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 풍요가 마음의 풍요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제도와 시스템, 그리고 세분화와 전문화를 통한 역할 분담이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란 표현이 생각납니다.

 

 

[본문 발췌]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으는 갖가지 가구나 물건이 결코 내면의 힘을 키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편의를 더 많이 가질수록 거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고 삶이 그만큼 더 제약을 받습니다.

 

불필요한 물품과 재화를 소유할수록 행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그만큼 줄어든다.

 

엔트로피가 에너지의 퇴화와 연계됐듯 부정가치는 가치의 퇴화와 연계될 수 있습니다. 엔트로피는 더 이상 물리적인 '일'로 전환될 수 없는 형태로 탈바꿈한 에너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부정가치'는 공용과 문화가 폐기된 결과 전통적 노동이 자급 능력을 상실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돈의 흐름이 증가하면서 사회는 더욱 해체되고 있는데도 더 많은 사람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려면 근본적으로 돈을 점점 더 늘려야 한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엔트로피는 이렇게 널리 퍼진 돈의 흐름에 따르는 사회 해체를 표현할 수 있는 솔깃한 유비로 보였습니다.

 

임금 노동을 보완하는 그림자 노동,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에 대항하여 경쟁하는 자급 노동

 

고도의 상품 환경에서는 상품이 결정하는 필요에 적절히 반응한다 해도 더 이상 그 사람의 만족을 함축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영영 뭔가가 '필요한' 상태로 이해됩니다. 필요가 무제한이 되면서 사람은 갈수록 더 궁핍해집니다. 역설적이게도, 필요의 만족을 위한다는 상품을 만드는 데에 시간과 자원을 소비할수록 사람의 욕망은 더 얕아지고 그것이 충족되는 구체적 형식에 더 무관심해집니다. 사람이 갈수록 더 궁핍해지고 가르치기 쉬워지고 욕구불만 상태로 넘어가는 문턱은 아주 낮습니다.

 

병원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을 만들어낸다. 학교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배울 능력을 빼앗고, 감옥은 죄를 양산하고, 자동차는 교통을 지체시킨다. 반생산성 단계에 이르면 제도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문제를 푸는 능력을 빼앗기고, 그 대신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도록 내몰린다. 급기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일리치는 그의 첫 저서 <의식의 축제>에서 마르크스가 리카르도 학파를 비판한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그들은 '쓸모있는 물건'만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쓸모있는 물건을 너무 많이 만들면 쓸모없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사실은 잊고 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전환을 불러일으킨다. 해석과 재사유가 가능하면, 변화의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낭만적인 생각으로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최악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부정否定의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모르는 척하면서, 행동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앞으로 달려가는 질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17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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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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