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철학이다.
[본문발췌]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그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탄생과 죽음, 사랑과 미움, 괴로움과 즐거움, 행복과 불행 등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선과 악, 고귀함과 비천함, 성공과 실패, 고통과 즐거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함께 따라다닙니다. 우리 삶 속에는 유쾌한 일도 고민스러운 일도 함께 있지요. 생활 속의 고민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가끔식 생기는 유쾌한 일들이 그런 고민을 잊게 해줍니다. 누군가 성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줄곧 어른에게 의존하며 무슨 일만 있으면 어른들의 도움을 청했지요. 주변의 낯선 세계가 두려웠고 눈앞의 험난한 현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용기는 우리 인생의 필수품이랍니다. 평생 부모의 품에 누워 응석만 부릴 수는 없어요.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겠지요.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생물학적 생명의 탄생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에 불과해요.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회학적 의미의 탄생과정을 거쳐야만 하지요.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인생살이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풍부하고 복잡하며, 인생의 문제는 영원히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한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재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거나 불의한 재물을 위해 남을 다치게 하는 것은 행복에서 멀어지는 길이에요. 가장 큰 행복은 사회에서 칭송을 받을만한 일을 하거나 어떤 신념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고결한 행동에서 비롯된답니다.
행복이란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므로 사람이 백 명이라면 행복에 대한 백 가지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과학자의 행복의 조건.... (세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만 갖추고 있어도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함)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또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 진심으로 나에게 관심을 갖는 친구가 있는가?
-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나 모호해서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작 아무도 알지 못한다. - 칸트
포기를 배우고 행복을 얻었구먼.... - 소크라테스
자연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인생의 확실한 이상이었어요. 절제와 인내, 관용만 있다면 우리는 사람의 모든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주의적 행복관을 구현해냈어요.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용서는 모든 미움을 몰아내고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요...
아우렐리우스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어요.
아침에 일어나 자신에게 말하라. 오늘 내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을 만나든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든 또한 오만한 사람이나 남을 속이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이나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그들이 그런 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적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재물과 명예, 향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가장 큰 행복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바로 이 세 가지 조건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통 감각기관의 쾌락을 얻었을 때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점점 그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을 얻은 뒤에는 종종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또한 명예나 재물은 많이 얻을수록 욕망도 강렬해져 더 많은 명예와 재물을 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희망이 물거품이 되면 느끼게되는 절망은 말로 할 수 없으며 큰 근심도 잇따라 따라오게 되지요. 이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끝도 없는 고통에 빠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감각기관의 쾌락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추구한답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일단 재물과 명예, 권력같은 것을 포기하면 인간의 욕망도 단순해지고 인간의 생활 역시 평온해지게 마련이랍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치 않은 요구를 줄이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주장한 행복의 정의지요.
자유는 구속받지 않는 것일까?
밀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발전'의 의의를 인생의 목적이나 행복이며, 동시에 사회진보와 인류발전의 척도라고 주장했었요. 한 사회가 어느 정도 진보했는가는 얼마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어디에서든 속박 가운데 존재한다." - 루소
자유는 인류가 가진 독특한 정신활동이자 인류와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다른 어떤 생물도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본능에 따라 생활하며 완벽하게 자연의 규율에 복종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게 생각하며 자유의 왕국을 이상으로 삼는답니다.
모든 자유에는 조건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유는 종종 상대적인 개념이랍니다. 하늘을 나는 매에게 공기가 없다면 과연 날 수 있을까요? 물속에서 자유로운 물고기지만 만약 물이 없다거나 물에 심각한 오염이 생긴다 해도 여전히 즐겁게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요? 사회적 조건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사회적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전제의 자유입니다.
자유는 완벽하게 자신의 일이며, 자아의 선택에는 어떤 기준도 없답니다. 자유는 행동을 의미하고, 이런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절망과 고통을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진정한 고통은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지요. 사람은 자유가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일은 알 수 없는 동시에 또한 가능한 것이기에 과거나 현재, 미래와 대면했을 때 인간은 일종의 막연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유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 흔히 말하는 절대자유란 이런 사실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선택에는 대가가 뒤따르기 마련이에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지요.
인간은 왜 고통을 받을까?
쇼펜하우어는 늘 인생은 고통과 불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런 고통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의 생존의지에 있었지요. 이런 생존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맹목적인 충동과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런 충동과 욕망이 생명의 본질인 고통을 결정해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며, 그도 안 된다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대개 이루어지기 어렵고, 사람은 더욱 강하게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지요. 인간의 충동과 욕망은 끝이 없어요.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바로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만족은 잠시뿐 욕망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어요. 모든 만족은 또 다른 욕망의 출발점일뿐이지요.
현대 사회는 라디오, 영화, TV, 신문, 광고 등의 선진화된 전파수단을 이용해 사람들의 사유방식을 통제하며, 인간의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지요.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 매체의 조종과 제어를 받는 신세가 되었어요. 인간은 가짜가 되었고 기계가 되었으며, 영원히 순종하며 사는 자아를 가지게 되었지요.
문명이 인류의 존재와 발전을 오히려 위협한 것이에요. 물질이 풍부해질수록 오히려 정신은 빈곤하게 됐지요.
현대인은 깊은 고독과 억압, 근심에 시달리게 됐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애완동물을 키우기 시작했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는 그 유효기간이 갈수록 짧아졌어요. 사람들은 쉽게 사람을 만났다가 쉽게 헤어지게 됐답니다. 그들은 남들과 쉽게 친해졌다가 또 쉽게 잊어버리게 됐어요. 인간관계의 변화 속도 역시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셈이지요. ...
현대인들은 풍부한 물질생활뿐만 아니라 충실하고 건전한 정신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해요. 정치와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방면에서 인도주의적인 개혁이 실현될 때 진정으로 건전한 사회도 수립될 수 있어요. 현대인이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더욱 풍부한 창조성을 가지려면 인도주의적인 사회시스템과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해요. 이런 사회 속에서라야 사람들은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답니다.
사람에게는 왜 신앙이 필요할까?
현대문명은 인류에게 풍부한 물질적 성과를 안겨주지만, 동시에 수많은 정신적 불안도 가져다주었어요. 바로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이 신앙이며, 정신적으로 의지할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신앙은 우리 인생길의 항구가 되어줍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사람은 정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에요. 현실의 생활 속에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날 때, 삶과 죽음의 모순이 발생할 때, 영원한 것과 찰나의 것 사이에 모순이 넘쳐날 때, 우리가 스스로 이런 모순과 충돌들을 깊이 생각해볼 때,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를 궁금해 할 때 그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신앙에 있다고 해요.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일까?
자연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인간보다 사회화의 생명개체로서의 인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사람의 모든 활동은 사회적 범위 안에서 전개되는 것이기에 사회성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듯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물이라면, 무엇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되겠지요.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라고, 사회생활은 언제나 이런 성장 과정을 동반하지요. 그러나 사회는 절대로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하나하나 살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조직이에요. 무수한 개체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 전체도 존재할 수 없어요. 개체의 주관적인 노력을 떠나서는 사회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답니다. 즉, 사회의 힘은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피와 땀이 어린 활동의 결과인 셈이지요.
개인이 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 개인을 떠날 수 없답니다. 개인은 사회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니까요. 이런 입자를 떠난다면 사회도 사라지고 말테지요. 결국 사람과 사회는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며, 작용하는 관계에요. 다시 말해 사회를 떠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개인을 떠난 사회는 사회가 아닌 것이지요.
자아 의식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자아 의식의 성숙과 생명의 사회화는 동일한 과정임을 알 수 있어요. 자아 의식은 사회의 영향에 크게 좌우되며, 사람은 사회의 기준에 맞춰 자신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생존의 이상에 따라 자신을 발전시키려 해요. 반면 사회화는 우리가 개성을 얻을 수 있는 전제가 되기에 사회가 없으면 자아도 있을 수 없어요. 사회는 자아의 형성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아가 없으면 사회도 있을 수 없답니다. 한 사회의 발전은 본래 많은 사람들의 힘이 발휘된 결과니까요. 그러므로 사람의 자아의식과 사회의 존재는 함께 가는 것이에요. 인생이란 여행길에서 자아를 의식하고, 사회를 인식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발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은 모두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고귀한 잠재력을 한껏 드러낸 사람들에요. 그들은 자아 의식의 기초 위에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장애를 극복하고, 이미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끝까지 노력해요. 자아를 실현한 사람들의 본질적인 특징은 사람의 잠재력과 창조력을 극한으로 발휘한다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자아 실현의 기술과 기교를 습득했다면 우리는 스스로 운명의 설계자이자 생활의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에요.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자기 자신의 일일 뿐이며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도 없어요. 사람이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스스로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 즉 고독의 존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일은 죽음뿐이다. 청춘의 소년, 소녀에게나 병약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나, 부자에게나 거리의 거지에게나, 대통령에게나 일반 백성에게나 죽음은 맑은 하늘에 날아든 검은 구름처럼 불현듯 찾아옵니다.
'살찐 국왕이나 비쩍 마른 거지나 구더기의 식탁 위 두 가지 식사에 불과하거늘. 국왕은 죽었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구더기에 먹혀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가겠지. 거지는 다시 그 구더기를 잡아다 낚시를 할 테고, 잡은 물고기는 다시 거지의 뱃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결국 국왕은 거지의 뱃속으로 마지막 행차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서 누군들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겠는가? 죽음 앞에서 대체 생명의 의미란 무엇인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 햄릿
삶은 아름답지만 우리는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해요. 이는 매우 잔인한 일이에요. 죽음은 우리 삶에 대해 걱정하게 해요. 물론 이런 걱정은 우리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게 하지요. 이런 걱정에서 벗어나려면 인류는 항상 생명의 의의에 대해 연구해야 해요. 인생은 마치 쏘아놓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요. 어쩌면 이런 인생의 유한성과 급박함 때문에 인류는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갈구하며, 현실의 생활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됐는지도 몰라요.
모든 사람에게 삶은 한 번 뿐이며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인가? 이는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예요. 그렇지 못할 경우 이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말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보았어요.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해 사는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실존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또 다른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인간은 넓은 우주 속에서 기(氣)의 운동이 변화하는 것으로 스스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해요. 더욱이 어느 한 곳에서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에요. 삶은 그 삶에 순응하고, 죽음은 그 죽음에 순응하는 것이지요.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으며,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에요.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극단인 것이에요.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과 시간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요. 사람은 시간 속에 살고, 시간은 인간 존재의 조건이 됩니다. 인생을 일컬어 '세상에 산다.'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시간 속에 있다.'는 뜻이지만 죽음은 엄밀히 말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이 '끝'나는 것에 불과해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육체는 다른 형식으로 변화하기 때문이지요.
죽음이란 어찌 보면 하나의 가능성일 뿐 현실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일이니까요. 일단 죽음이 현실이 된다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 것인지는 모두 불명확합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하자면 우리는 모두 죽지만, 언제 죽을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진정한 존재의 고독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의 생명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스스로 대신해야 하는 것이랍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있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죽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의 신과 마주하게 되면, 명예와 지위, 재물과 같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란 말로 이 깨달음의 상태를 설명했어요.
사람이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인생의 유한성과 독특성이에요. 우리 생명의 시작과 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지만 짧은 생명이란 과정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힘을 발휘할 공간은 남아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인생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랍니다.
죽음을 수양하는 것은 곧 생명을 수양하기 위함이에요. 또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함이에요. 죽음에 맞서는 것은 우리 생활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 위함이지요. 사람에게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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