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철학이다.


[본문발췌]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그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 등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선과 악, 고귀함과 비천함,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따라다닙니다. 우리 삶 속에는 유쾌한 일도 고민스러운 일도 함께 있지요. 생활 속의 고민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가끔식 생기는 유쾌한 일들이 그런 고민을 잊게 해줍니다. 누군가 성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줄곧 어른에게 의존하며 무슨 일만 있으면 어른들의 도움을 청했지요. 주변의 낯선 세계가 두려웠고 눈앞의 험난한 현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용기는 우리 인생의 필수품이랍니다. 평생 부모의 품에 누워 응석만 부릴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겠지요.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의 탄생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불과해요.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회학적 의미의 탄생과정을 거쳐야만 하지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인생살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풍부하고 복잡하며, 인생의 문제는 영원히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불의한 재물을 위해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지는 길이에요. 가장 큰 행복은 사회에서 칭송을 받을만한 일을 하거나 어떤 신념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고결한 행동에서 비롯된답니다.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이 백 명이라면 행복에 대한 백 가지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과학자의 행복의 조건.... (세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만 갖추고 있어도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함)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 진심으로 나에게 관심을 갖는 친구가 있는가?
  •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나 모호해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작 아무도 알지 못한다. - 칸트


포기를 배우고 행복을 얻었구먼.... - 소크라테스


자연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인생의 확실한 이상이었어요. 절제와 인내, 관용만 있다면 우리는 사람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주의적 행복관을 구현해냈어요.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용서는 모든 미움을 몰아내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요...
아우렐리우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어요.
아침에 일어나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내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만나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든 또한 오만한 사람이나 남을 속이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이나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이 그런 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적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재물과 명예, 향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큰 행복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감각기관의 쾌락을 얻었을 때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점점 그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을 얻은 뒤에는 종종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또한 명예나 재물은 많이 얻을수록 욕망도 강렬해져 더 많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 느끼게되는 절망은 말로 할 수 없으며 큰 근심도 잇따라 따라오게 되지요. 이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끝도 없는 고통에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감각기관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일단 재물과 명예, 권력같은 것을 포기하면 인간의 욕망도 단순해지고 인간의 생활 역시 평온해지게 마련이랍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치 않은 요구를 줄이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행복의 정의지요.




자유는 구속받지 않는 것일까?

밀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발전'의 의의를 인생의 목적이나 행복이며, 동시에 사회진보와 인류발전의 척도라고 주장했었요. 한 사회가 어느 정도 진보했는가는 얼마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어디에서든 속박 가운데 존재한다." - 루소


자유는 인류가 가진 독특한 정신활동이자 인류와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생물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본능에 따라 생활하며 완벽하게 자연의 규율에 복종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유의 왕국을 이상으로 삼는답니다.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종종 상대적인 개념이랍니다. 하늘을 나는 매에게 공기가 없다면 과연 날 수 있을까요? 물속에서 자유로운 물고기지만 만약 물이 없다거나 물에 심각한 오염이 생긴다 해도 여전히 즐겁게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조건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사회적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제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인간은 왜 고통을 받을까?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현대 사회는 라디오, 영화, TV, 신문, 광고 등의 선진화된 전파수단을 이용해 사람들의 사유방식을 통제하며, 인간의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지요.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 매체의 조종과 제어를 받는 신세가 되었어요. 인간은 가짜가 되었고 기계가 되었으며, 영원히 순종하며 사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지요.


문명이 인류의 존재와 발전을 오히려 위협한 것이에요.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오히려 정신은 빈곤하게 됐지요.


현대인은 깊은 고독과 억압, 근심에 시달리게 됐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했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는 그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졌어요. 사람들은 쉽게 사람을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게 됐답니다. 그들은 남들과 쉽게 친해졌다가 또 쉽게 잊어버리게 됐어요. 인간관계의 변화 속도 역시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셈이지요. ...
현대인들은 풍부한 물질생활뿐만 아니라 충실하고 건전한 정신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해요.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인도주의적인 개혁이 실현될 때 진정으로 건전한 사회도 수립될 수 있어요. 현대인이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더욱 풍부한 창조성을 가지려면 인도주의적인 사회시스템과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해요. 이런 사회 속에서라야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답니다.




사람에게는 왜 신앙이 필요할까?

현대문명은 인류에게 풍부한 물질적 성과를 안겨주지만, 동시에 수많은 정신적 불안도 가져다주었어요. 바로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신앙이며, 정신적으로 의지할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길의 항구가 되어줍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정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에요. 현실의 생활 속에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날 때, 삶과 죽음의 모순이 발생할 때, 영원한 것과 찰나의 것 사이에 모순이 넘쳐날 때, 우리가 스스로 이런 모순과 충돌들을 깊이 생각해볼 때,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궁금해 할 때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신앙에 있다고 해요.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일까?

자연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인간보다 사회화의 생명개체로서의 인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사람의 모든 활동은 사회적 범위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기에 사회성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듯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물이라면, 무엇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되겠지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라고, 사회생활은 언제나 이런 성장 과정을 동반하지요. 그러나 사회는 절대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하나하나 살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조직이에요. 무수한 개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도 존재할 수 없어요. 개체의 주관적인 노력을 떠나서는 사회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답니다. 즉, 사회의 힘은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피와 땀이 어린 활동의 결과인 셈이지요.


개인이 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날 수 없답니다. 개인은 사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니까요. 이런 입자를 떠난다면 사회도 사라지고 말테지요. 결국 사람과 사회는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며, 작용하는 관계에요. 다시 말해 사회를 떠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개인을 떠난 사회는 사회가 아닌 것이지요.


자아 의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자아 의식의 성숙과 생명의 사회화는 동일한 과정임을 알 수 있어요. 자아 의식은 사회의 영향에 크게 좌우되며, 사람은 사회의 기준에 맞춰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생존의 이상에 따라 자신을 발전시키려 해요. 반면 사회화는 우리가 개성을 얻을 수 있는 전제가 되기에 사회가 없으면 자아도 있을 수 없어요. 사회는 자아의 형성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아가 없으면 사회도 있을 수 없답니다. 한 사회의 발전은 본래 많은 사람들의 힘이 발휘된 결과니까요. 그러므로 사람의 자아의식과 사회의 존재는 함께 가는 것이에요.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자아를 의식하고, 사회를 인식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발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고귀한 잠재력을 한껏 드러낸 사람들에요. 그들은 자아 의식의 기초 위에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이미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끝까지 노력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은 사람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극한으로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자아 실현의 기술과 기교를 습득했다면 우리는 스스로 운명의 설계자이자 생활의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에요.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자기 자신의 일일 뿐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도 없어요. 사람이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 즉 고독의 존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일은 죽음뿐이다. 청춘의 소년, 소녀에게나 병약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나, 부자에게나 거리의 거지에게나, 대통령에게나 일반 백성에게나 죽음은 맑은 하늘에 날아든 검은 구름처럼 불현듯 찾아옵니다.


'살찐 국왕이나 비쩍 마른 거지나 구더기의 식탁 위 두 가지 식사에 불과하거늘. 국왕은 죽었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구더기에 먹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겠지. 거지는 다시 그 구더기를 잡아다 낚시를 할 테고, 잡은 물고기는 다시 거지의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결국 국왕은 거지의 뱃속으로 마지막 행차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서 누군들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대체 생명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 햄릿


삶은 아름답지만 우리는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해요. 이는 매우 잔인한 일이에요. 죽음은 우리 삶에 대해 걱정하게 해요. 물론 이런 걱정은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하지요. 이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인류는 항상 생명의 의의에 대해 연구해야 해요. 인생은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요. 어쩌면 이런 인생의 유한성과 급박함 때문에 인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며, 현실의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는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에게 삶은 한 번 뿐이며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인가? 이는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지 못할 경우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보았어요.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또 다른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인간은 넓은 우주 속에서 기(氣)의 운동이 변화하는 것으로 스스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해요. 더욱이 어느 한 곳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에요. 삶은 그 삶에 순응하고, 죽음은 그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며,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에요.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극단인 것이에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과 시간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시간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 됩니다. 인생을 일컬어 '세상에 산다.'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시간 속에 있다.'는 뜻이지만 죽음은 엄밀히 말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이 '끝'나는 것에 불과해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육체는 다른 형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어찌 보면 하나의 가능성일 뿐 현실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일단 죽음이 현실이 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 것인지는 모두 불명확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우리는 모두 죽지만, 언제 죽을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고독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생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스스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랍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의 신과 마주하게 되면, 명예와 지위, 재물과 같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란 말로 이 깨달음의 상태를 설명했어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죽음을 수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수양하기 위함이에요. 또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함이에요. 죽음에 맞서는 것은 우리 생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지요.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15932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여행에 필요한 것.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는 것, 수용성, 자유로움, 설레임!


[본문발췌]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여행에서 철학적 문제들, 즉 실용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사고를 요구하는 쟁점들이 제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의 기술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또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은 수많은 문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과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다.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나는 데제셍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그냥 집에 눌러 앉아 얇은 종이로 만든 브리티시 항공 비행 시간표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상상력의 자극을 받는 것보다 더 나은 여행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다.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보들레르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인정했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을 내 영혼은 언제나 환영해 마지않는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나간다.
해야 할 일이 오직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우리가 여행 과정에 부여하는 가치, 목적지와 관계없는 방랑에 부여하는 가치는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주장하듯이, 약 200년 전에 이루어진 감수성의 폭넓은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 변화를 통해 이방인은 내부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 말부터는 공동체의 관행이 아니라 방랑자가 되는 것에서 동료 의식이 생긴다. 따라서 자연과 공동체의 매개는 일반적인 사회의 엄격함, 냉혹한 금욕, 이기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본질적인 고립과 침묵과 외로움에 맡겨지게 된다.' - 레이먼드 윌리엄스, <시골과 도시>
우리가 휴게소와 모텔에서 시를 발견한다면, 공항이나 열차에 끌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건축학적인 불완전함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그 야한 색깔과 피로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이런 고립된 장소에서는 이미 터가 잡힌 일반적인 세상의 이기적인 편안함이나 습관이나 제약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은연중에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이라는 말을 좀 더 일시적이고 사소한 맥락에서 생각한다면, 외국에서 만나는 장소의 매력은 새로움과 변화라는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고향에는 말이 있을 만한 곳에 낙타가 있다거나, 고향에는 기둥을 세운 아파트 건물이 있을 만한 곳에 장식이 없는 아파트 건물이 있다거. 그러나 좀 더 심오한 기쁨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외국의 요소들이 새롭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나 신조에 좀 더 충실하게 들어맞기 때문에 귀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고향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현대성이 미학적 단순성의 결여, 도시적 삶에 대한 저항, 그물 커튼을 걸어두는 심리에 대한 불만.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홈볼트의 호기심의 수준이 나의 수준보다 한참 높았던 것은 사실을 찾아 나선 여행자는 구경을 하려는 목적을 가진 여행자에 비해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쓸모가 있다. 쓸모에는 (그것을 인정하는) 청중이 따른다.


내가 알게 된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보다는 나에게 개인적인 유익을 준다는 점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했다. 나의 발견은 나에게 생기를 주어야 했다. 그 발견들이 어떤 면에서는 '삶을 고양한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했다.
'삶을 고양한다'는 표현은 원래 니체가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3년 가을에 탐험가나 학자처럼 사실을 수집하는 일과 내적이고 심리적인 풍요를 목적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이용하는 일을 구별했다. 대학 교수는 예외적인 일이었지만, 니체는 앞의 행동을 모욕하고 뒤의 행동을 찬양했다. 그는 진정한 과제는 '삶'을 고양하기 위해 사실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괴테의 문장을 인용했다.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훔볼트의 흥분은 세상을 향해 올바른 질문을 가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언해준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파리를 보았을 때 약이 올라 파리채를 휘두를 수도 있고 산을 달려 내려가 <식물 지리론>을 쓰기 시작할 수도 있다.
여행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사물을 볼 때는 질문이 떠오르지 않으며, 질문이 없으므로 흥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보통은 질문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뭔가가 떠오를 때는, 엉뚱한 것이 떠오르는 경향이 있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 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자연은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하는 불가결한 약' - 워즈워스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 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동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워즈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그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에는 다소간 순응성이 있다는 원칙, 즉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때로는 사물-에 따라 변한다는 원칙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반면, 어떤 사람과 함께 있으면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가 일어난다.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조지프 에디슨은 <상상력의 기쁨에 관한 에세이>라는 글에서 "광활하게 트인 시골, 개발되지 않은 넓은 사막, 첩첩이 늘어선 거대한 산맥, 높은 바위와 절벽과 넓은 물" 앞에서 "기쁨을 주는 고요한 놀라움"을 느낀다고 썼다. 힐테브란트 제이컵은 <숭고에 의해 정신이 고양되는 방식>이라는 글에서 우리가 이 귀중한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높은 장소와 물건들의 목록을 나열했다. 잔잔하거나 폭풍우가 치는 넓은 바다, 석양, 절벽, 동굴, 스위스의 산맥.


하느님은 착하게 살았는데도 왜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는 욥의 질문을 받자 욥의 눈길을 자연의 엄청난 현상으로 돌린다. 하느님은 말한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네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 네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 것,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다. 숭고한 곳들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하찮음과 연약함을 생각하도록 하라.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로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객으로서 어떤 화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특징을 그 화가가 골라냈다고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가 어떤 장소를 규정할 만한 특징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냈다면, 우리는 그 풍경을 여행할 때 그 위대한 화가가 그곳에서 본 것을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니체가 알고 있었듯이, 현실 자체는 무한하며 예술로는 결코 모두 나타낼 수가 없다.


사실 예술 단독으로 열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예술은 예술가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정서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를 하고, 우리가 이전에는 모호하게만 또는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좀 더 의식하도록 안내할 뿐이다.


아름다움을 만나면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존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1.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2.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3.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4.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5.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림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것을 우리 손으로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슨하게 관찰하는 데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게 되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좀 더 확고한 기억을 가지게 된다.


한군데 가만히 앉아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해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튼튼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사람에게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해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기쁨은 결코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적극적이며 의식적으로 보기 위한 보조 장치로 사진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대체하는 물건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전보다 세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었다. 사진이 자동적으로 세상의 소유를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풍경의 진정한 소유는 그 요소들을 살피고 그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에 달려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이 기억 속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엇을 그릴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전에 내가 카메라를 잡는 동기가 되었던 욕구, 즉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의 안내를 받는 것이 합당할 것 같았다. 러스킨의 말을 빌리면, "당신의 예술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개껍질이나 돌멩이에 대한 찬양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득은 어떤 풍경이나 건물에 이끌리는 이유를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우리의 취향에 대한 설명을 얻게 되며, '미학', 즉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감명 깊은 장면을 좀 더 빠르게 분석하여, 감동을 주는 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집어낼 수 있다.


존 러스킨,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스케치를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사람은 그런 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녹색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궤뚫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끼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 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이어 동굴처럼 속이 빈 줄기와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가파른 둑을 움켜쥐고 있는 뒤틀린 뿌리들이 나타난다. 잔디가 덮인 비탈에는 수많은 색깔의 꽃들이 상감 세공처럼 새겨져 있다.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녹색 길을 통과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할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왔을 뿐이다.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의 작품은 심오하고 의미심장한 통찰로부터 출발했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거의 매일 이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이 길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나의 목표에 도움을 주는 정보만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보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민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얼굴과 표정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건물의 모양이나 가게 안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동안 거리를 나의 관심의 틀에 맞추어놓고 살아왔다. 이 틀에는 금발의 아이들이나 소스 광고, 보도에 깔린 돌이나 가게 진열장의 색깔, 일 보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연금 생활자들의 표정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따. 일차적 목표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공원을 구경하거나 단일한 블록 안에 뒤섞여 있는 조지 시대, 빅토리아 시대, 에드워드 시대의 건축물들에 대해 생각해볼 마음이 나지 않았다 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 연상적인 사고, 경이감이나 고마움, 시각적 요소에 의해 촉발되는 철학적 일탈은 잘려나갔다.


여러가지 불평들의 공통점들 - 늘 이기심이 문제고, 늘 맹목성이 문제다 - 을 생각해보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게 불평한다는 오래된 심리학적 진리.


혼자 연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니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 - 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 - 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 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의에 코르크처럼 까닥 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85027

반응형
Posted by 소요유+
,

고뇌, 괴로워하고 번뇌하다.

결국 괴로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조건이라고?

 

부처도 고뇌속에 고뇌를 떨쳐버림으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가. 고뇌를 벗어나야 자유로운데 고뇌가 인간의 본질이고 조건이라면 인간의 삶은 불행한 것이 아닌가?

 
 

[본문발췌]

 
 
모든 인간은 자기가 겪는 그 고뇌를 닮는 것이죠.
 
고통이란 그것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데 대개 고통은 죽음으로 끝나거든.
그렇군요. 하지만 그것은 아마 남자들의 생각이겠죠. 나로서는, 말하자면 한 여자로서는 고통이란 - 좀 이상하지만 -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하게 하거든요. 아마 여자는 애를 낳기 때문이지.
 
남의 소리는 귀로 듣고, 자기 소리는 목구멍으로 듣는다. 그렇다. 자기 생명도 목구멍으로 듣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생명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에게는 고독이 있다. 고독은 무수한 인간들의 배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마치 희망과 증오로 충만된 활량한 도시를 뒤덮고 있는 이 깊은 밤의 배후에 커다란 원시의 밤이 존재하듯이...
 
인간의 극도로 긴장된 모습은 어딘가 비인간적인 인상을 준다. 그건 우리들이 우리들의 약점을 통해서만 서로 쉽게 접촉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본질은 고뇌이고, 자기 자신의 숙명에 대한 인식이며, 거기서 모든 공포가 생긴다는 거야. 죽음의 공포까지도.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거야. 그것은 자기 마음속을 좀 깊숙이 살펴보면 알 수 있어. 다행히 사람은 행동할 수 있거든.
 
남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고뇌를 희생하며 남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이야.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알았어.
 
노동자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입니다. 죽지 않는 한 말이지요 인간이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어떤 사상을 위해서 버린다는 것은 인류의 독특한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인간이, 글쎄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견디어낸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겠지요.
인간이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는 모든 사상은 이 조건의 바탕을 막연하나마 인간의 존엄 위에 놓고, 그 올바름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테면 옛날의 노예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시민에게는 국가가, 그리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줄곧 중독되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아편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나라에는 마약이 있고, 서양에는 여자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아마도 연애가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인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은 아마도 권력에 무관심한지도 모르지요. 권력이라는 생각이 인간을 매혹하는 것은, 말하자면 현실의 권력이 아니라 권력 덕분에 이것저것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다는 환상 때문입니다. 왕좌의 권력은 다스리는 데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보통 인간에게는 다스린다는 욕망은 없어요. 그야말로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강제하고 싶어합니다. 인간 세계에서 인간 이상의 것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죠.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해지려고 말입니다. 이 가공의 병은 - 권력에의 의지는 지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 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되기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신은 소유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정복하는 힘은 갖고 있지 않아요. 신의 이상은 자기 힘을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꿈은 자기의 인격을 잃지 않고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력에 의지라기보다도 조직에의 의지다.
 
그의 권력에의 의지는 결코 그 목적에 도달하는 일 없이 부단히 그 목적물을 새롭게 바꿔나가야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문명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고뇌에 찬 요소 - 이를테면 노예에 있어서의 굴욕이나 현대 노동자에 있어서의 노동 따위 - 가 별안간 하나의 가치가 되었을 때, 즉 이 굴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에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또 이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생존 이유를 찾는 것이 문제가 될 때, 문명의 본질은 변한다. 여태껏 무덤으로 가득 찬 일종의 교회에 지나지 않았던 공장은 지난날의 대성당 같은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곳에서 여러 신 대신 대지와 싸우고 있는 인간의 힘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확실히 인간의 가치는 자기 힘으로 변화시킨 것에 의해서만 측정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인생을 속일 수 있어. 하지만 결국에는 인생이 언제나 우리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지. 모든 늙은이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야. 그렇지 않니? 많은 노후가 공허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허하다는 것이지. 사람들은 그것을 숨기고 있을 뿐이야. 하기야 그런 일도 별로 대단할 건 없지만. 인간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 있는 것은 관조의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거야.
 
고뇌에 근거를 두지 않은 인간의 존엄이란 없으니까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6885576

반응형

'4.읽고쓰기(reading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우화 - 류콴홍  (0) 2022.03.19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0) 2022.03.12
파수꾼 - 하퍼 리  (0) 2022.02.26
둔황 - 이노우에 야스시  (0) 2022.02.20
여유, 만족 그리고 느림의 미학  (0) 2022.02.15
Posted by 소요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