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욕망 덩어리 인간으로 쉽지 않다.


[본문발췌]


권교정의 만화 <매지션>에 코끼리를 갖고 싶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코끼리가 너무 좋아서 코끼리 한 마리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나깨나 코끼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뜨거웠다. 그는 차츰 알게 되었다. 당장 코끼리를 갖게 된다 해도 자신은 그걸 키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는 평범한 넓이의 마당을 가진 작은 집에 살고 있었고, 아주 가난하진 않았지만 농담으로라도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코끼리를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데려다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날마다 코끼리를 배불리 먹일 만큼의 사료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끼리가 과연 자기에게 오게 될지도 의심스러웠지만, 만에 하나 갑자기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을 유지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돈을 모으려고 밤낮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일차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끼리이지 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위해서가 아니면 그에게 있어서 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곧잘 돈을 모을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코끼리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는 싫지만 돈을 모아야 했다. 왜 하필 코끼리냐고 사람들은 그에게 묻곤 했다. 개나 고양이라면 쉽게 키울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그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코끼리한테 사로잡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아직 코끼리는 그의 것이 아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삶이 불행한 것은 코끼리를 손에 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코끼리를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고통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삶의 기술은 내려놓음의 기술이다


실제의 불만족과 행복의 부재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이다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 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깨어 있으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흐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놓아 두라."


"세상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단 한 권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책이다" - 아잔 차


태양이 내리비치는 인도의 시장에 앉아 칠리를 먹는 남자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녁 무력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괴로워하며 칠리를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근처 가게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 많은 칠리를 먹어도 단맛이 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 계속해서 먹고 있는 거요?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오?" 남자는 이제는 고통에 익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힘들게 참고 먹어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지 않소? 지금 포기한다면 여기에 바친 내 시간들이 얼마나 아깝고 무의미하겠소? 이제 이것은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의 문제가 되었소."
당신과 나의 삶이 그러하다. 이제 그것은 단맛 나는 칠리에 대한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코끼리를 갖게 될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갈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포기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린다. 당신은 진심으로 행복하고,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누가 쓴 대본에 따라서 웃고 울고,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누가 쓴 대본에 따라서 날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하고 불행해하는가? 그 대본을 하나님이 쓰는가, 붓다가 쓰는가? 아니면 운명이 쓰는가? 부모인가, 세상인가? 그렇지 않다. 그 대본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쓰는 대본에 따라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남아 있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미 자신이 해낸 일을 본다면, 지금가지 한 것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쌓은 벽돌 벽의 경우처럼, 만일 우리가 잘못된 것과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지혜로운 정원 주인은 자연의 '완벽한 불완전함' 속에서 아무 생각도, 아무 계획도, 그리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한 시간의 평화를 즐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잠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라져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사라져 줌으로써 그들 자신의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 삶을 구원해 주는 그 한 시간의 중요한 평화를 누린 뒤, 우리는 정원 일의 의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
정원에서 평화를 누리는 법을 이해할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발견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자신의 마음의 정원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법을. 비록 때로는 너무나 어수선하고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될지라도.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 - 불교 잠언
고민하는 대신 거기 언제나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비록 그 무엇인가가 불평하지 않고 잠시 평화롭게 앉아 있는 일이라 해도.


행복과 고통을 거의 같은 비율로 얻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고통에 처해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전에 받거나 잃은 행복 때문이다. 행복은 고통의 끝이 아니고, 고통은 행복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순환을 돌고 있을 뿐이다. 조금 놓아 버리면 조금의 평화가 오고, 크게 놓아 버리면 큰 평화를 얻을 것이다. 만일 완전히 놓아 버린다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상대로 한 그대의 싸움은 끝이 날 것이다.


아내와 남편이 숲으로 산책을 가 "꽥, 꽥!" 우는 소리를 듣고 닭이다, 거위다 싸운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조화이며,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결혼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금이 가는가? '닭이냐, 거위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혼이 발생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무엇이 최우선인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은 닭이냐 거위냐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게다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장담하는가. 그러고는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발견한다. 누가 아는가? 그것이 유전자를 조작해 거위 울음소리를 내도록 변형시킨 닭일지!


사랑할 때의 문제는, 환상이 사라지고 나면 뒤따라는 실망감이 우리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성과의 사랑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고, 뭔가가 든 병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행복감이 그렇듯이 얼마 후면 그것마저도 시들해진다. 진정한 사랑은 에고가 사라진 사랑이다. 그때는 오직 상대방만을 염려하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의 문은 언제나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하든." 이 때의 우리의 마음은 진실하다. 우리는 단지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흔치 않다.


자기 비난이 과거의 벽돌 벽을 바라보면서 잘못 놓인 두 장의 어긋난 벽돌만을 보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미래의 벽돌 벽을 바라보면서 잘못 놓이게 될 벽돌만을 보는 것이다. 두려움이 눈을 가리면, 완벽하게 쌓아올려질 나머지 벽돌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벽 전체를 바라보는 일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불행한 가능성에 집중할 때, 그것은 두려움이라 불린다. 반면에 다른 가능성들이 훨씬 많음을 기억할 때,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라 불린다.

두려움은 미래의 잘못될 일들을 예측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해도, 결코 무엇이 잘못될 것인가 예측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두려움은 끝이 난다.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자각함과 동시에 녹아 없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를 사용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우리를 녹여 없앨 수 있다.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벗어던지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고통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고통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머물도록 허락한다. 설령 평생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거이 더 나빠지더라도 거부하지 않는다. 고통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고통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그것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다. 고통이 머물러 있든 떠나든,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다. 오직 이때만이 고통은 사라진다.


야생의 코끼리를 자유롭게 풀어 놓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짓밟고 돌아다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 코끼리를 정복하지 않으면 삶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생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속 코끼리이다. 깨어 있음의 밧줄로 코끼리를 붙들어 맬 때 문제는 사라진다. 깨어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면 코끼리는 통제하는 이도 없이 집착과 분노, 욕망과 쾌락 사이를 뛰어다닐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영리한 반응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복하며, 행복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화를 내는 것은 비이성적인 일이다.

화를 내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대가 무너진 데서 촉발된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에 너무 많이 집착하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가 찾아오지 않으면 화를 낸다. 모든 원하는 결과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며 예측이다. 지금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며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
화를 내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고통 역시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 이다.
분노는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외톨이가 되기 원한다면 자주 화를 내라.


갈 곳이 아무데도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달아나는 대신 문제와 마주한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전보다 훨씬 더 가까이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달아날 곳은 없다. 더 이상 중요한 갈등들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속 그 분노에 찬 코끼리를 강제로 제압하려 하지 말고, 그 대신 자비의 마음을 사용하라.
"사랑하는 나의 미친 마음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활짝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 네가 나를 파괴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에게 어떠한 나쁜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나의 마음이여,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당신이 미친 마음과 싸우는 대신, 그 마음을 평화롭게 대하라. 그 자비의 힘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마음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온순하게 그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당신은 부드럽게 그 마음을 토닥이며 말한다. "그래, 내 마음이여. 그래, 내가 다 안다."


시장을 지나갈 때 코끼리는 쉴 새 없이 코를 흔들어 진열된 물건을 쓰러뜨리거나 아무거나 집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노련한 조련사는 이때 코끼리의 코에 대나무 막대기 하나를 쥐어 준다. 막대기를 받아 쥔 코끼리는 그것을 꽉 잡고 가느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마음 역시 이런저런 생각으로 움직이지만 참다운 자신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해 주고 긍정적으로 키워 주지 않으면 좋은 것이라도 해도 오래지 않아 시들어 버리고 소멸해 버린다. 하지만 약간의 칭찬만으로도 큰 격려가 된다. 인간 모두는 칭찬 듣기를 원한다. 단지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칭찬은 돈을 절약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를 풍요롭게 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그것을 주위에 더 많이 전파시킬 필요가 있다. 칭찬을 해주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은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나는 어려서부터 배웠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절망은 우리 모두가 통과해야만 하는 감옥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상황을 견뎌내게 도와준다. 그것은 또한 절망의 가장 큰 원인인, 행복한 시기를 너무도 자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버리게 해준다.


당신이 해변에서 친구와 함께 멋진 오후를 보냈다고 상상해 보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한 트럭 분랴의 소똥이 당신 집 현관문 바로 앞에 쏟아 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 첫째, 당신은 그 소똥을 주문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 둘째,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누가 소똥을 그곳에 잔뜩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도 목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은 그 것을 치우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도 없다.
  • 셋째, 그 소똥은 불결하고 불쾌하며, 고약한 냄새가 당신의 집안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비유에서, 당신 집 앞의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은 삶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는 불쾌한 경험들을 상징한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알야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 첫째, 우리는 그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한다. "왜 하필 나인가?"
  • 둘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도,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지 몰라도.
  • 셋째,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며, 우리의 행복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의 고통이 우리의 삶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 첫 번째 방식은 소똥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소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 다시 말해 분노와 좌절 등에 빠지는 것의 은유다. 그것은 불행한 환경에 처했을 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많은 친구들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심한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똥 더미는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발효가 될수록 더 나쁜 냄새가 난다.
  • 다행히도 두 번째 방식이 있다. 우리 앞에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이 쏟아 부어질 때, 우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작업을 시작한다. 외바퀴손수레, 쇠스랑, 갈퀴 등이 동원된다. 소똥을 손수레에 퍼 담고, 그것을 집 뒤로 끌고 가 정원에 파묻는다. 이것은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때로는 아무리 힘들여 일해도 하루에 반 수레밖에 소똥을 옮기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하면서 절망속으로 걸어들어가기보다는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우리는 소똥을 퍼 나른다. 소똥 더미는 날마다 줄어든다. 때로는 여러 해가 걸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아침이 오고야 만다. 우리 집 앞의 소똥이 모두 사라진 거을 우리 자신이 보게 되는 아침이. 나아가 우리 집의 다른 장소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꽃들이 풍성한 색채로 정원을 온통 뒤덮으면서 만발한다. 꽃들의 향기가 길 아래쪽까지 날아간다. 따라서 이웃들과 지나가는 행인들조차도 기쁨 속에 미소 짓는다. 그런가 하면 정원 구석에 있는 과실수들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 열매들은 달디달다. 그런 맛을 가진 열매들은 어디서도 살 수 없다. 수확한 열매가 너무 많기 때무에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기적의 맛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소똥을 퍼 나르는 것'은 그 비극들을 삶을 위한 거름으로 환영해 맞아들이는 것의 비유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 가슴의 정원으로 날마다 퍼 나름으로써 고통의 더미는 점점 줄어든다. 그것은 여러 해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침은 오고야 만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발견할 수 없는 아침이.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친절의 꽃들이 만발한다. 그리고 그 향기가 우리의 길 아래쪽으로, 이웃에게로, 친구와 심지어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로 날아간다. 그런가 하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의 열매가 가득 매달린, 구석에 서 있는 지혜의 나무가 우리를 향해 구부러진다. 우리는 그 맛 좋은 열매들을 전혀 아무런 계획 없이도, 지나가는 행인과도 무료로 나눈다.

우리가 비극적인 고통을 겪고 그것이 가져다준 교훈을 배웠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정원을 가꾸었을 때, 그때 우리는 깊은 비극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우리의 팔로 껴안을 수 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요, 나도 압니다."
그들은 우리가 진심으로 이해한다는것을 깨닫는다. 자비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외바퀴손수레와 쇠스랑과 갈퀴를, 그리고 끝없는 격려를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의 정원을 가꾸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교적 평단한 삶을 살아왔으며, 퍼 나를 소똥이 많지 않았던 그 수행승들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위대한 스승이 된 사람들은 실로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묵묵히 그것들을 퍼 날랐으며, 풍요로운 내면의 정원을 가꾼 이들이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수행승들은 지혜와 내적인 고요와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소똥을 가졌던 이들은 세상과 나눌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만일 자비의 길을 따르고자 원한다면, 다음번에 당신 삶에 비극이 일어날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와! 내 정원에 뿌릴 거름이 더 많이 생겼군!"


좋은 친구나 상담자는 바닥이 없는 쓰레기통과 같다. 그리고 너무 가득 차서 또 다른 사람의 문제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결코 없다.


세상은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 삶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자신의 힘을 축적했고, 포위망을 뚫듯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나 찾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당신의 삶을 위험에서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물살이 당신보다 더 강할 때, 그때는 물살과 함께 흘러갈 때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온 에너지를 쏟아 부을 때이다.


삶에는 항상 예기치 않았던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따라서 꿀을 맛볼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 가장 절박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문제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삶에서 해결책이 없는, 따라서 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걱정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가? 해결책이 있는 문제라면 당연히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어떻게 내리는가? 대다수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힘든 결정을 내려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일이 잘못될 때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갈 때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엉덩이가 가려운 사람이 머리를 긁고 있다. 긁어도 긁어도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네."자신의 삶의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당신의 엉덩이가 가려운데 계속해서 머리를 긁어대는 것과 같다.


톨스토이 단편선집에 실린, 모든 지혜로운 기준을 갖게 될 세가지 질문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지금.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군인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보살핌과 배려
소통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그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때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도 그것을 느낀다. 그 사람도 그것을 알고, 그것에 반응한다.
삶에서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당신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 자신에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자각하는 최초의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좋은 아침이야. 멋진 하루를 보내기 바라!"
그리고 잠들기 직전 당신이 자각하는 마지막 사람은 누구인가? 또다시 당신 자신이다! 나는 날마다 나 자시에게 잘 자라고 말한다. 하루 중 많은 개인적인 시간에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효과를 발휘한다.


부모들의 문제는,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종종 그들의 예측은 빗나간다. 때로는 예측이 맞는 부모도 있다. 거의 천 년 전에 아들의 탄생에 부쳐 다음의 시를 지은 중국의 소동파처럼.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그 아이가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네.
현명함으로 일생을 그르친 나는
이 아이가 어리석고 무지하기를 바라네.
그러면 장차 정부 관리가 되어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되리니.


우리의 마음 역시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는 것들과 다르지 않은 온갖 잡다한 것들에 점령당해 있다. 관계들 사이의 전쟁, 가정과 직장에서의 정치적인 행동, 큰 불화를 일으키는 개인적인 스캔들,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섹스라는 이름의 스포츠 등이 그것이다. 만일 우리가 때때로 그 '마음속 신문'을 내려놓는 법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에 늘 사로잡혀 있고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최상의 자연이 주는 때 묻지 않은 기쁨과 평화를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지혜는 배움이 아니라, 결코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마음은 눈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제공되는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음은 눈이 결코 볼 수 없는 소리까지도 알며, 실제로 존재하거나 꿈으로만 존재하는 것까지도 만질 수 있다. 마음은 나아가 오감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마음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임에 틀림없다. 마음은 모든 것을 담는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동양의 격언


어떤 장소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리 안락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그곳이 감옥이다. 이것이 '감옥'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다. 만일 당신의 직업이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그때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관계 속에 있다면,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병들고 고통스런 육체 속에 있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 다면, 그것 역시 당신에게는 감옥이다. 자유는 당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욕망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 모두 삶의 어느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피라미드를 올라갈 수 있는 시간과 평화를 우리 자신에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삶이라고 하는 이 복잡하게 뒤엉킨 정글 위로 올라가 보아야만 하다. 그때 우리는 사물들 속의 자신의 위치를 보게 되고, 우리 삶의 여행을 멀리까지 내다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우리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무한 세계를 응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힘들게 일해서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현대 서구 문화는 첫 번째 자유, 곧 욕망의 자유만을 인정한다. 그러한 자유를 국가 헌법이나 인간 권리 헌장 맨 앞에 모셔두고 숭배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근본 신조는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국민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에 사는 국민들이 그다지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두 번째 자유, 곧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몇몇 종교적인 공동체 안에서만 찬미를 받는다. 그들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만족과 평화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내가 머물고 있는 절처럼 금욕적인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들 각자는 삶의 표현이다. 삶은 친절한 스승이면서 동시에 가혹한 스승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스승을 찾기 위해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수많은 타인들을 거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 것은 곧 주위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무, 별, 고양이, 사람, 꿈과 소망을 가진 모든 존재, 웃음과 눈물을 가진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길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명상은 우리가 가진 재산, 우리의 인간관계, 아이들, 자동차, 소유물보다 더 중요하다. 재물을 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은 당신이 죽을 때 모두 사라진다.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결국 좌절을 가져온다. 아무리 많은 기쁨을 가진다 해도, 그것들은 노년의 안개 속에 사라진다. 나이 듦에 따라 알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삶의 쾌락이 일찍 올수록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생각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훨씬 더 쉽고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가난할 때 우리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부자들 중 많은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진실한 우정과 온갖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부러워한다. 부자가 되는 것은 단지 '가난한 자의 고통'을 '부유한 자의 고통'과 바꾸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수입이 끊어지는 것은 '부자의 고통'을 '가난한 자의 고통'과 교환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불쌍한 나, 운 좋은 그들!
다른 무엇이 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은 단지 한 가지 형태의 고통을 또 다른 형태의 고통과 맞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결혼을 했든 독신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신참이든 고참이든 지금의 당신에 만족할 때, 그때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운좋은 나, 불쌍한 그들!


슬픔은 당신으로부터 사라진 것만을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삶의 축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다. 마지막 눈을 감을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곁으로 가장 젊고 최근에 얻은 네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는 그녀의 소문난 몸매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보, 난 아무래도 오늘이나 내일 죽을 것 같소, 저 세상에서 당신이 없으면 난 무척 외로울 것 같아.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 빼어난 미모의 젊은 아내가 말했다.
"난 여기에 남아야 해요. 당신의 장례식 때 당신을 위해 멋진 고별사를 하겠지만, 그 이상은 안돼요."
그러면서 그녀는 방을 나가 버렸다. 그녀의 차가운 거절은 그의 가슴에 단검처럼 꽂혔다. 그는 그 젊은 아내에게 실로 많은 애정을 기울였었다. 중요한 행사 때마다 그녀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늙은 나이에 위엄을 더해 주었다. 그가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아직 세 명의 아내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년의 나이였을 때 결혼한 세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는 이 세 번째 아내를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었다. 그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숱한 남자들이 그녀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만 충실했다. 그녀는 그에게 믿음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 말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하루나 이틀 후면 죽을 것 같소. 죽어서 저세상에 갔을 때 당신이 없으면 무척 외로울 것이오. 나와 함께 가주겠소?"
"절대로 안 돼요!"
그 매혹적인 젊은 여인은 사무적인 태도로 잘라 말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겠어요. 하지만 장례식 뒤에는 당신의 아들들을 따라가겠어요."
세 번째 아내의 배신은 그를 뼛속까지 뒤흔들었다. 그는 그녀를 내보내고 두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는 두 번째 아내와 함께 성장했다. 그녀는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의 곁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매우 귀중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였다. 그는 확신에 찬 눈으로 두 번째 아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거요. 저세상에서 당신이 없으면 난 외로울 것이오. 나와 함께 가 주겠소?"
그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당신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는 따라가겠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어요."
남자는 망연자실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첫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녀는 그가 영원의 세월 동안 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녀를 무시한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유횩적인 세 번째 아내나 미모가 빼어난 네 번째 아내를 맞이하고부터는. 하지만 그에게 진실로 중요한 사람은 첫 번째 아내였다. 그녀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했다. 볼품없는 옷을 입고 몸까지 여윈 첫 번째 아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오늘이나 내일이면 내 목숨이 다할 거요. 저세상에 갔을 때 당신이 없으면 난 외로울 거요. 나와 함께 가주겠소?"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나는 생이 바뀌어도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이 첫 번째 아내는 '카르마(업)'이다. 두 번째 아내는 '가족'이고, 세 번째 아내는 '재산'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아내는 '명성'이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기 바란다. 이제 당신은 네 명의 아내를 알게 되었다. 그 아내들 중 단신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 돌봐야 할 아내가 누구인가? 당신이 죽을 때 그들 중 누가 당신을 따라 가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만으로 고민할 거리가 충분하지 않으면 텔레비전 드라마라도 보면서 상상 속 인물들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다. 많은 이들이 고민과 고통을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고통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들은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문제에 너무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83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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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봉선화, 해바라기, 무궁화 꽃이 활짝!

들깨밭은 숲을 이루고 고추는 병이 와서 말라 가는데 바로 옆 오크라는 따도따도 수확이 넘친다.

수세미는 잘 자라고 있어 조금만 지나면 말려서 일년 내내 설거지 하는데 천연수세미로 제격이다.

비 그친 오후 강아지랑 산책길, 하늘에는 무지개! 밤하늘에 별 가득한 8월 여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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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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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어는 가을이 제철이라고 하는데 여름 끝자락 전어 맛도 별미.

1박2일 택배 주문이라 횟감으로 어떨지 고민했으나 전어무침용으로는 괜찮은듯 보여 텃밭 야채넣고 무침과 전어구이, 그리고 오랜만에 태임씨 막걸리를 곁들이니 잘어울리는 마리아주!

그리고 8월 제철 전복.
페이스북 인어교주해적단의 전복광고를 보고 근호씨, 태임씨 백신 2차 접종마치고 보양식으로 괜찮겠다 싶어 바로 주문하는데 사이즈별 가격이 천차만별. 구이로도 먹으려면 그래도 너무 작으면 손질도 어렵다는 이여사님 의견을 반영해 킬로에 11-12마리로 당첨!

배송된 전복이 모두 살아 싱싱해서 전복물회까지 더한 오크라전복버터구이 한상,

뭐든 제철 식재료가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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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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