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동성이 높고, 불확실하며, 복잡하고 애매모호한 문제 해결에는 똑똑한 천재보다는 다양성에 바탕을 둔 집단지성이 더 낫다.



[본문발췌]


인지 다양성은 몇백 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면했던 문제들이 선형적이거나 단순하거나 분리 가능하거나 이 세 가지 특성 모두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에서는 이 논리가 뒤집힌다. 다양한 관점을 지닌 그룹에 엄청나고 결정적인 이점이 생긴다.

불완전한 관점을 지닌 두 사람을 한데 묶어놓으며 통찰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크게 발휘될 수 있다. "관점이 다양할수록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잠재적 실행 가능성을 갖춘 해결 방안의 범위가 넓어진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각자의 사각지대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한다. 이런 현상을 '미러링mirroring'(거울 효과)이라 부르기도 한다. 거울에 비치듯 나의 실제 모습이 상대방에게 비치고 상대방의 모습은 나에게 비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불완전하거나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더욱더 확신하기 쉽다. 그 결과 확신이 정확성과 반비례하는 지경에 이른다.

인지적 동질성은 현대사회에서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일반적인 표준이다. 대부분의 조직은 다양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탓에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영리한 전략을 수립하며 위협을 감지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손상시킨다.


정치 엘리트의 사회적 다양성 부족은 정책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경험이 너무나 중요한 정치에서 재앙이 된다. 동일한 배경을 지닌 똑똑한 사람들이 의사 결정 그룹에 배치되면 집단적 맹목 현상을 보이기가 쉽다.


현명한 그룹은 이와 다르게 기능한다. 그들은 복제인간 같지 않으며 동일한 관점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반항적인 그룹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하지 않지만 문제 공간의 다른 영역에서 나온 통찰을 제시한다. 이런 그룹에는 도전하고 확대하며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타화수분(다른 꽃의 수술에서 꽃가루를 받아 수정시키는 것)하는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속해 있다. 이는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나은 집단지성의 전형적인 특징에 해당한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보완하는 힘coverage이 있다. 그들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할 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려는 그룹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문제 자체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여러 측면을 더 깊이 파고드는 일도 아니다. 그 대신 한 발 물러서서 우리의 집단적 이해의 어느 부분에 틈이 있는지, 우리가 개념상 사각지대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동종 선호 경향이 우리를 문제 공간의 아주 작은 구석으로 몰아넣지는 않았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처럼 보다 깊이 있는 질문을 마주하지 않으면 조직은 그룹 토의 과정 곳곳에 결함이 스며드는 위험에 빠진다. 즉 문제를 검토하고 더욱 깊이 파고드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들의 사각지대를 더욱 강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인지 다양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룹 토의가 거울에 비추듯 서로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계모하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동질성의 가장 큰 문제는 복제인간 같은 팀이 이해하지 못한 데이터와 잘못된 해답,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기회가 아니다. 바로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질문과 미처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데이터, 인식하지도 못한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다. 도전적인 분야일수록 개인이나 개별 관점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가 더 어렵다. 집단 지성은 개인의 지식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차이에서 나온다.


다양성은 집단지성에 분명 기여하지만 관련성이 있을 때만 그렇다. 핵심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관점을 지닌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경제예측 전문가의 집단지성은 서로 다른 모델을 활용해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정보기관의 경우, 다양한 경험을 많이 보유하고 자신들이 직면한 위협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더 많이 이해하는 뛰어난 분석가들에게서 나온다. 정책 입안자의 집단지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이 섬기는 유권자들의 인구통계적 스펙트럼과 관련 있는 배경을 지닌 특출한 정치인들에 의해 형성된다.


지배 역학 관계. 한 명 또는 두 명이 지배적이면 팀 내 다른 사람들, 특히 내성적인 사람의 통찰이 억제된다. 지배적인 사람이 리더라면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그의 의견을 따라 하며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그룹 내에 존재하는 반항적인 아이디어들이 표출되지 못한다.


집단은 일반적으로 리더가 필요하며, 리더가 없으면 갈등과 망설임이 생길 위험에 처한다. 그런데도 리더는 집단의 다양한 관점에 접근할 때에만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일단 결정이 내려졌고 되돌릴 수 없을 때 지배는 말이 된다. 리더는 목표한 일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팀을 독려해야 한다. 하지만 결정을 실행하는 것과 달리 평가를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오릴 때 지배는 그 자체에 내재된 모순의 무게 때문에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는 명성의 역학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반항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기 위해, 그런 기여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리더의 응징을 받을 염려 없이 안전한 환경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사람들이 무엇이 맞는지 알아내기 위해 사려 깊은 반대를 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 레이 달리오


환경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이때가 바로 아무리 지배적인 두뇌라 하더라도 하나의 두뇌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시기다. 또한 집단지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한 바로 그 시기다. 그런데 지배적인 리더가 제공하는 미심쩍은 편안함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묵인하는 바로 그 시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배는 리더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종종 팀이나 조직 또는 국가 구성원들의 무언의 소망과도 연계돼 있다. 실제로, 팀이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하는 순간 명망 있는 리더십을 선천적으로 선호하던 사람들이 지배적인 리더십으로 옮겨 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데 이는 처참한 결과로 이어진다.


심리학자들은 종종 '개념적 거리conceptual distance'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 주제에 너무 몰입하면 우리는 지나치게 장식이 많은 바로크 양식 같은 복잡함에 포위된다.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거나 단순히 그 내부에 피상적인 변화를 주는 것만 생각하기가 매우 쉽다. 결국 자신의 패러다임의 포로가 된다. 하지만 벽 바깥으로 나오면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는 없지만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이는 종종 예술 형태의 주요 기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새로운 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익숙한 뭔가를 보는 것이다. W. B. 예이츠의 시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과 조각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위대한 작품들은 작품을 보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작품 사이, 즉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서 개념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재결합이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되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미래의 성장은 우리가 세상에 부여한 범주들을 초월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영역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정신적 유연성을 갖추고 있으며, 규칙과 사고 저장소 사이에 세운 벽을 불변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촉진될 것이다.


핵심적인 통찰은 물체와 달리 아이디어는 수확체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갖고 있던 차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리면 그와 동시에 차를 쓰지 못한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 아이디어의 잠재력은 커진다 이를 두고 정보 넘침information spillover이라 한다. 아이디어를 공유하면,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생각에 전달될 뿐만 아니라 이제 더 많은 아이디어와 결합될 수 있다.


혁신은 창의성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연결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만의 밀폐된 공간 속으로 후퇴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회가 아니라 위협으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난다.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했던 시대가 혁신을 이끌어왔다.


정보 버블의 경우, 정보의 경계는 밀폐돼 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버블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듣는다. 이는 왜곡된 관점을 만들어내지만 그 관점은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내집단 멤버가 외부 의견을 마주치는 순간 자신의 믿음에 의문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정보 버블을 터뜨리는 방법은 노출이다. 이것이 바로 광신적 종교 집단이 그토록 오랫동안 내부자들을 다른 목소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추가적인 필터를 갖춘 에코체임버의 속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정보 버블처럼 내집단에서 더 많은 의견을 듣지만 이런 관점들은 반대되는 의견에 노출될 때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반대자가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 가짜 뉴스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외부 목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무시한다. 에코체임버는 인식 취약성을 활용한다. 대체 가능한 관점에 대한 신뢰를 체계적으로 약화하고 다른 통찰과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모함하며 신뢰 형성 과정 자체를 왜곡하는 필터를 실행한다. 대체 가능한 관점은 깊이 생각한 후가 아니라 접하자마자 묵살된다. 사실은 제시되는 순간 바로 거부당한다. 관점과 증거는 쇳가루가 자기장에서 밀려나듯 퇴짜 맞는다. "에코체임버는 우리의 취약성에 붙어사는 사회적 기생충 형태로 운영된다. 정보 버블은 외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 형성된다. 에코체임버는 다른 편 사람들을 신뢰하지 못할 때 생겨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다. 신체 치수가 다를 뿐만 아니라 인지적 특성과 강점, 약점, 경험, 관심사도 다 다르다. 실제로 이런 다양성은 인류의 가장 멋진 특징들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가 중요한 방식에서 서로 다르다면, 현명한 시스템은 가능한 한 이 편차를 감안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런 편차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표준화된 조종석 같은 융통성 없는 시스템의 창살에 갇혀 있으면 어떻게 인간 다양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평균치에 현혹된다면 어떻게 다양성을 활용할 수 있을까?


다양한 예측의 평균을 내는 것은 다양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의 업무나 학습 등의 방식을 표준화하는 것은 다양성을 짓누를 위험이 있다. "평균을 잘 이용하면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통찰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잘못 하용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단 하나의 해법을 강요하게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고수한다. 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면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디폴트에 의문을 제기하는 능력이야말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혁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자신이 속한 네트워크에 관한 것이다. 지식은 축적되면서 집단 두뇌를 형성하며 사실상 자연도태 작용 자체에 따라 발전한다.


인간의 발전은 집단을 구성하는 두뇌들 자체보다 다양한 두뇌들이 상호 작용하는 방식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한다. 인류는 개인적으로 막강해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지구 행성에서 가장 막강하다. 다양한 통찰들을 한데 모으고 세대 내와 세대들에 걸쳐 연결하며 반항적인 아이디어들을 재결합함으로써 인류는 상당히 놀랄 만한 혁신들을 창조했다. 인간의 영특함이 사회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성이 인간의 영특함을 만들어냈다. 다양성은 인간 그룹의 집단지성을 끌어낸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독특한 진화 경로를 구축한 숨겨진 요소다.


다양성을 실제 일과 삶에 적용하려면

  • 무의식적 편견unconscious bias. 이는 사람들이 재능이나 잠재력의 부족이 아니라 인종이나 젠더 같은 자의적 요인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된다. 무의식적 편견을 없애는 것은 보다 공정한 시스템을 만드는 강력한 첫 단계일 뿐만 아니라 집단지성을 더 많이 갖춘 사회를 만드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배경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추구할 기회를 제공해 우리의 가장 긴급한 문제에 기여하는 지식을 지닌 집단을 확장한다. 구조적 차별에 맞서 싸워 이를 해결하는 일은 모든 정치적 의제의 거의 취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무의식적 편견 제거는 인종이나 젠더와 상관없이 최고 인재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인지 다양성을 최적화하지는 못한다. 무의식적 편견 제거와 인지 다양성 최적화, 이 두 가지 도전은 개념상 뚜렷이 구분된다. 훌륭한 조직은 둘 다 해야 한다.
  • 그림자 위원회shadow boards. 이 위원회는 주요 의사 결정과 전략에 대해 경영진에게 조언을 하며 나이로 인한 좁은 시야를 없앨 수 있는 젊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경영진이 '젊은 그룹의 통찰을 활용하며' 경영진의 관점을 다양화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또 반항적인 아이디어의 흐름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젊은 사람들의 빠른 신기술 습득 속도에 놀랐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림자 위원회의 중요성을 이해할 것이다. 또한 오래전부터 묵혀온 문제들을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보며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이 논리를 이해할 것이다. 
  • 주는 자세giving attribute. 협업에 성공하려면 특별한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의 통찰을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제공하고 관점을 공유하며 지혜를 전해야 한다. 이렇게 줘야만 다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실제로 점점 더 커지는 다양성의 중요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아마도 주는 자세를 갖춘 사람들이 더욱 성공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식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제공하려는 의지는 복잡한 세상에서 엄청난 이익을 준다.



우리는 동종 선호가 보이지 않는 중력처럼 작동하며 팀과 조직을 동질성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을 봤다.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관점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편견을 확증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즐긴다. 편안하고 인정받은 느낌이 든다. 심지어 우리가 집단적으로 더욱 멍청해지는데도 개인적으로는 똑똑하다고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다양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때 협업의 본질적인 의미가 바뀐다. 솔직한 반대는 파괴적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서로 다른 의견은 사회적 결합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사회적 활력에 대한 기여로 간주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해 아웃사이더에데 손을 내미는 것은 배신 행동이 아니라 가장 계몽적인 결속 형태다. 재결합으로 만들어진 혁신이 없으면 어느 집단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따라갈 수 있을까?


혁신은 각 개인의 영특함이 아니라 지식의 최첨단에 있는 다수의 개인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관점을 교환하며 반대 의견을 내고 서로 배우며 협업 관계를 구축하고 낯선 이를 신뢰하며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 혁신은 천재나 집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신을 하려면 생각이 자유롭게 상호 작용하는 거대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같은 배경과 동일한 분야, 같은 학교 출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정말 문제가 생긴다. 이런 동일성은 사각지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더 나은 의사 결정을 하려면 다양성이 분명히 중요하다. ... 어떤 분야도 모든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으며 '집단사고'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배경과 전문성을 대표하는 자들이 주요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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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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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공감, 더 많이 듣기를 실천하고 의도를 단정짓지 않기, 닫힌 생각을 멀리하기... 대화에 필요한 것은 부족하고 대화중 하지 말아야 할 다수의 잘못된 내 행동을 반성한다.


[본문발췌]

사람의 믿음에 깊이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언제나 솔직한 대화다. 대화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위로서(영어 단어 'conversation'에서 'con'은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타인의 믿음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본래 협업인지라, 상대방이 믿음을 제고하고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남 뿐만이 아니다. 대화는 나의 믿음을 되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화에서 가장 먼저 목표를 삼아야 할 일은 상대방의 추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적대적 사고, 즉 맞서고, 다투고, 따지고, 비웃고,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보다는 손잡고, 힘을 합치고, 듣고, 배운다고 생각하며 협력적 사고를 하자. '이 사람은 내 적이며, 내 말을 알아듣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접고, 대신 이렇게 생각하자. '이 사람은 내 대화 파트너이며, 그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가령 그가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을 서로 자연스럽게 배우는 기회다. 누군가를 파트너로 삼아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상대의 결론에 수긍하는 것도 아니요, 그의 추론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교양의 척도는 수긍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옛말도 있다.


상대방의 말 듣기, 말은 줄이고 더 많이 듣는다. 듣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남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고, 스스로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메시지 전달과 진정한 대화를 구분한다. 메시지 전달은 선생이 되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다. 반면 대화는 주고받으며 서로 배우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것만 좀 알아들면 생각을 바꿀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대화가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메신저 노릇을 할 때 메신저를 공격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메시지 전달 모드에 돌입하면, 나는 질문 중심의 '듣고 배우기' 모드로 들어가자. 질문은 엇나간 대화를 본 궤도로 슬쩍 되돌리는 효과가 있다.


상대방이 왜, 어떻게 지금처럼 생각하고 믿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러면 상대방에게는 물론 스스로도 그동안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는 게 아니었음을 겸허히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남에게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려면 우선 나부터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남들이 아는 건 나도 안다'는 흔한 오류. '읽지 않은 장서 효과(Unread Library Effect)', 인류의 지식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는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책이 수중에 있으니 책에 든 정보를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연구해보기는커녕 읽어보지도 않았으니 지식이 없는 상태다.

사람들에게 빌린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면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믿음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 참여자들에게 어떤 정책에 관해 구체적으로 실시할 방법, 예상되는 효과 등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게 했더니, 강한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사람도 더 온건한 견해로 선회했다. 타인의 사고에 개입할 때 이런 현상을 잘 이용한다면 적어도 두 가지 큰 장점이 있다. 첫째, 상대방이 주로 말하도록 유도하고 나는 주로 들음으로써 상대방은 내가 자기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된다. 둘째, 상대방이 그 누구의 압력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지식을 의심하게 된다.

읽지 않은 장서 효과를 자각시키는 데 효과적인 방법 하나가 바로 '무지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읽지 않은 장서 효과는 모르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며, 우리의 바람은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나 자신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세 가지 큰 장점이 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도 있는 읽지 않은 장서 효고를 극복하는 기회가 된다. 즉, 주어진 문제에 관해 실제보다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잘 모르겠네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그럼으로써 상대방에게도 모른다고 시인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 신호를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상대방의 체감 지식과 실제 지식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는, 미묘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략이 된다.


"예" 또는 "아니요"로 답하는 단답형 질문보다는 상대방이 자기 생각을 자기 언어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열린' 질문을 하자. 그러면 상대방을 대화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다. 인질 협상 전문가 크리스 보스는 열린 질문 중에서도 이른바 '교정 질문'을 추천한다. 교정 질문은 '어떻게'나 '무엇'이 들어가는 질문이다. "예" 나 "아니요"로 답할 수가 없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대화의 '주제'도 아니고, 대화를 나누는 '상대'도 아니다(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보기에 옳은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공동의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나와 도덕적 견해 다른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특히 상대가 관심을 둔 가치에 나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설령 상대방의 눈에 내가 도덕적 관점에서 아군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적군에 속한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야 상대방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서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전투적 대화를 피하자. 글로 쓴 주장은 상당히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크다. 화가 났을 때는 절대 아무것도 올리지 않는다. 이메일 답장이나 온라인 대화 참여도 하지 않는다. 누가 올린 답글에 화가 벌컥 난다면, 감정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는 답글을 달지 않는다.

트위터에서는 절대 논쟁하지 않는다. 트위터는 글자 수 제한 탓에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수많은 사용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자를 집단으로 공격하는 이른바 '조리돌림' 같은 문제에 특히 취약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페이스북에서는 종교와 정치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 과련 주제를 피한다.


탓하는 행동은 일방적이고 단정적이다. "네가 어떤 식으로 잘못했다!"라고 못 박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제 자체가 과거형이다. 반면, 기여 요인을 밝히는 행동은 상호 간에 공동으로 진행되는 노력이다. 사태가 일어난 경위를 더 폭넓게 파악하는 게 목표다.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사고하자는 얘기다. 현 상황의 수많은 기여 요인을 이해하고 나면, 문제를 진취적으로 풀어나갈 출발점에 제대로 설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도덕적 견해 차이가 벌어지는 요인 하나는 당파성이다. 우리는 우리 편 내부에서조차 당파적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보수가 진보를 탓하거나 진보가 보수를 탓하는 행위는 외부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내부 구성원들에게 우리 편의 가치관, 그리고 상대편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하는 행위다. 이로 인해 당파성은 더 커지고 진영 간의 예의는 점점 무너진다. 기여 관점으로 전환해 이 같은 폐단을 막자. 어떤 상황을 들여다봐도, 문제를 초래한 기여 체계는 알고 보면 복잡할 것이다.

우리 편의 나쁜 행동을 지적받았을 때 "그건 양쪽 다 마찬가지"라고 응수하지 않는다. 양쪽 다 마찬가지라는 말은 기여 분석에서 남 탓하기로 되돌아가는, 방어적 행동이다. 비판을 인정하기만 하고 되받아치지 말자. "맞다, 그럴 때가 있다"라고만 하자.


우리가 대화할 때 굉장히 흔히 하는 실수가 있는데, 알게 된 과정보다 결과에 주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무엇을' 안다고 주장하는지(믿음이나 결론)에 주목하기 쉬운데, 그보다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추론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상대방의 결론보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큰 이점이 있다. 사람마다 남에게 이의를 제기받으면 습관적으로 나오는 반응이 있다. 자주 듣는 반론에 대해 늘 반복하는 주장이나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자기가 결론에 '어떻게' 이르렀는지를 설명하게 된다. 입이 아프게 반복했던 메시지를 거두고 대화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상대방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면 믿음에 도달한 추론에 질문을 제기할 때보다 상대방이 방어적 자세로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방어벽을 쌓고 입장을 더 강하게 고수할 위험이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면 그런 문제가 많이 사라진다. 믿음 자체보다는 인식 원리를 캐물을 때 상대방이 위협을 덜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배울 수 있다'는 점은 우리가 가진 비장의 카드다. 그 카드를 활용하면 거의 실패 없이, 주제가 무엇이건 훈훈하고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상대방과 함께 진실을 모색하는 작업이 여의치 않고 상대방의 사고에 개입할 방법이 없으며 예의를 지키기 쉽지 않다면, 배우는 마음가짐으로 전환하면 된다.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그럼으로써 상대방의 사고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배우는 모드를 활용하면 거의 모든 대화를 '연착륙' 시킬 수 있다. 무언가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화를 좋게 끝낼 수 있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대화 중에 저지르기 쉬운 기초적 실수
  •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 화내기
  • 상대의 말 끊기
  • 고의로 무례하게 굴기
  • 조롱하거나 탓하기
  • 비웃기
  • 상대방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하기
  •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현
  • 상대방의 발언을 최대한 인색하게 해석하기
  • 상대방이 질문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 머리가 나쁘다고 공격하기
  • 실수하거나 도움, 정보, 의견을 청하는 사람을 나무라기
  • 상대방의 억측에 대한 비난
  • 믿음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인신공격(예; "그런 걸 믿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 타인을 '무지하다, 무능하다, 부정적이다, 말썽꾼이다'라고 간주하기
  • 자신의 진짜 생각을 속이기
  •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
  • 모르는데 '모른다'고 말하지 않기
  • 믿음의 이유보다 믿음 자체에 주목하기(즉, 인식 원리보다 결론에 주목하기. 예를 들면 "사형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뭐가 있을까?"라고 묻는 대신 "사형은 정당한 처벌이니 살인과 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 피부색이나 기타 타고난 특성을 이유로 그 사람의 생각을 깍아내리는 발언
  • 설득력 있는 근거를 새로 접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기
  • 대답을 얼버무리기(특히 상대방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 메시지 전달하기
  • 자신의 취약점을 인정하지 않기
  • 우리 편 극단주의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동
  • 상대방의 문법 실수 지적하기(짜증을 유발하는 행동이다.)
  • 상대방의 도덕적 잘못을 질책해 상대방의 논점을 이탈하거나 흐리는 행동
  • 말 끊기
  • 상대의 말을 가로채어 마무리 짓기
  • 대화를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 강압에 못 이겨 대화하기
  • 대화 중에 휴대전화 보기
  • 유명인 이름 팔기
  • 투덜대고 불평하기
  • 자랑하기
  • 대화 중단을 거부함으로써 관계 악화를 초래하는 행동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가장 한심하면서도 위험한 징후의 하나는, 그 누구도 자신의 생각에 반대할 수는 없다고 믿는 개인과 집단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이다. - 토머스 소웰(2018.7.30)


좋은 인간관계야말로 건강과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논쟁에서 이긴다고 그만큼 건강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인간관계의 기틀은 자기가 옳음을 인정받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혼자 옳으려면 혼자 살라", 자기가 옳다는 걸 인정받으려고, 상대방의 행동을 고쳐주려고, 혹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고집을 피우다가 좋은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예가 많다. 그냥 친구가 잘못 알고 있게 놔두자.


'프레임(틀)을 바꾼다'는 말은 표현 방식을 바꾸어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사안에 뭔가 다른 방식으로(이를테면 거부감이 덜 드는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다. 프레임 바꾸기는 '한쪽으로 생각을 몰아가기'가 아니다. 질문이나 쟁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제시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또 사안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부정적 태도를 줄이고 더 솔직하게 대화를 풀어나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래퍼포트 규칙 지키기. 상대방의 말을 재정리하고, 동의하는 점을 밝히고, 배운 점을 언급한 다음 반박한다.
상대방의 견해를 명확하게 재정리하면 내가 상대방의 견해를 이해하려고 진심으로 노력했음을 알릴 수 있다. 또 '내가 동의하는 점을 조목조목 밝힌다'는 규칙을 지키면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부각할 수 있다. 이는 특히 정치, 종교, 도덕 문제에서 상대방과 의견이 갈릴 때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그래야 공동의 기반을 다지고 협력의 틀을 유지할 수 있다. 또 합의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대화가 막히거나 분위기가 과열될 때 합의점을 되돌아보고 라포르를 형성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에게 배운 점을 언급하는 세 번째 규칙은 상호 학습과 존중의 자세를 권하는 효과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서 뭔가를 얻었음을 밝힘으로써 상대방의 모방을 유도할 수 있다. 교육 분야와 교정 분야에서는 이를 '친사회적 모델링'이라고 부른다. 친사회적 행동의 본보기를 먼저 보이는 것이다. 래퍼포트 규칙은 상호 존중과 열린 자세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설령 상대방이 화답하지 않더라도, 이 규칙은 협력의 외양을 유지하고 내가 상대방의 의견을 중시함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래퍼포트 규칙에는 본보기 보이기, 듣기, 메신저 잠재우기, 배우기 등 앞서 소개했던 각종 기술과 전략이 총망라되어 있다. 남의 견해를 비판하거나 반박하기 전에 확실히 이해할 것을 요구하므로, 경솔과 부주의를 막는 안전장치 역할도 한다. 이 규칙은 무례한 대화를 확실히 예방해주는 수칙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다른 근거를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바로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지 않기 때문'일 때가 많다. 합리적 논거를 꼼꼼히 살펴서 믿음을 형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그럼에도 자기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근거를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데 대개 서투르다. 믿음이 틀렸음을 확인하기보다는 옳음을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근거를 제대로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미 가졌거나 갖고 싶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만 쏙쏙 뽑아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성향이 있다. 또 대부분은 믿음을 먼저 형성한 다음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거를 찾아 나서곤 한다.

도덕적, 사회적 믿음이나 정체성 차원의 믿음을 바꾸려고 할 때,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행동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믿음에 반하는 근거를 제시받으면 믿음을 오히려 더 확신하게 되는, 역화 효과가 있음을 잊지 말자. 역화 효과가 일어나면 상대방이 기존 믿음을 한층 더 고수하면서 대화가 교착되고, 결국 노력은 헛수고가 되기 쉽다. 역화 효과를 유발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사실'이다. 근거가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심리적, 사회적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선한' 사람이 되련느 마음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변 사람에게서 받는 영향에 믿음의 내용이 훨씬 크게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가 쓰인 문장은 상대방의 견해를 반발 없이 인정하고 있다. 그 점이 바로 '그래, 그리고' 기법의 핵심이자 강점이다. "그래, 하지만..."이라고 하면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의 제기처럼 들린다. 마치 '네 논리를 한번 방어해보라'는 주문이 되어버린다. 반면 "그래, 그리고..."라고 하면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권유가 된다. 그렇게 하면 생산적 대화의 길이 활짝 열린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 - 심리학자 폴 에크머
분노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순환하며 증폭되기 쉽다. 그래서 대화 참여자 중 한 명이라도 화를 내면 상황은 대부분 악화한다.
  • 화는 답답함 아니면 불쾌함에서 기인할 대가 많다. 답답함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 가로막혀서 화가 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거나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게(혹은 조금이라도 신경쓰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될 때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신경을 건드리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가 폭발한다. 답답함이나 불쾌함이 고의로 초래되었다 싶으면 더 화가 나기 쉽다. 그러니 더욱, 상대방의 의도가 선하다고 간주하는 원칙을 잊지 않도록 하자. 대화 분위기가 격앙될 때는 기억하기 어려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분노는 뭔가를 바꿔야 하는 신호다. 제대로 바꾸려면 분노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분노가 일었을 때, 우리는 대화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 쟁점을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바뀌는 사람은 '나 자신'이어야 한다. 설령 화난 사람이 상대방이라 해도 그렇다. 완전히 틀린 사람이 내가 아닌 상대방이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기분이 상한 이유는 예컨대 내가 너무 세게 밀어붙였거나 혹은 예민한 표현을 써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에 나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대화에 화가 스며들었다면 이미 뭔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 화는 판단력을 흐리고 대화를 엇나가게 한다. 화는 우리를 신경계의 노예로 만든다. 모든 감정, 특히 화는 지식과 믿음과 정보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화가 나면 예의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 화는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화는 화가 정당함을 확인하려는 인지 편향을 강하게 일으킨다. 그래서 꼭 화를 내야 할 이유가 없는 온갖 정보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 특히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품었거나 부도덕하다고 간주하게 된다는 점에서 해악이 크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일부러 저런 말을 하고 있다!"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 화를 비롯한 모든 감정에는 이른바 '불응기'가 뒤따른다. 불응기에는 신경계의 작용과 일시적 감정 편향으로 인해 정보처리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불응기는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불응기는 감정이 강할수록 오래가며,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이나 몇 시간까지 갈 수 있다.



상황을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꼭 익힐 필요가 있다. 타인의 생각을 움직이려면, 그 사람의 관점이 가진 힘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이 그렇게 믿는 감정의 세기를 느껴야 한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
  • 입을 꾹 다문다. 상대방의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는다.
  • 소셜미디어는 피한다. 화났거나 불쾌한 상태에서는 '절대' 이메일이나 소셜미디어 댓글에 답하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자. 흥분을 가라앉히자.
  • 듣고 또 듣는다. 대화 분위기가 팽팽해지면 일단 듣는다. 다 들었으면 또 듣는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질문한다. 그리고 또 듣는다. 그런 다음 내 말을 한다.
  • 팽팽한 긴장감을 부인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긴장감과 압박감, 불안감 등 부정적 감정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답답함은 부인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 '화'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심기가 불편한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고 표현하면 상대방은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대신 '답답함'이라는 말을 쓰고 대화가 답답하다는 점을 인정하자.
  • 속도를 늦춘다. 대화의 진행 속도를 늦추면 긴장도 가라앉는 효과가 있다.
  • 화를 화로 받지 않는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똑같이 맞대응하며 화를 터트리지 않는다. 특히 인신공격을 받았을 때 절대 되받아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를 모욕하면 모욕으로 응수하지 않는다. 그러면 상황은 악화할 뿐임을 기억한다.
  • 탓하지 않는다. 특히 격론 중에 상대방을 뭐라고 판단하거나, 악화된 상황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난 잘 얘기해보자는 건데 왜 그렇게 화를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대화가 딴 길로 빠진 것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행동이며, 퇴로를 만들어주는 자세와 거리가 멀다.
  • 상대방의 의도나 동기 또는 화난 원인을 나쁜 쪽으로 짐작하지 않는다.
  • 안전에 위험을 느끼면 대화를 굳이 이어가지 않는다.  필요하면 구실을 내세워 먼 곳으로 자리를 피한다.
  • 화를 극복하는 방법은 긴장을 누그러뜨리거나 대화를 중단하는 방법밖에 없다. 때에 따라서는 단 몇 분만 지나도 불응기가 지나가고 감정이 가라앉아 더 생산적이고 예의 있게 대화에 임할 수 있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화제를 바꾸거나, 대화의 프레임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선의를 간주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다('뭔가 도움을 주려고 저러는 거야'라는 독백을 마음속으로 되뇌면 진정이 될 수도 있다). 인식 원리에 주목하여,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봐도 좋다. 아니면 위의 모든 방법을 결합해 내가 왜 화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긴장을 완화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 사과한다. 내가 상대방의 분노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한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사과는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도덕적 주제를 놓고 대화할 때는 항상 정체성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도덕과 정체성의 문제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차원에서 소리없이 판단이 이루어진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사람의 뇌는 자신의 도덕이나 정체성에 관한 믿음에 이의를 제기 받으면 신체적 위험에 처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타인의 도덕과 정체성에 관여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도덕적 견해가 엇갈리는 사람들 간의 차이점을 확실히 이해해본다. 상대방이 쓰는 도덕적 언어를 씀으로써 가능하면 같은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공유하도록 한다.


도덕적 대화를 풀어나가기 대단히 어려운 이유는, 도덕적 믿음이란 개인적 정체성 그리고 공동체의 문제와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집단에 얼마나 긴밀히 소속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들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더군다나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소속된 공동체에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주고 있다면, 도덕적 영역에서 대화 상대의 생각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무식보다 부끄러운 것은 배울 마음이 없는 것이다.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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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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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을 주기위해 설계된 복잡하고 많은 기능은 사용상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삶도 디자인도 자연스럽고 단순해야 한다.


[본문발췌]


좋은 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두 가지는 발견 가능성과 이해다. 발견 가능성(discoverability), 즉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 그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이해(understanding), 즉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제품이 어떻게 쓰라고 만들어진 것인가? 이 모든 여러 조절기와 설정이 무슨 뜻인가?


많은 제품이 잘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너무 많은 기능과 조절기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디자이너는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 낸다. 경험이 핵심적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자신의 상호작용을 얼마나 좋게 기억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매우 저평가되어 있다. 사실 감정 시스템은 인지와 나란히 작동하는 강력한 정보처리 시스템이다. 인지는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감정은 가치를 부여한다. 상황이 안전한지 혹은 위협적인지를,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이 좋은지 나쁜지를, 바람직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감정 시스템이다. 인지는 이해를 제공한다. 감정은 가치를 판단한다. 제대로 작동하는 감정 시스템이 없는 인간은 선택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인지 시스템이 없는 인간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하나의 중요한 감정 상태는 한 활동에 완전히 몰입될 때 동반되는데, 이를 사회과학자인 미하이 칙센미하이가 '몰입(flow)'이라고 이름 붙였다. 몰입 상태는 활동의 도전 수준이 우리의 기술 수준을 아주 살짝 초과해서 충분한 주의가 지속적으로 요구될 때 일어난다. 몰입은 활동이 우리이 기술 수준과 비교해서 너무 쉽지도 않고 너무 어렵지도 않을 것을 요구한다. 지속적인 전개와 성공과 결합되는 계속되는 긴장이 때때로 몇 시간 지속되는 몰입적이고, 푹 빠진 듯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휘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제거하고, 대신에 그것을 학습 경험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실패하기는 배우기다. 우리는 성공보다 실패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분명히 성공을 하면 기분이 좋지만, 종종 왜 성공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실패를 하면 종종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고, 그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안다. 과학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알기 위해 실험을 한다. 가끔 그들의 실험은 기대한 대로 되지만 종종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것들은 실패인가? 아니, 그것들은 학습 경험이다.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많은 것이 이와 같은 실패에서 나왔다.


실패는 탐색과 창의성의 필수 부분이고 만일 디자이너나 연구자들이 가끔실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충분히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는, 즉 일의 돌파구를 제공할 훌륭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신호다. 실패를 피하고 항상 안전한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단조롭고 흥미 없는 인생으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을 때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생각은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탓하는 이유다. 불행히도 사람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법 체계에도 내포되어 있다. 주요한 사고가 발생할 때, 책임을 평가하기 위해 심문을 위한 공식 법정이 열린다. 점점 더 자주 그 책임은 '인간 오류'에 돌려진다. 관련된 사람은 벌금을 물거나 처벌받거나 또는 해고될 수도 있다. 아마 훈련 절차가 개정될 것이지만, 법은 안락하게 쉬고 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볼 때, 인간 오류는 보통 나쁜 디자인의 결과다. 그것은 시스템 오류로 불려야 할 것이다. 인간은 계속 잘못을 저지른다. 그것은 우리 본성의 내재적 부분이다. 시스템 디자인은 이것을 고려해야 한다. 사람에게 비난을 고정시키는 것은 편안한 진행 방식일지 모르지만, 단 한 사람의 단 하나의 행동이 참사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시스템은 왜 디자인되었는가? 더 안 좋게도, 근본적인 기저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서 사람을 탓하는 것은 문제를 고칠 수 없다. 같은 오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반복되기 쉽다.


제약은 기억을 간단하게 한다. 운율이라는 제약을 생각해 보자. 어떤 한 단어를 다른 단어와 운을 맞추려면 많은 대안이 있다. 그러나 특별한 뜻을 가지면서 운도 맞는 단어를 찾는다면, 의미와 운율이라는 제약을 결합할 수 있는 후보들의 수를 극적으로 줄일 수 있고, 가끔은 커다란 집합에서 단 하나의 선택으로 줄인다. 가끔 후보자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시를 만드는 것보다 시를 외우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이유다. 시는 여러 다른 형태이지만, 그 모두는 구성에 형식적 제약을 가지고 있다. 유랑하는 이야기꾼이 읊는 발라드와 이야기는, 각운, 운율, 박자, 유사음 구사, 두운, 의성어 사용 등 여러 개의 시적 제약을 쓰는데, 그러면서도 또한 들려주는 이야기와 의미가 일관되어야 한다.


생각을 단순화시키는 한 방법은 단순화된 모형, 즉 배후에 있는 진실한 사태에 대한 근사 모형을 쓰는 것이다. 과학은 진실을 다루고, 연습은 근사치들을 다룬다. 실천가들은 진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정확하더라도 그들이 적용하려는 목적에 '충분히 좋은' 결과를 비교적 빨리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산업재해는 인간 오류에 기인한다. 그 추정치는 75퍼센트에서 95퍼센트 범위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무능할까? 답을 말하자면, 그들은 무능하지 않다. 그것은 디자인 문제다. 인간 오류로 비난받는 재해의 수가 1퍼센트 내지 5퍼센트라면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퍼센트가 너무 높다면 분명히 다른 요인이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무엇인가가 이렇게 자주 일어날 때, 거기에는 다른 근본적인 요인이 분명히 있다.

인간 오류가 발견되자마자 이유 찾기를 중단하는 경향은 널리 퍼져 있다. 사람들이 오류를 범할 때, 시스템을 바꾸어서 그런 오류가 감소되거나 제거되도록 해야 한다. 완전한 제거가 가능하지 않을 때, 재디자인해서 그 충격을 줄여야 한다. 오류가 개인의 실패로 생각되고 절차나 장비의 나쁜 디자인의 징조로 생각되지 않는다면 인간 오류를 제거할 수 없다.

한 가지 큰 문제는 오류를 어떤 사람 탓으로 돌리는 자연적인 경향성이 오류를 범하는 사람에게 공유되어 그들은 종종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동의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후 변명에 여지가 없어 보이는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을 탓하는경향이 있다. 그것은 문제의 재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수 모두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다른 원인은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가? 만일 그 시스템이 당신이 오류를 범하도록 했을 때, 그것은 잘못 디자인된 것이다. 만일 그 시스템이 당신이 오류를 범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잘못 디자인된 것이다.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제를 고칠 수 없다. 문제를 사람들 탓으로 돌릴 때, 이런 문제를 없애기 위해 디자인을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조직을 확신시키는 것은 어렵다. 최종적으로 잘못이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을 대체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시스템이나 절차, 사회적 압력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 문제들은 이런 모든 요인을 다루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오류의 한 주요 원인은 시간 스트레스다. 시간은 종종 결정적인데, 제조나 화학 처리 단지나 병원 같은 곳에서 특히 그렇다. 일상 과제조차 시간 압력이 있다. 좋지 않은 날씨나 교통 체증 같은 환경 요인에 더해지면, 시간 스트레스는 증가한다. 상업 기관에서는 처리를 늦추지 않게 하는 강한 압력이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이 불편해지고, 이것은 상당한 금전 손실로 이어지며, 병원에서는 환자 간호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관찰자가 그렇게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할 때조차 일을 밀고 나아가려는 압력이 상당하다. 많은 산업에서 조작원들이 실제로 모든 절차를 준수한다면, 일은 결코 완수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경계를 밖으로 민다. 자연스러운 정도보다 더 오랫동안 일한다. 우리는 동시에 너무 많은 과제를 하려한다. 우리는 안전한 정도보다 더 빨리 달린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문제없이 한다. 우리의 영웅적 노력에 대해 보상받거나 칭찬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고 실패할 때, 이런 동일한 행동이 비난받고 처벌받는다.


오류의 발생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들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그 발생을 줄이기 위해 적절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자료가 없을 때, 개선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오류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낙인찍는 것보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보고를 격려해야 한다. 오류 보고를 더 쉽게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목표는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판정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일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보자들은 실수보다 착오를 저지르기 더 쉬운 반면, 전문가들은 실수를 저지르기 더 쉽다. 착오는 종종 시스템의 현재 상태에 대한 애매하거나 불명확한 정보, 좋은 개념 모형의 부재 그리고 부적절한 절차에서 생긴다. 대부분의 착오는 목표나 계획에 대한 잘못된 선택이나 평가, 해석에 기인한다는 것을 상기하라. 이 모든 것은 목표의 선택과 계획을 달성하는 수단에 대해서 시스템이 제공하는 불량한 정보 그리고 실제 발생한 것에 대한 불량한 피드백 때문에 생긴다.


공학도와 경영인은 문제를 풀도록 훈련된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실제 문제를 발견하도록 훈련된다. 틀린 문제에 대한 뛰어난 해결책은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그러므로 맞는 문제를 풀어라. 맞는 문제를 푸는 것과 그 일을 인간 필요와 능력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디자인은 시장의 자본주의적인 중요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구입자에게 매력적이라 생각되는 외적 특징을 강조한다. 소비 경제에서 맛은 비싼 음식이나 음료 마케팅의 기준이 아니며, 사용성은 가정이나 사무실 기기이 마케팅에서 일차 기준이 아니다. 우리는 사용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들로 둘러싸여 있다.


디자인은 과잉하고, 과부하되고, 불필요한 일의 디자인이 되는 큰 위험에 빠져 있다.


디자인은 최종 제품이 성공적일 때만,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쓰고, 즐길 때, 그래서 그 단어를 퍼뜨릴 때 성공적이다. 사람들이 구입하지 않는 디자인은 디자인 팀이 그것을 아무리 훌륭하게 생각하더라도 실패한 디자인이다.

  • 디자이너는 기능이란 면에서 이해될 수 있고 사용이 편리하다는 면에서, 그리고 정서적인 만족, 자부심과 기쁨을 전달하는 능력이란 면에서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을 만들 필요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디자인은 하나의 전체적 체험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 그러나 성공적인 제품은 훌륭한 디자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신뢰성 있게, 효율적으로, 일정에 맞추어 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디자인이 공학적 요구 조건을 매우 복잡하게 해서 그 조건들이 정해진 비용과 일정의 제약 안에 실현될 수 없다면, 그 디자인은 결함이 있다. 마찬가지로 제조 과정이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때에도 디자인에 결함이 있다.
  • 마케팅 고려는 중요하다. 디자이너는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길 원한다. 마케팅은 사람들이 그 제품을 실제로 사고, 사용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를 원한다. 이것들은 두 가지 다른 집합의 요구 조건이다. 디자인은 둘 다 만족시켜야 한다. 사람들이 사지 않는다면 디자인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그것을 싫어하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것을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디자이너는 판매와 마케팅 그리고 비즈니스 재정 부문에 관해 점점 더 많이 배우면서 더 효과적이 될 것이다.
  • 제품들은 복잡한 생명 주기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은 기기를 쓰는 데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디자인이나 사용 설며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제품 개발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어떤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여러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에게 제공된 서비스가 부적합하다면, 그 제품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기기가 유지되고, 수리되고 업그레이드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는 그 제품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영향을 준다.
  • 오늘날 환경적으로 민감한 세상에서 제품의 완전한 생명 주기가 고려되어야 한다. 재료, 제조 과정, 배급, 서비스, 수리의 환경 비용은 무엇인가? 부품을 교체해야 할 때가 될 때, 낡은 것을 재생하거나 다른 식으로 재사용하는 것의 환경적 영향은 무엇인가?



세계적인 상호 연결, 세계적인 의사소통, 강력한 디자인 그리고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제조 방법의 등장과 더불어 세계는 급속히 변하고 있다. 디자인은 평등을 이루는 데 강력한 도구다. 필요한 모든 것은 관찰과 창의성 그리고 열심이며, 누구나 할 수 있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싼 오픈 소스 3D 프린터 그리고 또 오픈 소스 교육과 더불어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


대규모 변화에도 많은 근본 원칙은 그대로 나마 있다. 인간은 항상 사회적인 존재였다. 사회적 상호작용 그리고 세계 도처에 다른 시간에 있는 사람들과 연락하는 능력은 우리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디자인 원치근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발견 가능성, 피드백, 행위 지원성과 기표의 힘, 대응 및 개념 모형은 항상 들어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율적이고 자동적인 기계조차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위해 이 원칙을 따를 것이다. 우리 기술은 변할 수 있지만 상호작용의 근본 원칙은 영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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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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