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미국의 의사 던칸 맥두걸이 인간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썩어 없어지거나 재로 뿌려져 사라지는 육신의 흔적과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영혼의 무게만 남을 것이다.

 

고독속에 영글어진 생각, 그 생각을 정리하고 창작을 통해 문자화 된 이야기와 글, 그 무게는 영혼의 무게보다 더 무겁고 그것을 읽은 사람의 기억속에 좀 더 오래 남겨질 수 있지 않을까?

 

 

[이하 본문 발췌]

 

삼심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삼십오 년간 나는 그렇게 주변 세계에 적응해왔다. 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정도 되는 철이 전부라는", 인간이 소멸된 자리에 남는, 그의 실존을 증명하는 존재의 무게는 고작 25g이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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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면 꼭 높이를 확인하고, 정상에 올라야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높이나 정상보다 산에 오르는 과정에 보이는 계곡과 흐르는 물소리, 개성있는 나무나 식물, 적막을 깨는 새소리, 하늘을 이고 숲에 둘러싸인 절집 구경 등 산에 어우러진 주변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정상을 꼭 올라야할 이유도 없어졌다.

 

예전 설악산 단풍 구경은 주로 새벽 버스를 타고 한계령이나 오색을 기점으로 대청봉을 거쳐 천불동 계곡을 타고 내려가는 코스로 갔다. 요즘은 반대편 점봉산 방향으로 흘림골과 만경대 코스로 짧게 산책하며 단풍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만경대 코스는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 통해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https://reservation.knps.or.kr/information/trailInfo.action?trailCd=11

 

단풍 구경 후 오색에서 바로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지만, 속초로 가서 동명항 회센터에 들러 잡어 회 한접시 떠서 근처 바닷가에 자리잡고 가을 바다와 항구, 멀리 설악산을 풍경 삼아 먹고 근처 시외버스터미널을 이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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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깨닫는 방법 중 한 가지다.

계획하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통한 즐거움도 있겠지만 여행도 아는 만큼 더 잘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기를 읽고, 여행 정보를 찾아보는 거겠지...

 

[이하 본문 발췌]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그러려면 도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건축물과 박물관, 미술관, 길과 공원, 도시의 모든 것은 '텍스트(text)'일 뿐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 도시의 텍스트도 해석을 요구하는데, 그 요구에 응답하려면 '콘텍스트(context)'를 파악해야 한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말한다. 도시의 건축물과 공간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 그들이 처해 있었던 환경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누가, 언제, 왜, 어떤 제약 조건 아래서,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살피지 않는 사람에게, 도시는 그저 자신을 보여줄 뿐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는다. - 서문 중에서

 

도시는 대형서점과 비슷하다. 무작정 들어가도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몸도 힘들며, 적당한 책을 찾지 못할 위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매할 책을 미리 정하고 가서 그것만 달랑 사고 돌아온다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터넷서점에 주문하면 되지 무엇하러 굳이 서점까지 간단 말인가. 대형서점의 가장 큰 장점은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맛보려면 서점의 구조를 미리 파악하고, 어떤 분야의 책을 살펴볼지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려고 마음먹었던 책이 신간 안내나 서평에서 본 것처럼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는 건 기본이고, 신간 코너와 베스트셀러 진열대, 스테디셀러 판매대, 기획 도서 진열대, 귀퉁이 서가까지 다니면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는 여유를 누리는 것은 덤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낯선 도시를 여행했다. 찍어둔 곳을 빠뜨리지 않았고 몰랐던 공간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맛보았다. - 서문 중에서

 

아테네, 멋있게 나이들지 못한 미소년

  •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 죽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잠재력과 한계를 모두 확인해 주었다. 아태네의 품에서 태어났으나 시대의 경계 너머로 나아갔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은 다수의 폭정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문명의 대세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도 인류의 스승으로 인정받는다. 역사의 역설이다.
  • 세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많다. 학자들은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우연히 어떤 길을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 무얼 위해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근심하며 종종걸음을 친단 말인가.' - 그리스인 조르바

 

로마, 뜻밖의 발견을 허락하는 도시

  •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 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든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팍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 인간은 지구의 바이러스이고 도시는 그 바이러스가 만든 피부병
  • sokakta hayat var, 길 위에 삶이 있다.
  • 낯선 도시에서 눈썰미와 요령만으로 맛집을 찾는 데 성공하면 세 가지 즐거움을 얻는다. 혀로 맛보는 기쁨, 배로 느끼는 만족감, 그리고 마음이 누리는 뿌듯함이다.

 

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 루브르를 지배하는 것은 작품의 아름다움과 예술가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 횡포, 집단적 허영심이다. 적어도 내 느낌은 그랬다. 루브르의 건물은 프랑스의 국력과 왕의 권력에 비례해 커지고 화려해졌다. 전시품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와 근대의 예술작품 중에는 왕가의 수집품이 적지 않고 남의 나라 고대 유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약탈해 온 게 대부분이다.
  • 어쩌다 한 번 해보는 사치여서 좋은 것이지, 날마다 그렇게 먹는다면 그다지 좋은 줄 모를 것도 같았다. 행복을 느끼는 데는 결핍이 필요하다.
  •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에펠탑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다. 세계박람회장 관문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를 할 때 프랑스 정부는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기념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에펠탑은 금속 7천300톤을 포함해 전체 무게가 1만 톤이 넘으며, 자체 하중과 바람의 압력을 거뜬하게 견뎌낸다. 발명왕 에디슨이 괜히 공학이 발전과 기술자들의 능력을 찬양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게 아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탑에 새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 에펠탑은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왕이나 교황이 취향 따라 만든 게 아니라 공모 절차와 전문적 평가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했으며 전문가와 비평가들이 아니라 대중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에펠탑은 민주주의 시대 도시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며,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합당한 과정을 거쳐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체제도가 문명의 대세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계기는 1789년 터진 프랑스대혁명이었다. 에펠탑은 이 혁명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로 손색이 없다. 셋째, 에펠탑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대와 중세의 왕궁이나 교횡와 달리 에펠탑은 개인이 디자인한 예술품이며 노예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없이 축조했다. 디자인을 설계한 에펠은 물론이요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권리를 누리면서 일했고, 당국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안전 조처를 했다.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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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회사 사람들과 점심으로 분당 "삼교리동치미막국수"를 다녀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줄을 서고 꽤 넓은 홀에도 꽉꽉 들어차 있어서 기대를 했지만, 담백함과 단순함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그닥 찾아가서 먹을만한 곳은 아니었다.

 

동치미 육수 맛도 그닥 깔끔하지 않고, 김가루와 들기름이 메밀과 육수 본연의 맛을 방해했다. 그래도 물대신 메밀차를 내주는 것은 참 좋았는데, 종이컵에 따라 먹으라고 하는 것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

 

서울 시내에서 막국수가 먹고 싶을 때 내가 찾는 곳은 우이동 "춘천막국수전문"으로, 이곳은 밍밍한 듯 담백하고 시원한 맛으로 육수 한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오는 편이다. 둘이가면 녹두전, 셋~넷이면 닭무침까지 시켜서 막걸리를 더한다면 금상첨화!

 

같은 메밀을 원료로 하지만 전혀 다른 맛의 메밀국수!

 

메밀국수는 대학생시절 자주 가던 인천 신포동 청실홍실의 메밀국수와 만두에 대한 추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최근에 부천역 근처 지나는 길에 청실홍실 분점이 있길래 먹어봤는데, 예전에 먹던 그 맛은 전혀 아니었다. 

 

청실홍실의 그 맛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이 분당에 있는데, 바로 '그집'의 메밀국수와 만두!

 

더운 날씨에 막국수나 메밀국수 한 그릇으로 시원함과 건강을 챙겨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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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은 진실성, 객관성, 공정성, 정의, 자유를 추구하며 독립적으로 언론의 공적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최근 법무장관 청문 정국의 언론은 언론윤리, 역할은 말할 것도없이 균형과 자정능력을 잃어 버린 듯 합니다.

검찰은 균형있고 공평한 사고와 냉철한 판단으로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국민의 안녕과 인권을 지키는 국가 최고 법집행기관으로서, 각종 범죄로부터 국민 개개인과 사회 및 국가를 보호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법에 근거해 공정, 진실, 정의, 인권, 청렴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이성적 판단으로 법 집행을 해야합니다.

법무장관 후보자 관련 수사에 검찰은 공정하고 합리적 판단을 하고 있는지요?

진실은 밝혀지겠지만 책임지는 언론과 검찰은 있을지?

우리에게 남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남겨주신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란 말을 실천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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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물', '토양', 이 세가지는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하면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화석 연료를 태우면서 공기를 오염시키고, 대규모 축산과 화학제품의 사용으로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부족함 없이 사용하고 실제 가치에 비해 비용 지불을 하지 않거나 아주 낮은 가격에 사용되었다면, 깨끗한 '공기', '물'. '토양'을 이용하는 데 점점 사용가치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자연의 선물을 어떻게 지키고 누리고 남겨야 하는지 생각하고 행동할 때다.

 

 

[이하 본문 발췌]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큰 일과 이어진다. 작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서 거대한 건물을 짓는다. 벽돌을 쌓는 일을 하찮게 여겨 소홀히 한다면 결국 큰 일을 그르치게 된다. 따라서 작은 일을 하지 못하면 큰 일도 할 수 없다.

 

'부'라는 것은 마치 전기와 그 성질이 유사해서 오직 불평등과 격차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법이다.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되며, 그 일이 성공하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생산물은 노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유용하게 소비할 수 있는 물건을 뜻한다. 그렇기에 국가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잉태해 내는가'이다. 그 이유인즉, 소비야말로 생산의 목적이자 열매이고, 생명이야말로 소비의 목적이자 열매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세가지 지식과 세가지 미덕을 갖추어야 하고, 교육의 목적은 이 여섯 가지에 대한 애해를 키우는 것이다. 남자 아이든지 여자 아이든지, 모든 아이들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과 비옥한 '토양'의 특성에 대해 배워야 하고, 또한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지키고 누려야 하는지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미덕은 '감사'와 '소망'과 '사랑' 이다. 누구든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과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세계 안에 갖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자, 곧 신의 공의에 대해 믿음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은 그 마음이 늘 우울하기 마련이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자,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을 자신의 친지와 친척으로 여기는 '아히삼(불살생)'의 정신이 없는 사람 역시 인생의 비밀을 절대 깨닫지 못할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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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철학자를,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혜는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터득되는 것이기에 부단히 생각하고 마음을 닦음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겠지요.

 

지식은 외부에 두고 찾아 쓸 수 있지만 지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지식은 복사에서 붙여넣기가 가능하지만 지혜는 그러기 어렵습니다. 지식이 복잡하다면 지혜는 단순합니다.

 

삶의 지혜를 터득하여 삶을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지혜 (智慧/知慧)

1.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2.불교 제법(諸法)에 환하여 잃고 얻음과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미혹을 소멸하고 보리(菩提)를 성취함. ≒지혜바라밀.

3.기독교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 히브리 사상에서는 지혜의 특성을 근면, 정직, 절제, 순결, 좋은 평판에 대한 관심과 같은 덕행이라고 본다.

 

(네이버 영어사전) wisdom, (formal) sagacity

He grew in experience and wisdom. 그는 경험과 지혜가 늘었다.

Philosophy means the love of wisdom. 철학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I’m always amused by who’s willing to pick your brain. 기꺼이 상대방의 지혜를 빌리려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늘 즐겁습니다.

Experience is the father of wisdom, and memory the mother. 경험은 지혜의 아버지요 기억은 그 어머니다. (서양속담, 지혜속담)

No man is wise enough by himself. (Titus Maccius Plautus) 그 누구도 혼자서는 지혜로울 수 없다. (플라우투스, 지혜명언)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지혜'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 해야 한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자각함과 동시에 녹아 없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를 사용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우리를 녹여 없앨 수 있다. 지혜는 배움이 아니라, 결코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지식만 많은 사람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이 낫다. 지혜는 지식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지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다. 지식의 덕목은 재능, 능력, 학식, 성공, 출세 같은 것들이다. 지혜의 덕목은 인내, 신중, 절제, 자기만족, 신의와 연대 등이다. 참된 지식은 지혜 없이 얻기 힘들지만, 참된 지혜는 지식 없이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가득 찬 삶보다 지혜로 가득 찬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하겠다.

 

린위탕, <생활의 발견>

지혜, 다시 말하면 최선의 사고 방법은 우리들의 꿈 또는 이상주의를, 현실 그 자체에 뿌리박은 뛰어난 유머감으로 해서 부드럽게 하는 데에 있다.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죽음에 대한 지혜가 없이는 결코 삶을 제대로 향유할 수 없다.

 

재물이 넘치는 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 재물에 대한 어떤 욕심도 갖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온전히 비우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관성이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고, 이 지혜가 리더십의 원천이 된다. 공부의 힘이 삶의 모든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성의 아름다운 순환이다.

 

지식과 정보는 소유와 축적의 대상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의 영역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다'와 '도달하다'의 합성어다. 낡은 사유의 지평을 깨고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가능하려면 몸 사이의 '간극'이 없어야 한다. 간극이 없으면 깨닫게 되고 깨달음이 있으면 간극이 줄어든다. 고로, 삶의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곧 지혜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이, 지혜에 대한 열정이 없이 잘 살 수 있는 방법,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길은 단연코 없다! 팔자를 고치고 싶은가? 그럼 가장 먼저 지혜를 사랑하는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용신이 무엇인지 절로 드러나게 될 터이니.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오롯이 주시한다는 뜻이다. "더울 때는 더위가 되고, 추울 때는 추위가 되라!"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면 잔다" "평상심의 도다!" 등의 선사들의 경구가 그런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열정을 다 포기하고 대충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오인일뿐더러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읽은 것이기도 하다. 대충 살아서는 결코 저와 같은 일상을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표상의 그물을 뛰어넘는 아주 역동적인 사유가 필요하다. 자아는 물론 가족, 혈연, 국가 등의 표상들이 형성하는 장벽을 벗어나 그야말로 우주적 인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정적으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선형성을 탈피해야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는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레스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기 모습을 본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다른 '낯선' 존재로 여긴다. 인류의 스승들은 지혜와 성스러운 능력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영혼의 힘이 있으므로.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단순한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남에게 주어도 줄어들지 않는 보물이 단 한 가지 있다. 원하는 대로 주어도 점점 커지기만 하는 이 보물은 바로 지혜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필요한 모든 것이 자기 안에 있음을 알고 자기를 계속 개선하려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 화낼 일도 없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자신에게 친절하기를 기대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 바람결에 던진 먼지가 자신에게 돌아오듯 불행은 불행을 저지른 이에게 돌아온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 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준다.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혜민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삶의 지혜란 굳이 내가 무언가를 많이 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편안한 멈춤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간단한 진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아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었다. 그런 지혜가 생기면 비로소 나 자신과 지금의 상황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때 편안함도 더불어 느낄 수 있게 된다.

 

나는 상대의 거울입니다. / 상대는 또 나의 거울입니다. /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 상대로부터 원하는 것이 있으면 / 이렇게 해달라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렇게 합니다.

 

지식은 말하려 하지만, 지혜는 들으려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 '나는 그 정도는 다 안다.'에서 시작하므로 / 새로운 것이 들어갈 틈이 없는 반면, / 지혜로운 사람은 / '나는 아직 모른다.'라는 마음으로 / 다른 사람 이야기에 귀 기울이니 / 더 큰 지혜가 쌓입니다.

 

공자, 임자헌 옮김, <군자를 버린 논어>

번지가 지혜로움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공자가 답해주었다. "사람이로서 해야 할 도리에 힘쓰고 귀신이나 신에 대해서 경외하는 마음은 갖지만 의지하지는 않고 거리를 둘 줄 안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자 일번에는 사람다움이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진짜 사람다움이란 것은 어려운 일을 먼저 해내고 나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제대로 사람답다고 할 수 있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산을 좋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황을 파악하니까 상황에 따라 계속 움직이게 되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할 뿐이니까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막힘없이 흘러가며 살아 즐겁고, 사람다움을 이룬 사람은 듬직하게 자기를 지키며 살아 장수합니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알고 떠나든, 가서 비로소 알든 떠나지 않는 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오래된 지혜를 만날 수 없다. 그곳에 가면 켜켜이 쌓여 있는 이야기들을 만나 볼 것.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나이는 아픔을 발효시키고 지혜를 숙성시킨다. 산도 나이를 먹어야 생명체들과 조화하는 성정을 가지게 된다.

 

박웅현, <여덟단어>

호학심사(好學深思), 즐거이 배우고 깊이 생각하라. 이 말에서 더욱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심사입니다. 너무 많이 보려 하지 말고, 본것들을 소화하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피천득 선생이 딸에게 이른 말처럼 천천히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말하는 삶. 어느 책에서 '참된 지혜는 모든 것들을 다 해보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끝까지 탐구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이게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길거리의 풀 한 포기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간장게장에서 새로운 세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본 순간들이 모여 찬란한 삶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너무 안달복달하지 않는 태도가 정말 지혜로운 삶의 태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는 나와 먼 이야기고, 불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내 뜻대로 일이 풀릴 거라는 전제 하에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패하면 하늘이 무너진 듯 좌절하죠. 아쉽게도 인생은 종종 내 뜻과 무관하게 실패와 마주하게 됩니다. 때문에 실패를 기본 조건으로 놓고 살면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인생이라는 교실, 지혜는 하루하루를 사는 동안 그 하루가 준 귀중한 것들을 거두어 모으는 데 있다. - E. S. 보턴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금강경>의 핵심은 반야바라밀, 즉 지혜이 완성이다. 지혜의 완성이란 생각이나 관념이 타파되고, 얽매임이 없고, 차별을 두지 않고, 집착과 견해가 끊어진 상태이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무심코 외우던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제 와 닿는다. 침대 위에서 내내 읊조린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정철, <한글자>

회, 우리는 생선회를 먼저 먹은 후에 매운탕을 먹는다. 날것을 먼저 먹고 익힌 것을 먹는다. 지식도 그렇게 먹어야 한다. 익힌 지식, 삶은 지식, 끓인 지식보다 날 지식을 먼저 먹어야 한다. 날 지식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에는 없다. 할머니의 느릿한 말 속에, 계절의 바쁜 변화 속에, 개미의 복잡한 동선 속에 살아 있다. 우리는 이 날 지식을 지혜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세상 모든 지식은 지혜를 먼저 먹은 후에 먹어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김용규, <생각의 시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그렇듯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전하고, 상의를 하고, 협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상용하는 말이 아니다. 로고스라고 하든, 언어라고 하든, 그것으 자기 안에 진리를 담은 어떤 것, 곧 '진리의 담지자truth-bearers'다. 헤라클리에토스가 로고스를 두고 "진리를 말하는 것이 지혜"라고 교훈한 것이 그래서이고, 하이데거가 "언어가 존재의 진리의 집이다"라고 선언한 것도 그래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라"라고 가르친 것이 그래서이고, 하이데거가 "말하기sprechen는 무엇보다도 먼저 듣기horen다"라고 당부한 것이 그래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가 공통적인 것(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통찰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라고 한탄한 것이 그래서이고, 하이데거가 "인간이 말하는 것은 그가 그때그때 언어에 응답하는 한에 있어서다"라며 참된 말하기는 존재의 진리인 언어에 "응답해-말하기ent-sprechen"라고 강조한 것도 그래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설파한 로고스logos가 곧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die sprache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하이데거, 두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로고스(또는 언어)를 먼저 듣고, 그것을 따라서 생각하고, 따라서 행동하고, 따라서 말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유이고, 행동이고, 언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처음으로 언어를 진리의 담지자로 규정했다. "진리는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산다. 언어가 진리의 집이다."

 

피타고라스와 그의 학파 사람들에게 수에 관한 탐구는 이처럼 '질서와 조화에 관한 학문'이었고, 물리학적, 미학적 의미뿐 아니라 의학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의미까지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된 하나라고 보았고, 그것을 탐구하는 일을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 곧 철학이라고 했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용어도 피타고라스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철학은 다른 아닌 질서와 조화에 대한 사랑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고 단지 검색엔진을 돌려 찾아낸 정보와 지식에 의존해 살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게 어때서?'라고 물을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정보와 지식은 어디서든 전송받을 수 있지만, 진실과 지혜는 아무 데서도 전송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개별적이고 미시적이며 합목적적인 정보와 지식은 검색할 수 있지만,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은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매 순간, 현장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 드러나는 진실과 지혜이고, 우리 사회에 필히 요구되는 것은 보편적이고 거시적이며 합리적인 전망과 판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우리의 손에 든 뇌가 아니라, 오직 머리 안에 든 뇌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박지원, <열하일기>

지혜와 어짊과 용맹의 세 가지 훌륭한 덕을 갖추지 않는다면 학문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고 통제하며 발전해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독서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들과의 대화 - 존 러스킨

 

우리는 작가의 지혜가 끝날 때 우리의 지혜가 시작됨을 느끼고, 작가가 우리에게 해답을 주기를 원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에게 욕구를 불어넣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욕구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예술에 있어 최후의 노력을 하여 도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감상하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정신적인 눈에 관한 독특할 뿐만 아니라 숙명적인 법칙에 의해(이 법칙은 진리란 그 누구로부터도 전수받을 수 없으며 우리가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책의 지혜의 끝이 우리 지혜의 시작으로 보이게 하여, 책이 할 수 있는 말을 모두 다 마쳤을 때 우리에게 책이 한 말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책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답을 요구하는 셈이다. 사실 시인들이 개인적으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우리로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의 효과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는 별개로 뛰어난 장소를 단지 살짝만 엿보게 하는 것 같은 작품들을 보고, 저자들이 그곳의 심장부로 우리를 안내하기를 바란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자발적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 상업, 문학, 예술을 막론하고 불필요한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오늘날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개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의 원조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욕망을 키우거나 확장하는 일은 지혜에 대립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유와 평화에 대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이 커지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며, 그래서 생존을 위한 두려움도 커지게 된다.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 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

 

지혜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은 선의 실현이 현실에 대한 지식을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 지혜가 특히 중요하다는 것은 이른바 '좋은 의도'나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선의 실현은 우리의 행위가 현실 상황, 즉 구체적인 인간 행위에 대한 '환경'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합하며, 그래서 우리가 이 구체적인 현실을 현명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명하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에 도달하여 지혜를 완성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현실에 대해 '말없이 응시' 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관심을 적어도 일시적으로나 억제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과거가 현재보다 미래의 특징을 훨씬 더 잘 가르쳐준다. 미래를 알려면, 당신은 킬러 애플리케이션에만 몰두하면서 기술자폐적인 용어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 오직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과거를 존중하고, 역사적 기록에 관심을 가지고, 옛 것이 주는 지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생존에는 필수적이지만 때로는 문자로 전재히지 않는 경험법칙을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변에 있는 것, 즉 살아남은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혜민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복잡함 속에서도 단순한 것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단순한 것이지만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김형석, <백년을 살아보니>

장년기에는 이성과 감정이 균형을 갖춘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먼저 생각하고 감정을 노출하며 행동을 한다. 그런데 늙으면 이성 기능이 약해지고 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화를 내기도 하고 충격을 받기도 한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매사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징표.

 

김연수, <소설가의 일>

세상의 지혜란 마음의 평온을 찾게 하고 삶의 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피할 수 있는 생고생을 미연에 방지하게 만드는 데에도 어느 정도 목적은 있을 것이다. 피할 수 있는 생고생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자성어는 '견물생심'이다. 이 사자성어는 마음이 생기면 그게 고생길의 시작인데, 그 모든 것의 시초는 보는 것, 즉 감각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유현준, <어디서 살 것인가>

지식은 책에서 배우고,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

 

이기주, <한때 소중했던 것들>

세상에는 자기 그릇만큼만 겨우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있다, 라는 말은 참으로 온당하다. 아무리 많은 물을 길어서 '나'라는 그릇에 갖다 부어도 도무지 양이 늘어나지 않는 것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당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겐 지식일 수 있을 테고 누군가에겐 지혜일 수도 있을 텐데, 만약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법정 스님, <무소유>

사실 책이란 한낱 지식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 거기에서 얻는 것은 복잡한 분별이다. 그 분별이 무분별의 지혜로 심화되려면 자기 응시의 여과 과정이 있어야 한다. ... 나그네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행이 단수한 취미일 수만은 없다.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그러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나그네 길에서, 1971

 

미치오 카쿠, <미래의 물리학>

요즘 인터넷에서는 정신분열에 가까운 사이비 선구자들이 온갖 해괴한 논리로 대중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들의 헛소리에 시달리다 보면 대중들은 결국 한 가지 덕목을 갈구하게 된 텐데, 그것이 바로 '지혜(현명함)'이다. 사실(fact)은 지혜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정신 나간 블로거들의 헛소리에 염증을 느낀 미래의 네티즌들은 지혜가 담긴 글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경제학자 해미시 맥레이(Hamish Mcrae)는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의 대부분은 쓰레기다. 이런 것은 쓰레기 메일과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현명한 판단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미래에는 재정을 분석하거나 경제동향을 파악하는 등 현명한 판단력을 기초로 하는 직종이 가장 높은 연봉을 받게 될 것이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내온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순간과 운이 없었던 날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음에 동감하게 되었다. 어차피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과 싸워온 세월들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해서 부와 권력과 행복이 뒤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게으르고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밑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소소한 발전의 재미를 알아나가는 것도 지혜라고 해야겠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인생은 좋았고, 때론 나빴을 뿐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지혜와 덕을 갖춘 노인은 인류의 축복입니다. 신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가르쳐줄 수 없었기에 노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시간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줍니다. 인간은 많은 것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나이를 먹습니다. 늙었다는 것은 그가 오래 살았다는 뜻이기 전에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노인의 백발은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에 담긴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영복,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변화와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 버리기 연습>

명상을 제대로 하면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불교의 수행에는 계(戒), 정(定), 혜(慧)라는 삼학(三學)이 있습니다. 계는 스스로 지키는 계율이고, 정은 집중하는 마음 상태를 말하며, 혜는 집중 상태에서 자기 마음을 관찰하는 지혜로움을 뜻합니다. 정과 혜를 '머물러 본다'는 의미에서 지관(止觀)이라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마음의 패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패턴을 무너뜨리고, 자기 속의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것이 바로 수행의 본질입니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습관이 아무리 필수라 해도 도덕적 미덕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늘 새로운 상황이 생기고, 특정 상황에서 어떤 습관이 적절한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도덕적 미덕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천적 지혜"라 부르는 지식이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다루는 과학 지식과 달리, 실천적 지혜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특정 상황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실천하는 지혜이고, 실천은 특정 상황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를 "선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실천적 지혜는 정치적인 면이 내재된 도덕적 가치다. 실천적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같은 시민들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 무엇이 이로운지 심사숙고할 줄 안다. 심사숙고는 철학적 사고가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특정 상황에 관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행동에 주목한다. 하지만 단순히 계산에 머물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최고선을 찾아내려 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지식만 많은 사람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이 낫다. 지혜는 지식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지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얻을 수 있다. 지식의 덕목은 재능, 능력, 학식, 성공, 출세 같은 것들이다. 지혜의 덕목은 인내, 신중, 절제, 자기만족, 신의와 연대 등이다. 참된 지식은 지혜 없이 얻기 힘들지만, 참된 지혜는 지식 없이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으로 가득 찬 삶보다 지혜로 가득 찬 삶이 더 풍요롭다고 하겠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인생수업>

지혜와 명상은 우리에게 젊음이 중요하긴 하지만 언제나 매력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런 지혜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청춘은 순수의 시기인 동시에 무지의 시기입니다. 아름다운 시기이면서 동시에 고통스러운 자의식의 시기입니다. 모험의 시기이면서, 또 그만큼 어리석음의 시기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꿈은 늙은 시절의 후회가 됩니다. 삶이 끝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꿈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멋지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하루를, 그리고 하나의 계절을 온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산다면, 우리는 그날들을 다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후회를 가져다주는 것은 살지 않은 삶입니다.

 

에라스무스, <바보예찬>

너희들 중 누구든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줄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자가 되어라. 그래야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E. F. 슈마허, <굿워크>

삶을 예술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혜를 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슈마허가 보기에 진정한 교육이란 좋은 노동과 나쁜 노동을 구별할 수 있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 자본에 봉사하게 만드는 나쁜 노동에 대해 "아니오"라고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올바른 교육은 노동의 본질이 생명의 기쁨이자 에너지이며 우리가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혜임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란 무엇일까? 먼저 탐욕이나 시기심 같은 자아중심적인 욕구에서 해방되어 더 높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사랑, 동정, 공감과 같은 감수성을 고양시킴으로써 자아를 뛰어넘어 다른 사람들과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힘껏 돕는 것을 말한다. 슈마허는 산업교육에서는 불가능한 이런 삶의 지혜를 전통사회에서는 공동체마다 잘 간직하고 있었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전승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반면 산업교육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고, 서로서로 경쟁시킴으로써 각자가 오직 자신의 욕구충족에만 몰두하도록 만드는데, 이처럼 남보다 앞서려는 서바이벌 체제에서는 어떤 공동체도 건강한 모습으로 후대에 전승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산업교육은 먼저 남이 있어야 나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옛사람들은 인내 속에 지혜가 담겨 있으며 지혜는 인내에서 나온다고 믿었지요. ... 인내는 단순히 속도를 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이 생각하고 사색할 수 있는 여유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지식은 우리가 숙고할 수 있을 때에만 좋은 것이지요. 잠시 멈춤으로써 향상시킬 수 있는 건 지식뿐만이 아니다. 다른 인간들과 단순히 더 빠르게 연결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고 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신뢰를 쌓는 능력 또한 향상된다. - 도드 사이드먼

 

에드워드 윌슨, <통섭>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다. 따라서 세계는 적절한 정보를 적재적소에서 취합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중요한 선택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돌아갈 것이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철학이라는 단어는 보통 '사랑philo'과 '지혜sophia'로 번역되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고, 의미를 찾는데 헌신하는 사람이다. 지혜의 추구는 적극적이고 끝이 없는 발견 과정이다. 진정한 철학자는 이해하려는 열정으로 충만하고,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을 이어간다

 

찰리 멍거가 말한 '세상을 사는 지혜'를 얻는 기술은, 단일한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 획득을 강조하는 현대의 학습방식보다는 고대와 중세 시기의 리버럴 아트 학습법과 공통점이 많다. 지금까지 인류가 많은 지식을 축적해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지혜'다. 고등교육기관은 지식을 분야별로 분리해놓았는데, 지혜는 그것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세상 사는 지혜를 얻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특별한 선물을 얻게 될 것이다. 산타페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그 선물을 '창발'이라고 불렀고, 찰리 멍거는 '합주효과'라 불렀다. 기본 개념들이 연결되어 서로를 강화하면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생기는 폭발적인 힘이다.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이 광범위한 이해가 세상 사는 지혜의 토대다.

 

바버라 브래들리 해커티, <인생의 재발견>

생각이 경험을 결정한다. 사고방식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경력, 인간관계, 건강, 행복을 결정할 수 있다. 즐거운 생각을 하면 건강하고 부유하고 지혜로워진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부모,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대한 취약성, 감정적 기질과 같은 유전적 소인은 당신이 타고 있는 조각배를 특정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바람과도 같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주변 환경은 배를 떠미는 거센 물살이다.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는가 아니면 가정불화로 고통받거나 학대를 당하며 자랐는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는가? 가난한가, 부유한가? 결혼은? 직장은? 종교는? 그러나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조정할 수 있는 방향타를 갖고 있다. 승리와 패배, 기쁨과 고통과 상실 등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행복의 30~40%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 방향타가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당신의 배를 폭풍우로부터 지켜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항해를 즐기는 정도에는 확실히 영향을 끼친다. 결국 오늘 당신의 생각과 태도가 내일, 모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날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그리스 문화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었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구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죠. 에피스테메는 과학적 지식이자 철학적 지혜의 소산이었던 것이죠. 진선미가 분열되지 않고 통일되어 있었고, 지식인=철학자는 이 모두를 구비한 인물이었던 겁니다. 근대에 이르게 되면 형이상학적 지혜가 부정당합니다. 과학이 진眞을 담당하게 되고, 철학은 선善에 주력하게 되고, 예술은 미美를 담당하게 되죠. 칸트의 작업은 이런 삼분법을 잘 보여 줍니다.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이라는 삼분법을 사용하여 과학적 지식 및 그것에 대한 인식론, 도덕적 지혜, 그리고 심미적 능력을 인성의 세 부분으로 보았던 것이죠.

 

유시민, <청춘의 독서>

내가 남을 사랑해도 남이 나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인자한 마음(仁)이 넉넉했는지 되돌아보고, 내가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智)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것이며, 예로 사람을 대해도 나에게 답례를 하지 않으면 공경하는 마음(敬)이 충분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다면 온 천하 사람이 다 내게로 귀의할 것이다. - 맹자, 『이루 상』 4.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의 일주일>

지혜로운 여행사라면 우리에게 그냥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기보다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물어볼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세계는 어떤 손실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을 만큼 비좁은 곳은 아니다. 한두 번의 실패로 패배하고 손을 드는 것은 결코 판단에 민감하다고 해서 치하할 일이 못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명력의 파괴로서 슬퍼해야 할 일이다. 인간의 모든 사랑은 죽음에 지배된다. 죽음은 어느 때든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쳐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터전이 있으면, 인생의 의의와 목적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먼저 생각의 중심을 세우고, 그 이외에 여러 가지 2차적인 흥미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

 

레이 커즈와일, <마음의 탄생>

공포는 미신의 주요원인이자, 잔인함의 주요원인이다. 공포를 정복하는 데에서 지혜는 시작된다. - 버트란드 러셀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고독감이 병통으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차갑게 바라보는 자세기 필요합니다. 바깥의 풍경이든 내면의 심경이든 어느 하나라도 차갑게 관조할 수 있게 되면, 자아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제 3의 혜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지요. 지혜의 안목은 거리두기에서 옵니다. 사람과 사건은 한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삶과 죽음에 대하여>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야마구치 세이코,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 라인홀드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푸르름 속을 걷다보면 옹졸함과 자만심이 잠재워진다. 엄청난 대우주를 비춰 보면, 억만의 부富와 바이올린의 활 끝 사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걸으면서 단전호흡을 하면 영혼의 눈이 뜨이고 마음도 맑아진다. 벼락같이 기분이 상쾌해지면서 머릿속의 바람개비가 돈다. 그런데 나는 더 멍청해진 것 같다. 바보 같은 철인哲人인지, 지혜로운 바보인지..... 내 머릿속에는 아직 답이 없다. 바보스럽건 지혜롭건, 내일의 나는 다시 내 몸과 마음을 어느 낯선 땅으로 데리고 가서 부유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보다 부유해질 것이다.

 

강판권, <나무 철학>

인간은 시간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 나무는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간직하면서 나이테를 만들어간다. 나무의 나이테는 시간이 온전히 축적된 결과다. 그러므로 나이테를 많이 만들수록 삶의 지혜는 깊어진다.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촘촘한 나이테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지혜롭다. 얼굴의 주름을 보면서 한숨짓기보다는 주름 속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현명하다. 오래사는 나무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들에게 많은 것을 선물하듯, 나이든 사람도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나무가 나이를 먹어가며 다른 존재들에게 베풀면서도 자신의 성장과 성숙을 거듭하는 것처럼, 인간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남에게 많이 베풀면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다. 매일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나이를 먹는 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행복하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사랑이 사람에 대한 관심, 이해, 공감, 배려, 헌신, 감동이라면 지혜는 이 사랑이 사랑일 수 있게 하는 길 안내자이다. 지혜는 어떤 것의 모습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다른 것과 관계 맺고, 관계 맺음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사랑에게 이렇게 조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그 존엄을 훼손할 수 없다. 그래서 이웃 사람의 고통과 원하는 바에 눈길을 주어야 하고 늘 입장을 바꿔 이해해야 한다. 가슴 깊이 하나가 되고 이웃의 처지에 맞추어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 조건 없는 진정한 배려와 헌신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관심이란 이름으로 부당한 간섭을 하지 않으며, 내가 살아온 환경과 취향으로 이웃의 생각과 행위를 규정하지 않으며, 내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끈기와 인내와 관용으로 대화하면서 조화를 추구한다. 이렇게 무엇이 사랑이고 어떻게 해야 사랑을 잘 키워 내고 가꿔 낼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지혜이다. 다시 말해 '현명'한 안목과 '인자'한 마음 씀...

 

자비와 지혜, 혹은 깨달음과 사랑은 선후나 우열로 나뉠 수가 없는 가치이다. 마치 평화 없이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유 없이 평화로울 수 없으며, 존중 없이 평등이 있을 수 없고 평등 없이 상생이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철수, <이철수의 웃는 마음>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배란 방파제 안에 묶어두고자 만든 게 아니다. 사람이 산다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타성에 젖은 안주, 늘 걷던 길만을 걷는 일은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길을 벗어나 가보지 않은 길을 거거나, 스스로 길이 되는 일에 사람의 본분이 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들의 귀띔이지 않던가.

 

사람의 욕망은 채울 수도, 끝도 없다는 건 누대로 확인된 얘기 아닌가요? 그리고, 욕망 그 심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게 현자들이 전해주는 지혜지요.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인간이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일깨워주는 경고다. 인간에겐 분명 결점이 존재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지혜의 시작이다.

 

홍병선/최현철, <과학 기술과 철학의 만남>

철학은 한마디로 "모든 지적 호기심의 근원적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의 어원을 살펴보면 영어로는 필로소피(philosophy)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사랑을 의미하는 여러 말들 중에 친구와의 우정을 말하는 필로스(philos)와 지혜를 말하는 소피아(Sophia)의 합성어가 '필로소피아'인 것이다. 풀이하자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한자로 풀이해도 철학(哲學) 자체가 '슬기로울 철(哲)'자와 '배울 학(學)'자로 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슬기로움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 것인가?" 과연 "지혜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당연히 우리가 부수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사실 지혜란 슬기, 즉 지식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지식과 지혜 모두는 우리의 인식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세계 전체를 의미 있게 하는 근거와 관계되는 통일적인 지식으로 사물의 이치나 사람 행위의 선악을 분별하는 정신적 작용이라 하겠다. 우리 인간은 세계에서 다양한 것들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한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그냥 그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의 배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왜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되물어가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다고 하겠다.

 

전영우,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

육법공양. 부처님께 바치는 초, 향, 차, 꽃, 과일, 쌀 등 6가지 공양물과 함께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법을 의미. 초는 자신을 태워(자비) 세상을 밝혀(지헤) 주기 때문에 '지혜의 등불'을 뜻하고, 향은 어둡고 가려진 곳까지 두루 향기를 나누어주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해탈의 향기'를 의미한다. 차, 특히 감로차는 괴로움에 빠진 중생에게는 부처의 가르침이 마치 감로수와 같기 때문에 '열반의 맛'을 뜻한다고 한다. 오랜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인 과일은 개개인의 지극한 수행이 열매를 맺기 바라며 올리는 공양물로 '깨달음의 열매'를 뜻하고, 쌀은 봄부터 여든여덟 번의 노력으로 추수할 수 있기 때문에 '깨달음의 기쁨'을 나타낸다고 한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 꼭 피어야 할 존재이며, 울긋불긋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겠다는 보살행의 서원으로 여기기 때문에 '보살행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다.

 

웬델 베리, <지식의 역습>

과학이 인간과 토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될 수 있으니 농촌 공동체의 지식과 문화를 과학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는 가정은 이제 공식적인 강령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은 자본과 이윤의 연결 고리 기능을 한다. 전문가로서 주도권을 가지려면 지역 지식, 즉 평범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포기하거나 믿지 않아야 한다고 여겨진다. 그 결과 지역 지식은 경쟁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지역 주민의 지혜를 잃고 있다. 이제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정부, 기업, 대학에서 전문가를 불러오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간주된다. 그 전문가는 중심에서 고안한 물리학이나 화학의 최신식 해법을 추천할 것이다. 경제의 토대가 토지에서 정보로 바뀌었듯이, 노동의 토대가 지혜에서 자본으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전문가들이 추천한 해결책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만 한다면 이것도 괜찮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사태가 악화되거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건전 과학'과 기술 발전을 기업의 손에 맡겨두는 동안 우리의 농업은 갈수록 독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유전자 및 종자의 개수와 다양성은 줄어들고 있다. 대수층과 강물이 고갈되고, 농촌 공동체가 죽어가며, 토지와 농산물의 건강 상태도 갈수록 나빠지는 실정이다. 또한 식품 공급은 장거리 운송과 외국인 노동자에게 더 의존하게 되고, 우리가 마시는 물은 질이 점점 더 나빠지며, 멕시코 만에 있는 '죽음의 해역'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

 

로버트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타트 트밤 아시 Tat tvam asi" - 즉,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 라는 산스크리트어의 교리에 놓인다. 이 교리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나 자신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과 나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음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깨우침의 경지다. 논리의 세계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리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다. 따라서 논리는 궁극적 지혜가 아니다. 주체가 객체가 나뉘어 있다는 환상을 제거하는 최상의 방법은 물리적 행위, 정신적 행위, 정서적 행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한 훈련 방법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산스크리트어로 "디아나dhyana"라고 하는 것인데, 이 말이 다르게 발음되어 "찬(禪)"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다르게 발음되어 일번어로 "젠"이 되었다. 파이드로스는 결코 명상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도에 그가 머무는 동안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게 "의미 있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었으며, 이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할 만한 공정한 방법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따. 생각건대, 그의 입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믿음, 바로 그것이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내가 젊은 시절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섬기거나 혹은 거부했던 것은 대부분 사라진 것 같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은 단편들이다. 예전에는 지혜로 여겨졌던 것들이 이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지혜란 길을 따라 걷는 중에 얻어지는 법이다.

 

제인 구달, <희망의 밥상>

현대의 산업형 '농장'은 흙을 일구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며 자신이 기르는 동물들에게 정성을 기울이는 진짜 농부의 지혜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각각의 공장식 사육장은 오직 한 종류의 동물만을 '사육' 하며, 이 동물들은 최소한의 공간 안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성장해 몸무게를 불리도록 강요당한다. 최단 시간 안에 최대의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다. 사실 이러한 동물 공장은 농산업계에서 '동물 비육 공장'이라고 불린다.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이 가진 많은 재주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다. ...

동물들은 식단을 바꾸지 못한다. 생태계 변화가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변화가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 얼른 적응해서 거의 자유자재로 식단을 바꾸고 먹거리 종류를 무한대로 넓혀 생존을 유지해온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문명사는 먹거리 확장의 역사다. 먹을 수 없어 보였던 것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는 인간의 화려한 조리 기술에 걸리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야오간밍, <노자강의>

知人者智(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自知者明(자신을 아는 자는 명철하다) - 33장

 

헬라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선 두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지혜와 자비심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이르는 못한다. 여성은 지혜의 상징이고 남성은 자비심의 상징이다. 그 둘이 함께함으로써 불교의 근본이 형성된다 - 어느 라다크 승려의 말

 

사라 베이크웰, <어떻게 살 것인가>

연륜이 쌓인다고 지혜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늙은이에게는 젊은이보다 더 많은 허영심과 결점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늙으면 "어리석고 낡은 자존심에 빠지고, 따분한 수다나 떨고, 쉽게 발끈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하고, 미신에 사로잡히고, 터무니없이 재산에 대해서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방향이 틀렸다. 나이 먹음의 가치는 그러한 결점을 수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되면 젊은이들은 찾기 어려운 방법으로 자신의 결점을 찾을 기회가 생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쇠퇴의 흔적을 보면서 자신도 한계가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나이를 먹는다고 슬기로워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결국 일종의 지혜를 얻는다.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이렇게 결점을 지닌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리처드 왓슨, <퓨처 마인드>

간단한 문제를 풀려면 집단의 지혜에 의존하되, 고도로 독창적인 생각을 얻으려면 개인의 창의력에 의존해라.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대립과 갈등이 심화될 때,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의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이야말로 우리가 사랑과 공존의 지혜를 포기하도록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치'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도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비속해졌고, 갈수록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분명 사랑의 길은 엄청난 고행을 예약하는 길이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어떤 사람이 신중하고 참을성 있게 행동하고 시대와 상황이 그의 처신에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하면,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다시 변화하면, 그는 자신의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것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런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 만큼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 그러한 변화를 용납하지 않거나, 아니면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함으로써 항상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우리의 방법을 변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 신속하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지를 못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시대와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운명은 변화하지 않을 것입니다.

 

류관홍, <철학우화>

사람이 행복을 얻으려면 이성과 지혜를 통해 자연계의 질서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자연계의 규율에 따라 행동해야 해요. 이성과 지혜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생성됐다는 것을 말해주니까요.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이성과 지혜를 갖고 대처해야만 합니다.

 

왕가리 마타이,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지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관점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수직적 관점과 수평적 관점 사이에서, 큰 그림과 작은 그림 사이에서, 측정과 데이터에 기반을 둔 지식과 오랜 지혜와 경험에 기댄 지식 사이에서 말이다. 이 서로 다른 관점의 균형을 마음에 새기고, 이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영적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나무를 출발점 삼아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존 로빈슨, <인생혁명>

"우리의 GNP는 대기오염과 담배 광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앰뷸런스 등을 모두 포함한다. 문에 사용되는 특수자물쇠, 이 자물쇠를 부순 사람들을 가두는 감옥까지 모두 포함해 계산한다. 삼나무 숲 파괴와 자연의 경이로움 상실도 포함되어 있다. 네이팜탄과 핵무기, 도시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방탄차도 포함된다. 하지만 GNP에는 아이들의 건강, 교육 수준, 즐거운 놀이는 포함되지 않는다.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의미, 지적인 논쟁, 공무원들의 성실함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의 재치나 용기, 지혜나 학식, 동정심, 나라에 대한 헌신 등도 포함되지 않는다.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더해 산출하는 것이 GNP다." - 로버트 게네디

 

가와구치 요시카즈, <신비한 밭에 서서>

농사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따르는 일이다.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스스로 기쁘고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람 있게 살고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열정을 바치는 것입니다. 열정은 곧 창의력이고 지혜이며 기쁨이자 보람이고 희망입니다.

 

와타나메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자본주의가 세계에 퍼지면서 각 지역의 전통과 사고방식은 조금씩 퇴색했다. 돈만 내면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생활 속의 기술과 지혜는 사라진 것이다. 전통문화와 기술 속에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지혜와 사고방식이 적잖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데 도전하려 한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국민들이 무지하여 청명한 공기와 빛과 같이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고귀한 것들을 가치 없이 여기는 이 시대에, 그리고 평화와 신뢰와 사랑과 같이 그런 것이 없이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에 다른 물건의 소유와 활용 자체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시장에 매매 나온 금은 덩이나 진주 같은 것들과 교환하는 것이 남는 장사라고 여기는 이 시대에, 실로 참되기에 위대한 경제학만이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영속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또한 낭비와 영원한 허무의 제왕인 죽음을 섬기는 것이 절약과 영원한 충만함의 여왕인 지혜를 섬기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도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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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전체 180개나라 중 한국은 지난해보다 2단계 상승한 41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래도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랍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19’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22%로 38개국 가운데 당당히 꼴찌를 기록했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편향,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기반해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큰 꿈일까요? 

 

언론자유지수, https://rsf.org/en/ranking/2019

 

뉴스 신뢰도 - http://www.digitalnewsreport.org/

 

https://en.wikipedia.org/wiki/Press_Freedom_Index

https://reutersinstitute.politics.ox.ac.uk/sites/default/files/inline-files/DNR_2019_FINAL_27_08_20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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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을 넘어서 좋은 사회를 이루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까?

 

 

[본문에서 발췌]

 

'금융'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재무관리, 즉 자산가들의 포트폴리오를 확대하고 리스크와 세금 납부를 관리해 그들을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는 과학이자 실행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를 말하는 것일까? 좋은 사회란 지난 몇 세대에 걸쳐 철학자와 역사학자, 그리고 경제학자 등이 이상적인 사회를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해왔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이해하는 사회가 바로 좋은 사회라는 것이다.

 

금융은 '돈을 버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목표, 즉 사회의 목표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적인' 과학이다. 금융기관들이 사회의 목표와 이상에 더 부합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강해지고 부유해질 것이다...... 금융은 사람과 기업과 사회 기관들이 이러한 상상을 실현하고 목표를 구체화할 수 있도록 제도와 체계를 제공하는 것이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그 만족감은 점점 줄어들 뿐이다.

 

막대한 부가 한 개인에게 가져다주는 만족이란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일 뿐이지, 그 부를 소비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감사와 선망을 얻어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때가 온다. 그리고 스스로 부자가 된 사람이라면 본인의 성취에 대해서 이미 여러 종류의 칭찬을 일가친척이나 동료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 자체는 이러한 성취의 가장 마지막에 딸려오는 보너스에 불과할 것이다. 친지들과 동료들은 칭찬은 했지만 개인적인 자선과 기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는 처음에는 강한 흥분을 안겨주지만 기껏해야 고독한 기쁨이며, 명예나 우정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부에 집착할수록 결국 공허한 감정만 남게 된다. 본인이 부로 무엇을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그 부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인생에서 개인적인 기쁨은 대부분 그 노력하던 시기나 우정이나 관계를 맺을 때 생긴다. 성취의 정점에서 행복을 느끼진 않는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했을 때를 회상하는 동안 행복을 느낀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진실로 게으르거나 그보다 더 나쁜 일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에서는 강조한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의 충동은 권력욕이 아니라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다.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승인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구, 우리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이 욕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감정의 온당하고 적절한 대상을 제공하고, 승인과 존경이 자연스럽게 수여되는 그런 기준과 규칙에 따라 우리의 성격과 행동을 고치지 않는 한, 충분히 그리고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다. .... 우리는 칭찬뿐 아니라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얻는다.'

 

인간적 가치를 강화하기 위한 열쇠는 인간의 동기와 욕구의 다양성을 고려한 민주적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동기부여적인 거래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시스템, 우리의 공격성과 권력욕에 배출구를 제공해주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은 불가피한 인간의 충돌을 통제 가능하고 평화로우며 건설적인 경기장내로 한정시켜줄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59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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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열정적 사랑, 황혼기 되찾은 낭만적인 사랑.... 사랑이 있어 결혼을 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을 하고 사랑이 피어나는 경우도 있다. 쾌락적 사랑과 종교적 사랑, 가족애까지 같은 이름, 다른 시간, 다른 형태를 보일 때도 있지만 사랑은 둘 이상의 관계에서 감정적 경험과 느낌 속에 추억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에 본 뮤지컬드라마 "당신만이"이에서 느꼈던 생각이 겹쳐진다. '인생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 처음에는 사랑이었고, 정이었다가 의리였고, 마지막에는 단 하나뿐인 사랑으로 돌아온다'

 

 

 

[이하 본문 발췌]

 

그는 청년 시절의 열정에서 스스로 숙명적 인본주의라고 정의 내린 입장으로 옮겨 오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죽음이 주인이며, 죽을 시간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무런 걱정이나 고통 없이 죽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가슴의 기억은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과장하는 법이며, 이런 책략 덕택에 우리가 과거의 짐을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

 

언어란 무언가를 팔려고 할 때는 알아야만 하죠. 하지만 무언가를 살 때는 모든 사람이 당신을 이해해야 하는 법이에요.

 

공적인 생활의 과제는 두려움을 지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부부 생활의 과제는 지겨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여자들은 질문 그 자체보다 질문에 숨겨진 의미를 더 생각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때마다 꼭 잊어버리곤 했다.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

 

선장이 물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대답했다. "태어난 이래, 나는 진심으로 하지 않은 말이 단 한마디도 없소." 선장은 페르미나 다사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속눈썹에서 겨울의 서리가 처음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꺽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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