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멈췄던 생각, 망각의 늪에 잠겨 있던 기억, 새로운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생각하기와 걷기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본문발췌]
오래 걸을수록 걷기는 우리를 사로잡고, 점령하고, 우리의 몸짓과 호흡 리듬, 심장 박동을 바꿔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까지 다르게 형성한다. 우리가 몰두하고 전념하는 중심활동이 되면서 걷기는 생각에 연이은 변화와 새로운 자극을 가져오고, 그것이 특별한 제약처럼 작용해 생각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오랜 걷기로의 복귀는 우리를 자연 속으로, 몸의 느린 전진 속으로, 근육과 호흡의 지구력 속으로 끌어들인다. 또 이런 걷기는 우리를 다시 풍경 속으로 돌려보내 높낮이와 거리, 땅을 의식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오랜 리듬, 심오하고 우주적인 리듬을 되찾게 하고 이동의 피로를 느끼게 하며 어느 고개, 어느 산봉우리를 돌아설 때 문득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보상으로 돌려준다. 오랜 걷기의 이 모든 면모들은 - 육체적이건, 심리적이건, 도덕적이건, 문학적이건, 철학적이건 - 최근에 폭넓게 재발견되어 칭송받고 있다.
여정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중요치 않다. 일단 이 움직임이 시작되면 3초건 3일이건 우리는 걷거나 생각한다. 철학적 생각 속에서 위대한 여행, 긴 흐름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고, 한평생 이어질 질문들을 파고들 수 있다. 아니면 그저 매 분, 매 시간, 일상을, 현재의 몸짓들을, 우리가 투사하는 모든 것을,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대답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건, 생각하기와 걷기는 서로 닮았다. 생각 또한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나아간다. 무한히 균형을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멀리 나아간다.
진보 - 몸이 어떤 장소로 나아가는 진보, 생각이 어떤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 - 는 매번 촉발되었다가 모면되는 추락의 형태를 취한다. 철학에서건 과학에서건 서양 역사 속에서 진보는 언제나 하나의 확신에서 문제 삼기로, 두 번째 확신과 만회에서 새로운 문제 삼기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철학적 체계, 학문적 이론, 정치적 주장, 미학적 세계 모두 동일한 움직임이 되풀이된다. 넘어뜨리기, 만회하기, 다시 넘어뜨리기, 다시 만회하기, 그러면서 나아간다. 이런 형태의 걷기를 곳곳에서 '진보'라고 부르는 건 우연히 아니다. 진보를 말하는 사람은 사실 걷기를 말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걷기'는 Gradus, '걷다'는 Gradere이다. 진보pro-gresus는 나아가게 하는 것,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나 정신적 세계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걷기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인간의 걷기와 깊고도 정확하게 상응한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빙빙 돌며 헤매지 말아야 하고,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더욱 안 되며, 이쪽이든 저쪽이든 언제나 같은 쪽을 최대한 똑바로 걸어야 하고, 사소한 이유로 길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오직 우연이 그 길을 선택하게 했을지라도, 이 방법으로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딘가 끝에는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이 아마 숲속 한가운데보다는 나을 것이다."
걷기가 절뚝이는 것이고, 넘어지다가 다시 만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여행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똑같이 지속적인 불균형, 똑같은 중심 상실과 되찾기로 이루어진다.
더 많은 물질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개인을 물질과 욕망의 노예,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문화, 반생태적인 환경으로 세상을 이끌 것이다.
양보다는 질,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고, 비폭력적인 기술을 활용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일이 '굿워크'가 아닐까?
[본문발췌]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알베르트 카뮈
노동의 세 가지 목적
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
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세 가지 차원에서의 이런 역할을 통해 노동은 인간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마음속에서 확신과 결심, 남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 문제를 이해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중간기술로 나아가기 이전에 먼저 체제부터 바꾸자, 자본주의와 이윤추구 동기를 없애자, 다국적 기업을 해체하고 관료주의를 폐지하자, 교육을 개혁하자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체제를 바꿀 방법은 약자들이 자기 힘으로 생산함으로써 지금보다 더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새로운 형태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말이지요.
지난 수백 년간에 걸쳐 기술 발전이 점점 더 커지고, 더 복잡해지고, 더 자본집약적이며, 더 폭력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올바른 진단이라면 치료방법은 분명히 정반대 방향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필요한 위의 네 가지 기준 혹은 '지침'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네 가지 지침은 단순한 이론 작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 보자면 작고, 간단하고, 자본이 적게 들고, 비폭력적인 기술 혹은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갖춘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개인이건 공동체건 자기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기술은 보다 인간적이고 생태적이며, 화석연료에도 덜 의존하는 생활양식을 낳게 되고, 여기서 나온 생활양식은 거대하고 복잡하며 자본이 많이 들고 폭력적인 기술로 생긴 생활양식보다 인간이 지닌 현실적 욕구에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위의 지침이나 기준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지침이라도 제시해야 합니다. 지침이 없으면 대안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로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작업은 체계적인 토대 위에서 서둘러 시작할수록 더 좋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벌써 시작하여 수년간 활발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비록 힘은 적지만 서로에게 배우며 서로의 경험을 통해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돈을 모으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첫째가 돈이고 그다음에 돈으로 무얼 좀 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래, 비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만 나한테는 다른 일을 할 시간도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 최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의 최고의 일은 생계를 버는 일과 달리 사회에 빌붙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선'을 쫓느라 '차선' 마저 놓치게 되는 시대 흐름에 휩쓸려 과거에 있었던 훌륭한 지식과 장비가 사라져 버린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쫓아야 진보하게 되고, 이런 흐름은 환영할 만한 것이겠죠. 적어도 그런 흐름이 '최선'을 누릴 형편도 안 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최소한 누릴 수 있는 '차선'이라도 앗아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서구식 경제학은 외국에서 물건을 더는 싸게 들여올 수 없을 때가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말라고 합니다. 풍요로운 환경을 가진 푸에르토리코에 갔더니 당근을 미국의 텍사스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텍사스산 당근이 국내산보다 값이 더 싼 이상 푸에르토리코 농부들은 당근을 재배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시스템입니다. 중국인들이 이것을 뒤집어버렸습니다. 중국인들은 자기가 만들 수 없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는안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더 싸게 사 올 수 있다면 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발전이 저하됩니다. 반면에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는 한 사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도전하게 만듭니다.
노동은 인간에게 1) 자신의 잠재력을 사용하고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2)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일을 함으로써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게 해주며 3) 품위 있는 생존을 위해 인간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을 기계나 시스템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겹고, 무의미하며, 신경만 괴롭히는 멍청한 일을 젊은이들이 거부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노동이란 삶의 즐거움이자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노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점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이 좋은지를 결정하여 좋은 것은 잘 자라도록 최선을 다하고, 마찬가지로 무엇이 나쁜지를 결정하여 나쁜 것은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두 과정을 합산해서 전체적으로 커졌는지 작아졌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바로 삶의 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인간이 진정 무엇인지를 우리 마음속에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저 역시 새로운 내용을 전하려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지혜를 다시금 일깨우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여러가지 설명이 있지만 결국 인간은 신의 위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윤리와 가르침은 바로 이런 통찰력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존재이기에 인간은 전통적 언어를 통해 신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개별적 존재이기에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조직에는 이 세 가지 절대적 욕구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행하게 되고, 파괴적이 되며, 야만적인 자살 미치광이가 될 것입니다. 사회 정치 경제 조직에 인간의 욕구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옮긴이의 글]
슈마허는 경제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역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다. 점점 커지고, 복잡하며, 자본집약적이고, 폭력적인 현대의 산업기술은 바로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결국은 소수를 위한 기술, 착취를 위한 기술,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반생태적인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전문가란 점점 덜 중요한 것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쌓느라 결국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에 대해서만 잘 알게 되는 사람들"이라는 비판은 산업사회의 소위 전문화된 지식이 전문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공동체의 좋은 삶을 구현하는데도 지극히 무력하다는 슈마허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에너지에 대해서도 지금의 과학기술은 에너지를 오직 동력을 얻기 위한 물질로써만 취급할 뿐 에너지 그 자체가 바로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끝이며, 우리 삶의 생기이자 창조의 기쁨이라는 영적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하기만 하다.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간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었고, 악의에 찬 경쟁으로 인간 정신은 굴종과 복종에 순응하게 되었다. 신이 주신 활력과 기쁨이라는 노동의 본질이 굴종과 굴욕이라는 노예노동으로 변질됨으로써 우리의 노동시간은 해방과 깨달음의 시간이 아니라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직업이 있어도 직업이 없어도 아이들도 노인도 모두 불안하긴 마찬가지이다.
체험을 통해 직접적이든, 독서를 통해 간접적이든 경험을 통해 다양한 변화와 위험에 대처하는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본문발췌]
요즘은 '내일이 있잖아'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사람들을 엄습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내일이 있기에 오늘의 근심을 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을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정말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나 봅니다.
'천직'이나 '사회적 사명'이라 하면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 일의 의의는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와 관계를 맺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 일이란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자 '나다움'의 표현입니다. 저는 '나다움'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 없이 일단 한번 내딛어보는 한걸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신이 역점을 두는 대상을 몇 가지로 분산시켜둔다면 일이 잘 안 풀려 큰 피해를 보고 낙담하게 되었을 때도 그런 나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받은 상처 또한 일이 아닌 다른 종류의 보람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다차원의 축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리스크에 강합니다.
무리하지 않고, 잘난 체하지 않고, 작위적이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식하는 것. 그렇다고 해서 굳이 노력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리하게 자신을 크게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스스로를 값싸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자연스럽다는 것은 '부족함을 안다', '자족한다'는 말과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 사람이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포함하여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스스로를 알고 그런 나를 긍정하는 것이 바로 자연스러움입니다.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지헤를 얻고, 의사 체험을 즐기며, 자기 내 대화를 촉진한다는 세 가지 효용이 바로 독서의 큰 장점입니다. 이러한 장점을 통해 책 읽기는 살아 있는 체험이 되고 개인의 인격 형성에도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렇게나 읽어도 그저 권수만 늘리면 된다는 식으로 독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논어>에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막연하여 얻는 것이 없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보로서 받아들일 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책만이 가진 효용을 살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으면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가 어떻게 형성되며,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만약 일이라는 행위에서 영혼이 빠져버리면 일은 그저 단순한 스포츠와 다를 바 없으며, 그 결과로 사회 전체가 폭주하는 기계처럼 변할 것이라는 베버의 시나리오는 마치 오늘날의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예견한 듯하여 새삼 감탄하게 됩니다.
"기업의 목적은 개별 기업 바깥에 있다. 기업은 사회의 기관이며 그 목적은 사회에 있다. 기업의 목적에 관한 정의는 하나밖에 없다. 바로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노베이션으로 만드는 것은 과학이나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경제와 사회에 가져오는 변화다" - 피터 드러커, <매니지먼트>
비즈니스 퍼슨은 전차의 궤도가 바뀌는 역사의 '전철'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안에 하나의 명확한 좌표축이 있다면 시대의 변화를 재빠르게 포착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입니다. 어떤 일에서건 경제 상황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명확한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현재 자신의 위치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잘못된 판단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다양성이란 나의 외부에 다른 사람이 있고 다른 시각이 있어서 그것들이 각자 나름대로 공존하며, 동시에 내가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