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것도 필요하지만 결과는 행동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신성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문 밖을 나서야 하듯이...


[본문발췌]


요즘 넘쳐나는 '취미'란 한결같이 동호회처럼 특정 모임에서 세련되고 완벽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현실 속에서 성찰한다거나 변화시키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취미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건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환희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감과 충실감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 안에 있으며, 거기에는 늘 실의와 절망도 함께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서만 이런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벤처 정신을 지닌 사람은 원칙적으로 소수파이다. 누구나 하려고 하는 것, 누구나 이미 하고 있는 것, 이미 수요가 포화 상태인 것, 가치가 정해져 있는 것 따위에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는 자질이 없다면 벤처에 뛰어들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정보와 지식, 네트워크를 넓히려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 항상 소수파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성'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기 십상이다. 도요타도 소니도 혼다도 창업자는 사회의 소수파였다. 소규모로 외롭게 출발하여 다수파로의 편입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벤처의 원칙이다.


연애할 때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결혼한 뒤에는 함께 미래를 본다는 말이 있다. 부부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자 인생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혼자서도 할 수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신뢰와 전망을 공유할 때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사람의 뇌는 목표를 지니고 있을 때 활성화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정해 준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목표는 몸에 활력을 준다. 목표를 이루려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감기 따위도 걸리지 않는다. 목표는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전제'가 되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공감도가 마련된 사회라면 목표를 지니는 데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필요 없다. 목표는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나은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나 공기와 마찬가지로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목표가 없다면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모든 일에서 우선순위도 매길 수 없다. 또 당연한 말이지만 목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다른 누군가가 정해 줄 수 있느 것도 아니다.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자동차 사고로 상대에게 물리적인 상처를 입혔다거나 복잡한 도로에서 남의 발을 밟았을 때처럼 사건의 경위가 분명한 경우라면 모를까, 비즈니스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겼거나 의혹이 제기된다면 자초지종과 경위, 그리고 자신의 관련 여부부터 분명하게 밝히는 게 순서이다. 덮어놓고 사과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경위는 어떠한지, 원인은 무엇이고 자신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책임은 누가 지며 손해는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대응했고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는지, 언제쯤이나 해결될 것이고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대책을 취해야 하는지, 손해배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하고 이번 사고에 누가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등에 대해 가능한 신속하고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사죄보다 훨씬 중요하다.


업무나 개인사에서 스스로 매기는 일의 우선순위가 그 사람의 인생인 것이다.


직장인들이 전직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대목은 자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따져 보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제발 마음을 돌려 사표를 찢으르며 상사와 동료들이 나서서 붙잡는 사람이어야 전직이 합당한 것이다.


투자란 어떤 것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따져보고 자신의 결정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지 분위기에 편승하여 돈을 쏟아 부었다가 높은 수수료만 물거나, 수익은커녕 원금마저 까먹고 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투자의 초보자는 "떼돈 벌 수 있는 기회를 남에게 알려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 투자라는 걸 생각할 때 중요한 건 시간 감각이다. 예컨대 지금의 자신과 5년 뒤의 자신을 상상해 보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자원이다. 이 평등한 자원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5년 뒤 자기 모습이 바뀐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투자의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투자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투자 대상은 주식이나 상품, 부동산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어느 정도는 비교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한 비결이나 비책은 없지만 기본 전략은 있다. 불황일수록 바깥을 의식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경기 침체니 디플레니 하는 달갑지 않은 경제고들이 나오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안으로 움츠려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때야말로 무턱대고 '버티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자신과 외부의 관계를 살펴보며 '바깥을 향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기 위해서는 문 밖으로 나서야 한다.


업무상의 문장은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은 만큼 한층 더 정확하고 간결해야 한다. 물론 그런 글을 잘 쓰는 비법은 따로 없다. 멍청한 문장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글쓰기가 서툴러서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전하려 하는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글쓰기의 전제는 상대에게 반드시 전하려 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빼어난 문장, 화려한 문장, 품격 있는 문장이라는 것은 없다.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이라는 이상만 있을 뿐이다.


요컨대 아이디어란 섞어서 짜 맞추는 '조합'이지 새롭게 발견해 내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기획을 할 때 매력적이고 신선한 '조합'은 어떻게 해야 나올 수 있을까. 짜 맞춤의 소재는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과 새롭게 입수하고 준비한 외부 자료이다. 아이디어의 발상력이란 이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샅샅이 '검색'하고 적절한 것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힘은 근육과 마찬가지로 부단히 단련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그리고 발상력을 단련하고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집중하여 생각을 뽑아내는' 정면 돌파 말고는 없다. 어쩌면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뇌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머리를 짜내다가 잠시 그 문제에서 떨어져 있을 때, 마치 깊은 호수의 밑바닥에서 작은 기포가 생겨나듯 아이디어의 핵이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아이디어란 언제나 직감적으로 떠오르는데, 직감이란 '오랜 시간 집중하면서 머리를 쥐어 짜는 것', 그러니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몰두의 연장선 위에서만 작동한다.


일을 하다가 겪는 실패는 '단순한 실수'가 대부분이다. 준비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서 실패하면 신뢰에 금이 가고 질책이 쏟아진다. 그런 실패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뭔가 배울 수 있는 경우란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지만 지식이나 경험, 정보가 부족하여 실패했을 때 뿐이다. 본디 대부분의 사람은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무엇에 도전해야 좋을지조차 모른다. 도전할 만한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뭔가 얻는 게 있는 실패를 맛보기 위해서는 도전할 무엇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도전에 대한 굶주림'이다. 언젠가 우연히 마주할 그 어떤 기회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설령 마주치더라도 그것이 운명적 만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스쳐 지나고 말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15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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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심은 오크라, 집에서 먹고 남을 양이 수확되니 보관을 어떻게 할지 고민할 정도다.

수확시기를 조금만 넘겨도 씹기 힘들정도로 질겨지니 적당한 시기에 따서 냉동보관을 해야하는데, 이여사님이 오크라 피클이라는 별미를 찾아냈다.

 

아삭아삭 식감도 좋고, 상큼한 맛도 좋고, 위염과 위궤양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액질 뮤신성분이 피클 국물까지 점령한다.

 

초여름이 지나며 토마토, 참외 등이 집 식구들끼리 소화할 수 없을 정도라 주변과 나누어 먹더라도 남는 경우가 많은데 토마토 피클과 참외 장아찌로 짧은기간 저장하며 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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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만들어 지기에 언론과 미디어가 편향,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기반해 진실을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전달해야 하는 이유다. 학교, 회사, 교회 등 사람이 모이는 일상 공간에서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배치가 어떻게 권력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본문발췌]


관계는 사람간의 거리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 간의 거리는 공간의 밀도를 결정한다. 공간의 밀도는 그 공간 내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바꾸었다. 가까웠던 사람도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극장, 야구장, 공연장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 간의 간격이 바뀌자 사람 간의 관계가 바뀌었고, 사람 간의 관계가 바뀌자 사회도 바뀌고 있다.


우리가 보는 많은 권력은 공간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시선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시공간적 제약이 곧 사회 시스템이다. 공간이 만드는 사회 시스템이 주는 제약은 보이지 않게 사람을 조종한다. 이때 공간이 만드는 권력의 크기는 모이는 사람의 숫자와 비례한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공간에 의해서 더 큰 권력이 만들어진다.


과거 4인 가족 시대에는 부엌과 식탁이 하나로 묶였다면, 일이인 가구 시대에는 식탁과 책상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 맞다. 자연스럽게 부엌, 식탁, 거실이 한데 모여 있는 쓰리베이 아파트의 평면은 미래에는 거실과 침실, 식탁과 책상이 하나로 묶이는 공간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맞다.


기존의 집은 잠을 자는 곳은 침실, 쉬는 곳은 거실,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으로 공간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각각 다른 가구를 배치했다. 기능에 따라 공간과 가구를 나누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현대 사회는 기능에 따라 물건이 나누어지기보다는 합쳐지는 추세다. 소비와 행동의 개인화와 기술적인 발전은 공간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서 가구들의 통폐합 혹은 융합이 되어 새로운 가구가 나오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처음에는 가구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건축 평면상 방의 구획이 바뀌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아파트의 5원칙: 1가구 1발코니, 소셜 믹스 공원(아파트 단지 1층 지면을 공원, 상업시설, 문화시설로 사용할 수 있게 개방), 기둥식 구조, 복합 구성(건물 내에 작은 위성 학교, 공유 오피스 등을 작게 나누어서 주거와 섞어서 배치), 친환경적인 목구조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횃불,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테마파크의 AR/VR같이 어느 시대나 당대 최첨단 기술은 상상을 공간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만든 '공간과 권력의 제1 원칙'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사람을 모아서,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면 그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생겨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선을 많이 받는 사람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사람들이다. 정해진 시간에 하루에 한 시간씩 시선의 집중을 받는 뉴스 앵커맨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가 높을수록 권력이 높은 사람이고,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가 높을수록 권력자가 된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바뀌면 플랫폼은 바뀌지만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만들어진다는 법칙은 그대로 유지된다.


시간과 공간적인 자유가 적을수록 그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주체가 권력을 갖는다. 종교 행위의 시공간적 측면에서 기독교는 집단적인 종교, 불교는 개인적인 종교로 볼 수 있다. 위치적인 측면에서도 두 종교는 차이가 크다. 불교의 절은 대부분 산속에 있고 기독교의, 교회는 상가에 있다. 가까운 도심 속에 공간이 있는 기독교는 접근성 면에서 커다란 우위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예식과 규율을 강조한다. 예식과 규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주는 것이다. 종교의 권력, 학교 선생님의 교권, 직장 상사의 권력은 예배 참석, 등교, 출근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각종 예식, 등교, 출근, 예배 참석 같은 복잡한 행위들의 중심 원리는 '자유의 억제'다. 권력은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강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은 권력의 구조에 새롭게 진입한 사람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순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공간을 통한 권력 형성의 시작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주제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늘어날 때 학생들에게 어떻게 대면 대인 관계와 공동체 훈련의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인을 양산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누군가에게 조종되기 쉬운 대중으로 구성된 사회이거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세상이 되기 쉽다. 둘 다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커질수록 오프라인의 대화가 있는 수업 양이 늘어나야 한다. 학생 두세 명과 선생님의 토론 수업일 수도 있고, 동네 체육센터의 스포츠 동아리를 통해서일 수도 있고, 주변 이웃을 돕는 프로그램이나 다양한 독서 토론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


천장고가 낮은 지하 도로망으로 자율 주행 운송 로봇이 다니면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우선 로봇만 다니는 낮은 천장고의 터널은 트럭이 다니는 터널보다 단면이 10분의 1 이상 작기 때문에 건설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요즘은 지하 터널을 기계가 뜷기 때문에 공사 기간과 비용이 과거만큼 많이 들지 않는다. 둘째, 작은 크기의 운송 로봇은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1킬로그램짜리 피자를 배달할 때에도 60킬로그램 이상의 사람이 100킬로그램이 넘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다. 결국 161킬로그램을 이동시키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택배 트럭은 배달 내내 다른 물건들도 싣고 다녀야 한다. 운송 로봇은 그런 낭비를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다. 1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 자율 주행 로봇으로 피자를 배달한다면 사람까지 운반을 안해도 되기 때문에 가볍게 11킬로그램만 이동하면 된다. 에너지 효율이 16배 좋아지는 효과가 생긴다. 게다가 5G 기술을 이용한 자율 주행 로봇은 헤드라이트도 켤 필요가 ㅇ벗고, 사거리 신호등도 없이 교차로를 지나다닐 수 있다. 이동 속도와 흐름이 인간이 운전하는 교통수단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다. 지하 자율 주행 로봇 전용 도로망은 지하 하수도, 지하철, 지하 광케이블망처럼 경쟁력 있는 미래 도시의 필수 인프라 구조가 될 것이다.


사람은 지상으로 다니고 물건이 지하로 다니는 세상이 물건이 지상으로 다니고 사람이 지하로 다니는 세상보다 나은 세상이다. 물론 배달 시스템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도로는 온갖 물류 트럭들로 정신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천천히 걸을수록 좋고, 물류는 빠르게 이동할수록 좋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상충된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보내는 것이 지상을 '인간을 위한 느린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월세는 21세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이다. 사람들은 임대 주택에서 월세로 살면서 돈을 모아 나중에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문제는 집값이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다. 정부는 매년 최소 2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을 목표로 노력한다. 통화량이 많이지니 인플레이션은 계속되고,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같은 돈을 은행에 저금해 놓으면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반면 부동산은 유한한 자산이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집값은 오른다. 부동산 버블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도 매년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가 만약에 2퍼센트의 경제 성장률보다 빠르게 월급을 모을 수 있다면 나중에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이 더 빠르게 오른다면 영원히 내 집 마련은 힘들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의 부동산 자산 가격을 보면 경제 성장률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연봉과 집값 상승은 눈사람과 같다. 눈을 뭉쳐서 눈이 쌓인 골목길에서 굴리는 것과 연탄을 하나 가져와서 굴리는 눈사람 크기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다.


사실을 냉정하게 보기 이전에 성급하게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선입견을 만들고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대신해 주는 누군가에게 조종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이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그런 윤리적 판단을 내렸던 종교계와 공산당만 권력을 갖게 되는 세상이 됐고 다수의 일반인들은 자신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권력에 착취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느 한 집단이 너무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면 부패하게 된다. 중세 시대 유럽의 전체 부, 즉 부동산과 동산 포함 모든 경제적 자본의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고, 교회 권력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현 시대에 중국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부가 중국 전체 부의 3분의 1이라는 점이다.


집값이 폭등하고 은행 대출 없이 집을 사야 하는 세상이 되면 두 집단은 좋아한다. 바로 대자본가와 정치가들이다. 빈부 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는 자본의 집중을 얻게 되고, 정치가는 집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임대 주택을 구걸하는 표밭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당을 잡으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지만 실제로 세상에는 악당과 그 악당을 손가락질하면서 그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 위선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당과 위선자 사이에서 국민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만드는 사회에서 권력은 쪼개서 나눠 가질수록 정의에 가까워진다. 돈은 권력이다. 따라서 부동산 자산은 권력이다. 부동산이 정부나 대자본가에 집중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서 소유할 수 있는 사회가 더 정의로운 사회다. 내 아이를 위해서 거대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기업가가 착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부동산 자산이 나누어진 사회를 만들어 물려주고 싶다.


2016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은 상을 수상하기에는 젊은 나이인 40대 후반의 칠레 건축가 안레한드로 아라베나에게 돌아갔다. 그가 디자인한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엘레멘털'의 아이디어는 독특하다. 저소득층은 돈이 없기 때문에 비싼 집을 살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집을 절반만 지어서 분양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마련한 사람은 입주 후 돈을 벌면서 점점 자신의 집을 완성해 나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각각의 집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동네는 더욱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고 집값이 오른 만큼 입주자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동네에 대한 애착이 있고 이웃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에 이곳의 공동체는 살만한 곳으로 성장했다. 건강한 사회는 집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사회다. 그런데 보통 이런 사람들은 시작할 수 있는 자본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대출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획일화가 되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정량화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집값, 성적, 연봉, 키, 체중 같은 정량화된 지표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은 5천만원 이상의 연봉에 30평형대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2천cc 이상의 중형차를 끄는 것이다. 모든 기준이 정량화된 지표다. 반면에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중산층의 기준이 나만의 독특한 맛을 낼 줄 아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즐기는 스포츠가 있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다, 외국어를 할 수 있다 같은 정성적 기준들이다. 이렇게 가치관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체주의적이라 부를 만큼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량적 가치관으로 행복을 측정하는 나라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대중들은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다양성 추구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다양한 유전자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후손이 더 강한 생존력과 면역 체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준은 미래를 만든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시공간 확장의 역사다. 기차를 발명해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확장했고, 전화기 발명으로 내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을 확장했다. 도로와 인터넷 통신망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공간 압축' 도구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주고, 상거래를 가능하게 만든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역사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미래는 없다. 미래는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선의 초점을 과거에서 방향을 돌려, 미래를 향하길 바란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오늘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9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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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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