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놔두고 떠나는 여행, 생각과 삶을 자유롭게 한다.
 
 
[본문발췌]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능가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견고한 본질을 붙잡고 씨름한다.
 
 
모든 길의 끝에는 <승리의 여신>이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너는 항상 조급하게 굴다 끝내 용기를 잃고 돌아서 버리지. 대중은 <세이렌>을 보지 못해.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지. 눈멀고 귀먹은 채. 지상에 매인 자신들의 노를 젓느라 웅크리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보다 정선된 인간인 선장은 자기 내면 - 자신의 영혼 - 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와 더불어 장엄하게 삶을 탕진하지. 너는 인생에 다른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엾은 인간들은 세이렌의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아. 조심스럽고 겁 많은 그들은 평생 금화 다는 저울로 <예-아니오>를 저울질하다가 죽는 거야
 

인간의 가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몸부림에 있다.
 
 
우리의 기만, 우리의 위선, 우리의 비겁이 쓰디쓴 담즙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군주는 망설이다 그르치느니 주체할 수 없는 힘 때문에 그르치는 편이 낫다. 운명의 신은 여성이다. 따라서 그것을 정복하려면 과감하고 거칠게 대해야 한다.' - 마케아벨리
 
 
사상을 믿는 세 가지 부류

  1. 지난날의 미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편협하게, 광적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전투를 치른다.
  2. 지난날의 미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의 모든 단면에 매료되는 사람들. 따라서 그들은 삶의 최후의 얼굴 역시 덧없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오늘날의 사상이다-을 잘 알고 있다. 식견이 많고, 감각이 예민하고, 피로에 지친 그들은 손을 접고 앉아 세이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3. 지난날의 미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무서우리만치 강렬하고 짧은 한순간 옛 노래에 도취되었다가도 억지로 몸을 떼어 내어, 세이렌의 노래를 기억 속에 묶어 둔 채 계속 여행하는 사람들. 그들은 필연적으로 오늘날의 상대적인 진실들을 절박하게 표명하고, 잠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처럼 기쁨을 맛본 후 첫 번째 부류처럼 투쟁을 계속한다.

 
 
미래는 다음의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민족의 것이다. 오늘날의 유럽은 첫 번째 요소를 가졌다. 동양은 두 번째 요소를 지녔다.

  1. 현대의 기술
  2. 하나의 신념. 이것은 종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말해 구심점과 깊은 뿌리를 가진 양심을 뜻한다.

 
 
<정신>에는 유물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담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에도 관념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다시 말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굶주림, 즉 경제적 요인이 일차적 동기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분로, 증오, 사랑, 생식의 본능 등등)의 일차적 동기는 정념이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가축, 땅, 생업 수단, 자신의 몸과 두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해방시켜 줄 의무가 있지요.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고 계발함으로써입니다. 그것들을 해방시켜 주지 못하면 인간 자신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에게는 저 나름의 외연 - 땅, 전통, 사상 - 이 있고 그것이 해방을 원할 때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에게는 팔레스타인이 있지요.
 
 
바람처럼 떠돌던 무애인(無碍人)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의 원인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유의 최대의 걸림돌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핵심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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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만한 바보가 권력을 잡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현재 진행형이다.


[본문발췌]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이다.


'토론회에는 거만한 바보가 많았고,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바보는 나쁘지 않다. 대화할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거만한 바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직한 바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직하지 않은 바보는 골칫거리다! 나는 토론회에서 거만한 바보를 무더기로 만났고 아주 낭패했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 - <파인만!>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쉬었다. '난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렇게 인정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점검하는 습관을 익히면 되는 일이었다.


'거만한 바보'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다. 문명의 역사는 세속권력이나 종교권력을 거머쥔 '거만한 바보'들이 자연과 인간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낸 과학자를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얼룩졌다.


사람은 정말이지 서로 다르다. 같은 종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다. 한겨울에 길고양이한테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길고양이를 붙잡아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면서 아이한테 저분들 덕에 우리가 깨끗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겁을 준다. 돈이 많아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부자도 아니면서 돈자랑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만 어떤 이는 자신에게 이로운지 여부를 먼저 따진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만 관대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을 '전향'이라고 하자. 전향 그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노선을 바꾸었는지에 따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전향을 좋게 또는 나쁘게 평가할 뿐이다. 나는 전향 그 자체를 비난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한다. 옳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을 때가 있다. 게다가 '자유의지'라는 것이 정말 있지 의심한다. 그런 것을 들어 누구에겐가 감정적 호오好惡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어찌 강고하겠는가.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인문학보다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 전향이라는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오래되면 성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 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은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 근육, 관절, 시력, 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과 데이터 증가 효과가 하드웨어 퇴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상쇄하는 동안은 더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화로 인해 하드웨어가 심하게 나빠지면 소프트웨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를 상실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신규 데이터 유입은 줄어든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 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개인들이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 뭉치면 힘이 허용하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더 이기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탄소는 왜 생명의 중심이 되었을까? 과학자들이 찾은 답을 정치학 언어로 번역하면, 탄소는 '유능한 중도'여서 성공했다. 중도는 좌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가끔 치우치는 경우에도 슬쩍 편을 드는 정도에 그칠 뿐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열정이 있어도 몰입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녔지만 독선에 빠지지 않는다. 싸움을 먼저 걸지는 않아도 누가 싸움을 걸면 피하지 않는다. 무능한 중도는 극단에 휘둘리지만 유능한 중도는 좌우를 통합한다. 탄소는 유능한 중도의 대표 사례다. 사람으로 치면 성격이 온화하고 태도가 유연하다. 남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필요할 때는 원만한 관계를 맺는다. 남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무엇이든 되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 나간다. 


의학자는 암을 고치고 유전 결함을 바로잡으며 잘린 신경을 수리한다. 문제가 하나같이 복잡해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의학은 극적으로 진보한다. 세계의 수많은 연구 집ㅈ단이 정보를 공유한다. 신경생물학자, 미생물학자, 분자유전학자들은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한다. 의학자는 분자생물학과 세포생물학을 토대로 건강과 질병을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준까지 내려가서 연구한다. 유기체에서 분자까지 생물 조직의 모든 수준에 적용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사용한다. 의학은 통섭을 행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는 인종 갈등을 완화하는 방법, 개발도상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방법, 세계 무역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낙관적 전망이 부족하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념투쟁 때문에 중요한 발견도 빛이 바랜다.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는 서로 이해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과학을 통일하고 인도하는 지식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혼돈 상태를 창조적 효소라 착각하고 이론을 당파적인 사회운동과 개인적인 정치철학에 얽어맨다. 예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사회다윈주의처럼 극단적인 이론을 수용했고, 지금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 극단적 사회주의까지 온갖 이념을 인정한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 삼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까지 나왔으니 이념의 시장은 한없이 넓어졌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족 충성심에 쉽게 속박당하고 이론의 창시자에게 구속된다. 사회과학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이야기를 생물학과 심리학의 물리적 실재에 단 한번도 끼워 넣어 보지 않았고 심리학과 생물학의 발견을 무시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과대평가하고 인종주의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통괄적, 보편적 지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양한 학문이 넓고 깊게 발전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딜레마와 마주쳤다. 우리는 이제 세계를 전체로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목표를 영원히 상실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불완전한 지식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여러 사실과 이론을 종합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말하려는 개념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잠정적인 대답을 요약하면,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은 생물학의 사건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할 수 있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럴법한 이야기'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인문학의 전통적인 언어로 바꾸어 보자.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하찮은 수학은 유용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무용하다. '수학이 과학의 여왕이라면 가장 쓸모없는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연구의 무용성을 자랑삼는 수학자는 없다. 정수론으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한다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산술, 대수학, 유클리드 기하학, 미적분학과 대학의 공학, 물리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다. 일상의 일과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을 주는 수학,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쓰는 수학도 그렇다. 현대 기하학과 대수학, 정수론, 집합론, 함수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진정한 수학이다.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쓸모가 없다. 인류의 물질적 평안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 유용성을 기준으로 보면 진정한 수학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이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찮은 수학이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는 것과 달리 진정한 수학은 인간의 일상에서 떨어져 있다. 정수론이나 상대성이론이 전쟁 목적에 쓰인 경우는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수학자의 삶을 정당하게 여길 수 있다. - G. H. 하디, <어느 수학자의 변명>


수학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논리와 공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 난공불락의 진리를 찾아낸다. 수학적 증명은 영원불멸이다.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평면에 그려진 모든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한다. 수학자는 산을 오르거나 사막을 헤매거나 지하 동굴을 탐험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만으로 영원불멸의 진리를 선포한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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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확신은 제한을 수반한다. 불확실성은 다양하고 더 많은 선택과 가능성을 제공한다.
 
 
[본문발췌]
 
올슨 교수는 경제(적) 번영의 필요조건으로 두 요소를 지적한다. 하나는 안전하고 잘 정의된 사유재산제(권)를 확립하고 계약을 무사공평하게 집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탈의 부재, 즉 지배권력이 약탈하지 않거나 작게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사회든 지배세력이 이 두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면 그 나라의 경제는 번영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 어떤 유형의 정부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잘 나타내는 하나의 문구를 올슨 교수가 고안해 냈다. 그것은 시장 확장적 정부(market augmenting goverment) 이다. 시장 확장적 정부는 사유재산권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그리고 계약이행을 보증할 만큼 강력하나 자체의 활동으로 이들 권리를 빼앗지 않도록 제약되는 정부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믿을만하게 그리고 최대의 경제적 효과를 가지면서 충족되는 경우는, 좁고 작은 이해관계자들의 경우보다는 넓고 큰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갖도록 제도화된 권리 존중형(rights-respecting) 민주정치체제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지배권력의 논리는 이해관계가 너무 협소하여 사회의 이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집단을 위한 권력의 논리가 그 하나이고, 그리고 아주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가진 그래서 전적으로 자애롭게 행동하는 집단을 위한 권력의 논리가 다른 하나이다.
 
 
로렌제티의 나쁜 정부 그림을 살펴보면 폭정의 형상으로 그려진 나쁜 정부는 무너지는 성벽 앞에서 잔인함, 반역, 사기, 격노, 분열, 전쟁, 탐욕, 교만, 허영 등의 온갖 죄악에 대해 법정재판을 열고 있다. 중세 궁중예술에 나타나는 온갖 표정을 짓고 의상을 입은 인물들은 말할 수 없는 약탈, 전쟁, 범죄, 정의의 파괴 등으로 묘사된 장면을 표상하고 있다. 왼쪽의 나쁜 정부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벽 오른쪽의 공동선(Common Good)을 상징하는 인물은 지혜, 평화, 정의, 신의, 자선, 관대, 합치 등으로 상징되는 좋은 정보의 효과를 통할하고 있다.
 
 
"최고의 이론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특정지역을 확실히 관장하고 그곳에서 절취를 독점할 정도로 힘이 강하다면 도적의 두목은 해당지역 내에서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넓고 큰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그는 절취율을 제한하여 정규화하려 할 것이며 자신이 관장하는 자원을 공공재의 공급에 사용할 것이다. 이때 공공재는 그 자신 못지않게 그가 절취한 피해자에게도 혜택을 준다.
정주도적의 피해자들은 도적 두목의 입장에서 세금납부의 원천이기에 그 두목은 주민을 살해하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을 금지할 것이다. 관할주민이 훔치면 총소득이 감소할 것이므로 도적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훔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관장하에 있는 자원을 주민들 사이에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쓰고, 그리고 다른 공공재를 공급하기 위해 씀으로써 도적의 두목은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특정지역을 통제하고 관장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도적의 두목은 정착하여 왕관을 쓰고 공공재를 공급하는 전제군주, 독재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폭력을 가장 크게 조직화할 수 있는 사람들의 합리적 사익추구로 인해 큰 집단들의 경우 정부가 생성되게 된다. 이런 폭력적 기업가들은 당연히 스스로를 도적이라 부르지 않는 반면 오히려 반대로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고상한 직책을 부여한다. 가끔씩 그들은 신권(divine right)에 의한 지배라고까지 주장한다.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서만 기록되기 때문에 지배왕조의 기원은 통상 사적 이익으로 설명되기보다는 고차원적 동기로 설명되었다. 모든 형태의 전제정부는 시민들이 자신을 다스려 주길 원하기 때문에 다스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정부가 자발적 선택의 결과로 탄생되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조장하기에 이르고 있다.
도적떼가 정착할 수 있고 지역을 확실히 관장할  수 있을 때 그 도적떼의 유인체계가 변화함을 일단 이해하면 도적떼가 군벌의 시민들로부터 해마다 절취세를 징수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정주형 도적떼를 간헐적으로 나타나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유량형 도적떼보다 더 선호한다. 유량형 도적질은 무정부 상태를 의미하고 무정부 상태가 정부에 의해 대체되면 생산물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정주형 도적의 시민들은 세금으로 가져가지 않은 소득의 증가분을 갖게 된다. 논리의 전개과정으로 보나 과거 역사의 정보와 최근의 관찰에 따르나 정주형 도적의 계속적 절취가 무정부보다 훨씬 낫다. 매우 이기적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전제군주들의 경우에서조차 약탈적 국가의 친숙한 비유도 부절적한 것으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주형 도적은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서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지역 내에 질서를 확립하고 여타 공공재를 제공한다. 정주형 도적은 사슴을 잡아 먹는 여우가 아니고 가축을 보호하고 물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장 주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자신의 절취세율은 극대화하면서 공공재를 제공하고자 하는 정주형 도적의 유인체계를 감안하지 않는 한 전제국가에의 비유 또는 전제국가 모형도 정확할 수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전제군주든 민주주의 다수파든 지배계급에게는 국민소득이 자신들이 받는 소득 몫의 역수만큼 하락할 경우에는 소득을 자신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더 낫다. 만약 세수극대화 세율이 2분의 1이라면 세금 1달러의 징수 때문에 소득이 2달러 감소하면 전제군주는 세금인상을 멈출 것이다. 시장에서 창출된 국민소득의 5분의 3을 얻고 5분의 1의 소득을 자신들에게 이전하기를 원하는 다수집단은 재분배하고자 하는 1달러부터 4분의 5, 즉 1.25달러 상당의 국민소득을 필연적으로 감축시킨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크면 클수록, 즉 모든 원천으로부터 얻는 국민소득에서 자신이 받는 몫이 크면 클수록 자신에게로의 재분배에 따른 사회적 손실은 더 작아진다. 
 
동일한 역수법칙에 의해 지배집단이 공공재에 얼마만큼 지출하는지가 결정된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공공재에 지출한 마지막 1달러가 국민소득을 세율의 역수만큼 증대시키는 수준에서 공공재에 대해 지출할 때 이득이 된다. 물론 전제군주의 세율이 그가 얻은 혜택의 몫을 결정한다. 시장에서 소득을 창출하는 지배계급이 향유하는 공공재 편익의 몫은 당연히 더 커진다. 그 몫은 사회의 소득 중 자신에게 재분배하는 부분과 시장소득 중 자신이 받는 비율의 합이다. 시장에서 소득을 버는 재분배 지배계급은 마지막 1달러 지출이 국민 소득을 자신들이 받는 국민소득 몫의 역수만큼 증대시킬 때까지 계속 공공재에 지출할 것이다. 다수파가 시장소득의 5분의 3을 얻으며 사회소득의 5분의 1을 자신들에게 재분배하는 앞 문단의 가상적 사례에서 공공재 지출로 국민소득이 4분의 5만큼 증대하는 한 공공재에 대한 지출로 이득이 된다. 보다 광범위한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이 자신에게 더 적게 재분배함에 따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재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한다.
 
지배적 이해계층이 자신에게 재분배함으로써 얻는 이득을 어디에서 멈추느냐, 그리고 얼마만큼의 자원을 공공재에 지출하는 것이 득이 되는가 하는 두 가지 결정 모두에 똑같은 역수법칙이 적용됨을 주목하라. 전제군주든 민주주의든 체제에 관계없이 이 역수법칙이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소득창출력의 보다 큰 몫을 대변하는 지배집단은 보다 작은 몫을 대변하는 집단보다 자신들에게 소득을 보다 적게 재분배하려 하고 더 많은 공공재를 제공하려 할 것이다. 이는 보다 큰 몫을 대변하는 지배집단이 작은 몫을 대변하는 집단에 비해 사회에 보다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이나 스위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견제와 균형을 위해 주요 정책의 변경에 단순 다수결보다 더 많은 동의를 필요로 한다면 지배하는 압도적 다수는 사회 소득창출력의 적은 몫을 대변하는 일반적 다수보다 더 적게 소득재분배를 시도하고 더 많이 공공재를 공급할 것이다.
 
 
현실에서 일부 이익집단들이 장기적 결과에 관심이 없을 때도 있다. 매우 좁고 작은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의 경우 그 집단이 장기에 관심을 갖느냐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즉, 좁고 작은 이해관계의 집단은 장기를 생각하든 단기를 생각하든 사회 전체의 이익을 거의 고려하지 않거나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넓고 큰 이해관계의 집단의 경우 단기적 고려냐 장기적 고려냐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이해관계의 좁고 넓음에 연속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상에서도 연속성이 있다. 권력을 가진 집단의 계획시계가 매우 짧아지면 사회 전체의 이익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 결과는 이해관계가 얼마나 크느냐 넓으냐에 관계없다.
 
 
현 정부에 대한 반대자들이 법의 지배하에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계약권과 재산권을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계속될 수 없다. 집권세력의 반대자들조차 이러한 권리들을 갖는다면 일반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권리들을 갖게 될 것이다. 법제도, 독립적 사법부 그리고 법과 개인적 권리에 대한 존중은 바로 영구적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데, 이들 조건들이 계약권과 재산권을 보장한다. 재산과 계약과 관련하여 개개인의 권리가 확실하게 오랜 세대를 거쳐 계속 존속되는 것이 보장되는 사회만이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이다. 전제구주정의 경우 군주의 시계가 매우 짧으며 질서 있는 법적 권력승계가 없는 경우 현 군주가 사라질 때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불확실성이 크게 야기된다. 
 
 
무엇인가(something)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경쟁할 때는 무엇인가가 다소 부족한 경우에도 승리하기 마련이다.
 
 
코즈는 협상에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는 사실 또는 협상이 이런저런 이유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협상비용이 엄청 높지 않는 한 외부효과가 내부화될 것이다. 거래비용 또는 협상비용이 없다면 모든 외부효과는 파레토 효율적으로 해결될 것인데, 이는 합리적 당사자들이 통합된 이득이 극대화될 때까지 협상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책상 위에 돈을 남겨 둘 리가 없다. 만약 최종결과가 파레토 효율적이 아니면 집어갈 돈이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거래비용 또는 협상비용이 없으면 파레토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때까지 당사자간에 협상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외부효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자유방임이 파레토 효율성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피구적(Pigouvian) 논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문제가 통상 이런 식으로 서술되지는 않지만 코즈가 한 것은 본질적으로 상호이득 교환의 논리와 거래비용이 거래에 제한을 가한다는 생각을 기존의 시장실패 이론에 적용하고 그 이론에 결함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좋지 않은 나쁜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며 심지어 합리적인 사람들에게도 발생한다. 또한 정부와 정치가 분명히 일부 어처구니없는 비효율적 결과를 야기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아마도 전쟁이야말로 결과가 파레토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간단명료한 증거이다. 두 나라가 매우 희생이 큰 전쟁을 치를 때 서로 전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득을 얻고 그 이득을 공유하여 두 나라 모두 더 나은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같은 대단한 결과를 포함한 합의, 그리고 전쟁을 하지 않아 얻는 이득을 나누는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지킴으로써 두 나라는 더 좋은 상태에 다다른다.
대안이론이 설명해내지 못하는 나쁜 결과의 다른 명백한 한 사례는 왜 일부 나라들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가난하느냐, 즉 잠재소득의 아주 작은 몫만큼밖에 이들 나라들이 벌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부자나라들의 1인당 소득은 가장 가난한 나라의 1인당 소득의 20배 이상이다. 모든 나라들이 최신의 기술에 접근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자본시장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수 있다. 저자는 다른 논문에서 나라간 1인당 소득의 엄청난 격차를 토지나 자연자원의 차이로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각국 국민의 생산기술의 차이로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많은 나라들이 잘못 통치된다는 사실을 참작하지 않으면서 그들 나라가 극빈에 처한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분명히 잘못된 통치, 그리고 나라간 1인당 소득의 엄청난 격차가 나라간 거래비용의 격차로 그럴듯하게 설명될 수가 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부자나라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래에서 승강이를 하고 거래를 타결할 수 있다. 가장 발전된 기술을 기계에 체화시킨 기업들이 그들의 제품을 전 세계에 팔려고 안달하고, 그리고 자금관리자들이 최고의 수익률을 얻기 위해 지구 끝까지 자신들의 자본을 운용하는데, 도대체 왜 현대 기계장치를 두고 상호이득을 주는 거래가 엄청난 나라간 1인당 소득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는가? 빈곤국 사람들은 더 생산적으로 만들 기술과 자본이 쉽게 도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거래비용이 그렇게도 높아 지구상 사람들의 대다수를 빈곤에 빠뜨리고 있단 말인가?
 
 
공공재에 관한 정보에서 개인이 얻는 혜택은 그 정보를 얻기 위해 비용을 투입하는 개인에게 집중되기보다는 통상적으로 집단 전체 또는 나라 전체에 분산된다는 사실에서 많은 현상들이 설명된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뉴스가치가 있느냐 하는 기준에서 개가 사람을 문 경우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경우이다. 만약 공공정책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TV를 시청하거나 신문을 읽는다면 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비정상적 사건들은 무시되고 경제정책의 복잡한 부분과 공공문제의 계량적 분석 등이 강조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스가 크게 보아 거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분전환 또는 오락의 대안이 되는 경우에는 흥미로운 괴짜와 인간드라마 같은 것이 인기를 끈다. 마찬가지로 마음 졸이며 전개되는 사건들 또는 공인들간의 성추문 등을 언론매체가 놓치지 않고 잡는다. 국민이 내는 세금에 합당한 일을 하지 못하는 관리들도 그냥 잘 지내기도 하는데, 간단하나 눈에 띄게 뉴스거리가 되는 조그만 잘못으로 무너진다. 공공질서를 심하게 파괴하는지도 모르는 시위자들이 흥미로운 기사를 만들어 내고 달리 무시될 수 있는 주장을 주목하게 만든다. 선거인들의 합리적 무지, 따라서 대다수의 합리적 무지는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알아보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약탈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정책이 대다수 사람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허황된 주장에 설득당할 수 있다. 특수이익집단이 접하는 유인체제를 고려하면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좁고 작은 이해관계가 넓고 큰 이해관계를 대체한다. 정주형 도적은 자신에게 잡힌 사람들의 노력을 끌어내기에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데, 그는 사회 전체의 생산성 향상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사회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모하는 모임, 로비집단, 동업조합, 지역협회 등은 각자 사회 산출물의 아주 적은 부분을 얻기 때문에 각기 매우 협소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가격의 자의적 책정은 줄서기, 기다림, 재교환 등의 형식으로 추가적 손실을 초래한다. 이 손실들은 왜 자의적 가격책정이 바람직하지 않은지의 또 다른 이유이다. 만약 공식적으로 정한 가격이 너무 낮으면 대기선에서 기다리는 시간낭비가 발생한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필요가 있는 구매자들이 대기선의 맨 앞에 설 것이고 재구매하는 사람은 대기선에 선 사람들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구매할 것이다. 재화를 가장 싸게 생산하는 사람은 낮은 가격에 재화를 생산판매하려는 사람이다. 재화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면 그 상품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구입할 것이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공급자는 그 과도한 가격에 판매될 수 있는 최대의 수량을 공급하려 한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가격이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그 가격에서 시장은 거래량을 감소시킨 만큼 거래로부터의 이득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불확실성은 온 세상에 가득 차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동적이고 번창하는 사회는 수많은 다른 일들을 시도하는 사회이고 신용과 모험자본에 상대적으로 잘 접근하는 수없이 많은 기업가들을 가진 사회이다. 사회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다양한 기업가들을 보유하고 다양한 종류의 상호이득이 되는 거래를 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매우 다양한 선택을 그것도 한 개인이나 한 기관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잘 정의되고 안정적인 개인적 권리가 잘 보장될 때 자원을 낭비하는 활동으로부터 부를 증대시키는 활동으로 이전시키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만약 사회가 사회보험이나 또는 불운한 개인들을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을 가지고 있으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 개인적 권리가 부여된 사회에서는 기대 이상의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이나 자산에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예외적 이윤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복권당첨자가 복권상금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대 밖의 이윤을 창출하는 자산의 소유자는 권리에 기초한 민주체제하에서는 예외적 이윤에 대해 권리를 갖는데, 이는 그 이윤이 단순히 행운에 따른 것이라도 상관없다. 이러한 불균형한 이윤에 대한 권리 때문에 자원이 사회의 순산출물을 감소시키는 산업이나 기업에로 이전되는 것이 방지된다. 계약이행에 대한 권리 때문에 사회의 순산출물을 감소시키는 기업이 문을 닫게 되는 확률이 증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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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교류 양과 속도,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내 집단 편향(ingroup bias)에 갇혀 편견과 고정관념이 확대되고 생각의 정체(停滯) 된 사람들이 양극화와 혐오 사회를 조장한다.
 
 
[본문발췌]
 
수치심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 사바나를 무리 지어 돌아다닐 때부터 역할을 해왔다. 진화 심리학에 따르면 수치심은 고통과 아주 유사하게 우리가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고통은 불과 날카로운 칼날을 조심해서 쓰고 성난 말벌이 보이면 달아나라는 가르침으로 우리 몸을 보호해준다. 수치심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수치심은 하나의 집단이 불어넣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신에 집단의 규율과 금기가 새겨진다. 그 목표는 개인의 생존이 아닌 사회의 생존이다. 이런 점에서 수치심은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내포한다.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면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 습관, 도덕 등 관련 규범에서 파생하는 감정이다. 내가 기준에 못 미친다고 자각할 때, 또는 같은 반 친구나 동료, 슈퍼볼 광고가 기준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 수치심이 우리를 덮친다. 어떤 때는 그저 기분이 나쁜 정도겠지만 수치심으로 깊은 상처를 받으면 자아가 공허해진다. 인간 존엄성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며, 내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수치심이 날리는 잔인한 펀치다.
 
 
수치심은 의지를 꺽고, 침묵시키며, 명료한 사고를 막아 편향성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수치심에 사로집히면 피해자는 체념하고 굴복한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는 늘 굶주려 있는 수치심 머신을 거쳐 끝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수치심 산업에서 변함없는 한 가지는 선택이라는 개념이다. 약물 중독부터 빈곤 문제까지, 이들은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실패를 초래했다고 전제한다. 즉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똑똑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본다. 잘못은 그들이 했으니, 자책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겨도, 또 문제를 해결하고 정해진 구원의 길을 따라갈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강력한 수치심 머신이 새로 등장했다. 페이스북과 구글을 비롯한 여러 기술기업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는 최적의 값을 꾸준히 찾고 있다. 이는 트래픽과 광고효과를 높여 엄청난 이윤을 낳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기업 가치를 자랑하는 이들은 그 부산물로 서로 헐뜯고 조롱하는 해로운 흐름을 낳았다. 기업들의 알고리즘은 상대를 혐오하고 악마화할 수록 보상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캔슬 문화cancel culture(유명인이 논란 발언이나 행동을 했을 때, SNS 팔로우를 끊고 배척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잃게 하는 행위)를 부추긴다. 이런 온라인에서의 삶은 현실 인식에 혼란을 주고 대중을 교란한다.
 
 
수치심의 감정 여정 : 상처 > 부정 > 수용 > 초월
 
 
수치심이 인간사에서 억압과 이윤, 통제의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가난이라는 수치심을 없애려면 사회는 빈곤층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
 
 
거대한 수치심 머신은 비만, 약물 중독, 가난, 허약함을 이용하기 위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힘과 시장 지분을 얻는다. 일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을 돈벌이로 삼거나 일회용품으로 취급하면서 보통 두 가지 전술을 결합해 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릇된 전제를 복음처럼 받아들여 이 현상에 가담한다. 패배자는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자기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하고, 그렇게 충분히 후회해야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고 본다. 수치심은 강력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적이다. 강력한 수치심 산업에 맞서야 할 때다. 이들은 현재의 역기능을 영속화하고 이로부터 이윤을 얻지만 해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비만율이 치솟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가 도시와 시골에서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엄청난 수이 흑인 청년들이 교도소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금박 시대Gilded Age(남북전쟁 이후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미국이 누린 대호황기) 이후로 불평등이 극에 달했다. 수치심은 각각의 사회적 실패에 작용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각종 사회 문제를 겪을 때, 다음과 같이 안이한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런 끔찍한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들 잘못이다.' 이렇게 수치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존엄성 침해를 자각하려고 애쓰는 것이 수치심 머신을 해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런 끝없는 말싸움 덕분에 소셜 미디어 기업은 트래픽을 끌어올리고 광고 수입을 넉넉히 챙길 뿐 아니라 값진 정보를 얻는다. 내가 동의하는 게시물을 공유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낼 때,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 정보를 토대로 기업은 이용자를 더욱 정교하게 세분화할 수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고 수익성이 있는 맞춤형 광고가 가능해진다. 그 결과 지난 10년 사이에 페이스북과 구글 등 회사는 주가가 급등하면서 자산가치가 수조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라섰다. 디지털 거물 기업이 갈등에서 얻는 횡재는 그저 운 좋게 얻은 게 아니다. 이들은 돈이 되는 논쟁을 부채질하도록 자사 플랫폼을 설계한다. 또 이용자의 견해를 극단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그렇게 해야 논쟁이 과열되어 이용자가 쉽게 이탈하지 않는다.
 
 
디지털 거물 기업들이 여론을 작고 고립된 집단으로 쪼개는 일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존중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온라인이든 사교모임이든 새로운 동질 집단은 그 집단을 넘어 시야를 확장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다. 동질 집단은 나의 정보 채널을 장악하고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는 어리석게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과 공유한 가치가 보편적이라고 믿어버린다.
 
 
수치심 네트워크는 우리를 부지런히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때마다 잠깐씩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옹졸한 권력감이나 분노, 복수심 같은 감정에 중독된다. 우리는 나한테 관심을 주는 듯한 소규모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과도한 감정에 몰입하지만, 그 감정을 기계적으로 자극하는 허술한 시스템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 시스템은 바로 영속적으로 굴러가는 수치심 머신이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수치심 네트워크에서 벗어나게끔 다른 선택지와 다양한 경로를 탐색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며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가 그 공간에서 빠져나올  때 사랑과 용서로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 지도자들이 선포한 다양한 '전쟁'들을 떠올려보자. 빈곤과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비만과의 전쟁 등이 있었다. 단호한 지도력과 지성, 충분한 자금만 있으면 이러한 사회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팡파르를 요란하게 울리며 각각의 전쟁을 시작했다. 사람도 달에 보내는 세상이니, 이런 사회 문제는 당연히 해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비용도 꽤 든다는 게 분명해지자, 우리의 태도가 달라졌다. 피해자를 위해 시작한 전쟁이 피해자들을 겨냥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원대한 야망은 증발했고, 그 자리를 각종 재활시설과 약을 파는 업체, 처벌을 앞세우는 관료주의, 교도소가 대신했다. 어중간한 정책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또는 이런 난제를 고민하는 일이 지겨울 때, 우리는 비난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사회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뚱뚱하고 마약에 중독되고 가난한 자들은 사회의 해결책에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러니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
도와주는 것보다 비난하는 게 훨씬 쉬운 법이다. 약자를 공격하는 담론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은 광범위한 생태계를 부추긴다. 피해자가 자책하고 그들의 노력이 실패할수록 사업가들은 부유해진다. 업체를 다시 찾는 고객은 황금알이다. 고객 각자가 겪는 처참한 실패는 수치심을 불어넣는 현실을 정당화한다. 이런 담론을 CEO든 정치인이든 쉽게 받아들이는데, 그 논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 비용도 절감되고, 더 나아가 시장에 훌륭한 돈벌이 수단도 제공한다. 한마디로 수치심은 유망한 사업이다.
 
 
불평등은 승자에게 상을 주고 패자에게 벌을 주며 끊임없이 서열화하는 사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분노하지 말자. 무의식적으로 약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차고 넘친다. 분노는 중독성이 있다. 교도소 개혁에 힘쓰거나 유권자 억압에 저항하고 싶다면 뛰어들라. 그러나 종종 우리는 분노로써 행동을 대신하는데, 분노하면 속이 후련해지고 돈도 안 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모욕 행위를 부추길 뿐이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 화를 내는 건 아닌지 돌이켜보자.
 
 
공감은 꼭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회의 병폐를 바로 잡지 못한다. 대신 나름의 정당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되도록 다른 사람의 말을 믿으려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오해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보통 실수를 저질렀을 때 당사자만큼 속상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실수한 사람에게 내가 이를 망쳤을 때 받고 싶은 위로를 해주고,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주도록 하자. 
 
 
용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수치심의 이면이다. 수치심이 상처를 찢어놓는다면, 용서는 상처를 봉합하는 힘이 있다. 넬슨 만델라는 "용서가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용서가 두려움을 없앤다. 따라서 용서는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공감과 마찬가지로 용서는 힘든 일이며 일관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오늘날 수치심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가 모두 실수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동에 책임을 지고 속죄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잘못 때문에 영원히 수치심의 늪에 갇혀야 하는가에 대해선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없애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는 저녁 식사 자리부터 복지사무소, 기업 이사회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영역이든 개인적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고 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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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색인가요? 나는 총천연색을 띄고,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
 
 
[본문발췌]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사고란 수염 같은 것이다. 성장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 볼테르


자신의 머리로 사고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학문적인 장에서 논하는 것은 원래 이론적 정의가 필요하죠. 이건 정말 귀찮은 이야기예요. 창의력이란 사려 깊은 모방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실주의자 볼테르가 한 말이에요.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 또한 알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런 건 어차피 자네가 말했듯이 가설의 위태로운 연장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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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본문발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이유理由를 아는 것은 이치理致를 아는 것이라 할만하다. 존재하는 것을 물物이라 하면, 존재의 이유는 사물의 이치이고, 우리는 이것을 물리物理라 부른다. 
 
과거의 학자나 지식인은 세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하늘은 우주와 법칙, 바람은 시간과 공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다가온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원자들은 서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어야 할 곳과 움직임 그리고 가야 할 곳에 대한 생각으로 섬세한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종교 회의를 개최하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방법으로 뒤섞이고 뒤범벅이 되는 끝없이 계속되는 그런 일에 의해서 서로 부딪히고 몰려다니면서 모든 가능한 움직임과 조합이 이루어진다. 결국 원자들은 이 우주가 만들어지는 데에 필요한 그런 배열을 갖추게 된다.'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나'라는 원자들의 '집합'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나를 이루던 원자들은 다른 '집합'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주의 일부가 되어 영원불멸한다.
 
 
'물질을 정복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고귀하고 경건한 한 편의 시이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원자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과 일상을 설명하는 뉴턴 역학의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 원자들의 집단이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 일상의 물체처럼 행동하는지, 정말 크기가 중요한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이것은 '측정 문제'라는 양자역학 역사의 지긋지긋한 논쟁과 관련 있다. 
 
돌멩이의 낙하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으로 계산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돌멩이가 언제 떨어질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원자를 설명하려면 양자역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동을 원자로부터 이해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세포, 세포에서 인간으로 층위가 바뀔 때마다 이전 층위에서 없던 새로운 성질이 창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층위에 따라 다른 법칙을 적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많은 것은 다르다. More is different.
 
 
'나는 진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었다. 흙이 말한다. 왜 당신은 나를 건드리는가? 그대와 나는 둘 다 같은데. 비록 일부가 가라앉고 일부는 떠올라도 우리는 모두 단지 흙일 뿐이다.' - 오마르 하이얌.
우리는 죽으면 흙으로, 즉 지구로 돌아간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이렇게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것일수록 보다 더 작은 것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자들이 지배한다. 지구상 생물은 포도당 분자를 산화시켜 이산화탄소와 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는 탄소, 산소, 수소 원자가 배열을 바꾸는 사건이다. 이때 원자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원자핵 내부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
 
 
우주는 시공간상에서 물질이 운동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연극이다. 물질의 운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지구상 모든 물질이 운동하는 원인, 즉 에너지의 근원을 추적하면 태양에 다다른다. 태양은 원자핵의 융합에서 나오는 열로 불타오른다. 이렇게 우리는 별과 연결되고, 별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자핵과 연결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핵은 변하지 않는 물질의 토대가 되지만, 별의 원자핵은 쪼개지고 합쳐지며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어떤 원자핵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는 또 다른 원자핵으로 만들어진 물질들의 움직임을 추동한다. 이렇게 우주는 원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다.
 
 
같은 원자들이 모여 배열하는 방식에 다라 세상의 온갖 다양한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많은 이가 동의하는 생명의 속성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며 번식을 통해 '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와 복제, 이 둘의 결합이 생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잠시 생명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은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생명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닐까? 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며 생명은 더없이 경이롭고 삶은 더욱 소중하다. 이 기적 같은 찰나의 시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낭비하거나 남을 미워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이며, 진화란 이러한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cessity)
 
 
생명의 핵심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복제, 번식, 진화도 일단 생존해야 할 수 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에서 자신을 보존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구상의 동물은 호흡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걷고 숨 쉬고 생각하고 번식한다. 한때 이 에너지를 신비한 생명의 기운 같은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호흡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은 연쇄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 우리는 화학 반응이 이렇게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생명에 쓰이는 원자는 무생물에 쓰이는 원자와 동일하다. 생명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생물은 정교한 생화학 기계다. 이 기계는 수많은 원자로 되어 있고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 수많은 원자가 관여하는 이상 실수는 반드시 일어난다. 예측 불가의 불확실성은 원자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에 내재된 본질적 특징이다. 제법 큰 규모의 원자 기계에서는 열역학적 요동이 실수의 이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류가 누적되고 고장이 잦아지다가 생화학 기계는 결국 작동을 멈춘다. 우리는 이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생물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DNA, RNA, 단백질 모두 원자로 되어 있고, 이들 사이의 화학 반응은 양자역학에 따라 작동한다. 화학 반응을 지시하는 존재는 따로 없다. 충분히 많은 분자가 빠른 속도를 갖고 무작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원자 수준에서 이것을 위한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는듯하다 하지만 수많은 원자들이 모여 생명의 몸체를 이루는 순간, 외부 변화에 저항하며 자신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신의 복제품을 만드는 '것'이 탄생한다. 
 
 
생명은 자신을 복제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DNA에 저장하고 이것을 복제한다. 복제의 전 과정은 물리적이다. DNA로부터 자신을 만드는 과정 또한 물리적이다. 과정에 참여하는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열운동을 할 뿐이다. 모든 과정은 양자역학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생명이 왜 자신을 복제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복제하려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이런 원자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만들어진 원자 구조물이 복제의 특성을 얻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끝없이 복제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학은 우주에 의도나 목적이 없다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생명은 우연히 생겨난 자기 복제 기계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지구 밖에서 다른 생명체를 발견하는 날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외계 생명체의 화학 체계가 지구의 생명과 유사하다면 생명의 보편 원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세계관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다. 생명의 힘은 애초에 단 하나의 생물에 불어넣어졌을 것이다. 지구가 단순하고 변하지 않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질학적 순환을 하는 동안, 생명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체들이 무수히 진화했고 또 진화해가고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사랑은 하나의 점이다. 선이나 면처럼 이어져 존재하지 않고, 찰나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사랑은 휘발되고 없다. ... 사랑의 시작을 여는 필수조건에는 '실수'가 있다. 그 실수를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말하고, '필연'이라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실수일 뿐이다. .. 실수의 첫 발이 사랑을 점화시킨다. 그 실수는 이후, 가장 특별한 것, 가장 현명한 것, 가장 필연적인 것으로 미화된다. 미화하는 힘 자체가 사랑의 힘인 셈이다.' - 김소연, <마음사전>
 
 
'인생의 목표가 행복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이야.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중요하고 사소한 약속들을 지켰다는 증거였다.' -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무한은 숫자가 아니라 과정이다. 끝없이 커져가는 과정이다. 점은 무한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따라서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이 점이라면 사랑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어떤 사건이 한 사건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간이 가진 특별함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생각, 형태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무형의 상상에 있다. 바로 인간의 문화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인간만의 문화를 만들었고, 문화를 통해 지구 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포유동물이 되었다. 인간다움은 문화에 있지만 문화의 이름으로 강요된 악습과 억압은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제 문화의 산물인 과학이라는 방법론은 인간이 상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인과적 설명을 끌어들이는 건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무언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생각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미 일어난 진화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인과적 설명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주체가 인간이다 보니 진화사를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이 진화의 목표였다는 설명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언어를 이용할 수 있어 인간의 사회는 다른 동물의 사회보다 더 강력하고 정교한 소통이 가능하다. 인간은 더 깊은 공감, 더 강한 협력을 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읽기에도 능하다. 나아가 가상의 스토리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는 허구를 믿는 능력과 관련 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지폐'는 색칠한 종이 쪼가리다. 하지만 지폐가 가진 허구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 경제는 즉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도덕과 윤리도 그것이 왜 옳은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지 않는 순간,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세상은 기본 입자에서 원자, 분자, 생물, 지구, 태양, 우주로 이어지는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다. 각 층위는 자기만의 창발된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의 층위를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 층위의 특성으로 쉽게 환원할 수 없다. 각 층위의 개별 특성을 알고, 이웃한 층위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고, 전체를 조망할 때에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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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보라, 분홍, 빨강, 핑크...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
 
 
[본문발췌]
 
 
철쭉은 자신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절제'라는 꽃말을 갖게 되었다.
'지식과 절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무엇이 나쁜지 알고 그것을 피하는 사람은 배움과 절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 <사상의 보고: 고대부터 현대 작가들의 인용구 백과사전> (1884)
 
 
멀리서 반짝이는 너는
예쁜 별과 같지.
네 머리 위 하늘의
많은 별들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하지만 반짝이는 투구 장식을 단 별처럼
가만히 쉬면서도 침착하게 균형을 잡는다.
너를 책망하는 누군가 있다면
그의 보금자리에 평화가 오지 않기를!
- 윌리엄 워즈워스, <데이지에게> (1837)
 
 
하늘의 무한한 초원에서 하나씩 하나씩 소리도 없이,
사랑스러운 별들, 천사들의 물망초들이 꽃을 피운다.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반젤린: 아카디 이야기> (1847)
 
 
'행복은 물건이 아니라 취향에 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걸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해진다.' - 프랑수아 드 로슈푸코, <잠언집> (1665)
 
 
그것은 허리 굽혀 예쁜 종처럼 꽃을 피운 히아신스다. 세포에서 나는 진한 향기로 꽃이 늘어졌고, 향기롭게 축 처진 그림자 가운데 기억 그 자체가 그림자가 되어 드리운다. - 레티티아 엘리자베스 랜던, <사랑스러운 꽃들>(1837) 중 '히아신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고
기억과 욕망을 한데 섞고
윤기 없는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일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어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죠."
-- 하지만 밤늦게 히아신스 정원에서
꽃을 한 아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다는 향량하고 쓸쓸하다(Oed' und leer das Meer).
- T. S. 엘리엇 <황무지> 중
 

황혼의 땅, 신비로운 꿈에서
어두운 오시리스가 일어서는 곳에서,
그것은 그의 신성한 시냇가에서 피었다.
세상은 아직 젊었다.
그리고 자연이 말한 모든 비밀은,
금빛 지혜의 힘으로,
여전히 연꽃 속 모든 접힌 곳에 둥지를 틀고 있고, ...
- 윌리엄 윈터, <방랑자들: 윌리엄 윈터 시 모음집>(1889) 중 '연꽃'
 
 
여기 당신을 위한 꽃이 있군요. 뜨거운 라벤더, 민트, 세이버리, 마조람. 그리고 태양과 함께 잠자리에 들며, 늘어진 채 태양과 함게 일어나는 마리골드. - 윌리엄 셰익스피어, <겨울 이야기> 4막 4장 103행
 
 
'분노에서 시작된 일은 결국 수치로 끝난다.' - 벤저민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만병초여! 현자들이 어째서
너의 매력이 땅과 하늘까지 낭비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에게 말하라, 만약 눈이 무언가 보기 위해 존재한다면
그러면 존재에는 아름다움이 따라온다.
장미의 적수여, 어찌하여 거기 서 있는가!
물어볼 생각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지만
나의 단순한 무지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나를 그곳으로 데려온 똑같은 힘이 널 이리로 가져왔다.
- 랠프 월도 에머슨, <만병초>
 
 
꽃의 가장 좋은 면을 살펴보자. 당신은 장미의 가시를 불평하지만, 나는 장미에 가시가 돋쳤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신들에게 감사한다. - 알퐁스 카, <나의 정원에서 쓴 편지들>
 
 
섣부른 추측으로 겉보기에 쉽게 보이는 것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 용기를 잃고 좌절해서도 안 된다.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유니버설 매거진>(1765) 중 '도덕의 여러 주제에 대한 성찰'
 
 
'바람이 촛불을 끄고 불을 지피듯이 결핍은 작은 열정을 줄이고 큰 열정을 북돋는다.' -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잠언집>(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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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결핍은 그 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소중함을 알게해준다.
 
 
[본문발췌]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많으면 한때 사랑했던 것을 잃어도 다시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실을 넘어서는 발전들이 이뤄진다.
 
 
복잡하고 흔치 않은 병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것이다. 내게는 절실한 대답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만큼 절실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급하다고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급해지지 않는다. 나의 곤경은 내게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의 구원자들에게는 잠시 미뤄 둘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똑같이 다급한 사례들과 똑같이 간절한 탄원자들을 상대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그들의 냉담함에 대한 완벽한 변명은 못되더라도 최소한의 설명은 된다.
 
 
물론 내 이야기는 새벽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황혼에 관한 이야기다. 낮은 영원하지 않으며 빛은 가차없이 사그라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이야기다. 인생의 정점에 이르러 우리는 어디선가 빌려온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이야기다. 너무도 달라진 온도와 분위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황혼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풍부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내 세계는 흐릿해졌지만 동시에 예리해졌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내쉬었다. 나는 새로운 걱정들을 인사로 맞이하고 과거의 걱정들에 작별을 고했다. 한 친구는 내 상황을 재치 있게 한 줄로 요약했다. "한쪽 눈이 감기면 다른 쪽 눈이 뜨인다."
 
 
나는 한쪽 눈으로 더 열심히 더 오래 바라보았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전보다 정성껏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보고,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의례적인 질문만을 한다. 그들을 여러 조각으로 편집해 그중 가장 덜 복잡하고 가장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부분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우리가 충분히 추앙하지 않은 승리가 있다.
 
 
진정한 불운을 마주하고 나서 과거를 돌이켜보니 그 시간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 시간은 어리석은 분개로 점철되어 있었고 무의미한 앙심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게 열린 도로보다 닫힌 도로를 밟으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비뚤어진 시선 속에서 모욕으로 여긴 것들의 총계를 냈다. 시살 아무 걱정할 게 없을 때도 내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만이 있었다.
 
 
"삶이란 상실에 적응하는 일입니다." 삶의 도전은 상실에 적응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판단력과 품위를 키워서 상실은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삶의 유일한 궤적임을 아는 것이다. 삶의 도전을 마주하고 가늠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고 그중에는 위안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잘 살기 위한 비결, 가끔은 살아남기 위한 비결인 셈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실명을 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실명을 개성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외모에 만족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수도 있습니다. 키가 더 컸으면, 좀 더 날씬했으면 하고 바랄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의 내가 나입니다. 내게 실명은 정확히 그런 것이었습니다." 후안은 내게 말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보이지 않음의 장점을 온전히 누려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통제력이 별로 없지만, 그 사건들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다. 후안 호세는 시력을 바로잡을 수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빚어낼 수는 있다. 후안은 만족감과 충만감, 자긍심을 위해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주제에 밑줄을 그을 수 있다. 후안은, 아니 우리 모두는 정확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고난에 처하는 방식에서 무엇을 얻을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각각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얻는다.
 
 
신체적 쇠퇴는 노화에 따라 가속화 한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운이 좋아서 장수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나는 인생의 광고판 이론을 언급했다. 사람들이 어깨에 진 짐을, 그들이 억누르는 두려움을, 그들이 감추는 흉터를 잠깐만이라도 알아봐준다면, 우리는 각자가 경험하는 불운과 모욕감에 덜 사로잡힐 거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분과 잘못을 더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야망에 쫓기는 일벌레가 되지 말 것이며 긴장을 풀고 한숨 돌릴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어떤 경험을 뒤로 미루는 것은 종종 그 경험을 결코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연만큼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는 찬란함의 원천은 없다. 우쭐하고 득의만만한 우리 인간들이 이처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연히 여기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만큼 훌륭한 위안은 없다.
 
 
누군가를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가끔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알게 되어 행복했다. 누군가에게 평범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발견일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을 나누는 것이 삶을 끝없는 선물의 교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기게 되어 행복했다. 
 
 
일과 사랑과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 다른 각도가 있다. 수많은 도로와 이동 수단이 있다. 한 가지가 닫히면 다른 것을 이용할 수 있고, 심지어 이견의 여지가 없는 희생조차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일종의 방향 전환일 수 있다. 이따금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내가 앞 챕터에서 언급했듯이 한계나 상실은 우리가 모색하지 않았을 실험, 우리가 습득하지 않았을 능력, 우리가 알지 못했을 통찰로 가는 관문이 된다. 우리는 그저 그러한 전망을 허용하고 그러한 관점을 우아하게 내것으로 취해야 한다.
 
 
"내 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으려는 노력을 멈추었습니다."
 
 
조너선 라우시는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에서 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 50세 이상의 사람들이 강점을 보이는 심리적, 정서적 습관을 열거했다. "현재에 살기.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긍정성의 진가를 음미하기. 부정적인 것을 덜 생각하기. 받아들이기. 과잉반응하지 않기.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나 관계를 우선시하기." 이것들은 다양한 연령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고 환경에 관한 느낌을 묻는 조사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말한 행복 쌓기 블록에 해당한다. "삶의 만족도에 평점을 매기라고 했을 때 60대와 70대 응답자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고 80대에서 살짝 감소했다." 라우시는 말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심리학과 마케팅을 가르치는 노버트 슈워츠는 사람들의 행복은 신체 조건이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무엇을 중시하는지, 자신에게 허용된 가능성 내에서 무엇을 성취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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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원칙을 지키며 선택과 집중, 분산의 균형을 유지하고 완벽함 보다는 변동성을 즐기며 감정을 통제하는 시간 투자가!
 
 

[본문발췌]
 
수년간에 걸쳐 곱씹어본 이때 경험을 토대로 두 가지 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
  • 첫 번째 원칙은 가치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점이다.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상품이나 주식을 매매할 때 그 가치가 오래 지속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첫 번째보다 비중이 더 큰 두 번째 원칙은 시장 추세와 동향이 중요하기는 하나 투자 자원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이다. 예측했던 시장 움직임이 정확히 언제 나타날지는 누구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시장 예측이 완전히 틀리기보다는 예측의 실현이 지연되곤 한다. 신중한 트레이더는 이렇게 예측 실현이 지연되는 상황을 감안해 매매 계획을 수립한다. 반드시 알아둬야 할 원칙 가운데 자금 관리에 관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 듣기에도 끔찍한 대실패는 대개 단일 매매에 쏟아부은 자금 규모가 너무 컸거나 손실 포지션을 너무 오래 유지한 데서 비롯됐다.
 
 
투기는 이기는 데 유리한 전략을 개발하고, 승산을 높이고, 승리 전략을 구사하고, 새로운 참여자 혹은 새로운 생각과 개념을 포함해 그 게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임이다. 투기 기술의 근간은 약간의 '관찰'과 상당량의 '보존'으로 이뤄진다.
 
 
매매 포지션의 규모가 너무 크거나 지분이나 계약의 수가 너무 많으면 사소한 손실로도 낭패를 볼 수 있다. 미래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은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승산이 별로 없는 게임을 시작할 때 이런 식이면 완패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설 뿐임을 명심하라.
 
 
돈을 벌려면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에서 해야 하고 주사위 던지는 횟수도 되도록 줄여야 한다. 매매 횟수가 늘어날수록 투기적 농간에 휘둘릴 기회가 그만큼 늘어난다. 다시 말해 결정을 많이 할수록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나 투기 매매는 가격 변화에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분명하고 뚜렷해 보이는 주기는 매우 강력하고 유의미한 시장 요소다. 가격 변동폭이 클수록 이익이 날 가능성도 커진다. 가격 변화가 없거나 변동폭이 미미하다면 가격 추세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투기자가 시장에 들어갈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시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격 변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나날에 좌절을 느끼며 평정심이 무너지기 쉽다. 가격폭이 점점 줄어들고 매매 기회가 다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잃고 거의 패틱 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한다. 대다수가 현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에 갑갑함을 느끼는 바로 그때 작은 가격폭이 큰 가격폭으로 전환되는 '마법'이 발생한다.
 
 
투자 이익의 보편적 규칙: 이익을 늘려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올바로 판단하고 게다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까지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 제시 리버모어
 
 
매매 방식은 항상 변화하지만, 올바른 매매 규칙은 항상 똑같다. 규칙에 어긋나거나 겸손함을 잃거나 게으름을 피울 때는 어김없이 손실이 난다.
 
 
가격 변동의 이유는 매수하고 매도하는 주식이나 선물 계약의 양 때문이 아니다. 그 양은 결국 균형을 이루게 마련이다. 가격 변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도인과 매수인 중 한쪽에 생긴 공백 혹은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등식에서 한쪽 항이 매매 포지션을 취하고 싶다면 가격 상승 시 매수하고 하락시 매도하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등식에서의 불균형이 가격 변동을 일으키는데 이때의 불균형은 매매량의 불균형이 아니라 '속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매매를 원하는 쪽, 그것도 급매매를 원하는 쪽이 가격을 상승 혹은 하락시키는 역할을 한다.
 
 
추세는 모든 매매 및 투자 이익의 기초다. 추세가 없으면 이익 발생원도 없다. 추세는 시간의 함수다. 즉, 시간이 만들어내는 기회다. 매매에 참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추세를 포착할 기회가 늘어난다.
 
 
시간 요소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펀더멘털의 뒷받침이 보이지 않으면 누가 뭐라 해도 시장에 진입하지 않는다. 좋은 매매 기회는 많다. 그러므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요소가 하나 있더라도 이 하나만을 믿고 매매에 나설 이유는 없다. 손실을 낼 확률만 높아질 뿐이니 말이다.
 
 
바보라도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싸움을 하는 것과 이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매매를 시작하기는 쉽다. 바보라도 시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익이 나는 지점에서 알맞게 포지션을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투자의 기술이란 결국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에 관한 것이다. 미래는 애초에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모든 투자 예측은 선택, 타이밍(시점 포착), 관리 등 세 가지 요소를 수반한다.
 
성공적인 투기자는 기다리는 게임을 한다. 반면 대다수의 투자자는 기다리지 못한다. 그저 빠를수록 좋다면서 덤비는 사람이 태반이다. 노련한 투기자는 때가 왔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는 참고 기다리며 행동을 미룬다. 그래야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매매 관리는 자금 관리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매매 포지션을 얼마나 유지하느냐, 이익을 얼마나 취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트레이더의 감정 조절 및 통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과다 매매 혹은 과소 매매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적절한 행동을 하고 매매하는 동안 감정 상태를 제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매 방법을 안다는 것이 곧 매매에서 '이익을 내는' 방법을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릇 매매의 기술은 선택과 시장 진입 기법을 자금 관리 요소와 결합하는 작업이다. 선택이나 개별 매매 기법도 중요하지만, 정말 뛰어난 트레이더는 이런 기법의 사용 및 통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매매 관리야말로 시장 이익을 극대화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너무 잦은 매매 횟수와 너무 많은 계약 수는 트레이더를 압살할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 부자는 거액을 베팅하지 않으며 매일 베팅하지도 않는다. 인내심은 조급함이나 허세가 아니라 진정 때가 왔을 때 행동하도록 흥분 수위를 조절해준다. 투기는 산탄총을 난사해서 한두 마리 얻어 걸리면 좋은 그런 게임이 아니다. 풀숲에 숨어 기다리다가 사냥감이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단 한 발로 쏟아 맞추는 게임, 그것이 투기다. 인내심이 없는 트레이더는 헛되이 총알을 난사하며 돈도 감정도 소모해버린다. 그래서 막상 한 발이 필요할 때는 탄창이 비어서 쏠 수가 없다. 이보다 난감하고 속상할 때가 또 어디 있을까!
 
 
 
두려움과 욕심의 딜레마.
  • 욕심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주저하는 사람을 일으켜세워 경솔한 행동을 하게 하고, 매매 포지션을 너무 오래 보유하게 하고, 과도한 매수를 하게 하는 등의 적극적인 힘이 바로 욕심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 있으면 그런 감정이 혹여 보상보다 손실이 더 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시해야 한다.
  • 두려움은 다르다. 두려움은 욕심과는 정반대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요컨대 욕심은 시장에 진입하지 말아야 할 때 덤비게 하고, 두려움은 진입해야 할 때 주저하게 한다.
  • 두려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 왜 생기는가에 관한 부분이고 두 번째는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에 관한 부분이다. 두려움의 원인은 '모름'에 있다. 뭐가 뭔지를 모른다는 데서 두려움이 생긴다. 두려움을 잠재우려면 미래를 전망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라. 그러면 시장 상황에 대해 반사적 반응이 아닌 효율적 대응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두려움은 거짓을 낳는다. 트레이더는 특히 자신의 배우자에게 매매 결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부정과 거짓으로 꾸며진 꿈의 세상을 헤맨다. 이 사람들이 현실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적당한 두려움과 자신감에서 배짱이 나온다. 이익을 내는 성공적 트레이더는 대범하게 행동한다. 대범함은 자신감과 두려움, 배짱이 절묘하게 조합된 결과물이다. 이익을 노리고 뛰어든 투기 시장에서 정교한 계획을 세워 과감하게 추진하면 결국은 성공에 이르게 된다.
 
 
 
투기의 세계에서 큰돈을 벌려면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 상황에서 들어가고, 그 유리함이 계속 이어져야 하며, 매매에 투여할 자금 규모에 대해 일관되고 타당성 있는 접근법을 활용해야 한다.
 
 
과도한 양을 너무 자주 매매하고 또 너무 과한 금액을 투자하면 최악의 시장 상황에서 버틸 때보다 더 큰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손실 매매가 많았던 이유는 시장 진입이 늦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빨리 진입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매매 결정에 감정이 많이 개입될수록 진입 시점이 잘못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는 손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빨리 행동하는 우를 범한다. 그러니 먼저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라. 매매로 큰 돈을 벌 기회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너무 빨리 시장에 들어가면 손실 매매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지 못한다. 큰돈을 벌고 싶은가? 그렇다면 기다리는 법을 배워라.
 
 
매매에 손절점을 사용하면 적어도 회생 불가한 지경으로 망할 일은 없다. 매매 건당 잔고의 30%만 사용한다면 잔고가 텅 비어버릴 일은 없다. 이성적 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은 손절점을 사용하고 매매당 잔고의 일정 비율만 사용하는 것이다.
 
 
욕심은 손실이든 이익이든 현재 취한 포지션을 너무 오래 보유하게 하는 부작용만 따른다. 손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포지션을 청산할 때보다 욕심 때문에 포지션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 발생하는 손실이 훨씬 크다. 통제력을 잃고 속도를 낼 때 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바로 욕심 때문에 행동을 머뭇거리는 일이다.
 
 
이익 트레이더는 자신이 '선호하는' 몇몇 시장에 집중한다. 그런데 손실 트레이더는 뭐든 바꾼다. 이 시장에서 저 시장으로 바꾸고 추종하던 권위자나 시황 정보지도 바꾼다. 이익 트레이더는 스스로 연구를 많이 하는 반면 손실 트레이더는 손실이 적게 나게 해줄 혹은 이익이 더 많이 나게 해줄 누군가를 이리저리 찾아다닌다. 이익 트레이더는 자신이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항상 믿으면서 손실이 나더라도 이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태는 막으려 한다. 이들은 큰 손실로부터 자신을 막아줄 안전 보호막을 두른 채 시장에서 그저 어리석은 짓만 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매매 업계에는 반박불가한 두 가지 진실이 있다. 1) 손실을 통제해야 한다. 2) 가격은 예측 불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손절점을 사용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쓰는 매매 시스템이 제몫을 다하지 못해 손실이 발생할 때 그 규모를 줄여 트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시스템이 손실을 발생시킬 위험은 항상 있다. 이런 잠재적 위험 요소가 존재하지 않으면 손절 기제도 필요가 없다. 손절점은 시장 자체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위험으로부터 트레이더를 보호하는 장치다. 매매라는 게임은 예측 불가능성이 매우 높은 행위라서 손절점을 너무 촘촘하게 설정하면 오히려 트레이더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요컨대 손절 기준점과 시장가 간의 간격이 좁을수록 손절점에 도달하는 횟수가 많아진다. 포지션을 더 자주 청산해야 하므로 트레이더가 정신적으로 너무 고달파진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그 누구도 가격 추이를 상세하게 예측하지는 못했다(가격 변동이 무작위로 이뤄지기 때문). 따라서 손절점을 설정할 때는 무작위성을 감안해 시장가와의 간격을 여유 있게 잡아야 한다.
 
 
우리의 매매 전략은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1) 우선 매매할 시장을 정하고, 2) 시장 진입 시점을 노린다. 3) 마지막으로 손절매, 추적 손절매, 목표 가격 등의 방식으로 포지션을 청산한다.
 
 
경제든 혁신이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지는 법이다. 인생사 모든 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진다. 내림세가 있더라도, 이보다 더 큰 폭의 오름세가 있는 법이다.
 
 
그 어떤 것이든 설명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절대 논리로 무장한 집단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시장 상황에 주목하지 않고 이 무적의 논리를 맹신한 채 엉뚱한 곳에 배팅한다는 점이다. 주식이나 상품이 알아서 제 할 일을 해주게 마련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라 시장에 집중하면, 즉 지금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둔다면 성공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완벽한 시스템이나 접근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매매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살아남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시장 환경이 조성됐고 그 환경이 자신의 매매 규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라. 그러나 규칙이 그 환경에 맞지 않거나 환경이 규칙에 어긋난다면 그냥 넘어가라. 매매를 매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매매를 매일 할 필요는 없다. 시스템이나 매매 규칙을 활용하는 목적은 가장 유리한 성과를 내기 위함이지 그런 도구의 노예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매매는 완벽한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매매에 수학을 활용하고 또 수학은 완벽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수학을 사용한다고 해도 시장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시장에는 비이성적인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는데 뉴스 충격은 이중에서도 가장 큰 비이성적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이 바라는 진실과 진짜 진실을 혼동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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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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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는 소수의 특정 계층이 권력을 독점하고 다수의 자유와 평등, 행복 증진이 아닌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며 다수의 일반을 통제하고 고통과 상실, 비참함을 겪도록 하는 세상이다. 권력을 쥐고 주인 행세를 하며 보호자로서의 역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들은 농민 운동 지도자 자크 카이에의 연설에서 이야기하듯 강도짓에 길든 사나운 폭군, 못된 망나니, 탐욕스런 박해자들일 뿐이다.
 
 
[본문발췌]
 
필립 6세와 장 2세 치하에서 토지 예속은 전례 없이 잔인했다. 온갖 봉건적 권리가 횡행했다. 밀 10파운드를 수확한 농민은 영주와 사제에게 7파운드를 주었다. 전자에게 봉건 십일조, 후자에게는 성무 십일조를 바쳤다. 게다가 농민은 영주에게 현물세 혹은 농지 수입 5분의 1, 농노 각자에게 임의로 부과되는 정액 지대(地代), 종종 한 달에 10일 걸리는 부역, 무거운 조세 그리고 수많은 사용료를 바쳐야 했다. 밤에는 영주 저택을 지켰고, 4가지의 경우에는 영주에게 인두세를 바쳤다. 농노와 봉신은 영주의 볼모가 되어야 했고, 짐 나르는 짐승들처럼 매매되었다. 또한 14세기에는 성직자가 주교구에 말을 타고 부임했는데, 이때 시중드는 남자 3명과 여자 3명을 대동했다.
영주는 초야권을 누렸는데, 15세기 초까지 심지어 신부와 사제, 그리고 주교도 마찬가지로 그 권리를 행사했다. 그들은 소녀들에 대한 권리를 가졌으며, 이를 이용해서 미혼모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망나니권, 판매권, 측량권, 영지 매매권 등을 행사해서 영지에서 거래되는 모든 것의 일부분을 그들이 취했다. 잔재권으로 모든 유기 가축을 차지했고, 그들의 땅을 지나는 통로와 강에 대한 통행세, 겨울에 불을 지피는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인 호별세, 임의 몰수권, 사냥 및 어업세, 기타 잡세 및 인두세, 재미를 위한 농지 유린권을 행사했고, 무역을 가로막는 외국인 재산 몰수권 및 파선권 등을 가졌다. 백성은 죽기 전에 사제의 재산을 늘려주려 하지 않으면 교회 축성지에 묻힐 수 없었다. 혼례를 치르지 않고, 사제에게 결혼 음식을 바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었다. 엄청난 특권을 가진 성직자는 십일조를 정확히 납부하지 않은 사람, 교구를 위해 유산을 남기지 않은 사람, 그리고 수도사가 자식을 출가시키라는 명령을 전할 때 따르지 않는 사람을 파문할 수 있는 권리도 행사했다. 가문의 장자가 아닌 사람들은 장자권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다.
성관은 종종 강도들의 소굴이었다. 루이 성왕 시대에, 행인을 더 이상 강탈하지 않고 위조화폐를 더 이상 발행하지 않기로 했던 영주들은 모두 이전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 예속 농노들은 불행을 타고 태어난 초가집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법도, 치안도, 사법도, 풍습도 없어 프랑스에는 온통 강도짓과 미신, 광신, 특권 그리고 불행이 가득했다.
 
※ 4가지 인두세 : 1) 농민들은 영주가 성지순례를 떠나면 여행비용을 부담했다. 2) 영주가 감옥에 갇히는 경우 돈을 지불하고 그를 석방시켰다. 3) 영주가 어떤 기사단에 가입하면 그들의 옷값을 부담했다. 4) 영주 딸이 결혼하면 지참금을 냈다.
 
 

농락당하고, 지치고, 짓눌리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은 더욱 심하게 반발했다.  혼란은 극에 달했다. 각자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뒤엎었으며, 그런 것에 놀랄 필요도 없었다. 왕은 대중의 행복보다 자신의 권력을 더욱 키우는 데 몰두했고, 각자는 그런 왕의 본을 따랐다.
 

나는 내 아버지의 주인인 그 영주만 잔인한 괴물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한결같이 비정하고 야만적이었다. 영주가 농민을 대하는 방식을 가만히 보면, 정말로 각각은 피가 다르고 시원(始原)이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주는 권력과 재산을 갖고 죄를 짓고도 당당한 데에 반해, 농민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하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선행을 베풀었다. 모든 농노는 물론 그들의 잘난 주인과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도 일자무식이었다. 하지만 선량했다.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은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오두막과 작은 경작지, 농기구, 아내, 자식들 그리고 아버지 자신 등 모든 것은 영주에게 속했다. 나는 아들 4명 가운데 막내였고, 아버지가 똑같이 애지중지하는 우리 아들 넷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토지에 딸린 종살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인간이란 사방의 비천한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스스로 대단해진다고 생각하고, 그가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천하게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비천해질 뿐이다.
 
 
"내가 살인이나 다른 비슷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가벼운 처벌만 받으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을 행했고, 내가 복종하는 고위 성직자가 관심을 갖는 복수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무슨 이단 범죄를 저질렀다는 구실로 죽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서 지내거나 그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마음대로 상상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굴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이단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화형에 처해 버린다. 그들은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종족을 없애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무지의 시대에 배운 사람은 불행하고, 야만의 시대에 예민한 사람은 불행한 법! 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과 내가 경험하는 연민의 감정은 무지가 낳을 수 없고 악한 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희열을 준다네. 나는 하느님이 나의 운명을 정하신다는 것을 알아. 고난의 순간 다음에 오는 무한한 행복을 알고 있지. 지상에 널려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애통해하지만 압제에 시달리는 것이 압제자가 되는 것보다 낫고, 또 다른 세상과 영원한 시대가 있다고 생각하며 곧 눈물을 닦는다네."
 
 
수 세기 전부터 우리는 땅의 노예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굴종 상태에 놓여야만 하도록 우리 조상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프랑스 전역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한 명의 영주 아래서 떨고 있습니다.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물이 우리의 재산을 몰수하고 우리를 극도로 힘든 노동에 시달리게 하며, 우리 아내들의 순결을 훔치고 그의 변덕에  따라 우리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오직 우리가 땅을 일구고, 오직 우리 손으로 불쌍한 우리 조국 사람들을 먹여 살리며, 오직 우리만 유익한 일을 하는 주민이며, 오직 우리만 압제에 시달립니다. 영주의 삶은 어떻습니까? 명령하고, 몰수하고, 처벌하고,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농노의 몫은 무엇입니까? 노동, 면죄부, 고통 그리고 처형입니다.
 
 
지금과 같은 처지라면, 우리와 프랑스 땅에서 신음하는 모든 농노를 포함한 우리에게 우리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강도짓에 길든 사나운 폭군, 못된 망나니, 탐욕스런 박해자들일 뿐입니다. 이 주인들은 보호자가 아니라 지옥에서 토해진 괴물을 닮았기 때문에, 복수를 위해 나섭시다. 우주의 조화를 파괴하고, 타고난 평등의 바탕을 뒤엎으며, 모든 인류를 학대하는 비겁한 적을 처단한들 우리가 하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리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의 고통과 여러분의 고통, 나의 상실과 여러분의 상실, 내가 겪는 비참과 여러분이 겪는 비참, 나의 복수와 여러분의 복수, 나의 자유와 여러분의 자유, 나의 행복과 여러분의 행복, 프랑스 전체의 고통과 비참과 복수와 자유 그리고 행복이 분명합니다.
 
 
나는 내 기억력을 발휘하여 전할만한 모든 것을 진실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영주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농노들이 노예 사슬 아래서 떨고 있는 한, 불행한 자크리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전쟁을 강도짓이라 덧칠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멋대로 비방할 수 있는 불쌍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카이에를 음모가이자 폭도로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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