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이야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이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이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은 행동이 없이 머리에만 있고, 좋아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충만해지고, 스스로의 충만함을 남과 더불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즐거움이 아닐까 합니다. 즐기는 사람은 왠지 여유가 있어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해석을 했다.

 

그래서 여유, 즐거움과 행복은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즐거움(樂), 즐거운 느낌이나 마음.

[비슷한말] 유쾌, 쾌락, 화락, 열락, 재미, 기쁨, 낙

[반대말] 슬픔, 괴로움

 

(네이버 영어사전)  joy, pleasure, enjoyment, happiness, delight, gladness       

인생의 즐거움 the joy[pleasure; enjoyment] of life

독서는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Reading is my only[sole] pleasure.

그는 일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했다 He took no pleasure in his job.

봉사 활동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Volunteer work gives me great pleasure.

먹는 것은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Eating is one of the great pleasures in life.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즐거움을 느꼈다 She took pride and joy in her work.

그는 여행에서 커다란 즐거움을 얻었다 He got enormous pleasure from traveling.

그는 나를 놀리는 데서 큰 즐거움을 얻는 것 같다 He seems to take great delight in teasing[making a fool of] me.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즐거움이다 My greatest happiness[joy] in life is seeing my children grow.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즐거움'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시간, 즐거움에 따라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제러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행복은 내안에 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행복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외부에서 찾은 행복과 즐거움의 원천들은 모두 그 본질상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허무하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Happiness belongs to those who are sufficient unto themselves. For all external sources of happiness and pleasure are, by their very nature, highly uncertain, precarious, ephemeral and subject to chance.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불확실한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을 때 여행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여행의 즐거움은 장애물과 피로감에 있다. 심지어 여행 중에 겪는 위험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언제나 확실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이 항상 대기해 있으며 포근한 침대와 멋진 식사가 준비되고 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하다면 그런 여행에서 어떤 매력을 찾을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뜻밖의 사건이나 모험거리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너무도 잘 정돈되어 있으니까. - 테오필 고티에르, <에스파냐에서의 산책>

 

 

서은국, <행복의 기원>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강판권, <나무 철학>

즐거움은 바로 좋아하는 데서 출발한다. 즐겁게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내가 즐거움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나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것은 '즐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즐긴다'는 표현은 내가 시작하고 내가 맺을 수 있을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 - 심보선

 

구름과 안개에 대해서가 아니라면 나는 별 할말이 없다

그 둘을 설파할 때 내 몸은 기분좋은 기괴함에 젖어든다

나는 그것을 하나의 눈부신 곡예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어쩌다 등을 뒤로 굽혀 완벽한 원을 만들게 됐냐고 사회자가 물은 적이 있다

싸는 똥을 바로 받아먹고 싶었죠

즉석에서 시범을 보이자 관객들은 박수 치다 말고 토했다

 

구름과 안개에 골몰하느라 학업과 노동을 작파한 지 오래

내가 펄쩍 뛰었다 착지한 자리엔 음모가 수북이 쌓이곤 한다

내 몸이 점점 구름과 안개로 화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내 행방을 찾으려거든 땅 위에 떨어진 털들을 따라오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절대 금물

이름이 무엇이고 거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간혹 나는 밤거리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진열장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나 자신이 아득한 심연으로 되비치고

등뒤의 어둠과 눈앞의 환함이 서로를 환대할 때까지

나는 일생에 걸쳐 가장 가난한 표정으로 거기 오래 서 있는다

그러고는 오묘한 정취에 젖어 달이 뜬 쪽을 향해 물구나무로 걸어가는 것이다

자정의 밤거리는 언제나 취객과 창녀로 북적거린다

내 둥근 몸을 통과한 달빛에 젖은 자들이여

나를 비웃든 경외하든, 그대들의 삶에 다산과 다복이 넘치기를

 

또 간혹 나는 구름과 안개를 뚫고 달리고 또 달린다

구름과 안개가 걷히면 심심해져서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구름과 안개가 걷힌 거리는

지식 없는 선생이요

표정 없는 얼굴이기에

구름으로 다듬고 안개로 닦아야만 고독은 아름다운 자태를 얻는다고 믿는다

 

나는 그저 고독한 아크로바트일 뿐

굳이 유파를 들먹이자면

마음의 거리에 자우룩한 구름과 안개의 모양을 탐구하는 '흐린 날씨'파

고독이란 자고로 오직 자신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기괴함이기에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

즐거움과 슬픔만이 나의 도덕

사랑과 고백은 나의 금물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단코 침묵이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낯선 도시에서 눈썰미와 요령만으로 맛집을 찾는 데 성공하면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다. 혀로 맛보는 기쁨, 배로 느끼는 만족감, 그리고 마음이 누리는 뿌듯함이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호라티우스가 속했던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들이 추구한 쾌락은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며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 다시 말해서 충만한 삶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라티우스의 '오늘을 즐겨라'라는 의미도 당장 눈앞의 것만 챙기고 감격적인 즐거움에 의존하여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입니다.

 

 

김영하, <말하다>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 돈이 들지 않습니다. 성장률이 제로로 수렴하는 저성장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툭하면 0펴센트의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민자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그런 일을 겪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를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임영익, <메타생각>

'창의성은 낯선 것에 대한 즐거움' - 어니 젤린스키

 

 

E. F. 슈마허, <자발적 가난>

항상 미래에 닥쳐올 불행을 염려하는 것이 정말로 현명한 것일까? 미래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재앙을 고민하느라고 현재의 즐거움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 과연 신중한 것일까? - 버트런드 러셀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최적 경혐=몰입'에 빠지면 사람은 즐거움과 충족감을 느낀다. 반대로 관심의 대상이 자꾸 변해 하나에 집중할 수 없을 때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낭비한 듯 느끼고 즐거움과 충족감을 얻기 힘들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지성이 깨어날 때의 기쁨은 세상을 얻은 것같이 마음 부자가 된 느낌이고, 영성이 깨어날 때 즐거움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지성이 깨어나면 내 안에 가치 기준이 생겨 더 이상 남들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영성이 깨어나면 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 두 번 다시 현혹하지 않습니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 일도 없이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더불어 세월을 보내고 옛날 친구들과 때때로 만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새로운 행복을 찾아 누린 사람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공부를 시작한 사람, 취미활동을 계속한 사람,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노후에는 일이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 그 일을 미리부터 준비해두자는 생각이다. 노후를 위해 경제적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일을 준비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 가지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택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페이스북 사무실에 걸린 "빠르게 움직이고 틀을 파괴하라"는 말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잠시 속도를 늦추고 파괴된 것을 고쳐볼 수는 없을까? 디지털 라이프가 영구적인 현실이 되어버린 전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아날로그를 선택하고 있다. 기본 설정이 되어버린 디지털 기술에 비해 아날로그는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비용이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찾고 있다. 왜일까? 즐거움이 한 가지 이유다. 아날로그는 물리적인 사물과 경험이 사라져가는 영역에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재적 물건을 창조하고 소유하는 기쁨을 준다. 그것은 사진관에서 필름을 찾아오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옛 친구들과 새로운 보드게임을 하는 즐거움일 수도 있고, 일요판 종이 신문이 내는 듣기 좋은 소리일 수도 있고, 내 생각이 펜으로 종이 위에 구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즉각적인 보상일 수도 있다. 그런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두가 값을 매기기 힘든 경험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윤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이 설명하는 포스트디지털 경제에는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투자자와 소매상, 그리고 기업가가 필요하다. 작은 레코드점을 개장하든 거대한 시계 공장을 시작하든 아날로그에서는 수익이 생긴다. 언론은 실리콘밸리의 성공에 흥분하지만 사실 우리 경제의 절대적인 부분은 아날로그다. 아날로그 경제는 작은 지역에 집중된 디지털 자본에 비해 사회에 광범위하게 이득이 된다. 비즈니스 세계가 점점 더 디지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기술을 새롭고 참신하게 활용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더욱더 돋보이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간의 역할은 더욱 값어치가 올라갈 것이고 아날로그 도구나 활동(가령 화이트보드나 오프라인 매장처럼 디지털 경험을 현실 세계에 옮겨놓는 것)은 선두 기업과 나머지 기업들을 갈라놓을 것이다. 아날로그는 생산성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최고의 생산성을 가진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 오두막은 사회와 조화를 이룰 때 얻는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급자족이 으뜸입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최인철, <굿라이프>

심리학자 이선 맥머핸(Ethan McMahan)에 따르면 사람들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에서 파악한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정재승, <열두 발자국>

과거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면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예측 가능한 수준의 결과는 얻겠지만, 새로운 시도가 주는 큰 즐거움과 뜻밖의 수확은 얻을 수 없습니다. 삶에서 80~90퍼센트 정도는 기존 방법을 적용하더라도, 10~20퍼센트 정도는 방법 탐색의 전략으로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목적지를 향해 정해진 삶의 코스를 완주하는 게 목표인 마라토너라면 페이스 조절만 잘하면 안전한 삶의 궤적을 그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 주는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열매의 풍성함을 만끽하고 싶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탐험가의 기질이 필요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내 삶의 철학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질주의 방향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예술의 목적은 정신적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지만, 두뇌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상징화된 정보를 해독하는 것이 두뇌의 주요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전자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유흥산업과 연예잡지, 그리고 소셜네트워크는 앞으로도 결코 줄어들지 않고 꾸준히 팽창할 것이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역경 속에도 즐거움이 숨어 있고, 이를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경마저 평범한 일상 중 하나로 여겨야 한다. 조심스럽다기보다는 소심한 성격에 가까운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세계는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재미가 없다. 남들에게 들려줄 만한 실패나, 쉽게 경험하기 힘든 체험이 없어서다. 유난히 재미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또한 시간적으로 고생과 위험 부담을 즐겁게 감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생처럼 정직한 것은 없다. 인생의 재미는 이를 위해 지불한 희생과 위험에 정확히 비례한다. 모험을 택하지 않고서는 사는 재미도 보장받을 수 없다.

 

 

코에코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쾌락이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뇌가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그만큼 즐거움이 늘어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절개고(一切皆苦)'라는 진리이다. 이 진리에 따르면, 한 번 쾌락을 맛본 뒤에는 '좀 더 좀 더' 하고 보다 큰 즐거움을 찾으며, 그 재료가 되는 괴로움을 더욱 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에 대해 누군가 동의해 주면, 이때에도 만의 욕망이 생겨 자아가 자극되고 중독된다. 혹은 누군가 반론을 제기해도 괴로워하고 또 다른 분노를 느끼면서, 그것에 자극을 받아 중독된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중국 위나라 사람 동우는 <삼여지설>에서 '밤'과 '비 오는 날'과 '겨울철', 이 세 가지 여분의 시간이야말로 마음을 하나로 집중해 독서할 수 있는 좋은 때라고 말했다. 맑은 날 밤 고요하게 앉아 등불을 켜고 차를 달이면은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간혹 종소리만 들려온다. 이 때 이 아름답고 고요한 정경에 빠져 책을 읽으며 피로를 잊는다.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 비바람이 몰아쳐 길을 막으면 문을 잠그고 방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고 책만 앞에 가득히 쌓여 있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함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낙엽이 떨어진 나무숲에 한 해가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깊게 눈이 쌓여 있다. 바람이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고, 겨울새가 들녘에서 울음 운다. 방 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 있노라면 차 향기에 달콤한 술이 익어 간다. 이러한 때 시와 글을 모아서 엮고 있으면 좋은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마냥 즐겁다.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허균이 옛사람들의 글을 모아 엮은 <한정록> <정업>편에 나오는 말이다.

 

 

법륜 스님, <인생수업>

보통 사람들은 주로 재미만 갖고 인생의 즐거움을 삼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뒤에 후회나 허전함, 공허감 같은 것이 생기게 됩니다. 한편 또 너무 삶의 의미 같은 것만 찾으면 현재의 삶이 힘들어지고, 스트레스도 많아져 지치기 쉽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가장 좋은데, 바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곧 자기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장 조화로운 상태가 되는데, 우리는 보통 이 둘이 분리된 삶을 삽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우리는 삶을 누리고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도 일평생 동안. 흔히들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놀이는 아이들만의 소일거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 가진 존재의 생명력입니다. 놀이는 마음을 젊게 하고, 일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인간관계를 잘 맺게 해줍니다. 또한 젊음을 되돌려 줍니다. 놀이는 삶을 가장 충만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놀이는 순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는 모든 한계를 초월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놀이는 내면의 기쁨이 바깥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웃음, 노래, 춤, 수영, 등산, 요리, 달리기, 게임 등 즐거움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일과 놀이가 완전히 별개의 활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은 하루를 살아가고 평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목표지향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할 때 불행해집니다.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동시에, 즐거움으로부터 일을 떼어 놓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은 “나에게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 주는 샘물이다”라고 말했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즐거움과 도전 정신을 회복하게 되면 자연스레 우리의 생각도 ‘젊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스펙을 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 즐거워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다 보니 / 스펙이 하나둘씩 쌓이도록 하세요. / 과정의 즐거움이 빠지고 결과만 얻으려 하면 / 그게 바로 고통입니다. / 과정을 즐기십시오.

 

 

E. F. 슈마허, <굿워크>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로제 폴 드루아,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이런 방법론의 요구에 또 다른 철학자들은 생각의 나라에서 목표 없이, 때로는 나침반도 없이 걷는 방식들을 맞세웠다. 오직 산책의 즐거움만을 안내자로 삼고 아무것도 예측하지 않고 나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산책은 규칙도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거니는 것이다. 이 산책은 논증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을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강화한다. 

 

 

김위찬, <블루오션 시프트>

구매자들은 간편하고, 사용하기 쉽고, 즐거움과 원하는 바를 주기 때문에 이를 좋아한다. 즉 구매자들은 기술이 고객가치의 획기적 향상에 본질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제품과 서비스에 열광한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문학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만 하기보다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이니, 삶의 활력과 즐거움도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우리는 질서와 복잡성의 병치에서 생기는 즐거움 밑에서 이와 관련된 건축학적 미덕인 균형을 확인할 수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사치스러운 것과 수수한 것,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대립들을 건축가들이 능숙하게 중재할 때마다 아름다움은 피어나는 것 같다.

 

 

양재우, <불황을 이기는 월급의 경제학>

일상을 소중히 여겨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전하여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할 것이며, 소중한 시간을 아껴 알차고 의미 있게 활용하여 나란 존재 혹은 내가 만들어 놓은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을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것을 잊는다. 오늘의 삶을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원한으로 채운다.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한 번 할아버린 인생은 되돌릴 수 없으며, 놓쳐버린 사람이 환희는 되찾을 수 없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프로'는 프로페셔녈professional(전문가)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professio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프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도 끝까지 해내는 경향이 있다. 그냥 끝까지 하는 게 아니다. 하기 싫은 업무를 맡아도 겉으로는 하기 싫은 티를 잘 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마무리한다. 왜? 프로니까. 이와 달리 '아마추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 삼아 소일거리고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인지 모른다고. ... 살다보면 프로처럼 임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 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그런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긴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인류는 점차 특권에 의해서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기질적으로도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을 인정하고 사회가 정해준 생활에 기꺼이 적응해서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자기가 하는 일과 그 일을 언제 할지를 통제해서 모든 활동을 자기 나름의 속도로 수행하고 예상 밖의 사건과 다양성, 놀라움과 즉흥성에서 큰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로 나뉜다. 이로써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상도 크게 달라진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일은 권태를 몰아낸다. 요긴하고 재미있는 일을 할 때 느끼는 권태는 할 일이 전혀 없을 때 느끼는 권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일에는 하나의 공덕이 따른다. 일이 있음으로 해서 후일이 즐거운 것이다. 건강을 해칠 정도의 어려운 일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 시간에 게으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왜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도시로 모여들까요? 거기에는 화폐 문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 또한 그 밖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려함과 즐거움, 다양성,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겨나는 유행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분비는 테마파크에 가면 '줄 서지 않고 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로 텅 빈 테마파크에 가면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외롭다는 느낌을 갖기 쉽습니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삶이 우리를 우회로로 데려가고, 그 우회로가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안겨 준다. 먼길을 돌아 '곧바로' 목적지로 가는 것, 그것이 여행의 신비이고 삶의 이야기이다. 방황하지 않고 직선으로 가는 길은 과정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놓친다.

 

 

가오싱젠, <창작에 관하여>

관찰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심미를 획득할 때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 즐거움이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열매는 작가가 현실적 공리를 뛰어넘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입니다. 그렇지 않고 현실적 이익이나 효과에 얽매이게 되면 작가는 창작에 필요한 열정과 관찰자적 냉정함을 유지하기 어려워집니다.

 

 

마이크 비킹, <휘게 라이프>

휘게는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즐거움>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스크린은 개인과 기업을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 필요한 업무를 손쉽게 해결해주었다. 편리함과 즐거움을 제공할 뿐 아니라 세상을 한 걸음 더 가깝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한 네트워크가 촘촘해질수록 우리의 일상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로 인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다. 바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깊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의 핵심인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은 불확실성과 즉흥성에 기초한다. ... 여행은 불확싱설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우리에게 불확실성과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 잘 닦여진 길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때로는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별로 가지 않는 길이라 불편하고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과 두려움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감내해야 할 조건이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확신에 차 걷는 사람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견뎌낼 줄 알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이 걷는 길 자체를 사랑하고 자신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자신의 시도 하나하나가 모여 곧 길이 된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여행은 결국 삶으로의 여행이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물건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쓰는 편이 훨씬 더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 간디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래리 킬리 외 3명,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

고객참여 혁신은 종종 다른 종류의 혁신(특히 브랜드 혁신이나 서비스 혁신)과 함께 수행되어서 발견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고객과 상호작용하는 부분에 집중하라. 고객과 어떻게 관게를 맺고 고객에게 어떻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집중한다면 고객참여 혁신을 이룰 수 있다.

 

해적처럼 생각하라. 해적처럼 생각하는 것이 모든 혁신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흔들림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헌신적으로, 그리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게 혁신하라. 아마 우리보다 더 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정해진 규칙이 있다면 그 규칙에 얽매이지 마라. 오히려 틀에 박힌 규칙에서 벗어남으로써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혁신가가 지녀야 할 자질이다. 해적선을 만드는 것처럼 혁신 계획을 세워라.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종하기 쉽고, 번개처럼 빠른 무서운 해적선을 만들어라. 배를 출항할 때는 늦은 밤, 경쟁자가 지키고 있는 항구로 곧장 가라. 동이 트기 전까지 가장 효과적으로 적의 진영을 파괴할 수 있는 순간을 계획하고 맹렬한 전쟁을 벌여라. 필요한 전술이나 스킬은 무엇이든 사용하고, 타협하지 마라.

 

 

박웅현, <다시, 책은 도끼다>

늘 거기 있는 것을 주목해 보아 또하나 삶의 즐거움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더라. 잘 익어가자.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부와 사치에만 익숙해지면 소박한 삶을 잊게 되고 내면적인 즐거움과 평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간다고들 말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우리다. 인생은 너무 짧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도 못할 만큼 짧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 친절한 행동을 하라. ... 인생은 공간이나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바깥에, 영혼 속에 존재한다.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얽힌 것을 풀어헤치고, 곤란한 일을 수월하게 하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꾼다.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 대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라.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소박한 삶을 살면 자신만의 생활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돈과 시간과 자유가 있는 생활을. 일의 즐거움을 되찾는다는 것은 곧 현명하게 일하고, 자기에게 맞는 일정을 세울 자유를 누리고, 일을 놀이처럼 대하는 법을 배우고, 변화 속에서 기회를 찾는다는 뜻이다.

 

기존의 작은 즐거움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소한 일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얼마나 자주 그 일을 하는가? 그것을 생활 속에 더 깊이 스며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은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은 즐거움을 찾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날마다 예기치 못했던 뜻밖의 즐거움들을 목록에 정리하는 건 더 좋다.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인적 드문 깊은 산속에서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세상을 관조하는 탁족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도락이 아니다. 자연을 즐기고, 자연의 가치를 아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근 시간에 비례해 몸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깨끗해지는 쇄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도시의 온갖 욕망과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와 고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프레데릭엠 허드슨 박사는 "노화는 육체는 쇠락해도 정신은 성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던가. 나이듦을 두려워하고 거부하기보다 자연에서 찾는 작은 즐거움에도 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긍정의 힘이 정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던 걸음이었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여행의 즐거움의 반은 길 잃음의 미학이다. - 레이 브래드버리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비틀거리며 가다>

사람은 자기 장소가 주는 작은 즐거움들을 느끼는 그만큼, 그는 강하며, 반면에 꼭 돈이 들어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이 필요한 그만큼, 그는 약하다. - 웬델 베리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실크로드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걷는 즐거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신비로움.

 

 

최지원, <유학자의 동물원>

생에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생에 알맞지 않은 것은 미워하니, 감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이름을 준 것이 비록 일곱 가지가 있으나, 기실은 호오뿐이다. 칠정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이다. 감정의 발현에 어찌 이같이 실마리가 많겠는가. 진실로 그 실(實)을 추구해 보면 대개 호오가 있을 뿐이지만, 그 호오의 깊고 얕은 정도가 모두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절박하게 싫어하는 것이 슬픔이 되고 성하고 격렬하게 싫어하는 것이 노여움이 되며, 좋아하는 것이 나타나면 기쁨이 생기고 좋아하는 것이 두드러지면 즐거움이며, 좋아하는 마음이 대상에 결부되면 사랑이고, 싫어하는 것을 회피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욕(欲)이 되는 것이다. - 최한기, <추측록> 제3권, <추정측성>, 칠정(七情)은 호오(好惡)에서 나온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아!"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지나친 자의식 때문에 춤추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누구도 어리숙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 수업, 시 쓰기, 외국어 배우기, 노래 배우기...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만 빼면 수많은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강신주, <철학의 즐거움>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

 

자신의 일에서 놀이가 가진 즐거움과 창조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 아이 때 경험했던 놀이의 즐거움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은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정지훈, <무엇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

우리는 이제 생산에 투입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가치의 방점을 찍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나눔의 문화가 확산되고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사람들의 만남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분배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아이들은 가식도 없고 욕심도 없다. 잘 그린다는 기준도 없고 못 그린다는 기준도 없다. 단지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즐거움에 심취한다.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어떤 대가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기술 이상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가들도 나이가 들면 아이들의 그림을 닮아간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 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류콴홍, <철학우화>

생활 속에서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꿀 줄 아는 생활의 강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라." - 베토벤

 

 

리칭즈, <여행의 속도>

그 지역을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는 자신의 두 다리뿐이다. 발자국을 남겨야 비로소 그곳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여행의 시작이기도 하다. '길을 잃는' 즐거움을 알아야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조정래, <정글만리>

인생이 뭐고, 사는 게 뭡니까. 인생이란 추억 만들기고, 사는 건 때때로 무슨 계기 찾아가며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 아니던가요?

 

 

박웅현, <여덟단어>

萬物 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만물 개비어아의 반신이성 낙막대언) - 맹자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나를 돌아보고 지금 하는 일에 성의를 다하면 그 즐거움이 더없이 클 것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돈은 인간 생활에 중요하다. 그러나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쾌락 역시 인간의 삶에서 제외도리 수 없으나 쾌락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은 위험하고 허망하다. 삶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의 영위에 있다. 이해관계와 수지 타산을 떠날 줄 아는 삶, 용도와 유용성을 초월할 줄 아는 삶, 어떤 것을 '소유하기'나 '소유하는 자'를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중히 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쾌락pleasure이 아니라 즐거운joy이다. 쾌락이 자주 존재의 타락을 강요한다면 즐거움은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 확장의 경험이 기쁨이라는 것이다.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투자, 그것이 곧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이다. 이 투자가 있을 때에만 인간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질' 높이기이다. 삶의 질은 향랑의 수준에 있지 않고 아름다움의 수준에 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름다우이 없다면 인간존재는 수치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시, <결정적 순간에 써먹는 선택의 기술>

물질적인 만족은 짧고 정신적인 즐거움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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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탐욕이 마음을 흔든다.

 

 

[본문 발췌]

 

시세가 상승하는 증권시장에서 거래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더 많은 주식들이 '큰 손'에서 '작은 손'으로 가게 된다. 즉, 심리적으로 안정된 증권시장 참여자들로부터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증권시장 참여자에게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주식들이 작은 손들 손에 머물러 있게 되면, 주가 폭락은 곧바로 눈앞에 닥쳐오게 된다. 

 

투자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호황이 앞서지 않은 주가 폭락이 없고, 주가 폭락으로 끝나지 않는 호황은 없다.

 

순환과 반대로 행동함으로써 그리고 장기적 관점 하에서만 큰 돈을 벌 수 있다. 투자자는 사색가여야 하며, 미친 군중과 컴퓨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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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인문학, 여행의 공통점은 현실을 낯설게 보도록 해준다는 것! 새로운 시각, 창조성과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에 어울리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파리~~~

 

 

[본문 발췌]

 

아트, 인문학, 여행, 이들 셋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있다. 그건 우리를 성장시켜 현실을 '낯설게 보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여행은 떠남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둘러보고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고 돌아올 때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시야를 갖게 된다. 예술은 예술가의 눈을 빌어 자연이 숨겨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체험이다. 그것에 감동할 때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폭넓고 진지한 통찰을 배우는 것이다. 그 통찰의 맨끝에는 '낯선 나 자신'이 있다. 낯설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익숙한 것들 속에 숨어 있던 새로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 말하자면 본질 같은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그림은 내면의 생각을 그리는 것이며, 사진은 외부에서 생각을 찾아내는 것이다. 근원은 똑같다. 생각에 따라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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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말! "적당히"

 

 

[본문발췌]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현재는 영어로 'present'이다. present는 현재라는 뜻도 있지만 선물이라는 뜻도 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는 곧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를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자유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등 소유와 관련하여 뭔가를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진짜 자유는 자신의 활동을 스스로 만들고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라는 것이다.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자유도 활동에 근거하므로, 협업할 때 서로 주체가 된다면 자유와 의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나 보다, 어떻게 해야 잘 버틸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면서 불안을 헤쳐나가는 게 핵심이죠. 내리막 세상이라는 가장 큰 징후는 불안감이에요. 더 많은 돈이 불안을 해결해 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쳇바퀴 같은 지루한 일상이 반복될 뿐이죠. 그럴 때 일과 직장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불안감을 없애는 방법으로 적게 벌어도 굶지 않고 잘 사는 삶의 다양한 유형들이 나와야 해요. 많은 이들이 그런 삶을 공유해야죠. 그래야 함께 뭐라도 할 수 있어요." - 롤다 대표 제현주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힘이 곧 공동체의 건강을 보여주는 것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지만 타자를 통해 자기 존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장이고 존재의 확장이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문을 걸어 잠그는 게 아니라 다른 세계와 적극적으로 만나야 공동체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다른 존재되기란 참 멋진 말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성격이나 취향이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같이 한다는 것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낯선 만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뭔가를 함께 도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새로운 존재가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주거와 경제 문제를 함께 해결해 주는 우동사 같은 모델이 적게 벌고도 잘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아닐까. 그들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도시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재능을 나누고, 덜 소비하며 더 많이 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덜어 내고, 너무 끙끙대며 애쓰지 않는 삶, 자연스러운 삶, 그렇게 사는 게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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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유지하기 쉽게 하는 자유처럼 들린다.

 

 

[본문 발췌]

 

모든 결핍과 수동성에서 벗어나고픈 인간은 경제적 삶의 모든 영역을 완벽하게 미리 계획하여 통제하고 싶어 한다.

 

자본의 소유권과 기업 경영권의 분리.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과 주식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것을 별개의 일로 분리하여 주주에겐 배당금과 기업 자산에 대한 잔여청구권만을 주고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주자는 것이다. 이 제안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제도화된다면,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매사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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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다가 갠 가을 하늘, 그리고 가을 꽃들!

 

구절초, 코스모스, 노랑/보라 국화... 상상하지 못한 이름 뚱딴지꽃(돼지감자꽃이랍니다), 그리고 계절을 잊은 사과꽃까지...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을 주는 가을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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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삶에 반드시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없어도 괜찮다. 단지 좋아서, 재미있어서, 마음 내키는데로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삶의 과정이다.

 

 

[본문 발췌]

 

다른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기꺼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거나. 다른 말로 하면 조종manipulation과 영감inpiration이다. 조종 혹은 조작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어감이 강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부정적인 부작용도 별로 없다. 사실 우리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전략을 사용한다. 비즈니스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조종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영업 혹은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살펴볼까? 가격 인하, 프로모션, 두려움, 집단 압박, 욕구를 자극하는 메시지, 혁신의 트렌드 등등. 이 모든 조종 전략이 바로 구매, 후원, 투표를 끌어내기 위한 방법들이다. 회사든 정당이든 그 어떤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조직이든, 상대가 애 굳이 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할 때 이 조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진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조종은 매우 가시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효과적인 방편이기까지 하다.

 

기업이든 거기 몸담은 개인이든,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해 망설임 없이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퍼뜩 떠오르는 손쉬운 답은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지만 그것은 목적이 아니다. 결과일 뿐이다. '왜?'라는 질문이 원하는 것은 이유, 목적, 신념 같은 것이다. 당신 회사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매일 아침 당신은 무엇을 위해 달콤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가? 그토록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정을 통제하는 두뇌영역에는 언어능력이 없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단절 때문이다. 의사결정을 내리는 뇌의 영역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뇌의 영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안락한 집을 버리고 외딴 곳에 가서 생고생을 하며 캠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을지도 모를 위협을 무릅쓰고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한 일념으로 대양을 횡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와서 돈 한 푼 없이 지하실에서 회사를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이유는 논리나 사실 때문이 아니다. 희망, 꿈, 가슴, 직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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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병들면 자체 면역체계가 작동하여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 사회도 스스로의 자정능력과 균형을 되찾는 회복력이 없다면 시스템이 망가진 것이다.

 

 

[본문 발췌]

 

소유는 우리의 경제를 공전 궤도 안에 붙잡아 두는 중력장이다. 우리는 그 중력장에 붙들려 금융 과잉과 생태적 과다를 불러오는 행동을 일삼는다.

 

산업화 시대의 문명은 쌍둥이 같은 두 가지의 추출 과정에 힘입어 발전했다. 하나는 지구로부터 화석 연료를 추출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로부터 금전적 부를 추출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두 과정은 동등하지 않다. 금전적 추출 과정이 주된 힘이었다. 생물물리학적 폐해는 시스템이 벌인 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을 수 있다. 반면 금전적 부의 추출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추출적 소유는 금전적 목적을 갖는다.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목표다. 생성적 소유는 삶을 위한 목적을 갖는다. 삶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게 목표다.

 

살아 있는 시스템이 균형을 잃으면, 다시 균형을 되찾을 방법을 스스로 찾게 된다. "공정한 시스템일수록 회복력이 강하죠."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구조는 개인주의, 성장 지향, 최대의 금전적 이익 추구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른 생태적 감수성은 새로운 핵심 가치들을 형성내고 있다. 지속 가능성, 공동체, 충족성 등이 그 가치다. 이러한 가치의 전환은 새로운 종류의 생성적 소유 구조,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경제를 길러낼 온상을 창출해낸다. 휘발성을 띤 금융의 세계에 뿌리를 두는 대신, 이 새로운 경제는 살아 있는 지구, 인간의 공동체를 비옥한 토양으로 삼는다.

 

충분함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충족성sufficiency이다. 토머스 프린슨Thomas Princen의 <충족성의 논리The Logic of Sufficiency>에 등장하는 말이다. 충족성은 산업화 시대의 이상인 효율성efficiency과는 다르다. 효율성은 더 많은 것, 더 빠른 것, 더 싼 것이 언제나 더 좋다는 개념을 바탕에 둔다. 프린슨에 따르면 '어떤 활동을 계속하다 보면, 이만하면 충분하며 더 이상은 지나칠 수 있다고 느끼게 되는 지각'이 바로 충족성이다. 살아 있는 시스템에서 충족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계 안에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이는 우리 스스로 속도를 늦추고 그저 오늘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대상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볼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충족성이다. 충분히 가졌다는, 만족스럽다는 순수한 느낌 말이다. 충족성의 다른 말은 행복일 터다.

 

공정성, 지속 가능성, 공동체, 이 생성적 경제의 근본 가치 세 가지가 함께 작동한다.

 

생성적 형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초 요소는 '삶을 위함 목적', '뿌리내린 구성원', '사명 경영 통치제', '이해당사자 금융', '윤리적 네트워크'다.

 

심리학자 팀 캐서Tim Kasser는 사람들이 부의 추구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면, 실제로는 안녕감이 나빠진다고 말한다. 물질 중심 가치관이 강한 사람은 불안과 우울을 더 많이 느끼며, 알코올이나 약물을 더 많이 복용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문제를 겪기 쉽다. 재산이 늘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진짜 만족감을 주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캐서는 사람들이 안전, 효능감, 소속감, 자율, 확신에 대한 욕구를 타고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와 지위만을 좇으면 이런 것들에서 멀어진다. 다른 이들과 공감을 나누는 대신 경쟁심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끼는 대신 압박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행복은 우리가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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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풍요가 마음의 풍요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세분화와 전문화를 통한 역할 분담이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란 표현이 생각납니다.

 

 

[본문 발췌]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으는 갖가지 가구나 물건이 결코 내면의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편의를 더 많이 가질수록 거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삶이 그만큼 더 제약을 받습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

 

엔트로피가 에너지의 퇴화와 연계됐듯 부정가치는 가치의 퇴화와 연계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물리적인 '일'로 전환될 수 없는 형태로 탈바꿈한 에너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부정가치'는 공용과 문화가 폐기된 결과 전통적 노동이 자급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돈의 흐름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더욱 해체되고 있는데도 더 많은 사람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려면 근본적으로 돈을 점점 더 늘려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렇게 널리 퍼진 돈의 흐름에 따르는 사회 해체를 표현할 수 있는 솔깃한 유비로 보였습니다.

 

임금 노동을 보완하는 그림자 노동,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에 대항하여 경쟁하는 자급 노동

 

고도의 상품 환경에서는 상품이 결정하는 필요에 적절히 반응한다 해도 더 이상 그 사람의 만족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영영 뭔가가 '필요한' 상태로 이해됩니다. 필요가 무제한이 되면서 사람은 갈수록 더 궁핍해집니다. 역설적이게도, 필요의 만족을 위한다는 상품을 만드는 데에 시간과 자원을 소비할수록 사람의 욕망은 더 얕아지고 그것이 충족되는 구체적 형식에 더 무관심해집니다. 사람이 갈수록 더 궁핍해지고 가르치기 쉬워지고 욕구불만 상태로 넘어가는 문턱은 아주 낮습니다.

 

병원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을 만들어낸다. 학교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배울 능력을 빼앗고, 감옥은 죄를 양산하고, 자동차는 교통을 지체시킨다. 반생산성 단계에 이르면 제도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문제를 푸는 능력을 빼앗기고, 그 대신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도록 내몰린다. 급기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일리치는 그의 첫 저서 <의식의 축제>에서 마르크스가 리카르도 학파를 비판한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그들은 '쓸모있는 물건'만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쓸모있는 물건을 너무 많이 만들면 쓸모없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해석과 재사유가 가능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낭만적인 생각으로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최악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정否定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면서, 행동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가는 질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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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그리고 작가들이 '불평등'을 이야기했다.

나에겐 심보선 시인이 표현한 '불평등'이 마음에 꽃힌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 심보선, 「집」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지위나 계층적 불평등, 정보 격차에 의한 불평등.... 사회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며 불평등의 영역도, 대상도 늘어가기만 한다.

 

 

불평등(不平等), 차별이 있어 고르지 아니함.

[유의어] 불공평, 불균등

 

(네이버 영어사전) [명사] (political/racial) inequality, [형용사] unfair, unequal      

불평등한 분배, unequal division

불평등하게 대하다, treat sb unfairly[unequally]

그녀는 직장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She claimed that she was treated unfairly at work.

IMF 이후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After IMF crisis, the issue of social inequality became more severe.

우리 사회는 아직 남녀 불평등의 장벽을 깨지 못했다, Our society hasn't broken the barrier of sexual inequality yet.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집 안으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난 창문들을 모두 깨야 한다

 

그들의 집은 문이 없다

그들의 집은 불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집을 지켜야 한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부'라는 것은 마치 전기 그 성질이 유사해서 오직 불평등과 격차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법이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정치는 경제와 더불어 현재 우리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도구다. 개인적인 금전 문제는 성실을 무기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 성실로 일궈놓은 나의 사업이 송두리째 사라지거나 빼앗길 수 있다. 투표를 안 해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비열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많은 일에서 내 자유의지와 의사결정권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 정치에 대한 고의적 무관심이 계속될 때 사회에는 불평등이 만연해진다. 투표 같은 작은 행동이 자신의 행복에 직결되어 있음을 반드시 인지해야 할 이유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더 열심히 살 이유를 찾게 된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닌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남들보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이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도 이 문제로 부모를 탓하거나 남을 탓하기를 그치게 된다. 이 불평등에 순응하는 순간 불평등은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면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된다. 지금 주어진 환경이나 태어난 여건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환경과 여건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시절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오히려 사소한 역경이나 시련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다. 인생이란 험한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예방주사조차 맞지 않아서 인생의 고난에 저항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축복받은 환경이나 재능이 오히려 단점일 수 있다는 뜻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현대 문명을 저주하고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는 점을 보았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보았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보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느느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두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 그렇다면 현대 문명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악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

 

문명에 고통을 주는 원인이자 문명이 사망하는 원인은 불평등한 분배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 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금융 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 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 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 그에 더해 그들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전망을 약화시켰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한 경제 현상들, 즉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들의 보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그저 실생활에서 동떨어진 것 이상의 우를 범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이 한 짓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해를 끼쳤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세기 제언>

사회 안전망 없이 쥐꼬리만한 경제적 평등만 가지고서는 자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자유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유례없는 최고의 불평등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부와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외, <초예측>

미국의 엘리트들은 사회 불평등에 관심을 갖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정작 계급에 대한 이해는 낮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이유는 본인이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믿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그들이 진정 계급 문제를 이해하려면, 본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3루에 서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3루타를 쳐서 3루까지 달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고, 따라서 날 때부터 타석에 서보지도 못한 사람에 비하면 홈베이스를 밟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말이죠.

- 조앤 윌리엄스, '6장.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중에서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쇠고기 신화는 반복적으로 남성 지배를 영속화하고 계급 차별을 조장했으며, 국수주의와 식민주의의 이익을 증진시켜 왔다. 또한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박탈을 영속화했다.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두 가지 유형의 일자리 창출에 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소프트웨어 디자이너나 CEO 같은) 꼭대기에 있는 몹시 특화된 직업과 (폭스콘의 휴대전화 조립 기술자와 아마존의 창고지기 같은) 바닥에 있는 보수도 낮고 기술 숙련도도 낮은 일자리.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디지털 경제는 불평등한 경제입니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것처럼,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보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훨씬 빠르게 성장하면서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합리적' 인 것이 언제나 '합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학과 수학은 '합리적' 일수록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만, 예술과 예술을 닮은 인생의 여러 장면들은 때론 중요한 인상만 '선택' 해서 간직하는 불평등과 불합리를 통해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 ...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먹는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들과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손실을 간과한다. ... 불평등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슷한 소득 재분배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분배정의와 공동선의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루치르 샤르마, <애프터 크라이시스>

낮은 수준의 불평등은 장기적이고 강력한 경제 성장을 촉발하지만, 높거나 빠르게 심화되는 불평등은 성장의 싹을 조기에 잘라버릴 수 있다는 시각을 반박하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주장은 우선 소득이 늘어날수록 부자들은 저소득과 중산층 계급들에 비해서 추가로 번 소득 중 지출하는 몫은 줄어들고 저축하는 몫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는 관찰 결과로부터 시작한다. 부자들은 이미 식품부터 휘발유까지 원하는 모든 기본적 생필품을 구매하고 있기 때문에 재산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러한 소비재들에 대한 지출을 늘릴 여지가 많지 않다. 반면 저소득과 중산 계층들은 소득이 늘어났을 때 의류나 식품 내지는 더 좋은 부위의 쇠고기나 그동안 못해본 주말여행에 필요한 휘발유 지출을 늘릴 것이다. 경제학적 용어를 써서 이런 현상을 설명하자면, 부자들의 경우 추가 소득 중 저축되지 않고 소비되는 금액의 비율, 즉 한계소비성향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이 낮다. 결과적으로 국가 소득에서 부자들이 기여하는 몫이 커지는 기간 중에 전체 소비지출 성장세는 둔화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경제 성장률은 후퇴한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은 강력한 성장 기간이 끝나는 단계에서 생기는 금융 위기의 영향을 부풀릴 수 있다. 호황기가 정점에 도달하면 상류층으로 부의 쏠림 현상이 생기면서 부자들은 늘어난 재산 중 일부를 사회적 분노를 유발하는 과시적 소비 형태로 금융 투기에 탕진한다. 그런 뒤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국가 부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빼돌리기도 한다.

 

불평등은 기업인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현금으로 거래를 하고 장부에 기록하지 않는 지하 경제black economy에서 목격되는 부패와 강력하게 관련되어 있다.

 

나쁜 억만장자들은 부패, 불평등 고조, 성장 둔화라는 악순환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언어학에서 지프의 법칙, 경제학에서 파레토의 법칙, 베키의 법칙과 무수한 Power law. 이들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불평등과 불균형이다. 경제나 맥주 소비, 웹페이지 사용 빈도, 도시 인구 등 시스템은 다르지만 각 시스템은 대부분 특정한 몇몇 개체에 대부분의 숫자가 몰려 있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의 역할(빈도)은 미약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양상은 어떤 스케일에서 관찰하든 같은 패턴을 보인다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지프의 법칙의 경우,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단어들에서 이런 특성이 보일 뿐 아니라 영어로 된 모든 소설, 혹은 모든 문학 작품, 혹은 더 넓게 모든 활자매체의 글을 조사해봐도 똑같은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도시의 인구 분포도 한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또는 전 지구적으로 스케일을 넓힌다고 해도 똑같은 모양의 그래프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스케일에 무관하게 같은 구조를 되풀이하는 것을 '자기 유사성self-sinmilarity'이라고 부른다.

 

 

E. F. 슈마허, <굿워크>

슈마허는 생산, 분배, 소비에서의 국제적 협력관계의 중요성과 국제사회에서의 경제적 불평등과 종속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구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에는 과도한 흑자를 내는 소수의 국가들이 존재하고, 다른 반대편에는 도저히 갚을 수도 없는 빚더미에 허덕이는 대다수 적자국이 존재하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으로는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전쟁의 원인이 국제적 무역불균형과 교환체제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한 슈마허는 나중에 이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전후 다자간 무역을 활성화할 새로운 교환체제의 설립을 고안하였다. 그가 제안한 새로운 방식의 다국적 결제 시스템은 케인즈의 논문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도브 사이드먼은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서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이드먼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freedom from'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시시콜콜 간섭하는 상사로부터의 자유, 광고를 보라고 강요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동네 가게로부터의 자유, 지역 은행으로부터의 자유, 호텔 체인들로부터의 자유가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는 '행동할 자유freedom to'라고 사이드먼은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그들의 자유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선거, 헌법, 법의 지배, 그리고 의회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많은 지역에서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지역에서 혼란이 확산되면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먼은 리비아나 시리아, 예멘, 또는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 추락 이후의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이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얻지 못한 점에 주목해 그 차이를 '자유의 불평등'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불평등일 것이다. 사이드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벗어날 자유'를 얻는 건 신속하고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행동할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법률과 도덕률을 만들어 행동할 자유를 갖게 되기 전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진정한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이드먼은 "소득 불평등은 불안정을 초래하지만 자유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벗어날 자유'가 '행동할 자유'를 앞지를 때, 역량이 커졌지만 파괴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 많은 해악과 파괴를 초래할 것이며, 그들은 건설적이고 인간적인 노력에 고취되고 그에 협력하지 않는 한 탈주한 죄수와 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국가 안정을 위한 명목으로 빈부의 차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문명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슬에 묶여 있다. ... 인간은 국가에 지배당해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개인 우선' 사상이다. 또한 인간은 항상 서로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그 집합체가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는 국가의 모든 인간이 정치에 참여하는 '공화제'일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루소는 말했다. 루소가 꼽은 이상형은 고대 그리스에 있던 '도시국가'이다. 집회에서 투표를 통해 정치를 하고 국가의 규제는 없었던 시대야말로 자연적인 상태이며, 여기에는 불평등도 부자유도 없었다. 즉 국가는 공공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심리학자 짐 시다니우스와 펠리시아 프라토는 정도 차이는 있을지어정 누구에게나 이른바 사회적 우세(social dominance)의 동기가 있다고 말한다. 좀 더 직관적인 용어로는 부족주의(tribalism)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 집단들 사이에 위계가 구축되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보통은 자기 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우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다. 두 연구자는 사회적 우세 성향이 있는 사람일수록 애국주의, 인종주의, 운명, 업모, 카스트, 국가의 운명, 군사주의, 범죄에 대한 강경책, 기존 권위와 불평등의 보존 등의 견해와 가치에 끌린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거꾸로 사회적 우세에 반대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인도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보편 인권, 정치적 진보주의, 기독교적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에 끌린다. 사회적 우세 이론에 따르면, 인종은 편견을 둘러싼 논쟁에서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자주 쟁점이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유달리 중요하다 할 수 없다. 타이펠이 보여 주었듯이, 사람들은 몹시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눈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관계는 표면상 교환처럼 보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을 사는 것이죠(즉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합니다). 이런 관계는 바로 자유주의적 사회정의론의 근간을 이루는 '계약'의 전형이죠. 그러나 누가 노동자이고 누가 자본가인가? 이 문제는 어떤 추상공간에서 사유실험을 통해 '모델링'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이미 불평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즉 사회는 본질적으로 부정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사유는 정의로운 사회의 모델링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의한 조건들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표면상 노동과 자본은 서로를 교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은 완성된 제품으로서 소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자본에 생산력을 부여해 주는 살아있는 힘입니다. 자본은 노동력을 착취해서 확대재생산의 과정에 들어가지만 노동은 자기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부터 소외되어 버립니다. 노동의 결과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 되어버리죠.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외를 야기하는 생산의 메커니즘이 착취입니다. 즉 임금에 해당하는 노동 이상의 노동을 시킴으로써 잉여가치를 창출하고(이때 노동 '시간'과 '생산력'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 잉여가치를 확대재생산으로 돌림으로써 노동자의 노동을 전유하고 착취합니다. 즉 착취는 객관적인 경제학적 메커니즘이고, 소외는 그 결과로 야기되는 노동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베블런, <유한계급론>

유한계급의 제도는 문화적 발전을 직접 방해하는데 (1) 유한계급 자체의 고유한 타성에 의해 (2) 과시적 낭비와 보수주의의 규범적인 선레를 통해서 그러하다. 간접적으로는 (3) 유한계급 제도 자체가 의존하고 있는 부와 생계수단의 불평등한 분배체계를 통해서 문화의 발전을 저해한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자연재해, 기근, 종족분쟁은 선진국의 정부나 국제원조기구, 국제여론 등이 관심을 촉구하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은 점차 망각의 제물이 되고, 문제 자체의 존재마저 잊혀버리지.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돼. 처음에는 강했던 국제적인 연대감도 시들해지고. 토지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빈민가의 인프라 정비도, 농업지원도, 우물 파기 프로젝트도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버릴 응급 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마늘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어떤 죄악이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그 뿌리를, 그것을 가능케 했던 맥락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불 가리지 못할 정도의 격한 미움, 종교적 광신 -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유대교든 - 복수에 목마른 살인적인 근본주의는 언제나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정신적 곤궁, 정치적 절망과 실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꽃피게 되는 법이다. ... 세계의 지배자들은 점점 높아가는 황금산 위에 앉아 있다. 그들의 발치에는 굶어 죽은 자들과 전염병과 전쟁, 경제적인 궁핍으로 죽은 자들의 무덤이 놓여 있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불평등을 고려할 때 질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모두를 질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 전에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놀랍게도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클라우스 슈밥 외 26인, <4차 산업 혁명의 충격>

최근 강력하게 일어난 디지털혁명이 미래에도 게속된다면, 현대 경제의 구조와 일 자체의 역할에 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 후손들은 더 적은 시간 일하고 더 잘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과 보수는 더 불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고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하고 공평하고 포용적인 성장 inclusive growth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사물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디까지 진화하는지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홍병선/최현철, <과학 기술과 철학의 만남>

농업의 혁명은 돌을 갈아 정교한 도구를 만듦으로 이루어 것이다. 정교한 도구의 사용과 함께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식도 차츰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명이 발달한 지방에는 사냥도구, 농기구, 무기 등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고,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자연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석기 혁명 시기에 정교한 도구를 다루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었다. 결국 식량생산에 의해 생긴 여유는 마침내 전문기술자를 낳게 되고 또한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산업혁명의 발생 요인을 경제적으로는 크게 수요적 요인과 공급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수요적 요인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그에 따른 소득과 수요의 증가, 중상주의 시대의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수요의 증가이다. 공급적 요인으로는 인구증가에 따른 노동력 확보와 식민지 개척에 따른 풍부한 원료 공급 등이 있으며, 기술의 발달과 제도의 변화 또한 산업혁명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산업혁명 중 영국에서는 중소농민이 몰락과 노동자의 증가, 농업혁명, 기계의 발명 등과 공장제의 출현, 교통과 상업이 발달되었다. 여기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이 형성되고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생산방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생산량 증가로 인하여 결국 농업(1차 산업) 중심의 사회에서 제조업(2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의 사회 및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정보화의 혁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능력의, 차이에 따라 정보력의 격차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보력이, 격차에는 새로운 문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학기술의 적응도와 맞물려 있다. 이것은 정보에의 접근을 불평등하게 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미 빈부격차로 연결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정보격차에 대한 이러한 우려가 아직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 뚜렷한 징후가 포착되고 있지는 않지만 근래 정보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 한 국가 내의 지역 간의 정보격차 문제, 선진국과 후진국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TDF(Transboader Data Flow)논쟁의 심각성을 고려할 경우, 정보 격차 문제를 단지 특정 국가차원의 문제에만 한정시키기는 어렵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맨해튼이 굉장한 도시라는 것 외에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또 있었다. 맨해튼은 진보정치와 진보적 사상의 중심지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온갖 종류의 불평등을 끝장내는 것이다. 또한 노동하는 남녀를 해방시키고 자신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창조적 소동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이곳에 왔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났던 지식인들은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 외의 다른 지역은 무시했다. 또 이곳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부유하고 고립된 이기주의자에 불과했다. -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 마이클 예이츠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세계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불평등을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평등 속으로 녹여내고 불평등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존 롤스의 두개 정의의 원칙, 1) 자유와 관련한 원칙으로 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2)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한 원칙으로, 일단 공정한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사회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편익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암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으려면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 애덤 스미스'

 

 

왕가리 마타리,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한편 더 가난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평등 때문에 빈곤에 시달린다. 그래서 지역 환경을 지나치게 파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파른 비탈이나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나무와 풀을 베어 내고 농작물을 길러 대규모 토양침식이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방목한 가축이 남김없이 풀을 뜯어먹는 바람에 목초지가 사막처럼 변한다.

 

구조적 불평등 탓에 부유한 나라에서든 가난한 나라에서든 분명 가난한 이들은 가난에서 탈출하기 어렵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기 쉽다. 그 불평등을 인식한 그린벨트 운동은 나무를 심고 황폐해진 자연과 숲을 되살리고 식량 안보를 증진하며 물을 모아 두고 쓰레기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일에,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변화에 꼭 필요한 민주적 협치(good governance)를 정착시키기 위한 활동을 오래전부터 결합해 왔다. 민주적 협치란 지도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결정을 내리고, 경제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공평하고 책임감 있게 자원을 이용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얼마나 약자이든, 또는 처한 환경이 얼마나 불공평하든,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고 몸을 일으켜 걸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린벨트 운동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나무 심기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사실로 증명했다. 지구의 상처와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싸움이 성공하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힘이 꼭 필요하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돈은 맥주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아하지만 어느 선 이상이 되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맥주 한 잔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지만 맥주 열 잔을 마신다고 행복이 열 배 늘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만 나올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소비를 늘리는 데만 집중하면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생명체 수천 종이 멸종했고, 공기와 물이 오염되었고, 기후를 좌우하는 대기 가스도 불안정해졌다. 고립되고 불안하고 욕심 많은 사람을 만들어냈고, 부의 심각한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유례없이 심각한 빚만 늘어나게 되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갖게 되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경제적인 문제가 있는데도 우리는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 더 많은 가전제품 등 역사상 그 어떤 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사들인 탓에 물건을 쌓아두는 개인용  저장고, 빌딩, 창고 등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 번성했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평등해야 건강하다" - 리처드 윌킨슨

 

소득불평등은 유아사망률을 높이고, 살인율을 높이고, 구속 수감 인구를 늘리고, 학업성취도를 낮추고, 정신건강을 해친다. 여기에 사회구성원 간의 불신이 더해져 불평등을 강화한다.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안녕의 각종 지표들이 아래로 향한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호프스테더는 권력 거리를 '각 국가의 제도와 조직에서 권력이 약한 구성원이,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는 상태를 예기하고 받아들이는 정도'라고 정의했다.

 

불평등이 사회 공통의 법일 때는 최대의 불평등도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의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평등의 신화에서는 '욕구' 개념이 복지 개념과 결합한다. 욕구는 안도감을 주는 목적으로 가득 찬 세계를 묘사하고 이 자연주의적 인간학은 보편적인 평등을 약속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명제가 암시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욕구와 충족의 원칙 앞에서 평등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사물과 재화의 사용가치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비록 교환가치 앞에서는 불평등하고 반목하지만). 욕구는 사용가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은, 그 앞에서는 사회적, 역사적 불평등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효용 또는 자연적 합목적성의 관계다. 사용가치로서의 비프스테이크 앞에서는 프롤레타리아도 특권 계급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사회적 차이와 차별을 만들어내는데, 사회라는 이 구조적 조직체는 (특히) 부의 이용과 분배에 초를 두고 있다. ....성장이 우리를 풍부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도 않고 또 풍부함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성장 자체가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질서, 즉 특권계급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가 자신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전략적인 요소로서 성장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기술적, 경제적) 성장의 내재적 자율성은 사회구조에 의한 이 규정성에 비하면 미약하고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생활필수품 수준에서 상대적 균질화는 따라서 가치의 '점차적 변화'와 효용의 새로운 서열을 수반한다. 왜곡과 불평등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이전한 것이다. 일상적인 소비재는 점차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되지 못하며 또한 소득도 매우 큰 불균형이 감소되고 있는 만큼, 차별기준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간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지출, 구매 및 소유라는 의미에서) 소비는 사회적 지위의 변하기 쉬운 체계 속에서 현재 행하고 있는 우월한 역할을 조금씩 잃고, 그것을 다른 기준과 다른 유형의 행동에 양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소비가 모든 사람의 속성이 될 때에 그것은 더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맑은 공기에 대한 권리'가 의미하는 것은 자연재로서의 맑은 공기의 소멸과 그것의 상품지위로의 이행, 그리고 그것의 불평등한 사회적 재분배라는 사실이다. ... 자본주의 체계로의 진보라는 것은 모든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가치가 점차 생산형태로, 다시 말하면 (1) 경제적 이윤의 원천, (2)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갈망의 생산과정 자체도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사회하층에서의 체념과 상류층에서의 보다 자유로운 갈망은 욕구충족의 객관적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문제는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업상의 또는 문화적인 갈망보다 훨씬 더 큰 유연성을 나타내는 (물질적 또는 문화적인) 순수한 소비 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는 사회 이동의 면에서 중대한 실패를 보상하는 것일 수 있다. 소비충동은 사회계급의 수직적인 서열에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특히 하층계급의) '과소비' 갈망은 지위를 추구하는 요구의 표현인 동시에 이 요구의 실패를 체험한 데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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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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