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재미있게 일하고, 매사에 감사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소박하게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이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본문발췌]

"세상이 복잡한가, 머릿속이 복잡한가?"
세상이 참 어렵고 복잡해졌다고들 말합니다. 세상을 탓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에 제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대낮에도 세상이 깜깜하게만 느껴진 이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복잡다단한 세상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 속에서 희망의 요소들을 찾아 하나하나 적어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니 반드시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중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과 눈앞에 바로 보이기에 빨리 얻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 웃음, 사랑, 행복이 전자라면 돈, 명예, 권력 같은 것이 후자일 듯합니다. 그동안 미뤄왔지만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 이제 중요한 것 먼저 선택합시다. 우리의 인생은 매우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생김새나 겉모습, 일상적인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군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말입니다. 정답이 있을까요? 아마도 명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가치가 다 똑같지 다를리 있겠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사람마다 보험료가 달리 책정되듯이 사회적 가치면에서 판단하면 서로 가치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가격이 다른 것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을 잃거나 갈등에 시달리곤 합니다.
열등감이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들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갈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적 가격이 낮다고 여기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곤 합니다. 권력, 명예, 재물, 인물, 학연, 지연, 가족 등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낮춰 보고 주눅이 들거나 보잘것없다고 지탄하곤 합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하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끌고 가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사실 열등감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두 가지 모순된 욕구를 한꺼번에 채우려는 데서 커지는 것이지요. 공부는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 노력도 안 하고 성공하려는 것, 잘 웃지 않으면서 푸근한 인상을 주려는 것,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으려는 것, 밥은 많이 먹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허리둘레 줄어들길 바라는 것, 이런 게 바로 욕심입니다.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열등감에는 예방주사가 없습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무엇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는 것은 스스로의 목에 목걸이(강아지 목걸이)를 채우고 슬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목걸이에 끌려다니겠습니까?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엄함을 인정한, 자존심 있는 사랍입니다. 반면, 세상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 든 사람입니다.
 
 

행복의 기준
우리를 늘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명예, 권력, 학연, 지연, 인맥, 비싼 집과 좋은 자동차, 내 뜻에 잘 따르는 가족과 내가 원하는 것들에 끌려다니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 100개 중에 한두 개만 이루어져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90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갈구해서 얻어지길 기대한다면 그게 바로 세상에 끌려다닌 것입니다.
돈, 명예, 권력, 비싼 집과 좋은 차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주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것들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며 인생의 가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원하는 걸 갖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나보다 많이 갖거나 크게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속앓이를 합니다.
세상은 뱃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며 산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지만, 헤쳐나가야 할 미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할 우리의 것입니다.
 
 

당장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 있고 지금 당장 천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가능성을 예견하기에 오늘의 고통과 힘겨움과 갈등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풀어 말하면 '행복'이란 낱말이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살 만한 것은 자신의 일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열정은 자기 인생만 바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세상을 바꾸며,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열정의 놀라운 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열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열정은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교훈 중에 사람이 죽어 신에게 불려가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결정하는 질문 두 마디가 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남에게 기쁨을 주었는가?"
스스로 기쁘고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람 있게 살고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열정을 바치는 것입니다. 열정은 곧 창의력이고 지혜이며 기쁨이자 보람이고 희망입니다.
어느 기업 광고에 인생을 80년 산다면 26년 잠자고 21년 일하고 9년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뿐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화내는 데 5년, 기다리는 데 3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기쁨의 시간이 곧 웃는 시간일 텐데 팔십 평생 겨우 20일 정도만 기뻐하는 건 자신의 존재가치를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화내는 시간을 반쯤 뚝 잘라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 15초만 웃어도 수명을 이틀이나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니라 팔십 평생을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줄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내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잠시 기쁠 뿐입니다.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고 명예가 커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행복의 제조자인 자신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붙잡고 더디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세월을 더디 가게 하는 묘책입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합니다. 두 번 살 수 없습니다. 두번 살 수만 있다면 한 번은 연습처럼 살겠지만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니 살아 있는 동안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기에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인 듯 최선을 다해 살고 지금이 생애 최고의 순간인 듯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나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우주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기쁘게 웃을 수 있지만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여기면 세상에 즐겁고 기쁜 일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누리고 불행은 버리는 것입니다.
   소망은 좇는 것이고 원망은 잊는 것입니다.
   기쁨은 찾는 것이고 슬픔은 견디는 것입니다.
   건강은 지키는 것이고 병마는 벗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끓이는 것이고 미움은 삭이는 것입니다.
   가족은 살피는 것이고 이웃은 어울리는 것입니다.
   자유는 즐기는 것이고 속박은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고 울음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숨을 쉬지 않고 참아보면 그제야 비로소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숨을 쉬려고 노력했습니까? 훗날 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숨을 쉴 때야 비로소 숨 쉬는 게 참으로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미 행복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일구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지 않고 숨이 끊기지 않는 기적을 매일매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나지 말고 20초 정도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읊조리듯 말하십시오.
  첫째, 오늘도 살아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둘째, 오늘 하루도 즐겁게 웃으며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셋째, 오늘 하루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왜 사십니까? 불행하기 위해, 슬퍼하기 위해, 아프기 위해, 고통스럽기 위해, 짜증내기 위해 살아서는 당연히 안 됩니다. 행복하고 즐겁게 웃고 즐기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그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은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밖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행복을 돈, 권력, 명예, 학벌, 큰 아파트, 고급 승용차, 능력있는 가족,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자녀 등 대체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행복은 정말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내 가슴에, 내 영혼에, 오늘에, 지금 바로 내 옆에 가까이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거나 황홀하거나 아름답거나 짜릿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은 지금 내 마음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숨을 쉬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숨 쉬며 살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지금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으로 가면서 당신이 무엇을 가져갈까요? 따라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과연 가져갈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가져갈 수 없는 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사용하고 돌려줘야 할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평균 수명만 믿고 자신이 80세까지는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크나큰 오산입니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고 보장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80세 전에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내 인생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행복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영혼
내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얽매여 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 뿐이어서 저 홀로 설 수 없고 페달을 돌려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면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고 뒤를 잡아주던 사람이 손을 놓아도 놓은 줄 모르면 한참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달린다는 걸 아는 순간 놀라 넘어지게 됩니다. 다치는 게 두려워 계속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두 바퀴를 굴리며 저 너른 세상을 달려가려면 자기 인생은 자신이 조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적절히 돌려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많이 돌려서도 적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몸과 자전거가 균형을 유지할 만큼만 돌려야 합니다.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힘들 때는 힘든 쪽으로 집중하고, 고통스러울 땐 고통스러운 쪽을 살피고, 사랑할 때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시험 볼 때는 공부에 치중하고, 병들었을 때는 치료에 정성을 다하고, 갈등에 싸였을 때는 얽힌 타래를 풀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자존심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도 귀하게 여기고 행하는 것입니다. 나만 귀하다고 여기는 생각과 행실인 자만심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사랑, 용서, 베풂, 희망이 모이면 곧 자존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사람다운 정신이 자존심입니다.
 
 

색안경 낀 사람들의 세상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검거나 푸르거나 붉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세상을 보려면 색안경을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법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로 '더불어 사랑' 때문인 듯합니다. '더불어 사랑'은 나를 사랑하듯 나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신입니다.
보시란 주기만 하고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풂이나 봉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유해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미생물도 많습니다. 사람에게 유익한 미생물만 있으면 좋을것 같지만 유해한 미생물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물며 사람임에야!
 

 
인간의 향기
자비는 다른 이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심성이고, 자애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건 자애이고, 아픈 이를 조건 없이 보살피는 건 자비입니다. 바로 자애와 자비를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고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꽃이 아무리 어여뻐도 질 때는 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질 때가 훨씬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지는 사람의 특성은 곧 사랑과 베풂입니다. '사람답다'는 말은 배려, 사랑, 용서, 베풂을 뜻합니다.
사랑과 베풂은 단순히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결코 주는 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받는 이가 있어 주는 이가 더욱 행복에 겹고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복은 받는 것이고 덕은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풂의 진정한 의미는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거나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덕을 베푸는 게 아니라 '거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옛말에 복을 받으려면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온도는 섭씨 100도가 넘어 자칫 델 수도 있지만 덕의 온도는 36.5도로 사람의 온기와 같다고 합니다. 차갑거나 뜨겁지 않아 누구라도 끌어안을 수 있고 누구에게 주어도 불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고 간 사랑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베풂은 너그러움이고 너그러움은 곧 자유로움입니다. 반대로 받기만을 원함은 욕심이고 욕심은 곧 구속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인들 구속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베풀지 않고 받기만을 갈구하면 스스로의 영혼을 구속하는 셈이 됩니다. 베푼 사람은 승리자가 되고 빼앗은 사람은 패자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더 깊이 세상을 살펴보면 부드러운 것이 강한 걸 이기고 기쁨이 슬픔을 이기고 희망이 좌절을 이기고 베풂이 욕심을 이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마중물
인생이 힘에 부칠 때는 스스로 자신을 살피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동반자가 필요하고 스승, 벗, 이웃, 동료를 비롯한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의 성공사례를 살펴보면 혼자서 해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가 도왔거나 격려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여럿이 가라." - 아프리카 속담
인생을 잘 살려면, 첫째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야 하고, 둘째 어려울 때 함께할 수 있는 벗을 사귀어야 하며, 셋째 다사로운 동반자를 두고, 넷째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바쳐야 합니다.
얼음은 차가운 물을 부으면 잘 녹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야 잘 녹습니다. 뜨거운 물은 사랑이고 배려이고 베풂이고 나눔이고 어울림이고 동행이고 감사이고 기쁨입니다. 뜨거운 물이 될 수 있어야 진정한 벗을 얻습니다.
 

 
억겁의 우연끝에 만난 살람들
그렇게 고귀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세상이 존재하려면 남녀가 만나고 암술과 수술이 만나고 암컷과 수컷이 만나고 음과 양이 만나고 햇빛, 물, 강, 바다 풀, 나무 흙, 미생물이 얽히고 설켜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어울려야 합니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도 곱고 뜨거워서 인류가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귀한 가치로 존재할 것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분별심 때문에 스스로 악연의 싹을 틔운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감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디어졌더라도 두 사람의 만남을 선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뢰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미움을 포기하는 법
용서는 이러저러한 조건 없이 그냥 관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입니다. 육신의 강자는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정신의 강자는 용서로 해결하고 웃습니다. 용서는 내 기쁨이 분명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쏜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와 꽂히는 독 묻은 화살 같아서 나를 해코지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용서는 내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가슴을 주욱 펴게 하며 나를 향기나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애써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미움을 포기할 수는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듯 버리십시오. 나를 괴롭히고 마음 상하게 한 사람이 곧 내 영혼의 쓰레기를 청소하게 해준 셈이니 도리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에 박힌 가시
미움, 분노, 질시, 화, 슬픔, 괴로움은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습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눈에 보여 쉽게 뽑을 수 있지만 영혼에 박힌 큰 가시는 보이지 않아 자신을 끝없이 괴롭힙니다. 일이 잘못되어 날카로운 송곳이 몸에 박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박힌 가시를 굳이 뽑아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100세가 된 현역 최고령 한의사의 무병장수 비결은  첫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둘째, 남의 허물을 잊고 용서하며 셋째, 소식하고 운동하라.
남의 허물을 잊어버리거나 그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박힌 가시를 제거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베풂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나누어주는 묘약입니다.
 
 

용서의 위대함
화, 분노, 미움, 걱정 따위는 쌓아두지 마십시오. 쌓아둘수록 자신의 상처가 그만큼 깊어질 뿐입니다. 원망, 핑계, 가슴앓이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가슴에 맺히면 결국 그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핑계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핑계를 대어 잠시,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겠지만 화평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건 사기이지만 자신을 속이는 건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날
욕심을 채우고 또 채우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며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나무 마디처럼 온갖 고뇌를 딛고 자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 어찌 고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고뇌는 우리의 멘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뇌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미래를 개척해 주며 우리에게 살아갈 만한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바람을 마주 보고 맞으면 역풍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이 된다"는 어느 대기업 사장의 말처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바뀌고 상대가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씩 바뀌기를 바랍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그리도 평온한 것을,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묶어놓고 질질 끌려다녔기에 분별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돈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명예를 잃으면 아주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꿈에서 깨면 그 모두가 거짓이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욕심이 과한 것도 환몽이고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슬픔이 없기를 바라는 것도 환몽입니다. 꿈에서 탁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실제 상황에 닥치면 깨어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꿈속을 헤매며 두려워하기보다는 탁 깨어나 환몽임을 아는 게 행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늘 고통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사람에게 강한 생명력을 줍니다.
 
 

소박하게 산다는 것
<맹자>를  보면 품격 있게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어짊의 실마리로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
   둘째, 의로움의 실마리로 세상살이를 하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
   셋째, 예의의 실마리로 사양할 줄 알고 늘 겸손한 태도를 갖는 사양지심.
   넷째, 지혜의 실마리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
남을 측은히 여기는 어짊이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로움, 사양하고 겸손한 예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 가운데 그 어디에도 혼자 누리고 많이 갖고 받으려고만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법륜 스님이 사람들에게 일러준 행복하게 사는 삶의 자세 일곱가지
  첫째, 웃으며 즐겁게 살자.
  둘째, 소박하게 살자. 내가 먼저 절약해야 합니다. 소박하게 먹어 몸을 가볍게 하고, 소박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편케 해야 합니다.
  셋째, 나누며 살자.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합니다. 복을 지어야 덕을 보게 됩니다. 나누면 나와 이웃과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넷째, 감사할 줄 알자.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다섯째, 희망을 갖자.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느냐고 물으면 '물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봄이 온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사람이 가진 최고의 자산입니다.
  여섯째,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자.
  일곱째, 보람 있게 살자. 웃고 즐기고 건강하게 살며 남을 기쁘게 하면 절로 보람 있게 살게 됩니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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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옮겨 담은 화폭을 방안에서 보는 즐거움, 여유로운 삶.


[본문발췌]

'읽고 생각하는 즐거움' 못지않게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은 높고 높아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초목이 살고, 뭇 생명이 자리 잡고, 새와 짐승이 무리 지어 살고, 달리는 짐승이 쉬며, 보배로운 것들이 번성한다. 기이하게도 만물을 키워내면서도 지치지 않고 사방으로 뻗쳐 끝이 없도다. 
물이라는 것은 군자의 덕에 비유된다. 두루두루 흐르고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으니 덕을 닮았고, 이르면 생명을 살려내니 어짊을 닮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순리대로 하니 의로움을 닮았다. 얕으면 흐르다 깊으면 헤아릴 수 없게 되니 지혜로움을 닮았고, 낭떠러지에서 주저 없이 흐르니 용기를 닮았고, 가는 물줄기로 구석진 곳까지 이르니 성찰함을 닮았고, 오물을 받아도 사양하지 않으니 포용을 닮았고, 더러운 곳에 들어가 맑게 하여 나오니 세상을 교화시키는 것을 닮았고.....' 
- 유향, <설원> "잡언" 편 중에서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노자, <노자>, 제 8장 중에서


'숲과 못으로 들어가 너른 들에 살며 고요한 곳에서 낚시하고 무슨 일도 일삼지 않을 뿐이다. 이는 강해의 사람이며 세속을 피한 사람이니 여유로운 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 <장자> "각의" 편 중에서


중국 산수화의 흐름,
송대의 산수화는 화원 화가들에 의해 주로 그려지면서 경외의 존재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전이되었고, 이와 함께 문인의 뜻을 그리는 문인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원대에 들어서는 서예적 필법을 담은 문인산수화가 발전했고 명대에 들면 송대의 화원화풍을 계승하는 절파와 원대 문인화의 기법을 계승하는 오파의 두 개 화파가 전개되면서 이들은 각각 이상공간과 경험공간을 그리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청대에는 오파 계열의 문인산수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여말선초에 주로 그려지고 감상된 산수화 즉 청산백운, 사시팔경, 소상팔경, 몽유도원 등은 실제 산수 공간에서 초연히 벗어난 초월의 시간, 영원한 질서 속에 드러나는 순간을 관념화시킨 산수 이미지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말선초의 문사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산수의 참된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산수의 참된 이미지는 청산백운, 소상팔경, 사시팔경의 대표경으로 그들 관념 속에 정형화되었다. 이는 새 왕조의 주역이 누린 산수관이었다. 이러한 산수관은 그들의 낙관적 현실관과 부합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수를 현실로 끌어들여 혼연히 향유할 수 있었다.
  

해 비추는 향로봉에 붉은 안개 피어 오르고 / 멀리 보니 폭포수가 시내 앞에 걸려 있네 / 나는 듯 쏟아지는 삼천 척의 물줄기 /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하수인가 - 이백의 시 <여산관폭>


조선 중기의 산수 인물도들이 기려, 어부, 수면, 관폭 등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무장된 은자의 고차원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하였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다.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가 철리적 사유를 추구하였다면, 조선 후기의 시의도는 감상적 정감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철리적 사유가 보편적 당위성의 원칙을 중시한다면, 감상적 정감의 표현은 개인적 경험을 기억시켜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산수 표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산수인물도류에는 강호, 폭포, 등의 대상 산수가 암시적, 상징적으로 간솔하게 표현되어 산수화 속 인물은 산수경 자체보다 더욱 높은 사유 세계를 누리는 것으로 펴현된다. 그러나 시의도의 산수 속에는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 매우 섬세하게 처리된다. 그 지점에는 꽃이 피거나 지고, 낙엽이 지거나, 새가 날거나, 구름이 피어오른다. 시인이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제시한 장면이다. 이는 산수 표현에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산수 속 인물이 이러한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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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 정보의 양과 유통 속도가 급격히 발전했지만  사회적으로 정보의 질과 편협(향)성도 증가했다.

사실을 판단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는 정치인과 언론의 개소리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본문발췌]

“사실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라고 점잖게 말하는 기성 언론의 팩트체크 기사보다 개소리들이 훨씬 더 재미있고 귀에 쏙쏙 박힙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이를테면 같은 게임에서 맞서 싸운다고 해보자. 각자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이 이해한 대로 반응한다. 물론 한쪽은 진실의 권위에 따라 반응하고, 다른 쪽은 그 권위를 거부하고 권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개소리꾼은 이런 요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 달리 진실의 권위를 거부하지도, 이에 맞서지도 않는다. 전혀 신경쓰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진실의 더 큰 적은 거짓말보다 개소리다. 다시 말해 개소리꾼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유리한 발언을 할 뿐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개의치 않는다.
 

기자 한 명이 오랜 시간을 들여 주장을 검토한 후 사실을 토대로 신중히 기사를 작성하면 비용은 더 들고 클릭 수는 줄어든다. 이보다 더 쉽게 수익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원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서둘러 기사로 내보내서 그 주장에 대한 분노와 반박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내는 것이다. 폭로 기사는 다른 언론사가 쓴 기사를 그냥 베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관련 기사가 예닐곱 개 나오는데 그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도 있을뿐더러 직접 취재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가짜뉴스는 신뢰의 부재를 낳은 원인이라기보다, 이를 보여주는 현상에 가깝다. 개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의 적이다.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 없이는 절대로 정치적 성향을 넘어 토론할 수 없고 그저 상반된 담론을 향해 고함치는 데 그치고 만다.


정보 제공자가 맞춤형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용자에게 편향된 정보만 도달하는 필터 버블 현상도 큰 과제였다. 내 친구들은 나와 정치적 견해가 매우 비슷한 만큼 서로 동의할 기사만 공유할 확률이 높다. 우리가 뉴스 대부분을,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페이스북 피드에서 접한다면 결국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개소리의 힘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해서 전문가의 말이나 실제 벌어진 사건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더 신뢰한다. 필터 버블은 사람들이 진실을 더 쉽게 무시하도록 자극해 탈진실 사회를 부추긴다.
 

트래픽이 높아진다는 것은 당연히 해당 사이트의 수익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제목은 나중에 바꾸더라도 일단 기사부터 올리면 트래픽이 올라가지만 시간을 들여 사실을 확인한 후 아무 기사도 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자원이 줄어든 편집실에서는 보통 안전한 대책을 찾는다. 대학을 갓 졸업한 미숙한 기자가 정치 논쟁을 보도한다고 할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 후보가 한 말을 그냥 보도한 후 상대 후보의 반박을 싣는 것이다. 내용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생략한다. 현실 풍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게 현실이다. 특히 기사가 다수 매체의 일반적 보도 지침인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만족할 때 이렇게 보도한다. 한 후보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해도 마찬가지다. 자원이 풍부하고 숙련된 기자가 있는 편집실에는 정치 논쟁을 조목조목 따질 역량과 자신감이 있다. 그런 기자들이 부족한 편집실에서는 정치 논쟁을 제대로 문제 삼지 못한다.
 

수 세기 동안 미디어는 정부와 정치인에게 책임을 묻는 역할을 했다. 19세기 들어 미디어를 일컫는 ‘제4계급’이라는 별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디어의 권력 견제 기능을 공식화한 용어였다. 미디어가 영향력과 신뢰를 잃으면 권력에 책임을 묻는 능력도 약해진다.
 

정치는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도 공공정책을 논하는 순수하고 열띤 토론의 장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무관심과 냉소주의에도 안전한 범주와 해로운 수위가 있으며, 정치 전략에도 다른 것보다 더 유해한 방식이 있다. 정치 행위자가 미디어와 피드백 회로를 형성해 얄팍한 근거나 사실만으로도 공론화가 가능해지면, 정치권에 대한 신뢰는 더욱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살폈다. 하나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증거를 찾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가 내 주의를 끌더라도 이를 믿거나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확증 편향이 적극적인 정보 탐색을 가로막듯이, 역화 효과도 내게 들어오는 정보를, 나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정보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신념을 의심하기보다 고수하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필터 버블 때문에 서로 다른 의견에 가까워지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도적 관점에서 더욱 멀어진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에 순응하고, 그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집단을 통해 성향이 양극화한다.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정확하고 검증 가능한 정보보다, 정체성을 한층 더 견고하게 하는 개소리 정보를 더 반기는 이유다. 정체성이 한층 단단해지는 또 다른 상황은 바로 다른 집단과 대립을 할 때다. 이를 일컬어 내집단, 외집단 행동, 또는 현실 갈등 이론이라고 한다. 우리는 집단에 대한 진짜 소속감을 다른 집단에 대한 경쟁의식, 심지어 적대감을 통해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정치적 신념과 맞는 구절을 보면 쉽게 믿고, 거의 반사적으로 공유하려고 한다. 반면 잠깐이나마 출처를 살피고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어느 정도 노력이 든다. 전자는 시스템1 행동에 해당한다. 후자는 시스템2를 발동한 것으로 공유하기 전에 정보를 더 신중히 검토해보자는 결단이 필요하며, 노력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보를 대강 훑을 때 나오는 순간적인 사고를 누르고 의식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스템2 사고를 작동시키는 것은 자기통제 행위로, 때로 ‘자아 고갈’이라고 부를 만큼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만 의식적이고 신중한 사고와 자기통제가 없으면 우리는 개소리에 노출될 것이다.
 

주류 언론이 개소리에 대응하는 주요 무기는 사실 검증팀을 띄운 것이었다.
 
정치인,언론, 대중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는 풍토가 우려될 때, 우리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사실 검증을 활성화할 수 있다. 허위 정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치인이나 미디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내 주장의 진위를 가려주는 균형 있고 공정한 정보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진실이 신발을 신을 때, 거짓말은 이미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라는 오랜 격언은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한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보면, 우리는 사실 검증팀이 정보를 꼼꼼히 모으고 제대로 된 글을 써서 신속히 공개해도 개소리를 쉽게 억제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테다. 개소리는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의 신념을 강화하며, 남들과 공유하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확증해주는 정보를 믿는 편이고, 사실에 근거한 기사보다 자극적인 기사에 더 솔깃한다. 우리는 사실 검증을 하더라도, 전부터 의심한 사실 정도만 확인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의심하고 습관처럼 사실을 확인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개소리는 만들긴 쉬워도 그에 맞서긴 어렵다. <가디언>의 미디어 편집자 재스퍼 잭슨Jasper Jackson은 “이 싸움은 비대칭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말했다. 언론 조직은 정보 유통에 절대적 지배력이 있는 만큼, 전쟁 포로의 인권을 규정한 국제협정인 제네바협약에 상응하는 보도 원칙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지만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자들은 그런 제약이 없으므로 보도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부담이 전혀 없이 언론사들의 약점을 파고든다.
 

인터넷의 허위 정보와 싸우는 일은, 하나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여러 개의 과녁에 총을 겨누는 것과 같다. 


전부 거짓은 아니기에 더 위험한 나쁜 뉴스
<스놉스>를 만든 두 설립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미컬슨David Mikkelson은 2016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온 후 일주일 정도 지나 “우리에게는 가짜뉴스가 아니라 나쁜뉴스가 문제다”라는 논평을 올려 이 문제를 언급했다. “온라인 세상에는 나쁜 뉴스가 참 많지만 그 모두가 가짜는 아니다”라면서, <스놉스>가 대적하는 당황스러운 허위 정보를 열거했다. 진짜 뉴스를 가져다가 왜곡이 심한 낚시 기사로 둔갑시키는 당파적인 정치 사이트가 있다. 예전에 나온 뉴스를 마치 지금 떠도는 정보처럼 포장하는 사이트도 있다. 출처가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기사들을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다. 주로 건강과 과학 분야에서 말이다. 자기 딴에는 타당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나, 정보를 모으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정확성이 매우 떨어지는 사이트도 있다. 이런 형태의 뉴스는 어떻게 보든 하나같이 나쁜 뉴스지만, 모든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한데 묶어버리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이슈를 더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우리 모두는 이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검토 없이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검증하지도 않고 글이나 사진, 영상을 공유할 때마다 이 생태계에 잡음을 키우고 혼란을 부추긴다. 이 생태계가 너무 혼탁해진 만큼 우리는 온라인에서 접하는 정보를 독자적으로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능적 반응과 거리를 두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콘텐츠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거나 내 관점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우쭐거린다면, 다른 관점을 취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탈진실을 문제 삼을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대중과 권력자가 부쩍 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우리 모두와 관련한 문제다.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대중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응답자들이 하원의원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등한시하는 태도는 문제다. 나라를 통치하고자 한다면 진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탈진실 방식으로 캠페인 활동은 가능했더라도 언제까지나 탈진실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디어 그리고 탈진실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담론이 맞선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존 신념을 자극하는 감정적 담론이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가 높고, 가장 많은 대중에게 전달되며, 대중의 믿음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앞서 짚었다. 이는 사실 검증 문화와 거의 대조적이다. 사실 검증은 공명정대하고 신중한 자세를 보이려 하고, 논쟁에서도 당파적 입장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주목받은 사실 검증 기사조차, 이들이 대적하려는 가짜뉴스나 개소리보다 도달률이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단 몇 초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개소리를 공유할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 
내가 믿는 담론을 믿지 않는 담론만큼 의심해보자. 우리는 이런 편향에서 빠져나와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운동 조직이나 후보가 받는 비판도 믿어보려고 해야 한다. 다른 정치인이나 세력의 입장에서 기사를 읽어보고, 내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쉽지 않다. 내 정치적 입장을 제쳐놓고 어떤 스캔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어떻게든 해내면 사실과 증거를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가 흘려듣는 스캔들에 흥분하는지, 반대로 상대방이 무시하는 스캔들에 왜 우리는 열띤 반응을 보이는지 알게 된다.
 

명확성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혼란은 독재자의 도구다. 저질 정보, 망상, 허위 정보는 민주주의를 손상시키고 정보 스모그를 만들어서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합의하려는 시도를 소모적으로 만든다. 사회 전반에 이런 불확실성이 커지면 독재자와 전제군주, 선동꾼이 힘을 얻는다. 구소련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정보 전략 목적이 정치 선전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불확실성을 낳아 푸틴이나 그 어젠다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담론이 나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탈진실 사회의 접근법은 독재자의 접근법이다. 소모적인 캠페인 때문에 정부와 사법기관, 미디어 등 각종 기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대중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담론이 떠돌 뿐이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감정을 자극하고 이목을 끄는 과감한 주장을 내세우는 쪽이다. 보통 그런 주장은 역사가 보여주듯 소수집단들을 악마로 몰아간다. 이런 접근법을 러시아만 쓴 것은 아니다. 조직적이고 악랄한 체제의 결정판인 나치독일의 핵심 전략도 혼돈과 혼란이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에게 말을 건네기보다 나와 생각이 맞는 사람과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며(혹은 호들갑을 떨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관한 최악의 사실만 믿고, 그들을 악의적으로 표현한 정보를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공유한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음모론보다 더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확실한 증거가 나오려면 훨씬 오래 기다려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만화책에 나오는 악당이나 우리가 쉽게 무찌를 수 있는 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를 무수한 원인이 얽힌 복잡한 문제, 모두가 개입된 문제로 보는 쪽보다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대하거나 안 좋게 바라보려는 충동, 사실이었으면 하는 정보만 믿으려는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개소리보다 진짜 정보를 다뤘을 때 정치인과 미디어가 더 유익한 결실을 얻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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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부귀 권세를 쥔 자들이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과 말로 웃음을 주는 광대보다 나은게 무엇인가?
 
그들은 사익만 추구하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고, 자유와 진리를 미워하고, 모든 것을 자기 욕망과 이익에 비추어 판단하는 자들이 많다.



[본문발췌]

우신의 시종들. 여기 눈썹을 치켜뜬 자는 분명 '필라우티아'(자아도취)입니다. 저기 눈웃음을 지으며 박수 치고 있는 자는 '콜라키아'(아부)입니다. 반쯤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는 '레테'(망각)입니다. 팔로 머리를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는 '미소포니아'(태만)입니다. 장미꽃을 엮어 두르고 온몸에 향수를 짙게 바른 자는 '헤도네'(쾌락)입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자는 '아노이아'(경솔)이고,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이 좋으며 살이 통통하게 오른 자는 '트리페'(방탕)입니다. 시종들 사이에는 남신 두 명이 서 있는데, 한 명은 '코모스'(광란)이고, 다른 한 명은 '네그레토스 휘프노스'(깊은 잠)라고 합니다. 이들은 나의 충직한 가솔들이고, 나는 들의 도움을 받아 온 세상을 지배하며 위대한 통치자들조차 내 명령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사실 노인은 주름이 많고 생일이 더 많이 지냈다는 것 말고는 어린아이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머리색이 옅고, 치아가 다 있지 않고, 체구가 작고, 젖 먹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더듬고, 자꾸 이야기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곧잘 잊어버리며, 생각이 부족합니다. 거의 모든 점에서 비슷하지요. 사람은 늙을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을 느끼지 않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우신인 나보다 더 어리석지 않다면, 그러니까 진정으로 어리석지 않다면 아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배제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악취를 풍기는 자로 느껴지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협오스럽고 가증하게 보여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면에서 생모라기보다 계모라고 할 수 있는 자연이 사람들의 본성, 특히 좀 더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본성 속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에게 주어진 것을 시기하는 악덕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인생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마저 결국에는 모두 훼손되고 맙니다.


분별력이란 많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현자들은 염치나 소심한 성격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애초에 염치가 없는 데다가 위험에 구애받지 않기에 무슨 일이든지 거침없이 달려들어 해냅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분별력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에 더 어울리겠습니까? 
현자들은 케케묵은 옛날 책 속으로 도피해 거기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옛날 사람들이 말로만 그럴 듯하게 늘어놓은 궤변을 배웁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들은 모든 일에 직접 뛰어들어 무엇이 맞고 틀린지 체험함으로써, 내 말이 틀리지 안았다면, 진정한 분별력을 얻습니다. 
호메로스는 비록 눈이 멀기는 했지만, "어리석은 자는 일이 터지고 겪은 후에야 깨닫는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런 사실을 볼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하는 두 가지 주된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에 뿌연 연무를 드리워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염치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해 보이는 일은 시도하지 말라고 말리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은 사람들을 이런 것들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해방시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많은 유익을 가져다주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음과 좀 더 가깝고 친한 학문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학문과 일체의 접촉을 끊고 오직 자연이 이끄는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뛰어넘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인간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꾸미는 것을 싫어하고, 어떤 것이든 인위적인 학문으로 훼손되지 않았을 때 훨씬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모든 동물은 자연이 정해준 한계 안에서 만족하고 살아가는 반면에 인간만이 운명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애쓰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 불행한 동물은 없다.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일수록 더 진실이라 믿고,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쾌감을 더 크게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데 기막히게 좋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제와 설교자에게는 돈벌이도 됩니다.


사람들은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속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 진실을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행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사는 아주 모호하고 천차만별인지라 철학자들 중에 가장 덜 오만한 우리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올바르게 말했듯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알 수 있다 해도 그로 인해 인생의 즐거움을 방해받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은 진실보다 거짓에 훨씬 더 쉽게 사로잡히지요. 거짓을 통해 행복을 얻는 데는 비용이 그리 들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므로 문법처럼 별것 아닌 문제조차 진실을 알아내려면 몇 배는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면에 거짓을 바탕으로 자기에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란 아주 쉽고, 그런 생각은 곧바로 행복으로 이어지며, 생각이 거짓될수록 행복은 더욱 커집니다. 행복하다면 그것이 거짓으로 말미암은 것이든 진실로 말미암은 것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 해도 어리석은 자들이 누리는 행복이 더 낫습니다. 그들의 행복은 그저 그렇다고 믿기만 하면 되는 까닭에 돈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얻은 행복은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수학 공식처럼 정해진 규율에 따라 정확히 행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신발 끈의 매듭은 몇 개여야 하고, 허리띠는 무슨 색이어야 하며, 서로 형태가 다른 몇 벌의 수도복을 갖추어야 하고, 허리띠는 어떤 재질로 만들고 그 너비는 어떠해야 하며, 고깔은 어떤 모양과 크기여야 하며, 삭발은 손가락 몇 마디 길이까지 해야 하고, 잠은 몇 시간을 자야 하는지 다 규율로 정해놓습니다. 신체와 성격이 천차만별인 사람들에게 규율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겉보기에는 평등해도 실제로는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쓸모없는 자들은 하찮고 자질구레한 규율에 집착하며 자신들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할 뿐 아니라 우월감에 젖어 남들을 멸시합니다. 사도들의 사랑을 실천한다고 큰소리 치는 자들이 규율에서 정한 것과 다르거나 조금이라도 진한 색깔의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를 보면 놀라 자빠질 만한 비극을 연출합니다. 돈을 치명적인 독으로 여기며 손도 안 대려 하면서 술이나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절제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놀라운 열정으로 서로 다른 생활 규칙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욕망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과시하는 데 있습니다.


군주들은 끊임없이 사냥하고, 명마를 기르고, 행정과 군대의 요직을 팔아 이익을 얻고, 신민들의 재산을 털어 자신의 금고를 채울 새로운 방법을 날마다 생각해냅니다. 아무리 부당한 일도 그럴 듯한 명분을 붙여 공정한 처사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래야 군주의 모든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자기편에 붙들어두기 위해 어느 정도 잘 보이려고도 합니다. 오늘날 군주가 어떤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법률에 무지하고, 사익만 추구하느라 공익은 거의 적대시하고, 쾌락의 노예가 되어 있고, 학문과 자유와 진리를 미워하고, 국가의 안녕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자기 욕망과 이익에 비추어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반면에 다소 우둔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 대목에서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가 떠오르는군요. 동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사물의 그림자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동굴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간 한 사람이 사물의 실체를 보았다며, 저 하찮은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었을 때 일어난 일이 일반 사람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거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만, 정작 그들은 그를 미쳤다고 조롱하며 쫓아냅니다.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가장 숭배하고 물질적인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물질적인 것에 가까운 것일수록 무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일에 몰두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재물을 가장 중요히 여기고, 육체의 안락을 두 번째로 생각하며, 영혼을 마지막에 둡니다. 이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만물 중에 가장 순전한 존재인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고, 다음으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영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육체에는 관심이 없고, 돈은 조개껍데기 보듯이 하찮게 여기고 배척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다루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몹시 불쾌해하며 마지못해 다루지요. 돈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의 예로 제시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 전체에서 육체와 관련된 것들을 멀리하고, 영원한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과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미쳤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서로가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 일반 사람들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더 미쳤다고 보는 편이 더 맞습니다.


앞서 약속한 대로 기독교인들이 받을 최고의 상이 광기임을 간단히 증명해 보인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먼저, 플라톤이 무슨 생각으로 사랑의 광기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분명 나와 같은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들어갈수록 행복과 기쁨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신의 신체 기관을 적절히 사용하려 하지 않는 상태란 의심할 여지없이 미친 것이고 광기이며,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 차려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등 흔히 쓰이는 이런 표현들이 그런 의미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 절대적일수록 광기는 커지고 행복도 함께 커집니다.


<우신예찬>은 어리석음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여 인간의 모든 행복이 어리석음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 에라스무스가 마르턴 판 도르프에게 보낸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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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의 적정 기술은 균형, 조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지향한다.
 

[본문발췌]

적정기술 개발은 발전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이지 개발 자체가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간기술 ->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중간기술'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기술은 시간과 장소에 '적정한' 기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간기술의 목표
1.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존재
2. 일반적으로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히 저렴
3. 희소 자원의 낭비가 적어야 하며
4. 분산형 에너지를 사용
5. 상대적으로 간단한 기술과 현지 재료를 사용하여 제품을 만들고
6.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드는 것


개발도상국에서 적정기술이 저발전에서 기인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부상한 것과는 달리, 선진국에서 적정기술이 부상하게 된 것은 정치, 사회적 배경의 영향이 컸다.
1970년 초반부터는 적정기술의 개념이 발달된 산업사회의 문제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사회 운동가들은 적정한 기술이 널리 사용된다면, 공해, 환경 파괴, 에너지 가격의 급격한 상승, 자원고갈, 소외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병폐가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적정기술은 
1)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저렴할 것, 
2)쉽게 운전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단순할 것, 
3)소규모 운전에 적합할 것, 
4)인간의 창의성에 부합할 것, 
5)환경 보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을 것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기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기술이 지역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과 공존 가능하고, 지역적으로 물질과 에너지원이 이용 가능하며, 지역민에 의해 그 도구와 과정들이 유지, 작동할 수 있을 때 이 기술은 적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적정기술은 기술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고 체계'를 의미하며, 이 사고 체계는 실로 하나의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다. 적정기술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지향, 개인의 '자유로서의 개발'을 위한 이해를 포괄한다. 즉 적정기술의 개념은 기술을 적정한 수준으로 한계 짓는 데 있지 않고, 기술 사용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와 태도를 고양하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듄(Peter Dunn)이 언급한 바와 같이 적정기술은 '스스로 진화하고, 역동적이며, 발전에 관한 완벽한 시스템적 접근'이며, '지식, 기술, 그리고 그것의 기반이 되는 철학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발전에 관한 한 가지 접근방식'이다.
결론적으로 적정기술은 '해당 기술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그 사용이 환경이나 타인에게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로서 적정기술의 가장 정확한 기준은 '인간'이며, 적정기술은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진보를 우선시'하는 사고체계 또는 철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적정기술은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줌으로써 인간의 실현을 강화하는 일련의 목표와 과정, 사상, 실천으로 정의될 수 있다.


"지구는 모든 사람이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게 제공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까지 채워주지는 않는다." - 적정기술의 정신을 제시한 간디


'디자인 주도형(design driven)' 프로세스는 기획 단계에서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최종적으로 구현해야 할 모델과 이에 필요한 기술을 도출하고, 디자이너가 제품의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먼저 제안한 후에 제품 개발을 시행하는 순서로 진행한다. 한동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이은종 교수는 "기술은 Seed based(Seed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술 및 자원을 의미)로 개발하지만 디자인은 Needs based(사용자의 욕구를 토대로 개발하는 것을 의미)로 개발합니다."라고 말한다. 혁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술성이 아닌 필요성이다.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할 일을 정해야 하는 것이다.

디자인 방법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직접 관찰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필요를 먼저 발견한 후 이를 기술 개발이 가능하도록 연결한다. 지속가능하게 활용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적정기술은 디자인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콘셉트를 제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AT)은 한 공동체의 문화적, 정치적, 환경적인 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술이다. 궁극적으로 저개발국 저소득층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개발한 현실적인 기술을 의미한다. 

"저개발국 성장의 관건은 경제가 아니라 문화이며 표준적인 생활이 아니라 삶의 질이다." 

적정기술 운동을 시작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슈마허의 말은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단순한 일회성 원조나 경제적 지원이 아니고 복지 증진과 기본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과 기회를 제공해야만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적정기술이 진정으로 '적정'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이 계획되는 동기가 적정기술이 보급될 현지의 '욕구(wants)'와 '필요(needs)'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어야 한다. 

적정기술이 한계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적정기술이 무엇이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적정해야 하는지 적정 기술이 가진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봐야 한다. 앞으로 적정기술의 실행자들은 수혜자들이 진정으로 필요를 느끼는 점이 무엇이며 잠재된 욕구가 무엇인가를  세심하게 찾아냄으로써 수요자 중심의 모델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여자의 선한 의지가 수혜자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잃어버린 연결고리이다.

디자인은 사람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다양한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수요자의 욕구와 필요를 발견해내는 분야이다. 적정기술이 잃어버린 고리, 바로 수요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새로운 디자인 방법을 통해 적정기술을 인간중심의 기술로 혁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려고 한다.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 변화 : 스타일링에서 서비스와 시스템으로
디자인의 범위는 더 이상 제품의 조형이나 시각화된 결과물만을 디자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에는 시각, 제품, 환경, 공간 등 유형적 형태를 디자인하는 것으로 제한되었지만, 오늘날 디자인은 고객이 제품과 서비스 혹은 이 둘의 결합을 통해 경험하는 것을 디자인하는 범위까지 확장되었다. 이외에도 프로세스나 시스템을 창조하는 분야까지 새로운 콘셉트를 제안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적인 방법론으로 활용된다.

"좁은 의미로서의 디자인은 제품 및 서비스의 본원적 목적을 유지하면서도 사용자가 전달받는 가치가 향상되도록 하는 실체화의 과정 및 결과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넓은 의미로서의 디자인은 창의성과 혁신을 연결하는 것이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고 실제화시킴으로써 사용자에게 있어 매력적인 제품과 서비스, 프로세스가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소개된 서비스디자인은 인간 중심의 맥락적인(contextual) 리서치 방법을 활용하여 이해관계자 간에 잠재된 요구를 포착하고, 이것을 창의적이고 다학제적, 협력적인 디자인 방법을 통해 실체화(embodiment)함으로써, 고객 및 서비스 제공자에게 효율적이며 매력적인 서비스 경험을 향상시키는 방법 및 분야를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서비스디자인은 서비스 혁신을 통해 고객에게 제공되는 서비스가 더 유용하고 편리하고 바람직하게 인식될 수 있도록 하며, 고객뿐 아니라 제공자 측에게도 더 효과적이다. 서비스디자인은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분야로 새로운 디자인 전문 학문이 아닌 전문기술의 새로운 다학제적 플랫폼이라고 볼 수 있다.


적정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고 적정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적정기술을 개발하기 전 기획 단계에서 인간과 문화의 맥락을 이해하여 근본적인 사용자의 숨은 욕구와 본질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 콘셉트를 제안하여 혁신을 이끄는 방법이 바로 인간을 보는 기술, 디자인이다. 앞으로 적정기술을 개발할 때 기술 중심의 개발이 아닌 사용자 중심의 기술로서의 디자인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경제학자 다니엘 핑크도 새로운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디자인은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것,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효용과 의미를 결합하고 탐색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며, 광범위한 차원에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문제 역시 디자인적으로 접근하면 다양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디자인은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고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제 디자인은 인간의 생활 문제를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도구이자 방법이며 인간 중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으로, 인간의 행동 변화를 일으키고 나아가 사회와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사람을 향한 나눔 디자인', 디자인은 복잡한 문제를 구체화하고 실체화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며 감성적인 조화와 세심한 배려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 중심 디자인 프로세스는 개별적인 디자인 문제에서 출발하여 듣고(hear), 창조하고(create), 전달하는(deliver) 세 단계를 거친다. 이 프로세스를 통해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관찰한 다음 통찰력과 주제를 발견하는 추상적인 사고를 거쳐 다시 실체를 가진 해결책으로 돌아온다.


사고 통합적으로 지속가능한 생태 시스템 설계하기

  • 적정기술을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방법은 단순한 원조 지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비즈니스 모델로 발전시켜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고 지역사회의 경제 가치를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완전히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주어진 대안 중 제일 나은 대안을 선택하는 수렴식 사고가 아니라 디자인 사고를 활용해야 한다.
  • 디자인 사고는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방법에 의해 수행되며, 아이디어가 펼쳐지는 확산적 사고와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수렴적 사고를 반복적으로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감성과 직관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방식이나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요소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통합적인 접근 방식으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대안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인간은 물론 인간의 도구, 인간을 둘러싼 환경, 또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계획 등을 모두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총체적인 사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술만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생태계를 고려한 통합적인 시스템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디자인적 사고를 활용해야 한다.
  • 전체는 단순히 부분의 합이 아니다. 따라서 특정 부분이 문제라 해서 그 부분만 바라보고 해답을 찾으려 해서는 결코 근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열이 나는 것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려면 단순히 해열제를 투약하는 것만이 아니라, 종합적 진단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디자인 방법인 서비스디자인은 문제를 통합적으로 접근하여 특정 시점이 아니라 제품의 구매-사용-폐기의 전체 경험을 디자인하는 태도를 가지며, 동시에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과 기회를 제공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해결책을 제공하는 지속가능한 생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혁신(innovation)'이란 새로운 형태의 프로세스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디자인은 적정기술 개발에 있어서 새로운 혁신의 고리를 연결할 수 있다. 적정기술과 디자인의 만남은 현재 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놀랍도록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디자인은 여우가 접시를 선택하기 전에 한 번 더 두루미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게끔 해주는 사용자 중심의 혁신 기술인 것이다.


BOP(Bottom of the Pyramid, 피라미드의 저변.. 연소득 3천 달러 미만인 인구 집단), 40억 명의 빈곤층이 만드는 혁신의 기회. BOP는 개인별 구매력은 약하지만, 이를 집단적으로 봤을 때 12조5천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며, BOP는 성장잠재력이 포화된 선진국 시장의 대안임과 동시에 기업이 이윤추구를 통해 빈곤을 퇴치하는 효과까지 이룰 수 있다.


BOP 시장 접근에 있어 중요한 요소

  • 접근성(Access) : 빈곤층의 생활 패턴과 사회 경제적인 환경을 감안... 이곳에 제공되는 제품은 장거리 이동이 쉽지 않고, 전기나 가스 등과 같은 서비스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프그리드 상황에서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적합성(Affordability) : BOP 구매력에 적합한 구매 기준에 맞춰 접근.... 소량포장, 낱개포장과 같은 방식 뿐 아니라 필요 시 소액융자와 같은 금융서비스도 포함
  • 가용성(Availability) : BOP 빈곤층은 하루 수입으로 그날그날 물품을 구매하는 소비 패턴을 보인다. 따라서 필요 물품이 그 시점에서 구매 가능하지 못할 경우 구매로 이어지지 못한다.

 
빈곤층의 소비자로서의 역할 외에도 생산자와 기업가로서의 역할을 포함한다. BOP 개념에서 진정한 빈곤 퇴치 효과를 위해서는 빈곤층에게 소비 제품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기보다는 빈곤층을 비즈니스의 가치사슬에 적극적으로 통합시켜 해당 제품을 직접 생산하고 유통하는 역할까지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적정기술의 초점이 도구 중심(tool-oriented)에서 시장 중심(market-oriented)으로 전환해야 한다." - 폴 폴락
 
"적정기술 운동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학의 기본 규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 마틴 피셔

회사는 기술적으로 구현이 가능하다고 해서 바로 상품을 만들지 않는다. 사용자의 필요와 시장 상황, 상품을 지속적으로 제조하고 유통시킬 수 있는 탄탄한 비즈니스 계획이 수립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실현될 수 없다. 시장에서는 그러한 접근을 망각한 채 나온 상품이 그저 외면당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개발협력의 현장에 섣불리 제공된 적정기술 제품은 외면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경제와 현지인에게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말라리아 모기장 사례를 통해 아무리 기능이 좋고 수요가 확실한 적정기술 제품이라 할지라도 무상보급으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 만큼 지속적인 효과를 유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정기술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효과적인 유통 방안을 고민하고, 해외에서 제품을 생산해 수입하기보다 현지 제작을 고려하며, 무상보급 보다는 제품의 접근성과 가용성을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유료 판매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현재 적정기술 운동이 직면한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적정기술은 빈곤층의 수익 창출을 통해 직접적인 소득 증가를 돕거나, 비용 절감을 통해 간접적인 소득 보전 효과를 유발하는 탁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 해결형은 소득 증가나 비용 절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지만, BOP 빈곤층이 직면한 에너지, 식수, 보건의료, 교통수단 등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도록 고안된 적정기술 제품을 말한다. 


BOP 시장 중심 적정기술 개발 통합모델
BOP 현지인이 구매할 적정기술 제품을 기획할 때 '현지 제작-소득 창출' 또는 '현지 제작-비용 감소' 관점으로 기획한다. 이러한 제품은 B2C, 즉 현지인을 직접적인 구매자로 상정하며 현지인이 생산, 제작, 유통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바탕으로 접근할 경우 시장 중심 보급 방안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수퍼머니메이커 펌프와 드립 관개시설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현지 제작이 어렵고 특정한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적정기술 제품의 경우는 B2B와 같은 모델을 채택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즉, 외부기관의 후원을 받은 상태에서 현지인을 직접 구매자가 아닌 수혜자로 선정하고 현지인이 어떻게 유통 과정에 참여할 것인가에 주력해 시장 중심 보급 방안을 짜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서 '말라위 프로젝트'의 모기장이 해당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접근이든 현지 상황에 맞춘 유통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공통적인 필수요소이다. 많은 적정기술 제품이 유통 방안을 초반에 고려하지 않고 기술과 제품을 먼저 개발하는 바람에 겪는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품 기획 단계에서 명확한 유통 방안 전략이 나와야 하며, 성공적인 유통 전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그에 맞추어 기술과 기능을 수정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현재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다음 세대의 필요를 침해하지 않는 발전이며,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인 고려가 충분히 이루어진 발전을 의미한다.


'성장'의 사전적 의미는 '생물체의 크기, 무게, 부피가 자라서 점점 커짐'이다. 반면에 '발전'은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 또는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됨'을 뜻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성장하면 그것은 커지는 것이고, 어떤 것이 발전하면 그것은 달라지는 것이다. 지구 시스템은 발전 또는 진화하지만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성 성분인 경제는 결국 성장을 멈추어야만 하지만, 발전은 계속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장 없는 발전', 즉 생태계의 재생 및 동화 역량 내에서 물질 에너지의 처리량이 안정하게 유지되는 물리적 경제 기반의 정성적 개선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경우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은 말이 되는 것이다. - 김준, <지식의 지평> 6호 206~207쪽


녹색경제는 인간의 삶의 질, 사회적인 통합을 촉진하는 동시에 환경적인 위험과 생태학적인 부족을 감소시키는 경제 체제를 의미한다. 녹색성장은 저탄소 사회 및 빈곤층을 포함한 발전을 촉진하는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의 과정이다. 녹색성장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는 동시에, 자연 자산이 인류의 삶의 질에 기반이 되는 자원과 환경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녹색성장은 빈곤 퇴치, 일자리 창출, 빈곤층을 포용하는 문제와 같은 경제활동의 주요 부분을 깨끗한 물과 에너지에 대한 안전한 접근성, 기후 변화와 생물 다양성 감소와 같은 환경적인 활동과 통합한다.



적정기술은 특정한 사고의 방향, 사고의 관점을 가리키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정기술을 낮은 수준의 기술이나 도구의 활용, 첨단기술의 배척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정기술은 기술 수준과 활용 장소와 상관없이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경제의 외부 효과를 통해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와 GDP의 성장과는 반대로 빠르게 저하되는 삶의 질 앞에서 적정기술은 대안적인 세계관을 제안한다.

이러한 적정기술 세계관의 특징은 기술의 수준이 아닌 사용자 경험을 우선시하며, 발전을 위한 발전보다는 지속가능을 위한 발전, 집약적 성장보다는 분산적 성장, 세계화보다는 현지화, 개인 중심보다는 공동체 중심의 경향을 포함한다. 최근 적정기술의 적용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개발협력 현장 외에도 적정기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적용이 가능할 만큼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세계관이자 전략이다.

적정기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슈마허는 적정기술을 논의하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했다. 최근 지속가능한 발전 논의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인 생체모방학(biomimicry)을 통해 그의 통찰력 있는 전략의 진정성과 적실성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생체모방학이란 35억 년 이상 발전해온 지구 생태계의 최적의 패턴과 원칙을 인간이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용하고자 하는 접근을 말한다.


적정기술은 다양한 영여과 흐름과 접속하고 융합하는 장의 역할을 한다. 다양한 행위자들이 모여 시너지를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를 발생하므로 동반성장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바로 플랫폼이라고 말한다.


적정기술을 비유하자면 유연한 '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적정기술은 형태와 쓰임을 달리한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소득 수준이 어떠하든 주어진 '그릇'에 따라 적정기술의 '형체'는 달라진다.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작은 것이 편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작은 것, 분산화되고 지속가능한 적정기술은 현대 사회가 독점적인 권리인 양 제시하는 '편리성'을 반드시 동반하지는 않는다. 적정기술은 불편함에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던 인간 중심과 지속 가능성의 가치를 선사한다. 많은 경우 편리성은 인간 대신 기술을 앞세웠고, 복잡한 기술과 시스템의 논리로 인간을 소외시키곤 했다.

앞서 언급한 생태모방학이 던지는 핵심 질문과 같이 세계관이자 플랫폼인 적정기술은 우리에게 편리가 아닌 올바른 것의 관점에서 우리가 당면한 복잡한 이슈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 줄 것이다. "어떻게 적정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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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 한 바탕 잘 놀다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시인, <귀천> 중에서


[본문발췌]

서양 것들, 술 한 잔을 마셔도 부릴 멋은 다 부려. 각양각색의 잔으로 먼저 눈으로 마시고, 잔을 부딪치면서 귀로 마시고, 잔을 기울이며 번지는 향을 코로 마시고, 그리고 혀로 핥으며 입으로 마시다니....


중국말 파차이는 '돈을 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발음 '파'가 숫자 8의 발음 '빠'와 얼핏 혼동할 정도로 같이 들린다. 돈을 많이 많이 벌어 떼부자가 되고 싶은 중국사람들에게 8자는 곧 돈이라 믿는 행운의 숫자가 되었다. 8자가 들어가는 날은 무조건 길일이 되고, 그래서 8월 8일 8시에 결혼식을 시작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축의금도 888위안을 내는 사람이 최고의 하객이 되는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보면 그 개막식 날짜와 시간은 어떠했는가. 2008년 8월 8일 8시에 성화가 타올랐다.


문제 삼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문제 삼으니까 문제가 된다.


친구로 대하면 친구고, 적으로 대하면 적이다.


상사원의 삶이란 어쩌면 농부의 삶보다 더 허망한 것인지 모른다. 농부는 땅을 자본으로 자연의 혜택을 받아 수확물을 거두지만 상사원은 무엇인가. 종이쪽에 그림을 그렸을 뿐인 돈이라는 허상에 교환가치라는 절대권력의 왕관을 씌운 그 거한 존재를 쫓아다니는 불나방 떼 아닌가. 자본주의-돈을 신으로 모신 이념이다. 그건 솔직담백하고 단순명료하면서도 잔인무도하고 인정사정이 없다. 신의 권능을 가진 그 물건을 서로 많이 가지려고 총소리 나지 않게 벌이는 전쟁의 최전선에 싸우는 용병이 상사원이었다. 
그렇게 싸워서 얻는 것이 무언인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그 물음 앞에서 자꾸만 커지는 것이 회의고 서글픔이었다. 돈에 원수 갚고 죽는 사람 없더라고 평생 돈을 쫓아 좌충우돌 헐레벌떡 뛰어다닌 상사원들의 삶이란 결국 하잘것없는 퇴직금에 목매단 초라한 노년이 있을 뿐이었다. 그건 피할 도리가 없는 서러움이고 허망함이었다. 오십 고개 넘기면서부터 얼음 덮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 밀려나는 선배들의 축 처진 뒷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인생이 뭐고, 사는 게 뭡니까. 인생이란 추억 만들기고, 사는 건 때때로 무슨 계기를 찾아가며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 아니던가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화재는 선대의 피를 먹고 이루어져 후대에게 덕을 보인다.' 
모든 문화재에 점철되어 있는 전 시대 사람들의 피냄새와 신음소리를 바르게 느낄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 조지 산타야나


"인생 한평생 살고 보면 시시껄렁하긴 니나 나나 다 마찬가진 거야."


'정치가는 야심이 있어야 하고, 상인은 양심이 없어야 산다.'


역사 정신은 과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며, 역사란 흘러간 시간인 과거가 아니라 그 과거가 비추는 빛에 따라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비즈니스란 상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로 하는 것. 중국 비즈니스의 성패의 절대요건은 인간관계 관리에 달려 있다.


사람, 참으로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정글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차를 따를 때 너무 많이 따르지 말고 찻잔의 70퍼센트  정도만 따르도록 하시오. 나머지는 그냥 빈 공간이 아니라 마음을 따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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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유인 空超.
 
 

방랑(放浪)의 마음 - 오상순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 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속에 
바다를 그려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응시(凝視) 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 한 푸른 해원(海原) ㅡ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의 향기(香氣)
코에 서리도다. 

 
 
[본문발췌]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가을이 완연한데,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꿈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방금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천추千秋의 감격과 감사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히 벽력 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枕頭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봉이 울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 아니요, 꿈 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깊었고녀. 꿈은 깨어 무엇하리. -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다고 말한다.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태胎히 인류 생활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고苦가 아닐까. 사실을 회피하고 음폐陰蔽하고 부정함은 어리석다. 사실은 사실대로 그대로 승인하고 그것을 처리하며 그것을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시대고와 그 희생'
 
 
 
약한 인간이나 민족은 그 고苦에 눌려서 그의 노예가 되고 그 고苦에 못 견디어서 쇠멸하고 만다. 강한 자는 그 고苦와 싸우고 정복하여 쳐 이기고 퇴치코자 최후까지 백방으로 분투한다. 이에 불꽃이 튀고, 천지를 움직이는 대활동이 일어나고 처창悽愴한 대비극이 연출된다. 그러고 분투의 정도를 따라 승리의 운명을 복卜한다. 강자의 승리는 과연 선전건투善戰健鬪에만 있다. 우리는 그 싸움 속에 사는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 소극적으로 일체 곤란, 압박, 부자유, 불여의不如意의 고통과 싸워 이기고 적극적으로 일체 진선미와 자유, 모든 위대한 것, 신성한 것, 숭고한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운다. 그 싸움이 얼마나 신성하며, 이 싸움을 잘 싸우는 자者 얼마나 영광이랴. - '시대고와 그 희생'
 
 
 
우리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눈은 늘 무한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우리의 발은 항상 무한한 흐름 한가운데 서서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또한 오해나 핍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자유에 살고 진리에 죽고자 한다. - '시대고와 그 희생'
 
 
 
봄은 동방에서 꽃수레를 타고 온다는데 가을은 지금 먼 서방에서 내 파이프의 연기를 타고 온다. 가을은 이상하게도 환희와 비애가 서로 교차하고 융합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모르는 중에 무엇인지 하나씩 둘씩 여위어가고 시들어가고 떨어져가고 없어져가는 호젓하고 고독하고 애달픈 반면에 건강하고 씩씩한 생의 환희의 힘이 골절 속에서 샘솟듯 솟아오르는 계절이다. 조선이 가을 하늘은 한없이 높고 속 모르게 깊고 애타게 푸르다. -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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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타인의 기대, 시선에서 자유로워 질 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보고 삶의 자율성을 얻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본문발췌]

게으름을 두려워하는 걸 멈출 때 재충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교감하고, 좋아하는 취미를 다시 시작하고, 느긋한 속도로 세상을 헤쳐 나아갈 시간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성실한 직원이자 열정적인 활동가, 사려 깊은 친구이자 영원한 학생이다. 동시에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항상 미리 계획한다.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제해 불안을 줄이려 하고, 자신을 몰아붙이며 매우 매우 열심히 일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피곤하고, 버거워하고, 자신에게 실망한다. 아무리 애써도 부족하다고 확신한다. 아무리 성취해도 혹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만족감이나 마음의 평화를 느낄 만큼 충분히 해내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래서 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소진burnout과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만성 수면 부족을 견디면서도 한계를 갖는 것이 우리를 '게으르게' 한다고, 게으름은 항상 나쁜 거라고 확신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 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념 체계다. 이 신념 체계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믿는다.

  • 속으로 나는 게으르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 나는 내면의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극도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
  • 나의 가치는 나의 생산성을 통해 얻어진다.
  • 일이 삶의 중심이다.
  • 성취하지 못하고 열심히 할 동기가 없는 사람은 부도덕하다.

 

'게으를'수 있는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삶에서 놀이와 휴식과 회복을 위한 공간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해야 할 일 가운데 몇 가지나 해치웠는지를 자아상과 연결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커다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크게 세 가지 교리로 구성된다. 

  • 당신의 가치가 곧 당신의 생산성이다.
  • 자신의 감정과 한계를 신뢰할 수 없다.
  • 항상 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자신의 한계와 욕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인함의 신호다. 의무를 줄이는 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시키는 게 아니다.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싫어. 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삶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 우리가 전염병처럼 피해야 할 것으로 듣고 자란 많은 '게으른' 행동은 사실 매우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선택이다.


쉬어가는 것이 실제로 창의성과 사색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십중팔구 '게을러' 보이는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는 충분히 열심히 일했으며 이제 잠시 앉아 쉬어야 한다는 신호다. 인간이 수행하는 일의 대부분은 사색, 계획 혹은 창의력을 위한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는 컴퓨터도 로봇도 아니다. 먹고 자야 하는 것처럼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이 필요하다. '게을러' 보일  게 두려워서 재충전의 욕구를 무시하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빈둥거리기는 삶의 정상적인 일부다. 맑은 정신과 건강을 유지하려면 한가로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 게으르고 싶은 마음은 더 많은 도움과 휴식이 필요하거나 해야 할 일을 줄여야 한다고 우리에게 알리는 강력한 내면의 경고이기도 하다. 이 게으름에 경청하면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더 잘 이해하고 진정으로 살 가치가 있는 삶을 꾸릴 수 있다.


통찰과 창의력의 순간들은 억지로 한다고 해서 나오지 않는다. 정신 활동을 하지 않는 기간이 필요하다. 좋은 아이디어들은 종종 아이디어를 내려고 애쓰는 것을 중단했을 때, 예컨대 샤워 중이거나 한가롭게 산책을 하는 동안 떠오른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뇌가 쉬는 동안 머릿속에서 조용히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생산적인 휴식 시간을 '부화기incubation period'라고 부른다. 건강한 병아리가 태어나려면 알을 따뜻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정신의 창의적인 부분도 아이디어나 통찰을 낳기 위해 안전과 휴식, 이완이 필요하다.


게으름은 우리가 통찰력 있는 창작자와 문제 해결사가 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게으름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휴식을 취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여유를 얻으면 우리가 가진 큰 상처가 치유되고 우리에게 영양분이 되는 삶을 꾸릴 수 있다.


명상은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표현적 글쓰기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잠시 목표를 내려놓고 스트레스를 놓아버리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와 웰빙을 회복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게으름을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질에 혁명적인 영향을 준다.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몇 개를 해치웠는지로 우리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을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중요한 활동을 찾아 추구한다. 사회가 부가한 ‘당위’가 아니라 진정한 느낌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면, 훨씬 더 큰 진정성을 느낀다. 그리고 자유 시간을 만끽하고 더 느리고, 게으르고, 직관적인 속도로 일에 임할 때 수년간 과로가 남기 피해를 없애고 회복할 것이다.


우리는 여유 시간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더 힘들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힘들고 많은 일을 짊어지고 과로하는 것은 결국 자기 패배적이고 해롭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하루 2시간 이상 꾸준한 결과물을 낼 수 없다. 일터에서 생산적이고 유능한 것은 의지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다. 일을 잘하려면, 휴식을 취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몇 시간 더 일한다고 해서 생산성이 그만큼 올라가지 않는다. 인간의 주의와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양질의 일을 하려면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일터의 분위기가 좋으면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해 아무도 이전에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관여하는 방식으로 관리하면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습니다." 조직이 직원들에게 이로운 이상으로 열심히 하도록 강제하려들면 일에서 활기와 창의력이 사라진다.


건강을 좀 더 중시하고 덜 일하기 시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구체적 방법

  • 자율성을 주장하라.
  • 몇 시간 일했느냐가 아니라 일의 질을 중시하라.
  • 일-집 간섭 고리를 깨라.

 
스트레스를 받고 루틴에 빠져 있을 때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불과 의무로 점철된 안개 속에 혼재될 수 있다. 당신의 존재가 즐거움 없이 달성해야만 하는 의무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음미할 수도, 심지어 자세하게 기억할 수도 없다.


삶은 생산적이거나 남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목표에 집착하고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애쓰기만 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사실, 그렇게 살면 삶에서 좋은 것들을 인식하는 능력이 사라질 수 있다. 대신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가치를 재고하고, 우리가 무엇을 성취하든 못 하든 상관없이 삶에 내재된 가치가 있다고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고방식을 이런 식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을 바꾸기 위해 따를 수 있는, 연구에 근거한 전략들이 있다. 이러한 전략들 가운데는 음미하는 법을 배우기, 경외심을 느낄 시간을 내고, 우리가 정말 못하는 무언가를 주기적으로 시도해 보는 일이 보함된다.


경외로 가득 찬 삶은 음미하기가 훨씬 더 쉽다. 뇌가 낯선 장소와 경험을 처리하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리며, 이 때문에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것이 바로 차를 몰고 새로운 장소에 갈 때 집에 가는 것보다 항상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모든 감각이 새로운 경험을 수용하는 데 집중할 때, 일상의 책임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고 세상이 넓고 많은 가능성으로 차 있다는 것을 떠올리기가 더 쉽다. 또한 경외감을 체험할 때와 음미할 때 매우 유사한 정신적 과정이 사용되므로, 음미를 습관으로 만들려는 사람에게 훌륭한 연습이다.


습관적으로 과도하게 성취하려 하고 칭찬과 인정을 추구한다면, 십중팔구 잘 못하는 일을 몹시 싫어할 것이다. 이것은 특히 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사람 또는 어린 시절 똑똑하다는 말을 늘 들었던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다. 잘한다는 칭찬을 평생 좇았다면, 무언가를 잘 못하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다. 무언가를 잘 못하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거짓에서 벗어나는 훌륭한 방법이다. 실패를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할 수 없는) 일과 상관없이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 성공할 가망이 전혀 없는 활동을 추구하면,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즐기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비생산적이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편히 우리 시간을 '낭비'하면,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대신 자신만의 목표와 우선순위를 선택하는 자유가 생긴다.


<The Queer Art of Failure(기묘한 실패의 기술)>에서 잭 핼버스탬Jack Halberstam은 이렇게 말한다. “’실패는’ 완전한 패배다. 그리고 패배함으로써 삶, 사랑, 예술, 존재를 위한 다른 목표들을 상상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실패할 때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따르는 대신 무엇을 우리의 진정한 목표와 우선 사항으로 삼을지 선택할 자유가 생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가 잘하는 분야에서 계속 생산적이길 원한다. 그래서 잘 못하는 활동에 빠져 있으면, 우리는 성공해야 한다는 외적 압박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디지털 도구 덕분에 삶이 더 편해졌지만, 유지해야 할 수많은 계정과 걱정해야 할 알림들이 생겨버렸다. 소셜 미디어 애플리케이션들은 성취 포인트를 얻기 위해 삶의 모든 경험을 보여줘야 할 강력한 압박감을 조성했다. 즐거움이 영향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활동이 기록되고, 측정하고, 그것을 잘 해냈을 때 공유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런 집착적인 기록과 공유가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스마트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상상을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연락하기 위해 디지털 도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삶을 게임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디지털 영역과 상호작용을 하는 법에 대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경계를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재정의함으로써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우리의 생산성이 곧 우리의 가치를 정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리학 연구는 타인과의 경쟁보다 개인의 성장에 중점을 두는게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최고가 되고,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유능하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건 몹시 지치는 일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만드는데, 그래야 우리를 착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최고가 되길 원한다면, 결코 숨을 돌릴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해로운 세계관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치유의 여지가 없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색의 순간도 없다. 자신에 대해 연민을 갖고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멈출 때, 비로소 모든 느리고 ‘비생산적인’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프레드 브라이언트는 매우 성공한 심리학 연구자일지 모르지만, 그의 진정한 열정은 등산에서 찾을 수 있다. 프레드가 말한다. “정상에서 머무는 단 몇 분을 위해 우리는 힘겹게 산을 오릅니다. 하지만 등산은 정상에 오르는 경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음미하고 즐겨야 하는 경험입니다. 나는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과정을 좋아합니다. 정상에 머물기 위해서만 가는 게 아닙니다. 내겐 그게 바로 음미입니다. ‘들판을 달리며 최대한 많은 장미 향을 빨리 맡는’ 게 아니라 ‘멈춰 서서 장미 향을 맡는 것’입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인 동시에 짐이다. 이 점은 우리가 많이 읽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의무로 취급할 때 더더욱 그렇다. 불쾌한 뉴스에 계속 노출되면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끝없는 정보의 홍수는 잠시 멈춰 새로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해 숙고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 우리는 정보 과부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해법은 더 배우는 게 아니라 한발 물러서서 적은 정보를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삶에서 자율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꿀 수 없는 거대한 부정에 끊임없이 집중하면 정말 무력해진다. 자율성의 상실은 정보 과부하가 지닌 주된 위험 가운데 하나다. 수십 년 동안 연구자들은 부정적인 뉴스를 너무 많이 소비하면 개인의 정신 건강이 황폐해지고, 무력하고 취약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뉴스를 더 많이 시청하거나 읽을수록 두려움을 더 많이 느끼고, 실제로 지역 사회가 안전한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주변 환경을 더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두려움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자주 뉴스를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회피적인' 행동을 더 많이 했다. 더 자주 집 안에 머물며 타인과 어울리지 않았고, 새로운 일을 하거나 새로운 장소에 가기를 피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런 식의 고립은 개인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에 아주 해롭다. 일부 연구에서는 잦은 뉴스 시청이 심지어 개인의 인종차별적 편향을 높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식은 곧 힘이다"라는 격언도 있지만, 겁을 주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뉴스의 경우 정반대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겁을 주는 정보는 실제로 내적 통제감을 앗아가고, 자신과 타인을 돌볼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공중보건연구에 따르면, 뉴스에서 건강 관련 정보를 부정적으로 다루면 사람들이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가능성이 실제로 줄어든다. 예컨대 암 발생률 상승에 관해 경고하려고 만든 뉴스 기사는 실제로 반작용을 일으켜 암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매우 두렵기 때문이다. 기후 변화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뉴스 내용이 어둡고 절망적이면, 사람들은 숙명처럼 느끼고 생태계 붕괴와 맞서 싸우기 위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관심을 줄인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매우 이분법적인 사고를 부추긴다. 사람들은 상황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거나 아예 관심을 끊는다. 결단력과 개인의 노력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거나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하니 노력해 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문제에 대해 집착적으로 매달리도록 조장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게 불가능해지면,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실제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이 아니다. 마음이 분주해지고 늘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에 생산적인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진짜 싸움을 할 에너지를 앗아간다.


정보 과부하는 심지어 인지 능력에도 해롭다. 연구에 따르면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집중력을 잃는다. 그 가운데 아주 적은 정보만이 기억에 저장된다. 너무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넣으려고 하면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하거나 보유할 수 없다. 

정보 과부하는 비슷한 이유에서 의사 결정 능력에도 해를 준다. 어떤 정보가 유용하려면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처리하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맞아떨어지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 과부하 상태에서 이런 차분한 사색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온갖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사람들이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과부하에 걸리면 누군가가 거짓말하는 것을 잘 눈치채지 못하고 주어진 정보의 질이나 진위 여부를 평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습관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를 소비할 때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갈 위험이 가장 크다.


인간은 상호 의존적이다. 잘 살기 위해 사회적 교류와 공동체가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이 타인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운 나머지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고 그 과정에서 건강과 행복을 포기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우리의 가치가 타인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의해 정해진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고통스러운 자기 지우기를 조장한다. 타인과 진정성 있고 안전한 관계를 형성하려면 타인을 실망시키는데 편안해져야 한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많은 업무량과 다른 책임을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관계에서도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서적 무리는 일터에서 과로하는 것만큼 삶을 피폐하게 한다. 이 두 문제에 대한 해법은 우리의 진정한 욕구를 받아들이고, 싫다고 말하는 게 우리를 게으르게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그만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애쓰는 것을 중단할 때, 마침내 자신과 자신의 가치를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개개인이 우리에게 부가하는 요구에 도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부가하는 거대하고 광범위한 요구를 더 잘 떨쳐버린다.


당연히 우리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이 제시하는 이러한 이상들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해버리고, 바쁘고 정신없이 살게 하며, 욕구를 가진 것이 잘못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당한 기준에 맞춰 자신을 평가할 필요가 없다. 한발 물러서서 사회가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이 사실 우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타인의 마음에 들도록, 이해받도록 작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당위'에 저항할 때, 우리는 게을러지는 게 아니라 강해진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에게 해가 되는 기대에 부응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제약들에 순응하지 않으면 '게으르다'고 치부될 수 있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훌륭한 일이다.


작은 활동에 만족하라. 활동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지치지 않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의무라는 생각을 멈추고 대신 매일 할 수 있는 소소하고 구체적인 방법에 집중하는 것이다. 미국심리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추상적이고 무서운 문제를 보고 그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한지에만 신경을 쓸 때 우리는 무력감과 슬픔을 많이 느끼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반대로 관심을 문제 해결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작고 지엽적인 방법들로 돌리면 상황에 대한 통제감이 커지고, 불안이 줄어들고, 계속  싸울 동기가 더 많이 생긴다.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 편견과 편향을 탈학습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타인의 상황에 대해 알면 알수록 타인과 눈에 보이는 단점에 대해 더 많은 연민을 갖게 된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사람들이 처한 더 넓은 맥락을 보는 대신, 사람을 평가해 낙인찍고 재단하라고 부추긴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들을 복잡하고 역동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사람으로부터 결함이 없는 행동과 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을 멈추고 생산성과 상관 없이 가치 있는 사람으로 데하는 데 도움이 된다.


휴식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의 생산성이 당신의 가치를 정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의 가치는 활동 수준이나 내 삶에 '기여하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 그것의 가치는 아름답고 불완전하게 살아 있는 데서 온다. 이 작은 동물의 삶이 그 녀석이 무엇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본연의 가치가 있고 아름답다면, 내 삶도 본연의 가치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랑과 안락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이렇게 누구나 갖는 본연의 가치가 생산성과 무관하다고 깨닫는 건 멋진 일이다. 나는 이 점을 항상 기억하진 않지만, 시간을 들여 그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곰곰이 생각할 때 평온함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게 하면 많은 일을 하느라 고군분투할 필요도, 과도한 책임을 떠맡고 열심히 일하며 나 자신을 벌줄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족하다.


게으름이라는 거짓은 방대한 역사를 가졌고 산업화, 제국주의, 노예제의 유산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가장 가깝게는 유튜브  채널까지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매체에 침투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대부분 근면 성실의 가치와 야심과 동기가 없는 것의 위험에 대해 끊임없이 듣고 자랐다. 이런 종류의 강력한 문화적 프로그래밍은 쉽게 없앨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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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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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경제적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삶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행복과 삶의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친다.


[본문발췌]

이 책은 뼈 빠지게 일해도 결국 자본과 슈퍼리치의 노예가 되고 마는 현실에서 벗어나, 조금만 일하고 더 행복해지는 신개념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3만엔 비즈니스'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자는 게 아니라, 착한 일만 해서 돈을 벌고, 한달에 이틀만 일해도 충분하며, 남는 시간에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자는 새로운 삶의 방식인 것이다. 대도시에서 비싼 집세를 내면서 닭장 같은 사무실에서 하루 열 두 시간 노동을 하다가 몸만 망가뜨리는 미련한 삶을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

이 책의 철학은 우리보다 조금 일찍 난감함에 봉착한 서양의 '선진국 주민들' 사이에서 DIY라고 불리던 삶의 방식, 그리고 지역화,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허브 등 사회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움직임과 닿아 있다. 승자독식의 경쟁사회에서 비켜나서 슬기롭게 살아갈 길은 '사회에 이로운 착한 일거리'를 찾아 하면서 마을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그는 말해주고 있다.


'3만엔 비즈니스'의 밑바탕엔 '에너지와 돈에 의존하지 않는 풍요로움',  즉 '자급자족 생활'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생활을 '가난과 불편함'으로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독립적인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자존감을 통해서 얻는 더 큰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일 수 도 있습니다.
돈을 벌어들이는데 사용하는 시간을 줄여서 남는 시간에 자급률을 높이니까 자연히 지출이 줄어들어 궁핍하다고 느낄 이유가 없으며, 남는 시간을 문화 활동에 사용하거나 지성을 갈고 닦는데 사용하여 정신적으로 윤택하고 나아가 물질적으로도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출의 법칙
1. '의존형 라이프스타일'은 지출이 많다.
2. 자급률과 지출은 반비례한다.
    -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 자급률 목표는 자급하지 않을 경우의 지출을 기준으로 75%로 맞춘다.
      즉, 소비형 지출은 25%로 줄어든다.
    전체지출 = 소비형 지출 + 자급 활동을 위한 비용 지출
3. 자급자족 활동의 비용이 높으면 지출은 줄어들지 않는다.
    - 자급자족 활동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 노력한다.
    - 목표는 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가격의 30% 수준으로 맞춘다.
4. 휴일과 지출은 반비례한다.
    - '의존형 라이프스타일'은 휴일이 많을수록 지출이 늘어난다.
    - '자급자족형 라이프스타일'은 휴일이 많을수록 지출이 줄어든다.
    - 휴일을 늘리도록 노력한다.
    - 목표는 주 2일제, 일주일에 최소 5일은 휴식 및 자급 활동을 한다.
    소비성 지출(25%) + 자급비용 지출(75%X30%) = '의존형 라이프스타일' 지출의 47.5%
 

스스로 식량과 에너지를 생산하고 집을 짓는 자급자족 활동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우리 조상들이 갖지 못했던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과학기술은 인류와 자연이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으로 문명을 이끌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게 저의 소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기술을 지혜롭게 '적당히'만 사용한다면, 에너지와 돈에 의존하지 않고도 적절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도기에는 변화가 여러 지점에서 조금씩 다양하게 일어납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작지만 수많은 기회가 생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장소와 테마를 폭넓게 선택하면 비즈니스 기회는 그만큼 많아집니다. 변화의 방향은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만 보입니다. 변화의 시기에는 그 변화를 따르거나 변화를 일으키는 비즈니스가 유망하다는 걸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지역에서 '겸업화'를 촉진했으면 합니다. 본업과 부업 개념이 아니라 복수의 본업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겸업입니다. 문명의 전환기에는 겸업화가 고도로 발전합니다. 문명의 전성기에는 분업화가 대세입니다. 가치관, 사회 시스템, 문화 등의 틀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분과 수입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없는 사회인거죠. 이럴 때는 분업화할수록 효율이 높고 일하기도 편합니다.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경제 규모도 성장일변도입니다. 정치나 학문, 때로는 예술도 이런 흐름을 따릅니다. 하지만 어떤 분야든 지나친 분업화는 창조성을 떨어뜨리고 '재미'를 죽입니다.


남들이 만든 가이드라인과 매뉴얼을 잘 따라하는 '복제 기술'을 갖춘 사람은 많아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고차원의 개념화 기술'을 갖춘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인재'들은 변화의 시대에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멀어지면, 생산지를 속이거나 농약의 과다 사용 같은 문제들이 필연적으로 생겨납니다. 또 의존성이 심해지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이 줄어듭니다. 우울증, 면역력 감퇴, 성인병 증가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게 자급률을 높이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이유입니다.


좋은 학교를 나와 도시에서 좋은 직장을 얻고 많은 돈을 벌면서 소비생활을 즐기는 출세경쟁지향.
자연과 가까운 시골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서로 도우면서 돈은 적지만 행복하게 사는 걸 희망하는 평화공생지향.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과 이웃과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밝은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급자족도를 높인다고 해도 어쨌든 약간의 돈은 필요합니다. '3만엔 비즈니스'는 이 약간의 돈을 '착한 일을 하면서' '친구들과 도우면서' '편하게' 벌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작은 '힌트' 입니다.


인간은 용기와 희망을 잃었을 때 가장 불행합니다.


현대인이 '시스템의 올가미'에 빠져 있다. '슈퍼 리치' 한 명을 만들기 위해 '보통사람' 1만명이 죽도록 일해야 하는 시스템. '돈과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자급자족 생활의 지향점은 우리 모두가 이런 시스템의 덫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착한 일'만 하는 '3만엔 비즈니스' 아이템을 복수로 운영해서,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현금소득을 올리고, '좋은 친구와 동료'를 많이 만들어서 이들과 함께 남는 시간을 자급자족 활동에 사용하여, 지출도 줄이고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한다. 착한일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나쁜 일'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자연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말하지요.
이 책에서 설명한 이론과 원리를 적용해서 자신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실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작업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같이 하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 '시간', '체력' 만 있다면 얼마든지 같이 생각하고 다듬고 실행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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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비움, 만족, 작고 적고 단순한 조화와 균형 잡힌 삶. 오십에 다시 마음을 다잡아본다.


[본문발췌]


<도덕경>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삶의 지혜는 '멈춤'이다. 걸음을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바삐 걸을 때는 길가에 핀 민들레와 제비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너무 작아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선 결코 볼 수 없다.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고 오래 간다." 이 구절을 금언으로 삼아 인생 후반전을 느리게 천천히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있다.

일손을 놓고 잠시 쉬는 건 게으름이나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 꼭 필요한 멈춤이고 가장 우아하게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배운 또 다른 삶의 지혜는 '용서'할 줄 아는 용기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 무렵의 나는 "그때 내가 왜 그랬지" "그랬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심할 경우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자책했다. 인생 전반전의 내 삶에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한 건 결국 '욕심' 때문이다. '나 정도면 그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는데."라는 나에 대한 과신, 오만한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과한 욕심이 집착을 낳았고 집착은 괴로움이 되었다. 노자를 만난 후 나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대신 "그만하면 충분해."라는 말로 나를 격려하고 응원한다. 낙오자라는 열등감과 패배감을 갖고 살았는데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 전반기 내 삶은 '채움'을 지향했다. 실적, 성과, 재물, 명예를 채우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그러나 채우려 할수록 영혼은 더 큰 허기를 느꼈다. 빼곡하게 채운다고 채웠는데 '공허'에 시달렸다. 그러면 더 많은 걸 채우고자 나를 몰아세웠고 나는 더 힘들어졌다. 그러다 노자를 만난 후 존재의 본질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유와 욕망, 생각을 비우면 비울수록 삶이 더 충만해진다는 역설을 노자에게서 배웠다 


공자는 <논어>에서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고 육십을 '이순(耳順)'이라 했다. 나이 오십에는 천명을 깨닫고, 육십에는 자연의 섭리에 맞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명과 섭리의 현실적 규범으로서 '지지(知止)'와 '신퇴(身退)'를 제시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뒤로 물리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가르침이다. 천명과 자연의 섭리에 맞게 사는 삶의 모습이다.


'한 걸음만 더'하는 순간 멈추는 지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 도덕경 44장 중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사는 삶. 하늘은 도를 법으로 삼고 도는 자연을 법으로 삼는다. '天法道(천법도) 道法自然(도법자연)' - 도덕경 25장 중.  

순리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자연을 통해 깨닫는다. 욕심을 내려놓고, 서두르지 않고, 분수와 자리에 맞게 하루하루를 여유롭고 너그럽게 살아가는 게 자연을 닮은 삶이다.


사람은 대체로 나이가 들면 부드러워진다. 세월이 그렇게 만든다. 바닷가 조약돌을 부드럽게 만드는 건 영겁의 세월 동안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파도다. 파도에 실려 오는 세월의 힘이 조약돌을 부드럽게 만들 듯 사람도 세월의 힘으로 유연해진다. 인생은 억지로 붙잡으려 한다고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순리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


누가 능히 탁한 걸 고요하게 해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걸 움직여 서서히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 도덕경 15장 중. 
let it be. 무위와 서청의 지혜, 삶의 물이 탁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조급한 마음에 휘젓지 않고 서서히 맑아지길 기다리는 지혜.


나는 예수의 산상수훈 중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라는 말씀을 특히 좋아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비움'의 가르침과 의미가 같기도 하거니와, 인생을 살 만큼 살아 보니 마음속에서 타욕을 비우는 일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곧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이 걷기도 편하고 탈도 없다. 샛길을 탐하다가 인생 후반기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전설적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의 노랫말처럼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원칙대로 정도를 지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 인생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습니다. 내가 해온 그 모든 일을 생각해보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난 부끄럽게 살지 않았어요."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해와 달이 뜨고 지면서 생기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 즉 내 마음속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뜻한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기록된 날짜처럼 고정된 것이라 사람이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없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내가 느끼는 마음의 시간이므로 사람이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마음이 초조하면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고, 마음이 즐거우면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


"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작은 싹에서 나오고 구층 누대도 한 줌 흙이 쌓여 올라가고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억지로 하면 실패하고 집착하면 잃는다." - 도덕경 64장


도리스 컨스 굿윈이 쓴 링컨 전기 <권력의 조건>을 읽으며 삶의 토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링컨은 절친 죠슈아 스퍼드에게 자신이 가장 큰 장점이 단단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 단단한 강철과도 같아 그 위에 뭔가를 새겨 넣기도 힘들지만 일단 새긴 다음에는 문질러 지워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당나라 시절 처세의 달인이라 불리던 풍도는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고 했다.


세상 지식이라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남을 알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마음의 눈[心眼]'을 갖고 있어야 했는데 내겐 그런 눈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밝지 못했고 강하지도 못했다. 내가 정한 삶의 좌표라는 건 남들이 설정해놓은 기준을 모방하고 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핍은 정신의 덫이다. 물질보다 정신이 사람을 결핍된 존재로 만든다.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테라피는 간단하다. 이걸로 충분하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간단하지만 힘은 무척 세다.


“성인은 쌓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베풀지만 더욱더 많이 가지게 되고 사람들과 더불어 쓰지만 더욱더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 도덕경 81장


사람도 자연처럼 무위한 채로 살아가면 세상은 저절로 평화로워질 것이다. 무위하다는 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욕심을 비우면 남의 것을 탐하지 않게 되고 다툴 일이 없어진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안분지족한 삶을 살면 분쟁이 사라지고 싸울 일이 없어진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 간의 관계도 그렇다.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는다. 훌륭한 승자는 맞서지 않는다.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춘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덕이라고 하고 용인의 힘이라고 하고 하늘을 짝으로 삼는 지극한 일이라고 한다." - 도덕경 68장


"가지 굵은 나무 같아라. 의연한 산 같아라. 또 고독한 야수 같아라. 가끔은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별 같아라.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항상 나 자신으로 있으라." - 헤르만 헤세, <청춘은 아름다원> 중 '클라인과 바그너'


爲者敗之(위자패지) 執者失之(집자실지), 하고자 하면 실패하고 잡고자 하면 잃는다. - 도덕경 29장 중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것이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산책을 하다 보면 산책자의 온몸에서는 눈부신 감각이 열리며 찬란하고 고귀한 생각이 떠오른다. 산책을 통한 자연의 명상이 없다면 나긋하면서도 엄중하게 경고하는 자연의 탐구가 없다면 나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고 또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산책자는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한다." - 로베르트 발저, <산책>


"만물을 만들고도 공치사하지 않으며 모든 걸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 爲而不恃). 일을 하고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룬 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기에 자리를 잃는 일도 없다." - 도덕경, 2장


남은 인생을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소유에의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무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소유를 줄이고, 일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그로써 번뇌를 줄여 간소하게 사는 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표준으로 삼는다." - 도덕경 22장


일상을 소박하고 간소하게 만든 후 꾸준하게 실천하는 게 삶의 도를 실천하는 지름길이다. 만물의 시작은 하나다. 이 간단한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의상대사는 <법성계>에서 말한다. "하나 속에 모든 게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행복의 비결은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해진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고민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세상은 한없이 단순해지고 고민거리도 줄어든다.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기술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까 결정하는 기술이 행복에 더 필요하다. 이것저것 많은 걸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현명해지는 기술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를 아는 기술이다." - 윌리엄 제임스


단순하게 사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집중에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신을 것, 사는 곳을 최대한 단순하게 줄이면 진짜 좋아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불필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쓰고 에너지를 덜 쓰면 중요한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그만큼 더 많아진다. 대다수의 사람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기에, 당연히 해결책도 복잡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무력감에 빠지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두를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립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 ‘맑고 향기롭게 운동본부’ 발족식에서 법정 스님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단순하게 살 뿐이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나에게 가난한 자란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은 도무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삶은 앞에 있는 그 무엇이다. 태양은 매일 새로 떠오르니까.” -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


"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고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족함이다." - 도덕경 46장


"말이 많으면 처지가 궁색해진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만 못하다. 多言數窮(다언삭궁) 不如守中(불여수중)" - 도덕경 5장. 

말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아끼는 법,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말을 참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침묵하는 법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하고 돈독함을 지킬 수 있다. 영원한 걸 알면 너그러워지고 너그러워지면 공평해진다. 하늘은 곧 도가 되고 도는 영원하니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 도덕경 16장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건 스스로 너그럽고 공평하다는 증거다. 마음의 품이 넓지 못하면 타인을 믿지 못하고, 일을 맡기지 못한다. '이 일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은 오만함의 발로다. 타인을 나와 대등한 인격을 가진 성숙한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가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이다. 백성들 위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겸양함으로 스스로를 낮춰야 하고 백성들을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그 뒤에 둬야 한다." - 도덕경 66장


우주는 조화와 균형이 기본이다. 극단은 예외이고 조화가 깨지면 스스로 알아서 균형점을 찾아간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세상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곧 다시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평화로운 일상이 파괴되고 자유를 빼앗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원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그런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삶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우는 것이다. 그래야 연꽃처럼 꺾이지 않는다. 하루에 하나씩 비우자는 비움의 결심이 없다면 노년은 외로워 죽고 고독해 죽는다. 넘치는 욕망을 비우지 못하면 절대 고독과 소외를 느끼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된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는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말라비틀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래서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고 만다.” – 도덕경 76장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그것들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아(세르바나테스의 <돈키호테>에 나오는 이상향)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 두자.” – 장 그르니에, <섬>


“절대적으로 올바른 건 없다. 올바름이 변해 그른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해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도를 깨우친 사람은 곧지만 방자하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게 하진 않는다.” – 도덕경 58장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지 않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은 도드라지지 않는다.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 도덕경 24장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에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겨울이 가면 또 다른 봄이 온다. 그렇다고 봄을 시작이라 말하고 겨울을 끝이라고 말할 순 없다. 순환 고리에서 보면 봄이 끝일 수도 있고 겨울이 시작일 수도 있다. 삶에서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주 만물의 이치에 기대 생각해보면 반환점을 돈 지금의 내 인생은 새로운 시작이다.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약함이 도의 쓰임이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 도덕경 40장


"50년을 살아보니 49년이 후회더라. 行年五十(행년오십) 而知四十九年非(이지사십구년비)" - 회남자


"내 나이 예순,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둬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고 내 본분을 돌아보며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 정약용, <자찬묘지명>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소유에 집착하지 마라.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爲而不恃)

너무 꽉 채우려 하지 마라. 조금은 빈틈이 있어야 아름답다. 허이불굴(虛而不屈) 동이유출(動而愈出) 

가졌으면 더 채우려 하지 마라. 필요한 것은 하나로도 족하다. 지이영지(持而盈之) 불여기이(不如其已)

흘러간 시간에 집착하지 마라. 오늘이 최고의 선물이다. 집고지도(執古之道) 이어금지유(以御今之有)

흙탕물 휘젓지 마라. 가만두면 절로 맑아진다. 숙능탁이(孰能濁以) 정지서청(靜之徐淸)

만족할 줄 알아야 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오래간다. 지족불욕(知足不辱) 가이장구(可以長久)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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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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