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최근 조국 전 장관 이슈를 되새겨 본다.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의심만으로 야당, 검찰과 언론의 무차별 폭력과 같은 일방적인 뉴스가 정상적인가?

 

진보와 보수, 자유와 평등, 서로 상충되는 다른 생각들..... 다른 이념과 주장이 상존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한다.

 

 

[본문 발췌]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밀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침묵을 강요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산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대립의 존립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폐지한다. 이렇게 해서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중우정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디어 왜곡과 여론조작으로 인한 중우정치의 위험은 우리의 발밑에 똬리를 틀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시민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대안미디어를 활용해 언론권력의 여론조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위험에 또 발뒤꿈치를 물리게 될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는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 처음부터 아예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출발선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부와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경쟁의 규칙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반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경쟁의 규칙 그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반칙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계약과 거래의 어느 한 당사자가 상대방의 시혜 또는 선의에 의존해야 하거나 진정 자유롭게 판단할 수 없을 때, 경쟁이 만들어낸 분배의 격차는 정의로울 수 없다. 모든 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복지는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좁은 의미의 물질적 후생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가리킨다. 안전은 범죄뿐만 아니라 각종 재해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단순한 방어를 넘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항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환경은 단순한 주거환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연생태와 생활환경의 정착을 의미한다.

 

 

홉스의 국가는 좁은 의미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이념형 보수'에게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로크와 밀, 스미스, 루소의 국가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시장형 보수'에게는 자유와 이를 통해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는 물질적 부의 증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주의와 시장형 보수가 손을 잡으면, 우리가 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직접 경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시도했으며, 최근 세계 최고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 나름 성공적으로 안착한 '개발독재'가 된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도 이것이다. 보수정당 - 국가의 공안기관 - 보수 언론 - 재벌대기업 - 보수지식인들이 반세기에 거려 형성한 소위 주류의 지배 카르텔은 이념으로 보면 국가주의와 보수자유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내가 진보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나는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를 원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런 국가에서 개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살려면 우리들 각자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훌륭한 국가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비하하거나 사회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57606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생명이 병들면 자체 면역체계가 작동하여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 사회도 스스로의 자정능력과 균형을 되찾는 회복력이 없다면 시스템이 망가진 것이다.

 

 

[본문 발췌]

 

소유는 우리의 경제를 공전 궤도 안에 붙잡아 두는 중력장이다. 우리는 그 중력장에 붙들려 금융 과잉과 생태적 과다를 불러오는 행동을 일삼는다.

 

산업화 시대의 문명은 쌍둥이 같은 두 가지의 추출 과정에 힘입어 발전했다. 하나는 지구로부터 화석 연료를 추출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로부터 금전적 부를 추출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두 과정은 동등하지 않다. 금전적 추출 과정이 주된 힘이었다. 생물물리학적 폐해는 시스템이 벌인 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을 수 있다. 반면 금전적 부의 추출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추출적 소유는 금전적 목적을 갖는다. 이익을 최대화하는 게 목표다. 생성적 소유는 삶을 위한 목적을 갖는다. 삶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게 목표다.

 

살아 있는 시스템이 균형을 잃으면, 다시 균형을 되찾을 방법을 스스로 찾게 된다. "공정한 시스템일수록 회복력이 강하죠."

 

오늘날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구조는 개인주의, 성장 지향, 최대의 금전적 이익 추구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그러나 새롭게 떠오른 생태적 감수성은 새로운 핵심 가치들을 형성내고 있다. 지속 가능성, 공동체, 충족성 등이 그 가치다. 이러한 가치의 전환은 새로운 종류의 생성적 소유 구조,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경제를 길러낼 온상을 창출해낸다. 휘발성을 띤 금융의 세계에 뿌리를 두는 대신, 이 새로운 경제는 살아 있는 지구, 인간의 공동체를 비옥한 토양으로 삼는다.

 

충분함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충족성sufficiency이다. 토머스 프린슨Thomas Princen의 <충족성의 논리The Logic of Sufficiency>에 등장하는 말이다. 충족성은 산업화 시대의 이상인 효율성efficiency과는 다르다. 효율성은 더 많은 것, 더 빠른 것, 더 싼 것이 언제나 더 좋다는 개념을 바탕에 둔다. 프린슨에 따르면 '어떤 활동을 계속하다 보면, 이만하면 충분하며 더 이상은 지나칠 수 있다고 느끼게 되는 지각'이 바로 충족성이다. 살아 있는 시스템에서 충족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계 안에서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이는 우리 스스로 속도를 늦추고 그저 오늘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대상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볼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충족성이다. 충분히 가졌다는, 만족스럽다는 순수한 느낌 말이다. 충족성의 다른 말은 행복일 터다.

 

공정성, 지속 가능성, 공동체, 이 생성적 경제의 근본 가치 세 가지가 함께 작동한다.

 

생성적 형태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초 요소는 '삶을 위함 목적', '뿌리내린 구성원', '사명 경영 통치제', '이해당사자 금융', '윤리적 네트워크'다.

 

심리학자 팀 캐서Tim Kasser는 사람들이 부의 추구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하면, 실제로는 안녕감이 나빠진다고 말한다. 물질 중심 가치관이 강한 사람은 불안과 우울을 더 많이 느끼며, 알코올이나 약물을 더 많이 복용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문제를 겪기 쉽다. 재산이 늘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진짜 만족감을 주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캐서는 사람들이 안전, 효능감, 소속감, 자율, 확신에 대한 욕구를 타고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와 지위만을 좇으면 이런 것들에서 멀어진다. 다른 이들과 공감을 나누는 대신 경쟁심을 느끼고, 자유로움을 느끼는 대신 압박감과 불안감을 느낀다.

 

행복은 우리가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04811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공간의 물체는 빛과 여백이 있기에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치우침에는 반대의 성질과 양상이 있기에 균형을 맞춰 세상이 돌아간다. 

 

힘들고 어려울 때, 앞이 깜깜하고 갈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 잠시 고요함 속에서 여유를 갖고 세상과 주변을 돌아보면, 그 사이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떠오른다. 고요함 속에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사이 반복적이고 비슷비슷했던 하루하루 일상에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본문 발췌]

 

마음이 고요해지면 예전에는 잘 몰랐던 것들이 밝아지면서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내 안의 소망이라든지, 진정 꿈꾸는 삶의 방향이라든지, 추구하고 싶은 삶의 가치라든지, 혹은 오랫동안 눌러놓았던 감정이나 기억까지 되살아나 그것들로부터의 치유가 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지면 수행자들이 깨닫고 싶어 하는 자기 본성도 밝아지게 됩니다.

 

정말로 마음에 딱 드는 것이 아니라면 여유를 두고 좀 기다리세요. 기다리면서 열심히 찾다 보면 정말로 나에게 딱 맞는 사람, 딱 맞는 일, 딱 맞는 물건이 어느 순간 나타납니다.

 

자기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을 때 자유롭고 행복한지, 어떤 일을 하면 보람을 느끼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데 인지를 못할뿐더러 그 선택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하려고 한다. 더욱이 '남의 나'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통해서 세우려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게 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혹은 배우자가 승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이 결정된다. 자기를 위한 사람을 제대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희생적이면서도 의존적이 되기 쉽다. 게다가 아이나 배우자, 부모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함부로 넘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간섭하고 간섭당하며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행복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감상의 개념으로 본다면 소유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 친구와의 우정, 내 아이의 웃음소리, 음악이 선물하는 평온함,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팀 우승이 다 행복으로 다가옵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행복 역시 우리가 말하는 소확행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삶을 감상할 줄 아는 태도를 갖추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집이나 차, 옷 같은 것도 아주 잠깐 빌려 쓰는 것이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그저 사랑하고 감사해하며 잠시지만 누리세요.

 

내가 지금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하면 인생은 결핍이 되지만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면 인생은 감사함이 됩니다.

 

복잡함 속에서도 단순한 것을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단순한 것이지만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주어진 현실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그 현실에 대한 내 마음의 해석이 가져옵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내 마음의 해석에 따라 괜찮을 수도 있고 엄청난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긍정적으로 해석해보세요.

 

외로움의 정체는 혼자라는 외적 상황보다 혼자여서 문제라는 내면의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결국 상황이 아닌, 그 상황을 해석하는 우리의 방식이 우리를 괴롭혔던 것이다.

 

마음이 괴로울 때, 그 괴로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관찰해보세요. 그러면 그것이 내 생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원래 물 위에 쓴 글씨처럼 잠시 모양을 드러냈다가 자국을 남기지 않고 곧 사라집니다. 이내 사라질 생각을 붙잡고 되새김질하면서 괴로워하지 마세요.

 

텅 빈 큰 공간에 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보통 모양 있는 의자만 의식하고 모양 없는 텅 빈 큰 공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자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텅 빈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마음이라는 텅 빈 공간 안에 한 생각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생각만 의식하고 생각의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그 텅 빈 마음 공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생겼다 사라지는 텅 비고 고요한 마음 공간을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254551

반응형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년을 살아보니 - 김형석  (0) 2019.09.18
하늘 교대(交代)  (0) 2019.09.17
삭발의 의미  (0) 2019.09.16
좋은이별 - 김형경  (0) 2019.09.16
심보선 시집  (0) 2019.09.11
Posted by 소요유+
,

자연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평균을 중심으로 모이고 편향의 극단에서 변혁과 진화가 일어난다. 평균과 편향의 원리가 작동하며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사회도 다양성과 다면성 유지를 위한 편향과 균형의 중도가 공존해야 건강해 진다지만, 작금의 상황은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극단의 편향성을 넘어 거짓과 왜곡 투성이 미디어가 판을 치고 대중은 거기에 부화뇌동하지 않는지 우려된다.

 

오로지 깨어있는 시민의 판단과 시간에 맡길뿐!

 

 

편향 (偏向), 한쪽으로 치우침.

 

(네이버 영어사전) [명사] bias, [동사] be biased, be prejudiced, be lopsided      

편향된 시각으로 바라보다, look at sth from a biased point of view

그들은 편향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They have biased historical awareness.

그 신문의 보도는 편향된 측면이 있다, The newspaper's report is biased in some aspects.

 

(wikipedia) Bias is disproportionate weight in favor of or against an idea or thing, usually in a way that is closed-minded, prejudicial, or unfair. Biases can be innate or learned. People may develop biases for or against an individual, a group, or a belief.[1] In science and engineering, a bias is a systematic error. Statistical biasresults from an unfair sampling of a population, or from an estimation process that does not give accurate results on average.

위키 문서 링크:  https://en.wikipedia.org/wiki/Biashttps://namu.wiki/w/%ED%8E%B8%ED%96%A5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선택 편향의 한 종류.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 쉬운 한마디로 말하면 답정너.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의사결정에서 나타나는 지각적 편향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성립된 행동을 특별한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다른 개념들로 부작위 편향(omission bias),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이 있다. 부작위 편향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는 태도로 복지부동하며 최소한의 행동만 하려는 편향을 말하며, 손실 회피 편향은 같은 양이라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쓰디쓰게 느껴지게 되는 편향을 말한다.

 

선택편향(Selection bias), 표본을 사전 또는 사후 선택함에 따라 통계 분석을 왜곡하는 오류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통계적 유의성의 척도를 실제보다 더 크게 나타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허구적인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선택 편향은 자료를 직접 조작하는 과학적 사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무의식적인 조작이나 관찰 도구의 편향에 따른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적 관찰에서 파란 은하가 빨간 은하보다 더 잘 발견되는데, 대부분의 관찰 도구가 파란색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후원편향(funding bias), 어떤 연구가 그 연구에 비용을 대 주는 후원자 집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가 나오는 경향. 갈수록 많아진다. 기업 친화적인 언론기사, 일본의 지원을 받은 역사왜곡 학술 논문과 서적 등등

 

 

[글과 책 속에 쓰인 '편향'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사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진지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편향은 무척 악명이 높다. 그것은 악의적인 의제, 거짓말, 대중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적 시도와 동의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대해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한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된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한 쌍의 렌즈다. 편향은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 분투하고 개념이나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가치의 척도를 제시한다. 편향을 벗어나려는 행동은 그 자체로 지나친 시도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의 임무는 편향된 시각이 생산한 더 믿을 만하고 유익한 뉴스에 올라타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언론이 칭찬받을 만한 지점은, 사실을 모으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그 사실들의 타당성을 알아내는 (지적 편향을 통해 갈고닦은) 기술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 프래질>

어떤 사람은 체계가 잡힌 곳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욱 지적일 수 있다. 실제로 학교는 체계가 잡히지 않은 곳에서의 능력을 무시하면서 체계가 잡힌 곳에서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선택 편향을 갖는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행운에 속지마라)

결과가 비대칭인 경우 평균값과 중앙값은 전혀 관계가 없다. 현실은 비대칭적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편향이다.  ... 희귀사건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저평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심리적 편향 때문이다. 

"편향에 대한 베팅", 비대칭적 베팅을 통해 희귀 사건으로 부터 이익을 추구하는 것

 

캐시 오닐, <대량살상 수학무기>

빅데이터 경제의 원동력인 수학 모형 프로그램들은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선택에 기반을 둔다. 분명 이런 선택 중 일부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모형은 인간의 편견, 오해, 편향성을 코드화했다. 그리고 이 코드들은 점점 더 우리 삶을 깊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그대로 주입됐다. 수학 모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을 닮았다. 신처럼 불투명해서 이해하기 힘드다. 각 영역의 최고 사제들, 즉 수학자와 컴퓨터 과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내부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평결처럼, 잘못되거나 유해한 결정을 내릴지라도 반박하거나 수정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부자는 더욱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경향이 있다.

인종차별 모형은 무계획적인 데이터 수집과 허위상관spurious correlation에 의해 작동하고, 제도적 불공평institutional inequity에 의해 강화되며,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의해 오염된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사람들이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할 때면 가끔 안심complacency과 편향bias이라는 두 가지 인지적 질환에 걸리곤 한다. 안심은 잠재적인 위험이나 결함을 모르고 지나치게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는 경향을 말하고, 편향은 자동화를 맹신하는 경향을 뜻한다. 이 두 질환은 우리가 화이트헤드처럼 고민해보지 않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때 걸릴 수 있는 덫이다. 컴퓨터가 그릇된 안정감을 줄 때 우리는 안심한다. 우리는 기계가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어떠한 도전도 해결해주리라고 확신하고 일에 관심을 쏟지 않게 된다. 우리는 맡은 일 전부 아니면 소프트웨어가 처리해주는 일의 일부에 무관심해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신호들을 놓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렇게 안심했다. 이메일이나 문서 편집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때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이 켜져 있으면 써놓은 글을 꼼꼼하게 교정 보지 않는다. 

자동화에 대한 안심과 편향 모두 우리의 제한적 집중력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안심하려는 경향은 우리가 우리 주변과 꾸준히 상호작용하지 않아도 될 때 집중력과 자각력이 얼마나 쉽게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편향적으로 정보를 평가하고 무게를 재려는 성향은, 우리가 선별적으로 집중하고, 잘못된 믿음이나 심지어 유용할 것 같은 프롬프트의 등장만으로도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안심과 편향은 자동화된 시스템의 질과 신뢰성이 높아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여러 실험 결과 들을 보면, 우리는 빈번하게 오류를 일으키는 시스템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다. 우리는 주변 환경을 계속 의식하고, 다양한 출처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예의주시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어쩌다가 한번 고장이 나거나 오류를 일으키는 정도로 높은 신뢰성을 보일 때 우리는 게을러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시스템이 결코 틀리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시작한다.

자동화로 인한 안심과 편향에 쉽게 빠져드는 현상은 자동화만 믿던 우리가 어떻게 해서 과실과 태만이라는 그릇된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부정확하거나 불완전한 정보를 수용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또는 예의주시했어야 하는 것들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컴퓨터에 대한 의존이 자각력과 주의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은 또 다른 문제로도 이어진다. 자동화는 우리를 행위자에서 관찰자로 전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조종사가 조종간을 조작하지 않고 스크린만을 응시하게 되는 식이다. 그런 변화로 우리는 전보다 더 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전문지식을 배우고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은 손상될 수도 있다. 우리의 일 처리 능력을 높여주는지 낮추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자동화는 장기적으로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기술력을 약화시키거나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방해할지 모른다.

 

네이트 실버, <신호와 소음>

기상 예측 민간 기업들은 대부분 편향을 가지고 있다. 의도적으로 설정된 편향이다. 특히 그들은 실제보다 눈이나 비가 더 많이 내릴 거라 예측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상 전문가들은 이를 '축축한 편향wet bias'이라 부른다. 이 편향은 정부기관이 발표한 원자료에서 더 멀리 벗어날수록, 그리고 소비자에게 더 밀착하는 예측을 할수록, 점점 심해진다. 예측은 이처럼 정확성을 축소함으로써 '가치 창출'을 늘린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저 사람이 저걸 믿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의견과 미적 취향에 너그러워야 합니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재고하고 늘 회의하고 의심해보는 사람, 그래서 결국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들을 끊임없이 포용하고 들어보려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셜미디어 친구에는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도 포함돼 있어야 합니다. 나의 트위터 팔로잉을 들여다봤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는 건, 나는 듣고 싶은 얘기만 듣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러분의 트위터 타임라인은 여러분이 디자인한 세상, 조작한 세상이거든요. 여러분이 조작한 그 세상이 편향된 세상이 되지 않도록, 반대 의견까지도 듣는 태도를 만들어갑시다.

 

유리 브람, <통계적으로 생각하기>

선택 편향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비무작위 표본을 무작위 표본처럼 대할 때 발생하게 됩니다. 어떤 데이터의 경우에는 당신의 표본에 들어 있는 특정 데이터가 다른 데이터값에 의존하여 그 스스로를 편향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재선에 대한 유선 여론조사가 실제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예측하게 되었고, 미국 통계청의 인구조사가 방해받기도 합니다. 선택 편향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역시 상사들이 부하 직원들로부터 올바른 피드백을 받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고, 우리가 매우 인상적인 사람들이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잘 기억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죠. 또한 모든 자유 공연 참가자들은 자신이 가장 좋은 연주를 했다고 착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제한된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좋은 통계적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21세기 현재에는 너무도 많은 정보로 인해 어떻게 정보를 정리해야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바뀌었죠. 특히나 빠른 인터넷의 보급과 발전으로 우리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과학, 의학, 경제, 정치 분야에서 많은 통계적 데이터들과 이론들을 접해왔고,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통계학을 사용해왔습니다 이 중 많은 정보들은 그 목적에 알맞게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많은 정보들이 과장, 왜곡, 편향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새뮤얼 아브스만, <지식의 반감기>

우리가 자신의 뇌, 심리 등의 이상한 점을 안다면 인간은 스스로 내린 결정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인간이 새로운 지식과 사실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쓰는 방법이 완전히 합리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이러한 편향 속에서 규칙성을 찾을 수 있고 어떤 예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잘못되고 낡은 사실을 믿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캐서린 슐츠Kathryn Schulz는 <오류의 인문학Being Wrong>에서 우리가 오류를 저지르는 이유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그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진실을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가끔 이유가 되기도 하고, 반대되는 견해 때문이기도 하다(책에서 슐츠는 어떤 관점에 집착하는 확실한 방법을 제시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반대되는 입장을 주장하라고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저 내가 '지식의 관성'이라고 명명한 현상이 어느 정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식의 관성이란 어떤 지식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다음에도 이 낡은 지식에 매달리는 경향을 말한다. 지식의 관성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나는데,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진화심리학으로 이들을 설명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이런저런 편향을 감추기는커녕 이들을 포용하고, 심지어 과거에는 결함으로 비치던 것들의 진화적 이익을 찾아내려 한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 시대 같은 때에 그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엔 난센스다.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그런 주제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다. 그저 어느 쪽을 편들고 어떤 접근법을 따르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편향을 의식하면 할수록, 자신의 미학적 지적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

 

구본권, <로봇의 시대 인간의 일>

의식 현상에 대해 연구해온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최근 다양한 관측 도구와 실험 결과를 통해 의식의 핵심이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인간의 의식은 오랜 진화 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비정상적 요인에 영향을 받았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편향성을 형성했다. 인공지능은 사람의 의식처럼 비합리적 편향을 내재할 이유가 없으며, 감정에 휩싸여 비이성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판단을 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감정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것은 분노와 모욕을 참지 못한 충동적 살인일 수도 있고 목숨을 내던지는 살신성인의 결단일 수도 있다. 결함투성이이자 통제가 어려운 인간의 감정은 인간을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핵심적 특징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자연과학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자신의 연구 주제를 발빠르게 확장하여 사회과학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 결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간격을 잇는 4개의 교량이 생겼다. 첫 번째는 인지심리학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인지뇌과학 또는 뇌과학으로서 이 분야의 종사자들은 정신 활동의 물리적 기초를 분석하고 의식적 사고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인간행동유전학인데 이 분야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는 하지만 인간 행동의 유전적 기초 - 예컨대, 유전자가 정신 발달에 어떤 편향적인 영향을 주는지? - 를 밝히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교량은 진화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은 진화생물학의 잡종 자손으로서 사회 행동의 유전적 기원을 설명하는 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네 번째는 환경과학이다. 이 분야와 사회 이론과의 관계는 일견 희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연환경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해 온 극장이다. 또한 인간의 생리와 행동은 그 환경에 정교하게 적응되어 있다. 인간 생물학이나 사회과학도 이러한 틀을 고려하지 않는 한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하나의 사건을 공격자, 피해자, 중립적 제삼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각각 서사가 달라지는 현상은 폭력의 삼각형에서 겹쳐진 심리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도덕화 간극(Mralization Gap)이라고 부르자.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self-serving bias)이라는 더 큰 현상의 일부이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한다. '좋다'는 것은 효율적이고 능력 있고 가치 있고 유능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착하고 정직하고 너그럽고 이타적이라는 뜻일 수 도 있다. 인간에게 자신을 긍정적으로 내보이려는 동기가 있다는 것은 20세기 사회 심리학의 중요한 발견이었다. ... 자기 위주 편향의 대표적인 현상은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평가를 조작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행동을 잘 통제한다는 인상을 지키려고 애쓰는 성향이다. 레이크 워비건 효과(Lake Wobegon Effect)도 있다. (작가 개리슨 케일러가 창조한 가상의 마을 이름으로, 그곳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평균이상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바람직한 재능과 특징에 있어서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평가하는 성향을 말한다. 자기 위주 편향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치르는 진화의 대가이다. 우리가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서로 자석처럼 끌리는 로봇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사회적, 도덕적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기와 공감을, 감사와 신뢰를, 외로움과 죄책감을, 질투와 분노를 느낀다. 이런 감정들이 내면의 규제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생활의 대가로 고통 받지 않으면서도, 즉 사기꾼이나 무임승차자에게 착취당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생활의 이득을 - 상호 교환과 협동을 -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협동할 것 같은 사람에게 공감, 신뢰, 감사를 느끼고, 우리도 그에게 협동으로 보답한다. 반면 우리를 속일 것 같은 사람에게는 화내고, 배척하고, 협동을 무르고, 처벌한다. 개인의 선행 수준을 결정하는 저울의 양쪽에는 협동자라는 평판에 따르는 존경, 그리고 은밀한 속임수로 얻은 부정한 이득이 놓여 있다. 사회 집단은 다양한 수준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지닌 협력자들의 시장이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들통 나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너그러움과 신뢰도를 실제보다 높게 선전한다. 이런 도덕화 간극 때문에, 피해자와 가해자는 보상 협상에서 서로 상보적인 전략을 펼친다. 불법 행위를 두고 법적에서 맞붙은 변호사들처럼, 사회적 원고는 피고의 행동이 고의였음을 강조한다. 적어도 불량할 정도로 무심한 태도였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원고의 고통과 괴로움을 강조한다. 대조적으로, 사회적 피고는 자기 행동의 합리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원고의 고통과 괴로움을 최소화한다. 이렇게 경쟁하는 관점들이 보상 협상을 결정지으며, 구경꾼들의 공감과 믿음직한 상호 교환자로서의 평판을 더 많이 얻으려는 경쟁을 펼친다. 우리가 자신의 행동과 남들의 행동을 다르게 평가하는 것은 자기 위주 편향의 교과서적 사례이다.

 

권오상, <돈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선택의 순간, 인간의 비합리성이 고개를 든다. 비합리적인 심리적 편향들...

 

권용진, <인공지능 투자가 퀀트>

심리적 편향과 오류는 지능이나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비슷하게 일어난다. 제임스메디슨대학의 리처드 웨스트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논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심리적 편향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아무리 객관적이고 침착한 투자가라 해도 인간인 이상 심리적 편향에 노출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투자 편향을 배제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거래하고 위험 관리하는 알고리즘을 만든 다음 그대로 따른다면 일반인도 충분히 퀀트 투자로 수익을 낼 수 있다.

 

로버트 해그스트롬, <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우리 문화에는 변이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는 강한 편향이 존재한다. 대신 우리는 중심값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여러 현실 문제에서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보통 사람들처럼 전문가들도 사고과정의 결함을 고스란히 가진 것처럼 보였다. 특히 전문가들은 과신하고, 사후확신 편향을 갖고, 자기가 가진 신념체계를 방어하고, 베이즈 추론과정이 결여된 상태였다. 이런 심리적 편견들로 인해 시스템1 사고가 문제를 일으킨다. 사람들은 타고난 편견과 휴리스틱 때문에 사고과정에 오류가 생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급하고 직관적으로 의사결정한다. 하지만 시스템2 사고를 통해서만 판단을 잘못 내렸는지 점검할 수 있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자신의 감수성과 안목, 취향을 좋게 평가하고 상대방의 그것은 좋지 않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편향성을 직시하고 서로의 취향을 좀더 존중하는 데 이르면 우리의 취향은 더욱 발달하고 서로의 관계는 보다 깊어질 수 있다. 다음은 이명옥의 <인생, 그림 앞에 서다>에서 읽은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취향에 관한 철학이다. '자신의 취향은 동일한 취향과 접촉하기 때문에 함양하는 것이고, 또한 이질적인 취향과 만나서 계발되는 것이며, 높은 취향에 매료되기 때문에 향상심이 생기는 것이다. 세상 운명의 7할 이상은 이 취향의 발달로 인한 것이므로, 취향이 고립돼 말라죽게 된다면 세계의 진보는 멈추게 될 것이다.'

 

임웅, <새롭지 않은 새로움에게 새로움의 길을 묻다>

다니엘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판단과 결정은 엄밀한 논리적 규칙에 근거하는 대신에, 상황이나 맥락에 좌우되어 어림잡아 혹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는 다분히 실용적인 사고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인간의 이러한 사고과정을 휴리스틱스heuristics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 이들이 제시하는 휴리스틱스의 유형들, 즉 대표성 유리스틱스representative heuristics나 가용성 휴리스틱스availibility heuristics 등은 인간의 의사결정이 우리의 기대만큼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 대표성 휴리스틱스는 판단하고자 하는 대상이 특정한 모집단의 원형을 닮아 있으면 모집단의 특성만을 판단의 단서로 사용하는 경향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표성을 갖는 모집단의 특성 이외에 다른 중요한 판단의 근거들은 무시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 가용성 휴리스틱스란 접근 빈도가 높은 범주에 대한 인지 편향성을 의미한다.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시스템1은 정보 처리에 도움이 되는 인지적 편안함을 만들어주지만 신뢰할 수 없는 정보일 때 경고 신호를 보내주지는 않는다. 직관적 대답은 기술이나 휴리스틱 중 무엇에서 유래했는지 상관없이 머릿속에 빠르고 믿을 만하게 떠오른다. 이럴때 시스템2가 속도를 낮추고 단독으로 대답을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시스템2는 게으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기를 주저한다.

이럴 경우 시스템1이 내놓은 많은 제안은 최소한의 확인만 거친 후 무조건 승인된다. 시스템1이 오류와 편향의 원인이라는 나쁜 평판을 듣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무엇보다 WYSIATI, 강도 짝짓기, 연상적 정합성을 포함한 세스팀1의 기능정 특징은 닻 내리기, 비퇴행적 예상, 과신을 비롯한 수많은 다른 예상 가능한 편향과 인지적 착각을 야기한다.

(WYSIATI : What You See Is All There Is,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

확인 편향 오류에 빠지면, 우리는 확률 이론이 성공적으로 적용된 계임을 예로 들어 이것을 일반화시키려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삶에서 행운이 차지하는 역할은 일반적으로 과소평가하지만, 확률 게임에서는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요즘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원칙과 방향에 대한 질문'은 없다고 한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 달에 얼마 벌고 얼마를 쓰느냐, 어디 부동산을 언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생각만 꽉 차 있고 손익의 대차대조표만 중요할 뿐 삶을 이끌 원칙과 가치의 화살표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한다. 나는 이런 소문들을 믿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좁잡한 울타리, 개구리 우물, 작은 세계의 수인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세대와도 다른, 어쩌면 단군 이래 최고의 개인주의적 편향을 가진 세대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개인주의가 공동체와 정의, 공존과 연민의 윤리를 완벽하게 시궁창으로 내던진 몰가치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운 선택의 시대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라는 질문을 그들의 모든 중요한 선택과 행위의 배경에 깔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시, <결정적 순간에 써먹는 선택의 기술>

현상유지 편향(status quo bias), 손실을 피하려고 현재 상황에 만족

사람들은 보통 현재 상황을 변화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현재 상황에 만족해 버린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