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느리고 단순한 삶! 그 속에 여유가 있고, 여유 가운데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친밀감을 형성하고 현재를 즐길 수 있다.

 

 

[본문발췌]

 

 

감정은 "설명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 - 곰돌이 푸

 

 

'휘게'는 사물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취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느낌과 관련이 있다. 집에 머무는 느낌, 안전한 느낌,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느낌, 그래서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때 우리는 삶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끝없이 대화를 이어가거나, 서로 아무 말 없이 안온한 기분에 휩싸이거나, 아니면 혼자서 조용히 차 한 잔을 음미하게 된다.

 

 

국내총생산(GDP)은 어린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감안하지 않는다. 국내총생산은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영향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공개토론에서 다뤄지지 않는 주제들이나 공무원들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는다. 요컨대 국내총생산이 측정하는 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 로버트 케네디

 

 

의외로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적 지지'다. 사회적 지지는 간단히 말하자면 어려운 시기에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 좋은 대인관계는 행복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거꾸로 행복한 마음 덕분에 좋은 대인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휘게는 간소한 것, 그리고 느린 것과 관련이 있다. 휘게는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한 분위기와 더 가깝다. 여러 면에서 휘게는 '느리고 단순한 삶'의 덴마크인 사촌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잠옷을 입고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는 것, 좋아하는 차를 마시면서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것, 여름휴가 기간에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우는 것 모두 휘게다. 단순함과 겸손함은 휘게의 중요한 미덕일 뿐만 아니라 덴마크의 디지안과 문화 전반의 미덕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디자인은 단순함과 기능성이 매우 뛰어나다.

 

 

휘게는 삶의 단순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좋은 분위기나 유대감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바쁠 때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휘게할 수 없다. 친밀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시간을 들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과 뭔가를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휘게는 돈을 더 많이 소비함으로써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된다고 할 수 있다. 휘게는 시장 자본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행복에는 매우 좋은 영향을 끼친다. 휘게는 삶의 가장 단순한 것에서 느끼는 기쁨이며 거의 아무런 비용 없이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휘게는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데서 오는 소박한 즐거움의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휘게는 현재를 만끽하는 것이며 현재로부터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무언가를 만끽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감사함이란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음을 유념하고, 그 순간에 집중하며, 현재 누리는 삶을 감사히 여기고,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돌보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뿐만 아니라 남을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도 더 크며 또한 덜 물질적이라고 한다.

연구 결과 감사하는 마음은 심리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 일기를 적은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향상되었고, 어떤 일을 할 때 열의를 갖고 임했으며, 숙면을 취했고, 면역력의 강해졌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도 더욱 빨리 알아차렸다.

 

 

인간의 감정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 특히 긍정적인 사물이나 현상에 빠르게 적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똑같은 사고방식에 갇히는 일을 경계하고 감사해야 할 새로운 일들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한다. 

 

 

휘게는 단순한 즐거움을 만끽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휘게를 실천한다면 우리가 매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휘게는 현재를 최대한 만끽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의 행복을 계획하고 과거의 행복을 추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휘게 10계명>

    • 분위기. 조명을 조금 어둡게 한다.

    •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충실한다. 휴대전화를 끈다.

    • 달콤한 음식. 커피, 초콜릿, 쿠키, 케이크, 사탕. 더 주세요!

    • 평등. '나'보다는 '우리'. 뭔가를 함께하거나 TV를 함께 시청한다.

    • 감사. 만끽하라,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일지도 모른다.

    • 조화.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뽐낼 필요가 없다.

    • 편안함. 편암한을 느낀다. 휴식을 취한다. 긴장을 풀고 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휴전. 감정 소모는 그만. 정치에 관해서라면 나중에 얘기한다.

    • 화목.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관계를 다져보자. "기억나? 우리 저번에..."

    • 보금자리. 이곳은 당신의 세계다. 평화롭고 안전한 장소다.

 

행복했던 순간에는 늘 누군가 함께 있었다.

 

 

덴마크 사람들이 휘겔리한 저녁을 준비할 때 구성원 모두가 일을 평등하게 분담한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인 혼자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보다는 모두가 각자 자기 몫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더욱 휘겔리하다.

 

 

유엔자문 기구가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기본적인 생활 요건을 갖추는 것이 우선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인 생활 요건이 충족된 후에는 행복은 소득보다는 인간관계의 질에 더욱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놀이. 우리는 어렸을 때는 놀이를 사랑하지만 어째서인지 어른이 되면 놀이를 그만둔다. 어른이 되면 삶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고 바쁜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린스턴대학교의 경제와 사회 문제학과 앨런 크루거 교수가 이끄는 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는 여가활동을 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어른들이 문제점은 어떤 활동을 할 때 그 결과와 목적에 너무 연연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일을 하고, 몸무게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헬스클럽에 가며, 인간관계는 확장하고 출세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에 뭔가를 하던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 자체가 너무 오래 되었다면 '공부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을 떠올려보자.

 

 

휘게는 여러 가지 책임을 짊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어른들을 너그럽게 안아준다. 좀 여유를 갖자. 잠시만이라도 말이다. 휘게는 단순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이라고 안심시켜준다.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상태보다 긍정적인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삶의 만족도 측면에서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행복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커다른 행운이 아니라 매일 발생하는 작은 친절이나 기쁨 속에 있다." - 벤자민 플랭클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212676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자존감, 정체성,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누군가는 고통이다.

 

 

[본문발췌]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아이비 맥킨지

 

 

P선생이 장갑을 장갑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비록 인지적인 가정은 잘했지만 인지적인 판단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판단이란 것은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접할 때 그것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 P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 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늘 눈앞에 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갖가지 건강 상태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지금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병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고조차 말할 수 있다. 지독한 고통을 극복했을 때야말로 정신은 궁극적으로 해방된다." - 니체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다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 감각, 사고,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감히 말한다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이루는 이성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처럼 동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 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환영이 하찮고 꺼림칙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고한 황홀감에서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간질 증세가 있던 그는 황홀감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자주 경험하곤 했다. 그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불과 5, 6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영원한 조화와 존재를 느낀다. 놀랍도록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황홀경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5초 이상 지속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소멸될 것이다. 이 5초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산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모든 생명을 걸수도 있을 것이고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연 만물의 본래 모습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오히려 반대이겠지만, 신경학자들은 '구체성, 구체적인 사상'을 열등하고, 고려할 가치가 없고,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퇴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체계화, 조직화에 관한 한 당대 제일인자로 불렸던 쿠르트 골드스타인 등은 인간의 정신에 추상화와 분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단 뇌에 손상을 입으면 인간은 고상한 영역으로부터 인간적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차원 낮은 '구체성'의 수렁으로 내동댕이쳐진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간이 '추상적, 범주적 태도' (골드스타인) 혹은 '명제적인 사고력' (휴링스 잭슨)을 잃으면 도리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며, 중요성도 없고 관심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구체성이야말로 기본이다.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다. 만일 '구체성'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철학자는 우주에 내재한 교향곡의 메아리를 자기 내부에서 들은 뒤, 이를 관념의 모습으로 뒤바꾸어 다시금 외부세계로 투사하려는 사람이다." - 니체

 

 

인간의 영혼은 그 사람의 지능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리학자나 수학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서 말하는 조화의 감각이 주로 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이라고 해서 감각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감각이 전혀 뒤섞이지 않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sense)이란 단어는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감각적'(sensible)이란 단어는 '개인적'(personal)이란 뜻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과 어떤 점에서든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를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성공의 비밀은 좀더 특별한 곳에 있다. 모츠기는 이 지능 낮은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헌신,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츠기는 이렇게 말했다. "야나무라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그의 영혼을 내 영혼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교사는 아름답고 정직한 저능아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밝은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 C. C. 파크, <나디아론>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96206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본문발췌]

 

 

죽음은 놀라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괴로움, 고민, 기쁨, 터무니없는 생각들, 재산, 시기심, 사랑, 외로움이라는 마음 아픈 불행 - 이 모두가 삶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전체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그중 파편 하나만 취해서 그 파편으로 살지 말고요. 바로 그렇게 삶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움직임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매우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 슬픔이 지닌 진짜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는 일,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일 - 이것들 모두가 명료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론도, 이상도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수도 없고, 사랑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날마다 연습해서 배울 방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슬픔이 가진 놀라운 깊이를,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오는 순수함을 정말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본성, 슬픔의 특성이나 구조,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놀라운 것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뭔지 이해하게 되고, 슬픔이 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본다면,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편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삶을 조각조각 나뉜 것으로 다루면 끊임없는 혼란과 모순,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전체성을 보아야 하는데, 애정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있을 때에만 삶의 전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수학, 의학, 역사, 경제학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런 다음 그 지식 조각들을 한데 모으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혁명은 국가에 대한 섬김으로, 이미지에 대한 섬김으로, 또는 무수히 많은 전제적인 부패와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을 일상 삶과 멀리 떼어놓으면, 그 분리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리고 몇 배나 더 많은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키워갈 뿐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이 연속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든 불행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계속성continuity이지요.

 

 

사랑이 그런 것처럼, 죽음은 삶의 순간순간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축적하지 않고, 결코 경험을 모으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죽는 마음은 무구하며, 그래서 늘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란 몸, 특성, 저항, 장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고 감정을 느낌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 저항이나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불멸을 알게 될 겁니다. 갈망하는 것들, 움켜쥐고 있는 것들, 바라는 것들이 여러 층위를 이루며 쌓여 있는 것에 불과한 자기 자신 한계, 자기 자신 인격이나 개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만일 여러분이 생각에서 자유롭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통해 주의 깊음을 통해 그 강렬한 불꽃을 통해 꿰뚫어보았다면, 불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조화이며, 그것은 '사랑 길'이나 '슬픔 길'이 아닌, 그 안에서는 모든 구분이 사라진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만,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남이 있을 것이고, 죽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물을 선명하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끝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데, 그건 우리 마음이 계속성을 추구하고, 가족 안에서, 재산에서, 우리 직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탐욕스런 추구에서 벗어난,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계속성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난 마음만이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신의 불멸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 마음, 지속하고 싶어 하는 '나'는 불멸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죽음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절대 하루 안에 마무리 짓지 않고, 단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 우리는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에 살고 있지. 누군가가 오늘이 끝나면 너도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날 하루를 풍요롭게 살지 않겠니? 우리는 하루를 풍요롭고 완전하게 살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을 찬미하지 않아. 언제나 내일은 뭐가 될까, 내일 끝낼 크리켓 경기, 6개월 안에 끝낼 시험, 어떻게 하면 음식을 즐길까, 어떤 옷을 살까 등등,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를 생각하지. 그러니 결코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잘못된 의식으로 언제나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실상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 삶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상태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명상은 삶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이 질서를 가져옵니다. 질서는 덕이고, 덕은 곧 빛입니다. 이 빛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유식해도,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말입니다. 지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자신만이 이해와 명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emptiness, 空에서 여러분은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러면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입니다. 계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끝나는 것만이 창조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이 또한 죽음이기도 할 때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고, 진리와 사랑과 창조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넓은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 영역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리곤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며, 거기에 안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확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영속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것은 영속하지 않고, 그것은 완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과거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 진실을, 즉 죽음은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미래든, 여러분 얼굴이든, 이상이나 그 밖의 것들이든 간에) 끝나는 일이라는 걸 알 때, 죽음이라 불리는 이 아득히 먼 것을 삶이라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가져온 것이며, 그것은 곧 여러분 집착을 끝낸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이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과거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날마다 완전히 끝내기 위해 마음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엄청난 행동이죠) 날마다 순간순간 여러분은 삶과 함께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야생의 인간에게는 단순한 두려움 몇 가지만 있지만, 우리는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두려움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연해지려고 한다면, 반대로 더 집착하게 될 뿐이며 그래서 모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이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왜 집착하시나요? 집착이 없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집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아내이며, 여러분은 여러분 은행예금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일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이 느낌이 끝나면, 완전히 끝나면, 여러분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삶 끝에 있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상태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죽는 일이라고, 이런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 태어남이 있다고.... 죽음은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죽음이 이런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제를 오늘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죽음이예요. 날마다 죽는 게 죽음이에요.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신선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게 죽음이고 삶이예요. 모든 것을,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태양을 날마다 신선한 눈으로 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신선하고 무구한 눈으로 보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고, 늘 함께 있어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에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남이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541422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