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길이 사막이나 평지가 끊없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을까?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희로애락의 역동성이 힘들 때도 있지만 내려가기 위해 올라가고, 올라가기 위해 내려가야만 한다.
 

[본문발췌]

지옥이었다. 등반 첫날은 항상 그랬다. 내 몸 상태는 구제 불능이었다. 배낭은 그냥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천근만근이었다. 준비가 안 된 채 이렇게 무거운 걸 메본 것도 처음이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겨운 투쟁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무리 걸어도 끊임없이 새로운 봉우리가 나온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훤히 보이지만 앞으로 뭐가 나올지 전혀 예측 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나무 커튼 사이로 가파른 비탈길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고, 그럴수록 몸의 기운은 쪽쪽 빠지고 얼마나 왔는지조차 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꼭대기라고 생각한 곳까지 억지로 몸을 끌고 올라갈 때마다 그 너머에 또 다른 봉우리가 솟아올라 있다. 그것도 전혀 밑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봉우리가 나타나고 그 비탈을 넘어서면 또 다른 비탈, 그 비탈을 넘어서면 또 다른 비탈, 각 비탈마다 새로운 비탈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길게 반복해서, 끊임없이 비탈이 늘어서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질 때까지 비탈이 나타난다. 마침내 그 너머로 맑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고 가장 높이 있는 나무들의 맨 위를 볼 수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면 "바로 저기다!" 하면서 전의가 다시 살아나지만, 이내 잔인한 기만으로 끝난다. 교묘히 치고 빠지는 산 정상은 나아간 만큼 계속해서 후퇴한다. 그래서 전경을 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열릴 때마다 가장 높이 있는 나무들이 전과 다름없이 엄청나게 떨어져 있어서 결국은 가까이 가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비틀거리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밖에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크게 심호흠을 한번 하고 몸을 돌려 똑바로 누운 뒤 배낭을 벗고 힘겹게 일어서면 갑자기 환상적인 경치가 눈 아래 펼쳐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산들이 나무로 뒤덮인 채 사방으로 끝없이 뻗어 나간다. 의심할 여지 없이 장관이다. 천당이 따로 없다. 하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은 저 장관 속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 비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새 발의 피도 안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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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가보고 싶던 다이빙 포인트 중 꼬따오, 꼬창, 푸켓과 꼬피피는 다녀왔고 남은 꼬리뻬와 시밀란 중 이번에는 꼬리뻬를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들과 여행 중간 3~4일 일정으로 꼬리뻬를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아 2016년 다이빙 교육 받고 처음 시작한 꼬따오를 다시 가보기로 했다.

지난번에는 비행기+배편을 예약했다가 가는 일정의 비행기 스케줄이 변경되어 롬프라야 버스+배로 12시간을 이동하고 너무 힘들어 다시는 이 경로를 이용하지 말아야지 생각 했었는데, 하노이에서 이동해 바로 꼬따오로 들어가고 가족들이 있는 파타야로 이동하기에는 왕복 롬프라야 버스+배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왕복 25시간의 버스+배+택시의 이동 경로는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과거에 없던 우리나라 우등 버스와 같은 VIP버스가 생겨 좀 나아졌다고 할까?

저녁 9시 카오산에서 출발해 다음날 아침 9시 꼬따오의 선착장에 도착해 미리 예약한 리조트의 픽업 사인을 이리저리 찾아도 안 보인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리조트에 물으니, 깜빡했는지 바로 보내준단다.

도착일에 바로 오후 펀다이빙을 신청해서 리조트 early check-in이 되면 좋겠다 기대했는데 리셉션 직원이 바로 방이 준비된다는 이야기에 오는 길 피로가 사라지는 듯 했다.

이번에 묵은 The Tarna Align Resort는 싸이리 비치에서 언덕 위를 한참 올라야 하지만 숲에 둘러 쌓여 멀리 꼬따오 서쪽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

다이브원의 두 강사님과 3일 동안 6개 포인트에서 1:1 가이드를 받으며 즐긴 꼬따오 펀다이빙은 교육 받을 때 제대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꼬따오 바다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시간 이었다.

mango bay에서 체크 다이빙으로 시작해 japanese garden, 둘째날 오전은 파도가 있어 먼바다로 못나가고 Hin won bay와 white rock, 셋째날 오전은 Chumphon pinnacle과 HTMS Sattakut wreck까지 마지막 포인트에서 공기통에 문제가 있어 입수 전 바다 위에서 공기통을 교체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꼬따오 바다의 다양한 바다생물과 산호, 그리고 안전하고 세심하게 가이드해 주신 다이브원의 두 강사님 덕분에 즐겁게 다이빙을 마쳤다.


꾸준히 자주 하지 않는 다이빙이라 아직도 초보나 마찬가지지만 어느덧 97번째 로그, 다음 투어 100번째 입수는 어디서 하게 될까? 기대된다.



여행 tip

  • 꼬따오로 롬프라야 배+버스 조인트 티켓을 이용한다면 고민하지 말고 조금 더 주고 VIP 버스를 선택하는 게 확실히 버스에서 조금이라도 다리 펴고 편하게  잘 수 있다. 단, VIP버스 중에서도 구식 버스는 맨 앞자리는 다른 자리에 비해 불편하다. 과거에 일반 버스 맨 앞자리가 다리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일찍 롬프라야 체크인을 했는데, 가는 길은 구식 VIP 버스 맨 앞자리를 배정 받아 불편했다. 돌아올 때 탄 새 버스에서도 우연히 맨 앞자리를 배정 받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VIP버스는 맨 뒤 화장실 근처만 빼고 어디를 배정 받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 꼬따오 사이리 비치의 석양은 예술이다. 해질녘 모래사장에 앉아 석양을 보는 것도 좋지만 4~5시에서 7시 정도까지 운영하는 happy hour를 이용해 와인이나 모히또 등 칵테일을 마시며 즐겨 보시길. 이번 여행에서는 Blue Jay Beach club, Charcoal Bay Wine & Grill에서 석양을 즐겼는데 위치나 시설, 음식 맛 모두 괜찮다. 아무래도 음식 값은 비치 안쪽 식당들보다는 비싼 편이라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라면 happy hour 음료로 분위기를 즐기고 해진 후에 저녁 먹을 식당을 찾아갈 수 있다.
  • 꼬따오의 펀다이빙은 보통 오전/오후로 나뉘어 1 trip 당 2회 다이빙을 한다. 오후는 보통 섬 근처 가까운 포인트로, 오전은 춤폰 피나클 등 좀 더 먼 바다로 나가는 게 보통이다. 가보고 싶었던 sail rock 포인트는 내가 갔을 때 매일 운영하지는 않았고 가는 보트가 있으면 해당 다이빙샵을 이용하거나 다이빙샵끼리 연결을 해서 가기도 한다.
  • 오전 다이빙은 말이 오전이지 보통 6시반 정도 출발하기에 아침을 먹어야 한다면 전날 미리 준비하거나 세븐일레븐 등에서 간다한 요깃거리를 준비하면 된다. 나는 리조트에서 싸이리 비치 다 내려와서 세븐일레븐 삼거리에 Fruit salad집이 그 시간에 열었기에 망고 스무디나 과일요거트뮤즐리를 주문해서 먹었다. 마지막날 저녁에도 들렀더니 아주머니 아침 오픈 시간에도 오고 저녁에도 오니 단골이라고 아는 척을 해 주시며 과일 샐러드를 더 푸짐하게 올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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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첫 해외 여행.

부모님과 같이 동생 부부를 보기 위해 태국으로 가는 길, 베트남 항공권을 예매하다보니 부모님이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하시는 하롱베이도 다시 가 볼겸 하노이에서 모두 모였다.

2009년 부모님과 함께 다녀오고 14년 만에 다시 찾은 하노이와 하롱베이, 우리가 머물렀던 호안끼엠 근처는 외관상 크게 변한 것은 느끼지 못했지만 전반적인 물가가 올랐다는 것과 구시가 여행자거리의 탄히엔 맥주 거리는 예전보다 더 상업적으로 변하고 사람도 많아졌다는 것이 크게 체감되는 정도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베트남 여행이 처음이라는 동생 부부, 부모님과 함께하는 하롱베이 크루즈. 

바다를 운항하는 크루즈라니 멀미 걱정을 하던 매제는 약을 먹어야 하나 걱정하길래 배경이 지나가는 것 외에는 배를 타고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잔잔하다 설명을 한다.

 

미리 봐 두었던 파라다이스 계열과 앰버서더 크루즈는 예약이 다 차서 이리저리 검색하다 찾은 Arcady Boutique Cruise를 선택했고 대부분의 1박 2일 크루즈와 같이 아침에 숙소에서 pick-up 후 하롱베이 선착장으로 이동해 크루즈로 옮겨 탄 후 체크인과 점심 식사를 하고 갑판 데크에서 하롱베이의 섬들과 바다 경치를 즐기다 카약도 타고 모래사장이 있는 섬에 내려 전망대 트레킹이나 수영을 선택해서 즐기며 이후에 간단한 쿠킹클래스 체험을 하고 저녁을 먹은후 원하는 사람들은 오징어 낚시를 하기도 한다.

다음날 아침 태극권 체조는 새벽 부슬비와 참석한 사람이 별로 없어 취소 됬는데 옆 배 갑판에서는 한창이다.

커피와 크루와상, 요거트로 요기를 하고 근처 용암동굴로 가기위해 작은 보트로 출발하는데 배에서 쉬기위해 남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 아점 브런치는 뷔페식, 이후 체크아웃과 정산을 하고 다시 하노이 숙소로 내려주는 것으로 일정 마무리.

객실 등 배의 상태나 음식은 과거에 3번의 크루즈 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카약을 타던 곳이 진주 양식장 근처로 예전에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동굴을 지나 섬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호수 같은 잔잔하고 고요한 경치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으나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기며 근처에 정박한 배들의 불빛 야경을 구경하며 선상에서 하룻밤은 경험해볼 가치가 있다.


여행 tip

  • 4월 중순 베트남 북부인 하노이와 하롱베이는 흐린 날이 계속되어 덥지 않아 좋지만 과거보다 미세 먼지가 많아 하롱베이의 많은 섬들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단점이 있다.
  • 하롱베이 선착장 근처에 대관람차와 케이블카가 생겼다.
  • 베트남 음식은 우리에게 정말 잘 맞았다. 호안끼엠 근처에도 구글 평점이 4.5~4.9점 사이 음식점들이 여럿 있는데 서비스도 좋고 인당 1.5~2.0만원 정도에 여러 요리와 맥주나 음료를 곁들일 수 있다.
  • 외국인이 많이 가는 음식점에 외국인 담당 홀직원과 크루즈 가이드들의 영어 실력은 정말 뛰어난데, 하롱베이 선착장에서 만난 초등학생 또래 꼬마가 이리저리 다니며 외국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데, 자세히 보니 엄마가 옆에서 아이에게 외국인과 대화를 통해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친구들도 저렇게 공부했나 싶었다.
  • 호안끼엠 근처에 숙소가 있다면 아침 일찍 공원 산책을 해보시라. 여기저기 단체복을 입고 운동을 하시는 그룹을 볼 수 있고, 간단한 아침으로 반미나 쌀국수를 먹는 것도 좋다.
  • 1박2일 크루즈에는 보통 왕복 교통 비용과 4번의 식사, 카약 등 Activity 비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게 대부분인데, 왕복 교통의 경우 리무진 버스 등 좀 더 Private하거나 편안한 것을 선택하는 경우 추가 비용이 생길 수 있다. 또 배에서 먹는 식사는 기본 포함이지만 주류나 음료는 나중에 정산한다. 정산은 기본적으로 달러 기준으로 달러나 베트남 동으로 계산하고, 신용카드 결제를 할 경우 3% 정도 수수료를 추가 요구한다.
  • 호안끼엠 근처 4's pizza에서 인생 피자를 맛봤다. 근처를 지난다면 꼭 들러 보시길 추천한다.
  • 다른 포스팅에 소개한 적이 있지만 베트남항공을 이용한 방콕, 싱가포르, 라오스, 캄보디아 등 주변국 여행은 하노이나 호치민 스탑오버를 선택해 베트남을 함께 여행할 수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무비자로 왕복여정 중 한번밖에 스탑오버가 안됐는데 2023.4월 기준 두번 모두 가능해 하노이 인아웃, 호치민 인아웃으로 장기 여행자의 경우 베트남 북부와 남부를 모두 돌아보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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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 그 시간을 어디에 할당할 것인가?


[본문발췌]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각자 다르지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잘 관리해서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으로 만족감을 얻는 유일한 길은 위대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찾아라. 안주하지 말라. 마음속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으면 알 것이다. - 스티브 잡스


자신에게 정말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절대 한눈팔지 않고 목표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꿈이 사라지게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에 근거해 일자리를 구한 다음에 거기에 그냥 안주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타협의 길로 접어들면 대부분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을 괴롭히는 건 바로 그런 타협이다. 그러나 이런 운명에 체념할 필요는 없다.


전략은 성취하고 싶은 것과 성취하는 방법을 말한다.
우선순위, 계획과 기회의 균형, 자원 할당 등의 요인들이 모두 합쳐져서 전략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엄청난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일에서 동기를 부여받으면 그 일을 좋아하게 된다. 일이 좋아지면 계속해서 동기를 부여받는다.


돈의 추구는 기껏해야 일에서 느끼는 좌절감을 완화시켜줄 뿐이지만, 부자들이 부르는 유혹의 노래는 사회 최고의 엘리트들까지도 혼란에 빠뜨린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행복을 찾고 싶다면 의미 있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공하고 더 많은 책임을 질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찾아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평생 단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는 옛말이 있다. 일을 정말로 좋아하고 그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일 출근하면서 분명한 우위에 선다. 그들은 자기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덕분에 하는 일마다 아주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좋은 대우를 받는다. 동기부여 요인으로 가득 찬 일은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돈, 지위, 보상, 고용 안정 같은 위생 요인의 개선은 행복의 원인이라기보다는 행복의 부산물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부담 없이 정말로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다.

자신에게 동기를 주고 위생 요인을 만족시키는 일을 찾아야 한다.


행복을 기대하는 선택을 하기 위해 어떤 가정들이 사실로 판명돼야 하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동기부여 요인들 중에서 어떤 것을 중시하는 입장인가? 그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갖고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이직을 검토할 때마다 사실로 판명돼야 할 가장 중요한 가정들과 그 가정들의 진위 여부를 신속하고 저렴하게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라. 자신의 앞에 놓인 길에 대해서는 반드시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적합한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동안에 인생의 문을 활짝 열어둬야 한다. 각자 처한 특별한 환경에 따라서 위생 요인을 만족시키고, 동기부여 요인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때까지 다양한 기회를 실험하고, 방향을 선회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노력을 계속할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거기서 당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가끔 힘들 수 있다. 해야 할 일의 관점에서 자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런 생각은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 시킨다. 
'내 아내가 (혹은 남편이) 내가 어떤 일을 해주기를 가장 바라는 걸까?'라고 자문해보면 당신은 올바른 분석 방향 속에서 그 일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주변 관계에 접근할 때 어떤 게 올바른 일인지 막연히 추측하는 것보다 그 대답이 훨씬 더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배우자가 당신이 해주기를 바라는 일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당신은 그 일을 실행해야 한다. 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자신의 우선순위와 바람을 억누르고, 대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과 배우자들에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이처럼 헌신할 기회를 똑같이 주는 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이런 방법을 쓰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분명히 포기하는 것이 되므로 관계에 억울함을 초래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정반대의 효과가 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치 있는 뭔가를 위해 희생하면 그것에 더 강하고 깊게 헌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앞서 나가기를 바라고, 우리가 제공한 기회와 경험이 아이들에게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 즉 아이가 깊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사실상 아이가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갖게 만들지 못하는 경험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미래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프로세스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갈 뿐이다.

아이들을 위한 부모들의 의도는 모두 좋을 수 있지만, 나중에 극소수의 아이만이 자신이나 남을 위해 힘들 책임을 지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맞서는 게 두렵지 않아. 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자존심은 풍부한 자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하기 힘든 중요한 일을 해냈을 때 생긴다.

선진국의 청년 실업률에 대해 나는 젊은 세대 전체가 일자리를 얻는 능력(특히 그중에서 프로세스)이 없이 성인이 된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우리는 집안일을 아웃소싱했고, 그래서 생긴 빈틈이 우리 아이들에게 도전이나 참여의식을 심어주지 못하는 활동들로 채워지게 내버려뒀다. 우리는 아이들을 인생에서 생기는 문제로부터 지켜주려다가 무심코 그들로부터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프로세스와 우선순위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갔다. 나는 가능하면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또한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렇게 해서 얻은 성취감 속에서 자긍심을 느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부모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돕고 싶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려운 도전을 겪어보지 못한다면 평생 필요한 회복력을 쌓지 못할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몇 년 동안 멈추지 않고 성공을 거두다가 처음으로 중요한 장애물을 만나본 사람은 종종 그대로 허물어져버린다.

아이들이 겪는 도전은 중요한 목적을 충족시킨다. 즉 도전은 아이들이 한평생 살면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고 개발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가령 까다로운 선생님을 상대하고, 운동 경기에서 패하고, 학교 내 복잡한 사회적 파벌 구조를 해쳐나가는 법을 배우는 일들이 모두 경험의 학교 내 학습 과정이 된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본래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일이 주는 도전을 준비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실패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지금까지 잘못된 과정을 밟아온 사람들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연스럽게 좋은 성적과 체육대회 우승 등 아이의 이력을 쌓는 데 전적으로 몰두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밟아야 할 과정을 무시하는 건 잘못이다. 자, 이제 돌아가서 아이들이 성공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쌓는데 도움이 될 적절한 경험을 찾아라. 당신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 중 하나이다.
 


기업은 미래 혁신을 위한 투자를 결정할 때 일반적으로 기존 사업의 관점에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기 위해 투자 금액을 계산한다. 계산 결과에 따라서, 기업은 투자했을 때 드는 한계비용보다 한계수익이 적으면 투자 포기를 결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에는 거대한 오류가 잠재해 있다.
어쩌면 한계적 사고가 쳐놓은 덫이다. 우리는 투자했을 때 드는 비용을 즉시 확인할 수 있겠지만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드는 비용을 정확히 산출하기란 정말로 힘들다. 여전히 완벽하게 여겨지는 기존 제품을 팔고 있는 반면에 신제품 투자의 장점이 충분히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면, 당신은 다른 누군가가 시장에 신제품을 출시할 미래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 특히 그중에서도 기존 제품을 팔아서 번 돈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기업은 일정 시간 동안 그런 결정에서 빚어질 결과를 보지 못할지 모른다. 기업은 경쟁사가 앞서 나가지 않는다면 단기적으로 경쟁사에게 '따라잡히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비용이란 렌즈를 통해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기업은 궁극적으로 대가를 치른다. 기업들이 미래를 보고 투자하지 않음으로써 결국에 실패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경우가 정말로 많다.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불편한 도덕적 양보를 했을 때 초래되는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보다 처음부터 그런 양보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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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가치는 빈 서판에 무엇이라도 써야 남겨진다.

[본문발췌]

일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을 구경만 하는 것은 더 힘들어서 그래요. 더구나 노인이 일하는 것을 보는 것은 말이에요.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소년은 조서에 서명을 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국경을 같이 넘은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소년은 열여덟 살이 아니고, 열다섯 살이다.
이름은 클라우스(Claus)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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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 자연에서 배우는 지혜!


[본문발췌]

농사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따르는 일이다.
우리가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 농사를 짓고 살고자 하는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자연을 거스르는 삶과 문명으로서는 심신의 건강도, 행복한 삶도, 지속적인 생존도 보장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이란 자연과 조화하면서 지속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해롭고 성가신 것으로만 여기고 있는 돼지풀, 명아주, 쇠비름, 쐐기풀 같은 잡초들이 토양 깊숙한 곳으로부터 미네랄을 끌어다 황폐해진 표토 쪽으로 옮겨다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 토양의 상태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즉 그 잡초들은 인정 많은 이웃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영양소들을 농작물 뿌리 쪽으로 끌어다 준다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이러한 움직임을 '만물의 공존 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식물들 간의 공존과 유대관계를 통해서 서로를 살리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디 이러한 법칙이 식물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이겠는가. 공생의 원리, 상생의 법칙이 우주 대자연의 법도가 아니겠는가. - 조셉 코캐너, <잡초는 토양의 수호자다>


자연농법은 자연에 맡기고 인간은 거기에 최소한의 도움만을 주는 농법이다. 자연은 개조, 개량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따르고 배워 마침내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인위적인 방법들을 버리며 그리고 돌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땅 갈이를 하지 않고,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제초를 하지 않는 것.


건강하고 완전한 벼의 생명을 먹어야 사람의 생명은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농약이나 비료로 얻어진 벼라면 그것을 먹는 인간의 생명은 약해져 병에 걸리기 쉽다. 그에 따라 건강한 정신도 점차 사라져간다. 벼처럼 생명이 결핍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약을 먹어야 하는데 또 그 약이 사람의 생명을 약하게 만든다. 결국 악순화의 반복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런 건강한 생명의 순환 속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서로 먹고 먹히는 조화가 그대로 자연의 대 조화이자 커다란 활동이다. 이 대조화가 잘못되면 큰일이다. 어느 한 부분이 오염되거나 훼손되거나 병이 들거나 파괴가 되어 죽더라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은 마침내 다른 부분으로 영향을 미쳐 결국 전체로 퍼져나간다. 인간으로부터 생긴 독은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자기가 만든 독이 다른 존재에 이르기 전에 자기에게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독성은 더욱 심해진다.


인간만이 여분의 것을 탐내고 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고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생명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적량을 알고 대자연 속에서 최소한 것을 먹어야 한다. 인간을 빼고는 다른 생물들은 모두 알고 있다. 지나치면 언젠가는 결핍되고 파괴를 불러 마침내는 전체로 파급되어 간다는 사실을.
인공 속에서 나날을 계속해온 결과 생명이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힘이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탓이다. 자연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는 직관력에 구름이 끼어 있고, 주어진 그대로 자기를 완수하는 능력이 훼손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인을 제거해 주면 저절로 건강하게 된다.


작물 중에서 마른 땅을 싫어하는 것으로는 가지, 피망, 고추, 율무, 토란 등이 있고 특히 젖은 땅을 싫어하는 것으로는 토마토, 옥수수, 조, 수수, 감자 등이 있다. 또한 수박, 멜론, 참외, 배추, 무, 시금치 등도 습지를 싫어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자연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생명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과학의 눈은 결코 생명을 볼 수 없는 눈이다. 과학이라는 눈으로, 곧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질뿐이지 생명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과학성에 의해..., 과학적인 증거가..., 과학적인 증명이 없으면 믿을 수 없는 마음은 물질밖에 믿지 못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물질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어리석고 어둡고 쓸쓸한 마음인 것이다.
과학을 절대시하고 의존하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 어리석음, 불분명함, 소심함을 깨닫고, 곧 그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고 거기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과학의 진짜 의미와 그 작용을 정확히 깨달아야만 한다. 과학에 의해서 생기는 일체의 일들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학교 교육도 과학을 절대시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생명 영위는 전혀 보려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다. 학생 개개인의 생명을 보지 않고, 개개인의 마음을 보지 않고 있다. 학습 내용 또한 생명을 문제로 삼지 않고 지엽적인 것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지식화 하고 있다.
현행의 교육 제도는 지식의 양에 의해 우열을 결정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어린이 개개인의 인간성 확립과 함께 참다운 통찰력을 깨닫게 하고 개개인의 직관력에 따라 학문을 행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지나쳐서 모자람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신 양면으로 무엇이든 너무 많이 집어넣어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나침으로써 신체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 피로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혼란하게 만들고 연약하게 만들고 있다. 고장을 자초하며 병을 초래하는 불행에 빠져들고 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고, 지나치면 반드시 조우한 생명이 파괴되어 간다. 
겨울은 모으는 활동이지만,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된다. 자연의 영위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는 야산의 작은 새들, 벌레들, 짐승들, 풀과 나무들은 지나치는 법이 없이 자연의 영위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영위로부터 벗어나 자기 멋대로 굴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서 지나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치고 있는 것은 바르게 자연의 영위에 따라서 소화하고 방출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 지나치면 큰일이다. 그러면 생명이 점점 결핍되어 간다. 원기가 사라지며 기력이 없어진다. 의욕이 솟아나지 않고 정기와 신기가 사라진다. 지력은 고갈되고 능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마침내는 참다운 앎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젊은 생명은 하나밖에 몰라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성장기의 생명에게 개화결실을 재촉하는 청년의 성급함, 장년기의 성숙함이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노년기의 성숙을 찾는 장년기의 초조함, 망설임, 자기 과시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숙함과 결점을 비극적인 생명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사람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불행한 생명도 길잡이로 삼고 진인들을 거울로 삼아가며 결코 참이 아닌 곳으로 길을 잃거나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미숙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장년기도 아직은 미숙기인 것이다. 청년기는 잎이 돋아나는 계절로 아직 꽃도 없고 열매도 없는 계절이다. 잎이 나야 하는 계절에 꽃이 피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다. 청년기는 청년기를 완수하고 장년기는 장년기를 완수하는 것이 본래의 생명이다.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자기 마음의 발밑을 보면서, 자신의 영혼 속을 꿰뚫어 보면서 장년기의 현재를 완수해 가야 한다. 자만 속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만은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 깃들여 있는 신까지 속이는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성장할 때에도 결코 몇 계단씩 뛰어넘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이나 사람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인생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생명의 성장과 신체의 성장과 더불어서 이루어지는 정신의 성장이자 마음의 성장이며 예도의 완성인 것이다.
또한 그 어떤 길에 있어서나 참다운 예술에 이르는 길은 청년의 혼돈기를 반드시 거치기 때문에 영혼의 참다운 출발점은 장년기부터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장년기는 마음도 정신도 아직 미숙한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영혼은 젖먹이와 같아도 좋은 것이다. 서두를 일도 없으며 서둘러서도 안 된다. 교만해서도 안 되면 스스로 자신을 속여서도 안 된다.


땅을 갈면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의 순환을 단절하는 결과가 된다. 앞의 생명이 다음 생명을 기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들어버린 여름풀 아래는 수많은 작은 동물들이 활동이 있다. 그중에는 풀과 벌레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활동도 있다. 나고 주고 먹고 싸는 활동이 다음 생명과 주위의 생명을 기른다. 따라서 비료는 전혀 필요가 없다.


일체 만물은 서로 차이가 없고 나누어지지 않은 하나의 존재인 동시에 일체 사물이 또한 서로 다른 존재이다. 불일불이, 곧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하나이자 둘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옳으냐, 더 소중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둘 다 아니라고 하여 중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양방이 동시에 하나인 것이다. 한편이 빠진 곳에는 참이 없다. 가짜가 된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일체의 존재가 한 생명인 동시에 거기에는 개개의 차이, 곧 남녀의 차이, 주객의 차이, 주종의 차이, 선생님과 학생의 차이, 하늘과 사람의 차이, 신과 인간의 차이, 의사와 환자의 차이, 농부와 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체임과 동시에 별개인 그것은 스스로 일어서고 스스로 활동하며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하나임과 동시에 개개의 차이가 있음을 온전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불행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영혼은 항상 엉뚱한 것을 좇아 쓸데없이 먼 곳까지 찾아가 방황하고 있다. 신비스럽고 완전한 자신의 생명을 헛되이 연소시키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완수하고자 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에 소홀히하며 본연 그대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기를 피하려고만 하는 안타까운 습성이 아닐 수 없다.
상대 세계에 살며 대립에 떨어지고 소아에 집착하여 하나를 둘로 나누고는 그 중 한쪽에만 사로잡혀 그것만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곳은 한편이 밝으면 반드시 다른 한편은 어두운 어둠의 세계이다.
 


논밭에 풀과 벌레가 번창하면 논밭의 생명도 번창한다. 잡초는 논밭의 양분을 빼앗지 않고 벌레와 함께 오히려 논밭을 기름지게 만든다. 논밭의 생명활동이나 채소의 영위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다. 생명활동에 사람은 손을 댈 수 없기 때문이다. 본연의 영위에 일체를 맡기면 된다. 본리를 영위하는 채소나 논밭의 완전한 작용에 맡기면 된다. 필요가 있어서 논밭의 영위를 훼손 또는 파괴할 경우는 되도록 파손을 줄이도록 한다.

목적하는 채소의 생명이 다른 풀의 생명에 지지 않도록 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채소와 풀이 모두 아직 어린 때는 풀을 뿌리 채 뽑아서 그 자리에 놓아준다. 어린 풀뿌리는 매우 가늘기 때문에 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뽑더라도 채소의 성장을 방해하는 곳에 있는 풀만을 그렇게 하면 그렇지 않은 풀은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다.
풀이 이미 자랐을 경우는 낫으로 베어 그 자리에 놓아준다. 자를 때는 뿌리와 줄기의 접점을 자른다. 그러면 뿌리는 흙속에 그대로 있지만 잘라진 곳에서 싹이나 줄기가 다시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덩굴성으로 인해 키가 큰 채소나 줄기가 딱딱하고 강한 잡곡류가 이미 자랐을 경우는 풀줄기를 낫으로 베어서 그 자리에 놓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름의 왕성한 생명 잔치를 마치고 성장 후반기의 가을로 접어들어 있는 풀은 그대로 두어도 좋은 경우가 많다. 이를 알 수 있는 힘은 수년 동안 계속하여 농사를 짓는 사이에 절로 생기게 된다.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는 될 수 있는 한 풀의 생명도 그 장소에 일생을 완수하고 자연 속에서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가게 맡겨둔다. 종류가 다양한 여러 가지 풀들의 생명이 논밭에서 순환하는 쪽이 흙의 생명을 건강하게 만들며, 거기 있는 채소 또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다.

 

적량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면 지구는 언제나 낙원. 낙원의 모든 보물을 섬기고 아끼는 방법을 모르면 낙원은 더 이상 인간에게 낙원일 수가 없다. 지구상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류가 생명을 완수하고 즐겁게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들이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줄거나 없어지는 일이 없다. 항상 일정량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며 지구 생명과 함께 순환해 갈 수 있다. 지구와 우주는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항상 가득 채워주는 낙원이다. 동시에 일체의 생명들과 함께 사람들의 생명도 천수를 누리며 사람들의 생활은 안정에 이르러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것이다.
 
탐욕에 빠진다거나 제멋대로 군다거나 자기를 잃어버리고 미망 속을 방황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한 무지한 행위를 넘어서 진실을 깨우치고 다른 생명을 받아들이는데 적량을 알고, 일체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며 그들과 조화하는 생활을 통하여 주어진 낙원을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숲이나 산으로부터 나무를 베어내되 지나치는 일이 없으면 자연의 영위 안에서 절로 새로운 나무가 나서 자라므로 산과 숲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나치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 산이 풍요로우면 그곳에 새와 짐승들이 모여 번영한다.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산은 들과 논밭과 사람 사는 마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를 준다. 그러면 지구는 낙원이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물고기를, 산에서는 나무와 새와 짐승을, 산야초를, 초목의 열매를 마구잡이로 따고 캐고 베어내고 잡아서 먹고 저장하고 돈으로 바꾸며 탐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인류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함께 죽여 가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망가뜨려 가는 공멸의 길을 걷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적량을 알고 지나치지 않으면 바다에는 항상 물고기가 가득 차서 번창하고, 야산에는 나무와 풀들이 풍요롭게 우거지고, 논밭에는 벼와 채소가 풍성하게 자라고, 인간의 생명은 평온하게 번영하며 천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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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김장을 마치고 밭에 농사용 비닐을 다 걷지 못했는데, 마른 잡초와 엉켜 엉망이네요.
남은 비닐 걷고, 마른 잡초를 모아 태우고, 내려간 김에 동네 분께 부탁해 밭갈이도 마치고 다시 한 달만에 내려가니 여기저기 푸릇푸릇, 울긋불긋 봄 소식을 전합니다.
 
겨우내 언땅을 견디고 올라온 부추, 쪽파, 민들레를 캐서 바로 무쳐 낸 상큼한 봄 나물!
 
창고 한 구석에 넣어뒀던 감자는 싹이나서, 생각지 않게 고랑을 파 감자를 심기.
 
이렇게 고창에서의 봄은 계속 된다.
 

밭갈아주신 동네분이 겨우내 버틴 쪽파들을 기술좋게 남겨 주셨는데 한달만에 무성하게 자라다
마당 화단에 수선화
2월말 비닐과 잡초를 걷어내고 밭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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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월이 제철인 멸치, 삼천포에 자주 시켜먹는 어가에 올해 잡아올린 멸치와 보리숭어가 있길래 바로 주문했다.
전에 시켜먹던 멸치보다 씨알도 굵고, 싱싱한 멸치! 숭어밤까지 챙겨주신 보리숭어와 제철 회.
 
예전에는 기장이나 남해에 가지 않으면 먹기 어려웠던 멸치회무침을 배송시켜 집에서 만들어 먹는 편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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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사이에 날씨가 따뜻해지니 잠깐 걷힌 먼지를 피해 설봉산 산책. 온 산에 진달래, 개나리가 가득! 설봉호수 근처로 내려오면 몽우리진 벚꽃이 필락말락, 산수유와 매화는 활짝, 간혹 보이는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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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연결, 공감, 친화력이 공생의 길이 있다.


[본문발췌]


우리 안에 잠재한 최선의 본성을 살리기 위한 열쇠는 최악의 본성을 발동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중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적자 생존' 개념은 최악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한 연구는 가장 덩치가 크고 가장 힘세고 가장 비열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 비축된 에너지를 고갈시켜 면역체계를 약화하고 결국 우리는 더 적은  수의 후손을 남기게 된다. 마찬가지로 공격성이 높을수록 비용이 많이 드는데, 싸워서 다치거나 잘못되면 죽을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적자'는 우두머리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더럽고 잔인하고 짧은'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타인이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지식을 세대에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게 해준다. 또 복합적인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문화와 학습의 기반이 되었으며,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왔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가축화징후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는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 (리처드 랭엄, 데일 피터슨, <악마 같은 남성>)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사회연결망은 많은 이유로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술 발전에 필수 요소다. 더 큰 사회연결망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구 집단은 그저 기술의 진보가 멈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단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영장류 학자 토마셀로는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는 침팬지와 아주 흡사한 문화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약 1만 2000년 전 본토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고립되었다. 화석 기록을 보면 이 시기 전까지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더 큰 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집단과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만 년 뒤, 본토 원주민들의 도구 세트는 눈에 띄게 늘어났지만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의 도구 세트는 겨우 몇십 종으로 줄어들었다.


사회연결망이 확장되면 강력한 피드백 순환 고리가 시작 된다.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갖게 된다. 개선된 기술로 더 많은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더 밀도 높은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력이 높을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가설은 첫째, 감정반응이 격하지 않고 관용이 높을수록 자연선택에 유리해졌고 이것이 협력적 의사소통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능력과 연관되며 둘째, 우리의 외형과 생리 작용, 인지능력의 변화가 다른 동물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축화징후와 유사하다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이미 큰 뇌를 지니고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종 조상이 이 자연선택에 성공했다. 자기가축화는 다른 동물 종들에게서도 일어났을 수 있지만, 자기가축화 과정이 시작될 때부터 극도의 자제력을 지녔던 것은 우리 종뿐이었다. 자기가축화 과정을 겪으며 감정반응을 더욱 억제함으로써 신중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한층 더 강화된 것이다. 사람의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사람 사회에서 지배력을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 장악을 막기 위한 용도로 공격성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나눔, 관용, 협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이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사랑이 정체성이 다른 타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공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 외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만 느끼는 친화력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펄럭이는 귀나 얼룩이 있는 털 같은 신체적 변화와는 달리 이 부산물은 실로 가공할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가 위협으로 여겨질 때, 그들을 우리 정신의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는 것이다. 연결감, 공감, 연민이 일어날 수 있던 곳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다정함, 협력,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종 고유의 신경 메커니즘이 닫힐 때, 우리는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이 현대 사회에서 비인간화 경향은 오히려 가파른 속도로 증폭되고 있다. 편견을 표출하던 덩치 큰 집단들이 보복성 비인간화 행태에 동참하며 순식간에 서로를 인간 이하 취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보복적으로 비인간화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 종은 독재자가 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 종은 오로지 사회의 신용을 중시하며,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는 누가 되었건 배척하거나 죽이는, 작은 무리의 수렵채집인으로 살도록 진화했다. 수천 세대에 결쳐서 이 평등주의자 무리들이 전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는 동안 나머지 다른 사람 종은 모두 사라졌다. 독재의 씨앗은 우리가 최초로 농작물을 수확하면서 함께 뿌려졌다. 식량을 생산하고 많은 양을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사회가 성장했다. 사람들은 물자를 독점하기 위해서 협력해야 했고 그 누구도 독재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견제하던 작은 규모의 수렵채집 집단이라는 장치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100명쯤 되는 무리 안에서는 쉽게 존재가 드러나 처벌받았을 독재자들이 익명이 가능해진 큰 무리 속에 숨어 한 사회 내의 하위집단을 선동해서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부족, 왕국, 제국, 민족국가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는 이 방식, 즉 싸워 이긴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세워졌다. 농경 사회는 한 울타리 안에서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게임에 갇히게 되었다.


"너무 민주적일 때 민주주의는 실패한다."고 2016년 언론인 앤드루 설리번은 경고한 바 있다. 관용을 베풀다 못해 스스로가 잠식되기 시작하는  때가 민주주의가 과도해지는 지점이다. "지고한 자유로부터 ... 야만적인 속박이 널리 퍼져" 폭군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국가>에서 말했다. "폭군의 최우선 관심사는 갖가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지도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을 가진 극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이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권력의 집중이 아닌 분산을 추진하고, 유사함이 아닌 다름을 찬양하며,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에 살면서 자기가 속한 집단이 더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다름이 전체의 하나됨을 위협한다고 여긴다면, 다름을 찬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과녁의 원 외곽에 속하는 모든 극단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위협이 되거나 자신들의 신념에 도전하는 이들을 도덕적 관점에서 배제, 즉 비인간화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정치적 신념은 유동적이다. 사람은 중도에서 원 외곽으로 나갈 수도 있고, 다른 도시로 이사한다든가 나이가 든다거나 소득이 변하든가 하는 개인적 겨험이나 정치적 사건을 겪은 뒤 다시 중도로 돌아갈 수도 있다. 원 외곽에 속하는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이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고 더욱더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정치는 더 불안정해진다. 그 위협이 커지면 온건한 중도에 속했던 사람들까지도 극단주의로 밀려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테러, 프랑스혁명, 일본 제국주의까지 권력자는 어떤 형태의 정부로도 비인간화와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들을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뿐이다. 나치 지도자 헤르만 괴링이 뉘른베르크 감옥에서 말했듯이, "지도자는 언제든 국민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아주 쉬운 일이다. 그저 우리가 공격받고 있으며 평화주의자들에게는 당신들이 나라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고 말한 뒤, 애국심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면 된다. 어떤 국가에서든 원리는 동일하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에 국한해서 보자면 시민담론의 부재, 편의주의적 선거구 개편 문제, 초당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호한 의회 규칙(예를 들면 하스터트 규칙), 유권자 통제, 규제 없는 사적 정치자금 모금을 통한 선거 비리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왜 접촉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은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에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에 따르면 더 평화로운 전략이 더 효과적인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폭력 시위는 위협감을 가중시켜 보복성 비인간화의 순환 고리에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다.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가 되었건 극단에 가까운 신봉자일수록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외부자가 그 집회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집회의 '평화로운' 부분임을 기억하자. 평화로운 노력만이 내구력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도시는 서로 다른 배경과 관점 및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섞여 생각을 교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무역로를 따라 형성된 정착 부락이 있었다. 머나먼 곳에서 떠나온 여행자들이 이곳에 모여 생각과 기술, 상품을 나누었다. 현대의 우리에게 이 역할을 하는 곳은 공원, 카페, 극장, 식당 같은 공공장소다. 우리는 이런 장소에서 이웃을 만나 어울리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친해질 수 있다. 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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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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