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가지려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들면 고달프다.
내려놓고 더불어 사는 재미를 즐겨야 몸과 정신이 건강해진다.

행복감을 높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시간 사용을 통제하는 것이다. 즐기는 일을 할 시간을 더 많이 갖는것! 재미와 즐거움이 없는 일을 하고, 행복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본문발췌]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용감히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
그리고 더 바보처럼 살리라.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헤엄치리라.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그리고 콩은 더 조금 먹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거리를 상상하지는 않으리라.

- 나딘 스테어의 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중에서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늘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그것을 고치고 싶어 하는 당신은 지극히 건강하다. 잘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며 내일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당신은 어떻게든 성장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이상 스스로를 닦달하지 말고, 매사에 너무 심각하지 말고,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내일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그 모든 위험성을 예측하고 예방해 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생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삶을 즐기는 것은 '~해야 한다'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의무감과 책임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당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갈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 말고,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부터 결정하세요."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며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 구로야나기 테츠코, <창가의 토토>


숙제하듯 헉헉 대며 살아온 날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 따라 숨가쁘게 달려온 날들, 그 세월 속에서 내가 놓쳐 버린 것들이 아쉬움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그저 눈을 뜨고 바라봐야만 한다. 아, 인생의 덧없음이여!


무언가를 더 원하고, 그것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바로 우리는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그에 비해 내가 가진 것이 늘 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찾아온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덜어 내는 것, 나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포기하는 것, 세상은 이래야 하고 나는 이래야 된다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와 세상을 똑바로 보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다.

지나친 이상화에서 벗어나야 나와 타인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그래야 서로 감싸 주며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어쩌면 이 너그러움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과정이며,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삶을 깊게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면 그를 내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어차피 그는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난 후 조심스레 당신의 의견을 말해 주어라. 그리고 결정은 그에게 맡겨라. 그가 설령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나중에 후회할지언정 그것은 그의 몫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나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면 내가 중요한 사람이며 이런 일을 겪는 내가 결코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주지 못하더라도 그저 관심을 가지고 들어 주면 내 이야기를 쭉 풀어놓으면서 스스로 문제를 정리하고 해법을 찾아간다. 비록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 보여 준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마음먹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다. 우리가 재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감탄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세상엔 즐거운 일투성이며 인생은 더욱 신나고 재미있어진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낼 때가 되었음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몸도 뇌도 때론 쉬어야 한다. 쉬지 않으면 시야가 좁아져 평소에 할 수 있는 적절히 확장된 수준의 사고를 하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잠시 멈추어 선 시간에 우리는 그동안 경험한 것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 자신 있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나갈 수 있다. 그러니 몸은 피곤한데도 계속 쉬지 못하고 있다면 의도적으로 '잠시 멈춤'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라.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함은 줄어들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거리를 두는 것은 아예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 버리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슬프지만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고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않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 위단이 쓴 <논어심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꽃은 활짝 피고 나면 시들 일만 남게 되고, 달은 꽉 차게 되면 기울 일밖에 남지 않는다. 활짝 피기 전이나 꽉 차기 전에는 그래도 마음속에 기대와 동경이 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관계도 모두 이와 같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확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두 사람이 친밀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자신을 열고 상대를 이해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친밀함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관계를 만들어 갈 때는 먼저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마음이 상하더라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감정적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파악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선을 기준으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내 삶까지 망가질 것 같을 때는 '미안하지만 더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보다 남을 더 신경 쓰느라 정작 자기 마음이 곪아 터진 것을 보지 못하고, 좋은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솔직한 감정을 억누르며 혼자 상처받아 온 사람일수록 한계 설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끝까지 사람을 믿고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해야 할 최소한의 장치가 바로 한계 설정인 것이다.


어찌 보면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양한 경험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철학자 파스칼의 잠언대로 우리가 인생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삶을 우리가 우주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가정하고,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길을 걸을 때 매일 똑같은 길로만 걷지 말고, 한 번쯤은 새로운 길로 가 보길 권한다. 음식을 먹을 때도 한 번쯤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해 보라. 친구를 만날 때도 늘 가던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만나 보라. 그리고 뭐든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으면 결과와 상관없이 한번 시도해 보라. 그렇게 새로운 경험을 수없이 해 본 사람과 매일 똑같은 행동만 반복하는 사람의 내일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살고 싶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더 많은 도전을 하고 웬만한 일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들이 얼마나 값진지를 알기 때문이다.


유머는 위기 상황을 웃음으로 넘기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공격성을 완화해 주며, 일상을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 인생에는 우스꽝스럽거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데 유머는 인생의 그런 요소들을 이해하고 웃음을 통해 부드럽게 껴안아 주도록 만든다. 다시 말하면 유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부분들을 이해하는 태도다.
그렇기 때문에 유머는 우리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준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유머러스한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안정과 유연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또한 좌절과 모순, 상실을 견딜 수 있는 힘도 필요하다.
니체는 말했다. 환하게 웃는 자만이 현실을 가볍게 넘어 설 수 있다고, 그러니 맞서 이기는 게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상처를 입고 그것이 회복되어 흉터로 남고, 다시 상처를 입고 그것이 아물어 또 다른 흉터가 되는 동안 나는 더욱 성장하면서 인생을 배웠다. 결핍과 상실로 인해 상처를 입고 때론 그것들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때론 견디는 법을 배우며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러면서 더욱 풍요로워지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인간이지 싶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회복탄력성'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 스트레스를 이겨 낼 수 있도록 돕는 힘을 말한다. 상처가 난 자리에 새 살이 돋듯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회복탄력성, 그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도 살아남아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회복탄력성 덕분이었다.
회복탄력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스트레스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누구나 살다 보면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역경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또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힘들다고 말하고 위안을 얻으며 고통을 이겨 내는 법을 배우려 노력한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삶이라는 긴 여행의 끝이며, 그동안 누려 온 모든 기쁨과 행복의 끝임과 동시에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모든 고통과 슬픔의 끝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에게 상처 준 사람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과도 이별이다. 그래서 죽음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잠시 지녔던 모든 것들-나의 육신과, 내가 집착했던 명성과 성공, 집과 물건들 그리고 나에게 잠시 허락되었던 시간조차도-을 다시 이 세상에 돌려주고 떠남을 의미한다.
죽음은 두려움이다.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혼자서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 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죽음은 눈을 감은 후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가르침이다. 그것은 남은 시간도 별로 없는데 비로소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잔인한 스승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그리고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향유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다.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데 나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가르쳐 주는 무심한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자연의 일부로서의 나의 삶을 완성시켜 주는 자비로운 스승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용서 못할 것이 없고, 해결 못할 것이 없음을 보여 주며,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죽음은 이어짐이다. 그것은 내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줌으로써 세상이란 이 공간을 영속시키는 자연의 확고한 의지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나의 시간을 끝냄으로써 세상의 시간이 계속 흐르게 만드는 대자연의 손길이다. 나의 시간이 다음 세대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주는 관대한 손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에 대해 멋진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 아나? 영혼이 하늘에 가면 말이야. 신이 두 가지 질문을 했다네. 대답에 따라서 천국에 갈지 말지가 정해졌다고 하지. 인생의 기쁨을 찾았는가, 자네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했는가. 대답해 보게." - 영화, <버킷리스트> 중에서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5511477623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음식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좋은 재료와 정성, 그리고 그 음식을 사이에 두고 같이 먹으며 대화하는 사람이다.


[본문발췌]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적 차원에서 좋은 요소,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후대에 길이 남긴 용어, '미덕'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당시의 이상적인 시민을 규정하는 열 두 가지 미덕을 정의했다. 용기, 절제, 관용, 기품, 아량, 적절한 야심, 온화함, 정직, 재치, 친절, 겸손, 의분(義憤)이다. 세월이 흘러 삶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감안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미덕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미덕의 목록을 새로 만든다면 아마 다음과 가까울 것이다. 희망, 장난기, 성숙함, 안도감, 외교술, 냉소, 예민함, 지성, 친절, 인내심, 비관주의, 자기이해, 자기애, 자기주장, 동정심, 감사하는 마음이다.


음악이나 미술처럼 음식 또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삶의 다양한 생각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런 생각들은 미각을 통해 음식을 맛볼 때마다 생생하게 상기되기 마련이다. 종교는 오래전부터 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인성을 개선하고 향상시려 음식과 의식을 자주 짝지었다. 예를 들어 선불교는 우리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기를 원한다. 이를 강연이나 책으로 설파하는 대신, 함께 차를 우리고 마심으로써 고요와 친절이 자리 잡도록 유도한다.
다도는 선불교의 핵심 의식으로, 가톨릭의 미사만큼이나 중요하다. 물이 끓기를 차분하게 기다리고, 준비한 잔에 찻잎을 살포시 담아 차를 우린다. 다도는 인내심과 온화한 유대감을 장려한다. 잔을 비롯한 다구는 정신이 단순해질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소박하게 만든다. 차를 마시는 동안 지키는 침묵은 차를 마시는 순간에 집중하고 속세의 생각을 잠시 멈추어 위안을 주는 타인의 존재감과 다정함을 깨닫도록 만든다. 선불교는 몇몇 핵심적인 인간의 미덕에 좀 더 굳건하게 뿌리를 내린, 기념비적 의식을 고안한 것이다.


수많은 계획들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좌초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 바닥나면 삶의 지난함에 믿음을 상실하면서 성취를 느끼기도 전에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타인이 잠재력을 끌어내고,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 잠재적으로 대립하는 관점을 완만하게 조율하는 역량이 바로 외교술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약간의 냉소가 필요하다. 인간의 본성에 자리하는 어둡고 이기적인 구석을 정확하고도 침착하게 인식하는 능력 말이다. 약간의 냉소는 어느 제도에나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며, 사람들의 동기가 항상 순수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타주의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선 행위에도 사익 추구라는 동기가 작동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많이 안다고 유능한 선생이나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독자나 청중에게서 호기심을 끌어내고, 그들로 하여금 요점을 이해하게끔 만드는 사람이 선생이나 작가로 성장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리하고 명료하다. 복잡하고 모호한 소재나 사안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정리한다. 지성이라는 개념은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데, 얄궂게도 그 특권은 종종 강자의 편에 붙는다.
우리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상반된 주장을 하며, 동시에 너무 세세하게 구분하려 듦으로써 우리의 지성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또, 사실과 개념을 켜켜이 쌓아 두기만 하고, 다른 이들이 이해 못한 핵심을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운다.


감각이 확장되면 이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덕분에 우리의 감사하는 요령에 부족함이 있음을 깨닫고 좀 더 겸손해지면서, 감사한 일이 더 없는지 궁금해진다. 그 결과 대담하고 거대하며 불온한 생각의 언저리에 도달할 수도 있다.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가치를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세상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역설처럼 들리겠지만, 기분이 나아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타인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크고 진지한 것(돈, 자유, 사랑)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욕적일 정도로 자질구레한 것(건강한 식사, 포옹, 휴식)들 역시 행복해지려면 반드시 필요하다.


요리를 하려면 일단 전문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음식이 주는 만족감은 기술의 정교함이 아니라 음식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와 우정의 깊이에 비례한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요리와 사랑을 구분하지 않는다. 요리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채우는 방법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의 가장 빼어난 점이 다른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받는 순간은 오히려 우리가 실패하거나 약점이 드러나 일을 망치고 실수할 때이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 모두 언제나 훌륭하지 않으며, 종종 두려움을 느끼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완벽함이 타인을 감탄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위협한다면, 결점은 타인과 교감하고 우정을 쌓을 계기를 마련한다.


기원전 2세기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는 열린 마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떤 면도 내게는 낯설지 않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는 이미 자신의 지독한 괴팍함을 깨닫고 있기에 타인의 괴팍함에 놀라지 않는다. 또한 겉모습으로 타인의 내면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실제 모습에 포용적이다.
이상하게도 열린 마음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 주목할 때 생성된다. 우리 내면에는 기이한 상상을 즐기고 사회 규범을 넘나드는 휴식 공간이 자리한다. 가령 절대 실행하지도 않을 지독한 복수를 상상하는 것이다. 또는 예의범절에 엄격한 사람이라도 정교한 공상을 즐기고,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가치관을 가졌으면서도 돈에 집착한다. 꽤 침착해 보이지만 때로는 분노와 절망에 시달린다. 열린 마음을 지니면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려 애쓴다. 자신만큼이나 타인 역시 속내가 복잡하다고 가정하며 세계를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덕주의는 선행이 보상받는다는, 종교적인 믿음에서 출발한 위력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이런 정의로운 비전을 정확히 충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사에서 누군가 잘못 판단한 사업 확장 계획 탓에 야근을 한다. 우리의 책임도 아니지만 늦게까지 일하고 종내에는 정리해고를 당한다. 선하게 행동한다고 딱히 제대로 보상을 받는 건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자기희생과 약속의 좌절에 진저리를 치는것은 놀랍지 않으며, 오히려 축하할 일이다. 그런 일을 겪더라도 약해지지 말고 현실의 부당함에 적절히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전략적으로 무례하고 악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두운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초월적 사유 속에선 내 삶만이 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평정심을 갖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나'와 '내가 아닌' 대상과의 거리를 줄인다. 언제나 세계의 일부였던 자연이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 바람, 구름이나 파도와 함께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계급은 아무것도 아니고, 소유는 무의미하며, 불평불만은 조바심을 잃는다.
만약 누군가 초월적 사유에 빠진 우리와 마주친다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 그리고 새롭게 엿보이는 너그러움과 이해심에 놀랄 것이다. 초월적 사유는 종종 미치도록 짧다. 늦은 밤이나 해 질 녘에 잠깐, 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나 기차에서 불현듯 찾아온다. 하지만 어떤 식재료, 특히 라벤더, 카르다몸, 강황과 계피를 통해 우리는 초월적 사유에 좀 더 체계적으로 다가가 고집스러운 자아를 조금은 누그러트릴 수 있다.


우리는 기술적으로는 인상적일지 몰라도 감정이 메마르고 실제 경험과 단절된 사유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 결과 학술적으로는 논리적이지만 관중을 감동시키거나 동기를 부여하지 못하는 사상에 집착한다.
과도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삶을 편하게 사는 데 중요한 것들을 상당 부분 잊거나 무시하기 쉽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디자이너는 20세기 중반 바우하우스 철학을 도발적으로 암시해 아름답지만 앉기에는 엄청나게 불편한 의자를 만든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정치인은 이론적으로 훌륭하지만 시민들의 특징과 현실 감정을 반영하지 않는 정책을 입안하여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역사학자는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더라도 좋은 이야기를 알리는 일에 소홀하다.
그렇다고 이성을 무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성에 무엇인가 더하는 방법이 현명하다는 말이다. 기억, 욕망, 맛, 냄새와 본능적인 경험 등을 이성과 엮는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라면 그렇지 않은 면에 계속해서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감각을 활성화하는 데 야외에서의 식사만큼 탁월한 방법이 또 없다.


거의 언제나 창조적 사유의 적은 불안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심오한 생각은 대체로 불안을 내재하고 있다.
정확하게 집어내고 중요성을 확인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과거에 소중했던 신념이 그다지 현명하지 않았다거나 과거의 판단 착오를 되새겨야 할지 모른다. 삶에 중요하고도 어려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상황을 마주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처럼 찾아올 변화의 그림이 또렷해지기 시작하면, 성장보다 평온을 선호하는 내적 검열관이 이를 알아차린다. 창의력이 발휘되기 전에 중단되는 이유다.
경계심 많은 자아가 동요하면 피로를 느끼고 인터넷이나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사고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혼란에 빠트리고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이는 비록 중요하고 흥미로운 기능이지만, 단기적인 평화를 노골적으로 위협했던 창조적 사유를 향한 진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는다.
창조적으로 사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단순히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이다. 숲을 거니는 것도 좋다. 한발짝씩 내디디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우리의 정신 저 너머에서 절반만 형성되어 있었던 독창적인 발상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회를 만나기도 한다. 의도가 없었으므로 더 자유롭고 용감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의 수필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천재의 사고방식에서 우리는 방치된 자신의 생각을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소위 천재들이라고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선입견으로 방해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생각할 뿐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품고 있지만 대체로 너무 불안하거나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어 외면한 길을 찾은 것이다.


종교가 특정한 음식을 조금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식생활과 도덕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연결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종교가 음식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단식은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식사를 사랑하고, 또한 식사가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지배하는지 기리는 의식이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음식을 조금씩 덜 먹다 보면 다른 관심사나 걱정이 표면 위로 드러나곤 한다. 다른 이들에게 잘못했던 일에 대한 슬픔이나 고귀한 이상에 대한 헌신, 육체적 욕망과 관심을 자중하고 싶은 소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종교 밖에서도 일정 기간 동안의 단식 혹은 절제된 식생활은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느낌에 대응하는 데 꽤나 유용하다. 아주 생생하고도 기본적인 방식으로써, 절제력을 발휘해 육체보다 정신이 우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만든다. 그렇게 고삐 풀린 자아를 다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성장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다. 우리는 삶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고통스러운 간극에 충격을 받곤 한다. 후회할 만한 말을 입에 담고,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으며, 나쁜 습관을 떨쳐 내지도 못한다. 우리는 더 집중력을 발휘해 노력하고, 단호함과 자신감을 갖기를 갈망한다. 그럴 때 음식은 우리가 직접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극을 제공한다.


우리는 완벽하기 위해 너무 많이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게 매력적인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실패다.
사람들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는 외적 증거를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생활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커리어 쌓기가 얼마나 고된지, 가족들이 얼마나 불만족스러운지, 늘 걱정을 짊어지고 산다든지 하는 문제는 모두에게 익숙하기에 동질감을 자아낸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5501538619?cat_id=50010360&frm=PBOKMOD&query=%EC%82%AC%EC%9C%A0%EC%8B%9D%ED%83%81&NaPm=ct%3Dldcj0g1s%7Cci%3D5c2db004e0c19dacd43d0b6370b8f3a8902b40d1%7Ctr%3Dboknx%7Csn%3D95694%7Chk%3Dc9178b10f78b31238cd4c8f7a528eccebf3be2c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억.


[본문발췌]

세상은 온통 더 많은 걸 기억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과 건망증에 시달려 불안한 중년들과 치매를 걱정하는 노년들로 가득 차 있다. - 추천의 글, 정재승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기억은 효율을 꽤 따지는 편이다. 한마디로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하도록 진화했다. 의미가 없으면 잊는다. 그런데 우리 삶 대부분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이고 사소하다.


뭔가를 기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지(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와 주의집중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은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즉 늘 하는 일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이 사건들은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일어나는 단조로운 일들이다. 일화기억은 늘 똑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평범하고 전형적이고 뻔한 것들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이런 경험들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린다.



성인이 되어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일화기억이 형성되는 시기는 평균 3세다. 3세 이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리고 있던 짙은 안개가 걷히는 때는 6세 혹은 7세 정도다. 이제부터의 기억은 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 곁들여진 일화들이다.

왜 우리는 아주 어릴 때의 일을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할까? 뇌에서 언어의 발달은 일화기억을 강화, 저장, 인출하는 능력과 상응하여 일어난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세부적인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언어와 연관된 해부학적 구조와 회로가 갖추어져야 한다. 따라서 성인이 되어 접근할 수 있는 기억은 경험을 말로 옮길 수 있는 언어능력을 갖춘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기억이다.

일화기억을 형성하는 사건들은 대개 15세에서 30세 사이에 모여 있다. 이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집중되는 회고절정의 시기다. 다양한 방면에서 첫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인생은 목표와 의미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한다. 그래서 일화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기 위해서는 감정, 의외성, 의미 등이 필요하다.



저장된 일화기억을 인출할 때마다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기억의 인출은 녹화된 동영상의 재생이 아니라 이야기의 재구성이다. 지나간 사건을 다시 떠올릴 때 저장되어 있는 세부정보의 일부만을 불러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세한 부분을 빼먹고, 어떤 부분은 재해석하고, 어떤 부분은 왜곡한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고려할 여유가 없던 정보, 맥락, 관점들이 지금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종종 기억의 빈틈을 메워서 기억의 서사를 더 완벽하고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없던 정보를 꾸며내기도 한다. 당연히 이 정보는 대개 부정확하다.

일화기억은 매번 인출될 때마다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기 때문에 매번 우리가 뭔가를 떠올릴 때마다 잘못된 정보가 침투해 기억을 실제 경험과 다르게 왜곡할 수 있다. 일화기억에 거짓 정보가 침투하는 가장 흔하면서도 확실한 경로는 언어, 특히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일화기억은 단어의 선택과 유도질문으로 매우 쉽게 조작된다.

피질에서 한 번씩 끄집어낼 때마다 보관되어 있던 일화기억은 쉽게 변질되고, 우리는 꺼내온 기억 위에 새로 편집된 기억, 온갖 새로운 정보로 업데이트된 기억을 덮어씌운 다음 다시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지나간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쩌면 맞을 수도,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참과 거짓 중간 어디쯤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혹시 배우자가 말하는 기억이 우리의 기억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발끈하지 말자.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도 아마 고의는 아니겠지만 잘못된 기억을 둘만의 추억이라고 여기며 간직해왔는지 모른다. 이 점을 깨닫고 진실이 무엇인지 누구도 완벽하게 알 수 없음을 그냥 받아들이자.



기억을 잠식하는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즉 반복과 의미 부여다.


우리는 뛰어난 기억력을 원하지만 모든 부담과 공로를 온전히 기억에만 돌릴 수는 없다. 기억체계가 최적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보저장과 정보삭제가 균형을 이루도록 섬세한 조정이 필요하다. 기억이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능력은 모든 것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 유용한 정보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다. 신호를 저장하고 소음은 제거한다. 잊는 능력은 기억하는 능력만큼이나 꼭 필요하다.


만성스트레스는 기억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현대의 삶은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못할지라도 우리의 뇌와 몸의 반응에 극적인 변화를 줄 수는 있다. 요가, 명상, 건강한 식습관, 운동, 마음챙김 수행, 감사와 공감을 통해 우리는 스트레스에 조금 둔감해지고, 도피 반응에 브레이크를 걸고, 불안이라는 독을 건강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든 방법들이 고혈압, 염증, 불안, 스트레스를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활동은 코르티솔 수준도 정상화시킨다. 또한 해마의 신경생성을 강화함으로써 만성스트레스를 퇴치하고 기억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우리가 깨어서 바쁘게 활동하는 동안 시냅스에 대사 잔해들이 쌓이는데, 깊은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가 이 잔해들을 청소한다. 숙면은 뇌의 대청소 시간인 셈이다. 특히 우리가 밤에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신경교세포는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바로 아밀로이드의 처리다. 하룻밤만 잠을 못 자도 뇌척수액에 아밀로이드와 타우(또 다른 알츠하이머병 예측지표)가 증가할 수 있다. 아밀로이드가 쌓이면 숙면을 방해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아밀로이드가 쌓이게 되므로 퇴적물 형성을 가속화하는 악순환 고리에 갇히게 된다. 수면 부족은 알츠하이머병을 진행시키는 매우 중요한 위험 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부터 수면 부족에 시달린 것은 아니다. 194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은 하룻밤 평균 7.9시간을 잤다. 언제나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무엇이든 다 가지고 다 해봐야 한다는 압박, 치솟는 불안, 전자기기 사용 시간의 폭증, 깊은 밤까지 TV 시리즈 한 시즌을 정주행하는 습관 등으로 인해 우리의 수면 시간은 현저하게 줄었다. 오늘날 미국, 영국, 일본의 성인들은 하룻밤 평균 6.5시간을 잔다. 우리는 잠을 박탈당하고도 적게 자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곱 시간도 채 자지 않는 생활습관을 열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허세다. 수면 전문가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수면 시간에 대해 모두 한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일곱 시간에서 아홉 시간을 자야 한다. 그보다 덜 자면 건강과 기억을 해친다.


기억이 한 인간을 이루는 전부는 아니다. 인간에게는 감정, 의지, 감수성, 도덕적 가치가 있다. 한 인간을 자극하고 그에 따른 깊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다. - 알렉산드르 루리아


기억을 소중히 여기되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기억을 정말 대단한 존재로 여긴다면, 기억의 진정한 위대함을 인정하고 기억을 잘 돌볼 것이다. 올바른 도구를 사용하면 기억은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기타 치는 법을 배우고, 시험에서 A를 받을 수 있다. 기억의 진정한 가치에 감사할 것이며, 이런 감사의 마음은 수많은 연구가 증명하듯 우리의 행복과 안녕에 보탬이 된다. 동시에 기억을 가볍게 받아들이면 기억의 수많은 허점에 대해 느긋하고 관대해질 것이다. 불완전한 기억을 탓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한 걸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스트레스도 줄어든다. 만성스트레스가 줄어야 기억력도 좋아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처럼 우리의 삶이 편안해진다.


우리의 뇌는 애초에 일상적이거나 뻔한 일들을 담아두도록 설계되지 않은 반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반복적이고 뻔한 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기억하고 덜 잊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일이긴 할까? 아마도 의미 있는 것만 남기고 모두 잊어버리길 바라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기대일 것이다. 즉 인생에서 의미 있는 부분들을 자세히 기억하는 능력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기억은 내가 나임을 느끼게 해주고, 인생을 하나의 서사로 인식하게 해주며, 타인과의 연결 안에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해줄 것이다. 우리의 뇌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쩌면 지금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2438301003?cat_id=50005778&frm=PBOKMOD&query=%EA%B8%B0%EC%96%B5%EC%9D%98+%EB%87%8C%EA%B3%BC%ED%95%99&NaPm=ct%3Dld32rzls%7Cci%3Daa50c0454dbba08405c9233ad2a8255f394c334e%7Ctr%3Dboknx%7Csn%3D95694%7Chk%3D7555828c3110a37d7061bc14c457880696427fc9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