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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10 [검색사전] 고향(故鄕)

여름의 끝자락이 아직 멀리 가지 않은 9월 초, 추석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손 가득, 부모님과 가족들 만남의 기대도 가득 안고 고향 갈 준비들을 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족들의 기대와 다른 현재의 삶, 남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고독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난 고향, 가족이 머무르고 있는 고향, 과거의 추억이 있는 각자의 고향이라도 찾아보며 마음의 위안을 받는 추석이길 바래봅니다.

 

 

고향, 故鄕

1.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고구6(故丘)ㆍ고리8(故里)ㆍ고산3(故山)ㆍ고원1(故園)ㆍ관산ㆍ구리12(舊里)ㆍ모향1(母鄕)ㆍ전리1(田里)ㆍ향관4(鄕關)ㆍ향리2(鄕里). 예) 내가 살던 고향

2.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향관4. 예) 아버지는 혼자서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3.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예) 현대인은 마음의 고향을 잃은 채 살고 있다.

4.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 예) 명작의 고향

 

(네이버 영어사전) one's home, one's hometown; (특히 유명한 사람의) one's birthplace      

고향을 떠나다[등지다], leave one's home

파리는 나의 제2의 고향이다, Paris is my second home.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 그립다, I miss my family back home.

이곳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This place is the hometown of my heart.

대구가 제 고향입니다, Daegu is my hometown. I was born and raised in Daegu.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고향'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사투리가 남아있는건 아직 고향의 향수가 남아있다는거야 - 영화 <변산>

 

전규태, <단테처럼 여행하기>

고독은 우리 마음의 고향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할 수 없을 때, 또는 남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을 때 고독해진다."고 했다. "이럴 때면 익숙했던 곳을 떠나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고독감이란 자기 사고방식이 주변 사람들과 다를 때, 남의 사고방식이 납득되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이며, 그런 때는 그런 주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김영하, <오직 두사람> '인생의 원점' 중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떠돌이의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고, 커서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사람에게도 비슷해 묵은 관계라고는 없었다. 오래전에 본 어떤 영화에서 인생이 망가진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칠 때, 서진은 그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는커녕 가벼운 질투가 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영원히 갖지 못할 값진 성취처럼 보였다. 그런 성취가 누군가에겐 기본으로 주어지고, 자신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 "너를 안 만났다면 좋았을걸."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생각해봐도 그렇다. 오디세우스는 귀환을 시작하자마자 연을 먹는 사람들의 섬에 기착한다. 사람들이 친절하게 권한 연 열매를 먹고 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부하들도 모두 잊어버린다. 무엇을? 귀환이라는 목적을 잊어버린다. 고향은 과거에 속해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미래에 속한다. 그후로도 오디세우스는 거듭하여 망각과 싸운다. 세이렌의 노래로부터 달아나고 그를 영원히 한곳에 붙들어두려는 칼립소로부터도 탈출한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의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증 치매 환자와 짐승이 뭐가 다를까. 다른 것이 없다. 먹고 싸고 웃고 울고, 그러다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어떻게? 미래를 기억함으로써, 과거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신경림, <다시 느티나무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 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돈키호테도 훌륭한 기사처럼 그의 이름에 고향의 이름을 덧붙여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문과 고향 마을을 만방에 알리는 일이라 생각했으며, 그런 이름을 갖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희인, <여행의 문장들>

'그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말은 그에겐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대는 다시는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어린 시절로, 낭만적 사랑으로, 영광과 명예에 대한 청년 시절의 꿈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는 방랑 생활, 다른 나라로의 도피, 그리고 '예술과 미',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이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 한때는 영원한 것으로 보였지만 언제나 변화하는 사물의 낡은 형태와 조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으며, 다시는 시간과 기억의 도피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토마스 울프,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자연이란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모성(maternity)'을 가진 모든 존재는 치유적이며 그중에 자연은 최고의 치유자다. 우리는 자연으로의 여행을 통해 추억이 깃든 고향에 온것 같은 깊은 위로와 안식을 느낄 수 있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도요새의 무리들이 그 뻘에 당도한다. 이 갯벌은 새들의 고향도 아니고 타향도 아니다. .... 대륙 간을 날아다니면서도, 그것들은 짐보따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들의 자랑은 무일푼의 혈혈단신에 있다. 그것들은 먹을 것과 잠자리를 예비하고 있지 않고, 버리고 떠나고 또 찾아서 날아간다. 그것들의 유선형 몸매와 기름진 용골 근육은 홀로 시공을 통과하는 자의 외로움과 강인함으로 빛난다. 원양의 바람 속을 무착륙으로 건너가는 그것들의 눈은 두꺼운 보호막으로 덮여 있고, 보호막 안쪽에서 그것들의 눈동자는 닥쳐올 시공 속의 조짐들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것들의 싸움은 바다에 순응하는 싸움이다.

 

레프 톨스토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어둠이 없다면 빛을 모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이 없다면 미덕이나 정의도 몰랐을 것이다. 세상에는 악이 넘친다. 사람들이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에 고통과 불편을 가져오는 것을 악이라 부른다. 하지만 인생은 영혼을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삶을 영적 경험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는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현재 있는 곳이 곧 고향이다. 어디서든 자기 내면, 영혼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동우, <트레킹으로 지구 한바퀴>

모든 꽃이 시들 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한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서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중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 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다뉴브>

그러므로 강은 수원으로 되돌아간다. '검은 바다'라는 거창한 이름의 흑해 하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인생의 입구가 아닐까? 아마 모든 여행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무에서 자신의 얼굴을 불러낸 창조주의 의지를 찾아 기원으로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반복해서 자기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현실의 압박을 피해 자유와 미래, 다시 말해 아직 열려 있고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미래, 삶이 아직 그 앞에 있었던 어린 시절, 고향집을 찾는다.

 

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만일 대학이 스스로의 안전을 염려해서 가르침의 진실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세상의 안전을 염려해서 그 진실과 그것을 세상에 응용한 결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대학은 졸업생들이 어디에 살고, 어디에서 일하며,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해야 한다. 졸업생들은 습득한 지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이웃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역 공동체, 인간과 자연, 전 국가를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시회, 경제적 지위 향상에 골몰하는' 소위 전문가들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가? 대학은 이전 세대의 고전 작품들에 관한 교양과 지식을 확대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 대학은 과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는가, 그마저도 감퇴시키는가? 대학은 오염과 토양 침식을 증가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 대학은 공무원들이 진실을 말할 능력과 의지를 증가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 물론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정확한 답을 기대할 수는 없다. 특히 영향력에 관한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든지 질문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우리는 그런 것들에 관해서 물어보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단합되고 구체화된 힘이기 때문이다.

 

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인간이 원초적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데 종교가 믿음과 희망과 자비의 원리이듯이, 충성심은 우리가 자신의 부모와 고향땅을 향해서 갖고 있는 자비의 원리이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혜민 스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지성이 깨어날 때의 기쁨은 세상을 얻은 것같이 마음 부자가 된 느낌이고, 영성이 깨어날 때 즐거움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지성이 깨어나면 내 안에 가치 기준이 생겨 더 이상 남들 기준에 휘둘리지 않게 되며, 영성이 깨어나면 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 두 번 다시 현혹하지 않습니다.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관계 지능. 자국민보다는 외국인, 비슷한 세대보다는 나이 차이가 나는 세대, 동성보다는 이성, 고향이 같은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 동종업계의 사람보다는 다른 직종의 사람..., 이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과도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은 샐러리맨에게 있어 중요한 자질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귀중한 정보의 매개체이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 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에는 말이 있을 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에는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 그러나 좀 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 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

현대성이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 중에서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 미숙한 영혼의 소유자는 그 자신의 사랑을 세계 속 특정한 하나의 장소에 고정시킨다. 강인한 자는 그의 사랑을 모든 장소에 미치고자 한다. 완벽한 자는 그 자신의 장소를 없애 버린다.

완벽한 독서를 희망하는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국의 땅이 되어야 한다.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모른다. 도대체 어떤 감미로움이 사람을 고향으로 이끌어가는가? 그리고 고향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현명한 사람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고향에 이별을 고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와타나베 준이지,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다양한 외부 환경 변화에 대처하고 그 상태에 익숙해지는 능력을 보통 '환경 적응력'이라고 합니다.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은 기온이나 생태적 변화는 물론, 인간관계나 사회적 변화에도 쉽게 맞춰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 가서도 금새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자연환경이나 인종, 문화 등이 전혀 다른 외국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이러한 능력이 환경 적응력입니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어떤 나라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나아가 현지의 어떤 음식을 먹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 환경 적응력만큼 멋지고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둔감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의미의 둔감함이 있기에 어떤 환경,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죠. 앞으로 세계를 향해 날갯짓하며 새 시대를 일궈나가고 싶은 사람은 먼저 자신에게 둔감력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야 합니다. 만약 둔감력이 있다면 소중히 이기고, 없다면 다양한 환경에 뛰어들어 훈련해야 하죠. 그러려면 모든 일에 호기심을 품고, 좋은 의미에서 둔감하게 반응하며, 주저 없이 도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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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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