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정체성,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누군가는 고통이다.

 

 

[본문발췌]

 

 

도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의사는 자연학자와는 달리 다양한 생명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이론화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 아이비 맥킨지

 

 

P선생이 장갑을 장갑으로 보고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비록 인지적인 가정은 잘했지만 인지적인 판단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판단이란 것은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접할 때 그것을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 P선생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보는' 능력 즉 관계를 짓는 능력이었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 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 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우리는 다리나 눈을 잃으면 다리가 없고 눈이 없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사실 자체를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깨달을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도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늘 눈앞에 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상실' 즉 기능적 결함에만 주목하는 한 그것이 지극히 편협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능의 과잉도 있을 수 있다면, 결손에만 주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기억상실증뿐 아니라 기억과다증도 있는 것이다. 인식불능증과 반대하는 인식과다증도 있다. 이밖에도 '과다현상'은 얼마든지 많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갖가지 건강 상태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지금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병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고조차 말할 수 있다. 지독한 고통을 극복했을 때야말로 정신은 궁극적으로 해방된다." - 니체

 

 

우리는 각자 오늘날까지의 역사, 다시 말해서 과거라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연속하는 '역사'와 '과거'가 각 개인의 인생을 다룬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인생 이야기, 내면적인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와 같은 이야기에는 연속성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곧 우리의 인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자기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전기이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을 통해, 우리들 안에서 즉 지각, 감각, 사고,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말하는 이야기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즉 지금까지의 이야기인 내면의 드라마를 재수집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 편의 이야기 즉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감히 말한다면.... 우리는 무수하고 잡다한 감각의 집적 혹은 집합체에 불과하다. 그러한 감각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차례차례 이어지고 움직이고 변화하고 흘러간다.', 흄의 생각대로라면 개인의 정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각 혹은 지각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의 지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은 그저 계속해서 변화하기만 하는 감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개체 혹은 자아에 의해 통일을 유지하는 확고한 존재이다. 그러나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처럼 불안정한 존재의 경우에는 흄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분명히 그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왔다 갔다 하는 발작적인 지각과 움직임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이루는 이성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영처럼 동요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흄이 말한 거품과도 같은 존재이다. 철학적 신학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자아가 충동에 의해 압도당하는 경우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운명이다. 충동에 압도당한다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적인 운명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적인 운명의 경우에는 비극적이기는 해도 이성(의식)이 존재하는 반면에 흄적인 운명은 무의미하고 부조리할 뿐이다. 슈퍼 투렛 증후군 환자는 진정한 인간, 어디까지나 '개체' 다운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충동과 싸워야 한다. 투렛 증후군 환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무시무시한 장벽에 직면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이야말로 '경이'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지만, 그들은 싸움에서 승리한다. 살아가는 힘,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개체'다운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의지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나 병보다도 강하다. 건강, 싸움을 겁내지 않는 용맹스런 건강이야말로 항상 승리를 거머쥐는 승리자인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환영이 하찮고 꺼림칙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고한 황홀감에서 나오는 영감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예를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간질 증세가 있던 그는 황홀감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자주 경험하곤 했다. 그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었다. '불과 5, 6초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영원한 조화와 존재를 느낀다. 놀랍도록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황홀경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상태가 5초 이상 지속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견뎌내지 못하고 소멸될 것이다. 이 5초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전체를 산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모든 생명을 걸수도 있을 것이고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것이다.'

 

 

자연 만물의 본래 모습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오히려 반대이겠지만, 신경학자들은 '구체성, 구체적인 사상'을 열등하고, 고려할 가치가 없고,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퇴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체계화, 조직화에 관한 한 당대 제일인자로 불렸던 쿠르트 골드스타인 등은 인간의 정신에 추상화와 분류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단 뇌에 손상을 입으면 인간은 고상한 영역으로부터 인간적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차원 낮은 '구체성'의 수렁으로 내동댕이쳐진다고 생각했다. 만일 인간이 '추상적, 범주적 태도' (골드스타인) 혹은 '명제적인 사고력' (휴링스 잭슨)을 잃으면 도리없이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며, 중요성도 없고 관심의 대상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구체성이야말로 기본이다.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다. 만일 '구체성'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철학자는 우주에 내재한 교향곡의 메아리를 자기 내부에서 들은 뒤, 이를 관념의 모습으로 뒤바꾸어 다시금 외부세계로 투사하려는 사람이다." - 니체

 

 

인간의 영혼은 그 사람의 지능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리학자나 수학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서 말하는 조화의 감각이 주로 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적이라고 해서 감각적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 감각이 전혀 뒤섞이지 않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감각(sense)이란 단어는 항상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감각적'(sensible)이란 단어는 '개인적'(personal)이란 뜻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과 어떤 점에서든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폐증 환자는 원래 좀처럼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적으로 살아갈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에게는 독창성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들의 독창성은 내부에서 생긴 것,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완전히 내부로 향하는 존재, 독창성이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라를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성공의 비밀은 좀더 특별한 곳에 있다. 모츠기는 이 지능 낮은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상대를 위해서 몸을 내던지는 헌신,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모츠기는 이렇게 말했다. "야나무라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한 일은, 그의 영혼을 내 영혼으로 여기는 일이었다. 교사는 아름답고 정직한 저능아 학생을 사랑하고, 그들의 밝은 세계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 C. C. 파크, <나디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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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본문발췌]

 

 

죽음은 놀라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삶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슬픔, 괴로움, 고민, 기쁨, 터무니없는 생각들, 재산, 시기심, 사랑, 외로움이라는 마음 아픈 불행 - 이 모두가 삶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을 전체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는 것처럼, 그중 파편 하나만 취해서 그 파편으로 살지 말고요. 바로 그렇게 삶을 이해하는 가운데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삶의 움직임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를 매우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입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 슬픔이 지닌 진짜 중요한 의미를 충분히 납득하는 일, 그리고 죽음과 함께하는 일 - 이것들 모두가 명료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어떤 이론도, 이상도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법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수도 없고, 사랑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날마다 연습해서 배울 방법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진 의미를, 슬픔이 가진 놀라운 깊이를, 그리고 죽음과 함께 오는 순수함을 정말로 이해할 때 자연스럽고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본성, 슬픔의 특성이나 구조,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놀라운 것을, 이론적으로나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시간을 이해하면 죽음이 뭔지 이해하게 되고, 슬픔이 뭔지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슬픔이나 죽음과는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따로 떼어서 본다면, 우리가 접근하는 방법은 단편적인 것이 될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놀라운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맙니다.

 

 

삶을 조각조각 나뉜 것으로 다루면 끊임없는 혼란과 모순, 불행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의 전체성을 보아야 하는데, 애정이 있을 때에만, 사랑이 있을 때에만 삶의 전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혁명입니다. 수학, 의학, 역사, 경제학에 대해서 더욱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런 다음 그 지식 조각들을 한데 모으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지요. 사랑이 없으면, 혁명은 국가에 대한 섬김으로, 이미지에 대한 섬김으로, 또는 무수히 많은 전제적인 부패와 인간에 대한 파괴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두려움을 느껴서 죽음을 일상 삶과 멀리 떼어놓으면, 그 분리는 더 많은 두려움과 불안을, 그리고 몇 배나 더 많은 죽음에 대한 이론들을 키워갈 뿐입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삶은 생각이 연속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든 불행을 키우는 것이 바로 이 계속성continuity이지요.

 

 

사랑이 그런 것처럼, 죽음은 삶의 순간순간 여기 있습니다. 일단 이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여러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모르는 것the unknown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the known을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가족을 잃을까봐, 친구들도 없이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자신이 축적해놓은 경험들과 재산이 없어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놓아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은 기억이며, 마음은 그 기억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단지 기계적인 것일 뿐입니다. 컴퓨터가 그걸 아주 잘 증명하고 있지요. 죽음의 아름다움과 놀라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그때 죽음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죽으면 마음이 신선해지고 새로워져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면 죽음이라 불리는 그 상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간을, 생각을, 그리고 슬픔을 이해하며, 그런 사람만이 죽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축적하지 않고, 결코 경험을 모으지 않으면서 순간순간 죽는 마음은 무구하며, 그래서 늘 사랑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란 몸, 특성, 저항, 장애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고, 닳아 없어질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고 감정을 느낌에 있어 자유로운 사람, 저항이나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불멸을 알게 될 겁니다. 갈망하는 것들, 움켜쥐고 있는 것들, 바라는 것들이 여러 층위를 이루며 쌓여 있는 것에 불과한 자기 자신 한계, 자기 자신 인격이나 개성을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멸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만일 여러분이 생각에서 자유롭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을 통해 주의 깊음을 통해 그 강렬한 불꽃을 통해 꿰뚫어보았다면, 불멸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조화이며, 그것은 '사랑 길'이나 '슬픔 길'이 아닌, 그 안에서는 모든 구분이 사라진 길입니다.

 

 

우리는 오직 시간이라는 관점에서만,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끝남이 있을 것이고, 죽음이 있을 것이며, 그러면 우리는 사물을 선명하게,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끝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데, 그건 우리 마음이 계속성을 추구하고, 가족 안에서, 재산에서, 우리 직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오직 안전에 대한 탐욕스런 추구에서 벗어난, 계속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계속성이라는 과정에서 벗어난 마음만이 불멸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신의 불멸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 마음, 지속하고 싶어 하는 '나'는 불멸이 무엇인지 절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죽음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의미를 모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절대 하루 안에 마무리 짓지 않고, 단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다. ... 우리는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에 살고 있지. 누군가가 오늘이 끝나면 너도 죽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날 하루를 풍요롭게 살지 않겠니? 우리는 하루를 풍요롭고 완전하게 살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을 찬미하지 않아. 언제나 내일은 뭐가 될까, 내일 끝낼 크리켓 경기, 6개월 안에 끝낼 시험, 어떻게 하면 음식을 즐길까, 어떤 옷을 살까 등등, 언제나 내일 아니면 어제를 생각하지. 그러니 결코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잘못된 의식으로 언제나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만일 우리가 단 하루를 살고 그날과 함께 죽으며 또 다른 날을 마치 신선하고 새로운 날인 것처럼 다시 시작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우리가 획득한 모든 것들, 모든 지식, 모든 기억, 모든 다툼을 날마다 멈추는 것, 그것들을 다음날로 가져가지 않는 것 -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설사 끝남이 있더라도, 새로 태어남이 있다는 말이다.

 

 

두려움은 실상에 대한 무지이며, 우리 삶은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상태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명상은 삶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이 질서를 가져옵니다. 질서는 덕이고, 덕은 곧 빛입니다. 이 빛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유식해도, 아무리 영적이라 해도 말입니다. 지상에서든 천국에서든 자신만이 이해와 명상에 빛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비어 있고, 그 비어있음emptiness, 空에서 여러분은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러면 사는 일이 곧 죽는 일입니다. 계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창조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끝나는 것만이 창조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이 또한 죽음이기도 할 때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창조가 있습니다. 죽음은 모르는 것이고, 진리와 사랑과 창조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달리는데,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넓은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 영역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알고 있는 것에 매달리곤 합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며, 거기에 안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전이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확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는 영속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펴보면 그것은 영속하지 않고, 그것은 완전히 불확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매달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과거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 진실을, 즉 죽음은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그것이 미래든, 여러분 얼굴이든, 이상이나 그 밖의 것들이든 간에) 끝나는 일이라는 걸 알 때, 죽음이라 불리는 이 아득히 먼 것을 삶이라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가져온 것이며, 그것은 곧 여러분 집착을 끝낸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 과거에 사로잡힌 마음이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 마음은 과거에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날마다 완전히 끝내기 위해 마음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면, (그런데 그건 엄청난 행동이죠) 날마다 순간순간 여러분은 삶과 함께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처럼 몹시 복잡한 인간 문제에 대해 조사하려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뭐든 만일 선입견이나 믿음, 희망, 두려움이 있으면 관찰하거나 조사할 수 없습니다. 매우 진지하게 조사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왜곡하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위안을 바라는 욕망 희망이 없어야 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야 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 알아내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야생의 인간에게는 단순한 두려움 몇 가지만 있지만, 우리는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 두려움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초연해지려고 한다면, 반대로 더 집착하게 될 뿐이며 그래서 모순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이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느낌에서도 자유로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왜 집착하시나요? 집착이 없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 집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아내이며, 여러분은 여러분 은행예금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일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집착을 통해 계속된다는 이 느낌이 끝나면, 완전히 끝나면, 여러분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삶 끝에 있는 것, 우리 모두가 그 상태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 사랑, 미움, 기쁨, 즐거움... 그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 죽는 일이라고, 이런 죽음이 있어야만 새로 태어남이 있다고.... 죽음은 날마다, 순간순간,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예요. 죽음이 이런 거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지요? 어제를 오늘로 가져오지 말고, 오늘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는 게 죽음이예요. 날마다 죽는 게 죽음이에요. 다음날 아침 완전히 신선한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게 죽음이고 삶이예요. 모든 것을,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태양을 날마다 신선한 눈으로 보는 것, 그 모든 것을 신선하고 무구한 눈으로 보는 게 삶이라고요. 그러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디 있겠어요? 그 둘은 항상 붙어 다니고, 늘 함께 있어요.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에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새로 태어남이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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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삶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편안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투쟁, 노력의 과정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본문발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쪽에서 내가 원하는 생각을 할 수도 없거니와 내 쪽에서 원하는 것을 그가 생각하게 만들 수도 없어. 그러나 누군가를 잘 관찰할 수는 있는 것 같아. 그가 다음 순간에 무얼하게 될지 말이야. 그건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그걸 모를뿐이야. 물론 연습이 필요하지. ... 어떤 짐승이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주의력과 모든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로 향하게 하면, 그는 그것에 도달하기도 하지. 그게 전부야. 네가 알고 싶었던 일도 정확하게 그래. 어떤 사람을 충분히 자세히 바라봐. 그에 대해서 그 자신보다 네가 더 잘 알게 돼.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너의 <허용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어.

 

 

우리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 - 자기에게 금지되어 있는지. 금지된 것은 결코 할 수 없어. 금지된 것을 하면 대단한 악당이 될 수 있지. 거꾸로, 악당이라야 금지된 일을 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야. -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의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늘 그러게 마련이듯이 그런 사람은 살기가 쉬워. 다른 사람들은 운명을 자기 속에서 스스로 느끼지. 그들에게는 어느 명예 있는 남자건 날마다 하는 일들이 금지되어 있어.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폄하되는 다른 일들은 허용되어 있어.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아무려나 어떤 목적으로 네가 지금 네 잔을 마시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 둘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의 인생을 결정하는, 네 안에 있는 것은 그걸 벌써 알고 있어. 이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들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들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사물들이지. 우리가 우리들 마음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그들은 바깥에 있는 물상들만 현실로 생각해서 마음속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가 전혀 발언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행복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한 번 다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겠다는 선택이란 없어져 버리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쉬워. 우리들의 길은 어렵고. 우리 함께 가보세"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그리고 여기서 갑자기 예리한 불꽃 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그 누구도 자의로 택하고 고쳐 쓰고 그리고 마음대로 주재해도 되는 직분은 아니라는 것.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기를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그 생각이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이 체험에서 얻은 열매였다. 나는 자주 미래의 영상들을 가지고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으로 혹은 예언자로, 혹은 화가로 혹은 어떻게든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을 역할들을 꿈꾸곤 했었다.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짖기 위하여, 설교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시인으로 혹은 광인으로, 예언가로 혹은 범죄자로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것은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 그런 건 궁극적으로 중요한게 아니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반쪽의 얼치기였다. 시도를 벗어남이고, 패거리의 이상으로의 재도피이고, 무비판적 적응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영상이 무섭고도 성스럽게 눈앞에 솟았다. 수백번 예감했고 어쩌면 자주 입 밖에 내었지만 이제 비로소 체험한 것이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無)에로 더져졌다. 그리고 측량할 길 없는 깊은 곳으로부터의 이 던져짐이 남김없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 뜻을 마음속에서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직분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미 많은 고독을 나는 맛보았다. 이제 예감했다. 더 깊은 고독이 있으며 그 고독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 갖겠다고 원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운명뿐이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바깥에는 거리와 집들, 사람과 시설들, 도서관과 강의실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여기에는 동화가, 꿈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가운데서 자주 그 세계 한가운데에서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다르게 바라봄에 의하여 갈려져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섬을 제시하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을, 아무튼 살아가는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내가, 오래 고립되어 있던 사람인 내가, 완전한 혼자임을 맛보고 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연회를, 즐거운 사람들의 축제를 갈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시는, 다른 사람들의 연대를 보고 시샘이나 향수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나는 <그 표적>을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았다.

 

 

표적을 가진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는 이상한 사람들, 위험한 광인들로 비칠지도 몰랐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 견해로는 우리 표적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것, 개별화된 것 그리고 미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뜻을 제시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수(固守)의 의지 속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류가, 그들도 우리처럼 사랑하는 인류가 무언가 완성된 것, 보존되고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들에게는 인류가 하나의 먼 미래,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고, 그 모습은 아무도 모르는, 그 법칙은 그 어디에도 씌어 있지 않은 미래였다.

 

 

"사랑은 간청해서는 안 돼요.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게 끌리고 있어요. 언젠가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그러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 에바 부인

 

 

오려고 하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 필요 있는 것은 겪게 되겠지요.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겠지.

 

 

예전에 나는 한 인간이 하나의 이상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일이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드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봉사와 공동의 위험이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공격 때뿐만 아니라 어느 때나 확고하고 먼, 약간 신들린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엄청난 것에 몰두해 있음을 뜻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무얼 원하든 믿고 생각한다 - 자기들이 준비되어 있고, 쓸모 있다고, 그들에게서 미래가 형성되리라고, 그리고 세계가 점점 더 경직되어 세계와 영웅주의에, 명예와 다른 낡은 이상에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일수록 그만큼 더 요원하게 그리고 그만큼 더 거짓말처럼 외면적인 인간성의 목소리 하나하나는 울렸다. 이 모든 것은 다만 표면이었다. 전쟁의 외적이고 정치적인 목적들에 대한 물음이 표면에 그치듯이. 깊은 곳에서는 무엇인가가 생성중에 있었다. 새로운 인간성 같은 무엇이.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내 곁에서 죽었다. 그들에게는 미움과 분노, 살육과 말살이 대상에 매어 있지 않다는 통찰이 느껴졌다. 아니다. 대상들은 목표들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이었다. 원(原) 느낌, 가장 거친 느낌들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헙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하여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려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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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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