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재력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시민은 깨어 있어야 하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권력에는 불복종으로 맞서야 한다.

 

 

[본문발췌]

 

 

'진실은 진실한 행동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 톨스토이

 

 

실제로 수천 년 전부터 그랬지만,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민중을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지식인, 지배계층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전 등을 운영하는 거대 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로 대중은 서로 소외도어 갈 뿐입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아주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대중을 삶의 표피적인 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의 벽을 세우고 대중을 그 벽 안에 가둬 격리시키려 합니다.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간에 선전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선전수법이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울 뿐입니다. 예전부터 그 역할은 지식인의 몫이었습니다. 학식과 지식을 지닌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자유란, 어떠한 환경이나 속박 그리고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세네카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는 권력은 때로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 코슈트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들어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공급자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공급자 중심의 경제로 진행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강력하고 전제적인 힘을 지닌 소수 집단이 초강대국을 등에 업고, 때로는 국가의 정책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면서 일부 경제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만, 국민 앞에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다소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기업의 지배가 위협받자, 선전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기관과 홍보기관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기업계 지도자의 표현대로 '개똥철학' 즉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나 관심을 갖는 구경꾼'의 역할이어야 했습니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런 흐름을 꿰뚤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합니다.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테크놀로지에서 최첨단 영역은 공공 분야가 전적으로 재정을 떠맡고 있습니다. 반도체, 마이크로프로세서, 대부분의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공공 분야에서 지원한 연구의 산물입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 분야의 창의적 발상으로 공공자금으로 개발된 이런 모든 것은 당연히 공공의 재산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민간 기업에 양도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말입니다.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으려면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 애덤 스미스

 

 

금융시장과 투기시장도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투자 방향을 짐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수가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합니다.

 

 

투자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하나는 "패닉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닉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 로빈 하넬(Robin Hahnel) '패닉 퍼스트 Panic First'

 

 

현재의 경제체제가 붕괴되다면 그 이유는 금융위기나 생태환경의 재앙일 가능성이 크다 - 촘스키

 

 

외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대부분이 경영 지배권의 확보를 위한 돈입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 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이런 민영화는 대체로 부패한 정부에서 주로 시행됩니다.

 

 

매일 거대 자본이 컴퓨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주인이 바뀔 뿐입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투자되는 자본은 소규모에 불과합니다.

 

 

버뮤다 군도, 버진 군도, 파나마에 투자라는 명목으로 국경을 넘어 이동한 액수의 거의 절반이 회계상의 이동이었다. 회계상의 이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나라들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기업이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국민의 몫을 훔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입니다.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미디어, 학교, 지배 계급의 문화에 반대하며 민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여론의 압력이 더해질 때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는 온갖 범죄를 감싸주는 외투다 - 메난드로스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지배계급은 체제순응적인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이 이념을 멋지게 색칠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세계화는 미국식 모델을 전 지구에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화의 목표이고 결론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칸트

 

 

대중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전념할 것이고,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피상적인 것에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단계의 정책 결정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동 현장과 그 이상에 관련된 정책 결정에서도 말입니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계급은 공포심을 조장하고 선전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 사회는 줄곧 변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관련된 개념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구조와 계급구조는 변했지만 특정집단의 이해 관계, 지배 관계, 사회의 계층구조, 의사 결정의 단계 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런 모순이 계급간의 갈등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유일하게 매수되지 않는 것이다. - 필딩

 

 

텔레비전 사회자는 프롬프터를 읽어대고 있을 뿐입니다! 텔레비전 사회자는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미용실로달려갑니다. 그리고 프롬프터가 있습니다. 대개 그를 대신해서 생각까지 해 주는 젊은 여자가 조작하는 프롬프터 앞에 앉습니다. 프롬프터에 질문이 나타납니다. 그럼 그는 마치 자기가 직접 생각해낸 질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출연자에게 묻습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당신 생각을 세 문장으로 집양시킬 기회가 생긴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슬로건을 반복하는 데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당신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를 택하면 당신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 주장을 뒷받침해 줄 최소한의 증거도 제시할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는 우리에게 사건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전 효과에 100퍼센트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동시성과 즉각성은 사건의 흐름에 우리 몸을 그대로 내 맡기게 만듭니다. 현재의 인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어려운 단어들을 골라 쓰며 복잡하게 말해야 지식인 대접을 받으면서 특권층처럼 군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인들이 회의에 초대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강연에 알맹이가 있습니까? 바로 이런 현상이 문제입니다. 쉬운 말로도 더 깊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악인보다는 선량한 사람만을 학살한다. - 소포클레스

 

 

미국은 변덕스럽고 보복을 잊지 않는 국가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계 모든 국가가 미국을 두렵게 생각할 테니까요. 지나치게 합리성을 따지는 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양식良識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믿을 만한 몇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폭력을 일심는 친위대원이 될 수도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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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결말, 희망이다.

 

 

[본문발췌]

 

 

서재는 반드시 우리가 읽은 책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언젠가 읽게 될 책들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죠. 서재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들입니다.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책들이죠. 그것들을 영원히 못 읽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 장 클로드 카리에르, <책의 우주>

 

 

어떤 것에 대해 미운 마음을 품거나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꼬치꼬치 캐고 들거나 속상해 하면서 세월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은 거란다. -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 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취미의 세계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하는 환희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 무라카미 류, <무취미의 권유>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곧 겨울이 되기 때문에 작은 들쥐들은 옥수수, 호두, 밀, 짚을 모으기 시작했다. 쥐들은 모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프레데릭을 제외하고, 들쥐들이 물었다. "프레데릭, 왜 일을 안 하는 거니?" 프레데릭이 말했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나는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빛을 모으고 있는 거야." - 칼하인츠 A. 가이슬러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레오 니오니의 동화 <프레데릭>을 인용한 부분

 

 

흘러가는 세월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한 줌의 모래처럼, 혹은 우리를 노쇠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면 우리는 불행한 것이다. 반대로 생각을 바꿔서 흘러가는 세월이 우리를 보다 더 완성시켜가고 있다고 여기면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 - 생텍쥐페리 잠언집>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것에 대해 의견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의견이 없다고 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다. 의견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라. 의견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이자 권리다. 오늘날 진짜 문제는 정보의 부하가 아니라 의견의 과부하다. 세상은 당신의 코멘트 없이도 잘 돌아갈 것이다. - 롤프 도벨리, <불행 피하기 기술>의 52개 기술 중 '모든 것에 뚜렷할 필요는 없다'

 

 

살다 보니,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과거의 교육은 여러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환경이 달라질 때는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전략을 설계하면서 적응해나갔다. 그러나 작금의 변화는 과거의 변화와 전혀 다르다. 교육자들은 인간 역사의 어떤 전환점에서도 이번만큼 어려운 고비와 도전에 직면한 적이 없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런 상황을 처음 겪고 있다. 우리는 정보로 과포화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기술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하물며 그보다 더더욱 어렵고 역부족인 기술, 즉 앞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인간을 가르치는 기술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고, 싫어하는 것을 줄이면 된다. 제발 '좋은 것'과 '비싼 것'을 혼동하지 말자! 자신의 '좋은 것'이 명확하지 않으니 '비싼 것'만 찾는 거다. - 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같은 것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 매일이 좋은 날'

 

 

익숙한 것의 안도감과 지루함, 낯선 것의 경이로움과 두려움. 아마도 이것들이 잘 조화를 이룰 때 생은 안정되는 것이리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질병의 부재나 기능의 부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잠재력이다. - 올리버 색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거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것이 마음이 담긴 길이라면, 마음이 담긴 길을 갈 때 자아가 빛난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에도 문이 있다. 힘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공감하는 마음이 열쇠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는 거란다. 네가 마음만 먹느다면 그 아름다움 속으로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단다. - 영화, <와일드>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 - 위스망스, <거꾸로>

 

 

그것은(여행기는) 여행이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을 돌아오는 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노승이 말했다. "진정한 지혜는 이 풍경 속에서 한 순간에 발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언제까지나 깊이 감추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꾸뻬는 문득 깊이 감추어져 있는 그것을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침묵 속에 사원 앞에 서서 구름과 태양과 바람이 한 순간 산들과 어울려 노니는 것을 바라보았다. 꾸뻬는 이것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보다 새로운 배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 프랑수아 를로르, <꾸뻬씨의 행복여행>

 

 

인생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라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습관은 안락하고, 포근하고, 안전하게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끌고 왔지만, 새로고침이 주는 뜻밖의 재미, 유쾌한 즐거움은 여러분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줄 겁니다. 우리 뇌는 습관이라는 틀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디자인돼 있지만 새로운 목표를 즐겁게 추구하도록 디자인돼 있기도 합니다. 어느 뇌 영역을 사용할 것인지는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시면 됩니다. - 정재승, <열두 발자국>

 

 

우주는 떨림이다. 정지한 것들은 모두 떨고 있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 김상욱, <떨림과 울림>

 

 

우리는 흔히 혼자됨을 개인적인 실패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삶에 속한 것이며, 홀로 있음에 힘들어하는 것 역시 사회적인 통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안다면 혼자인 사람은 자신이 커다란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 프란치스카 무리, <혼자가 좋다>

 

 

혼자라는 것은 같이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분명 결핍이다. 같이 있다는 것은 혼자 있다는 것에 비추어보면 충족이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틀로 비추어보면, 행복은 혼자 있을 때와 같이 있을 때 어느 한쪽과 일방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행복이란 혼자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결핍에 벗어날 때, 그리고 같이 있을 때 발생하는 과잉 충족으로 인한 질식에서도 동시에 벗어날 때 가능하다. -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별들은 멀고 먼 거리 /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 저 혼자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 김재진,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주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을 보고 토끼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니?" 사람이 대답했다. "나의 일을 쫓아가고 있어." 토끼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네가 일을 쫒아가야 할 정도로 일이 너를 앞서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그 일이 네 등 뒤에 있을 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그냥 멈추기만 하면 만나게 될 텐데. 지금 너는 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건지도 몰라." - 동유럽에서 전해지는 우화 중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이상 긴장감 속에서 경계심을 품은 채 이 세상을 조사, 관찰하지 않아도 된다. -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조급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방향을 잡는 것도 서두를 일이 아니다. 헤매는 것이 인생이다.

 

 

향미가 희석되는 현상은 현대 농업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문제다. 종자 개량, 화학비료, 비닐하우스, 지력 쇠퇴, 토양미생물 감소 등 다양한 원인이 밍밍한 음식을 만들어 냈다. 닭고기는 향미를 잃었따. 토마토는 밍밍해졌고, 옥수수, 밀, 딸기, 상추도 각각의 고유한 맛이 약해졌다. 모든 음식이 묽게 변했다. - 유진규, <맛의 배신>

 

 

미래는 종종 예상하고, 계획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새로운 시간과의 만남에 설레고 싶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증거이므로.

 

 

"미지를 향해 문을 열어두는 것, 어둠으로 난 문을 열어 두는 것. 그 문은 가장 중요한 것들이 들어오는 문이고, 내가 들어왔던 문이고, 언젠가 내가 나갈 문이다. ...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무언가다. 그런데 우리는 변화의 건너편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모르거나, 모르는 데도 안다고 생각한다." -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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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 우화처럼 집, 학교, 사회에서 게으름은 나쁜 것,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배우고 생각한다.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깨닫는다면 물질과 권력 중심의 목적지향적인 삶이 얼마나 공허하며 거꾸로 삶을 피폐하고 힘들게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선우정아의 '뒹굴뒹굴'을 BGM 깔고 읽어보시길...


[본문발췌]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 피에르 쌍소

나는 시간을 멎게 하는 게으른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병리학의, 잣대로 들이댄다면 모를까,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되찾고, 느긋이 몸을 돌보고, 서로 아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거의 현자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만 시간을 늦출 수 있을 뿐이다. 아니면 차라리, 강요받고 별 뜻 없으며 앞다투어 능률을 올리는 시간을,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갈음할 뿐이다. 게으름이라 함은 이따금 제 기분이나 기질에 따라서 행동하는 만큼, 그리하여 드디어 자기 자신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다.

게으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남이다. 그러나 정신까지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맞서는 것을 잠깐 멈추는 식의 물러남이다. 이 세상이 뭐가 되든지, 되어 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 어른이 되고, 늙은 사람은 죽게 되는 것.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신경 쇠약으로 죽음을 재우쳐서도 안 된다. 겨울이 우리를 삼키고 꽁꽁 얼어붙게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참을성을 갖고 기다리자.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것이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될 테니.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한가로이 거닐기, 남의 말 들어주기, 꿈꾸기, 글쓰기 따위처럼 사람들이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버려진 순간에 깃들여 있다.
존재의 아름다운 순간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 순간은 놀라움의 순간이고, 당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다. 웃음을 띤 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러한 순간이다.
게으름은 어디 아픈 것처럼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증세가 아니다. 천천히, 느리게, 있는 그대로 삶을 누리려는 몸가짐이자 마음가짐이다. 아주 천천히 가고 있어서 삶의, 저물녘에, 막바지 노을 속에서, 영원의 저녁 빛을 숨쉬는 그러한 능력이 게으름이다.

이와 같은 인식 행위에는 시간을 멎게 하는 힘이 있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 볼 가치가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볼 가치가 있다. 마치 포도주잔에 빠져들어 한 방울 한 방울 그 맛을 느끼며 즐기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아껴 마시는 포도주, 그 포도주 또한 입 안의 포도주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나.

움직이 않음, 마침내 그것은 움직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일 터.



<정원에서> - 질 클레망

자연은 아무도 정확하게 내달볼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커다란 자원이기도 하다. 자연은 언제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만일 사람들이, 자연이 스스로 알아서 저희를 표현하고 무슨 일이든 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아마 한결 풍요로운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꽃이며 짐승들이 곳곳에서 나타날 테니까.

이러한 삶이, 이러한 다양성이 실재한다. 자기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차라리 거꾸로 움직이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더 잘하는 것이다.



<무를 위한 시간> - 티에리 파코

'휴식recreation'이라는 말 속에는 '창조creation'라는 말이 들어 있다. 창조의 그 순간에 아무 감정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그에 따르는 침묵에 방해는 받았다는 듯이.

더구나, 그러한 침묵은 우리 스스로의 소리를 듣게 하고, 우리를 가깝게 하고, 우리를 꽉 채워 주고, 우리가 삶의 길을 다시 갈 수 있게 한다. 휴식과 창조의 시간, 무를 위한 그 시간은 새로운 무엇을 예비하는 시간이다.



<시간, 멈추어 버린>

나날의 삶에는 나날의 삶이 필요로 하는 박자와 어긋나는 방향이 있다. 그러한 템포의 틈서리에서, 우리의 삶은 멋대로 휴식을 얻는다. 낮잠과 밤새우기와 일요일과 기다림과 권태가 우리로 하여금시간을, 우리의 시간을 되찾게 해 준다.



<밤과 잠> - 마르틴 쿠티에

누구나 알고 있다. 회한에 사무쳐 괴로워하는 사람은 제대로 쉬거나 잠을 잘 수도 없다는 것을... 유령 이야기, 서서 자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거꾸로, 뉘우칠 거라곤 없는 순수하고 천진하고 결백한 영혼은 평화롭고 깊은 잠을 자도록 보장받는다. 흔히 그렇다는 말이다.



<일요일, 그 등대에서> - 장 프랑소와 뒤발

늦잠을 자고 나면 그 나머지 시간이 있는 법. 일요일은 사회 생활의 규칙으로 말미암은 것만큼이나 계절의 리듬, 밤과 낮이 바뀜에 따라 결정되는 '시간의 추종자들'이 한 순간 폭발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추종자들은 바깥쪽 요인의 강요를 받아서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시계의 연대기 생물학의 시간과 다른 결을 타기 일쑤다.

아침잠을 깨우는 자명종, 수첩에 적힌 갖가지 일, 노동 시간, 제때 식사, 여름 시간표, 겨울 시간표 따위가 한 주 동안에 우리와 일상을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낮 열두 시에 아침을 먹기도 하고, 점심을 거르기도 하고, 간식 시간과 점심 또는 저녁 시간이 뒤섞이기도 한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몽롱하게 취하기도 하고, 사냥감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몇 킬로미터를 내달려 보기도 한다. 굳이 시간을 셈하거나 하지 않고.

일요일이 지닌 두드러진 점 가운데 한 가지는 바로 느림과 감속이라는 특성이다(이따금 멈춤에 따른 불안한 감정까지 건네면서). 평일은 재즈처럼 늘 비슷비슷한 템포로 움직인다. 일요일은 훨씬 조화로운 날이며, 화려한 피날레가 따르곤 한다. 영화에서 화면이 바뀌며 나타나는 영상 하나하나가 우리 나날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것으로 갈음되듯이, 우리는 갑작스럽게, 아주 쉽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런 사물, 곧 위대한 시간을 맞이한다.

평일은 경제의 역학 구조와 온갖 구속에 의하여 완벽하게 조정되기 일쑤다. 그러나 일요일은 이 역학 구조를 차단시키며, 마침내 시간과 맞물리지 않는 흐름을 타곤 한다. 어느 시간대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의 기제가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일요일에는 저마다 자신이 시간을 가진다. 삶은 셀 수 없이 숱한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갖가지 시간으로 짜여 있다. 일요일은 우리에게 시간의 다양성과 그 최초의 밀도를 조금이라도 되찾아 주는 날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함부로 흘리거나, 붙들고 있거나, 갈무리하거나, 써 버리거나, 아예 없애거나, 잃어버리거나, 보람차게 만들거나,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내가 힘없이 가라앉아 있거나, 힘이 넘쳐서 설레거나,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시간에 대한 나의 지배는 변함이 없다.

일요일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지위를 빼앗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 불연속성 앞에서, 평일에는 우리가 다른 배역을 맡지 않을 수가 없다. 평일은 우리를 나누고, 우리 자신을 갈라놓는다.

지속성과 연속성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일요일에는 그런 배역이 없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이따금 그 단일성 속에서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며, 존재의 흐릿한 윤곽을 분명하게 하도록 촉구한다. 왜냐하면, 존재 방식을 통해서, 정체성이 찾고자 하는 내적이고 심리적인 태도를 통해서, 그 특별한 날은 온갖 퇴행 현상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곤 하는 까닭이다. 괄호 속에 놓인 사회적 자아, 나르시시즘을 곁들인 욕구는 틈만 나면 차츰 기력을 되찾는 경향이 있다. 그 때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자신을, 자기 가족을, 자기 주변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만일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면, 그것은 식전의 맛보기 술이 주는 가벼운 행복감, 즐거운 식사 모임, 알코올로 말미암은 취기, 묵직한 소화 기관, 이런 상태에서 이미 쾌락주의자들이 겪은 바 있는, 무기력하고 조금은 게으르게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그 때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억눌려 있는 자아다. 만족시켜야 할 욕구가 있는, 쾌락을 좇는 자아다.

만일 일요일이 우리의 나날 가운데 가장 걱정 없이 보내는 날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일요일이 온갖 일탈을 가능하게 하며 다른 어떤 시간보다도 광기와 우연과 창조의 시간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그 날의 시공간 속에서 본다. 그날은 또한 과거 속에 가장 뿌리내린 시간이다.

평일에는 탈을 써서 오히려 그 만남을 훼손시키지만, 일요일에는 아예 탈을 쓰지 않음으로써 남과의 만남 또한 자기와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 일요일에는 왕조차 가식을 벗어던진다. 일요일은 누구나 다 자기와 똑같은 사람임을 깨닫는 날이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휴식의 시간인 일요일은, 사람과 사람이 새롭게 맺어지는, 관계가 다시 창조되는 시간인 것이다.



<시시한 이야기> - 크리스티앙 보뱅

영원이라 함은 시간으로 나아가는 것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남는 자취 같은 것이지요. 마치 이삭들을 헤치며 걷다 보면, 어느덧 밀밭에 생기는 어린 시절의 오솔길처럼... 영원이라는 것 또한 그 시간 하나하나에 깃들여 있는 소박한 삶일 뿐,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 그 영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옮기고 나서]
<게으름의 즐거움>은 게으르게 사는 것이 바쁘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찬양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언사로 게으름이, 느림이, 멈춤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이리저리 풀어헤쳐 보인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4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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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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