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있는 가치의 다양성, 타자의 이해에 기반한 관용, 왜곡과 편견을 멀리하는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이런 것들이 '별들 사이에 길을 놓는다'는 표현을 만든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 -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본문발췌]
교육과 소득 수준의 관계,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 등을 열심히 연구해온 시카고 대학 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은 인간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15세까지'로 잡는다.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배제했을 때, 한 인간의 지적, 정서적 능력이 거의 결정되는 나이가 15세 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은 '교육의 효과' 부분이다. 15세 이후에는 교육 등의 외적 개입이 개체의 기본적 능력 형성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고 그는 말한다. 15세 이후의 교육은 한 인간의 기술적 능력 개발은 돕지만 그의 근본적인 능력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 15세 까지의 연령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가 '8세까지'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생 밀감이 아니다. 신의 설계이건 자연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느림, 자유, 여유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은 모든 아이들에게 어른에게나 적용될 속도계를 강요한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 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 - 괴테...
"바람과 불과 물과 땅 - 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고 이야기로의 번역이 가능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시 한 편이 응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긴 영화 한 편이 나올 수도 있다. 시의 1분은 영화의 한 시간, 산문의 두 시간이다. .... 스탠리 쿠니츠 <핼리 혜성>
종교적 관용의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개인의 불관용보다는 조직, 국가, 체제에 의한 불관용이 더 무섭과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 - 롤랑 바르트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선택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 타자의 이해와 존중을 가르치는 쪽.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릴 때에도 사람들이 시집 한 권, 음반 하나, 한 장의 그림에서 '행복'을 찾아내어 삶의 위기를 관리할 수 있게 하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다. 배고프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문화가 무슨 소용인가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화는 필요하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면 그 역도 진리다. 건강한 정신이 또한 건강한 몸을 만들므로.
문학에서 본 인간은 무엇보다도 '이야기 하는 동물'이다. 그는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과 인간의 ,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파악한다. 아니, 이야기는 그의 '세계'이다. 그는 이야기의 우주속에 태어나고 이야기로 성장하고 이야기 속에 살다가 이야기를 남기고 죽는다. 죽어서도 그는 이야기 속에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우리 속담은 말한다. '이름'은 어떤 문장 속에 들어가 주어 노릇을 할 때에만 제대로 이름이 된다. 그 문장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빼면 인간은 그냥 원숭이다.
인간세계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불평등을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평등 속으로 녹여내고 불평등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은 '성찰과 반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문화의 이 역량은 위풍당당한 시장주의와 오락주의의 행진 앞에 거의 빈사지경이 되어 있다. 문화는 문화의 학살을 가리켜 '이것이 문화'라 말하고 있다.
관용의 문화 없이는 어떤 문명도 공존의 정의를 실현시킬 윤리적 토대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패권주의자들에게 차이의 존중, 사랑, 관용이라니, 얼마나 허약해 보이는 제안이가! '타자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체제'로서의 '관용'
한번은 석가세존이 여행길에 강을 건널 일이 있어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방의 도인이 하나 나타나 석존에게 도전한다. "나는 25년 수도 끝에 배 없이도 물위를 걸어 강 건너는 법을 터득했다. 당신은 25년 설법 끝에 이만한 강도 건너질 못하는가?" 석존이 껄껄 웃고 왈, 배 타고 건너면 될 것을 그까짓 강 건너는 기술 하나 터득하자고 25년 세월을 보냈다니 참 안됐소 그려. 도인은 대꾸를 못하고 달아났다.
스님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오래된 무덤 속처럼 텅텅 빈 주머니 안의 공허를 맨손으로 만나기 위해서다. 제로를 애무하는 것은 불교적 구도의 핵심이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유한성과 일시성에서 오히려 인간존재의 품위를 발견하려는 자의 감성을 보여준다. ... 인간이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는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 - 볼테르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나 그가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 그가 천사 앞에 내놓을 위대한 자랑거리는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그 순간성의 조건과 유한성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순간>
기억과 사유, 상상과 표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독특한 능력들의 목록을 대표한다. 인간이 천사를 향해 자랑할 것도 그 네 가지 능력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 네 가지 능력의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수많은 구멍들을 갖고 있고 사유는 불안하다. 상상은 기억과 사유의 한계를 확장하지만 유한한 경험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도 시간성에 종속된다. 그러나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인간적 시도들은 그것들이 지닌 한계 때문에 무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들만이 가지는 순간적 아름다움의 광채를 포착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워즈워스의 "5월의 꽃", 푸시킨이 노래한 "해질녘 다리 위의 소녀와 잠자리떼", 괴테가 본 "마리앤바드의 위대한 가을 숲",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겨울 숲" - 이런 것들은 그 순간성 때문에 아름답다. ...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책 읽으라고 설계된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한 역사는 5000년, 지금 같은 형태의 종이인쇄 책의 역사는 600년에 불과하다. 자연선택이 사냥과 채집 같은, 인간종의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설계한 뇌 건축물의 부수적 파생 효과 가운데 하나가 책을 쓰고 책을 읽는 기능이다. 말하자면 그 능력은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덤'이 참으로 중요하다.
구미 각국이 리터러시 강화 정책을 펴는 데는 '잘 읽고 잘 쓰는 국민' 이야말로 다른 어떤 자원이나 능력보다도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힘'이라는 인식과 판단이 깔려 있다.
잘 읽고 잘 쓰는 능력은 시민의 경제력 제고와 자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리터러시는 모든 분야에서의 정보 접근, 수집, 판단, 활용의 기본이며 이 기본적 능력 없이는 기회 창출, 자립, 삶의 질 향상이 불가능하다.
잘 읽고 잘 쓰는 시민의 리터러시 능력 없이는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이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가진 시민, 잘 판단하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을 요구한다.
매체문화 환경이 다양해지면서 활자매체와 책 읽기로부터 이탈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이는 사회적 위기이다. 상상력, 비판력, 사고력의 중심 매체인 책의 힘이 약화되면 사회는 창조성 고갈의 위기를 맞는다.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지구에 왜 왔는가?", 박진영은 "춤추러 왔다."고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신념 작심이 어떤 내용의 것일지 알지 못한다. 당신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할지 모르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사랑이, 더 큰 행복과 빛나는 성취가 필요할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작심 내용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 한 가지, 나는 당신의 신년 결의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그 작심이 당신의 '삶의 품위'와 '삶의 기쁨'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으면 싶다. "나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비록 부대끼며 살아도 그 삶이 지녀야 할 품위를 생각하게 하고 "춤추러 왔다'는 대답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그 삶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요청의 절실함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몸으로 추는 춤만이 춤의 모두가 아니다. 몸의 춤이 있다면 마음의 춤, 영혼의 춤도 있다. 우리에게는 몸의 춤과 마음의 춤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가 영혼의 춤을 가장 잘 출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 타인의 정신, 타인의 영혼을 만날 때이다. 이 만남의 소중한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 '책 읽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 영혼의 만남이 일으키는 신명나는 춤판, 마음의 공동체가 벌이는 즐거운 무도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들어올리고 확장하는 사계절 축제이다. 거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삶의 품위를 지키고 삶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박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실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경쟁력, 곧 인격과 가치의 형성이라는 소득이다. 사회, 기업, 조직은 인격체이기 어려운 반면 개인은 인격체이고자 하며, 이 인격 존재는 그의 삶을 안내하고 지탱할 기본 가치와 원칙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원칙들을 부단히 만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책 읽기의 즐거움이다. 인격 존재를 지향하는 개인과 비인격적 사회 조직 사이에는 가치 충돌이 자주 발생한다.
이런 경우의 위기관리 능력도 근본적으로 인격에서 나온다. 물론 돈을 벌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돈 되는 일, 돈 버는 데 필요한 일이며 모두 오케이"라는 지침만으로 행동 원칙을 삼는 것은 아주 파괴적이다. 성적과 상장을 돈으로 거래하기도 한다는 최근의 교육 현장 실정은 몰가치적 돈지상주의가 어떻게 사회를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대면하는 최대의 딜레마는 "인간 생존의 절대 모태인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역설적 곤경으로 표현된다. 오비디우스의 신화 시집 <변신>에는 먹고 먹고 또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고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몸을 뜯어먹는 에뤼식톤이라는 걸신들린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인의 초상은 제 몸 뜯어먹고 소멸해가는 에뤼식톤의 형상과 극히 유사하다.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바로 그 풍요 때문에 더 많이 죽어가고 그 풍요 때문에 더 가난해지고 더 고통 받아야 하는 역설적 존재가 되어 있다.
몸의 건강을 위해 단련이 필요하듯이 정신 근육도 단련이 필요하다. 독서가 중요한 것은 정신의 확장과 근육 키우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단기적(이를테면 취업, 자격증, 시험 같은) 목표 때문에 관련된 책을 읽는 이른바 목적성 독서는 '사냥'과 흡사하다. 반면, 특정의 정보 사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목적성 독서는 '춤'과 같은 데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비목적성 독서의 경우에도 '마음 가꾸기'라는 목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마음 가꾸기는 단기적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보 사냥과 다르다. 정보 사냥은 목표가 달성되면 그만두어도 되는 반면, 마음 가꾸기는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사냥과 달리, 이 경우의 독서행위는 정신을 자극하고 마음을 확장하는 일, 곧 '혼의 즐거운 춤' 같은 것이다. 이 춤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 추어야 하는 춤이다.
생택쥐페리의 말처럼 인간은 장애물에 자신을 견주어보았을 때에만 자기를 발견한다.
도움을 주기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도움받는 사람들이 자구와 자립의 의지를 잃고 외부 지원에만 의존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파탄이며, 이런 파탄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 모든 종류의 지원사업에 따라붙는 어두은 그늘이다. 그 그늘 속에서는 자립과 자활의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노약자 등 절대적 지원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립, 자활, 자치의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복지사업과 지원사업이 궁극적 목표다.
사람이 산을 만나면 위대한 일이 벌어진다. - 윌리엄 블레이크
아바스 카이로스타미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
결코 기발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소재. 보통의 작가라면 애당초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 '선택의 비범성'이다. 보통의 작가와 보통 이상의 작가를 나누는 분계선은 거기 있다. 보통 이상의 작가에게 원칙상 '시시한 소재'란 없다. 보통의 작가가 무슨 기발한 소재를 찾아 헤매고 다닐 때 보통 이상의 작가는 모든 소재로부터 진지한 도전을 발견한다. 그러나 선택의 비범성만으로 보통 이상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시해 보이는 소재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소재를 가지고 결코 시시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작가이다.
작은 파편 속에 전체를 집약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의 꿈이다. 그것은 조그만 캡슐 안에 우주를 잡아넣는 일과도 같다. 짧고 범박한 단편적 에피소드 안에 성장의 큰 이야기를 담아내고 보여준다는 것은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것이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예술'이 되는 모멘트이다.
사회통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것이랄 때, 그 묶어주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지탱해주는 공유의 가치와 연결의 끈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관계나 연결의 끈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에 최고로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이거나 국민소득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이르고 3만 달러에 이르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망상이 공공정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소득 수준과 사회통합 사이에는 사실상 별 관계가 없고 소득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도 큰 관계가 없다. 소득 수준 높아지는 것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소득 수준의 높이로 사회가 통합되고 사람들도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근복적으로 '문학적'인 것은 이처럼 우리들 누구나가 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자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어디 먼 곳에 따로 있지 않고 문학인들만이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 있고 삶 그 자체이다. 요란스레 자서전을 남기고 누가 전기를 써주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 자서전의 주인공이고 자기 전기의 작자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일이며 스스로 플롯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미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책임지는 일이다. ...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방향과 목표를 주는 모든 가치 체계, 모든 믿음의 체계, 모든 행복의 지침은 근본적으로 서사적이며 서사적 이야기의 틀이다. 그 틀은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이고 삶의 목표이며 의미이다.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때로 우리는 어떤 하나의 틀 아닌 두 개, 세 개의 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게 몇 개이건 같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갈등과 모순을 조화시키며 산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산다. 사회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회도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있지 않다. 모든 사회는 몇 개의 거대한 이야기 틀을 갖고 있고 그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가 '문학적'이다.
선진사회에서도 아직 빈곤은 남아 있지만, 그것은 굶주림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그런 정도의 절대 빈곤이라기보다는 분배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빈곤이다. 상대적 결핍감도 고통의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은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에서 더 많이 초래된다.
잘 먹고 잘 살기는 하는데 그 삶이 인간의 내부에 큰 구멍을 내고 있을 때, 그리고 그 구멍을 돈으로 메울 방도가 없어 보일 때, 인간은 정신의 위기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물질적 삶의 안정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잆없이 제기될 때, 사람은 의미의 위기를 경험한다.
잘못된 것을 용인하고 불의를 허용하는 자는 불가피하게 그 불의의 공범자이다. - 마틴 루터 킹
좋은 삶이란 존 스튜어트 밀이 잘 말했듯이 "선택하는 삶"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보다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좋은 삶, 품위 있는 삶이다.
선택은 반드시 '다양성'의 가치를 전제한다. 문화 소외는 다양성을 거부하고 궁핍을 선택한다. 쏠림 현상도 다양성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궁핍의 선택이다. 다양성은 문화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쏠림 현상이건 문화적 소외이건 간에 궁핍의 선택이 강화되는 사회에서 문화는 위기 상황에 빠진다.
인간이 가진 많은 재주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다.
동물들은 식단을 바꾸지 못한다. 생태계 변화가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변화가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 얼른 적응해서 거의 자유자재로 식단을 바꾸고 먹거리 종류를 무한대로 넓혀 생존을 유지해온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문명사는 먹거리 확장의 역사다. 먹을 수 없어 보였던 것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는 인간의 화려한 조리 기술에 걸리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이 우주의 한 우연한 생명 형식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그의 운명이 전적으로 우연에 내맡겨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축구 경기가 재미있는 것은 그게 반드시 우연의 게임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연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보를 판단하는 비판적 능력,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식을 생산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힘, 기존 지식의 틀을 넘어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상상력,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지적 모험,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능력 - 이런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넘어선 곳에서 작용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사과나무에 사과 달리듯 거기 어딘가에 달려 있을 것이므로 내가 가서 따기만 하면 된다는 착각과 함께 무슨 산수 문제 풀듯 '정답 찾기'의 환상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답 찾는 훈련에 몰두하도록 훈육됩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문제, 판단과 해석과 의미를 요구하는 문제를 만나면 망연자실 기절하지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지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넓은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책은 되레 우리 시대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었고 책 읽는 행위는 우리 시대의 고유한 문화적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 문화 자산과 문화행위의 특징은 그것들이 돈이나 권력보다는 '가치의 추구 행위'를 대표하고 '의미를 만드는 행위'를 대표한다는 점입니다.
가치와 의미? 그래요. 지금은 돈이 가치의 전부를 표현하고 의미의 전부를 만드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소중한 의미는 돈으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회봉사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돈을 주면 버럭 화를 냅니다. 봉사활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이런 가치 추구가 사실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쫓아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가치를 추구하자. 그러면 행복이란 녀석이 웃으며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무가치와 무의미 상태에서는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단순한 교양 쌓기를 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 이 행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돈 적게 드는 길의 하나라는 자신감, 자기 변화와 도덕적 상승이 독서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경험 - 이런 자신감과 경험이 사회적 지혜가 되어 널러 퍼졌으면 합니다.
사회에 물질적 제도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독서는 그런 심리적 안전망 구축의 한 방법입니다. 독서를 통해 느티나무처럼 내부가 튼튼해진 사람은 웬만한 일에 허둥대지 않고 바람 앞에 우왕좌왕하지 않아요. 위기를 관리할 내공이 생겨 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죠.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모임, 도서관, 친목클럽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 친밀감, 배려, 돌봄, 소통의 기회를 증진시켜 소통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사회자본'이라 불리는 무형의 자본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도서관 운동을 하면서 도서관이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폈어요. 도소관이라는 인프라만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공동체'도 안전망이라는 뜻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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