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있는 가치의 다양성, 타자의 이해에 기반한 관용, 왜곡과 편견을 멀리하는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이런 것들이 '별들 사이에 길을 놓는다'는 표현을 만든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 -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본문발췌]

 

 

교육과 소득 수준의 관계,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 등을 열심히 연구해온 시카고 대학 경제학자 제임스 헤크먼은 인간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15세까지'로 잡는다.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배제했을 때, 한 인간의 지적, 정서적 능력이 거의 결정되는 나이가 15세 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은 '교육의 효과' 부분이다. 15세 이후에는 교육 등의 외적 개입이 개체의 기본적 능력 형성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고 그는 말한다. 15세 이후의 교육은 한 인간의 기술적 능력 개발은 돕지만 그의 근본적인 능력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 15세 까지의 연령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가 '8세까지'라는 주장이다.

 

 

인간의 성장 속도가 느린 것은 그 느린 과정에 의해서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능력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조생 밀감이 아니다. 신의 설계이건 자연선택의 결과이건 간에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는 과정은 느려야 하고 숨통 조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은 느림, 자유, 여유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속도의 포로가 된 어른들은 모든 아이들에게 어른에게나 적용될 속도계를 강요한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 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 - 괴테...

 

 

"바람과 불과 물과 땅 - 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고 이야기로의 번역이 가능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시 한 편이 응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긴 영화 한 편이 나올 수도 있다. 시의 1분은 영화의 한 시간, 산문의 두 시간이다. .... 스탠리 쿠니츠 <핼리 혜성>

 

 

종교적 관용의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개인의 불관용보다는 조직, 국가, 체제에 의한 불관용이 더 무섭과 파괴적이다. 그렇다고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분법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 - 롤랑 바르트

 

 

가치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하는 문화적 선택이며, 정의로운 사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점점 더 깊게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 타자의 이해와 존중을 가르치는 쪽.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릴 때에도 사람들이 시집 한 권, 음반 하나, 한 장의 그림에서 '행복'을 찾아내어 삶의 위기를 관리할 수 있게 하는 이상한 힘을 갖고 있다. 배고프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문화가 무슨 소용인가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도 문화는 필요하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면 그 역도 진리다. 건강한 정신이 또한 건강한 몸을 만들므로.

 

 

문학에서 본 인간은 무엇보다도 '이야기 하는 동물'이다. 그는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이야기로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과 인간의 ,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파악한다. 아니, 이야기는 그의 '세계'이다. 그는 이야기의 우주속에 태어나고 이야기로 성장하고 이야기 속에 살다가 이야기를 남기고 죽는다. 죽어서도 그는 이야기 속에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우리 속담은 말한다. '이름'은 어떤 문장 속에 들어가 주어 노릇을 할 때에만 제대로 이름이 된다. 그 문장이 '이야기'다. 이야기를 빼면 인간은 그냥 원숭이다.

 

 

인간세계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불평등을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평등 속으로 녹여내고 불평등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은 '성찰과 반성의 능력'이다. 그러나 문화의 이 역량은 위풍당당한 시장주의와 오락주의의 행진 앞에 거의 빈사지경이 되어 있다. 문화는 문화의 학살을 가리켜 '이것이 문화'라 말하고 있다.

 

 

관용의 문화 없이는 어떤 문명도 공존의 정의를 실현시킬 윤리적 토대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패권주의자들에게 차이의 존중, 사랑, 관용이라니, 얼마나 허약해 보이는 제안이가! '타자를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는 체제'로서의 '관용'

 

 

한번은 석가세존이 여행길에 강을 건널 일이 있어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근방의 도인이 하나 나타나 석존에게 도전한다. "나는 25년 수도 끝에 배 없이도 물위를 걸어 강 건너는 법을 터득했다. 당신은 25년 설법 끝에 이만한 강도 건너질 못하는가?" 석존이 껄껄 웃고 왈, 배 타고 건너면 될 것을 그까짓 강 건너는 기술 하나 터득하자고 25년 세월을 보냈다니 참 안됐소 그려. 도인은 대꾸를 못하고 달아났다.

스님의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오래된 무덤 속처럼 텅텅 빈 주머니 안의 공허를 맨손으로 만나기 위해서다. 제로를 애무하는 것은 불교적 구도의 핵심이다.

인간의 행복을 욕망의 규모와 소유의 크기로 계산해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행복 모형이라면 붓다가 제시한 것은 욕망의 축소, 단절, 무소유의 모형이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 소유의 위력이 한층 커진 것은 소유가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자유까지도 확대해준다는 산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산술로 따지면 자유는 지갑의 두께에 비례한다. 그러나 붓다적 자유의 모형은 돈지갑과 관계없고 두둑한 지갑과는 더더구나 관계없다. 지갑의 노예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니다. 소유의 즐거움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행복론 앞에서 소중하게도 정확히 그 반모형을 제시해주는 것이 붓다의 행복론이자 자유론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욕망과 소유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유한성과 일시성에서 오히려 인간존재의 품위를 발견하려는 자의 감성을 보여준다. ... 인간이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는 생각이 같지 않다. 그러나 당신의 말할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이라도 내놓을 용의가 있다" - 볼테르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나 그가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 그가 천사 앞에 내놓을 위대한 자랑거리는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그 순간성의 조건과 유한성의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순간>

 

 

기억과 사유, 상상과 표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독특한 능력들의 목록을 대표한다. 인간이 천사를 향해 자랑할 것도 그 네 가지 능력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 네 가지 능력의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수많은 구멍들을 갖고 있고 사유는 불안하다. 상상은 기억과 사유의 한계를 확장하지만 유한한 경험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도 시간성에 종속된다. 그러나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인간적 시도들은 그것들이 지닌 한계 때문에 무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들만이 가지는 순간적 아름다움의 광채를 포착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워즈워스의 "5월의 꽃", 푸시킨이 노래한 "해질녘 다리 위의 소녀와 잠자리떼", 괴테가 본 "마리앤바드의 위대한 가을 숲",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겨울 숲" - 이런 것들은 그 순간성 때문에 아름답다. ...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책 읽으라고 설계된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한 역사는 5000년, 지금 같은 형태의 종이인쇄 책의 역사는 600년에 불과하다. 자연선택이 사냥과 채집 같은, 인간종의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설계한 뇌 건축물의 부수적 파생 효과 가운데 하나가 책을 쓰고 책을 읽는 기능이다. 말하자면 그 능력은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덤'이 참으로 중요하다.

 

 

구미 각국이 리터러시 강화 정책을 펴는 데는 '잘 읽고 잘 쓰는 국민' 이야말로 다른 어떤 자원이나 능력보다도 한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힘'이라는 인식과 판단이 깔려 있다.

  • 잘 읽고 잘 쓰는 능력은 시민의 경제력 제고와 자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리터러시는 모든 분야에서의 정보 접근, 수집, 판단, 활용의 기본이며 이 기본적 능력 없이는 기회 창출, 자립, 삶의 질 향상이 불가능하다.

  • 잘 읽고 잘 쓰는 시민의 리터러시 능력 없이는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이 불가능하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가진 시민, 잘 판단하는 시민, 참여하는 시민을 요구한다.

  • 매체문화 환경이 다양해지면서 활자매체와 책 읽기로부터 이탈하는 인구가 늘고 있다. 이는 사회적 위기이다. 상상력, 비판력, 사고력의 중심 매체인 책의 힘이 약화되면 사회는 창조성 고갈의 위기를 맞는다. 정책적 대응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지구에 왜 왔는가?", 박진영은 "춤추러 왔다."고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신념 작심이 어떤 내용의 것일지 알지 못한다. 당신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할지 모르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사랑이, 더 큰 행복과 빛나는 성취가 필요할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작심 내용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 한 가지, 나는 당신의 신년 결의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그 작심이 당신의 '삶의 품위'와 '삶의 기쁨'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으면 싶다. "나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비록 부대끼며 살아도 그 삶이 지녀야 할 품위를 생각하게 하고 "춤추러 왔다'는 대답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그 삶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요청의 절실함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몸으로 추는 춤만이 춤의 모두가 아니다. 몸의 춤이 있다면 마음의 춤, 영혼의 춤도 있다. 우리에게는 몸의 춤과 마음의 춤이 모두 필요하다.

우리가 영혼의 춤을 가장 잘 출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 타인의 정신, 타인의 영혼을 만날 때이다. 이 만남의 소중한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 '책 읽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 영혼의 만남이 일으키는 신명나는 춤판, 마음의 공동체가 벌이는 즐거운 무도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들어올리고 확장하는 사계절 축제이다. 거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삶의 품위를 지키고 삶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박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실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경쟁력, 곧 인격과 가치의 형성이라는 소득이다. 사회, 기업, 조직은 인격체이기 어려운 반면 개인은 인격체이고자 하며, 이 인격 존재는 그의 삶을 안내하고 지탱할 기본 가치와 원칙들을 필요로 한다. 이런 원칙들을 부단히 만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책 읽기의 즐거움이다. 인격 존재를 지향하는 개인과 비인격적 사회 조직 사이에는 가치 충돌이 자주 발생한다.

이런 경우의 위기관리 능력도 근본적으로 인격에서 나온다. 물론 돈을 벌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돈 되는 일, 돈 버는 데 필요한 일이며 모두 오케이"라는 지침만으로 행동 원칙을 삼는 것은 아주 파괴적이다. 성적과 상장을 돈으로 거래하기도 한다는 최근의 교육 현장 실정은 몰가치적 돈지상주의가 어떻게 사회를 망가뜨리는지 잘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대면하는 최대의 딜레마는 "인간 생존의 절대 모태인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고서는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역설적 곤경으로 표현된다. 오비디우스의 신화 시집 <변신>에는 먹고 먹고 또 먹어도 허기를 채울 수 없고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 자기 몸을 뜯어먹는 에뤼식톤이라는 걸신들린 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인의 초상은 제 몸 뜯어먹고 소멸해가는 에뤼식톤의 형상과 극히 유사하다. 현대인은 고대인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바로 그 풍요 때문에 더 많이 죽어가고 그 풍요 때문에 더 가난해지고 더 고통 받아야 하는 역설적 존재가 되어 있다.

 

 

몸의 건강을 위해 단련이 필요하듯이 정신 근육도 단련이 필요하다. 독서가 중요한 것은 정신의 확장과 근육 키우기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단기적(이를테면 취업, 자격증, 시험 같은) 목표 때문에 관련된 책을 읽는 이른바 목적성 독서는 '사냥'과 흡사하다. 반면, 특정의 정보 사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목적성 독서는 '춤'과 같은 데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비목적성 독서의 경우에도 '마음 가꾸기'라는 목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마음 가꾸기는 단기적 일시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정보 사냥과 다르다. 정보 사냥은 목표가 달성되면 그만두어도 되는 반면, 마음 가꾸기는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사냥과 달리, 이 경우의 독서행위는 정신을 자극하고 마음을 확장하는 일, 곧 '혼의 즐거운  춤' 같은 것이다. 이 춤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 추어야 하는 춤이다.

 

 

생택쥐페리의 말처럼 인간은 장애물에 자신을 견주어보았을 때에만 자기를 발견한다.

 

 

도움을 주기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도움받는 사람들이 자구와 자립의 의지를 잃고 외부 지원에만 의존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파탄이며, 이런 파탄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 모든 종류의 지원사업에 따라붙는 어두은 그늘이다. 그 그늘 속에서는 자립과 자활의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노약자 등 절대적 지원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립, 자활, 자치의 능력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모든 복지사업과 지원사업이 궁극적 목표다. 

 

 

사람이 산을 만나면 위대한 일이 벌어진다. - 윌리엄 블레이크

 

 

아바스 카이로스타미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the friend's home>...

결코 기발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소재. 보통의 작가라면 애당초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 '선택의 비범성'이다. 보통의 작가와 보통 이상의 작가를 나누는 분계선은 거기 있다. 보통 이상의 작가에게 원칙상 '시시한 소재'란 없다. 보통의 작가가 무슨 기발한 소재를 찾아 헤매고 다닐 때 보통 이상의 작가는 모든 소재로부터 진지한 도전을 발견한다. 그러나 선택의 비범성만으로 보통 이상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시해 보이는 소재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소재를 가지고 결코 시시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보통 이상의 작가이다.

 

 

작은 파편 속에 전체를 집약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의 꿈이다. 그것은 조그만 캡슐 안에 우주를 잡아넣는 일과도 같다. 짧고 범박한 단편적 에피소드 안에 성장의 큰 이야기를 담아내고 보여준다는 것은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것이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예술'이 되는 모멘트이다.

 

 

사회통합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과 사람을 묶어주는 것이랄 때, 그 묶어주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며 그 관계를 지탱해주는 공유의 가치와 연결의 끈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관계나 연결의 끈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에 최고로 중요한 것은 개인소득이거나 국민소득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이르고 3만 달러에 이르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망상이 공공정책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소득 수준과 사회통합 사이에는 사실상 별 관계가 없고 소득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도 큰 관계가 없다. 소득 수준 높아지는 것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일은 절대로 아니지만 소득 수준의 높이로 사회가 통합되고 사람들도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망상도 그런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근복적으로 '문학적'인 것은 이처럼 우리들 누구나가 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자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어디 먼 곳에 따로 있지 않고 문학인들만이 문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 있고 삶 그 자체이다. 요란스레 자서전을 남기고 누가 전기를 써주지 않아도 인간은 자기 자서전의 주인공이고 자기 전기의 작자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일이며 스스로 플롯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미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책임지는 일이다. ...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방향과 목표를 주는 모든 가치 체계, 모든 믿음의 체계, 모든 행복의 지침은 근본적으로 서사적이며 서사적 이야기의 틀이다. 그 틀은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이고 삶의 목표이며 의미이다. 이렇게 살아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때로 우리는 어떤 하나의 틀 아닌 두 개, 세 개의 틀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게 몇 개이건 같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틀 속에서 갈등과 모순을 조화시키며 산다. 인간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산다. 사회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떤 사회도 이야기의 틀을 벗어나 있지 않다. 모든 사회는 몇 개의 거대한 이야기 틀을 갖고 있고 그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 전체가 '문학적'이다.

 

 

선진사회에서도 아직 빈곤은 남아 있지만, 그것은 굶주림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그런 정도의 절대 빈곤이라기보다는 분배의 편차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빈곤이다. 상대적 결핍감도 고통의 한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이 느끼는 고통은 물질적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위기, 의미의 위기, 가치의 위기에서 더 많이 초래된다.

잘 먹고 잘 살기는 하는데 그 삶이 인간의 내부에 큰 구멍을 내고 있을 때, 그리고 그 구멍을 돈으로 메울 방도가 없어 보일 때, 인간은 정신의 위기를 경험한다. 이 경험은 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물질적 삶의 안정과 풍요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잆없이 제기될 때, 사람은 의미의 위기를 경험한다.

 

 

잘못된 것을 용인하고 불의를 허용하는 자는 불가피하게 그 불의의 공범자이다. - 마틴 루터 킹

 

 

좋은 삶이란 존 스튜어트 밀이 잘 말했듯이 "선택하는 삶"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보다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좋은 삶, 품위 있는 삶이다.

 

 

선택은 반드시 '다양성'의 가치를 전제한다. 문화 소외는 다양성을 거부하고 궁핍을 선택한다. 쏠림 현상도 다양성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궁핍의 선택이다. 다양성은 문화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쏠림 현상이건 문화적 소외이건 간에 궁핍의 선택이 강화되는 사회에서 문화는 위기 상황에 빠진다.

 

 

인간이 가진 많은 재주들 중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한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울 수 있는 능력'이다.

동물들은 식단을 바꾸지 못한다. 생태계 변화가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그 변화가 그들을 절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외다. 환경이 바뀌어도 거기 얼른 적응해서 거의 자유자재로 식단을 바꾸고 먹거리 종류를 무한대로 넓혀 생존을 유지해온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문명사는 먹거리 확장의 역사다. 먹을 수 없어 보였던 것도 삶아먹고 구워먹고 튀겨먹는 인간의 화려한 조리 기술에 걸리면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둔갑한다. 

탐욕은 사회적으로 전염되는 질병이다. "남들은 다 먹는데 나는 왜 못 먹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시기, 질투, 선망의 포로가 되고 '못 먹는 자'는 불출, 무능, 도태의 존재로 강등된다. 욕망이라는 것이 빠지면 인간의 삶은 동력을 상실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망과 탐욕은 그 차원이 다르다. 사회 전체가 탐욕과 선망의 질병에 걸리면 인간은 존재의 품위와 광채를 잃고 거대한 입과 밥통으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딜레마는 우리가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세계 경제체제가 정확히 탐욕과 선망의 체제라는 점이다. 탐욕과 선망을 증폭시키지 않고서는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경제의 비극적 결함이며 그 결함의 체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 현대적 생존의 딜레마다. 우리가 이 딜레마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 시대를 어떻게 살까에 대한 지혜는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위대한 어떤 능력이 동시에 현대적 난국의 기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이 우주의 한 우연한 생명 형식일 수 있지만, 그 때문에 그의 운명이 전적으로 우연에 내맡겨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축구 경기가 재미있는 것은 그게 반드시 우연의 게임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연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보를 판단하는 비판적 능력,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식을 생산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힘, 기존 지식의 틀을 넘어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상상력,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지적 모험,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능력 - 이런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넘어선 곳에서 작용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사과나무에 사과 달리듯 거기 어딘가에 달려 있을 것이므로 내가 가서 따기만 하면 된다는 착각과 함께 무슨 산수 문제 풀듯 '정답 찾기'의 환상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답 찾는 훈련에 몰두하도록 훈육됩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문제, 판단과 해석과 의미를 요구하는 문제를 만나면 망연자실 기절하지요.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지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넓은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책은 되레 우리 시대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었고 책 읽는 행위는 우리 시대의 고유한 문화적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 문화 자산과 문화행위의 특징은 그것들이 돈이나 권력보다는 '가치의 추구 행위'를 대표하고 '의미를 만드는 행위'를 대표한다는 점입니다.

가치와 의미? 그래요. 지금은 돈이 가치의 전부를 표현하고 의미의 전부를 만드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소중한 의미는 돈으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회봉사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돈을 주면 버럭 화를 냅니다. 봉사활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이런 가치 추구가 사실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쫓아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가치를 추구하자. 그러면 행복이란 녀석이 웃으며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무가치와 무의미 상태에서는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단순한 교양 쌓기를 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 이 행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돈 적게 드는 길의 하나라는 자신감, 자기 변화와 도덕적 상승이 독서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경험 - 이런 자신감과 경험이 사회적 지혜가 되어 널러 퍼졌으면 합니다.

사회에 물질적 제도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독서는 그런 심리적 안전망 구축의 한 방법입니다. 독서를 통해 느티나무처럼 내부가 튼튼해진 사람은 웬만한 일에 허둥대지 않고 바람 앞에 우왕좌왕하지 않아요. 위기를 관리할 내공이 생겨 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죠.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모임, 도서관, 친목클럽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 친밀감, 배려, 돌봄, 소통의 기회를 증진시켜 소통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사회자본'이라 불리는 무형의 자본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도서관 운동을 하면서 도서관이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폈어요. 도소관이라는 인프라만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공동체'도 안전망이라는 뜻이지요.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47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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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코로나19와 재택,

진보진영의 압도적 총선 승리 가운데에도 후퇴하는 정치,
조직과 자기 이익만 앞세우며 제역할을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검찰과 언론의 볼썽 사나움.

롤러코스트 주식시장, 

친구와 외할머니의 죽음.

그래도 계속되는 일상, 계획과는 빗나가고 게으름으로 이루지 못한 것들도 많았지만 나름의 2020년을 되돌아 보며 새로운 2021년을 기다려본다.

 

 

Jan. 

1월 중순 마닐라 근처 화산폭발 소식을 들었을 때, 화산 때문에 돈솔 다이빙 투어가 영향을 받을까? 걱정했드랬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암흑기가 다가올 것이라 상상도 못한 한해의 시작. 화를 참지 못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내가 하는 일,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에 남탓하지 말고 시비를 가리느라 힘쓰지 않고 물 흘러가듯 세상 살아가는 지혜와 행동이 아쉬운 2020년의 시작.

 

"옳다는 강한 확신이 있다면 자신의 의견을 굳이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도 없다. 아니, 상대와 싸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도 '자신감'이 없고 진심으로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상대를 납득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즉 타인의 납득하는 표정을 보고, 찬성하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뇌에 주변 사람들이 찬성했다는 정보를 입력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논쟁 혹은 말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숨기기 위해 자극적인 말이나 논리적으로 보일 법한 말을 사용하거나, 큰소리로 말하거나, 손동작을 크게 하는 등 상대를 납득시키려 노력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해 상대를 불쾌하게 만든다." - 코에케 류노스케, <생각버리기 연습2> 중에서

 

 

 

Feb.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의 기쁨에서 코로나19로 평생 처음 재택근무를 경험하다.

 

"여기에 있는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싶다. 내가 당신 종을 분류하려고 했을 때 그것 을 알게 되었다.

당신들은 사실은 포유류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 행성 위의 모든 포유류는 그 주변 환경과 본능적으로 자연적 평형을 발전시키지만, 당신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한 지역으로 가서, 거기서 증식하고 또 증식하여 모든 자연 자원들을 소비한다.

당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지역으로 퍼지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똑같은 패턴을 따르는 또 다른 유기체가 있다. 바이러스다.

인간들은 질병이고, 지구의 암이다.

당신들은 전염병이며 우리는 치료제이다." - 영화 <매트릭스>, Agent Smith

 

 

 

Mar. 

코로나19로 돈솔 다이빙 투어는 취소, 항공권과 리조트 환불로 바쁘게 3월을 시작했다. 긴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사려고 기다리는 마스크 배급제를 경험하고, 한달을 통째로 재택으로 보내며 <트래블러>에 펼쳐진 파타고니아의 자연과 <고립낙원>에 소개된 자연인들의 삶을 보며 위로를 받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어떤 것에도 스스로 소유당하지 말며, 자신의 삶을 살되 삶에 휘둘리지 말라. ...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 -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2012년 어느 날, 오스트레일리아 작은 동내에서  말기암 환자들을 돌보았던 브로니 웨어라는 간호사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환자들에 한가지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들이 무언이가요?"

그리고 대부분의 환자들이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을 공통적으로 5가지를 답변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생에 마지막 순간을 바로 눈 앞에 앞두고 있다면 지금 무엇이 가장 후회되는가?

 

1.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

우리는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을 한다. 내가 스스로 하는 선택이던 누군가에 의한 선택이던 그 선택에 따라 우리에 길, 직업, 삶이 만들어져 간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길과 방향이 있지만 부모님이나 주변 시선에 의해 그 방향을 다시 돌리곤 한다. 그 방향이 옳다고 혹은 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따라 목적과 의미없이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흥하려고 하는 삶을 죽기전에 돌아봤을 때 그 것이 진정 내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기 전 가장 후회되는 하나, 내가 원하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대한 삶을 살아왔던 나. 지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지 찾아보는 건 어떨까?

 

2.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

평균 노동시간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 뼈때리는 말이다.

열심히 일해야 차사고 결혼하고 집살 수 있는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랬동안 만들어진 틀이고 일에 매여 살지말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생은 일만 하고 살기에 너무 짧고 불행하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건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남편, 아내로서, 친구로서 또 내 삶을 위해서 조금 더 벌기 위한 일은 잠시 내려놓는 것은 어떨까?

 

3. 내 감정에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

감정이 없다면 시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수 많은 관계속에서 여러가지 감정을 감추고 보이고 나눠가며 살아간다. 실제로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분출하는 것 보단 잘 감추고 넘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분명히 꼭 표현하고 싶은 감정은 누가나 한번씩 살면서 느낄 것이다. 누군가에 상처가 되고 피해가 될까봐 감췄던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거절당할까봐 혹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감췄던 감정, 용기가 부족해서 말하지 못했던 내 진심이 담긴 감정들...

그 시간이 지나고 흐르면 분명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가 될 것같다. 오늘 당장 용기를 내어 하지못했던 솔직한 말을 용기있게 말해보자.

 

4. 옛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것

죽기전에 가장 보고싶은 사람은 평소에 연락하고 지냈던 지인들이 아닌 한번쯤은 용기내어 연락해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친구들이리고 한다. 남들이 원하는 삶을 바쁘게 살아가느라... 어쩌다 보니 죽을 날이 다 왔는데... 그렇게 평소에 잘 지내고는 있나, 한 번 연락해봐야지 했었는데 못해봤던 옛 친구들이 떠오를 때, 그 순간만큼 너무 늦었구나 하며 후회 될 일도 없을 것같다.

내 소중한 순간을 함께했던 옛 친구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볼수 있는 시간 단 5분이면 충분하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5. 변화를 두려워해 즐겁게 살지 못한 것

누구나 변화를 두려워 한다.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처음 어른이 되었다고 느껴졌을 때, 처음 사회인이 되어 혼자 힘으로 해야할 때가 되었을때,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다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 모든 변화는 설레임보다 큰 두려움이 늘 항상 따라온다.

변화는 게 두려워 멈춰있었다면 분명 내 삶이 다 끝나갈 때 쯤 한없이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눈을 감고 돌아봤을 때 실패했던 일을 바라보며 후회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할 수 있었는데.. 조금만 용기를 갖고 했으면 도전해 볼 수 있었는데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한다고 한다. 변화를 두려워 하기엔 역시 인생은 짧다.

 

 

 

Apr. 

코로나19의 가운데에서도 봄은 벚꽃, 개나리, 조팝꽃무리와 함게 왔다.

몇 년간 암투병 중이던 동기의 죽음 가운데 죽음도 인생의 일부임을 생각한다.

진보진영의 앞도적 총선 승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고 태클만 거는 정치인, 법을 권력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 휘두르는 검찰, 조회수에 바른 주장을 펴고 사실을 그대로 전해야 할 정론직필의 역할을 망각한 언론 개혁의 시작이길 바란다.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May. 

신록이 피어나는 5월이지만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상황 가운데 시간만 보낸다.

 

"그러니 마음속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품지 마십시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저 혼자만 현명하다고,

혹은 자신이 다른 누구도 갖지 않은 혀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열어 보면 빈껍데기로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현명한 사람이라 해도, 많이 배우려 하고

자기를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선 겨울철 격류에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몸을 굽혀 가지들을 구하는지 보시지요.

반면에 저항하는 것들은 뿌리째 뽑히고 맙니다.

또 마찬가지로 배의 돛 아래 줄을 계속 당기며

바람에 전혀 굴복치 않는 사람은 결국 배가

뒤집혀, 남은 여정을 뒤집힌 의자에 앉아 항해하게 되지요.

그러니 노기를 그치고 태도를 바꾸십시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젊은 제게도 어떤 지혜가 있다면,

사람이 나면서부터 지식으로 가득한 게

단연코 으뜸이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실 그렇기는 어려우니까요.

좋은 충고를 하는 이에게서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 <안티고네> 중 하이몬의 대사

 

 

 

Jun. 

잠깐 다시 시작 재택, 팀워크는 사라지고 모든 게 개인중심으로 변하는 회사생활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에 아쉬움만 더하는 가운데 가끔씩 옛 친구, 동료와 퇴근 후 술 한잔에 마음을 녹인다.

 

"고독은 차가운 정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며,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일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지혜의 안목은 거리두기에서 옵니다. 사람과 사건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더 뚜렷하게 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는 고독감을 느끼며 어른이 되어갑니다. 개인은 고독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고독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최우선 조건입니다. 자유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되는데,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혁명과 반동, 진보와 보수, 정치적 올바름과 그릇됨이라는 이분법적 틀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선택을 해도 됩니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합니다." - 가오싱 젠, <창작에 대하여> 중 '고독의 필요성'

 

 

 

Jul. 

목포에서 공수한 홍어에 애탕맛에 흠뻑 빠지다. 더위 가운데 우동제~청림제~대항~고사포~격포... 숲과 바다로 이어지는 내/외변산 드라이브로 바닷속 그리움을 잠시 떨친다.

 

100년을 사시고 영면하신 외할머니를 추억하며 외가 식구들과 조용한 장례를 치르다. 

 

"가난한 자는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원하는 사람이다. - 세네카", 윌리엄 파워스의 <속도에서 깊이로> 중에서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 불행의 순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진실에, 즉 침묵에 익숙해진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어떤 '부름'을 들을 때가 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내적 신호가 북소리처럼 울리면, 인생에 있어 전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삶의 전환기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설렘과 두려움을 모두 느낀다. 그렇기에 이들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을 통해 이제 그들이 곧 마주할 새로운 삶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안전한 정착을 위한 리허설을 갖는 셈이다. 만일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여행을 몹시 갈망하고 있다면, 이는 어쩌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 문요한, <여행하는 인간>

 

 

 

Aug. 

더위 가운데에도 8.15 집회로 다시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 확산! 다시 시작한 재택.

이 집에서 14년을 지내며, 가전이나 가구를 크게 바꾸지 않고 살았다. 세월이 변하니 같이 시작했던 가전기기가 하나씩 고장으로 제 수명을 다하고, 형광등 안정기가 나가 새로 LED 등도 직접 교체해본다. 대대적인 수리나 이사가 필요한 기로에 섰다.

 

'프루스트는 "예술 덕분에 우리는 단 하나만의 세계, 즉 우리 세계만을 보는 대신, 그 세계가 스스로 증식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임의에게 맡겨진 만큼의 많은 세계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다양한 세상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예술가를 품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류는 평화를 맞을 수 없다.' -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커피는 복잡하다. 콩의 종류에 따라, 볶는 시간에 따라, 볶는 방법에 따라, 콩을 분쇄하는 방법에 따라, 물의 종류에 따라, 물의 온도에 따라, 불의 세기에 따라, 날씨에 따라, 장소에 따라, 커피른 내리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그의 마음에 따라, 함께 마시는 사람에 따라, 함께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의 기분에 따라, 커피 맛은 달라진다. 그러니까, 커피 맛은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같은 맛의 커피는 결코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 - 최갑수, <당신에게, 여행>

 

 

 

Sep. 

장마가 그치니 태풍이 연달아 한반도를 스쳐간다. 비바람 지나고 잠시 산책 다녀오니 수락산, 불암산 가운데 무지개가 걸렸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음식 재료를 사다가, 또는 택배로 시켜서 만들어 먹는 재미도 늘어난다.

 

"뉴스란 게 그런거잖아. 뭐가 진짜고 가짠지 가려내는거 그거 우리일 아니야. 보는 사람들 일이지. 그들이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실인거야." -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

 

"청춘이라는 단어를 생물학적 나이의 어느 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무모함의 함량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시기가 나의 청춘이었다." - 최갑수,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Oct. 

집에 있는 시간 술도 같이 는다. 반주로, 비가와서, 기분이 우울해서, 마음이 들떠서 이유란 이유는 끌어다가 술만 는다.

선운사 꽃무릇, 축령산 치유의 숲 산책으로 나무가 내주는 기운과 바람 가운데 몸과 마음을 씻어본다.

 

"나는 절제, 품질, 단순함과 같은 단어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이라면 다 좋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과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려는 미미한 시도들을 통해 나는 보다 단순하게 살아야, 혹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해야 정말 중요한 모든 면에서 빈곤하고 결핍된 삶이 아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이본 쉬나드,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물건은 더 많아졌지만 우리를 행복하게하는 해주는 것들을 위한 시간은 줄었어요. 친구. 가족, 여가 시간 같은 것이죠. - story of stuff

 

 

 

Nov. 

김장배추 자라는 사이 캐다가 달달한 배추전에 막걸리! 다 자란 배추, 무 수확해서 절이고 씻고, 18가지 양념속과 정성을 더해 버무린 3일간의 김장여정 마무리!

 

가을 다가기 전 선운사 단풍, 문수사 애기단풍 구경!

 

"진화는 진보가 아니며 다양성의 증가일 뿐." - 스티븐 제이 굴드, <풀하우스>

 

"감정에는 저마다의 목적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선택에는 나를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다. 당신이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실수에 관대한 사람이 될 때 더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이 세상을 더 현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 게리 D. 맥케이, 돈 딩크마이어, <아들러의 감정수업>

 

 

 

Dec. 

겨울에 들어서며 1000명대 확진자가 속출하는 코로나19 대유행기가 다시 시작이다. 다시 길어지는 재택 가운데, 정치권의 싸움은 여전한 가운데 무소불위 검찰의 폭주를 통제하지 못하는 검찰총장 징계 정지 법원결정과 뒷맛이 개운치 않은 정경심 교수의 1심판결! 코로나19 만큼 우울한 사회, 정치 상황이다.

2020년 마지막 주간 공수처의 발족과 코로나19 치료제 소식으로 2021년의 희망을 기대해 본다.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지만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성을 보이고 있다. 특정 영역 내의 생물에 대해 자연이 행사하는 내재적 견제와 균형 체계를 흐트러뜨리려 애쓰는 것이다.

인간은 생물체 중에서 유독 혼자만 암 유발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 불행히도 이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자연은 결코 인간이 만든 틀에 순응하지 않는다. 자연의 균형이란 유동적이고 계속 변화하며 조절과 조정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 역시 자연이 이루는 균형의 일부분이다. 가끔씩 인간이 이런 상태를 자의적으로 바꾸곤 한다. 그 결과 인간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문제가 일어난다.

살충제의 수와 다양성, 그 파괴성이 매년 실질적으로 증가하면서 환경 저항은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을 옮기고 농작물을 해치는 곤충의 개체수는 유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증가했다.

우리의 목적은 폭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주의 깊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한다면 자연은 자신의 방식에따라 견제와 균형이라는 복잡하고 훌륭한 시스템을 가동시켜 삼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 레이첼 칼슨, <침묵의 봄>

 

많은 어제와

많은 내일이 있다.

그러나

많은 오늘은

없다.

- 마리오 베네데티 <오늘> (류시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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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지속하기 위해 쉼표만한 특효약도 없다.

기계는 정지하면 역할을 다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잠깐의 쉼표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멈춤으로 늦어질 것 같지만, 멈춰서 있는 동안 재정비하고 주변과 상황을 둘러보며 지름길을 찾아 원하는 목적지에 더 빨리 갈지도 모른다.

 

 

[본문발췌]

 

 

모든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인생과 삶의 목표가 있고 깨달음의 계기는 누구나 다르다.

 

 

여행하는 것처럼 산다.

 

 

2년은 긴 시간 같지만 막상 지나고 나면 인생에 찍힌 점 하나일 뿐이야. 잠시 쉰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 돈은 다시 모으면 되지만 시간은 돌릴 수 없으니까.

 

 

나이와 국적, 하는 일과 사는 곳이 모두 달라도 여행길에서는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길에서는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을 모두 내려놓고 온전히 사람대 사람으로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행'이라는 주제가 있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하루를 함께 보내기까지 하는데 친해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는 것도 똑같지.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잖아.

가만히 생각해보면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리의 삶도 여행과 다를 것이 없다. 옆집 친구의 이사, 연인과의 헤어짐, 퇴사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내 삶과의 이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여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시작과 만남이 중요한 것처럼 끝과 이별 역시 중요한 것인데....

 

 

매일매일 뭔가를 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 이렇게 쉬어줄 필요가 있어. 사람은 기계가 아니잖아? 일을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인생을 살아갈 때도, 쉼표는 꼭 필요한 거지. 인생의 쉼표...

 

 

부족함이 너희를 힘들게 하겠지만, 그 부족함이 있어서 너희가 작은 것에도 더 감사하고 만족하게 되는 거야...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원히 우리는 돈이라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는 이 여행과 우리의 삶에 더 감사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쿠나 마타타... 다 잘 될거야, 걱정할 것 없어...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연금술사>

 

 

주변을 모두 가린 채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으니까. 이 긴 여행을 시작한 이유가 나와 우리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는데, 어느새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왜 스페인 생활을 꿈꾸었던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문화를 경험하기 위함이었지, 어학 시험을 위해서는 분명 아니었다. 하루빨리 눈에 보이는 성과를 손에 쥐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있었다.

 

 

똑같이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생각이 많이 달라질 거야. 지금 우리가 그렇거든. 사실 난 이제껏 일과 돈이 1순위인 인생을 살았어. 그런데 쉬는 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새로운 신념이 생겼다고 할까?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앞으로 뭔간를 선택할 때는 되도록 우리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어. 그게 잘 사는 거고, 행복한 거니까.

 

 

남겨진 사진 한 장보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기까지의 과정이 진짜 여행이 아닐까... 여행의 수많은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 안에 담아주는 곳, 이상하게 지나온 여행길을 되돌아보게 하는 곳, 그래서 유난히 눈물을 훔치는 여행자들이 많은 곳, 마추픽추는 그런 곳이었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는 길, 허벅지는 묵직해졌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홀쭉해진 우리의 배낭만큼. 항상 가볍게 살아야 겠다. 물건이든 생각이든 욕심이든. 무엇이든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고민이 많아질 것이고, 고민이 많아지면 마음의 여유를 잃어갈 것이며, 결국 우리 삶이 힘들어질테니까. 부족한 듯 조금만,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그렇게 살아야겠다. 아! 그 대신꿈은 크게 꿔야겠지. 그래야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왜 떠나야 했나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종종 우리에게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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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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