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물의 본질과 주변 환경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보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 발췌]

 
"이 나라에 대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언젠가는 정부가 괴물 같아져서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은 짓밟힐 거란 거야, 그러면 이 나라에서 살 가치가 없어질테지. 이 지겨운 세상에서 아직 미국을 독보적인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것은 누구든 생각이 허락하는 한 어디에든 이를 수 있고 또 원한다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인간의 탄생은 대단히 불쾌해. 번잡하고 극도로 고통스러워, 때로는 위험할 정도야. 언제나 피를 흘리지. 문명도 그와 마찬가지야"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도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 거지. 적을 비난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게 더 현명한 거야"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다가 조직의 편제에 정말로 위험한 그 무엇에 길을 터주게 되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해. 그게 어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말이다.
 
제퍼슨은 정식 시민의 신분은 각자가 획득해야 하는 특권이지 가벼이 주어지거나 가벼이 취급되어서는 안 될 무엇이라고 믿었단다. 제퍼슨이 보는 바로는,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이 허락될 수는 없었어. 제퍼슨에게 투표는 공존공영의 경제 체제에서 각자가 스스로 획득하는 소중한 특권이었단다.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
너는 너만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어딘가에서 그 양심을 따개비처럼 네 아버지에게 붙여놓았던 거야. 자라나면서, 또 어른이 되고도, 너 자신도 전혀 모르게 너는 네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혼동하고 있었던 거야. 인간의 심장을 가진, 인간의 결점을 가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지. 그것을 깨닫는 게 쉽지 않았으리란 것은 내가 인정한다. 형은 실수를 범하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형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실수를 하기는 해 너는 정서적 불구자였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항상 네 답이 곧 아버지의 답일 거라 가정하고 답을 구해 왔지.

어제 또는 10년 전을 돌이켜 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는 언제나 쉬워. 그러나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광장히 어렵지.
 
친구에게 네가 필요할 때는 친구가 틀렸을 때란다. 친구가 옳을 때는 네가 필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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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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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
 
[본문발췌]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의 삶을 새삼 확인하면서도 이를 비관적으로 응시하거나 격앙된 슬픔의 감정을 토로하는 대신, 덧없는 인간의 존재를 무한한 애정으로 포용하려는 차분하고 절제된 시각을 획득하는 것이다. 웅대한 자연의 질서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인간이란 극히 제한된 시간을 할애받은 초라한 존재에 불과하며,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결국 고독하고 허무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 인식...
 
진사시험 당일 뜻하지 않은 실수로 의외의 인생행로를 걷게 되는 조행덕...
저돌적이고 용맹한 성격의 소유자인 주왕례와의 만남으로 인해 서하의 한족 부대에 참가하게 되며, 그와의 인간적 교류는 문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했던 행덕의 가치관을 근저에서 변화시키는 한편, 마지막까지 그의 삶의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위구르 왕족 여인과의 만남과 죽음을 통해 행덕은 인간의 운명적 요소에 대한 응시를 거쳐, 불교와 같은 종교가 지향하는 어떤 영원한 것에 대한 구도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행덕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가 흥미로웠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역사의 유구한 흐름에 비하면 인간의 삶의 영위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을 인간이 노력을 통해 후대에 남기고 전달하려 할 때, 아무리 비정한 역사라 해도 이를 외면하지 않는 법이다.
 
나라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종교와 민족, 그리고 역사의 결연한 흐름 속에서 시대의 추이와 인간들의 삶을 묵묵히 응시해온 위대하고 유구한 자연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새삼 자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둔황>을 비롯한 그의 역사소설의 참된 가치는 항상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인식하고, 역사의 흐름에 좌우되는 인간의 운명을 묘사하면서도 단순히 역사 속의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을 유유히 흐르고 지탱하는 고독한 '시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도려내어 응시하는 가운데, 고독과 허무, 방랑으로 채색된 인간의 삶과 죽음의 근원적 의미를 제시하는 점에 찾아야 할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6355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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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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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소비, 정보의 양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고 소통과 이동의 속도가 빨라진 사회를 살며 여유, 만족, 느림을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간의 여유, 물질적 여유, 깊고 넓은 지식, 마음의 여유!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이 그 기준을 한 없이 늘리기 때문에 양적으로만 많다고 여유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여유와 적당한 만족이 있다면 적은 양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정철의 <불법사전>을 보면 '여유있게 사는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1. 시계를 자주 보지 않는 것. 조급한 사람은 시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2. 나이를 자주 묻지 않는 것. 조급한 사람은 세월을 붙잡으려고 헛힘을 쓴다.
  3. 남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조급한 사람은 대화에서도 도로에서도 꼭 끼어든다.
  4. 위에서 내린 세 가지 정의를 외우려고 하지 않고 그냥 흘려듣는 것. 나중에 정의가 필요한 그 순간에 생각나는 여유로운 그림을 내놓는 것.
  5. 미리미리 대답을 생각해두지 않는 것. 정답은 이거라고 서둘러 결론짓지 않는 것.
  6. 이렇게 같은 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도 짜증내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주는 것.



여유와 더불어 생활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만족할 줄 아는 삶이 필요하다.
유교경에 "족함을 모르는 자는 부유해도 가난하고, 족함을 아는 자는 가난해도 부유하다."고 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지더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빨리빨리"가 익숙한 세상에 잠시 느리게 움직여보고 지름길이 있더라도 가끔은 가보지 않은 길을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이다. 매일 같은 길로 앞만 보고 다닌다면 어떻게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과 경험을 할 수 있겠는가.

댄스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댄스를 배우는 초보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춤 동작을 배우는 과정에 "슬로우~~슬로우~~퀵~퀵"을 외치며 춤을 가르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바쁘고 삶이 버겁더라도 잠시 쉼표,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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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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