살아남기 위해 '빈 공간'이 진화하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가 창조라고 하는 것들은 어차피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닌, 자연에 있는 물질의 재구성일 뿐이다.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는 행위다. 그러니 내가 다 쓰고 나면 후손들이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업사이클링도 잠시 빌려 쓰는 행위다. 현재 지구상에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인간 개체 수가 있고 모두가 살아남아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어느 때보다 나누어 쓰고 다시 쓰는 업사이클링이 필요한 때다. 우리 시대에 태어난 건축물은 다음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어떤 진화의 몸부림을 치게 될지 궁금하다.
건축물을 만들 때 우리는 건축물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그 건축물이 담아내는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차를 선택할 때 자동차의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외관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동차를 누구와 함께 타고 어디를 가느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건축과 도시를 만들 때 건축물 자체보다는 그 공간 안에서 이루어질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해야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보면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하나의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서서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계속해서 회전하는 하나의 바퀴"라고 역사의 지속성과 반복성, 그리고 순환에 대한 의미를 이야기한다.
역사는 또한 역사가 과거-현재-미래가 상호작용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정확하고 그 무엇에도 쏠리지 않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만큼, 그 어떤 증오나 두려움 때문에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진실의 어머니이며 시간의 그림자이자 행위의 축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증인, 현재의 본보기이자 반영, 미래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에서
[본문 발췌]
역사 서술은 사실을 기록하는 작업이자 사회 변화의 원인과 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활동이며 어떤 대상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 행위이기도 하다. 성실한 역사가는 사실을 수집해 검증하고 평가하며 중요한 역사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다. 뛰어난 역사가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해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며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과 역사 변화의 패턴 또는 역사법칙을 찾아낸다. 위대한 역사가는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로 엮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의 내면에 인간과 사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과 감정의 물결을 일으킨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해 과학을 껴안으며 예술로 완성된다.
교류가 전혀 없었던 두 문명에서 비슷한 때 본격적인 역사서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려는 욕망이 우리 인류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흔히들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 역사 서설의 과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처럼 고매한 과업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보이려 할 뿐이다. - <1494년붕터 1514년까지 라틴족과 게르만족의 역사> 서문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아를 없애어 비아에 바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흔적만 남긴다. 이는 고금의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다. - <조선상고사> 13~14쪽
역사가의 선택을 받은 사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자. 수많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느 것을 사실로 인정할지, 그 사실에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부여할지는 역사가의 주관적 평가와 해석에 달려 있다. 역사적 사실은 순수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발언하는 게 아니라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고 무언가 할 수 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의 진로를 만든 것은 세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만 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척을 가속했다. 과학혁명은 겨우 500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역사의 종말을 부르거나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 세 혁명은 인간과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 <사피엔스> 18~19쪽
뇌 배선이 달라지는 생물학적 돌연변이 덕분에 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으며 협동하는 능력을 얻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란 무엇인가? 첫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이 '신'이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꽃이라고 하는 '법인', 우리가 소중이 여기는 '인권'과 '국민주권' 개념도 그렇다. 사피엔스는 이런 것을 믿으면서 거대한 공동 행동을 조직했고, 그런 능력 덕분에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인간 종을 모두 밀어내고 지구 생태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통계학에 '자유도'란 개념이 있다. '통계적 특성치를 계산하는데 자유로이 값을 취할 수 있는 관찰치의 수',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노예의 삶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자의든 타의든 사회라는 시스템에 구속 된 삶에 적응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삶의 방법에 대한 선택을 잊어 버렸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유 (自由) [명사]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2.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3.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
[비슷한 말] 자유자재, 해방
[반대말] 구속, 속박, 규제
(네이버 영어사전) freedom, liberty
언론[종교; 출판]의 자유 freedom of speech[religion; the press]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자유를 위해 싸우다 fight for freedom
자유를 맛보다 taste[experience] freedom
자유를 제한하다 restrict sb's freedom
자유를 박탈하다 take away sb's freedom(s)
자유 계약 선수가 되다 become a free agent
자유 시간을 갖다 have free time
자유 시간을 갖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 have time for oneself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We should respect personal liberty.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그는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찾아 망명했다 He expatriated in search for a society that guarantees freedom.
가든지 남든지 그것은 당신 자유입니다 You are free[at liberty] to go or stay.
가든지 남든지 그것은 당신 자유입니다 It's up to you whether you go or stay.
선택은 네 자유다 The choice rests with you.
그는 그 기계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He operated the machine skillfully.
그는 지난달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He was freed from prison last month.
그녀는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She speaks three languages fluently[very well]. She has a good command of three languages.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자유'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물론 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돈과 삶을 결부시킬 때 우리는 자유를 사기엔 턱없이 가난하다는 확신이 더해질 뿐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시행착오는 자유를 의미한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소유에 의존하는 삶은 일을 하거나 존재를 바탕으로 한 삶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윌리엄 제임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이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때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이 신성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바람처럼 떠돌던 무애인(無碍人)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의 원인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유의 최대의 걸림돌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핵심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강판권, <나무 철학>
나무는 잎을 버린 뒤에야 여유를 찾는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풍요롭지만 여유가 없다. 인간도 몸이 가벼워진 뒤라야 여유로울 수 있다. 여유는 비어 있는 여백과 같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 겨울나무는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껴입고 움츠리는 것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도 힘차게 생동한다. 여유가 있어야 자유롭다.잎 떨어진 나무는 절대 자유 그 자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겨울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내가 가진 '자유'입니다. / 좀 힘들어도 /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 / 남의 눈치 보며 돈을 조금 더 버는 것보다 / 훨씬 나은 삶입니다. / 내 자유를 돈 받고 팔지 마세요.
무소유는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 반대로,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데도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 참고 사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E. F. 슈마허 외, <자발적 가난>
스스로 족함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가난할지라도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곳이다.
가난함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요, 아무런 바람도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모든 것을 가지려는 것이다. - 아코포네 다 토디
욕망은 속박이요, 버림은 자유이다. -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
자발적 가난은 유일하게 창조적인 가난, 그러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성스러운 가난이다. 이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미래와 존재에 반하는 투쟁이며, 야망과 권력에 얽매여 사랑을 잃고 자아를 상실한 채 타인에게 운명을 내맡기는 삶의 확실한 해독제이다. 자발적 가난은 욕구의 결핍에서 나온다. 자발적 가난은 이러한 결핍에 만족한다. 자발적 가난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존재의 단순한 골격만으로 부유함의 모든 욕구를 대체한다. 자발적 가난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의 기원이며, 성취다. 자발적 가난은 자아를 정복한다. 따라서 이는 정신 수행의 도구가 된다. 자발적 가난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물질세계 내부에서 고통을 덜어주는, 그리하여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이다. 자발적 가난은 일관된 철학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경험에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다. 자발적 가난은 제도적 가난을 자발적 가난의 권리에 대한 박탈로 인식함으로써 강력한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킨다. 유일하게 창조적인 긍지인, 가난에 대한 긍지는 자발적 가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자발적 가난은 마음의 평화이다. -안드레 밴던브뤼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청춘에 답하다>
고대사를 연구한 독일의 사학자 바르토르 니부어는 "야만의 시대가 온다"라고 말했다. "그런 시대가 이미 와 있다. 우리는 야만적 시대에 살고 있다. 야만이란, 뛰어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것들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입법가든 혁명가든, 평등과 자유를 동시에 약속하는 자는 공상가 아니면 사기꾼이다."
자유의 의미를 안다. "우리는 충족돼야 하는 일정한 제약조건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힘을 알고, 절도와 분별력을 갖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만이 성공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네. /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위험에 둘러싸여 / 알찬 삶을 보내리라. /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 그런 드높은 행복을 미리 맛보며, /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즐기노라.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샤르트르는 우리의 목표가 자신의 존재와 자유(선택 가능한 범위 내)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회와 조직이 지시한 대로 행동하는 고지식한 사고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직업 같은 건 자유롭게 선택하면 될 텐데도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취직 인기 순위의 상위에 올라 있는 회사만 원하는 것은 전형적인 '융통성 없는' 사고다.
소위 성공은 사회나 조직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기대받은 성과를 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샤르트르는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자유롭다는 것은 사회나 조직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르트르 또한 조직과 사회가 들이대는 척도를 보며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창조해 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자유주의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를 첫 번째 가치로 소중하게 여긴다.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며 그것은 각 개인의 감정과 욕망, 선택으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정치에서 자유주의는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고 믿는다. 따라서 민주적인 선거를 옹호한다. 경제에서 자유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따라서 자유 시장 원리를 반긴다. 사적인 문제에서 자유주의는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신의 마음을 따르라고 권장한다. 다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개인의 자유는 인권 속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은 디지털 독재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질서는 자유와 더불어 평등의 가치도 중시해왔다. 자유주의는 늘 정치적 평등을 소중히 여겨왔을 뿐 아니라, 경제적 평등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회 안전망 없이 쥐꼬리만한 경제적 평등만 가지고서는 자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자유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유례없는 최고의 불평등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부와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는 것이다.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지적했듯이, 행복은 우리가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캐서의 용어로는 자율과 확신이며, 데이비드의 용어로는(그리고 기업 구조의 용어로는) 자치다.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소속감에 대한 욕구 또한 중요하다. 생성적 구조에서 소속감과 자율은 함께 자유로이 작용해 활기 띤 전체를 만들어낸다.
정철, <한글자>
칸, 원고지 한 칸에 글자 하나. 조정래 선생도 나도 이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란, 내 앞에 놓인 한 칸에 내가 넣고 시픈 글자를 마음대로 넣어도 좋다는 뜻이지, 두세 개의 글자를 한꺼번에 쑤셔 넣어도 된다는 뜻은 안니다.
정철, <불법사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마음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말라고 해도 되는 것.
자유형, 수영의 한 종목. 꼭 이렇게 수영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가장 자연스러운 영법. 그러나 세상 모든 자유형선수들은 다 똑같은 팔동작으로 물을 가른다. 자유를 안겨줘도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바보들의 게임.
김영하, <말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 직시하게 됩니다. ... 한계에 부딪쳤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임영익, <메타생각>
창조는 그것이 수학이든 예술이든 항상 '자유로운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무엇이든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창조를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상상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유로운 상상조차도 기존 지식과 자신의 경험에 의해 크게 지배를 받는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욕망을 키우거나 확장하는 일은 지혜에 대립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유와 평화에 대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이 커지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며, 그래서 생존을 위한 두려움도 커지게 된다.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 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우주는 시간이 흐를수록 빅뱅에 의해서 생성된 초기의 얽매임(균일한 상태)으로부터 해방되어 갈수록 자유롭게 편중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엔트로피를 자유로움의 척도로 파악하는 것이 인간행동의 엔트로피를 연구할 때 무척 중요하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역설적으로 항상 자유롭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제약이 된다. <끝없는 이야기>와 <모모>로 유명한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의 작품에 <자유의 감옥>이란 이야기가 있다. 자유로운 선택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제약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상황은 다르지만, 자유를 인정하면 행동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결과 활동효율이 제약을 받게 된다. 이미 논했듯이 이 자유로움 때문에 사람이 하나의 활동에 100%의 시간을 모두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업무 생산성이나 시간 사용법 등 모든 것에 사용된다.
인간의 활동은 열기관과는 다르지만 열기관과 동일한 제약을 받는다. 미시적인 요소 간의 자원 분포나 엔트로피의 증가 등이 물질의 경우와 동일한 형태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활동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으므로 효율의 정의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열역학에서 유추해 활동효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자. 즉, 전체 활동 시간을 분모, 이 활동 시간 안에 이루고자 하는 활동에 투입한 시간을 분자로 해서 나눈 값을 활동효율이라고 정의한다. 이루고자 하는 활동에 사용한 시간의 비율이 활동효율이다. 즉 활동효율은 어떤 활동에 얼마의 시간을 쓸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자유의지대로 활동을 선택할 수 있다면 활동효율은 100%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활동이 열역학을 따른다고 하면 활동효율은 어느 상한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따르면 활동의 '자유로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롭다는 것은 하나의 활동에만 자원을 집중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활동 시간에 제약이 가해지는 셈이다. 이는 열기관의 효율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의 제약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원자의 움직임이 '자유롭기' 때문에 열기관의 효율은 일정 수치를 넘지 못한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당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언제나 원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지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지하여 행복과 번영을 찾도록 만들면 당신은 두려울 게 없어진다.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가르쳐주어 당신 없이도 살 수 있게 만들지 말라.
선택의 제한된 특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 많은 자유가 일종의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한다. '무제한적인 선택'이라는 말은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마비시켜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택의 폭이 제한될 때 편안함을 느낀다. 따라서 똑똑한 사람은 이러한 원리를 통해 기만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다. 눈앞에 놓인 대안들 가운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조종당하거나 속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이 적은 양의 자유를 주면서 실제로는 당신의 의사를 강력하게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한다. 따라서 항상 좁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증가한 선택의 자유에 이르는 모든 길이 그렇듯, 맞춤 뉴스가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의 어려움을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자기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을 때 자유롭고 행복한지, 어떤 일을 하면 보람을 느끼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데 인지를 못할뿐더러 그 선택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하려고 한다. 더욱이 '남의 나'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통해서 세우려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게 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혹은 배우자가 승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이 결정된다. 자기를 위한 사람을 제대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희생적이면서도 의존적이 되기 쉽다. 게다가 아이나 배우자, 부모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함부로 넘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간섭하고 간섭당하며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사람들은 여가시간을 보낼 때보다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로 인해 더 많은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자유시간에 사람들은 지루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다시 일하러 가는 걸 가장 싫어했다. 칙센트미하이와 르페브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때보다 일을 할 때 더 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여가를 즐길 때가 아니라 일을 할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유리감옥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 몸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쇠약해질 뿐이다.
다니엘 슈라이버, <어느 애주가의 고백>
실패란 동시에 자유를 의미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죄의식을 견디기 위해, 불안함과 자책을 덜기 위해, 자신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스스로의 하찮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완전히 어리석은 전략이다. 술은 삶의 어떤 경험, 어떤 경력, 위대한 생각, 일 혹은 책과도 상관이 없다. 삶은 그 자체로 항상 충분하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경우라면 그 활동은 생산활동이다.
최인철, <굿라이프>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유가 우리 손에 있는 사회가 아니라, 시스템이 자유를 움켜쥐고 우리를 대하는 사회이지요. 우리는 이런 사회를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별로 없지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성취하면 칭찬받지만, 열심히 일하지 못하는 순간 냉정하게 내쳐지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 있는 시스템, 그들을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없는 곳에는 놀이도, 창의도, 혁신도 없습니다.
최윤식/최현식, <제4의 물결이 온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강제한 규범이라도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해서 거역하거나 고칠 수 있는 의지와 행동이다. 왜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울까? 자유의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행동의 자율성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 판단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판단한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 가설을 세우고 기존 가설과 비교하여 더 좋은 가설을 선택하는 행위로 옮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자유의지의 핵심은 선택의 자유도가 아닌 가치 판단의 자유도이다. 기존 가치 판단을 학습해서 새로운 상황에서 가치 판단 기준을 재설정하는 능력도 포함한다.
법정 스님, <무소유>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야마시타 히데코,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소유욕은 가지면 가질수록 자유를 잃는 정체 모를 욕구입니다. 호흡, 휴식, 수면, 음식, 배설처럼 본능에서 오는 욕구와 달리 이차적 욕구인 소유욕은 생명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만 물건을 갖고 싶어할까요? 타인과 비교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대산하기 위해서? 집에 있는 물건을 차분히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안에 숨은 당신의 진심을 알게 될 테니까요.
소노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남과의 비교를 중단하면 자유로워진다. 자연스레 막힘없이 나의 생활을 키워나가는 힘이 생긴다. 나만의 특기가 발견되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고, 더 단순하며, 훨씬 큰 위안을 줄 수 있게 과장하고 창조할 자유가 있다." - 모파상, <피에르와 장>의 서문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길>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어버려 '바탕'이란 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버렸다. 똥더미 속에 감춰져버린 다이아몬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말이다!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퍼져야 하는 나팔소리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나의 마음속엔 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을 추앙하고,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보다 넓은, 우주를 닮은 마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마음을 거역하고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우주의 완성은 나의 완성에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존재로 나의 영원한 지성에 다가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는 모든 악한 풍파 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것, 내 욕망을 다스리는 것, 혈기를 참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명예와 호화로운 저택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공허하고 따분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의 삶이 억눌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당신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자연의 뜻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을 태어나게 만든, 그리고 당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자연의 질서를 기억해내십시오. 질서가 당신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깨달으십시오. 그래야만 사람들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유시민/정훈이, <표현의 기술>
표현의 기술은 자유롭고 자신 있게 내면을 표현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신영복, <담론>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부정적 집합표상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representation)은 인간의 인식활동입니다. 우리는 남산을 바라보지 않고도 남산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격리되어 있지만 대상을 재구성하는 인식 능력입니다. 대상은 그에 대한 1개의 표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표상 즉 집합표상으로 구성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고유의 집합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란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봉건제의 집합표상이 청산되지 않는 한 프랑스혁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 한 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인도가 안겨 주는 달관은 그것의 크기에 있어서 인류사가 역사의 도처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욕망의 집합표상을 일소하는 느낌을 안겨 줍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적 사유로서는 쉽게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탈근대를 지향하고 비근대를 조직하는 후기 근대사회의 실천적 과제에 앞서 인도의 달관은 '카르마의 손損'이라는 점에서 탈문맥, 탈정의 의미로 주목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완전한 자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까닭은,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자유로운 까닭은,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질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는 걸 안다면, 무엇 때문에 마냥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몰입하면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목표에 집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이처럼 대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 깊이 없이 폭넓은 경험만을 추구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래, 어린 시절에는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게 바람직하다. 아마 필수라 해도 좋을 거다. 결국엔 세상을 폭넓게 경험하면서 내 모든 걸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황금이 묻혀 있는 곳은 깊다. 뭔가에 끊임없이 몰입해 깊이 파고들어 그걸 캐내야 한다. 관계, 직업, 훌륭한 생활 방식을 만들기를 비롯한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호기심과 상상력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그 능력에 따라 인간의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통,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는 반드시 호기심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세계, 자유로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겠는가?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창조의 진정한 에너지가 바로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개별을 배제하는 보편의 감옥에 사는 것과, 그 밖에서 개별자로 자유롭게 사는 것.
안드레아 울프, <자연의 발명>
자연은 훔볼트의 교사였다. 훔볼트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교훈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자연은 자유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균형은 다양성에 의해 이루어지며, 다양성은 정치적 도덕적 진실의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끼나 곤충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참나무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자연 속에서 각각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모여 전체를 이룬다. 인간도 자연의 작은 구성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훔볼트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자유공화국republic of freedom이었다.
팀 페리스, <나는 4시간만 일한다>
물질주의적 탐닉과 시간에 쫓기는 강박, 그리고 비교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인간은 속도와 크기에 집착하는 문화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벋어날 수 없다. 속도와 크기에 집착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속도를 줄이는 법을 배우자. 일부러라도 길을 잃어보자.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 - 이남곡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등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인간은 수많은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통해 자유를 증진해왔다.
둘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도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타인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과학, 종교, 여성운동도 진보의 중요한 영역이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우선순위에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나의 자유 의지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기 때문에 삶이 힘든 것이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두려움은 너를 포로로 붙잡아 두지만,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 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자율주행 상황의 딜레마는 우리의 삶이 알고리즘의 세계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의 판단과 행동이 언제나 합리적이지도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지도 못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우연과 무작위, 그리고 무지의 장막으로 보호되어왔다. '실수'라는 것은 사람에게 허용된 자유의 영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존하고 위임한다는 것은 이러한 우연과 무작위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다. 우리는 사람과는 달리 기계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도, 자유를 부여할 수도 없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여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시간을 즐기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별다른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자유시간은 일보다 즐기기가 어렵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여가가 아무리 생겨도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것은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사실은 신성하며, 의견은 자유롭다. - C. P. 스콧
모종린, <골목길 자본론>
골목을 사랑하는 여덟 가지 조언을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주의다. 개인의 자유, 선택, 창의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공공재 창출 능력을 신뢰하는 것. 자유주의자라면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큰 집단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율적으로 성장한 골목길의 변화에도 유연해야 한다. 골목길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야 하기에, 개인이 선택한 결과로 발생한 골목길의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가 골목길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도브 사이드먼은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서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이드먼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freedom from'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시시콜콜 간섭하는 상사로부터의 자유, 광고를 보라고 강요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동네 가게로부터의 자유, 지역 은행으로부터의 자유, 호텔 체인들로부터의 자유가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는 '행동할 자유freedom to'라고 사이드먼은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그들의 자유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선거, 헌법, 법의 지배, 그리고 의회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많은 지역에서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지역에서 혼란이 확산되면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먼은 리비아나 시리아, 예멘, 또는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 추락 이후의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이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얻지 못한 점에 주목해 그 차이를 '자유의 불평등'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불평등일 것이다. 사이드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벗어날 자유'를 얻는 건 신속하고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행동할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법률과 도덕률을 만들어 행동할 자유를 갖게 되기 전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이기주, <말의 품격>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몽테뉴가 노래한 삶의 태도 = '정신적 자유인', 가장 아름다운 정신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정신이다. 철학이란 어떻게 죽을까를 배우는 것이다. 기적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자연의 본질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의 준비는 자유의 준비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유 의지의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 돌아가려는 운명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원인과 결과의 체계인 반면 도덕적 선택은 자유 의지의 문제인데 자유 의지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도덕적 선택을 하거나 단순한 본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의 영역을 초월하여 자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자유의 영역은 유일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허용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인생에는 구속을 벗어나 제 멋대로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점에서, 이성은 우리에게 그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타인이 제 멋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때라고 말이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자유를 추구하고, 사물을 보는 시점을 보다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은 많은 이점을 낳는다. 우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확대시키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그것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분노나 혐오의 감정도 자연히 필요치 않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활기차고 말쑥한 인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정신과 마음이 이처럼 현명하기 때문이다. - 선악을 넘어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어떻게든 구속할 필요가 있다. 감정을 제멋대로 풀어놓는다면 그때마다 감정이 자신을 휘두르고, 혹은 감정이 이끄는 한 방향만으로만 몸과 마음이 향해 결국에는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본인의 의지대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같은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실천하고 있다. - 선악을 넘어서
인생에는 돈도, 쾌적한 주거도, 건강하고 풍성한 식사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람은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유가 도를 넘으면 사람은 180도 돌변하여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고 휴식 시간까지 구속당하며, 조직에 조종당하고 끝내는 국가의 구속까지 받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 - 볼턴 홀 <3에이커와 자유>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자유는 단지 권리가 아니라 획득해야 할 기술이다. 나만의 렌즈가 아니라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기술이자 아무도 상상한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해서 아름다움이나 의미나 영감을 찾는 기술이다. 각자의 삶은 이런 자유에 관한 우화다.
고대 아테네에서 고용은 노예를 위한 것으로 자유인은 남에게 굽실거리며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다. 고용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를 팔아서 시간제 임금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긴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고, 사전에 정해진 목표로부터의 자유와, 사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불가피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태도로부터의 자유에 의존한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자존감을 갖지 못하면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자유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자존감이 파괴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과 맞서 싸우고 저항하고 의문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면 안 된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존감이 충분하면 누구와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지 않게 된다. 나 스스로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비교할 이유도 방법도 없다. 이때야 비로소 막힘이 없어져 시야가 넓어지고 보는 만큼 자유롭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행복을 얻게 된다.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 플톨레마이오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도 없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은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그런 정책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내려놓을수록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더 높이 날고, 높이 날수록 더 많이 본다. 가는 실에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다시 오지 않을 현재의 순간을 사랑하고, 과거 분류하기를 멈추는 것. 그것이 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의 모습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새는 날갯깃에 닿는 그 바람을 좋아한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창작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돈으로 살수도 없습니다. 이 창작의 자유는 먼저 작가 자신이 그것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필요로 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자유는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지켜봅니다. 만약 이 자유를 다른 무언가와 바꾸려고 한다면 자유라는 새는 멀리 날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팔려고 한 대가입니다. 작가가 다른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지만, 그 사회에 대해서는 도전이 됩니다. 물론 그것은 의도한 도전이 아니므로 작가 스스로 영웅이나 투사가 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다해도 그것은 어떤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작품 외적으로 약간의 공훈이 더해졌을 때의 일입니다. 작가가 사회에 도전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언어를 통해서여야 합니다. 그조차도 작품 속 인물이나 배경을 빌려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문학은 분노의 고함소리가 아니며, 개인적인 성토의 수단도 아닙니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 문학으로 완성시킬 뿐입니다. 그런 작품만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회에 도전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유력한 답이 됩니다. 이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모든 소란은 사라지고, 작품 자체의 목소리만이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공空은 도상 안에 있으면서도 도상 밖에 있다. 일종의 해탈이며 정신적 경지다. 사람은 일정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또한 그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롭고자 한다. 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일깨움을 준다. 시간과 공간은 회화에 부여되는 일종의 한계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 무소부재하는 선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조형예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꼭 필요한 거리가 없으면 온종일 충돌이 일어납니다. 가정과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과 양해가 필요한데, 관용과 양해는 각자의 마음속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최우선 조건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되는데,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미디어가 모든 시간을 장악해버린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면, 고독만이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고독이 병통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자유인의 네 가지 특징: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정정(訂正)하는 유머감, 행위의 변덕성과 분방성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여행의 소득은 전혀 알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새로 고쳐보는 데 있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과도 통한다. 과거에 대한 배려는 미래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나그넷길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도 자유인이다. 인생 그 자체가 자유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정착사회의 번거로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보려는 욕구의 발로다. 여행이란, 안전한 일상생활과 다른 이질적인 세계로, 긴장을 내내 수반한다. 예컨대 편리한 환경에서 불편한 환경으로, 넉넉한 생활에서 모자라는 삶으로 스스로를 옮겨보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이란, 안전할 수도 있고 호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늘 자유분방해야 하며, 고독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나서야만 한다.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여행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관습에서 탈피하는 일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이다. 굳이 해방을 꾀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자유로워진다. ... 여행은 끊임없는 과정이다. ... 여행, 사랑, 죽음은 모두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접한 칼 마르크스의 말에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저장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바로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표적 행위가 여행이라고 본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하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미쉘, <오늘부터 미니멀라이프>
물건이 적어지니 시간에 여유가 생겼고 더불어 마음까지 가볍고 자유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손에 뭔가를 쥐고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누구나 미니멀리스트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을 꽉 움켜쥘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빼앗긴다. 나 자신의 가치는 갖고 있는 물건의 합계가 아니다. 물건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주 잠깐 동안일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은 에너지와 시간은 물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얻었다. -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할 것 없이 지각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에서, 기본 입자들의 무작위적인 일탈이 있기 때문에 곧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긴 예정된 연쇄작용에 속할 뿐이라면 자유의자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만약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면, 태고부터 하나의 원인은 또다른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끌어내곤 한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과다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 관계의 그물망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 부분 그대로가 곧 전체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린다. -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자비와 지혜, 혹은 깨달음과 사랑은 선후나 우열로 나뉠 수가 없는 가치이다. 마치 평화 없이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유 없이 평화로울 수 없으며, 존중 없이 평등이 있을 수 없고 평등 없이 상생이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철수, <이철수의 웃는 마음>
자유나 기쁨을 소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병든 사람은 되지 말자.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부와 사치에만 익숙해지면 소박한 삶을 잊게 되고 내면적인 즐거움과 평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더 큰 속박을 당하게 된다. 크게 바랄수록 자유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한다>
개인정신주의는 개인의 마음속이 평온하고 자유로운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너무 적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게 균형이 잡힌 부(富)라는 것은, 그 상태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의 내적 균형이 지구 전체의 균형으로 이어져야 한다.
빚을 내서 물건을 하는 행위는 미래의 시간까지 구속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호화스러운 것을 산다 해도 그걸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경제적 자유(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빚이 없고 매월 나가는 고정비가 적다는 의미에서)와 시간적 자유(오프그리드에서 생활하기 위해 다소의 관리는 필요하지만 내킬 때 하면 된다는 점에서)를 바탕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만이 아니라 지구환경에도 유익한 집과 생활이 완성되어 있는 삶을 추구한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Tumbleweed Tiny House company를 운영하는 제이 셰퍼Jay Shafer는 영화 <TINY>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은 집을 선택함으로써 얻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자유조. 작게 살면 세상이 커집니다. 금전과 시간 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죠. 지금은 온 세상이 내 거실입니다."
자유와 행복과 직접 관계가 있는 건 돈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세인의 관심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뒤따르더라도, 사람들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과 근심, 굴욕을 충분히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런 관심을 얻는 순간 모든 자유와 편안함, 근심 걱정 없는 안전함은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 3인류>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그물이나 창보다 더 무서운 덫이로군요. 저 고릴라는 손을 펴고 과일을 포기하기만 했어도 자유를 얻고 목숨을 건졌을 텐데....<놓아 버리기>의 필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죠.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 것이라고 믿고 간직하려는 하는 것은 하나의 덫이에요...우리는 무언가를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며 포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덫에 걸린다
김동우, <트레킹으로 지구 한바퀴>
매일 빠른 속도로 의미 없이 일상이 내 곁을 흘러갔다. 두 눈은 어지러웠고, 두 어깨에는 극심한 피로감이 쌓였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에, 그리고 게슴츠레 침을 흘리는 내 인생에 쉼표를 찍어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내 감정에 솔직해지기... 나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 해보기... 정말, 그래 보기. 하지만 가면을 벗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움켜진 손아귀를 펴는 거다. 그러면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 새로 손에 쥔 그 무엇은, 그동안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경험이었고, 놓기 전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유였다.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그 많은 돈으로 무얼 하시나요? 자유, 자유를 사고, 내 시간을 사요. 그게 가장 비싼 거죠. 인세 덕에 돈을 벌 필요는 없게 됐으니 자유를 얻게 됐고, 그래서 글 쓰는 것만 할 수 있게 됐죠. 내겐 자유가 가장 중요해요. -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중에서
박경철, <문명의 배꼽, 그리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인 없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제레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이제 새로운 모습의 미래가 삶의 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바로 협력적 이해관계, 연결성, 상호 의존에 기반을 둔 미래가 그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타인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고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가 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깊이 참여할 때 얻을 수 있다. 자유가 삶의 최적화라면,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가, 또 사람들과 얼마나 강력한 사회적 유대를 맺는가를 토대로 측정해야 마땅하다. 외딴 존재로 살아가는 삶은 딱하고 무의미하다. 삶의 질이라는 꿈은 집단 내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고립되어 타인을 배제한 채로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하기는 불가능하다. 삶의 질을 획득하려면 모든 사람이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어느 한 사람 뒤처지지 않도록 모든 구성원이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계몽주의 경제학자들은 행복과 '훌륭한 삶'이 개인적 부의 축적과 동의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의 문턱에 있는 오늘날 젊은 세대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에 비례하기도 한다고 믿는다. ...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소한 더욱 커다란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 모두가 집단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 과연 그 공동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시공간적 터전은 임의적인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생물권 자체를 아우르는 범위까지 확대된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근면함이 사람의 표지였고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물질적인 부를 맹렬하게 추구하면서 수세대의 사람들이 기계로 변했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살았다." 3차 산업혁명과 협업 시대는 인류를 실용적 세계에 갇힌 기계화된 삶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들이마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놀기 위해 산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와 놀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포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의 활동은 놀이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는 덧붙이고 싶다. 사람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점점더 갈수록 현대인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제도적인 삶을 떠나서 거의 또는 아무런 독립적인 삶을 누리지 못한다. 만약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다고 할 때, 사람들은 여행사와 관광산업이 만들어낸 지점으로 이동해가기 위해서 수송산업을 이용한다. 이것은 그들이 시스템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기서 도피할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로운 삶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덕행의 가능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의 부유한 부문에 속해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포기는 너무나 극적이고, 너무나 겁나는 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몸을 결박하고 있는 제도적 지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빈곤과 전쟁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보'의 프로젝트들에 의해서 안락과 편의성이 증대하면 할수록 인간은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의 노예가 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진실로 인간답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 다시 말하여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정신과 타자에의 능동적인 환대와 같은 오랜 세월 인류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적인 덕행은 극히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시간은 교환가치의 법칙에 따르는 희소하고 귀중한 상품이다. 이것은 매매의 대상이 되는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점차 자유시간마저도 '소비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구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노먼 메일러는 냉동한 오렌지주스와 액체상태의 오렌지주스의 원가르르 각각 계산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액체상태의 오렌지주스 쪽이 언 것을 다시 녹이는 데 필요한 2분간의 시간을 벌기 때문에 그 2분만큼 비싼 값이 덧붙여진다고 한다: 이처럼 소비자는 자기 자신의 자유시간마저도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번' 시간, 즉 이윤을 생기게 하는 자본, 잠재적 생산력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김형욱, <손끝에 닿은 세상>
자유로운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하노니.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길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날이 밝으면 행복한 미소 지으며 길을 떠날. 이 길의 끝이 어드메일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올곧게 내 의지로 자유롭기를 바라며. 그 끝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되기를....
일평생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바람같이 살아가길 바라며....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당신과는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 - 볼테르...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롤스의 두개 정의의 원칙, 1) 자유와 관련한 원칙으로 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2)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한 원칙으로, 일단 공정한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사회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편익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이나 경제 예측 따위를 진심으로 믿기 어렵다. 하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의 행동이 예상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 그런 일관성은 없다. 일관성이 없으면 일반화 하기 어렵고, 그러면 예측하기도 어려워 진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
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순순하 놀이는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 형식이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두려워하여 자유를 쓰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놀이다' - 샤르트르
인간은 순수한 놀이에 완전히 참여해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자유에서 자율성을, 자율성에서 나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능력을 연상하면서 우리가 근대를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의 결실로 얻은 재산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 징표로 여겨졌다.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부터 남을 배제하는 권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개인적 자유를 지키는 최선의 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노암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자유란, 어떠한 환경이나 속박 그리고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세네카'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어떤 장소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리 안락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그곳이 감옥이다. 이것이 '감옥'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다. 만일 당신의 직업이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그때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관계 속에 있다면,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병들고 고통스런 육체 속에 있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 다면, 그것 역시 당신에게는 감옥이다. 자유는 당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욕망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현대 서구 문화는 첫 번째 자유, 곧 욕망의 자유만을 인정한다. 그러한 자유를 국가 헌법이나 인간 권리 헌장 맨 앞에 모셔두고 숭배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근본 신조는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국민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에 사는 국민들이 그다지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두 번째 자유, 곧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몇몇 종교적인 공동체 안에서만 찬미를 받는다. 그들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만족과 평화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내가 머물고 있는 절처럼 금욕적인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벽 하나를 다시 뛰어넘은 기분이 들었다. 자유라는 건 분명 자기 손으로 붙잡는 것이다.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남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뇌를 희생하며 남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이야.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았어.
류콴홍, <철학우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어디에서든 속박 가운데 존재한다." - 루소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종종 상대적인 개념이랍니다.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존 로빈슨, <인생혁명>
덜 쓰고 덜 버리며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멋진 인생에 한 발 내딛는 기쁨과 더불어!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 세상의 섭리일까. 1번 나는 둥지를 지키는 대신 자유를 잃니다. 2번 나는 자유를 지켰으나 둥지를 잃는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이 상실한 그것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용서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용서는 실천과 자유로 가는 열쇠다. Forgiveness is the key to action and freedom. - 한나 아렌트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서는 것만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며, 진정한 나를 찾는 그 궁극적인 보상이다. Self-reliance is the only road to true freedom, and being one's own person is its ultimate reward. - 페트리샤 샘슨
우연에 대처하는 법: 자유로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고, 사고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하다. - 에리히 프롬
완벽한 대답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 - 알렌 레이드 맥기니스
다릴 앙카,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선택할 자유, 또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당신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일, 그것이 곧 당신 자신의 카르마를 끊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 자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을 때, 당신은 부정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은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이란 한 마디로 말해 '힘이 없는 행동' 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자기가 창조해 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타인을 상처입히지 않고,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고, 서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필요로 하는 일 모두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자유
신체, 거주/이전, 직업선택, 주거, 사생활의 비밀, 양심, 종교,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둔감함보다 변화에 대처하는 순발력과 빠른 적응력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함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조화로운 삶이 가능하고 환경 대처와 적응력도 생긴다고 말한다.
[본문 발췌]
재능은 있거나 없는 게 아니라 얼마나 끄집어냈는가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재능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알맞은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재능을 끄집어내준 것입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잠재된 재능을 발휘하도록 도와준 이가 아무도 없었을 뿐이죠. 재능 있는 사람은 주변에 반드시 그를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고, 본인도 그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우쭐해 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우쭐해 하며 자신감을 갖는 것은 경박하고 꼴사나운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미래를 향해 더 크게 날갯짓할 수 있는 멋진 둔감력을 가진 것이죠.
변화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둔감력입니다. 매사에 예민하고 자기가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까지 변하지 못합니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편안하고 밝게 일하려면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요? 물론 둔감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습관이나 행동이 못 견디게 거슬리는 사람도 있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 하나는 불쾌한 말이나 행동도 무시하고 넘길 수 있는 둔감한 사람만이 집단 속에서 밝고 느긋하게 일하며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양한 외부 환경 변화에 대처하고 그 상태에 익숙해지는 능력을 보통 '환경 적응력'이라고 합니다.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은 기온이나 생태적 변화는 물론, 인간관계나 사회적 변화에도 쉽게 맞춰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 가서도 금새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자연환경이나 인종, 문화 등이 전혀 다른 외국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이러한 능력이 환경 적응력입니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어떤 나라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나아가 현지의 어떤 음식을 먹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 환경 적응력만큼 멋지고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둔감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의미의 둔감함이 있기에 어떤 환경,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죠. 앞으로 세계를 향해 날갯짓하며 새 시대를 일궈나가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신에게 둔감력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합니다. 만약 둔감력이 있다면 소중히 이기고, 없다면 다양한 환경에 뛰어들어 훈련해야 하죠. 그러려면 모든 일에 호기심을 품고, 좋은 의미에서 둔감하게 반응하며, 주저 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민감하고 날카로운 것만이 재능이 아닙니다.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함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재능이죠. 예민함이나 순수함도 밑바탕에 둔감력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재능으로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최근 조국 전 장관 이슈를 되새겨 본다.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의심만으로 야당, 검찰과 언론의 무차별 폭력과 같은 일방적인 뉴스가 정상적인가?
진보와 보수, 자유와 평등, 서로 상충되는 다른 생각들..... 다른 이념과 주장이 상존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한다.
[본문 발췌]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밀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침묵을 강요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산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대립의 존립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폐지한다. 이렇게 해서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중우정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디어 왜곡과 여론조작으로 인한 중우정치의 위험은 우리의 발밑에 똬리를 틀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시민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대안미디어를 활용해 언론권력의 여론조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위험에 또 발뒤꿈치를 물리게 될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는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 처음부터 아예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출발선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부와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경쟁의 규칙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반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경쟁의 규칙 그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반칙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계약과 거래의 어느 한 당사자가 상대방의 시혜 또는 선의에 의존해야 하거나 진정 자유롭게 판단할 수 없을 때, 경쟁이 만들어낸 분배의 격차는 정의로울 수 없다. 모든 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복지는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좁은 의미의 물질적 후생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가리킨다. 안전은 범죄뿐만 아니라 각종 재해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단순한 방어를 넘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항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환경은 단순한 주거환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연생태와 생활환경의 정착을 의미한다.
홉스의 국가는 좁은 의미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이념형 보수'에게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로크와 밀, 스미스, 루소의 국가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시장형 보수'에게는 자유와 이를 통해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는 물질적 부의 증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주의와 시장형 보수가 손을 잡으면, 우리가 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직접 경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시도했으며, 최근 세계 최고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 나름 성공적으로 안착한 '개발독재'가 된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도 이것이다. 보수정당 - 국가의 공안기관 - 보수 언론 - 재벌대기업 - 보수지식인들이 반세기에 거려 형성한 소위 주류의 지배 카르텔은 이념으로 보면 국가주의와 보수자유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내가 진보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나는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를 원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런 국가에서 개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살려면 우리들 각자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훌륭한 국가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비하하거나 사회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직관과 통찰, 그리고 상상력! 한 가지를 더한다면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통섭[統攝 , Consilience]의 능력은 사람과 사람의 차이를 만드는 능력이자 사람과 인공지능의 사이를 가르는 능력이고, 이러한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사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일 것이다.
[본문 발췌]
인공지능 등의 미래기술이 일으킬 진정 위대하고 혁명적인 변화는 인간의 지능에서 일어날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뇌를 포함해서 '인공 뇌artificial brain'와 '클라우드 뇌cloud brain'등 3개의 뇌를 갖게 된다. 미래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경쟁력인 시대가 된다. 지능 역량에 따라 부의 크기도 달라질 것이다. 지능혁명으로 개인자본주의 시대가 열린다. 개인의 능력이 혁명적으로 증가하고 거대한 지능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자본주의의 중심이 자본에서 개인으로 이동한다. 지능, 자율, 영생은 21세기 인류의 최고의 소비 품목이 될 것이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갈망해 왔던 이 세 가지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된다.
네트워크가 지능화될수록 그 최대 수혜자는 개인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자본이 풍부해야 얻을 수 있었던 지능, 자본, 기회를 개인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접속해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적 사고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람의 생각을 해석하는 도구이다. 이 도구를 활용해야 문제, 욕구, 결핍을 찾을 수 있다. 미래인간의 과제는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욕구를 충족시키고, 결핍을 채울 것인가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패턴을 벗어난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바로 통찰력과 상상력이다. 사람과 사람의 차이를 만드는 능력이자 사람과 인공지능의 사이를 가르는 능력이다. 직관과 통찰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로 갈수록 더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된다. 누군가 복제하더라도 직관과 통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시 변신하고 진화할 수 있다.
말에 앞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라도 입 밖으로 나오면 주워담을 수 없기에 조심해야 하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실행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에 대한 김연수 작가의 이야기.....
[본문 발췌]
용기는 동사와 결합할 때만 유효하다. 제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용기가 될 수 없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소설가로 산다는 건 여러 번 고칠수록 문장이 좋아진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플롯과 캐릭터 같은 건 처음부터 직관적으로 멋진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고 해도 문장만은 제일 먼저 쓴 문장이 제일 안 좋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필요한 동사는 세 가지다. '쓴다' '생각한다' '다시 쓴다'. 소설가는 제일 먼저 '쓴다'. 그다음에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쓴다'. 소설가란 어떤 사람들인가? 초고를 앞에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자기가 쓴 것을 조금 더 좋게 고치기'가 바로 소설가의 주된 일이다. 소설쓰기라는 동사가 있다면, 그런 뜻이어야만 한다. 누군가 '소설쓰고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먼저 글을 썼고, 지금은 그 글에 대해 생각하면서 다시 쓰고 있습니다'라는 뜻이어야만 한다.
작가로서 핍진성이라는 말을 알고 살면 인생살이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데, 특히 반항적인 젊은 학생들을 제압할 때 아주 유용하다. 용법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네 소설은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없어! 이 말이면 다 해결된다. 다들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이 단어는 한글('핍진성')로도 어렵고, 한자('逼眞性')로도 어렵고, 영어('verisimilitude')로도 어렵다. 이건 그냥 말만으로도 할생들 괴롭히기에 딱 좋은데, 뜻('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하는 관습화된 이해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소설 창작의 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는 동기 부여나 세부 묘사 등의 소설적 장치를 들 수 있다')까지 얘기하면 다들 괴로워 죽으려고 한다.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일관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긍정적인 사람의 표정과 부정적인 사람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르며, 그들이 걸리는 병의 형태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격에 따라서 그들의 표정이나 걸리는 병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핍진성의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는 제외한다. 인물의 성격뿐만 아니라 사건도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진행한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뒤에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도 보편적인 패턴이 있다. 여기에도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소설에서는 무의미하다. (예외적이라면 독자들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인물들도 인과의 사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그러니 일단 써보자. 다리가 불탈 때까지는 써보자. 그러고 나서 계속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자.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인생이란 결과적으로 무상이오. 허나 인생살이 그 과정은 길어요. 낙심하지도 말고, 너무 괴로워하지도마시오. 인생사의 얻고 잃음이란 모래 한 주먹 쥔 손을 오무렸다 펴는 것과 같은 것이오. 손을 오무려도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손을 펴도 모래는 흘러내리는 거요. 다만 시간 차이가 좀 있을 뿐이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얻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 두고 맨손으로 떠나게 되어 있소. 그러니 집착을 버리시오.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리시오. 새 마음으로 다가올 날만 생각하시오. 그것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가 뜨고 지듯이, 달이 차고 기울듯이, 그런 걸음으로 다가올 날을 맞이하시오. 그렇게 마음을 다스려가는 지금부터가 자신을 위한 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오. 과거에 집착해 분노와 증오를 못 버리는 것, 그것처럼 큰 어리석음은 없소.
도시는 자꾸 비대해지고, 비대해지는 만큼 경쟁은 치열해지고, 경쟁은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고, 그 적대감은 서로를 경계하며 소통이 차단되는 개체화가 되고, 그 분열은 서로를 소외시키다가 끝내는 자기 자신까지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그 자기 소외는 곧 정신 질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현대 도시인들이 갖는 가장 큰 비극이다. 그 치유책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하소연할 수 있고,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친구를 갖는 것이다.
피천득 <인연>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나눌 인생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
책이란 갈고닦은 영혼의 결정체가 담긴 그릇이다.
법정스님 <텅빈 충만>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 중의 하나는 남과 자기를 비교해가며 자꾸 불행을 키우는 것이다.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의지뿐이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를 말로 삼아 끝없이 채찍질을 가하며 달려가는 노정이다.
인생이란 두 개의 돌덩이를 바꿔 놓아가며 건너는 징검다리다.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의 수련이 일기 쓰기와 편지 쓰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일찍부터 글쓰기 수련의 왕도라고 일컬어져 왔을 것입니다.일기는 일과 중심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관찰과 인식과 의식 중심으로써나가면 글쓰기에 큰 효과가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심장이 뛰듯이 살아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 사회와 국가는 병들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는 시들어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은 절대 불변의 사실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의 국가권력과 재벌, 언론의 사회 권력, '모든 권력자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타락하는 것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왜냐하면 그건 국민이 감시 감독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 가지 큰 불행은 탐욕을 본능으로 타고난 것이고, 국가라는 것을 배격할 수 없는 것이고, 돈이라는 것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다소 정도의 차이가 있고, 방법이 달라졌을 뿐 국가 폭력은 계속 자행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국가권력 기관들이 국민을 속박하고, 속이고, 횡포를 자행하는 것 전부가 국가폭력입니다.
우리 손지가 공부허고 있으믄 내가 말해. '아가'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다 도둑놈 되드라. 맴 공부 해야 쓴다. 사람 공부 해야 쓴다. 그러코 말해. 착실허니 살고, 넘 속이지 말고 넘의 것 돌라묵을라 허지 말고 니 심으로 땀 흘림서 벌어묵어라와. 내 속에 든 것 지킴서 살아야 써. 사람은 속 짚은 것으로 허는 짓이 달라지는 벱잉께. 지 맴을 잘 지켜야제 돈 지킬라고 애쓰덜 말아라 잉. 아이고, 이쁜 내 강아지!! - <전라도닷컴>의 기자가 순천시 송광면 왕대마을 윤순심 할매의 말씀을 받아적은 '인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