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학에 '자유도'란 개념이 있다. '통계적 특성치를 계산하는데 자유로이 값을 취할 수 있는 관찰치의 수', 자유롭게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노예의 삶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자의든 타의든 사회라는 시스템에 구속 된 삶에 적응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갖는 삶의 방법에 대한 선택을 잊어 버렸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유 (自由) [명사]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2.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3.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

 

[비슷한 말] 자유자재, 해방

[반대말] 구속, 속박, 규제

 

(네이버 영어사전) freedom, liberty      

언론[종교; 출판]의 자유 freedom of speech[religion; the press]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자유를 위해 싸우다 fight for freedom

자유를 맛보다 taste[experience] freedom

자유를 제한하다 restrict sb's freedom

자유를 박탈하다 take away sb's freedom(s)

자유 계약 선수가 되다 become a free agent

자유 시간을 갖다 have free time

자유 시간을 갖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 have time for oneself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We should respect personal liberty.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그는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찾아 망명했다 He expatriated in search for a society that guarantees freedom.

가든지 남든지 그것은 당신 자유입니다 You are free[at liberty] to go or stay.

가든지 남든지 그것은 당신 자유입니다 It's up to you whether you go or stay.

선택은 네 자유다 The choice rests with you.

그는 그 기계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He operated the machine skillfully.

그는 지난달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He was freed from prison last month.

그녀는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She speaks three languages fluently[very well]. She has a good command of three languages.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자유'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물론 오래 살아서 차비라도 벌어놓은 사람은 언젠가는 기차를 타게 되겠지만 그때는 활동력과 여행 의욕을 잃고 난 다음일 것이다. 이처럼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돌아와 시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먼저 인도로 건너가서 돈을 벌려고 했던 어떤 영국 사람이 생각난다. 그는 당장 다락방에 올라가 시를 쓰기 시작했어야 했다.

 

 

롤프 포츠, <Vagabonding 여행의 기술>

돈과 삶을 결부시킬 때 우리는 자유를 사기엔 턱없이 가난하다는 확신이 더해질 뿐이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안티프래질>

시행착오는 자유를 의미한다.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소유에 의존하는 삶은 일을 하거나 존재를 바탕으로 한 삶보다 자유롭지 못하다.' - 윌리엄 제임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자유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이 순간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지금 이 순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것...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때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이 신성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바람처럼 떠돌던 무애인(無碍人)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의 원인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유의 최대의 걸림돌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핵심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도정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강판권, <나무 철학>

나무는 잎을 버린 뒤에야 여유를 찾는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풍요롭지만 여유가 없다. 인간도 몸이 가벼워진 뒤라야 여유로울 수 있다. 여유는 비어 있는 여백과 같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면 가지와 가지 사이에 여백이 생긴다. 겨울나무는 사람들이 겨울에 옷을 껴입고 움츠리는 것과 달리 옷을 입지 않고도 힘차게 생동한다. 여유가 있어야 자유롭다. 잎 떨어진 나무는 절대 자유 그 자체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득 찬 겨울나무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다.

 

 

혜민 스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 내가 가진 '자유'입니다. / 좀 힘들어도 /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 / 남의 눈치 보며 돈을 조금 더 버는 것보다 / 훨씬 나은 삶입니다. / 내 자유를 돈 받고 팔지 마세요.

 

무소유는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 /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아니다 싶을 때 다 버리고 떠날 수 있어야 진짜 자유인입니다. / 반대로, 없어서 갈증을 느끼는데도 무소유라는 이름으로 / 참고 사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E. F. 슈마허 외, <자발적 가난>

스스로 족함을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은 가난할지라도 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운 곳이다.

 

가난함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요, 아무런 바람도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모든 것을 가지려는 것이다. - 아코포네 다 토디

 

욕망은 속박이요, 버림은 자유이다. -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투스

 

자발적 가난은 유일하게 창조적인 가난, 그러니까 자유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성스러운 가난이다. 이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미래와 존재에 반하는 투쟁이며, 야망과 권력에 얽매여 사랑을 잃고 자아를 상실한 채 타인에게 운명을 내맡기는 삶의 확실한 해독제이다. 자발적 가난은 욕구의 결핍에서 나온다. 자발적 가난은 이러한 결핍에 만족한다. 자발적 가난은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존재의 단순한 골격만으로 부유함의 모든 욕구를 대체한다. 자발적 가난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의 기원이며, 성취다. 자발적 가난은 자아를 정복한다. 따라서 이는 정신 수행의 도구가 된다. 자발적 가난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물질세계 내부에서 고통을 덜어주는, 그리하여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이다. 자발적 가난은 일관된 철학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경험에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다. 자발적 가난은 제도적 가난을 자발적 가난의 권리에 대한 박탈로 인식함으로써 강력한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킨다. 유일하게 창조적인 긍지인, 가난에 대한 긍지는 자발적 가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자발적 가난은 마음의 평화이다. -안드레 밴던브뤼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청춘에 답하다>

고대사를 연구한 독일의 사학자 바르토르 니부어는 "야만의 시대가 온다"라고 말했다. "그런 시대가 이미 와 있다. 우리는 야만적 시대에 살고 있다. 야만이란, 뛰어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것들에 경의를 표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입법가든 혁명가든, 평등과 자유를 동시에 약속하는 자는 공상가 아니면 사기꾼이다."

 

자유의 의미를 안다. "우리는 충족돼야 하는 일정한 제약조건 속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힘을 알고, 절도와 분별력을 갖고 자유를 누리는 사람만이 성공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날마다 자유와 삶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네. / 어린아이, 젊은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이곳에서 위험에 둘러싸여 / 알찬 삶을 보내리라. / 나는 사람들이 그리 모여 사는 것을 보며,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고 싶네. / 그러면 순간을 향해 말할 수 있으리라, / <순간아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 이 지상에서 보낸 내 삶의 흔적이 /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 그런 드높은 행복을 미리 맛보며, /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즐기노라.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샤르트르는 우리의 목표가 자신의 존재와 자유(선택 가능한 범위 내)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인데도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회와 조직이 지시한 대로 행동하는 고지식한 사고에 갇혀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말대로 직업 같은 건 자유롭게 선택하면 될 텐데도 그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취직 인기 순위의 상위에 올라 있는 회사만 원하는 것은 전형적인 '융통성 없는' 사고다.

 

소위 성공은 사회나 조직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기대받은 성과를 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샤르트르는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자유롭다는 것은 사회나 조직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르트르 또한 조직과 사회가 들이대는 척도를 보며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예술 작품처럼 창조해 내야만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자유주의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를 첫 번째 가치로 소중하게 여긴다.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며 그것은 각 개인의 감정과 욕망, 선택으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정치에서 자유주의는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고 믿는다. 따라서 민주적인 선거를 옹호한다. 경제에서 자유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따라서 자유 시장 원리를 반긴다. 사적인 문제에서 자유주의는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신의 마음을 따르라고 권장한다. 다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개인의 자유는 인권 속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위험은 디지털 독재만이 아니다. 자유주의 질서는 자유와 더불어 평등의 가치도 중시해왔다. 자유주의는 늘 정치적 평등을 소중히 여겨왔을 뿐 아니라, 경제적 평등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사회 안전망 없이 쥐꼬리만한 경제적 평등만 가지고서는 자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자유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유례없는 최고의 불평등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부와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는 것이다.

 

 

마조리 켈리, <그들은 왜 회사의 주인이 되었나>

크리스토퍼 알렉산더가 지적했듯이, 행복은 우리가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낄 때 찾아온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에게 진실한 것,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캐서의 용어로는 자율과 확신이며, 데이비드의 용어로는(그리고 기업 구조의 용어로는) 자치다.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소속감에 대한 욕구 또한 중요하다. 생성적 구조에서 소속감과 자율은 함께 자유로이 작용해 활기 띤 전체를 만들어낸다. 

 

 

정철, <한글자>

칸, 원고지 한 칸에 글자 하나. 조정래 선생도 나도 이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란, 내 앞에 놓인 한 칸에 내가 넣고 시픈 글자를 마음대로 넣어도 좋다는 뜻이지, 두세 개의 글자를 한꺼번에 쑤셔 넣어도 된다는 뜻은 안니다.

 

 

정철, <불법사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마음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말라고 해도 되는 것.

 

자유형, 수영의 한 종목. 꼭 이렇게 수영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가장 자연스러운 영법. 그러나 세상 모든 자유형선수들은 다 똑같은 팔동작으로 물을 가른다. 자유를 안겨줘도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바보들의 게임.

 

 

김영하, <말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 직시하게 됩니다. ... 한계에 부딪쳤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

 

 

임영익, <메타생각>

창조는 그것이 수학이든 예술이든 항상 '자유로운 상상'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무엇이든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창조를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상상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유로운 상상조차도 기존 지식과 자신의 경험에 의해 크게 지배를 받는다.

 

 

E. 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욕망을 키우거나 확장하는 일은 지혜에 대립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유와 평화에 대립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이 커지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며, 그래서 생존을 위한 두려움도 커지게 된다. 욕망을 줄이는 경우에만 분쟁과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인 긴장 상태를 진정으로 줄일 수 있다. 

 

 

야노 가즈오,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우주는 시간이 흐를수록 빅뱅에 의해서 생성된 초기의 얽매임(균일한 상태)으로부터 해방되어 갈수록 자유롭게 편중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엔트로피를 자유로움의 척도로 파악하는 것이 인간행동의 엔트로피를 연구할 때 무척 중요하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역설적으로 항상 자유롭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제약이 된다. <끝없는 이야기>와 <모모>로 유명한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의 작품에 <자유의 감옥>이란 이야기가 있다. 자유로운 선택이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제약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상황은 다르지만, 자유를 인정하면 행동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결과 활동효율이 제약을 받게 된다. 이미 논했듯이 이 자유로움 때문에 사람이 하나의 활동에 100%의 시간을 모두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업무 생산성이나 시간 사용법 등 모든 것에 사용된다.

 

인간의 활동은 열기관과는 다르지만 열기관과 동일한 제약을 받는다. 미시적인 요소 간의 자원 분포나 엔트로피의 증가 등이 물질의 경우와 동일한 형태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활동에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으므로 효율의 정의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열역학에서 유추해 활동효율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자. 즉, 전체 활동 시간을 분모, 이 활동 시간 안에 이루고자 하는 활동에 투입한 시간을 분자로 해서 나눈 값을 활동효율이라고 정의한다. 이루고자 하는 활동에 사용한 시간의 비율이 활동효율이다. 즉 활동효율은 어떤 활동에 얼마의 시간을 쓸 수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자유의지대로 활동을 선택할 수 있다면 활동효율은 100%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활동이 열역학을 따른다고 하면 활동효율은 어느 상한에 따라 제약을 받는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 따르면 활동의 '자유로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롭다는 것은 하나의 활동에만 자원을 집중시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활동 시간에 제약이 가해지는 셈이다. 이는 열기관의 효율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의 제약을 받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원자의 움직임이 '자유롭기' 때문에 열기관의 효율은 일정 수치를 넘지 못한다.

 

 

로버트 그린, <권력의 법칙>

당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이 언제나 원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지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지하여 행복과 번영을 찾도록 만들면 당신은 두려울 게 없어진다.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가르쳐주어 당신 없이도 살 수 있게 만들지 말라.

 

선택의 제한된 특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너무 많은 자유가 일종의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한다. '무제한적인 선택'이라는 말은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마비시켜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선택의 폭이 제한될 때 편안함을 느낀다. 따라서 똑똑한 사람은 이러한 원리를 통해 기만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다. 눈앞에 놓인 대안들 가운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조종당하거나 속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이 적은 양의 자유를 주면서 실제로는 당신의 의사를 강력하게 강요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채지 못한다. 따라서 항상 좁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증가한 선택의 자유에 이르는 모든 길이 그렇듯, 맞춤 뉴스가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의 어려움을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자기 삶을 이끄는 가치가 무엇인지, 무엇을 했을 때 자유롭고 행복한지, 어떤 일을 하면 보람을 느끼는지 스스로 인지하고 삶을 선택해 나가야 하는데 인지를 못할뿐더러 그 선택을 자신이 하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 묻거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하려고 한다. 더욱이 '남의 나'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통해서 세우려고 한다. 아버지의 아들로,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으로, 아이들의 부모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타인에게 자신의 행복을 의탁하게 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에 따라, 혹은 배우자가 승진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행복이 결정된다. 자기를 위한 사람을 제대로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희생적이면서도 의존적이 되기 쉽다. 게다가 아이나 배우자, 부모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져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함부로 넘으며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간섭하고 간섭당하며 다툼을 반복하게 된다.

 

 

니콜라스 카, <유리감옥>

사람들은 여가시간을 보낼 때보다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로 인해 더 많은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자유시간에 사람들은 지루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다시 일하러 가는 걸 가장 싫어했다. 칙센트미하이와 르페브레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때보다 일을 할 때 더 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여가를 즐길 때가 아니라 일을 할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유리감옥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 몸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쇠약해질 뿐이다.

 

 

다니엘 슈라이버, <어느 애주가의 고백>

실패란 동시에 자유를 의미한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죄의식을 견디기 위해, 불안함과 자책을 덜기 위해, 자신에 대한 커다란 기대와 스스로의 하찮음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건 완전히 어리석은 전략이다. 술은 삶의 어떤 경험, 어떤 경력, 위대한 생각, 일 혹은 책과도 상관이 없다. 삶은 그 자체로 항상 충분하다.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자유가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형성하는 활동에 존립하는 한에서,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경우라면 그 활동은 생산활동이다.

 

 

최인철, <굿라이프>

소유물은 비교를 불러일으키지만 경험은 비교를 유발하지 않는다. 경험은 우리를 비교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경험의 삶이 곧 무소유의 삶인 이유는 무소유의 본질이 소유가 유발하는 비교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무소유의 삶이 부담스러운 우리에게 경험의 삶은 아주 좋은 대안이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유가 우리 손에 있는 사회가 아니라, 시스템이 자유를 움켜쥐고 우리를 대하는 사회이지요. 우리는 이런 사회를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별로 없지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성취하면 칭찬받지만, 열심히 일하지 못하는 순간 냉정하게 내쳐지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차 있는 시스템, 그들을 언제든지 내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신자유주의 사회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없는 곳에는 놀이도, 창의도, 혁신도 없습니다.

 

 

최윤식/최현식, <제4의 물결이 온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강제한 규범이라도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해서 거역하거나 고칠 수 있는 의지와 행동이다. 왜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울까? 자유의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행동의 자율성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 판단에 대한 가설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판단한 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 가설을 세우고 기존 가설과 비교하여 더 좋은 가설을 선택하는 행위로 옮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자유의지의 핵심은 선택의 자유도가 아닌 가치 판단의 자유도이다. 기존 가치 판단을 학습해서 새로운 상황에서 가치 판단 기준을 재설정하는 능력도 포함한다.

 

 

법정 스님, <무소유>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야마시타 히데코,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

소유욕은 가지면 가질수록 자유를 잃는 정체 모를 욕구입니다. 호흡, 휴식, 수면, 음식, 배설처럼 본능에서 오는 욕구와 달리 이차적 욕구인 소유욕은 생명 유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만 물건을 갖고 싶어할까요? 타인과 비교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대산하기 위해서? 집에 있는 물건을 차분히 살펴보는 일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안에 숨은 당신의 진심을 알게 될 테니까요.

 

 

소노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두다>

남과의 비교를 중단하면 자유로워진다. 자연스레 막힘없이 나의 생활을 키워나가는 힘이 생긴다. 나만의 특기가 발견되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고, 더 단순하며, 훨씬 큰 위안을 줄 수 있게 과장하고 창조할 자유가 있다." - 모파상, <피에르와 장>의 서문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길>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허나 이런 이상은 거의 완전히 잊어버려 '바탕'이란 말을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버렸다. 똥더미 속에 감춰져버린 다이아몬드가 되어버린 셈이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 말이다!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퍼져야 하는 나팔소리이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나의 마음속엔 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고, 진실을 추앙하고, 거짓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보다 넓은, 우주를 닮은 마음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마음을 거역하고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우주의 완성은 나의 완성에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존재로 나의 영원한 지성에 다가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는 모든 악한 풍파 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를 지켜내는 것, 내 욕망을 다스리는 것, 혈기를 참아내는 것, 그것이 나의 자유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명예와 호화로운 저택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공허하고 따분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의 삶이 억눌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당신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자연의 뜻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을 태어나게 만든, 그리고 당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자연의 질서를 기억해내십시오. 질서가 당신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 깨달으십시오. 그래야만 사람들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유시민/정훈이, <표현의 기술>

표현의 기술은 자유롭고 자신 있게 내면을 표현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신영복, <담론>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부정적 집합표상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representation)은 인간의 인식활동입니다. 우리는 남산을 바라보지 않고도 남산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대상과 격리되어 있지만 대상을 재구성하는 인식 능력입니다. 대상은 그에 대한 1개의 표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표상 즉 집합표상으로 구성됩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고유의 집합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란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봉건제의 집합표상이 청산되지 않는 한 프랑스혁명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 한 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인도가 안겨 주는 달관은 그것의 크기에 있어서 인류사가 역사의 도처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욕망의 집합표상을 일소하는 느낌을 안겨 줍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적 사유로서는 쉽게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탈근대를 지향하고 비근대를 조직하는 후기 근대사회의 실천적 과제에 앞서 인도의 달관은 '카르마의 손損'이라는 점에서 탈문맥, 탈정의 의미로 주목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완전한 자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몰입할 때 자유를 얻는 까닭은, 더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자유로운 까닭은, 중요한 일에 집중해 정신을 가다듬는 게 건강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몰입하면 결정을 내리기 쉬워지고 좋은 것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질 수 있다. 지금 내게 있는 게 충분히 좋다는 걸 안다면, 무엇 때문에 마냥 더 좋은 것을 쫓아다니느라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몰입하면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목표에 집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공을 이뤄낼 수 있다. 이처럼 대안을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와 자신이 선택한 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 깊이 없이 폭넓은 경험만을 추구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래, 어린 시절에는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게 바람직하다. 아마 필수라 해도 좋을 거다. 결국엔 세상을 폭넓게 경험하면서 내 모든 걸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황금이 묻혀 있는 곳은 깊다. 뭔가에 끊임없이 몰입해 깊이 파고들어 그걸 캐내야 한다. 관계, 직업, 훌륭한 생활 방식을 만들기를 비롯한 모든 일에서 마찬가지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누구도 나더러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저마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덕무, <문장의 온도>

호기심과 상상력의 힘을 긍정해야 한다. 그 능력에 따라 인간의 미덕과 악덕,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통, 현재와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는 반드시 호기심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다면 어떻게 새로운 세계, 자유로운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겠는가?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창조의 진정한 에너지가 바로 어린아이의 호기심과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개별을 배제하는 보편의 감옥에 사는 것과, 그 밖에서 개별자로 자유롭게 사는 것.

 

 

안드레아 울프, <자연의 발명>

자연은 훔볼트의 교사였다. 훔볼트가 자연으로부터 얻은 교훈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자연은 자유의 영역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균형은 다양성에 의해 이루어지며, 다양성은 정치적 도덕적 진실의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끼나 곤충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참나무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자연 속에서 각각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며, 함께 모여 전체를 이룬다. 인간도 자연의 작은 구성요소 중 하나에 불과하다. 훔볼트에게 자연은 그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자유공화국republic of freedom이었다.

 

 

팀 페리스, <나는 4시간만 일한다>

물질주의적 탐닉과 시간에 쫓기는 강박, 그리고 비교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인간은 속도와 크기에 집착하는 문화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벋어날 수 없다. 속도와 크기에 집착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속도를 줄이는 법을 배우자. 일부러라도 길을 잃어보자.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 - 이남곡

  •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등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인간은 수많은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통해 자유를 증진해왔다.

  • 둘째는 물질의 결핍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한 생산력 발전이다. 자유는 물질의 절대적 결핍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숨 쉬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도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야 한다.

  • 셋째는 인간의 의식을 변혁하는 것이다. 타인과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에게 먼저 양보하고 싶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과학, 종교, 여성운동도 진보의 중요한 영역이다.

 

 

카트린 지타,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우선순위에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나의 자유 의지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기 때문에 삶이 힘든 것이다.

 

영화 <쇼생크의 탈출>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두려움은 너를 포로로 붙잡아 두지만,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더 많이 가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뿐이다. 여행지에서처럼 꼭 필요한 것들만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일상에서도 여행자처럼 자유로워질 것이다.

 

 

구본권, <로봇시대, 인간의 일>

자율주행 상황의 딜레마는 우리의 삶이 알고리즘의 세계로 변환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사람의 판단과 행동이 언제나 합리적이지도 않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지도 못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우연과 무작위, 그리고 무지의 장막으로 보호되어왔다. '실수'라는 것은 사람에게 허용된 자유의 영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존하고 위임한다는 것은 이러한 우연과 무작위의 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다. 우리는 사람과는 달리 기계에 대해서는 너그러울 수도, 자유를 부여할 수도 없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여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유시간을 즐기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별다른 기술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자유시간은 일보다 즐기기가 어렵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여가가 아무리 생겨도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 여가를 효과적으로 쓰는 것은 자동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사실은 신성하며, 의견은 자유롭다. - C. P. 스콧

 

 

모종린, <골목길 자본론>

골목을 사랑하는 여덟 가지 조언을 관통하는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주의다. 개인의 자유, 선택, 창의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발적인 협력을 통한 공공재 창출 능력을 신뢰하는 것. 자유주의자라면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큰 집단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율적으로 성장한 골목길의 변화에도 유연해야 한다. 골목길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야 하기에, 개인이 선택한 결과로 발생한 골목길의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가 골목길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도브 사이드먼은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서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이드먼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freedom from'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시시콜콜 간섭하는 상사로부터의 자유, 광고를 보라고 강요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동네 가게로부터의 자유, 지역 은행으로부터의 자유, 호텔 체인들로부터의 자유가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는 '행동할 자유freedom to'라고 사이드먼은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그들의 자유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선거, 헌법, 법의 지배, 그리고 의회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많은 지역에서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지역에서 혼란이 확산되면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먼은 리비아나 시리아, 예멘, 또는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 추락 이후의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이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얻지 못한 점에 주목해 그 차이를 '자유의 불평등'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불평등일 것이다. 사이드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벗어날 자유'를 얻는 건 신속하고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행동할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법률과 도덕률을 만들어 행동할 자유를 갖게 되기 전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이기주, <말의 품격>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몽테뉴가 노래한 삶의 태도 = '정신적 자유인', 가장 아름다운 정신은 가장 많은 다양성과 유연성을 지닌 정신이다. 철학이란 어떻게 죽을까를 배우는 것이다. 기적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자연의 본질에 따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의 준비는 자유의 준비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자유 의지의 몸부림과 다시 신에게 돌아가려는 운명적인 믿음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사시다.

 

칸트에 따르면 자연은 원인과 결과의 체계인 반면 도덕적 선택은 자유 의지의 문제인데 자유 의지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도덕적 선택을 하거나 단순한 본능을 넘어설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의 영역을 초월하여 자유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자유의 영역은 유일한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만 허용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인생에는 구속을 벗어나 제 멋대로 해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점에서, 이성은 우리에게 그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려 준다. 그것은 타인이 제 멋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때라고 말이다.

 

 

시라토리 하루히코, <니체의 말>

자유를 추구하고, 사물을 보는 시점을 보다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은 많은 이점을 낳는다. 우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확대시키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그것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분노나 혐오의 감정도 자연히 필요치 않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활기차고 말쑥한 인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정신과 마음이 이처럼 현명하기 때문이다. - 선악을 넘어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싶다면 자신의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어떻게든 구속할 필요가 있다. 감정을 제멋대로 풀어놓는다면 그때마다 감정이 자신을 휘두르고, 혹은 감정이 이끄는 한 방향만으로만 몸과 마음이 향해 결국에는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본인의 의지대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같은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실천하고 있다. - 선악을 넘어서

 

인생에는 돈도, 쾌적한 주거도, 건강하고 풍성한 식사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람은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유가 도를 넘으면 사람은 180도 돌변하여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고 휴식 시간까지 구속당하며, 조직에 조종당하고 끝내는 국가의 구속까지 받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

 

 

틱낫한, <중도란 무엇인가>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다. / 비우면 채워진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충만하며, 나비는 춤으로 비우고 충만하네"라고 하듯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들을 다 비우면, 하나의 견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다. / 견해를 버리는 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탐욕과 괴로움은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를 고집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중도는 바로 이런 관념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 -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고용주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한다. - 볼턴 홀 <3에이커와 자유>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자유는 단지 권리가 아니라 획득해야 할 기술이다. 나만의 렌즈가 아니라 다양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기술이자 아무도 상상한 적 없는 무언가를 상상해서 아름다움이나 의미나 영감을 찾는 기술이다. 각자의 삶은 이런 자유에 관한 우화다.

 

고대 아테네에서 고용은 노예를 위한 것으로 자유인은 남에게 굽실거리며 일을 해서 임금을 받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꾸로다. 고용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고 자기를 팔아서 시간제 임금을 받는 것을 성공으로 여긴다.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자유롭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데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여긴다.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고, 사전에 정해진 목표로부터의 자유와, 사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불가피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태도로부터의 자유에 의존한다.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자존감을 갖지 못하면 자유를 얻을 수 없고, 자유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자존감이 파괴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과 맞서 싸우고 저항하고 의문을 갖고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면 안 된다. 세상은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변화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도하고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존감이 충분하면 누구와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지 않게 된다. 나 스스로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비교할 이유도 방법도 없다. 이때야 비로소 막힘이 없어져 시야가 넓어지고 보는 만큼 자유롭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행복을 얻게 된다.

 

 

철학을 추구하는 자는 마음이 자유로워야 한다. - 플톨레마이오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모종의 규칙과 한계가 있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도 없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정부의 정치적 개입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은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그런 정책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내려놓을수록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더 높이 날고, 높이 날수록 더 많이 본다. 가는 실에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다시 오지 않을 현재의 순간을 사랑하고, 과거 분류하기를 멈추는 것. 그것이 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의 모습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새는 날갯깃에 닿는 그 바람을 좋아한다.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창작의 자유는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돈으로 살수도 없습니다. 이 창작의 자유는 먼저 작가 자신이 그것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필요로 해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자유는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지켜봅니다. 만약 이 자유를 다른 무언가와 바꾸려고 한다면 자유라는 새는 멀리 날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를 팔려고 한 대가입니다. 작가가 다른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글을 쓰기 위해서만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지만, 그 사회에 대해서는 도전이 됩니다. 물론 그것은 의도한 도전이 아니므로 작가 스스로 영웅이나 투사가 된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영웅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다해도 그것은 어떤 위대한 과업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작품 외적으로 약간의 공훈이 더해졌을 때의 일입니다. 작가가 사회에 도전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언어를 통해서여야 합니다. 그조차도 작품 속 인물이나 배경을 빌려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문학은 분노의 고함소리가 아니며, 개인적인 성토의 수단도 아닙니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작품에 녹여내 문학으로 완성시킬 뿐입니다. 그런 작품만이 시간의 풍화작용을 이겨내고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사회에 도전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견디고 살아남은 작품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유력한 답이 됩니다. 이로써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모든 소란은 사라지고, 작품 자체의 목소리만이 남아 독자의 가슴을 울립니다.

 

공空은 도상 안에 있으면서도 도상 밖에 있다. 일종의 해탈이며 정신적 경지다. 사람은 일정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또한 그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롭고자 한다. 선은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중요한 일깨움을 준다. 시간과 공간은 회화에 부여되는 일종의 한계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 무소부재하는 선에 다다를 수 있을까. 이렇듯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조형예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꼭 필요한 거리가 없으면 온종일 충돌이 일어납니다. 가정과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과 양해가 필요한데, 관용과 양해는 각자의 마음속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최우선 조건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되는데,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미디어가 모든 시간을 장악해버린 이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누군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면, 고독만이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고독이 병통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고독은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린위탕(임어당), <생활의 발견>

자유인의 네 가지 특징: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정정(訂正)하는 유머감, 행위의 변덕성과 분방성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여행의 소득은 전혀 알거나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새로 고쳐보는 데 있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물음과도 통한다. 과거에 대한 배려는 미래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나그넷길에서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도 자유인이다. 인생 그 자체가 자유이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정착사회의 번거로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보려는 욕구의 발로다. 여행이란, 안전한 일상생활과 다른 이질적인 세계로, 긴장을 내내 수반한다. 예컨대 편리한 환경에서 불편한 환경으로, 넉넉한 생활에서 모자라는 삶으로 스스로를 옮겨보는 과정인 것이다. 여행이란, 안전할 수도 있고 호사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늘 자유분방해야 하며, 고독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나서야만 한다. 여행이란, 여행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다. 자기 안의 '고독한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스스로의 인생뿐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를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놀라운 체험이다.

 

여행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관습에서 탈피하는 일이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일이다. 굳이 해방을 꾀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여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자유로워진다. ... 여행은 끊임없는 과정이다. ... 여행, 사랑, 죽음은 모두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나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접한 칼 마르크스의 말에서 현대인들이 어떻게 해야 저장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 바로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있어 존재를 키우고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대표적 행위가 여행이라고 본다. 여행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존재감은 커지고 우리는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히 소유욕과 저장강박이 약해진다. 일본의 하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외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자유다. 그 자유는 때로는 여행이 끝난 후의 삶으로도 확장된다. 그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덜 쓰고 덜 일하되 더 여유로운 삶을 모색할 수 있다. 마음의 에너지가 물질을 소유하는 대신에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미쉘, <오늘부터 미니멀라이프>

물건이 적어지니 시간에 여유가 생겼고 더불어 마음까지 가볍고 자유로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손에 뭔가를 쥐고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누구나 미니멀리스트였다. 그러나 자라면서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을 꽉 움켜쥘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빼앗긴다. 나 자신의 가치는 갖고 있는 물건의 합계가 아니다. 물건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주 잠깐 동안일 뿐이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은 에너지와 시간은 물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알맞은 정도라면 소유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도를 넘어서면 소유가 주인이 되고 소유하는 자가 노예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를 얻었다. -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스티븐 그린블랫, <1417년, 근대의 탄생>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할 것 없이 지각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에서, 기본 입자들의 무작위적인 일탈이 있기 때문에 곧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긴 예정된 연쇄작용에 속할 뿐이라면 자유의자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만약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면, 태고부터 하나의 원인은 또다른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자유의지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운명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끌어내곤 한다.

 

 

법인 스님,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진정한 힐링은 나를 내 삶의 주체로 세우고 독창적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유와 행복은 성취된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암 진단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직관이 내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이미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과다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 관계의 그물망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 부분 그대로가 곧 전체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린다. -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김예슬 선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자비와 지혜, 혹은 깨달음과 사랑은 선후나 우열로 나뉠 수가 없는 가치이다. 마치 평화 없이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유 없이 평화로울 수 없으며, 존중 없이 평등이 있을 수 없고 평등 없이 상생이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이철수, <이철수의 웃는 마음>

자유나 기쁨을 소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그런 병든 사람은 되지 말자.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부와 사치에만 익숙해지면 소박한 삶을 잊게 되고 내면적인 즐거움과 평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많을수록 더 큰 속박을 당하게 된다. 크게 바랄수록 자유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한다>

개인정신주의는 개인의 마음속이 평온하고 자유로운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너무 적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게 균형이 잡힌 부(富)라는 것은, 그 상태를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의 내적 균형이 지구 전체의 균형으로 이어져야 한다.

 

빚을 내서 물건을 하는 행위는 미래의 시간까지 구속하는 일이므로 아무리 호화스러운 것을 산다 해도 그걸 자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경제적 자유(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빚이 없고 매월 나가는 고정비가 적다는 의미에서)와 시간적 자유(오프그리드에서 생활하기 위해 다소의 관리는 필요하지만 내킬 때 하면 된다는 점에서)를 바탕으로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돌아봤을 때 자신만이 아니라 지구환경에도 유익한 집과 생활이 완성되어 있는 삶을 추구한다.

 

 

테미 스트로벨, <행복의 가격>

Tumbleweed Tiny House company를 운영하는 제이 셰퍼Jay Shafer는 영화 <TINY>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은 집을 선택함으로써 얻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자유조. 작게 살면 세상이 커집니다. 금전과 시간 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죠. 지금은 온 세상이 내 거실입니다."

 

자유와 행복과 직접 관계가 있는 건 돈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다.

 

 

애덤 스미스 원저, 러셀 로버츠 지음,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세인의 관심으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뒤따르더라도, 사람들은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이를 통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과 근심, 굴욕을 충분히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은, 이런 관심을 얻는 순간 모든 자유와 편안함, 근심 걱정 없는 안전함은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제 3인류>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그물이나 창보다 더 무서운 덫이로군요. 저 고릴라는 손을 펴고 과일을 포기하기만 했어도 자유를 얻고 목숨을 건졌을 텐데....<놓아 버리기>의 필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죠.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 것이라고 믿고 간직하려는 하는 것은 하나의 덫이에요...우리는 무언가를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며 포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덫에 걸린다

 

 

김동우, <트레킹으로 지구 한바퀴>

매일 빠른 속도로 의미 없이 일상이 내 곁을 흘러갔다. 두 눈은 어지러웠고, 두 어깨에는 극심한 피로감이 쌓였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에, 그리고 게슴츠레 침을 흘리는 내 인생에 쉼표를 찍어 보고 싶었다. 한 번쯤 내 감정에 솔직해지기... 나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남이 아닌 내가 원하는 일 해보기... 정말, 그래 보기. 하지만 가면을 벗기까지는 적잖은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실현 가능성은 낮아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움켜진 손아귀를 펴는 거다. 그러면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 새로 손에 쥔 그 무엇은, 그동안 꽉 쥐고 놓지 않았던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경험이었고, 놓기 전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유였다.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그 많은 돈으로 무얼 하시나요? 자유, 자유를 사고, 내 시간을 사요. 그게 가장 비싼 거죠. 인세 덕에 돈을 벌 필요는 없게 됐으니 자유를 얻게 됐고, 그래서 글 쓰는 것만 할 수 있게 됐죠. 내겐 자유가 가장 중요해요. -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중에서

 

 

박경철, <문명의 배꼽, 그리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인 없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제레미 리프킨, <3차 산업혁명>

이제 새로운 모습의 미래가 삶의 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바로 협력적 이해관계, 연결성, 상호 의존에 기반을 둔 미래가 그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타인에게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고 고립된 섬과 같은 존재가 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깊이 참여할 때 얻을 수 있다. 자유가 삶의 최적화라면,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가, 또 사람들과 얼마나 강력한 사회적 유대를 맺는가를 토대로 측정해야 마땅하다. 외딴 존재로 살아가는 삶은 딱하고 무의미하다. 삶의 질이라는 꿈은 집단 내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고립되어 타인을 배제한 채로 높은 삶의 질을 향유하기는 불가능하다. 삶의 질을 획득하려면 모든 사람이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어느 한 사람 뒤처지지 않도록 모든 구성원이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계몽주의 경제학자들은 행복과 '훌륭한 삶'이 개인적 부의 축적과 동의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3차 산업혁명의 문턱에 있는 오늘날 젊은 세대는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행복은 사회적 자본의 축적에 비례하기도 한다고 믿는다. ...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소한 더욱 커다란 공동체에 대한 구성원 모두가 집단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 과연 그 공동체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우리의 시공간적 터전은 임의적인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생물권 자체를 아우르는 범위까지 확대된다.

 

19세기와 20세기에는 근면함이 사람의 표지였고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물질적인 부를 맹렬하게 추구하면서 수세대의 사람들이 기계로 변했다. "우리는 일하기 위해 살았다." 3차 산업혁명과 협업 시대는 인류를 실용적 세계에 갇힌 기계화된 삶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들이마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놀기 위해 산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유와 놀이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포착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의 활동은 놀이로 나타난다." 여기에 나는 덧붙이고 싶다. 사람이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낄 때가 있는가?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점점더 갈수록 현대인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제도적인 삶을 떠나서 거의 또는 아무런 독립적인 삶을 누리지 못한다. 만약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다고 할 때, 사람들은 여행사와 관광산업이 만들어낸 지점으로 이동해가기 위해서 수송산업을 이용한다. 이것은 그들이 시스템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여기서 도피할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로운 삶에는 어느 정도의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덕행의 가능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의 부유한 부문에 속해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이러한 포기는 너무나 극적이고, 너무나 겁나는 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눈을 가리고, 몸을 결박하고 있는 제도적 지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물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빈곤과 전쟁에서 헤어날 방법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진보'의 프로젝트들에 의해서 안락과 편의성이 증대하면 할수록 인간은 제도와 기술과 전문가의 노예가 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을 진실로 인간답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 다시 말하여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온 자기희생의 정신과 타자에의 능동적인 환대와 같은 오랜 세월 인류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적인 덕행은 극히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시간은 교환가치의 법칙에 따르는 희소하고 귀중한 상품이다. 이것은 매매의 대상이 되는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점차 자유시간마저도 '소비되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구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노먼 메일러는 냉동한 오렌지주스와 액체상태의 오렌지주스의 원가르르 각각 계산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액체상태의 오렌지주스 쪽이 언 것을 다시 녹이는 데 필요한 2분간의 시간을 벌기 때문에 그 2분만큼 비싼 값이 덧붙여진다고 한다: 이처럼 소비자는 자기 자신의 자유시간마저도 돈을 주고 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번' 시간, 즉 이윤을 생기게 하는 자본, 잠재적 생산력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시 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김형욱, <손끝에 닿은 세상>

자유로운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하노니.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고 길을 잃지 않기를.... 그리고 날이 밝으면 행복한 미소 지으며 길을 떠날. 이 길의 끝이 어드메일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올곧게 내 의지로 자유롭기를 바라며. 그 끝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되기를....

일평생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바람같이 살아가길 바라며....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나는 당신과는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 - 볼테르...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롤스의 두개 정의의 원칙, 1) 자유와 관련한 원칙으로 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2)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한 원칙으로, 일단 공정한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사회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편익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이나 경제 예측 따위를 진심으로 믿기 어렵다. 하지만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들의 행동이 예상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 그런 일관성은 없다. 일관성이 없으면 일반화 하기 어렵고, 그러면 예측하기도 어려워 진다.

 

 

강신주, <철학이 필요한 시간>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타자의 자유를 긍정한다면, 두 사람의 사랑이 항상 푸르게 유지될 가능성은 매우 커진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놀이는 자연의 진행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해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 호모 루덴스, 하위징아"

 

 

제레미 리프킨, <소유의 종말>

순순하 놀이는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가장 높은 수준의 표현 형식이다.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움을 두려워하여 자유를 쓰고 싶어하는데.... 그래서 하는 것이 놀이다' - 샤르트르

 

인간은 순수한 놀이에 완전히 참여해 보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자유에서 자율성을, 자율성에서 나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능력을 연상하면서 우리가 근대를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동의 결실로 얻은 재산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 징표로 여겨졌다.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부터 남을 배제하는 권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개인적 자유를 지키는 최선의 길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고 공감하고 포용할 수 없으면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법정 스님,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노암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자유란, 어떠한 환경이나 속박 그리고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세네카'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잔 브라흐마,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어떤 장소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리 안락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그곳이 감옥이다. 이것이 '감옥'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다. 만일 당신의 직업이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그때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관계 속에 있다면,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병들고 고통스런 육체 속에 있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 다면, 그것 역시 당신에게는 감옥이다. 자유는 당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욕망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현대 서구 문화는 첫 번째 자유, 곧 욕망의 자유만을 인정한다. 그러한 자유를 국가 헌법이나 인간 권리 헌장 맨 앞에 모셔두고 숭배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근본 신조는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국민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에 사는 국민들이 그다지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두 번째 자유, 곧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몇몇 종교적인 공동체 안에서만 찬미를 받는다. 그들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만족과 평화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내가 머물고 있는 절처럼 금욕적인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벽 하나를 다시 뛰어넘은 기분이 들었다. 자유라는 건 분명 자기 손으로 붙잡는 것이다.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남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뇌를 희생하며 남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이야.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았어.

 

 

류콴홍, <철학우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어디에서든 속박 가운데 존재한다." - 루소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종종 상대적인 개념이랍니다.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존 로빈슨, <인생혁명>

덜 쓰고 덜 버리며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새로운 멋진 인생에 한 발 내딛는 기쁨과 더불어!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김홍신, <인생사용설명서>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노트>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 세상의 섭리일까. 1번 나는 둥지를 지키는 대신 자유를 잃니다. 2번 나는 자유를 지켰으나 둥지를 잃는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이 상실한 그것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스티브 디거, <잠들기 전에 읽는 긍정의 한줄>

용서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용서는 실천과 자유로 가는 열쇠다. Forgiveness is the key to action and freedom. - 한나 아렌트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서는 것만이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며, 진정한 나를 찾는 그 궁극적인 보상이다. Self-reliance is the only road to true freedom, and being one's own person is its ultimate reward. - 페트리샤 샘슨

 

우연에 대처하는 법: 자유로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고, 사고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하다. - 에리히 프롬

 

완벽한 대답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 - 알렌 레이드 맥기니스

 

 

다릴 앙카,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선택할 자유, 또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가 당신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일, 그것이 곧 당신 자신의 카르마를 끊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 자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을 때, 당신은 부정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은 자유롭지 않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이란 한 마디로 말해 '힘이 없는 행동' 입니다.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자기가 창조해 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타인을 상처입히지 않고,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고, 서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필요로 하는 일 모두를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자유

신체, 거주/이전, 직업선택, 주거, 사생활의 비밀, 양심, 종교,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비추어 최근 조국 전 장관 이슈를 되새겨 본다.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의심만으로 야당, 검찰과 언론의 무차별 폭력과 같은 일방적인 뉴스가 정상적인가?

 

진보와 보수, 자유와 평등, 서로 상충되는 다른 생각들..... 다른 이념과 주장이 상존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한다.

 

 

[본문 발췌]

 

인간사회에서 누구든, 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그 사람의 의지에 반해서 권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하다. 이 단 하나의 경우 말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밀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했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침묵을 강요하면 인간과 사회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산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가운데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며,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대립의 존립조건과 계급 그 자체를 폐지하고 종국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급지배도 폐지한다. 이렇게 해서 계급과 계급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선언>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중우정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미디어 왜곡과 여론조작으로 인한 중우정치의 위험은 우리의 발밑에 똬리를 틀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시민들이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대안미디어를 활용해 언론권력의 여론조작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위험에 또 발뒤꿈치를 물리게 될 것이다.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보수주의는 생물학적 본능이고 진보주의는 목적의식적 지향이다. 보수가 구심력이라면 진보는 원심력이다.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있기에 유지되고 발전한다. 진보주의자만 있는 사회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다. 생활환경의 사소한 변화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혁명으로 번져나갈지 모른다. 반면 보수주의자만 사는 세상에서는 혁신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회는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몰락할 것이다.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이 생각하는진보는 무엇인가? 대표적인 견해를 몇 가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의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진보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엔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진보라는 견해가 있다.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자기 책임 아래 전개하는 자유로운 경쟁이 만들어낸 소득과 부의 분배는 정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 조건이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이 동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 처음부터 아예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출발선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부와 소득을 분배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둘째,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 경쟁의 규칙이 합리적이어야 하고 반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경쟁의 규칙 그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반칙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셋째, 만인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동등한 주체로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계약과 거래의 어느 한 당사자가 상대방의 시혜 또는 선의에 의존해야 하거나 진정 자유롭게 판단할 수 없을 때, 경쟁이 만들어낸 분배의 격차는 정의로울 수 없다. 모든 시민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를 직접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활동이다. 국가의 정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을 만인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고, 각자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저마다 받게 만드는 것이 국가가 사람들 사이에 세워야 할 정의이다. 국가가 최고의 도덕적 이상인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한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평등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환경이 깨끗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국가공동체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자유, 복지, 평등, 안전, 평화, 환경 등이다. 자유는 자유권적 기본권에 대한 침해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복지는 1인당 국민소득으로 표현되는 좁은 의미의 물질적 후생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을 가리킨다. 안전은 범죄뿐만 아니라 각종 재해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는 군사적 위협에 대한 단순한 방어를 넘어 한반도에서 무력충돌과 전쟁의 위험이 항구적으로 제거된 상태를 가리킨다. 환경은 단순한 주거환경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연생태와 생활환경의 정착을 의미한다.

 

 

홉스의 국가는 좁은 의미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하는 '이념형 보수'에게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로크와 밀, 스미스, 루소의 국가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국가론을 따르는 '시장형 보수'에게는 자유와 이를 통해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다는 물질적 부의 증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주의와 시장형 보수가 손을 잡으면, 우리가 박정희-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직접 경험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국가들이 시도했으며, 최근 세계 최고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 나름 성공적으로 안착한 '개발독재'가 된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도 이것이다. 보수정당 - 국가의 공안기관 - 보수 언론 - 재벌대기업 - 보수지식인들이 반세기에 거려 형성한 소위 주류의 지배 카르텔은 이념으로 보면 국가주의와 보수자유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그리고 이런 내가 진보자유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거나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다. 진보자유주의는 모든 형태,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자유, 복지, 안전, 평등, 평화, 환경 등 헌법이 규정한 사회의 최고 목표 또는 최고 가치는 모두 평등한 지위를 가진다. 어떠한 우열관계나 종속관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하여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는 순간, 국가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 있다고 본다. 전체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정의를 파괴한다.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나는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수립하는 국가를 원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국가, 국민을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존중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당한 특권과 반칙을 용납하거나 방관하지 않으며 선량한 시민 한 사람도 절망 속에 내버려두지 않는 국가에서 살고 싶다. 그런 국가에서 개인으로서 훌륭한 삶을 살려면 우리들 각자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시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있고 훌륭한 국가에서 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나라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대한민국을 비하하거나 사회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는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57606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돈, 부동산, 명품, 최신 전자제품..... 사람들이 욕망하는 소유하고 싶은 목록들이 있다.

여유, 낭만, 청춘, 시간, 지혜, 즐거움, 행복, 희망, 이상, 의미, 여행, 정의..... 눈에 보이지 않고, 쓰잘데 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 내 삶에 관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하 본문 발췌]

 

여행자는 흔희 두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렵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여행은 그러나 이런 두 개의 만남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세번째 만남이 있다. 제 나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이전의 자기가 아님을 문득 깨닫는다.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그는 바뀌어 있다.

 

낯선 나라를 통해 되비쳐오는 제 나라의 얼굴 만나기, 그것이 여행의 한 소득이라면 대학 생활의 가장 자랑할 만한 성과도 나 아닌 것, 타자, 다른 세계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를 알고 넓어지는 것이다. 이 자기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질문 던질 줄 아는 성찰과 비판의 능력이다. 질문하는 능력의 확장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대학에 인정하는 높은 특권이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다. 그것은 특권이되 모든 기득권을 거부하고 진리의 소유 주장을 심문하는 특권, 정신의 가장 활발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겸손해지기 위한 특권이다.

 

욕망의 크기를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를 키우는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기루 잡기다. 그러므로 욕망의 크기를 줄여라. 그것만이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욕망이 제로일 때는 제로의 소유만으로도 너는 행복하다.

 

빵과 의미는 삶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빵이 삶의 바깥쪽을 버텨낸다면 의미는 삶의 안쪽을 지키고 지탱한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이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조건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4797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자유인에게 인생에 있어 오롯이 내가 소유하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 “시간

시간을 쓰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인생의 가치와 방향, 의미가 달라지고 심지어 행복을 느끼는 감정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시간의 주권을 잊어 버리거나, 잃어 버리거나, 포기하며 살고 있는지도….

 

미하엘 엔데의《모모》에서는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
사실 시간이란 달력과 시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시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하지만 우리는 어떤 막연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시간이란 소중한 비밀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목표를 이루고 나면 행복을 거머쥘 것 같지만 정말 그럴까?

 

시간은 절대적인가? 상대적인가?
빠른 세월의 흐름을 나이와 시간의 속도가 비례한다는 표현으로 말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느린 것만 같고 어른이 되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여유가 없다고 한다결국 절대적인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 아닐까
같은 일상의 반복적인 삶과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삶. 같은 시간을 보내도 더 길게 느껴지는 시간은 무엇일까?

절대적인 시간을 상대적으로 소비하는 것. 여유가 있고 온전히 자기만을 위해 시간을 쓴다면 시간은 느린 것만 같고, 일에 몰입해 자기만의 시간이 부족하면 시간에 쫓기듯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이 지구의 시간 속에서 인생은 찰나와 같다. 그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은 이 순간뿐이니까태어나 죽기까지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 짧은 인생을 즐겁게 살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삶이다어려운 일, 하기 싫은 일이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자. 제한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삶을 찾자.

 

"... 인생이 뭐고, 사는게 뭡니까? 인생이란 추억 만들기고, 사는 건 때때로 무슨 계기 찾아가며 즐거움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니던가요?"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 조정래의 <정글만리>

시간에 쫓기는 선택은 결국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아까운 시간을 돈과 바꾸며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시간과 정력을 바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시간을 낭비하는 걸 알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경험하지 못한 세상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 뿐일까부질없는 노력을 거듭하고, 자신의 귀중한 생명을 헛되이 연소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을 멈출 수 없다. 그 시간을 소중히 쓸 수밖에 없다자발적, 능동적이지 못하니 보내는 시간이 괴롭다. 반면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먹기, 자기, 놀기가 반복되는 고양이의 하루. 먹기, 자기, 보초서기가 반복되는 개의 하루….

즐거운 삶(시간)과 괴로운 삶(시간)의 대비를 보여준다.

 

박노해 시인은 삶에서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부자다.”라고 했다.

 

근심 걱정은 잊자. 시간은 가고 그 시간이 문제도 해결한다.

고통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시간은 지나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인생에 가장 후회되는 기억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허비한 것. 걱정하지 말자

그 시간에 현재를 즐기자.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