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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08 [검색사전] 불평등(不平等)

많은 사회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그리고 작가들이 '불평등'을 이야기했다.

나에겐 심보선 시인이 표현한 '불평등'이 마음에 꽃힌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 심보선, 「집」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지위나 계층적 불평등, 정보 격차에 의한 불평등.... 사회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며 불평등의 영역도, 대상도 늘어가기만 한다.

 

 

불평등(不平等), 차별이 있어 고르지 아니함.

[유의어] 불공평, 불균등

 

(네이버 영어사전) [명사] (political/racial) inequality, [형용사] unfair, unequal      

불평등한 분배, unequal division

불평등하게 대하다, treat sb unfairly[unequally]

그녀는 직장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She claimed that she was treated unfairly at work.

IMF 이후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After IMF crisis, the issue of social inequality became more severe.

우리 사회는 아직 남녀 불평등의 장벽을 깨지 못했다, Our society hasn't broken the barrier of sexual inequality yet.

 

 

 

[시, 글과 책 속에 쓰인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집  /  심보선

 

그들은 저주받았다

관념론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유물론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엔 영원히 잠들지 않는 아이가

잠들기 직전

납으로 된 의문부호 하나를 자정의 발등 위에 못박는다

그들의 꿈에선 언제나 썩은 피가 샌다

 

또한 그들에게 희망이란

주머니 속의 빵 부스러기를 세는 식이다

그러나 한 번도 맞게 센 적이 없다

세면 셀수록 부스러지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셈을 멈추지 않는다!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집 안으로 그들을 부르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난 창문들을 모두 깨야 한다

 

그들의 집은 문이 없다

그들의 집은 불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비극이다

그 집을 지켜야 한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부'라는 것은 마치 전기 그 성질이 유사해서 오직 불평등과 격차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법이다.

 

 

김승호,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

정치는 경제와 더불어 현재 우리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도구다. 개인적인 금전 문제는 성실을 무기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 성실로 일궈놓은 나의 사업이 송두리째 사라지거나 빼앗길 수 있다. 투표를 안 해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비열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그들은 많은 일에서 내 자유의지와 의사결정권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 정치에 대한 고의적 무관심이 계속될 때 사회에는 불평등이 만연해진다. 투표 같은 작은 행동이 자신의 행복에 직결되어 있음을 반드시 인지해야 할 이유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이미 명백한 사실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가 더 열심히 살 이유를 찾게 된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결핍을  느끼게 되지만,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닌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 남들보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이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재능이 없어도 이 문제로 부모를 탓하거나 남을 탓하기를 그치게 된다. 이 불평등에 순응하는 순간 불평등은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해줄 뿐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면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된다. 지금 주어진 환경이나 태어난 여건은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앞으로의 환경과 여건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갈 수 있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시절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축복이라고 생각되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오히려 사소한 역경이나 시련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다. 인생이란 험한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예방주사조차 맞지 않아서 인생의 고난에 저항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는 축복받은 환경이나 재능이 오히려 단점일 수 있다는 뜻이다.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

인류 문명 발달의 불평등을 설명해 주는 원리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관한 원리가 아니며, 인구가 생존물자에 압력을 가한다는 원리도 아니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불평등에 있다. 토지소유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지적 도덕적 상황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커다른 기본 요인이다. 

 

현대 문명을 저주하고 위협하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의 원인이 토지사유제에 있다는 점을 보았다. 이 제도가 존재하는 한 생산력이 향상되더라도 대중에게 지속적인 혜택을 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대중의 생활을 악화시킨다는 점을 보았다. 또 빈곤을 구제하고 부의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현재 추진되고 있거나 제시되는 해결책을, 토지사유제 철폐만 제외하고, 모두 검토하였지만 효과가 없거나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보았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뿐이다. 부가 증가하는데도 빈곤이 심화되고, 생산력이 커지느느데도 임금이 억제되는 이유는 모두 부의 근원이자 모든 노동의 터전인 토지가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을 타파하고 임금이 정의가 요구하는 수준, 즉 노동자가 벌어들이는 전부가 되도록 하려면 토지의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 ... 그렇다면 현대 문명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부정의하고 불평등한 부의 분배,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악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이것이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해야 한다."

 

문명에 고통을 주는 원인이자 문명이 사망하는 원인은 불평등한 분배이다!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한 원인은 부와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이 현재의 우리 문명에 강도를 더하여 나타나고 있다. 임금과 이자는 계속 하락하고 지대가 상승한다.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빈자는 힘도 희망도 잃고 있으며, 중산층은 사라지고 있다.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 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금융 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 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 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 그에 더해 그들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전망을 약화시켰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한 경제 현상들, 즉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들의 보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경제학은 그저 실생활에서 동떨어진 것 이상의 우를 범한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이 한 짓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해를 끼쳤다.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세기 제언>

사회 안전망 없이 쥐꼬리만한 경제적 평등만 가지고서는 자유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자유를 없앨 수 있는 것과 같이 유례없는 최고의 불평등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부와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나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바로 사회와의 관련성을 잃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외, <초예측>

미국의 엘리트들은 사회 불평등에 관심을 갖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정작 계급에 대한 이해는 낮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이유는 본인이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믿거든요. 하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그들이 진정 계급 문제를 이해하려면, 본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3루에 서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3루타를 쳐서 3루까지 달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고, 따라서 날 때부터 타석에 서보지도 못한 사람에 비하면 홈베이스를 밟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말이죠.

- 조앤 윌리엄스, '6장. 무엇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중에서

 

 

제레미 리프킨, <육식의 종말>

쇠고기 신화는 반복적으로 남성 지배를 영속화하고 계급 차별을 조장했으며, 국수주의와 식민주의의 이익을 증진시켜 왔다. 또한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박탈을 영속화했다.

 

 

데이비드 색스, <아날로그의 반격>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두 가지 유형의 일자리 창출에 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소프트웨어 디자이너나 CEO 같은) 꼭대기에 있는 몹시 특화된 직업과 (폭스콘의 휴대전화 조립 기술자와 아마존의 창고지기 같은) 바닥에 있는 보수도 낮고 기술 숙련도도 낮은 일자리.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디지털 경제는 불평등한 경제입니다.

 

 

정재승, <열두 발자국>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것처럼,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보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훨씬 빠르게 성장하면서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P. G. 해머튼, <지적 생활의 즐거움>

'합리적' 인 것이 언제나 '합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학과 수학은 '합리적' 일수록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만, 예술과 예술을 닮은 인생의 여러 장면들은 때론 중요한 인상만 '선택' 해서 간직하는 불평등과 불합리를 통해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 ...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불평등은 공리나 합의에 미치는 영향과는 별개로 시민의 미덕을 좀먹는다. 시장에 매료된 보수주의자들과 재분배에 주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손실을 간과한다. ... 불평등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슷한 소득 재분배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분배정의와 공동선의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루치르 샤르마, <애프터 크라이시스>

낮은 수준의 불평등은 장기적이고 강력한 경제 성장을 촉발하지만, 높거나 빠르게 심화되는 불평등은 성장의 싹을 조기에 잘라버릴 수 있다는 시각을 반박하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주장은 우선 소득이 늘어날수록 부자들은 저소득과 중산층 계급들에 비해서 추가로 번 소득 중 지출하는 몫은 줄어들고 저축하는 몫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는 관찰 결과로부터 시작한다. 부자들은 이미 식품부터 휘발유까지 원하는 모든 기본적 생필품을 구매하고 있기 때문에 재산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러한 소비재들에 대한 지출을 늘릴 여지가 많지 않다. 반면 저소득과 중산 계층들은 소득이 늘어났을 때 의류나 식품 내지는 더 좋은 부위의 쇠고기나 그동안 못해본 주말여행에 필요한 휘발유 지출을 늘릴 것이다. 경제학적 용어를 써서 이런 현상을 설명하자면, 부자들의 경우 추가 소득 중 저축되지 않고 소비되는 금액의 비율, 즉 한계소비성향marginal propensity to consume이 낮다. 결과적으로 국가 소득에서 부자들이 기여하는 몫이 커지는 기간 중에 전체 소비지출 성장세는 둔화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경제 성장률은 후퇴한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은 강력한 성장 기간이 끝나는 단계에서 생기는 금융 위기의 영향을 부풀릴 수 있다. 호황기가 정점에 도달하면 상류층으로 부의 쏠림 현상이 생기면서 부자들은 늘어난 재산 중 일부를 사회적 분노를 유발하는 과시적 소비 형태로 금융 투기에 탕진한다. 그런 뒤 실제로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국가 부의 상당 부분을 해외로 빼돌리기도 한다.

 

불평등은 기업인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현금으로 거래를 하고 장부에 기록하지 않는 지하 경제black economy에서 목격되는 부패와 강력하게 관련되어 있다.

 

나쁜 억만장자들은 부패, 불평등 고조, 성장 둔화라는 악순환을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정재승,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언어학에서 지프의 법칙, 경제학에서 파레토의 법칙, 베키의 법칙과 무수한 Power law. 이들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불평등과 불균형이다. 경제나 맥주 소비, 웹페이지 사용 빈도, 도시 인구 등 시스템은 다르지만 각 시스템은 대부분 특정한 몇몇 개체에 대부분의 숫자가 몰려 있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의 역할(빈도)은 미약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양상은 어떤 스케일에서 관찰하든 같은 패턴을 보인다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지프의 법칙의 경우,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단어들에서 이런 특성이 보일 뿐 아니라 영어로 된 모든 소설, 혹은 모든 문학 작품, 혹은 더 넓게 모든 활자매체의 글을 조사해봐도 똑같은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도시의 인구 분포도 한 나라뿐 아니라 아시아 또는 전 지구적으로 스케일을 넓힌다고 해도 똑같은 모양의 그래프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스케일에 무관하게 같은 구조를 되풀이하는 것을 '자기 유사성self-sinmilarity'이라고 부른다.

 

 

E. F. 슈마허, <굿워크>

슈마허는 생산, 분배, 소비에서의 국제적 협력관계의 중요성과 국제사회에서의 경제적 불평등과 종속관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구평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한편에는 과도한 흑자를 내는 소수의 국가들이 존재하고, 다른 반대편에는 도저히 갚을 수도 없는 빚더미에 허덕이는 대다수 적자국이 존재하는 지금의 경제시스템으로는 언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전쟁의 원인이 국제적 무역불균형과 교환체제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한 슈마허는 나중에 이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전후 다자간 무역을 활성화할 새로운 교환체제의 설립을 고안하였다. 그가 제안한 새로운 방식의 다국적 결제 시스템은 케인즈의 논문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만큼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토머스 프리드먼, <늦어서 고마워>

도브 사이드먼은 이사야 벌린의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의 개념에 영향을 받아서 자유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이드먼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freedom from'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시시콜콜 간섭하는 상사로부터의 자유, 광고를 보라고 강요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동네 가게로부터의 자유, 지역 은행으로부터의 자유, 호텔 체인들로부터의 자유가 뭔가로부터 벗어날 자유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는 '행동할 자유freedom to'라고 사이드먼은 주장한다. 이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갈 자유를 말한다. 그들의 자유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선거, 헌법, 법의 지배, 그리고 의회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많은 지역에서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지역에서 혼란이 확산되면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이드먼은 리비아나 시리아, 예멘, 또는 호스니 무라바크 대통령 추락 이후의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이 벗어날 자유는 확보했지만 행동할 자유는 얻지 못한 점에 주목해 그 차이를 '자유의 불평등'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불평등일 것이다. 사이드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벗어날 자유'를 얻는 건 신속하고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행동할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유대인들은 법률과 도덕률을 만들어 행동할 자유를 갖게 되기 전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진정한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이드먼은 "소득 불평등은 불안정을 초래하지만 자유의 불평등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벗어날 자유'가 '행동할 자유'를 앞지를 때, 역량이 커졌지만 파괴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 많은 해악과 파괴를 초래할 것이며, 그들은 건설적이고 인간적인 노력에 고취되고 그에 협력하지 않는 한 탈주한 죄수와 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루케 마코토, <교양고전>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국가 안정을 위한 명목으로 빈부의 차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문명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의 행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슬에 묶여 있다. ... 인간은 국가에 지배당해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는 '개인 우선' 사상이다. 또한 인간은 항상 서로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그 집합체가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는 국가의 모든 인간이 정치에 참여하는 '공화제'일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루소는 말했다. 루소가 꼽은 이상형은 고대 그리스에 있던 '도시국가'이다. 집회에서 투표를 통해 정치를 하고 국가의 규제는 없었던 시대야말로 자연적인 상태이며, 여기에는 불평등도 부자유도 없었다. 즉 국가는 공공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심리학자 짐 시다니우스와 펠리시아 프라토는 정도 차이는 있을지어정 누구에게나 이른바 사회적 우세(social dominance)의 동기가 있다고 말한다. 좀 더 직관적인 용어로는 부족주의(tribalism)라고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 집단들 사이에 위계가 구축되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보통은 자기 집단이 다른 집단들보다 우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다. 두 연구자는 사회적 우세 성향이 있는 사람일수록 애국주의, 인종주의, 운명, 업모, 카스트, 국가의 운명, 군사주의, 범죄에 대한 강경책, 기존 권위와 불평등의 보존 등의 견해와 가치에 끌린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거꾸로 사회적 우세에 반대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인도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보편 인권, 정치적 진보주의, 기독교적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에 끌린다. 사회적 우세 이론에 따르면, 인종은 편견을 둘러싼 논쟁에서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자주 쟁점이 되지만 심리적으로는 유달리 중요하다 할 수 없다. 타이펠이 보여 주었듯이, 사람들은 몹시 사소한 유사성만으로도 세상을 내집단과 외집단으로 나눈다.

 

 

이정우, <개념: 뿌리들>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관계는 표면상 교환처럼 보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자본가는 그 노동력을 사는 것이죠(즉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합니다). 이런 관계는 바로 자유주의적 사회정의론의 근간을 이루는 '계약'의 전형이죠. 그러나 누가 노동자이고 누가 자본가인가? 이 문제는 어떤 추상공간에서 사유실험을 통해 '모델링'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이미 불평등하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즉 사회는 본질적으로 부정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사유는 정의로운 사회의 모델링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부정의한 조건들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표면상 노동과 자본은 서로를 교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은 완성된 제품으로서 소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자본에 생산력을 부여해 주는 살아있는 힘입니다. 자본은 노동력을 착취해서 확대재생산의 과정에 들어가지만 노동은 자기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부터 소외되어 버립니다. 노동의 결과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것이 되어버리죠. 그래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외를 야기하는 생산의 메커니즘이 착취입니다. 즉 임금에 해당하는 노동 이상의 노동을 시킴으로써 잉여가치를 창출하고(이때 노동 '시간'과 '생산력'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 잉여가치를 확대재생산으로 돌림으로써 노동자의 노동을 전유하고 착취합니다. 즉 착취는 객관적인 경제학적 메커니즘이고, 소외는 그 결과로 야기되는 노동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베블런, <유한계급론>

유한계급의 제도는 문화적 발전을 직접 방해하는데 (1) 유한계급 자체의 고유한 타성에 의해 (2) 과시적 낭비와 보수주의의 규범적인 선레를 통해서 그러하다. 간접적으로는 (3) 유한계급 제도 자체가 의존하고 있는 부와 생계수단의 불평등한 분배체계를 통해서 문화의 발전을 저해한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자연재해, 기근, 종족분쟁은 선진국의 정부나 국제원조기구, 국제여론 등이 관심을 촉구하고 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자들은 점차 망각의 제물이 되고, 문제 자체의 존재마저 잊혀버리지. 그리고 깊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게 돼. 처음에는 강했던 국제적인 연대감도 시들해지고. 토지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빈민가의 인프라 정비도, 농업지원도, 우물 파기 프로젝트도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버릴 응급 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마늘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어떤 죄악이 매우 끔찍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그 뿌리를, 그것을 가능케 했던 맥락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불 가리지 못할 정도의 격한 미움, 종교적 광신 -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유대교든 - 복수에 목마른 살인적인 근본주의는 언제나 사회적 불평등, 경제적 정신적 곤궁, 정치적 절망과 실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꽃피게 되는 법이다. ... 세계의 지배자들은 점점 높아가는 황금산 위에 앉아 있다. 그들의 발치에는 굶어 죽은 자들과 전염병과 전쟁, 경제적인 궁핍으로 죽은 자들의 무덤이 놓여 있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더 악화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불평등을 고려할 때 질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모두를 질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 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그러나 스미스보다 22년 전에 장-자크 루소는 날카롭고 기묘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놀랍게도 야만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다들 야만인과 근대의 노동자 가운데 노동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정말일까 하고 물었다. 루소의 주장은 부에 대한 명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근대 사회는 첫 번째 방법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욕망에 줄기차게 부채질을 하여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성취의 한 부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부유하다고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와 같다고 여겼지만 우리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사람과 실제로나 감정적으로나 거리를 두면 된다. 더 큰 물고기가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옆에 있어도 우리 자신의 크기를 의식하며 괴로울 일이 없는 작은 벗들을 주위에 모으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면 된다.

 

 

클라우스 슈밥 외 26인, <4차 산업 혁명의 충격>

최근 강력하게 일어난 디지털혁명이 미래에도 게속된다면, 현대 경제의 구조와 일 자체의 역할에 관해 다시 생각해야 할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 후손들은 더 적은 시간 일하고 더 잘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과 보수는 더 불평등하게 분배될 수 있고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하고 공평하고 포용적인 성장 inclusive growth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사물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디까지 진화하는지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홍병선/최현철, <과학 기술과 철학의 만남>

농업의 혁명은 돌을 갈아 정교한 도구를 만듦으로 이루어 것이다. 정교한 도구의 사용과 함께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식도 차츰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명이 발달한 지방에는 사냥도구, 농기구, 무기 등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고,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자연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석기 혁명 시기에 정교한 도구를 다루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었다. 결국 식량생산에 의해 생긴 여유는 마침내 전문기술자를 낳게 되고 또한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산업혁명의 발생 요인을 경제적으로는 크게 수요적 요인과 공급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수요적 요인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그에 따른 소득과 수요의 증가, 중상주의 시대의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수요의 증가이다. 공급적 요인으로는 인구증가에 따른 노동력 확보와 식민지 개척에 따른 풍부한 원료 공급 등이 있으며, 기술의 발달과 제도의 변화 또한 산업혁명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산업혁명 중 영국에서는 중소농민이 몰락과 노동자의 증가, 농업혁명, 기계의 발명 등과 공장제의 출현, 교통과 상업이 발달되었다. 여기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이 형성되고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생산방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생산량 증가로 인하여 결국 농업(1차 산업) 중심의 사회에서 제조업(2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의 사회 및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정보화의 혁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능력의, 차이에 따라 정보력의 격차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보력이, 격차에는 새로운 문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학기술의 적응도와 맞물려 있다. 이것은 정보에의 접근을 불평등하게 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미 빈부격차로 연결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정보격차에 대한 이러한 우려가 아직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 뚜렷한 징후가 포착되고 있지는 않지만 근래 정보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 한 국가 내의 지역 간의 정보격차 문제, 선진국과 후진국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TDF(Transboader Data Flow)논쟁의 심각성을 고려할 경우, 정보 격차 문제를 단지 특정 국가차원의 문제에만 한정시키기는 어렵다.

 

 

이권우, <여행자의 서재>

'맨해튼이 굉장한 도시라는 것 외에도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또 있었다. 맨해튼은 진보정치와 진보적 사상의 중심지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온갖 종류의 불평등을 끝장내는 것이다. 또한 노동하는 남녀를 해방시키고 자신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창조적 소동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이곳에 왔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났던 지식인들은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뉴욕 외의 다른 지역은 무시했다. 또 이곳에 있는 자신의 친구들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고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주 부유하고 고립된 이기주의자에 불과했다. -  <싸구려 모텔에서 미국을 만나다>, 마이클 예이츠

 

 

도정일,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인간세계에서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불평등을 어떻게 더 큰 사회적 평등 속으로 녹여내고 불평등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조건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강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존 롤스의 두개 정의의 원칙, 1) 자유와 관련한 원칙으로 자유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2) 불평등이 인정될 수 있는 조건과 관련한 원칙으로, 일단 공정한 기회가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며 사회에서 최하층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의 편익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암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으려면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 애덤 스미스'

 

 

왕가리 마타리,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

한편 더 가난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평등 때문에 빈곤에 시달린다. 그래서 지역 환경을 지나치게 파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 가파른 비탈이나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나무와 풀을 베어 내고 농작물을 길러 대규모 토양침식이 일어나고, 아무렇게나 방목한 가축이 남김없이 풀을 뜯어먹는 바람에 목초지가 사막처럼 변한다.

 

구조적 불평등 탓에 부유한 나라에서든 가난한 나라에서든 분명 가난한 이들은 가난에서 탈출하기 어렵고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기 쉽다. 그 불평등을 인식한 그린벨트 운동은 나무를 심고 황폐해진 자연과 숲을 되살리고 식량 안보를 증진하며 물을 모아 두고 쓰레기를 줄이고 지속 가능한 기업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일에,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변화에 꼭 필요한 민주적 협치(good governance)를 정착시키기 위한 활동을 오래전부터 결합해 왔다. 민주적 협치란 지도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결정을 내리고, 경제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공평하고 책임감 있게 자원을 이용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얼마나 약자이든, 또는 처한 환경이 얼마나 불공평하든, 모든 사람은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고 몸을 일으켜 걸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린벨트 운동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나무 심기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사실로 증명했다. 지구의 상처와 우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싸움이 성공하려면 스스로 강해지는 힘이 꼭 필요하다.

 

 

존 로빈스, <인생혁명>

돈은 맥주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좋아하지만 어느 선 이상이 되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맥주 한 잔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지만 맥주 열 잔을 마신다고 행복이 열 배 늘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만 나올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소비를 늘리는 데만 집중하면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생명체 수천 종이 멸종했고, 공기와 물이 오염되었고, 기후를 좌우하는 대기 가스도 불안정해졌다. 고립되고 불안하고 욕심 많은 사람을 만들어냈고, 부의 심각한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유례없이 심각한 빚만 늘어나게 되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갖게 되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경제적인 문제가 있는데도 우리는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 더 많은 가전제품 등 역사상 그 어떤 세대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을 사들인 탓에 물건을 쌓아두는 개인용  저장고, 빌딩, 창고 등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 번성했다.

 

 

이현석, <여행자의 인문학>

"평등해야 건강하다" - 리처드 윌킨슨

 

소득불평등은 유아사망률을 높이고, 살인율을 높이고, 구속 수감 인구를 늘리고, 학업성취도를 낮추고, 정신건강을 해친다. 여기에 사회구성원 간의 불신이 더해져 불평등을 강화한다.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안녕의 각종 지표들이 아래로 향한다.

 

 

유시민, <유럽 도시 기행>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호프스테더는 권력 거리를 '각 국가의 제도와 조직에서 권력이 약한 구성원이,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포되어 있는 상태를 예기하고 받아들이는 정도'라고 정의했다.

 

불평등이 사회 공통의 법일 때는 최대의 불평등도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의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평등의 신화에서는 '욕구' 개념이 복지 개념과 결합한다. 욕구는 안도감을 주는 목적으로 가득 찬 세계를 묘사하고 이 자연주의적 인간학은 보편적인 평등을 약속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명제가 암시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욕구와 충족의 원칙 앞에서 평등하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사물과 재화의 사용가치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이다(비록 교환가치 앞에서는 불평등하고 반목하지만). 욕구는 사용가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은, 그 앞에서는 사회적, 역사적 불평등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효용 또는 자연적 합목적성의 관계다. 사용가치로서의 비프스테이크 앞에서는 프롤레타리아도 특권 계급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사회적 차이와 차별을 만들어내는데, 사회라는 이 구조적 조직체는 (특히) 부의 이용과 분배에 초를 두고 있다. ....성장이 우리를 풍부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도 않고 또 풍부함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성장 자체가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질서, 즉 특권계급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가 자신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전략적인 요소로서 성장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기술적, 경제적) 성장의 내재적 자율성은 사회구조에 의한 이 규정성에 비하면 미약하고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생활필수품 수준에서 상대적 균질화는 따라서 가치의 '점차적 변화'와 효용의 새로운 서열을 수반한다. 왜곡과 불평등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이전한 것이다. 일상적인 소비재는 점차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 되지 못하며 또한 소득도 매우 큰 불균형이 감소되고 있는 만큼, 차별기준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해간다.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지출, 구매 및 소유라는 의미에서) 소비는 사회적 지위의 변하기 쉬운 체계 속에서 현재 행하고 있는 우월한 역할을 조금씩 잃고, 그것을 다른 기준과 다른 유형의 행동에 양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소비가 모든 사람의 속성이 될 때에 그것은 더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맑은 공기에 대한 권리'가 의미하는 것은 자연재로서의 맑은 공기의 소멸과 그것의 상품지위로의 이행, 그리고 그것의 불평등한 사회적 재분배라는 사실이다. ... 자본주의 체계로의 진보라는 것은 모든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가치가 점차 생산형태로, 다시 말하면 (1) 경제적 이윤의 원천, (2)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갈망의 생산과정 자체도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사회하층에서의 체념과 상류층에서의 보다 자유로운 갈망은 욕구충족의 객관적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도 문제는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업상의 또는 문화적인 갈망보다 훨씬 더 큰 유연성을 나타내는 (물질적 또는 문화적인) 순수한 소비 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는 사회 이동의 면에서 중대한 실패를 보상하는 것일 수 있다. 소비충동은 사회계급의 수직적인 서열에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특히 하층계급의) '과소비' 갈망은 지위를 추구하는 요구의 표현인 동시에 이 요구의 실패를 체험한 데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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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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