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9.10.07 언어의 온도 - 이기주
  2. 2019.10.07 말의 품격 - 이기주
  3. 2019.10.02 글의 품격 - 이기주
  4. 2019.10.02 한때 소중했던 것들 - 이기주

대중교통으로 이동을 하는 짧은 순간에도 스마트폰에 집중하며 잠깐의 공백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삶에서 여백과 쉼은 중요한 요소다. 인생의 마침표를 찍기전 단 한번의 쉼표도 없이 숨가쁘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후회스러울까? 잠깐동안 시간의 여백을 즐겨보시길....

 

 

[본문 발췌]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습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릅니다. 온기가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줍니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어떤 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민을 털어내고,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건네는 문장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가짜는 필요 이상으로 화려합니다. 진짜는 안그래요. 진짜 지폐는 자연스러워요.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개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기다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기다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나를 아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세상을 균형 잡힌 눈으로 볼 수 있고 내 상처를 알아야 남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란 것도 나를, 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시작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때론 훨씬 더 중요하다. 당사자에게 알려지는 것과 당사자에게 알리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시작만큼 중요한 게 마무리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 폴 발레리.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 모른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행여 여행길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다 해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방황이 끝날 무렵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훗날 그 방황은 꽤 소중한 여행으로 기억될 테니까.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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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쉽게 내 뱉을 수 있지만, 말이 지닌 무게와 영향력을 생각하면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선인들께서도 말과 관련된 여러 속담을 통해 말의 중요성과 잘 사용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 말이 씨가 된다

 

본문에 나온 한자 言의 풀이를 되새기며 말의 무게와 품격을 생각하며 언행에 주의해야 겠습니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言'에는 묘한 뜻이 숨어 있다. 두二 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품격이 있듯 말에는 나름의 품격이 있다. 그게 바로 언품이다."

 

 

[본문 발췌]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鈍感'에 힘을 뜻하는 역力 자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곰처럼 둔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인이 어떤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지를 지각하고 적절히 둔감하게 대처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둔감력은 무신경이 아닌 복원력에 가깝습니다."

 

역지사지를 실천하려면 내가 서 있는 곳에 잠시 벗어나 상대방이 처한 공간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조금 다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기존의 관점을 내던져 '관점 전환perspective taking'을 시도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삶은 그러한 것 투성이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관점을 다른 방향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건 쉽지 않으므로 관점의 중심을 이동해 비스듬히 기울여봄직하다. 그애야 육안肉眼이 아니라 심안心眼을 부릅뜰 수 있다.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시선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관점을 기울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아니, 그때 비로소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성대중이 당대의 풍속을 엮은 잡록집인 <청성잡기>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부족자 기사번 심무주자 기사황內不足者 其辭煩 心無主者 其辭荒",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이 아니다. 의미 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편견의 감옥이 높고 넓을수록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든다.

 

착한 독설, 건설적인 지적을 하려면 나름의 내공이 필요하다. 사안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통찰은 물론이고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말 속에 배어 있어야 한다. 말 자체는 차갑더라도, 말하는 순간 가슴의 온도만큼은 따뜻해야 한다.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비판의 한자를 들여다보며느 미약하나마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비평할 비批는 손 수手 변에 견줄 비比가 합쳐진 글자다. 사물이나 사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제대로 된 비판이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순간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검지뿐이다.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세 손가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지를 들어야 한다. 타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떳떳한지 족히 세 번은 따져봐야 한다.

 

중국 송나라 때 고서 <통감절요>에 "해납백천 유용내대海納百川 有容乃大"라는 글귀가 있다. 직역하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이 대문에 (바다는)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바다의 본질이 그러하다.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넓고 깊어서가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끌어당겨 제 품속에 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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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공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 수묵화가 김호득의 한 언론 인터뷰 中 

 

여백과 단순함, 힘을 빼고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삶의 이치는 글을 쓸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심지어 운동을 배우기 시작할 때 종종 듣는 "힘을 빼세요!" 까지 이어진다.

 

<논어, 위정편>의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말씀처럼 마음이 하는대로 행동해도 세상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삶일까?

 

 

 

[본문 발췌]

 

문장을 쓰고 매만지는 과정에서 말에 언품言品이 있듯 글에는 문격文格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전을 찾아보면 '격格'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다. 세상 모든 것에는 나름의 격이 있다. 격은 혼자서 인위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다듬어지는 것이다. 문장도 매한가지다. 품격 있는 문장은 제 깊이와 크기를 함부로 뽐내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세월에 실려 글을 읽는 사람의 삶 속으로 퍼져나가거나 돌고돌아 글을 쓴 사람의 삶으로 다시 배어들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또 넓어진다.

 

 

'기억'과 어울리는 동사는 '잊다'가 아니라 '접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잊히는 기억이 있지만,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기억만큼은 종이학처럼 곱게 접힌 채 마음 속 한구석에 보관되니 말이다.

 

 

타인이라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라는 주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기에 남이 있는 것이다.

 

 

한자 '욕慾'을 쪼개보면 욕심의 본질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골짜기 곡谷, 하품 흠欠,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진 형태다. 본래 '흠欠'은 갑골문에서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을 나타냈는데 훗날 의미가 확장되면서 '마시다', '노래하다' 같은 뜻을 지니게 됐다. 깊은 골자기처럼谷 입을 크게 벌려欠 끊임없이 목구멍에 집어넣으려는 마음心이 바로 욕심이다.

 

 

고유한 리듬을 타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과 박자로 적절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똑같은 풍경 앞에서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감정을 느낀다. 눈으로 스며든 하나의 풍경은 각자가 지닌 선입견이나 기분과 맞물려 머리와 가슴에서 순식간에 다른 정경과 상황으로 변모한다. 자연의 풍광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무수한 갈등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진실이야말로 그렇지 않을까. 우린 진실이라는 커다란 거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각자 유리한 입장에서 바라본 뒤 "내가 진실을 알고 있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한다. 깨지기 전 온전한 상태의 거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말이다.

 

 

글도 그림도 힘을 빼고 여백을 만들어야 지면과 화폭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본질적인 재료는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문장을 다 채우기보다 적절하게 비워내고 그 비움의 파편들을 모아서 크기와 높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공간을 지을 때, 문장과 문장 사이로 햇빛과 바람을 불러들일 수 있고 글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잡념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비우고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데 산책만큼 좋은 것도 없다. 산책은 외부의 풍경뿐 아니라 내부의 풍경, 즉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산책은 보행을 통해 이뤄진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몸에 바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음미하다 보면 평소보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천천히 흘려 보내면 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느 것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어느새 내면의 소용돌이도 잦아든다. 잔잔해진 마음 위에 '생각의 집'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새롭고 신선한 생각이 움트기도 한다. 웹페이지를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기 위해 누르는 '새로고침refresh'처럼 말이다.

 

 

우린 종종 별것도 아닌 일을 어렵게 바라보면서 사안의 본질과 멀어진다. 실타래처럼 엉킨 삶의 문제를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면서 외려 더 엉키게 만들어버린다. 뒤엉킨 실뭉치를 풀기 위해선 실이 맨 처음 꼬이기 시작한 지점을 정교하게 찾아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을 솎아내고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우린 질문을 던진다. 질문質問에서 '질質'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는데, 도끼斤로 조개貝를 자르거나 나무를 팰 때 아래에 두는 밑받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질문은 사물과 현상의 본바탕, 즉 근원根源을 묻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근원은 곧 수원水源이다. 흐르는 물줄기가 처음 시작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밀도 있는 질문은 깊고 너른 생각을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왜?'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떨구는 순간 우리 안의 깊은 곳에 생각의 씨앗이 심어진다. 새롭게 움튼 생각이 호기심을 먹고 튼실하게 자라면 사고의 폭과 깊이는 자연스레 확장된다.

 

 

말수가 적음을 뜻하는 한자 '눌訥'은 말하는 사람의 안內에서 말言이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신중하게 말하는 자세를 뜻하기도 한다. 글쓰기에서도 때론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쓰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 문장에 제동을 걸 줄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달필達筆의 능력이 아니라 눌필訥筆의 품격이 아닐까?

 

 

글쓴이의 감정에 떠밀려 정확성과 객관성이 찬밥 신세로 전락한 글은, 독자 입장에선 먼지 낀 거울처럼 흐리터분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초고를 에워싼 불필요한 포장지, 예컨대 과잉 감정 따위를 퇴고 과정에서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연필을 깎아 흑심을 드러내듯, 모호함을 걷어내 글에 담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지향점은 본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문제다. 지향점이 어딘가에 따라 걸음을 옮기는 방법과 속도와 리듬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지향점이 명확하면 나아갈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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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했던 추억, 소중한 사람, 소중한 물건.....

 

소중한 것은 과거형도 있고, 현재와 미래까지 유지되는 것들도 있다. 지금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느끼고 있는지 되짚어보자.

 

 

[본문 발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정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선 입을 닫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잘 말하기 위해선 상대의 가슴에서 드밀고 올라오는 것들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들끓고 있는지, 미소 뒤에 얼마나 슬픈 비명이 감춰져 있는지 헤아려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자기만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빛을 발견하려면 빛만 응시해선 안 되지 않나 싶다. 때론 어둠 속을 걸으면서 손끝으로 어둠을 매만져야 한다. 어둠을 가로지를 때 허공으로 흩어지는 어둠의 파편들을 한데 끌어모아, 현미경 들여다보듯 어둠의 성질을 치밀하게 알아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우린 빛으로 향하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어둠을 직시할 때만 우린 빛을 움켜쥘 수 있다.

 

살아가는 일은, 어떤 면에서 희미하게 사라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과 감정과 관계는 때가 되면 시간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언젠가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가물거리다가 서서히 흐릿해진다. 그 사라짐 속에서 우린 온갖 이별을 경험한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작별이든, 사귐을 끊고 흩어지는 헤어짐이든 사람의 힘으로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이별을 겪는다. 이별은 좀체 학습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별이다. 다만 이별은 헤어져 영원히 잊히는 게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빛나는, 두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엔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뒤섞여 있다. 그 뒤섞임과 혼란 속에서 나만의 시각으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건져올릴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고 믿는다. 우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 때 행복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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