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생에서 자주 두 갈래 길에 마주선다. 미래에 펼쳐질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 상상력이 그려낸 두려움이 선택을 어렵게한다.
[본문발췌]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판단은 삼가라... (플로니어스)
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자물쇠를 잠갔으니, 열쇠는 오빠가 맡으세요. (오필리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참아내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고통의 물결을 두 손으로 막아 이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가? 죽는 건 잠드는 것, 그뿐이다. 잠들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마음의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그렇다면 죽고 잠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열렬히 찾아야 할 삶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잠들면 꿈도 꾸겠지. 아, 여기서 걸리는 구나. .... 죽은 뒤의 그 어떤 두려움과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결심을 무디게 하고, 그래서 미지의 저승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참게 만드는 것인가? (제 3막 제1장 중)
중용을 지켜서 연기에 대사를, 대사에 연기를 일치시켜야 해. 특히 자연의 절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무엇이고 지나치면 연극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법이니.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을 거울에 비추어 선은 선한 모습으로, 악은 악한 모양으로 반영해서 그 시대의 양상을 본질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니까. (제 3막 제2장 중)
습관은 악습에 대한 인간의 모든 감각을 먹어 삼키지만 천사의 역할도 합니다. 항상 좋은 행동을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어색한 옷 같지만 어느새 몸에 꼭 어울리게 만들어 줍니다. (제3막 제4장 중)
대개 민중이란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눈으로 보아서 좋고 옳고 그름을 결정해서, 범죄자가 받는 형벌만 문제를 삼고 범죄 그 자체는 생각지 않거든. (제4막 제3장 중 클로디어스 왕)
우리는 우리가 살찌자고 다른 동물들을 살찌우고, 우리가 살찌는 것은 구더기를 살찌우기 위한 것입니다. 살찐 임금이나 여윈 거지나 맛은 다르지만 한 식탁에 오르는 두 쟁반의 요리지요. 그뿐입니다.
왕을 뜯어먹은 구더기를 미끼로 고기를 낚고, 구더기를 먹은 그 고기를 사람이 먹을 수도 있습니다.
왕이라도 거지 뱃속으로 행차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제4막 제3장)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행위와 한평생의 삶이 단지 자고 먹는 것뿐이라면? 그렇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신이 우리 인간에게 이렇듯 위대한 사유의 힘을 주시고 앞뒤를 살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은, 그 능력과 신 같은 이성을 쓰지 않고 곰팡이가 피도록 내버려두가로 하신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짐승처럼 잘 잊어버리기 때문인가, 아니면 일의 결과를 너무 세밀하게 생각하는 좁은 마음의 망설임 탓인가. (제4막 제4장)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신의 특별한 섭리야. 지금 오면 나중에 오지 않고, 나중에 오지 않으면 지금 오네. 올 것은 지금 안 와도 나중에 오고야 마는 거야. 요는 각오야. 언제 버려야 좋은지. 그 시기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목숨이 아닌가?
타인의 고통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정한 목격자의 한 사람으로 타인의 고통을 알리고 예방하고 치유하는데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 권력과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소설쓰듯 이야기를 지어내 일반 대중을 왜곡과 편향으로 이끄는 일부 기자들과 책임과 윤리라곤 나몰라라 하는 일부 언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본문발췌]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오늘날의)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실에서도 전쟁을 구경할 수 있게 됐다.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 이른바 '뉴스'는 비참한 모습을 시청자들의 눈에 내던져 동정심이나 격분, 그도 아니면 찬성 같은 반응을 자아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쟁과 폭력을 대서 특필하기 마련이다.(헤드라인뉴스의 케케묵기 그지없는 지침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피가 흐르면 앞쪽에 실어라") 전쟁이라는 재앙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쟁점이 되어 왔다.
포토저널리즘 작가들의 사명. 전쟁의 시기에서든 평화의 시기에서든, 광신적 애국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난 채 공정한 목격자의 한 명으로서 자신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기록할 것.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에 손장난을 치는 일은 디지털사진과 포토샵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사진이 부정확할 가능성도 늘 존재해 왔다. 회화나 데생은 그것을 제작했다고 알려진 예술가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그러나 사진(아니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영상기록)은 그것이 묘사하려고 했다는 장면을 둘러싸고 뭔가 관람객을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위조품이라고 판명된다.
시간이 지남에따라, 연출됐던 그토록 많은 사진들이 그 순수하지 못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전쟁이 점점 더 적을 추적하는 정밀한 광학 장치들로 수행되는 행위가 되어갈수록, 전선에서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카메라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도 점점 더 엄격해졌다. 사진 없는 전쟁, 즉 1930년 에른스트 윙거가 관찰했듯이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윙거는 이렇게 썼다. "위대한 역사적 사건을 매우 꼼꼼히 보존하려는 행위와 자신이 지닌 무기로 적들의 위치를 정확히 몇 초, 몇 미터 단위까지 추적해 그들을 섬멸하는 행위는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수행된다."
미국이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무수한 적들에 맞서 원격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이 시대에는, 대중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책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텔레비전 뉴스 생산자들과 신문, 잡지의 사진 편집자들은 매일같이 주저하면서도 대중들이 알아야 할 범위를 놓고 의견의 일치를 봐야 한다. 때때로 그들의 결정 사항은 '훌륭한 감식력,' 즉 특정 기관이 앞장서 주장할 때에는 흔히 억압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기준에 대한 판단이 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국가론> 제4권의 한 구절, 플라톤은 이 구절에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욕망이 이성을 압도하게 되는 경위, 그래서 자아가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 욕망에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경위를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설명했는지 보여준다. 플라톤은 심적 기능(영혼)이 이성, 노여움이나 격정, 욕구나 욕망,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움직인다는 이론을 개진했다. 이 이론은 초자아, 에고, 이드로 구성된 프로이트의 도식을 예견케 해준다.(차이점이 있다면, 플라톤은 이성을 맨 윗자리에 올려놨고, 의분으로 대변되는 양심을 한가운데에 놓았다는 점이다).
에드먼드 버크... "내 확신에 따르면 사람들은 현실의 불행과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얼마간, 그것도 적지 않은 즐거움을 느낀다"
윌리엄 해즐릿... "우리는 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화재 사건이나 충격적인 살인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를 늘 읽곤 하는가? ... '불행에 대한 사랑,'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의 관점... 고통을 희생에, 희생을 정신적 고양에 결부시킨다. 따라서 고통을 뭔가 잘못된 것이라거나 불의의 사건, 혹은 일종의 범죄로 여기는 감수성, 즉 고통을 고쳐야 할 무엇, 거부해야 할 무엇,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으로 여기는 현대의 감수성에는 낯설기 그지없는 관점이다.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 하다. ...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이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사진으로 찍혀 보여진 바가 전혀 없는 사건보다는 사진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사건이 훨씬 더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사진에 찍힌 사건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결국 점점 덜 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 <사진에 관하여>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극을 받게 되면 "정신적 분별력이 무뎌질" 뿐만 아니라 "정신이 미개하다고 할 만큼 무감각해지는 상태에 빠지는" 결과가 빚어진다.
'매일, 매달, 혹은 매년 신문지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가장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소식이 실리지 않을 때가 없다. .... 처음 줄부터 끝줄까지, 모든 신문들은 공포에 질릴 만한 소식투성이이다. 군주들, 국가들, 사적 개인들이 저지른 온갖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온 세상에 판치는 잔악 행위 등등. 문명화된 인간은 매일 이 메스꺼운 전채로 아침식사의 식욕을 돋운다.' - 보들레르 (1860년대 초 자신의 일기)
<사진에 관하여>에 제시된 견해, 그러니까 상스럽고 소름이 돋을만한 이미지가 무차별로 확산된다면 윤리를 지켜나가며 생생한 감수성으로 각각의 경험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견해는, 이런 이미지의 확산을 보수적으로 비판한 견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잠깐의 편리, 편익을 위해 지속가능한 삶의 원천인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도시의 뒷골목, 지하에 쌓이는 유독물질과 쓰레기, 농약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잃어가는 토지, 항생제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집단사육장! 휴식을 위해 찾아가는 휴양지도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오로지 해결책은 작고 단순하며 자연 친화적인 삶!
[본문발췌]
해충방제는 필수불가결하고 바람직하지만 동시에 생태계와 관련된 것이기에 그저 화학자들의 손에 맡길 수만은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윤 추구를 주목적으로 하는 화학적 방제는 기술적, 양적 접근법이다. 이와 달리 생태학적인 접근은 자연의 세력 균형, 다수의 경쟁적 요소 혹은 상충하는 이익 간의 적절한 통합을 중시한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생태학은 그저 단순히 양적 혹은 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생태학은 전체적인 상황을 다루며 양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질적인 관점에서 동등하게 중시하는 분야이다. 현재와 미래, 즉각적이고 부분적인 이익과 인류 전체의 지속적인 이익 사이에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학은 자원의 최적 이용뿐 아니라 최적 보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원의 범주에 식량이나 광물 등 물질적 자원뿐 아니라 아름다운 경치, 고즈넉함, 미적 가치, 흥미 등 향유할 수 있는 무형 자원들을 포함시켜야 하며 식량 생산을 통한 이익 창출과 더불어 인간의 건강증진, 획기적 보존, 레크리에이션 창출 같은 다른 이익들과도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줄리안 헉슬리, <서문> 중
예전에는 그렇게도 멋진 풍경을 자랑하던 길가는 마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듯, 시들어 가는 갈색 이파리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생물이란 생물은 모두 떠나버린 듯 너무나도 고요했다. 시냇물마저 생명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물고기들이 다 사라져버렸기에 찾아오는 낚시꾼들도 없었다.
불길한 망령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찾아오며 상상만 하던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적나라한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의 수많은 마을에서 활기 넘치는 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지구 생명의 역사는 생명체와 그 환경의 상호작용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 지구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물리적 형태와 특성은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지구 탄생 이후 전체적인 시간을 고려할 때 그 반대 영향, 즉 생물들이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20세기에 들어서 오직 단 하나의 생물종(種), 즉 인간만이 자신이 속한 세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위력을 획득했다.
지난 25년간 이 위력은 불안감을 심어줄 정도로 크게 증가했을 뿐 아니라 그 본질에도 변화가 생겼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공격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위험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유독물질로 공기와 토양과 하천과 바다를 오염시킨 일이었다.이런 피해를 입은 자연은 원상태로 회복이 불가능한데, 그 오염으로 인한 해악은 생명체를 유지하는 외부세계뿐 아니라 생물들의 세포와 조직들에도 스며들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재난을 불러온다. 보편적인 환경 오염에 있어 화학물질은 세상의 근원 - 생명의 본질마저도 - 을 변화시키는 방사능의 사악하고 비밀스러운 동반자 역할을 한다.
원시적 농업 시대에 곤충은 농부들에게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되고 대규모 농지에 단일 작물 재배를 선호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특정 곤충 개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단일 작물 경작은 자연의 기본적 원칙이라기보다는 기술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지만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성을 보이고 있다. 특정 영역 내의 생물에 대해 자연이 행사하는 내재적 견제와 균형 체계를 흐트러뜨리려 애쓰는 것이다. 자연의 견제로 각각의 생물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넓이의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일 작물을 경작할 경우(예를 들어 밀과 다른 작물을 섞어 키우는 대신 밀만 재배하는 경우)에는 다른 작물 때문에 널리 퍼져나갈 수 없던 해충이 급증하게 마련이다.
새로운 합성살충제의 특징은 놀라운 생물학적 잠재력에 있다. 이 살충제들은 단지 독성을 지니는 것만이 아니라 생물들의 몸 속에 침투해 가장 사악하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변화시킨다. 이런 살충제는 유해물질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주는 효소를 파괴하고 에너지를 얻는 산화과정을 방해하며 각종 기관의 정상적인 기능을 억제해 불치병을 일으키는 등 점진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유도한다.
우리는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토양은 서로 연결된 생물들로 촘촘하게 짜여진 거미줄과도 같다. 생물은 토양에 의지해 살며, 토양 역시 공동체를 구성한 생물들이 번성할 때에만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물과 토양, 그리고 지구의 녹색 외투라 할 수 있는 식물들로 인해 지상에서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다. 현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 우리의 식량을 만들어주는 식물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물에 대해 우리는 정말로 편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각적인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식물을 잘 키우고 보살핀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별로 바람직하지 않거나 관심 없는 거라면 즉시 이 식물을 없애버린다. 인간이나 가축에게 해를 끼치는 식물뿐 아니라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식물이라고 해도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다면 바로 제거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원치 않는 식물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식물도 있다.
식물과 대지, 식물과 식물, 식물과 동물 사이에는 절대 끊을 수 없는 친밀하고 필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식물 역시 생명계를 구성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부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관계를 교란시키는 선택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한참 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려 깊게 생각해야 한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에는 그 주변 역사와 풍토를 고려해야만 한다. 자연 식생은 그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들이 벌이는 상호작용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경관을 갖추게 되었는지, 왜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잡초와 토양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우리의 편협한 시각에서도 이 관계는 왠지 유용한 듯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토양과 그 속 혹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 사이에는 상호의존적이고 상호이익을 주는 관계가 존재한다. 추측컨대 잡초는 토양으로부터 무언가를 취하고 대신 토양에 무언가 도움을 줄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식물을 방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특정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을 이용하는 것이다. 목초지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이런 가능성은 상당히 무시되었다. 곤충들은 자신이 원하는 식물만 먹이로 삼는데 그런 제한적인 식성을 잘 이용한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살충제는 대부분 비선택적이다. 없애려는 특정한 종만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독성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살충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살충제와 접촉하는 모든 생물,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고양이, 농부가 키우는 가축, 들판에서 뛰노는 토끼, 하늘 높이 날아가는 종달새가 모두 위험에 빠진다. 이런 동물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사실 동물과 그 주변 환경의 존재로 인해 인간의 삶이 더욱 즐거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그 보답으로 갑작스럽고 무시무시한 죽음을 선사한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곤충의 최대 적은 다른 육식성 곤충들, 조류, 작은 포유류 등이지만 DDT는 자연이 내려준 이런 천적들과 아름다운 경치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 우리는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잠깐 편안함을 누릴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벌레를 없애지도 못하면서 사악한 해충방제의 희생물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해충의 천적들이 농약 때문에 사라진다면, 새로운 해충이 등장해 느릅나무뿐 아니라 다른 나무들을 공격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통제할 것인가?
동식물 집단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열쇠는 영국의 생태학자인 찰스 엘턴이 말한 '종 다양성 유지'에 있다.
삼림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물고기를 살리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 모든 강이 죽음의 강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포자기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대안들을 보다 폭 넓게 활용해야 하며 지식과 자원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대안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가문비나무 벌레 억제에 있어서는 기생충을 활용하는 방법이 살충제보다 효과적이었다는 사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자연적 통제를 최대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독성이 약한 살충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삼림 생물 전체에는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해충만 없애는 미생물을 활용하는 편이 낫다. 구체적으로 그런 대안은 무엇이며 그런 방식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차후에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해충을 없애는 데 있어 화학약품 살포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며 또한 최선의 방법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만, 하구, 강어귀, 연안 습지들은 매우 중요한 생태학적 지형이다. 이런 곳은 어류 연체동물, 갑각류들의 생존과 너무도 밀접하게, 그리고 불가결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만약 여기서 생물이 살 수 없게 되면 이내 우리 식탁에서 바다식량들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농지와 숲을 대상으로 시작된 화학물질의 공중살포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고, 그 양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이제는 어느 영국 생태학자의 말처럼 '놀라운 죽음의 비'가 지구 표면에 내리고 있다. 또한 독극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미묘하게 변화했다. 한때 독극물은 해골과 엇갈린 뼈가 그려진 용기에 담겨 있었고, '부득이한 사용시에는 극도로 주의해야 하며 사용 목적 이외의 다른 대상에는 절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함께 표기되곤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새로운 유기 살충제가 개발되고 비행기들이 남아돌자, 이런 경고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현재 사용되는 독극물들은 예전 그 어떤 것들보다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공중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구제 목표인 곤충이나 식물만이 아니라 화학약품이 뿌려진 지역에 사는 인간마저도 예기치 못한 재앙처럼 독극물과 접촉하게 된다. 숲과 경작만이 아니라 마을과 도시에도 유독물질이 살포되고 있는 것이다.
'잔류 허용량 기준치' 제정은 결국 농부와 가공업자들에게 생산비용 절감이라는 혜택을 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 독성 화학물질 사용을 허락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시민들이 섭취하는 화학물질이 위험 수준이 아님을 확신시켜주는 정책기관을 만들고는 그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하려는 수단이기도 하다 최근 사용되는 농약의 양과 독성 정도를 고려할 때, 이런 임무를 수행하자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데 의회의 국회의원들 중 그런 비용 지출을 승인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없다. 결국 운이 지독히도 없는 시민들은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잘못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세금으로 부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가장 필요한 것은 염화탄화수소계 화학물질, 유기인산계, 기타 다른 독성 화학물질에 대한 잔류 허용량을 폐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농부들에게 부담이 심하다며 반대하는 사람도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과일과 채소에 있어 7ppm(DDT 허용량), 1ppm(파라티온), 혹은 0.1ppm(디엘드린)이라는 허용치를 제정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아예 화학물질이 전혀 검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몇몇 농작물의 경우에는 헵타클로, 엔드린, 디엘드린의 검출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든 농작물을 대상으로 이렇게 화학물질 검출을 금지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덜 위험한 농약을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비화학적인 방법을 개발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정 곤충에게 병을 유발하는 박테리아를 응용하는 방법은 이미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이런 연구가 좀더 활발해져야 한다. 농작물에 해로운 잔류물을 남기지 않는 해충방제법도 연구되고 있다. 이런 해결책이 대규모로 시도될 때까지 우리는 현재 상황에 대해 그저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로마 시대의 보르자 가의 초대를 받은 손님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보르자 가에서는 손님을 초대해놓고 독살해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화학물질이 우리 환경을 삼켜버리면서 전혀 새로운 공중보건 문제가 대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가 나라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오늘날 우리의 관심사는 곳곳에 편재하는 병원균이 아니다. 위생, 더 나은 생활환경, 새로운 약으로 인해 전염병은 비교적 잘 통제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은 근대적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인간 스스로 초래한 새로운 형태의 환경 오염이다.
병든 환경을 조성하고 질병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살충제는 어떤 역할을 할까? 살충제들이 토양과 물, 음식을 오염시키며 고기가 뛰놀지 않는 개울과 새가 없어 온통 고요하기만 한 정원과 숲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다. 인간이 아무리 안 그런 척 행동해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이 세상 곳곳에 만연된 공해로부터 과연 인간은 도망갈 수 있을까?
책임 있는 공중보건 책임자들은 화학물질의 영향은 오랜 기간 축적되며, 개인에 대한 위험은 전 생애에 걸쳐 노출된 화학물질 총량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그런 위험을 쉽게 무시하고 만다. 앞으로 재앙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확실치 않은 위협은 그저 무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질병에 대해서만 신경 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눈에 잘 띄지 않은 채 슬그머니 나타나는 병이다"라고 현명한 의사인 르네 뒤보(Rene Dubos) 박사는 말했다.
사람들은 즉각적인 일에만 관심을 보인다. 문제가 즉시 드러나지 않고 그 형태도 명확하지 않으면 그저 무시하고 그 위험을 부정해버린다. 연구자들조차 아주 미미한 증세만 가지고는 원인을 추적하기 힘들다.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병의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는 사실은 현대의학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다.
생물학자인 조지 월드(George Wald)는 눈의 시각 색소에 관한 자신의 독특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한 바 있다. "멀리 떨어진 아주 작은 창문을 통해서는 오직 한 줄기 빛만을 볼 수 있다. 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의 시야는 점점 더 넓어지고 결국 이 창을 통해 전 우주를 다 볼 수 있게 된다."
우리 몸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몸의 세포 하나, 그 다음엔 세포 속의 미세한 구조들, 그리고 마침내는 그 구조 속의 분자들로 우리 관심이 옮겨가게 된다. 우연히 우리 몸 속으로 들어온 외부의 화학물질이 미치는 심각하고 광대한 영향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의학자들은 생명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각 세포들의 기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몸의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건강유지뿐 아니라 생명유지에도 기본적으로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기관이나 기능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세포 속에서의 에너지 생산이 순조롭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몸은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곤충과 설치류, 잡초를 없애려고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이런 시스템에 직접 영향을 주어서 아름다울 정도로 정교한 신체 기능을 교란시킨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볼 때, 개개인의, 생명보다 궁극적으로 더욱 소중한 것은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유전적 형질이다. 영겁처럼 긴 시간 진화를 거쳐 만들어진 우리의 유전자는 현재의 모습을 규정할 뿐 아니라 인간의 미래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유전자는 희망찬 약속이 될 수도 있고 커다란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유전자의 변이는 이 시대에 대한 협박, '우리 문명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생물체 중에서 유독 혼자만 암 유발물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 불행히도 이것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모든 화학적 발암물질을 제거하는 일은 비현실적인 목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성분이 아니다. 이런 발암물질들 제거하면 전체 발암물질의 양은 훨씬 줄어들고 그 결과 네 명 중 한 명에게서 암이 발병할 가능성 역시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음식과 식수와 대기를 오염시키는 발암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음식과 식수, 공기 속의 위험물질은 수년간 지속적으로 계속 흡수되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요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은 결코 인간이 만든 틀에 순응하지 않는다. 곤충들은 자신에대한 화학적 공격을 우회적으로 피해가는 방법을 찾아낸다. 인간이 뿌려대는 화학물질로 인해 환경의 내재적인 저항력과 각 생물 종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방어벽이 약화되는 현상이다. 우리가 이런 방어벽을 무너뜨릴 때마다 곤충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자연의 균형이란 유동적이고 계속 변화하며 조절과 조정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인간 역시 자연이 이루는 균형의 일부분이다. 가끔씩 인간이 이런 상태를 자의적으로 바꾸곤 한다. 그 결과 인간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문제가 일어난다.
살충제의 수와 다양성, 그 파괴성이 매년 실질적으로 증가하면서 환경 저항은 점점 더 감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질병을 옮기고 농작물을 해치는 곤충의 개체수는 유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증가했다.
캐나다의 곤충학자 G. C. 울리에트, '우리는 그 동안 유지해온 철학을 바꾸어야 하며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또 특정 생물체의 수를 조절하는 데 있어 자연이 인간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고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위험한 길을 탐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방제법에 관해 열심히 연구를 하겠지만 이 방제법은 생물학적인 관점이어야지 화학적인 관점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적은 폭력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주의 깊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 것이다.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와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지금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에 서 있다. 하지만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 등장하는 두 갈래 길과는 달리, 어떤 길을 선택하건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해온 길은 놀라운 진보를 가능케 한 너무나 편안하고 평탄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라 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동안 무분별하고 놀라운 위험을 강요해왔다는 사실을 인식학 된다면, 지금까지 충분히 인내해온 우리가 마지막으로 '알 권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때야말로 독극물로 세상을 가득 채우려는 사람들의 충고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떤 또 다른 길이 열려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화학적 방제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놀라운 정도로 다양한 선택이 존재한다. 어떤 것은 이미 사용되었고 화려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아직 실험중인 것도 있다. 또한 상상력 풍부한 과학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가 실험으로 옮겨질 날만을 기다리는 방법들도 있다. 이들 모두는 공통점이 있따. 방제 대상이 되는 유기체와 이 유기체가 속해 있는 전체 생명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하는 생물학적 해결법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한다면 자연은 자신의 방식에따라 견제와 균형이라는 복잡하고 훌륭한 시스템을 가동시켜 삼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자연을 통제한다'는 말은 생물학과 철학의 네안데르탈 시대에 태어난 오만한 표현으로,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응용곤충학자들의 사고와 실행 방식을 보면 마치 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원시적인 수준의 과학이 현대적이고 끔찍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 곤충을 향해 겨누었다고 생각하는 무기가 사실은 이 지구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