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사회와 환경의 확장, 유지를 위해서는 인간의 ‘공감’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하지만 현실 세계는 생태계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양극화, 국가주의, 지역주의, 개인과 집단 이기심과 소유욕, 소비 조장, 분쟁 등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상황은 걱정이다.


[본문발췌]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야생과 친해지려는 동료 의식을 유전적으로 타고났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은 자연에서 고립될수록 심리적 박탈감은 물론 신체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성은 자율, 즉 혼자만의 섬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의식과 애정과 친밀함을 추구한다. 자의식과 자아 인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이때 우애적 유대감을 만드는 수단이 바로 공감이다.

우리 인간에겐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을 추구해가며 보다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여정은 이러한 인간의 경향과 우주를 지배하는 에너지 법칙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시작한다. 인류사의 근간을 이루는 변증법은 공감을 확장하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 사이에 놓인 끊임없는 피드백의 고리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자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환경을 그 자신과 자신의 씨앗으로 바꾸려고 한다."라고 지적했다. 자연의 분류 체계에서 진화가 잘된 종일수록, 자신의 비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에너지도 많고 살아 있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엔트로피도 많다.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는 모든 유형의 생명은 비평형 질서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 환경에서 더 큰 무질서(흩어진 에너지)를 초래한다는 말이 된다. 에너지는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며, 높은 수준에 있는 시스템으로 들어가 그 시스템을 소모하여 더 낮은 상태의 시스템으로 만든다.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 매커디는 <인간의 기원>에서 인간의 경험을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실제 사용량이 늘어나는 진화 과정으로 본다.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나 집단이 이룩한 문명의 정도는 에너지를 인간의 발전과 필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도 대부분 이런 견해에 동조한다. 가령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를 모든 인간 문화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로 사용한다. 그는 한 문화의 업적이 높은지 낮은지는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의 기능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화이트를 위시한 인류학자들은 거듭 강조한다.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방정식을 바꾸어 왔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소위 지휘-통제 메커니즘이 되어, 문명의 에너지 흐름을 편성하고 조직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가령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인은 처음으로 농업에 정교한 관개시설을 도입했다. 광합성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품은 채 저장된 곡물은 1차 에너지가 되어 인구를 크게 늘리고 계약 노동량을 증가시켰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에너지 제도를 다루려면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필요했다. 최초의 기록 문서에 새겨진 수메르인의 설형문자는 곡물을 생산하고 저장하고 분배하는 데 있어 수력 기술의 발명에 못지않게 중요한 발명이었다. 설형문자는 복잡하고 거대한 관개 체제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지휘-통제 메커니즘의 등장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장부 기록은 그날 그날의 곡물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을 포함하여 수메르인의 모든 조업 업무를 체계화해 주었다.

근대 초기의 인쇄-출판-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석탄, 증기, 철도와 결합하여 1차 산업혁명을 낳았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전화, 라디오, 전동 타자기, 계산기 등 1세대 전기 통신은 석유 생산 및 내연기관과 맞물려 20세기 내내 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사회와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문헌에 나타난 관개농업 문화의 의식은 고대 구전 문화의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근대의 인쇄 혁명과 집약적인 1세대 전기 통신은 다양한 종류의 의식을 낳았다. 아울러 각 단계에서 새로 나타나는 의식은 앞선 의식의 잔재를 한편에 지니면서도 보다 성숙한 공감 본능을 확대시켜 갔다. 새로운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식의 구조는 인간이 평형상태와 멀리 떨어진 상태에 있을 때 번창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각 단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복합체는 인구를 유지하고 세대 간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의 흐름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그들의 영속성은 환경에서 전체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지구에서 35억 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수많은 생물들 중에서 인간은 가장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고 잇달아 나타나는 각각의 사회적 구조의 질적 변화는 이전의 사회구조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대며 더 많은 엔트로피를 생산했다.


새로워지고 복잡해진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식 구조 덕분에 인간은 시간을 절약하고 공간을 좁힐 수 있다.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이다.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 반사회적 이상성격자, 자폐적 불구자들로 가득 찬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가? 사회는 사교적이어야 하고 사교적이 되려면 공감이 확대되어야 한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자아의식은 더 확실해야 하고 다양한 종류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많아야 하며 공감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공감을 인식하는 과정과 세계적 차원의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파괴가 충돌하는 인류 여정의 중대한 교차로에 서 있다. 우리의 공감의 정도가 높아 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엔트로피로 인한 손실도 매우 불길하다. 인간이 본래 철두철미하게 물질주의적이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을 해결할 가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에 민감하고, 우애를 갈망하고, 사교적이며, 공감을 넓히려는 성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공감-엔트로피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내어 생물권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부모가 정적인 애착과 독립적인 탐구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마련해 주어 둘 사이의 바람직한 균형을 잡아 주면, 아이는 자아의식을 건강하게 발전시키고 정서적으로 성숙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포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지 못하거나 세상을 탐구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하면, 아이의 자아의식은 억눌리게 되어 커서도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보다 안정적인 애착 관계에 있는 아기가 커서도 보다 사교적인 성인이 된다. 이 아이들은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협동심이 높으며 친밀한 관계를 많이 만들었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공감 의식이 잘 발달되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줄 수 있을까? 공감은 가르치거나 훈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감해 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가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공감의 잠재력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나 놀이의 본질적 특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우선 놀이는 본질적으로 철저히 참여적이다. 놀이는 자아가 마음으로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환상이다. 놀이는 다른 사람과 무언가에 몰두하는 행동이다. 놀이는 혼자만의 쾌락이기보다 하나의 공유된 즐거움이다. 순수한 놀이는 수단이기보다는 본질적 의미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다.
  • 개방성과 관용은 놀이 환경의 본래적 부분이다. 행동에 따른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자신을 드러낸다. 또 놀이에는 늘 용서가 뒤따르기에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당할지 모른다. "그냥 장난으로 그런 거야."라는 말은 용서를 당연시하는 아이들이 발뺌할 때 써 먹는 상투어이다.
  •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놀이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놀이는 또한 실용성과는 별개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놀이 공간'은 안전한 피난처이고 '현실 세계'에서 독립된 장소이다. '놀이 공간'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들이 임시로 공유하는 가상의 장소이다.
  • 놀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는 것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다. 경험 그 자체는 '가상pretense'이어서 놀이라는 경험에 초월적인 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느낌으로는 다른 현실을 갖고 있다.
  • 놀이 환경은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교실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페르소나, 다른 역할, 다른 상황에 대입하여 상상력을 펼치고 저 사람이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여자아이와 사내아이가 소꿉장난이나 병원 놀이를 하고 개나 말, 엄마나 아빠, 형제, 학교 선생님, 대통령이 될 때, 그 아이들이 하는 것은 바로 공감의 확장이다.
  • 놀이가 없는 공감 발달은 상상하기 어렵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 정의한 것도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위징아는 모든 문화는 놀이에서 생겨난다고 간파한다. 그는 "이런 놀이를 통해 사회는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드러낸다."라고 말한다.
  • 사회화 과정에서 놀이가 그렇게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놀이가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 주기 때문이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대체 현실을 끝없이 만들어 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대체 현실을 탐구한다. 우리는 거대한 타자, 즉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존재의 무한한 영역을 헤치는 탐험가가 된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다른 현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실체적인 경험과 정서와 추상적 사고를 하나의 종합적인 앙상블, 즉 공감적 마음으로 모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정서적일 뿐 아니라 인지적이다. 우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동시에 추상적 사고를 창조한다.
  • 순수한 놀이는 또한 인간 개발이 가장 잘 구현되는 현장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1795년에 쓴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인 한에서만 놀이를 하고, 놀이할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는 인간의 유대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적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놀이를 한다. 놀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가장 심오한 행위이다. 놀이는 집단적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놀이하는 사람은 경계심을 풀고 잠깐이나마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함께 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자유와 놀이 역시 교집합을 갖는다. 진정한 놀이는 항상 자발적으로 시작한다. 놀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를 좋아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놀이에 빠진다. 목표는 즐거움과 생명 본능의 재확인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를 경험함으로써 사람은 동료 인간과 동등하게 마음을 열고 참여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몰입한다. 순수한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면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로 이해하고 그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때 그는 놀이를 한다."라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다. 놀이할 때보다 더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가? 그때 놀이는 시시한 장난이 아니다. 놀이는 공감 의식을 확장하여 진정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수단이다.

 

화해는 주로 사회적 조화를 되찾으려는 욕구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위로는 다른 의도 없이 순전히 공감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으로, 단지 상대방의 곤경을 인정하고 달래기 위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면 상대방의 느낌을 읽고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적 유대감을 형성하기가 더 쉬워진다.


말과 글과 인쇄, 그리고 이제 전기 통신 등의 발전으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또 보다 밀집된 인구와 복잡한 사회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사회적 진화의 각 단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일차적 기능은 공감의 확장을 통해 신뢰감, 친밀한 관계, 사회적 결합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서로 털을 골라 주든 인터넷을 통해 가십을 퍼뜨리든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단을 통해 동료와 교류하려는 깊은 욕구와 사회적 본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감적이며 이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공감적 배려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다.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좀 더 깊이 공감할수록 참여의 정도가 강해지고 넓어지며, 그럴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영역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보편적이 된다. 얼마나 마음을 열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현실을 이해하는 폭도 달라진다. 경험은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보편적이 된다. 우리는 세계인이 되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권 인식biosphere consciouness'의 시작이다.



진리는 찾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체적 철학의 틀에서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새로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현실은 공유된 경험을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공통의 이해에 관한 설명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거대한 도식 속에 모든 관계가 썩 잘 들어맞는 방법을 통째로 알려고 한다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보다 더 큰 그림을 우리가 속해 있는 방법과 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진리는 자율적 사실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진리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다. 그때 모든 진리는 우리의 현존하는 관계와 공통으로 공유된 이해를 체계화하는 것이다. 존재는 관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존재의 진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적, 철학적 접근은 우리의 경험적 존재를 무시하는 신앙과 이성과의 근본적인 결별이다.


실체적 경험을 내세우는 철학자에게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한 존재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가능한 한 폭넓게 그 경험을 구가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차이는 자유에 관한 관념을 바꾸어 놓는다. 자유는 이성의 시대에 핵심 개념이었다. 합리주의자들은 자유롭다는 것을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자율적인 상태로 정의했다. 근대의 자유는 노동을 통제하고 재산을 확보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쾌락을 최대화하고 행복해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또한 정치 무대에서 대표권, 그리고 시장에서 선택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개개인 각자가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의 주권자라고 소리를 높였다. 고전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에게는 물질 세계에서 자신의 이익을 마음 놓고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주권과 경제적 권리 모두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본 것이다. 이성적 양식으로 볼 때 자유는 부정적인 자유, 즉 배제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혼자 고립될 수 있는 자유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냉정하고' 자족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이들과는 상반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인생의 충만한 잠재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충만한 삶이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보다 깊고 보다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성을 찾는 삶이다. 공감적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양육되고 성장할 때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확장된 공감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평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유일한 인간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할 때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는 바로 그런 행동이 평등 의식의 궁극적 표현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신분에서 상대방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다르고 낯설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실감하기 어렵다. 상대방에게 동정을 느낄 수도, 안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과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그들이 나 같다는 느낌과 반응이 있어야 한다.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고 오직 '나'와 '너'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 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공감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초월한다. 실체적 경험이 현세적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허약함을 인정하고 삶을 최대한으로 누림으로써 초월한다. 완벽함에 대한 충동은 물러나고 자아실현에 대한 탐구가 들어선다.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최대화하려 한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칭송하는 자, 삶을 넓힌다." 프리드리히 헤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근본적인 존재로서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 탄생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다."라고 상기시킨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삶을 긍정한다.


괴테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인간에게는 특별히 삶을 음미할 수 있는 고양된 의식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청지기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도 그런 맥락에서 보았다. 자연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판단을 보류한 채 자신의 삶을 꾸려 갔다. 그가 아는 자연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대상이거나 실용적이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상호성이 지배하는 살아 숨쉬는 공동체였다. 인간은 자연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보다 큰 전체와 연결된다. 이런 관계를 심화시키려면 다른 존재의 고유한 개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다른 존재가 우리를 어떻게 경험하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다른 존재의 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세상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래서 세상에 '말을 거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인이다." - 괴테


낭만주의자들에게 개인은 창조적 잠재력을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었다.


다른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공감의 낭만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면 공감도 있을 수 없고 지상의 초월을 위한 낭만적 탐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존 러스킨은 낭만주의자들이 상상력에 부여한 의미를 이렇게 지적했다. "인간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본능적으로 배려하게 된다." 낭만주의 운동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이유로 공감 의식의 진화라는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공감적 영감을 진전시킨 주역은 다른 아닌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시야말로 다른 사람에 대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갇혀 있던 공감의 충동을 풀어헤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외감, 생명의 나약함, 존재의 고통, 잘살아 보려는 투쟁, 그리고 친교의 기쁨을 이처럼 시를 통해 환기시킨 예는 일찍이 없었던 현상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존재의 적을 소유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저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가 우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존재와 멀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만다. 


착한 성격이 멋진 개성으로 바뀌는 과정에는 또 다른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람마다 개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 개인의 나약함이나 그들만의 포부에 보다 민감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착한 성격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으로만 구분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분류하고 판단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정서적, 정신적 나약함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호감을 받는 것이 존재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애정이나 우정에 대한 갈망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한층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세계의 도시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엔트로피 흐름의 엄청난 증가였다. 도시의 사회구조는 지구의 이용 가능한 에너지와 물질을 더 많이 퍼내어 인간의 생활을 평형 상태에서 멀리 떼어 놓는다. 인프라의 중심부에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지만, 가장자리와 외부에서는 더 많은 엔트로피 폐기물을 쏟아 낸다.
생활이 도시화되면서 인프라는 더욱 복잡하게 작동하여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르고, 차별화와 개인화가 심해지고 자의식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게 되고, 그러면서 공감적 유대는 더욱 확장된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서로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남과 교류에 비례해서 공감의 표현이 확장될 가능성도 증가한다. 여행은 공감적 감수성을 넓혀 줄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는 누가 가장 강력한 리더가 되고, 누가 가장 훌륭한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며, 누가 경제를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등의 항목이 포함되는 것이 보통이다. 2008년에는 색다른 질문이 하나 추가되었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선택을 제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답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감을 대통령의 자질로 끌어들인 여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정치학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정치가나 여론조사 기관, 그리고 대중들은 그 질문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끌 가장 좋은 후보를 결정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고 타당한 질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선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며 공감을 넓혀 간다. 자의식이 분명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훨씬 너그러워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외부의 존재를 두렵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강한 결속력을 가진 작은 집단의 유대감에서 해방되어 보다 느슨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교제를 확대해 가면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지고 개방적이 되어 공감을 확대시킬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의 태도와 가치를 추적한 후에, 로널드 잉글하트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생존이 불투명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을 때, 외부인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 갈 위험한 국외자로 인식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예측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 구분과 성별 기준을 고수한다. 거꾸로 생존이 당연시되기 시작할 때,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은 흥미롭고 자극을 주기 때문에 긍정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이들 조사의 핵심은 “개인의 안정성이 공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소외 집단을 인정하고 각양각색의 다른 사람들과 공감적 유대를 넓혀 가는 새로운 현실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개인의식이 활성화되고 자기 표현이 두드러지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거대한 조직망에서 서로 관계를 주고받는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된, 복잡하고 글로벌하게 구조가 짜여진 문명은 개방 의식, 비판단적 견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정,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의 기반을 발견하려는 갈망 등을 요구한다. 범위를 넓혀 가는 공감의 연대감은 수많은 사람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어 주는 접착제이다.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 이상으로 부의 추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부의 소유는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소유해 버려,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행동만 하고, 모든 사람과 사물을 자신의 부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한다.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결국 나는 주변의 애정과 우정으로부터 고립된다. 남는 것은 소외감뿐이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다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진다. 물질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할수록 사람을 못 믿게 된다. 또한 물질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모르고 너그럽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기심이 늘면 이타심은 줄어들었다. 물질적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 물질주의자는 세상은 얻지만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동, 즉 공감적 유대를 발휘하는 일에는 서툴다.


인류의 절반은 안락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화석연료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소모하고 있고, 그 이상으로 부가 늘어날 때마다 불행도 증가하게 된다. 또 한쪽 절반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최소한의 안락한 수준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다. 하지만 부유한 나라의 호사스러운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주고, 30억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석유와 그 밖의 화석연료나 핵전력에 필요한 우라늄은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최소한의 안락을 보장해 주는 분기점까지는 경제가 향상되어야 공감도 따라서 개발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분산에너지는 뒷마당에서 찾을 수 있는 에너지이다. 햇빛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 바람은 매일 지구 곳곳에서 분다. 우리는 쉬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시골에 사는 사람은 농업과 임업 폐기물을 이용할 수 있다.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밀물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있다. 지열 에너지는 지표면 아래에 있고 물은 수력발전을 제공한다. 이들 에너지를 우리는 분산 에너지라고 부른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처럼 일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엘리트 에너지와는 달리,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어디서나 다양한 규모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가능하게 한 정보통신 기술은 세계의 파워그리드(power grid: 전력망)의 형태를 바꾸어 놓고 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 사무실, 가게, 공장, 기술 단지에서 스스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모아 전략을 생산할 수 있고, 그것을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듯,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를 통해 P2P 방식으로 공유한다. 기업들은 이미 업계 리더들이 말하는 소위 ‘분산 자본주의’를 위한 시장과 인프라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3차 산업혁명의 첫 두 기둥인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발전소 건물’을 도입하려면 3차 산업혁명의 세 번째 기둥까지 함께 도입해야 한다. 다름 아닌 재생 가능 에너지의 저장법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들 에너지원을 모아 필요할 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저장법을 개발해야 한다. 배터리나 분화양수기 등은 저장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널리 사용할 수 있고 비교적 효율적인 저장 매체가 하나 있다. 수소는 공급 면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고, 전력 생산뿐 아니라 차량에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이 재생 가능 에너지를 ‘저장하는’ 보편적 매체이다. 

인터넷 망을 따라 파워그리드의 형태를 바꾸는 네 번째 기둥은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전력 회사에서 실험 중에 있다. 네 번째 기둥이 세워지면 업체와 가정은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다. 
다기능적 전력 교환망인 스마트 인터그리드smart intergrid는 가정과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하나로 이어 준다. 가정과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미니그리드minigrid로 태양전지, 풍력발전, 소형 수력발전, 동식물 폐기물, 쓰레기 등 지역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하여, 그것을 각자 필요한 전력 생산에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스마트미터링smart metering 기술을 활용하면 지역 생산자로부터 그리드를 통해 전력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를 메인 파워그리드에 효율적으로 되팔아 에너지의 쌍방향 유통을 원활하게 해 준다.

스마트그리드 기술의 다음 단계는 센서와 칩을 그리드 시스템 곳곳에 끼워 넣어, 모든 가전제품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소프트웨어를 통해 그리드의 어떤 곳에서 언제 얼마나 전력을 소모하는지 전체 파워그리드에 알린다. 이런 상호 연결 시스템으로 전력 사용의 최고점과 최저점에서 에너지 사용과 흐름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고, 심지어 매순간 전력의 가격 변동에도 연동하여 사용량을 조절할 수 있다.

인터그리드는 전력의 폭넓은 재분배를 가능하게 해 준다. 중앙으로 집중된 하향식 에너지 유통은 점점 더 퇴화되고 있다. 앞으로 기업과 시 자치제와 일반 가정은 자신의 에너지에 대한 소비자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분산 발전distributed generation’이다. 이처럼 분산된 스마트그리드는 또한 석유로 가동하는 내연기관을 전기나 수소 연료전지 플로그인plug-in 차량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한다. 플러그인 전기차와 수소 연료전지 차량 또한 20킬로와트 이상의 용량을 발전하는 ‘달리는 발전소’이다. 자가용, 버스, 트럭은 주차 시간이 길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집이나 사무실이나 주요 쌍방향 네트워크에 플러그인하여 필요한 전기를 공급받은 다음, 남는 전기를 다시 그리드에 되돌려줄 수 있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와 수소 연료전지 차량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3차 산업혁명의 인프라에 필적하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다. 3차 산업혁명은 민족과 국가를 전례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협력 관계로 끌어들여 전력이 널리 분산되는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다. 지난 10년에 걸친 분산된 통신 혁명으로 네트워크 사고방식, 오픈소스 공유, 통신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 민주화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생활 방식을 실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갖추는 세계를 그리기 시작할 때이다.



재산권에서 접속권으로.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만큼이나 낡은 고전적 경제 패러다임과 새로운 분산 자본주의 모델이 상충하는 곳도 없다. 전통적 사업 계획에서 특허권과 저작권은 하나의 성역이다. 그러나 협업 경제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오픈소스로 내놓는 것이 협업의 출발점이다. 지식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은 협업을 가로막는 일차적 장애이다.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변환은 사업체들이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에도 극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존의 시장은 본질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재산 교환에 초점을 맞추는 사업 모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에너지의 비효율을 줄이고 엔트로피의 흐름을 늦출 인센티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엔트로피를 줄이면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적어도 에너지 비용이 오르기 시작하고, 정부가 탄소 총량 제한 및 배출권 거래제carbon cap-and-trade와 재활용법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최근까지는 그랬다. 그것은 일단 구매자와 제품을 교환하고 나면, 생산자는 더 이상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필립스라이팅Philips Lighting 같은 기업은 전구 제품에서 서비스로 운영 방식의 일부를 바꾸기 시작했다. 
필립스는 소비자와 소위 ‘성과 계약performance contract’이란 것을 개시했다. 예를 들어 필립스는 보다 효율적인 소형 형광등과 대도시 지역의 LED 옥외 조명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와 계약을 한다. 필립스는 조명과 설치를 제공하는 것을 비롯하여 이 계획에 들어가는 자금 일체를 부담한다. 그러면 도시는 필립스에게 협의한 일정 시간 동안 절약된 에너지에서 비롯된 수입을 필립스에 되돌려준다. 거래되는 형광등은 단 한 개도 없다. 형광등은 여전히 필립스의 소유이기 때문에 필립스는 공급자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이다. 성과 계약은 새로운 에너지 시장에서 표준 요금이 되고 있다. 새로운 사업 모델에서, 필립스 같은 제공자는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능률적이고 지속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할 새로운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 제품을 파는 방식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에너지 효율과 보다 긴밀한 자원 관리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흐름을 줄이는 문제는 모든 기업 운영의 핵심 관건이 될 것이다.



협동 사회에서는 비물질적 가치, 특히 자아 완성과 인격적 변화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충만한 인생’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 즉 접속의 권리는 가장 중요한 재산 가치가 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재산은 “개인이 충만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해 줄 탄탄한 관계에 참여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맥퍼슨은 주장한다.


서열을 하찮게 여기고, 네트워킹 방식으로 사람이나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협력이 체질화되어 있고, 자율과 배척보다는 접속과 포함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다양성에 감수성이 강한 밀레니엄 세대는 역사상 가장 공감적인 세대가 될 확률이 크다. 분산적이고 협동적이고 비위계적인 사회가 곧 공감적인 사회이다.



최근에 들어와 삶의 질은 20세기 경제 이론의 많은 핵심 가설을 다시 검토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목록의 정점에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국내총생산이 있다. GDP는 오랫동안 미국과 다른 나라의 복지를 가름하는 잣대로 확고한 권위를 누려 왔다. 
GDP는 1930년 대공황에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상무부가 고안해 낸 개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GDP가 12개월 동안에 생산된 경제적 재화와 용역의 총량의 가치만을 측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GDP는 실제로 사회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 활동과 그와 반대되는 부정적 경제 활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늘어나는 교도소 신축, 경찰력 확대, 군비 확장, 오염 처리 비용, 흡연과 음주와 비만에서 비롯되는 의료 비용 증가, 그리고 그 밖에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가공식품과 기름진 패스트푸드를 먹으라고 부추기는 데 들어가는 광고 비용 등, 모든 형태의 경제 활동이 GDP에 포함된다.

여러 해 동안 GDP를 대체할 만한 지표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다. 지속 가능한 경제복지지수(ISEW: 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 참진보지표(GPI: Genuine Progress Indicator), 포드햄 사회건강지수(FISH: Fordham Index of Social Health), UN의 인간개발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 경제적 웰빙지수(IEWB: Index of Economic Well-Being) 등이 대표적인 것드리다. 이들 지표들은 ‘진정한’ 경제적 향상을 인간의 복지에서 찾으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ISEW는 먼저 개인의 소비 지출로 시작하여 보수를 받지 않는 가사 노동을 더한다. 그런 다음 범죄와 오염과 사고에 들어간 금액 등, 일차적으로 손실을 완화하기 위한 활동을 뺀다. ISEW는 또한 소득 불균형과 고갈된 천연자원도 반영한다. 참진보지표는 많은 부분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만, 지역 사회의 자원 봉사 가치를 보태고 여가 시간의 손실을 빼는 점이 다르다. 포드햄사회건강지수FISH는 유아 사망률, 아동 학대, 유아기 빈곤, 10대 자살, 마약 남용, 고등학교 중퇴율, 평균 주급, 실업, 의료보험의 적용 범위, 노인층 빈곤, 살인, 주택, 소득 격차 등 사회적, 경제적 지표 열여섯 개 항목을 측저한다. 경제적 웰빙지수IEWB는 가족저축률, 주택스톡(housing stock: 이동주택을 포함한 모든 주거 단위의 총합) 등 미래의 안정감을 측정할 수 있는 항목을 고려한다.


경쟁보다 협동이 대세를 이루고 접속권이 재산권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삶의 질이 개인의 재정적 성공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각되는 분산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를 잡으면, 공감적 감수성도 번영할 여지를 마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욕, 사리사욕, 실익을 인간 경험의 중심에 놓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배타성의 경계, 그리고 위계질서는 더 이상 공감적 감수성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이 관계적이고 또 정체성이 수많은 관계에 묻혀 존재하는 연극적 의식의 시대에, 접속을 거부당한다는 것은 고립된다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1년 열두 달 하루 24시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고립과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계속 줄어들어 이미 제로에 접근하고 있다. 시간에 굶주린 사회에서 모든 여분의 나노초는 ‘또 다른 접속’을 이루는 기회가 된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의 시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모든 종류의 관계가 우리의 중심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인본주의 심리학자의 “나는 참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이제 새로운 명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한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적 유대나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면, 이런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은 공감적 인식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문제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학생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참지 못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패를 맛보았을 때 그 실패를 쉽게 처리하거나 극복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는 일에도 서툴다.


지난 10년 동안의 조사 결과는 스크린 앞에서 자란 젊은 세대의 소통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어휘는 곤두박질 쳤고, 독해력과 의사 소통 능력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런 요소들은 공감의 능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구전에서 필사로, 다시 인쇄로 이어지는 이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어휘도 따라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렇게 늘어난 어휘는 치밀하고 풍부한 은유와 언어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어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복잡하고 정교한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공감의 영역도 넓혔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느낌과 의도와 서로에게 거는 기대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분명한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역설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인터넷 망은 인류에게 무한한 지식과 소통의 통로를 제공하지만,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때문에 이해와 의미와 공감적 유대감을 높여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현저하게 줄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에도, 형편이 어려운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생활 방식을 단순화시켰고, 많이 가지는 것보다는 인간관계의 질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찾아내려 한 것을 그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수입 이상의 재산 축적은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경제 상황 탓에 사람들이 알아서 삶의 규모를 줄여 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돈보다는 더 의미 있는 관계로, 또 시장경제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행복의 기준과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지만 않다면, 어려운 시절은 시민사회를 쇄신하고 공감의 물결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서로를 배려하고 실제로 서로 보듬고 돕고 베푸는 일에 참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자연의 부를 평등하게 분산시키면 그동안 탐닉과 방종으로 혜택을 남용했던 선진국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체제로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고, 못사는 나라들은 그들의 처지를 개선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선진국들이 선진화되지 못한 나라의 삶의 수준과 복지를 향상시키는 책임을 맡는다면 인류 문명은 균형을 잡으면서 자연의 재생 능력을 되살리는 쪽으로 인간의 소비 습관을 정돈해 줄 것이다. 분산된 3차 산업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지구 어디에나 있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누구나 공평하게 원하는 만큼 사용하면서, 모든 인류가 하나의 품안에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해 준다는 점에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제 지역 분산 방식으로 복합적인 인류 문명을 수립하고 엔트로피의 수치를 낮추면서 공감의 범위를 넓힐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정점에 이른 글로벌 경제에서 인류는 생물권 인식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에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답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생물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지만, 바로 생물권이 기후 변화로 위협받으면서 이제 모든 종을 위험에 빠뜨리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망치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겐,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일 것이다."


자연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기계적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고정적이 아니라 임기웅변적이며 다른 현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변한다. 과학과 기술이 가속도와 위치의 문제에 매여 있었을 때는, 뉴턴의 기계적 법칙도 얼마든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따로 떼어 놓고 시간을 재고 측정하여 엄격히 계량화되는 현상만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환원주의나 기계론적 개념은 한계가 뚜렷해서 자연의 내재성을 포착할 수 없다. 사회나 자연을 이해하려면 구성 부품의 속성뿐이 아니라 현상과 현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과학자들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공감의 성숙도는 특히 비판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상충하는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다의적인 사고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은 비판적 사고를 포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서적 요소이다.


협력적 학습 환경에서는 과정이 결론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위계적인 학습 모델보다는 각자의 지식을 짜 맞추는 네트워크 방식이 더 유리해진다. 학습은 훈련을 통해 학생의 두뇌에 전문적인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협력하고 비판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내는 과정이다. 협력적 학습의 효과를 높이려면, 집단이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해 주고 상대방이 관점과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기탄없이 비판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전체 집단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협력 학습은 배려, 조화, 비판단적 상호 작용, 개인의 고유한 공헌, 참여의 중요성, 관계를 통한 공동의 의미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감을 가지고 참여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과학적 방법은 우리 자신의 본성과 세계의 본성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과 사실상 전혀 맞지 않는다. 과학적 방법은 현실의 관계적 측면을 부인하고 참여를 막기 때문에, 공감적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성의 시대에도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법론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괴테가 그런 경우였다. 괴테는 자연은 사심 없는 방관자로서 보다는 참여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식물학자가 형태학을 연구할 때는, 지구의 생명체부터 시작해야 한다. 
괴테는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가장 내부 지향적인 방법으로 그 자체를 대상과 동일시하고, 그렇게 하여 실질적인 이론으로 성립하게 되는 민감한 경험주의”라고 정의했다.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은 베이컨과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괴테는 그의 “생각의 힘이 대상과 합일을 이루는 순간 활성화되고, 그때 생각은 대상에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괴테는 진정한 통찰력은 초연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현상에 깊이 참여할 때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은 130여 년 동안 묻혀 있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많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인츠 코후트는 처음으로 과학적 조사에 대한 참여적 접근이라는 생각을 손질했다. 코후트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은 ‘원격 체험experience-distant’이어서 실제적 관찰과 거리가 있다며 대안적 경험론을 주장했다. 그것을 그는 공감과 내관으로부터 직접 나온 자료이기 때문에 ‘근접 체험experience—near’이라고 불렀다. 
정신분석이 과학적 사고에 기여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공감과 결합시킨 점”이라고 코후트는 생각했다. 공감을 “하나의 관찰 도구로서” 과학에 접목시키면 “과학적 원리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의 깊이와 폭을 증가시킨다.”라고 코후트는 말한다. 더욱이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공감을 적용하는 문제는 과학적 추구가 “인간의 생활과 유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코후트는 주장했다. 코후트는 냉정하고, 사심 없고, 합리적인 방식만 고집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20세기에 야만적인 전체주의 체제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런 방법론은 “세계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목적”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매슬로의 ‘배려하는 객관성caring objectivity’이라는 개념은 그가 두 번째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요구에 처음 반영한 이후로 반세기 동안 더욱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영장류 동물학자 제인 구달처럼 신세대 공감적 연구자들은 과학적 탐구에 대한 공감적 접근 방법인 ‘근접 체험’을 사용하여 기존의 사심 없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적 방법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연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을 이끌어 냈다. 생물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려면 자연에 얼마나 깊숙이 다시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연에 다시 참여하기로 한 이번의 결정은 인간이란 종의 초기 진화를 특징짓는 원래의 참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과거에 자연과의 관계는 의지에 의한 참여가 아니라 운명적인 참여였다. 그때는 자의식적인 선택을 할 만큼 자아가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구석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의존했던 것만큼이나 자연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따라 자연과의 관계를 규정해 갔다. 이제 자유의지로 자연에 기꺼이 다시 참여하는 것은 생물권 의식을 이전이 모든 의식과 구별해 주는 기준이다.


세상을 소유하려는 탐색은 우리를 보다 복잡한 경제적 구조로 몰아넣었고, 이런 구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더욱 몰아세우고 사람과 물건으로 채웠다. 이제 우리는 이 지구의 곳곳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여 인류를 하나의 품으로 연결하는 진정한 글로벌 문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울러 그 대가로 우리는 인류의 전멸을 예고하는 엔트로피 수치를 손에 받아 들었다.


‘공감의 문명empathic civilization’이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감싸는 거대한 생명권과 전체 인류에게로 공감의 범위를 빠르게 넓혀 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감적 유대 관계를 다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후 변화와 대량살상무기의 증식이라는 형태로 무섭게 속도를 올리고 있는 엔트로피라는 괴물과 충돌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제때에 지구촌의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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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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