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지만,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지 차이다.


[본문발췌]


기억은 실물을 덮어버린다. 풀은 초록색이라는 기억, 사람의 팔은 양쪽이 같다는 지식이나, 눈은 둘이요 코는 하나라는 정보 등은 그림의 진실을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 교양에 복종하지 않는 천진함, 대상의 고유한 진실을 파악하는 어린아이의 눈이 그림을 그림으로 보게 한다. 그림을 보되 겉모양만 보는 사람은 달을 가리켰으되 달을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사람과 같다.


강요배의 풍경에서 가장 극적으로 요동치는 소자(素子)는 '바람'과 소금기가 코끝에 스치는 '습기'이다. 어둑한 날의 우울감이 밴 색조에다 그 심리적 무게를 지탱하는 밀도 높은 터치가 신산스런 효과를 자아내고 있으며, 거기에 눈에 뵈지 않는 바람과 눅눅한 습기까지 포착하는 작가의 눈길. 풍경은 그저 바라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간단없이 뒤척이게 한다.

마파람, 강요배, 캔버스에 유채
바람 타는 나무, 강요배. 2013
파도, 강요배. 1995년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한광석 : 오방정색, 오방간색


'세상에서 가장 짙푸른 쪽색은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 앞 지중해 색이다' - 한광석의 쪽빛 무명

'예술이란 하루아침의 얄팍한 착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재치가 예술일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참으로 나자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한눈 팔 수 없는 외로운 길을 심신을 불사르듯 살아가는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귀한 예술의 터전이 된다.' - 혜곡 최순우


수묵화 : 희고, 검고, 마르고, 축축하고, 진하고 옅은
칠하지 않는 종이는 흰생, 먹을 더하면 검은색, 그리고 바짝 마른 색과 축축한 색, 마지막으로 진하고 옅은 색... 그래서 먹은 육채(六彩)라고 했다.


삼여도, 세가지 여유란 '밤'과 '겨울' 그리고 '흐리고 비오는 날'
책을 읽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왜 독서하지 않느냐는 추궁에 '농사짓느라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럴 때 꾸짖는 말이 '학문하는 데는 삼여만 있으면 충분하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송나라 때 화원을 뽑는 시험은 참으로 흥미롭다. 뭐뭐를 그려보라는 주문 없이 아예 시를 지어 출제하게 했다.

  • '꽃을 밟고 달려운 말발굽의 향기.', 흙바람을 따라 날아오르는 한 무리의 나비 그림이 입선. 꽃향기가 날리는 곳에 어찌 나비가 없을까보냐는 시적인 발상
  • '한적한 산골에 강 건너는 사람 하난 없고 외로운 나룻배 종일토록 떠 있네', 뱃머리에 다리 괴고 누워 피리 부는 노인을 그린 사람이 장원

단 한 순간에 초월의 경지로 나아가는(一超直入) 그림이 수묵화이다. 그것은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정신의 깊이에서 탄생한다. 장인의 현란한 기교가 행세하는 세상, 정신의 고매함이 밴 수묵화가 그늘진 외지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상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대중문화의 이미지는 알게 모르게 화가의 밑천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통찰은 대중문화의 우산 속에서 참말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된다.


산새 소리가 뜻이 있어 아름다운가? - 피카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5584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삶의 무게와 배낭의 무게, 없으면 채우고 싶고 채우면 무거워 힘들어 하는 것.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최소의 무게로 자전거에 오른다. 가볍게, 속도에 맞춰 주변을 둘러보며 떠나는 자전거 여행!

 

이 책을 읽으며 95년 6월말 인천에서 춘천까지 자전거 여행이 떠오른다. 중간에 서울 잠실 인근에서 1박, 경춘가도를 따라 시원하게 달려 중도유원지에서 캠핑, 돌아오는 길 가평 근처에서 조그만 사고와 망가진 자전거, 우역곡절 끝에 경기도 이천인지 광주인지에서 다시 1박으로 대략 3박4일 일정, 지금같은 자전거길이 없어 일반국도를 차와 같이 달렸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아직도 또렷한 한 가지는 돌아오는 길 여관방 TV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뉴스를 봤던 것이다. 바퀴가 휠 정도로 망가진 자전거를 고쳐서 다시 인천까지 간 결과만 기억할 뿐, 그 과정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본문발췌]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도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설요,

세상으로 돌아가는 노래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바다의 짠맛과 햇볕의 향기로 소금은 탄생한다.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차는 살아 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 버렸으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려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마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 진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신경준, '도로고'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 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

 

 

산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생애의 일부가 된다. 사람의 시야 속에서 그 산들은 멀어질수록 커지고, 커질수록 순해진다. 그것은 한바탕의 완연한 구조와 체계를 갖춘 산세다. 멀어져야 비로소 완연해지는 산이 사람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움직이는 산이다. 움직이는 산이 사람에게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자리잡는다. 그렇게 해서 산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생애의 일부가 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275708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청춘, 여행, 자유, 책...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들!
나 스스로에게도, "Buen Camino!"


[본문발췌]


책은 여행과 마찬가지로 낯선 세상을 보여주고, 세상과 내가 사는 이곳의 차이를 드러낸다. 차이를 인정하면 삶이 유연해지고, 단단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을 뿐"이라고 했다. 여행은 책을 읽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면 세계의 한구석만을 맴돌 뿐이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카페를 점찍어 운명을 같이한다면 그 카페를 '소유'한 거나 다름없다. 물론 그 카페도 당신을 소유한다. - 노엘 라일리 피치, <파리 카페>. 파리의 셀렉트 카페


미치오는 인디언이 사냥한 거대한 사슴, 무스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인디언 축제에서 무스 머리를 통째로 고아 우려낸 머리고기수프를 먹으면 "무스의 몸뚱이가 천천히 내 몸속으로 스며들어, 나는 무스가 되고 무스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알래스카에서 우리는 언젠가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렇기에 슬픈 일이 닥쳐도 자연을 보면서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우주적으로 순환하는 삶을 살지만, 인간적으로는 직선적인 삶을 산다. 우리에게는 시작과 끝이 있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끝을 향해 나아간다.


나 있은들 어떠하고 없은들 어떠하리. / 노래하는 새들이 내 목소리 이어받을 테고, / 저 하늘은 언제나처럼 당당할 것이며, / 수많은 사람이 여기 머물진다... - 몽골의 시에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쌀알이 바늘 끝에 얹히는 것만큼이나 어렵단다. 얘야, 그래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 그토록 소중한 거란다.


'엘 부르고 라네로'의 대피소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미노다.' 나는 카미노에서 걷고, 식당을 찾고, 숙소를 찾았따. 그게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전부다. 대단하다고 할 만한 일들은 아니다. 하지만 카미노의 하루하루는 모험으로 넘쳐났다. 나는 카미노에서 현재를 살았다. 하루하루를 어제와 다르게 보낸 그 시간은 모험이었다. 나는 내가 세운 계획대로 카미노를 걸으려 했고, 그러지 못할 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었다. 자신의 어깨로 자기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을 카미노는 나에게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자연의 속성은 인간의 속성과 대비된다. 인간의 불안과 질투와 시기는 자연의 안정감과 영속성과 고요함으로 위로받는다. 워즈워스에게 도시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혼잡과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을 의미했다. 도시 사람들은 먹고살 만한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원했다.


유유상종이란 말을 쓰는데 여행이 바로 그런 겁니다. 시시한 여행을 할 때는 시시한 사람을 사귀지요. 얽매인 데 없이 좋은 여행을 할 때는 격이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높은 인격의 사람을 만나는 게 곧 좋은 여행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행 중에 얼마나 다양하게 만났느냐가 중요하지요. 그것이 여행의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중에서


차를 몰고 떠날 때, 벌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너무도 거대한 세계가 우리에게 덮쳐오는, 그것이 이별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하늘 아래 펼쳐질 또 다른 광기 어린 모험을 향해 돌진한다. - 잭 케루악, <On the Road>


"걱정하기를 엄청 좋아하고, 거리를 계산하고, 오늘 밤은 어디서 잘지 고민하고, 기름 값이랑 날씨, 목적지까지 어떻게 갈지를 생각하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도착할 텐데 말이야.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아. 뭐가 정말 급한지도 모르는 채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네 영혼이 말이야. 어디로 가지? 무엇을 하나? 뭘 위해서? 그런 고민을 하느니 잠이나 자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늘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매번 어디로 가야 할지 재기만 한다. 그렇게 신중한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걸까?


삶을 오랫동안 생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나 존재적으로 그 지지기반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그 한 가지 방법은 보헤미안의 국제도로 위에 있는 한 정거장에 내려서 그 도시에 머물며 글을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르셀로나 또는 프라하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다가 가끔씩 발길을 멈추고 글을 쓰는 삶의 방식, 그렇게 글 쓰는 인생을 축복하는 것이다. - 에릭 메이슬,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


보헤미안은 방랑, 창조성, 자유인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된다. 보헤미안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 곳을 떠나기 쉽다. 방랑이나 일탈을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이해받을 곳을 찾아 보헤미안의 국제도로를 서성인다. 보헤미안의 꿈은 단순하다. 획일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적 방랑자가 되어 삶을 창조하며 거리낌 없이 살고 싶다.


한현주, <on the road>, 태즈매이니아. 캠퍼밴을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어딘가 정착해 사는 꿈을 꾼다. 정착해 사는 것은 길 위에서의 시간과는 다른 삶을 창조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일만하며 살 것! 그때 사는 것은 조용한 모험이자 특권이다. 한국을 떠나야만 여해을 하는 게 아닌 것처럼 길은 집 밖에만 있지 않다. 길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까? 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끝까지 가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마음이 들 곳을 찾는다. 내가 꿈꾸는 목가적 세계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정착할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안다. 길 위에 서 있건 일상을 살아가건,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면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며 즐겁게 살 수 있다.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청춘, 길>. 여행은 아름답다. 여행은 두렵다. 여행은 설렌다.... 청춘은 아름답다. 청춘은 두렵다. 청춘은 설렌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어차피 구하고 싶은 걸 구할 수 없는 게 청춘이다. 방황을 아름답다고 용인하는 대가다. 청춘을 소유할 순 없다. 그래서 아름답다. 마치 흘러간 여행처럼....


중년의 남자는 청춘을 그리워하고, 청춘만 되찾으면 될 것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눈물 없이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을까? 다시 아프고, 다시 눈물이 흐르고... 아물어갈 것이다. 청춘은 방황이니까.


헤이든 헤레라, <프리다 칼로>. 인생이 주는 모든 것을 취하시오.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이가 들면 자기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된다오. 어릴 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하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소. 당신이 정말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면, 나에게는 당신이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긴긴 겨울의 깊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의 불빛에 감사한다. 여름 태양 아래 충만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만끽할 시간들을 상상하며 기다린다. 그 안에 고독의 그림자가 함께한다. 기다림과 꿈꾸는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힘은 고독이며 혼자일 때 가능하다.


고장 난 차는 고쳐 쓰고, 발레신발이 해지면 기워 신는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춤을 춘다. 어디를 가나 노랫소리, 타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거리는 언제나 축제 같다. 어디서나 노인밴드와 마주친다. 노인들이 홍대의 밴드마냥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리듬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폈다 하며 춤을 준다. 쿱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여유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롭다. 20년 가까운 경제봉쇄 속에 쿠바는 오히려 식량자급률이 95퍼센트를 넘은 것으로 알려졌따. 아바나 근교에만 수천 개의 유기농 농장이 있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견학을 갈 정도다. 굶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농사를 지어야 했고, 농약이나 비료를 구할 수 없으니 '본의 아니게' 자타가 공인하는 유기농이 되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이런 쿠바의 모습에서 생태주의자들은 또 다른 꿈을 꾼다. '인류의 미래'라는 꿈이다.


도시 곳곳의 텃밭에서 허브가 자라고, 차를 버린 사람들이 자전거로 거리를 달린다. 생태주의자라면 머릿속으로 그려볼 법한 이상적인 미래상이 쿠바에서는 현실로 펼쳐지고 있다. -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림을 그린 캔버스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 이상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 <반고흐, 영혼의 편지> 중에서


빈센트는 자신을 옭아매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었으나 용기가 없었다.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처럼. 빈센트에게서 우리가 감동받는 이유는 참다운 인간에게서 전해지는 풍부한 인간미 때문이지, 그가 미쳤다거나 광기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 정물, 인물을 간단하고 쉽게, 그리고 빠르게 그렸다.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보게끔, 누구나 좋아하게끔... - 박홍규, <내 친구 빈센트> 중에서


사람의 기억은 긍정적일 때 추억이나 그리움이 된다. 추억이 더깊어지고 얽힌 사연이 많다면 향수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순간의 기억이 삶의 지향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을 지키는 일은 삶이 지향점을 지키는 일이 된다. - 강동진, <빨간 벽돌창고와 노란전차>


<극락타이생활기>의 저자 다카노 히데유키에 따르면, 태국 사람들의 기질은 사바이, 사누크, 사도아크라는 세 단어로 표현된다. '사바이'는 건강하게, '사누크'는 즐겁게, '사도아크'는 편안하게라는 뜻이다. 여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의 '마이펜라이'를 덧붙이면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진다. 건강하고, 즐겁고, 편한하게 산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내 능력 밖이라 생각했다. 그림은 그리지 않고, 그리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능숙하지 않고 서툴러도 그리는 게 먼저라는 걸 몰랐다. 벼룩시장에서 본 호박 그림이 생각난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쪼개진 호박 한 덩어리를 그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인다. 만년 가난한 예술가인 내 친구는 이런 그림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꽃잎을 주워모아 액자를 만든 이에게 얼마나 잘 만들고 못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생활을 풍요롭게 할 뭔가를 만들 줄 안다면, 그는 예술가다. 예순이 되고 일흔이 넘어 벼룩시장에서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며, 잘 그리거나 말거나 쪼개진 호박을 캔버스 앞에 두고 붓을 드는 사람은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죽음이 우리 둘을 갈라 놓을 때까지'란 말로 맹세한 사랑이나 생활은 어디까지나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목적은 아니라고 믿고, 찰나적이고 싶다. 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같이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같이 있는 동안은 함께하는 생활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면 조금은 울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이 우리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면, 아마 더 울지도 모르겠다. -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 미래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 있는 측정할 수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젊은 사람이 가지는 최초의 욕망이다. - 김화영, <행복의 충격>


나는 간혹 달랑 지도만 들고 숙소는 나선다. 진리는 나를 자유케하지만 정보는 나를 옭아매기 십상이다. 때로 가이드북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은 여행자를 가이드북의 동선 안에서 패키지관광객처럼 만들어버린다. 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 문제다. 정보는 여행을 카피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 정보가 다 양질인 것도 아니다. 가이드북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 김화영, <행복의 충격>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직선적인 시간을 살지만 지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전을 하며 낮과 밤이 반복되고, 공전을 하며 사계절이 반복되는 것처럼, 앞으로 몇백 몇천 년이 지나도 지구는 돌고 또 돌 뿐이다. 조몬삼나무는 알려준다. 오늘에서 내일로 흐르는 시간뿐만 아니라, 순환적인 시간도 있다는 걸....


지구를 제집처럼 돌아다니며 목숨을 걸고 배우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의 하나다. 하지만 그런 삶을 대다수인 우리가, 더욱이 일생동안 계속할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배움과 동경의 여행은 끝나고, 여기에 사는 게 시작된다.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인생여행의 참다운 시작이다.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호화로운 즐거움을 찾는 게 아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도 물론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일상 속에서 계속되는 즐거움이야말로 가장 좋다. 좋은 땔감을 때면 자연스레 불길도 좋다. 좋은 기분으로 불을 때면 저절로 좋은 불길이 생긴다. 그날은 손수 골라온 좋은 땔감으로, 그리고 좋은 기분으로 불을 지폈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없는 불길이 조용히 타올랐다. 겨우 목욕물을 데우는 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런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은 완벽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듯 느껴지곤 한다. - 야마오 산세이, <여기에 사는 즐거움>


하루하루를 창조적으로 산다면 일상이 곧 여행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245744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