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로봇 자동화 및 휴머노이드, 뉴럴링크의 뇌에 심는 컴퓨터칩으로 뇌와 연결-통제를 통한 질병치료, 스페이스X의 발사체로 스타링크를 구축하여 지상 통신망이 없는 곳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하고 행성간 우주선을 개발하여 화성으로의 여행과 이주를 꿈꾸며, 태양광 지붕으로 자가발전을 하고 스마트그리드와 연결하여 분산 에너지 혁명을 이끌고 있는 일론 머스크.
 
AI, 에너지 전환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업들에 트위터(X)까지 더한 커뮤니케이션 혁신까지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본문발췌]

로로프 보타는 말한다. "기업가는 사실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기업가는 리스크를 완화하는 사람이에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번창하려 하지도 않고 리스크를 증폭시키려 하지도 않죠. 대신 통제 가능한 변수를 파악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머스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우리가 물러설 수도 없게 배를 불태워버리는 데 몰두했어요." 보타가 보기에 머스크의 맥라렌 사고는 그런 성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속페달을 있는 대로 밟고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보려다 난 사고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항상 리스크를 제한하는 데 집중하던 틸과 머스크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리스크 중독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는 면에서는 유용할 수도 있었다.
호프먼은 말한다. "머스크는 놀랍도록 성공적으로 사람들이 사막을 가로질러 행진하게 만들곤 하지요. 그는 모든 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칩을 테이블에서 거두지 않고 계속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 그것은 그의 인생의 주제가 되었다.


"내가 간과했던 것은 일론은 사명으로 일을 시작해서 나중에는 그것을 재정적으로 성공시키는 방법까지 찾아낸다는 점이었어요. 바로 그런 면이 그를 경외감이 들 정도의 강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지요." - 리드 호프먼


공장을 설계할 때 머스크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제조 팀이 모두 함께 모여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따랐다. "조립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디자이너나 엔지니어를 붙잡아 세우고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만든 거요?'라고 따질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머스크가 뮬러에게 설명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자기 손을 올려 놓으면 뜨거워지자마자 바로 떼어내지만, 다른 사람의 손이 올라가 있으면 무언가 조치를 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마련이지요."


"머스크에게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냥 해보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잘 안되면 그 이유를 설명하면 되는 겁니다." - 톰 뮬러


머스크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했다. "엔지니어처럼 생각하는 디자이너와 디자이너처럼 생각하는 엔지니어를 창출하겠다는 비전이 있었던 겁니다." 폰 홀츠하우젠의 말이다. 이것은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가 애플에 주입한 원칙, 즉 디자인이 단순한 미학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진정한 산업 디자인은 제품의 외관과 엔지니어링을 연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 결과다. 잡스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디자인은 겉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디자인의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는 개념은 없습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이며, 결국 그 영혼이 겉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머스크의 생산 알고리즘

  1. 모든 요구사항에 의문을 제기한다. 
  2. 부품이든 프로세스든 가능한 한 최대한 제거하라. 나중에 다시 추가해야 할 수도 있다. 사실, 10퍼센트 이상 다시 추가하지 않게 된다면 충분히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3. 단순화하고 최적화하라. 
  4. 속도를 높여 주기를 단축하라. 
  5. 자동화하라. 

 
레고 조각은 10미크론(100만분의 1미터) 이내의 정확성과 동일성을 자랑하는데, 이는 어떤 부품이든 다른 부품으로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 부품도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머스크는 말한다. “정밀도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요. 정밀도는 대부분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얼마나 신경을 쓰느냐의 문제이거든요. 정밀하게 만들고 싶으면, 정밀하게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소유물은 사람을 짓누르며 공격의 빌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 돌아와 직접 로켓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한 이후 머스크는 자체적으로 ‘바보 지수idiot index’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부품의 총 비용에 대한 원자재 비용의 비율을 계산해 뽑는 지수였다. 바보지수가 높은 부품(예커내, 원자재인 알루미늄 가격은 100달러에 불과한데 그것으로 만든 부품은 1,000달러에 달하는 경우)은 설계가 복잡하거나 제조공정이 너무 비효율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머스크는 사람들이 안락과 여가를 우선시하고 싶어지면 회사를 떠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관찰해서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범용 로봇으르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경제를 엄청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도 있겠지요. 일은 선택이 될 수 있고요.” 머스크는 약간 더듬거리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옵티머스를 테슬라의 자율주행차 계획 및 도조 슈퍼컴퓨터와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는 옵티머스가 코드로 지시받을 필요 없이 직접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처럼 관찰을 통해 스스로 학습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의 경제는 물론이고 삶의 사고방식까지 혁신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새로운 엔진의 개발로 건너뛴 조치의 요점은 모든 관계자를 대담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위대한 모험을 위한 엔진입니다.” 머스크가 팀원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성공 확률이 0보다 높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실행에 옮기세요! 우리가 바꿔놓은 것이 너무 모험적인 것으로 드러나면, 그러면 후진하면 됩니다.” 기본 지침은 군더더기 없는 ‘린lean’ 엔진을 만드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가죽을 벗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죽을 벗긴 후의 모습이 어떠할지 아는 것입니다. 정답은 근육질만 남은 멋진 모습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연결 부위는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의 장치로 가야 해요.” 낙담한 뉴럴링크 엔지니어들에게 머스크가 말했다. “전선도, 연결도, 라우터도 없는 하나의 우아한 패키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오.” 모든 기능을 하나의 장치에 담는 것을 막는 물리 법칙이나 기본 원칙은 없었다. 엔지니어들이 라우터의 필요성을 설명하려 하자 머스크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제거하시오.” 그가 말했다. “제거, 제거, 제거”


“나는 그저 스페이스X를 통해 사람들을 화성에 보내고, 스타링크를 통해 정보의 자유를 구현하고, 테슬라를 통해 지속 가능한 기술을 가속화하며, 사람들을 운전의 고단함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가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도 확실이 어느 정도 좋은 의도로 포장될 수 있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나쁜 의도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는 선하다는 얘기였다.


머스크에게 CEO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말 다정한 것”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격언 중 하나는 경영자가 호감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일련의 규칙을 따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하여 기술을 습득한다. 그것이 바로 앨런 튜링이 1950년 논문 <컴퓨팅 기계와 지능>에서 구상했던 머신러닝에 대한 접근방식이었다.


슈로프는 신경망 플래너가 규칙 기반의 접근방식보다 더 효과적인 사례를 머스크에게 보여주었다. 슈로프가 준비한 데모 영상에는 쓰레기통과 쓰러진 트래픽콘, 이런저런 파편 등으로 뒤덮인 도로가 등장했다. 신경망 플래너의 안내를 받은 자동차는 그런 장애물을 피해 자선을 넘고 필요한 경우 몇 가지 규칙까지 어기며 주행했다. “이것이 바로 규칙 기반에서 네트워크 경로 기반으로 전환하는 경우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슈로프가 그에게 말했다. “이 기능을 작동하면 체계가 없는 환경에서도 차가 충돌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대한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는 능력은 자율주행 자동차부터 옵티머스 로봇, 챗GPT 유형의 봇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AI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머스크는 이제 자율주행차에서 수집되는 영상과 매주 트위터에 올라오는 수십억 개의 게시물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실시간 데이터의 원천을 보유했다.


컴퓨터의 지능의 양은 스테로이드를 맞은(즉 강화된) 무어의 법칙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생물학적 두뇌 능력이 디지털 두뇌 능력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이게 될 것이 자명했다. 더욱이 새로운 AI 머신러닝 시스템은 스스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결과물을 생성하는 방법을 스스로 학습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자체이 코드와 기능을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었다. ‘특이점singularity’은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과 공상과학 작가 버너 빈지가 인공지능이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기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머스크는 낮고 불길한 어조로 “그런 일이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문명이 쇠퇴하는 방식이에요. 더 이상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거 말이에요. 그렇게 리스크 감수를 멈추면 동맥이 굳어지게 돼요. 매년 심판은 많아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은 더 이상 고속 철도나 달에 가는 로켓 같은 것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성공을 너무 오래 향유하면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욕구를 상실하게 되지요.”


머스크로 하여금 장대한 위업에 도전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의 대담성과 자만심이다. 그렇다면 그런 대담성과 자만심은 그의 나쁜 행동 방식과 냉담함, 무모함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개자식처럼 구는 겨우에 대한 변명까지 될 수 있을까? 물론 대답은 ‘아니오’이다. 
누구든 사람의 좋은 특성은 존경하고 나쁜 특성은 매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닥들이 어떻게 함께 엮여 있는지,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단단히 엮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천 전체이 실을 풀지 않고는 어두운 부분을 제거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모든 영웅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결점은 비극을 낳고 어떤 결점은 극복된다. 우리가 악당으로 보는 인물도 복잡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도 “결점으로 주조된다”라고 썼다.


과연 절제된 머스크가 구속되지 않은 머스크만큼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여과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 머스크라는 인물의 본질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는 아닐까? 안정적이든 혼란스럽든 그의 모든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로켓을 궤도에 올릴 수 있고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위대한 혁신가들은 배변 훈련을 거부하고 리스크를 자청하는 어른아이일 수 있다. 무모하고,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때로는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미치광이일 수도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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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편리함 속에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은 줄고 점점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본문발췌]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똑똑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걸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해진 세계에서, 그들은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이다. 

조용한 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듣는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실패투성이 인간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인생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다 공짜다.
 


씨알을 심는 농부는 기다림을 산다.
 기다림은 씨앗이 땅에 심기었다는 믿음,
 지금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
 어둠 속 대지에서 하루하루 커나간다는 믿음.
 나에게 진정 간절한 기다림이 있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이 있을 뿐.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큰 사람들.
 창조란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아이들아, 너는 이 지구별에 놀러 왔단다.
 더 많이 갖기 위한 비교경쟁에 인생을 다 바치기엔
 우리 삶은 너무나 짧고 소중한 것이란다.
 너는 맘껏 놀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네 삶을 망치는 모든 것들과 싸워가거라.
 인생은 수고의 놀이터이니 고통받기를 두려워 말고,
 고통을 공깃돌 삼아 저마다의 삶을 누리며 행복하라.
 


수많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나 홀로 버려져 있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세상을 다 가졌어도 진정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은 비와 바람과 태양이 길러준
 대지의 선물을 허리 숙여 거두는 날.
 우리는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
 태양으로 길러지고 빛나는 것으로만 확인될 뿐.
 사랑 또한 볼 수 없고 단지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덕분에' 살려지고 있으니.

 

집이란 이렇게 사고 파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내 삶의 무늬를 새기며 오래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지상의 단 하나뿐인 기억과 소생의 장소이니.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결핍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다 사르지 못하고 
 자기 존재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 
 '잉여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통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아무 의미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종자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 매달아진다.
 수백 수천의 옥수수 알들은 단지
 한 톨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대지에 파묻혀 썩어 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오늘 무슨 일을 했는가 못지 않게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가 중요하지요.
 모든 것은 물결처럼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남아 가슴으로 이어져 흐르겠지요.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
 대지에 뿌리박은 삶에서 행복이 차오르는 것이니.

 

시작은 짜이
 꽃 농장 인부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짜이를 끓여 마시며 담소 중이다.
 이들의 하루는 짜이와 함께 시작된다.
 "내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고
 동료 간에 우애의 감정이 돌아야
 내가 가꾸는 꽃들도 향기를 건네겠죠.
 삶을 위해 일하고 웃기 위해 돈 버는 건데
 일과 돈이 사람의 주인 노릇 하면 되나요."
 일터는 '돈터' 만이 아닌 '삶터'이자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수행터'이고,
 동료란 경쟁 관계가 아닌 '좋은 벗'인 것을.
 아침 해와 함께 멋진 하루를 열어주는 짜이 한잔.



선물 받은 하루의 생을 다 소멸시키며, 텅 빈 충만의 정신적 풍요를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이 지상에 잠시 천막을 친 자이니, 삶도 초원의 꽃처럼 남김없이 피고 지고 하루하루 사랑으로 나를 살라가는 생의 도약을 이루기를...
 


남김 없이 피고 지고
 야크 젖을 짜던 스무 살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천막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지상에 잠시 천막을 친 자이지요.
 이 초원의 꽃들처럼 남김없이 피고 지기를 바래요.
 내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새 풀이 돋아나고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아이들이 태어나겠지요."
 충만한 삶이란, 축적이 아닌 소멸에서 오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 삶의 목적은 선물 받은 하루하루를 남김없이 불살라
 빛과 사랑으로 생의 도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던가

 

나날이 새롭게
 여명은 생의 신비다.
 우주의 순환은 날마다 한 번 해가 뜨고 한 번 해가 지고
 우리는 오직 하루 치의 인생을 새로이 선물 받는다.
 이 대지의 삶은 순간이고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하여 삶은 일일일생一日一生이니
 오늘 하루의 생을 남김없이 불사르고
 지금 여기서 자신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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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기대와 시선에 맞춰 사느라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누리지 못하지는 않는지?
가끔은 멈춰 쉬고, 가끔은 천천히 음미하며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본문발췌]

다 다르다
...
삶은 숫자가 아니라고 
행복은 다 다르다고 
사람은 다 달라서 존엄하다고



유산
...
너는 미래의 먹이로
오늘 네 삶을 던져주지 마라

 

거대한 착각
나만은 다르다
이번은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
 


보험
삶을 살 줄 모르는 자는 죽을 줄도 모른다
 


성숙이 성장이다
멈출 때를 모르면 성장이 죽음이다
그리하여 성숙이 참된 성장이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멀어져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내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겨져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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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하는 것 만큼이나 존재하는 것도 지독하다'
사랑, 돈, 권력.... 결국은 우리의 탐욕과 분별심 때문이 아닐까?
 
 
[본문발췌]
 
나는 어떻게 노인들이 먼지와 끈적거림, 경미한 수준의 오물과 곰팡이 핀 수건에 익숙해지는지 이해하게 된다. 꼭 눈이 침침하거나 몸이 약해져서 이런 문제를 어쩌지 못한다기보다는, 그저 지금껏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을 전부 땅에 묻은 마당에, 커피잔의 립스틱 자국이나 다시는 못볼 사람의 사진 액자에 내려앉은 먼지에 어떻게 일일이 흥분하겠는가? 사랑했던 아내와 형제를 땅에 묻은 마당에, 의자 등받이의 (이제는 거의 구멍이 날 지경인) 닳은 곳을 어떻게 심각하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관록은 유용하다. 그래서 열여덟 살로 돌아가라면 다들 싫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관록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안 좋은 점은,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쓰는 게 도무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오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부재하는 것 만큼이나 존재하는 것도 지독하다는 걸 알게 된다.

 
'육신은 무엇인가? 인내다. 사랑은 무엇인가? 감사함이다. 우리 가슴속에는 무엇이 숨어 있나? 웃음이다. 또 다른 건? 연민이다.' - 루미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빠르지만 너무 빠르지는 않게) - 비스와바 아나 심보르스카

삶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토록 비옥할 수가 없고,
개구리처럼 개굴대거나 지빠귀처럼 지저귀거나
개미집처럼 집채만하거나 새싹처럼 싹틀 수 없다

나는 삶의 환심을 사려 애쓴다
삶의 총애를 받으려,
삶의 변덕을 예상하려
늘 제일 먼저 허리 굽혀 인사하며,
늘 잘 보이는 곳에 서 있다
겸손하고 존경어린 얼굴로,
환희의 날개로 날아오르며,
경이의 파도 아래 떨어지며

아, 이 풀벌레는 어찌나 푸르른지
이 열매알은 또 어찌나 영그는지
이 행을 결코 잉태하지 못했겠지
이 생에 내가 잉태되지 않았다면!

삶이여, 너는 참으로 알지 못한다
너를 어느 것에 견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솔방울을 하나 만들고 나서
똑같은 솔방울을 하나 더 만들 수 없으니

나는 너의 독창성을 찬양한다
관대함과 유연함과 정확성을,
그리고 정연함을-가히 마법과
마력에 가까운 선물들을

나는 너를 언짢게 하고 싶지 않다
놀리거나 화나게, 성가시게, 귀찮게도.
수천 년간 나는 노력했다
내 미소로 너를 달래려고

나는 삶의 잎자락을 붙잡고 매달린다
제발 날 위해 한 번만 멈춰주겠느냐
무엇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지
잠깐이나마 망각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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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이 건강하고 균형적인 삶의 길일지도!


[본문발췌]

"모든 죽음은 폭력적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잠자다가 조용히 생애를 마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고 싶어하지만, 그런 상상과 달리 자연사 같은 것은 결코 없다. 나는 그런 것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 클로드 란즈만


종으로서 보면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나은 삶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가 사는 햇수는 늘어났지만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늘어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살 만한 삶 자체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대다수는 100세까지 살게 될지를 생각할 때면 여전히 "그런 일은 없기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지막 수십 년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아 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시간에 결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소 호흡기와 온갖 약물. 엉덩뼈 골절과 기저귀. 화학요법과 방사선요법. 수술 또 수술. 그리고 의료비. 맙소사, 그 엄청난 의료비.


생물의 몸이 이기적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하는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는 세계에서는 자연선택이 불멸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개체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모든 종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에 가용 자원을 번식이나 수명 중 어느 한쪽에 할당되도록 진화해왔다. 양쪽에 다 투자할 수는 없다.


노화의 징표들 :  영양소 감지 교란, 단백질 항상성 상실, 세포 내 의사소통 변형, 줄기세포 소진, 텔로미어 마모,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 세포 노화, 후성유전학적 변형, 유전체 불안정(DNA)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장수 유전자들을 활성화할 수 있는 스트레스 요인들이 많다. 특정한 유형의 운동, 간헐적 단식, 저단백질 식단, 고온과 저온 노출 등이 그렇다. 이렇게 약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몸이나 세포가 반응해 활성을 띠는 현상을 "호르메시스hormesis"라고 한다.  호르메시스가 일어나면 장수 유전자들이 활성화할 때 생기는 약간의 스트레스가 몸 방어 체계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숨죽이고, 보존하고, 좀 더 오래 생존을 도모하라고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장수의 출발점이다.


인간과 효모는 진화적으로 10억 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효모는 우리와 유전자의 약 70퍼센트가 같다. 그리고 효모가 그런 유전자로 하는 일은 우리가 똑같은 유전자로 하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처럼 효모 또한 거의 언제나 2가지 중 하나를 하려고 시도한다. 먹으려고 하든지 번식하려고 애쓴다. 즉 늘 먹이를 추구하거나 번식을 추구하느라 바쁘다. 효모도 사람과 흡사하게 늙어 가면서 행동이 굼떠지고 더 커지고 둥글어지고 번식을 덜 한다. 그러나 인류가 이 과정을 수십 년에 걸쳐서 거치는 반면 효모 세포는 일주일 안에 겪는다. 그래서 효모는 노화를 이해하려는 연구의 좋은 출발점 역할을 한다.


"후성유전적 잡음epigenome noise"은 바로 이 같은 유형의 혼란을 일으킨다. 이 혼란은 대체로 DNA가 끊기는 일처럼 세포에 심한 손상이 일어남으로써 생긴다. 마그나 수페르스테스의 원초적 생존 회로에, 그리고 번식 능력을 잃은 늙은 효모 세포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혼란이다. 그리고 '노화의 정보 이론'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늙는 이유다. 머리가 세는 이유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며, 관절이 아프기 시작하는 이유다. 나아가 줄기세포 소진과 세포 노쇠에서부터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과 텔로미어의 빠른 단축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노화의 징표가 나타나는 이유다.

젊음 -> 끊긴 DNA -> 유전체 불안정 -> DNA 포장과 유전자 조절(후성유전체)의 교란 -> 세포 정체성 상실 -> 세포 노화 -> 질병 -> 죽음


우리는 노화가 중년에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무렵이 되면 몸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바스 시계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째깍거리기 시작한다. 


노화의 이 모든 증상들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DNA 손상 신호의 결과로 나타난 후성유전적 변화 때문에 생기고 있었다.
서투인을 비롯한 후성유전 인자들이 유전자를 떠나 DNA가 끊긴 자리로 가서 수선을 한 뒤에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늙게 하는 원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곳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들이 늘어난다. 아이스 생쥐를 다룰 때 말했듯이 DNA를 끊어서 생존 회로가 대처하도록 만들어 후성유전체를 교란할 때, 우리는 잡음을 도입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경관을 침식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쥐의 몸은 잘못 안내되어서 기능 이상이 일어난 세포들의 키메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노화다. 이 정보 상실이 바로 우리 모두를 심장병, 암, 통증, 쇠약, 죽음의 세계로 이끈다.


노화는 갈수록 높이가 높아지고 간격도 점점 짧아지는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면서 빠르게 달리는 장애물 경주에 더 가깝다. 우리는 결국 이 장애물 중 하나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또다시 넘어질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질 뿐이다. 장애물 하나를 치운다고 해서 앞에 놓인 길이 실제로 덜 위험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 질병의 치료에 초점을 맞춘 현행 해결책들이 우리의 건강수명을 늘리는 쪽으로 큰 발전을 이룬다는 측면에서는 효과가 거의 없을뿐더러 비용만 많이 드는 이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장애물을 쓰러뜨릴 의학이다.


50세에 다다르면 우리는 머리가 세고 주름이 늘면서 자신이 부모와 닮아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65세에 다다랐을 때 아직 질병이나 장애가 없다면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80세까지 산다면 어떤 질병에 시달리느라 삶이 더 힘겹고, 덜 편안하고, 덜 즐거울 것이 거의 확실하다. 85세에 남성은 평균 4가지 질병, 여성은 5가지 질병에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심장병과 암, 관절염과 알츠하이머병, 신장질환과 당뇨병 등이다. 또 대부분은 고혈압, 허혈심장병, 심방세동, 치매 등 아직 진단을 받지 않은 질병을 몇 가지 더 지니고 있다. 노화는 이 모든 것들을 일으키는 어떤 위험 요인이다. 아니, 실제로 '바로 그' 위험 요인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온갖 요인들은 사실 하찮다. 흡연이 암에 걸릴 위험을 5배 증가시키지만 50세가 되면 암에 걸릴 위험이 100배 증가한다. 70세가 되면 100배로 증가한다. 이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확률은 심장병에도 적용된다. 당뇨병에도 적용된다. 치매에도 적용된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세계에서 국민이 노화와 싸우는 일을 돕기 위해 의미 있는 수준으로 자원을 쓰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것이 거의 없는 듯한 세상인데, "인생은 본래 그런 거야"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듯이 보인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법

  • 적게 먹어라. 절식(단식) -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우리 대부분이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몸을 결핍 상태로 두는 것 - 은 분명히 우리의 건강과 장수에 좋다.
  • 간헐적 단식 또는 주기적 단식. 
  • 육식을 줄여라.
  • 땀을 흘려라.
  • 몸을 차갑게 하라.
  • 후성유전적 경관을 흔들지 마라.



건강을 증진시키는 다른 많은 분자들과 그 화학적 유도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에서 다량 생산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포도에서 레스베라트롤을,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을, 갈레가(프랑스 라일락)에서 메트로포르민을, 녹차에서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를, 과일에서 케르세틴을, 마늘에서 알리신을 얻는다.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은 인간이 그것들을 감지해 자신의 생존 회로를 투입시키도록 경보를 발령하는 이종호르메시스 분자들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 가장 색깔이 선명한 것을 고르자. 이종호르케시스 분자는 노란색, 빨간색, 주황색, 파란색을 띠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이 하나 더 있다. 그런 것들은 대개 더 맛있다. 세계 최고의 포도주는 피노누아르처럼 스트레스에 민감한 품종이나 햇볕이 강하고 메마른 토양에서 생산된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런 포도주에는 레스라트롤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가장 맛좋은 딸기는 물이 부족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잎채소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다 알듯이 열기와 추위 모두에 노출된 양상추가 가장 잘 자란다. 흔히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조건에서 기르는 유기농 식품이 왜 몸에 더 좋은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3가지 주요 장수 경로. 역경을 겪는 동안 생존 메커니즘을 활성화함으로써 몸을 보호하도록 진화한 경로들이다. 저열량이나 저아미노산 식단 또는 운동을 통해 이 경로들이 활성화되면 생물은 더 건강해지고 더 질병 내성을 띠고 더 오래 살게 된다. 라파마이신, 메트포르민, 레스베라트롤, NAD 증진제 등 저열량 식단과 운동의 혜택을 흉내 내어 이 경로들을 자극하는 분자들은 다양한 생물들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우리는 아날로그며, 그래서 늙는다. 노화의 정보 이론'은 세포가 젊음의 정보를 상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늙고 병에 잘 걸리게 된다고 말한다. DNA는 정보를 오래가는 디지털 형식으로 저장하는 반면, 후성유전체는 아날로그 형식으로 저장하기 때문에 후성유전적 "잡음"이 늘어나기 쉽다. 1990년대의 DVD 플레이어에 비유하면 딱 좋다. 정보는 디지털이다. 움직이면서 그 정보를 읽는 판독 장치는 아날로그다. 노화는 디스크에 점점 늘어나면서 정보를 제대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긁힌 자국과 비슷하다.


후성유전적 재프로그래밍은 늙은 생쥐의 시신경을 재생하고 시력을 회복시킨다. '노화의 정보 이론'은 노화가 돌연변이로 유전 정보를 잃어서가 아니라 후성유전 정보가 상실되어 일어난다고 예측한다. 생쥐에게 Oct4, Sox2, Klf4라는 재프로그래밍 유전자를 감염시켰을 때 일어나는 세포의 노화 역전에는 TET 효소가 관여한다. 이 효소는 DA에 붙은 메틸기 꼬리표 중 적절한 것들만 제거함으로써 노화 시계를 되감고 세포가 살아남아서 신생아처럼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어느 꼬리표가 젊을 때의 것인지를 이 효소가 어떻게 아는지는 수수께끼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클로드 새넌의 "관찰자", 즉 원본 데이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에 해당한다.


우리 세상을 더 친절하고 더 관용적이고 더 포용적이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한결같은 추친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너무 오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7년 사망하기 직전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편을 설득해 그들이 그 빛을 보도록 함으로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편이 결국은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진리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면서 이기는 것이다."


평등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갑부들이 자녀뿐 아니라 반려동물마저 가난한 사람의 자녀보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위태로운 세계가 정말로 출현할 것이다. 부자와 빈자가 단순히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인간 삶을 정의하는 방식 자체를 통해 분리되는 세계, 부자는 진화하도록 허용되고 빈자는 뒤처지지는 세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잠재력이 우리 세계의 가장 끔찍한 문제들 중 일부를 악화시킨다고 해도 -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젯거리들을 안겨줄 것이라고 해도 - 나는 낙관한다. 이 혁명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꿀 것이라고 여전히 낙관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노동 시장은 나눌 수 있는 조각이 한정된 피자가 아니다. 누구나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노동 시장에 참여하는 나이 든 남녀가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사회 보장 제도가 파산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최고의 처방이 될 수 있다. 사회 보장 제도를 잘 유지하는 과제의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더 오래 일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통해 목적을 추구할 기회와 활력을 수십 년 더 누리는 데 따르는 보상, 존경, 혜택을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숙련도가 좀 떨어지는 사람까지 포함해 생산력이 있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최고의 방법은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을 고용하는 기업을 만들거나 유치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번영을 누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원한다면 예산을 줄이고, 젊은이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퇴직 연령을 낮추고, 노령자의 의료비를 삭감하는 일을 하지 말기 바란다. 대신에 인구를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유지하고, 교육과 혁신의 장벽을 모두 타파하기 바란다.


"과거를 잊고,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아주 짧고 초조한 법이다." - 세네카. 
그는 삶을 음미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간이 "아주 값싸게 ...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라며 한탄했다.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한다."


미국이 노화 연구에 쓰는 예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라고해도 다른 대다수 선진국의 상황에 비하면 낫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지원조차 안 하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이 노화를 본모습, 즉 인구의 약 90퍼센트를 죽이는 질병이 아니라 삶의 불가피한 일부라고 보는 기존 견해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노화는 질병이다. 너무나 확실하기에 이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양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계속 하련다. 노화는 질병이라고, 게다가 질병일 뿐 아니라 만병의 어머니다. 우리 모두가 걸리는 질병이다.

미래를 살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려면 삶을 연장하고 보호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오용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모두가 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의사는 50세인 환자를 진료할 때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덜 아픈" 상태로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의료의 향방을 결정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 2가지가 있다. 나이와 경제력이다. 나이는 의사가 환자에게 알리고 논의하려는 치료법의 종류까지 제한할 때가 많다. 환자의 신체 활동이 줄어들고, 이미 얼마간 통증을 안고 살며, 시간이 흐를수록 몸 여기저기의 기능이 떨어질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은 논의를 더욱 제약한다. 어떤 치료법이 환자의 삶을 얼마나 개선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며, 더 나아가 마음을 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의료 체계는 연령차별에 토대를 둔다. 젊을 때는 나이 먹었을 때 건강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치료를 받지 않는다. 나이 먹었을 때는 젊을 때 의례 하던 치료를 받지 않는다.


현재 우리 대다수가 죽는 방식은 야만적이다. 우리는 긴 세월에 걸쳐 쇠퇴한다. 그리고 통증, 슬픔, 혼란, 두려움을 겪는 기간을 연장함으로써 더욱더 많은 통증, 슬픔, 혼란, 두려움을 겪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은 더욱 오래 슬픔, 희생, 동요를 느끼면서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직하면 사랑하는 이들은 안도할 때가 많다. 대다수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노화 연구를 하는 대대수는 노화와의 싸움이 죽음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건강한 삶을 연장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훨씬 더 나은 상태에서 - 사실상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빠르고 고통 없이. 준비가 되었을 때.


소비가 "자원과 생태계에 가하는 압력이 인구 성장보다 2배나 많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 조지 몬비오


우리가 소비 때문에 멸종한다면 더 길고 더 건강한 삶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수명을 늘리든 말든 간에 우리 생존은 소비를 덜하고, 혁신을 더 이루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는 데 달려 있다.


더 공감하고, 더 온정을 베풀고, 더 용서하고, 더 정의로워야 할 것이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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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놔두고 떠나는 여행, 생각과 삶을 자유롭게 한다.
 
 
[본문발췌]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능가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견고한 본질을 붙잡고 씨름한다.
 
 
모든 길의 끝에는 <승리의 여신>이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너는 항상 조급하게 굴다 끝내 용기를 잃고 돌아서 버리지. 대중은 <세이렌>을 보지 못해.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지. 눈멀고 귀먹은 채. 지상에 매인 자신들의 노를 젓느라 웅크리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보다 정선된 인간인 선장은 자기 내면 - 자신의 영혼 - 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와 더불어 장엄하게 삶을 탕진하지. 너는 인생에 다른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엾은 인간들은 세이렌의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아. 조심스럽고 겁 많은 그들은 평생 금화 다는 저울로 <예-아니오>를 저울질하다가 죽는 거야
 

인간의 가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몸부림에 있다.
 
 
우리의 기만, 우리의 위선, 우리의 비겁이 쓰디쓴 담즙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군주는 망설이다 그르치느니 주체할 수 없는 힘 때문에 그르치는 편이 낫다. 운명의 신은 여성이다. 따라서 그것을 정복하려면 과감하고 거칠게 대해야 한다.' - 마케아벨리
 
 
사상을 믿는 세 가지 부류

  1. 지난날의 미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편협하게, 광적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전투를 치른다.
  2. 지난날의 미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의 모든 단면에 매료되는 사람들. 따라서 그들은 삶의 최후의 얼굴 역시 덧없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오늘날의 사상이다-을 잘 알고 있다. 식견이 많고, 감각이 예민하고, 피로에 지친 그들은 손을 접고 앉아 세이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3. 지난날의 미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무서우리만치 강렬하고 짧은 한순간 옛 노래에 도취되었다가도 억지로 몸을 떼어 내어, 세이렌의 노래를 기억 속에 묶어 둔 채 계속 여행하는 사람들. 그들은 필연적으로 오늘날의 상대적인 진실들을 절박하게 표명하고, 잠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처럼 기쁨을 맛본 후 첫 번째 부류처럼 투쟁을 계속한다.

 
 
미래는 다음의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민족의 것이다. 오늘날의 유럽은 첫 번째 요소를 가졌다. 동양은 두 번째 요소를 지녔다.

  1. 현대의 기술
  2. 하나의 신념. 이것은 종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말해 구심점과 깊은 뿌리를 가진 양심을 뜻한다.

 
 
<정신>에는 유물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담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에도 관념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다시 말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굶주림, 즉 경제적 요인이 일차적 동기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분로, 증오, 사랑, 생식의 본능 등등)의 일차적 동기는 정념이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가축, 땅, 생업 수단, 자신의 몸과 두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해방시켜 줄 의무가 있지요.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고 계발함으로써입니다. 그것들을 해방시켜 주지 못하면 인간 자신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에게는 저 나름의 외연 - 땅, 전통, 사상 - 이 있고 그것이 해방을 원할 때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에게는 팔레스타인이 있지요.
 
 
바람처럼 떠돌던 무애인(無碍人)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의 원인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유의 최대의 걸림돌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핵심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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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만한 바보가 권력을 잡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현재 진행형이다.


[본문발췌]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이다.


'토론회에는 거만한 바보가 많았고,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바보는 나쁘지 않다. 대화할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거만한 바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직한 바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직하지 않은 바보는 골칫거리다! 나는 토론회에서 거만한 바보를 무더기로 만났고 아주 낭패했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 - <파인만!>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쉬었다. '난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렇게 인정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점검하는 습관을 익히면 되는 일이었다.


'거만한 바보'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다. 문명의 역사는 세속권력이나 종교권력을 거머쥔 '거만한 바보'들이 자연과 인간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낸 과학자를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얼룩졌다.


사람은 정말이지 서로 다르다. 같은 종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다. 한겨울에 길고양이한테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길고양이를 붙잡아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면서 아이한테 저분들 덕에 우리가 깨끗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겁을 준다. 돈이 많아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부자도 아니면서 돈자랑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만 어떤 이는 자신에게 이로운지 여부를 먼저 따진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만 관대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을 '전향'이라고 하자. 전향 그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노선을 바꾸었는지에 따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전향을 좋게 또는 나쁘게 평가할 뿐이다. 나는 전향 그 자체를 비난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한다. 옳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을 때가 있다. 게다가 '자유의지'라는 것이 정말 있지 의심한다. 그런 것을 들어 누구에겐가 감정적 호오好惡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어찌 강고하겠는가.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인문학보다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 전향이라는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오래되면 성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 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은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 근육, 관절, 시력, 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과 데이터 증가 효과가 하드웨어 퇴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상쇄하는 동안은 더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화로 인해 하드웨어가 심하게 나빠지면 소프트웨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를 상실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신규 데이터 유입은 줄어든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 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개인들이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 뭉치면 힘이 허용하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더 이기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탄소는 왜 생명의 중심이 되었을까? 과학자들이 찾은 답을 정치학 언어로 번역하면, 탄소는 '유능한 중도'여서 성공했다. 중도는 좌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가끔 치우치는 경우에도 슬쩍 편을 드는 정도에 그칠 뿐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열정이 있어도 몰입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녔지만 독선에 빠지지 않는다. 싸움을 먼저 걸지는 않아도 누가 싸움을 걸면 피하지 않는다. 무능한 중도는 극단에 휘둘리지만 유능한 중도는 좌우를 통합한다. 탄소는 유능한 중도의 대표 사례다. 사람으로 치면 성격이 온화하고 태도가 유연하다. 남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필요할 때는 원만한 관계를 맺는다. 남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무엇이든 되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 나간다. 


의학자는 암을 고치고 유전 결함을 바로잡으며 잘린 신경을 수리한다. 문제가 하나같이 복잡해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의학은 극적으로 진보한다. 세계의 수많은 연구 집ㅈ단이 정보를 공유한다. 신경생물학자, 미생물학자, 분자유전학자들은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한다. 의학자는 분자생물학과 세포생물학을 토대로 건강과 질병을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준까지 내려가서 연구한다. 유기체에서 분자까지 생물 조직의 모든 수준에 적용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사용한다. 의학은 통섭을 행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는 인종 갈등을 완화하는 방법, 개발도상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방법, 세계 무역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낙관적 전망이 부족하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념투쟁 때문에 중요한 발견도 빛이 바랜다.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는 서로 이해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과학을 통일하고 인도하는 지식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혼돈 상태를 창조적 효소라 착각하고 이론을 당파적인 사회운동과 개인적인 정치철학에 얽어맨다. 예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사회다윈주의처럼 극단적인 이론을 수용했고, 지금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 극단적 사회주의까지 온갖 이념을 인정한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 삼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까지 나왔으니 이념의 시장은 한없이 넓어졌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족 충성심에 쉽게 속박당하고 이론의 창시자에게 구속된다. 사회과학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이야기를 생물학과 심리학의 물리적 실재에 단 한번도 끼워 넣어 보지 않았고 심리학과 생물학의 발견을 무시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과대평가하고 인종주의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통괄적, 보편적 지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양한 학문이 넓고 깊게 발전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딜레마와 마주쳤다. 우리는 이제 세계를 전체로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목표를 영원히 상실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불완전한 지식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여러 사실과 이론을 종합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말하려는 개념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잠정적인 대답을 요약하면,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은 생물학의 사건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할 수 있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럴법한 이야기'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인문학의 전통적인 언어로 바꾸어 보자.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하찮은 수학은 유용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무용하다. '수학이 과학의 여왕이라면 가장 쓸모없는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연구의 무용성을 자랑삼는 수학자는 없다. 정수론으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한다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산술, 대수학, 유클리드 기하학, 미적분학과 대학의 공학, 물리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다. 일상의 일과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을 주는 수학,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쓰는 수학도 그렇다. 현대 기하학과 대수학, 정수론, 집합론, 함수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진정한 수학이다.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쓸모가 없다. 인류의 물질적 평안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 유용성을 기준으로 보면 진정한 수학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이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찮은 수학이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는 것과 달리 진정한 수학은 인간의 일상에서 떨어져 있다. 정수론이나 상대성이론이 전쟁 목적에 쓰인 경우는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수학자의 삶을 정당하게 여길 수 있다. - G. H. 하디, <어느 수학자의 변명>


수학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논리와 공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 난공불락의 진리를 찾아낸다. 수학적 증명은 영원불멸이다.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평면에 그려진 모든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한다. 수학자는 산을 오르거나 사막을 헤매거나 지하 동굴을 탐험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만으로 영원불멸의 진리를 선포한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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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확신은 제한을 수반한다. 불확실성은 다양하고 더 많은 선택과 가능성을 제공한다.
 
 
[본문발췌]
 
올슨 교수는 경제(적) 번영의 필요조건으로 두 요소를 지적한다. 하나는 안전하고 잘 정의된 사유재산제(권)를 확립하고 계약을 무사공평하게 집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탈의 부재, 즉 지배권력이 약탈하지 않거나 작게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사회든 지배세력이 이 두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권력을 행사하면 그 나라의 경제는 번영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번영을 위해 어떤 유형의 정부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잘 나타내는 하나의 문구를 올슨 교수가 고안해 냈다. 그것은 시장 확장적 정부(market augmenting goverment) 이다. 시장 확장적 정부는 사유재산권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그리고 계약이행을 보증할 만큼 강력하나 자체의 활동으로 이들 권리를 빼앗지 않도록 제약되는 정부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믿을만하게 그리고 최대의 경제적 효과를 가지면서 충족되는 경우는, 좁고 작은 이해관계자들의 경우보다는 넓고 큰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갖도록 제도화된 권리 존중형(rights-respecting) 민주정치체제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지배권력의 논리는 이해관계가 너무 협소하여 사회의 이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집단을 위한 권력의 논리가 그 하나이고, 그리고 아주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가진 그래서 전적으로 자애롭게 행동하는 집단을 위한 권력의 논리가 다른 하나이다.
 
 
로렌제티의 나쁜 정부 그림을 살펴보면 폭정의 형상으로 그려진 나쁜 정부는 무너지는 성벽 앞에서 잔인함, 반역, 사기, 격노, 분열, 전쟁, 탐욕, 교만, 허영 등의 온갖 죄악에 대해 법정재판을 열고 있다. 중세 궁중예술에 나타나는 온갖 표정을 짓고 의상을 입은 인물들은 말할 수 없는 약탈, 전쟁, 범죄, 정의의 파괴 등으로 묘사된 장면을 표상하고 있다. 왼쪽의 나쁜 정부 그림과는 대조적으로 벽 오른쪽의 공동선(Common Good)을 상징하는 인물은 지혜, 평화, 정의, 신의, 자선, 관대, 합치 등으로 상징되는 좋은 정보의 효과를 통할하고 있다.
 
 
"최고의 이론은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특정지역을 확실히 관장하고 그곳에서 절취를 독점할 정도로 힘이 강하다면 도적의 두목은 해당지역 내에서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넓고 큰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그는 절취율을 제한하여 정규화하려 할 것이며 자신이 관장하는 자원을 공공재의 공급에 사용할 것이다. 이때 공공재는 그 자신 못지않게 그가 절취한 피해자에게도 혜택을 준다.
정주도적의 피해자들은 도적 두목의 입장에서 세금납부의 원천이기에 그 두목은 주민을 살해하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을 금지할 것이다. 관할주민이 훔치면 총소득이 감소할 것이므로 도적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훔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관장하에 있는 자원을 주민들 사이에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쓰고, 그리고 다른 공공재를 공급하기 위해 씀으로써 도적의 두목은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특정지역을 통제하고 관장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도적의 두목은 정착하여 왕관을 쓰고 공공재를 공급하는 전제군주, 독재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폭력을 가장 크게 조직화할 수 있는 사람들의 합리적 사익추구로 인해 큰 집단들의 경우 정부가 생성되게 된다. 이런 폭력적 기업가들은 당연히 스스로를 도적이라 부르지 않는 반면 오히려 반대로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고상한 직책을 부여한다. 가끔씩 그들은 신권(divine right)에 의한 지배라고까지 주장한다.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서만 기록되기 때문에 지배왕조의 기원은 통상 사적 이익으로 설명되기보다는 고차원적 동기로 설명되었다. 모든 형태의 전제정부는 시민들이 자신을 다스려 주길 원하기 때문에 다스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정부가 자발적 선택의 결과로 탄생되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조장하기에 이르고 있다.
도적떼가 정착할 수 있고 지역을 확실히 관장할  수 있을 때 그 도적떼의 유인체계가 변화함을 일단 이해하면 도적떼가 군벌의 시민들로부터 해마다 절취세를 징수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정주형 도적떼를 간헐적으로 나타나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유량형 도적떼보다 더 선호한다. 유량형 도적질은 무정부 상태를 의미하고 무정부 상태가 정부에 의해 대체되면 생산물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정주형 도적의 시민들은 세금으로 가져가지 않은 소득의 증가분을 갖게 된다. 논리의 전개과정으로 보나 과거 역사의 정보와 최근의 관찰에 따르나 정주형 도적의 계속적 절취가 무정부보다 훨씬 낫다. 매우 이기적인 지도자들로 구성된 전제군주들의 경우에서조차 약탈적 국가의 친숙한 비유도 부절적한 것으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주형 도적은 자신의 관할지역 내에서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지역 내에 질서를 확립하고 여타 공공재를 제공한다. 정주형 도적은 사슴을 잡아 먹는 여우가 아니고 가축을 보호하고 물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장 주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자신의 절취세율은 극대화하면서 공공재를 제공하고자 하는 정주형 도적의 유인체계를 감안하지 않는 한 전제국가에의 비유 또는 전제국가 모형도 정확할 수 없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전제군주든 민주주의 다수파든 지배계급에게는 국민소득이 자신들이 받는 소득 몫의 역수만큼 하락할 경우에는 소득을 자신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더 낫다. 만약 세수극대화 세율이 2분의 1이라면 세금 1달러의 징수 때문에 소득이 2달러 감소하면 전제군주는 세금인상을 멈출 것이다. 시장에서 창출된 국민소득의 5분의 3을 얻고 5분의 1의 소득을 자신들에게 이전하기를 원하는 다수집단은 재분배하고자 하는 1달러부터 4분의 5, 즉 1.25달러 상당의 국민소득을 필연적으로 감축시킨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크면 클수록, 즉 모든 원천으로부터 얻는 국민소득에서 자신이 받는 몫이 크면 클수록 자신에게로의 재분배에 따른 사회적 손실은 더 작아진다. 
 
동일한 역수법칙에 의해 지배집단이 공공재에 얼마만큼 지출하는지가 결정된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공공재에 지출한 마지막 1달러가 국민소득을 세율의 역수만큼 증대시키는 수준에서 공공재에 대해 지출할 때 이득이 된다. 물론 전제군주의 세율이 그가 얻은 혜택의 몫을 결정한다. 시장에서 소득을 창출하는 지배계급이 향유하는 공공재 편익의 몫은 당연히 더 커진다. 그 몫은 사회의 소득 중 자신에게 재분배하는 부분과 시장소득 중 자신이 받는 비율의 합이다. 시장에서 소득을 버는 재분배 지배계급은 마지막 1달러 지출이 국민 소득을 자신들이 받는 국민소득 몫의 역수만큼 증대시킬 때까지 계속 공공재에 지출할 것이다. 다수파가 시장소득의 5분의 3을 얻으며 사회소득의 5분의 1을 자신들에게 재분배하는 앞 문단의 가상적 사례에서 공공재 지출로 국민소득이 4분의 5만큼 증대하는 한 공공재에 대한 지출로 이득이 된다. 보다 광범위한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이 자신에게 더 적게 재분배함에 따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재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한다.
 
지배적 이해계층이 자신에게 재분배함으로써 얻는 이득을 어디에서 멈추느냐, 그리고 얼마만큼의 자원을 공공재에 지출하는 것이 득이 되는가 하는 두 가지 결정 모두에 똑같은 역수법칙이 적용됨을 주목하라. 전제군주든 민주주의든 체제에 관계없이 이 역수법칙이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의 소득창출력의 보다 큰 몫을 대변하는 지배집단은 보다 작은 몫을 대변하는 집단보다 자신들에게 소득을 보다 적게 재분배하려 하고 더 많은 공공재를 제공하려 할 것이다. 이는 보다 큰 몫을 대변하는 지배집단이 작은 몫을 대변하는 집단에 비해 사회에 보다 넓고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미국이나 스위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견제와 균형을 위해 주요 정책의 변경에 단순 다수결보다 더 많은 동의를 필요로 한다면 지배하는 압도적 다수는 사회 소득창출력의 적은 몫을 대변하는 일반적 다수보다 더 적게 소득재분배를 시도하고 더 많이 공공재를 공급할 것이다.
 
 
현실에서 일부 이익집단들이 장기적 결과에 관심이 없을 때도 있다. 매우 좁고 작은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의 경우 그 집단이 장기에 관심을 갖느냐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즉, 좁고 작은 이해관계의 집단은 장기를 생각하든 단기를 생각하든 사회 전체의 이익을 거의 고려하지 않거나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넓고 큰 이해관계의 집단의 경우 단기적 고려냐 장기적 고려냐는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이해관계의 좁고 넓음에 연속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상에서도 연속성이 있다. 권력을 가진 집단의 계획시계가 매우 짧아지면 사회 전체의 이익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 결과는 이해관계가 얼마나 크느냐 넓으냐에 관계없다.
 
 
현 정부에 대한 반대자들이 법의 지배하에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계약권과 재산권을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계속될 수 없다. 집권세력의 반대자들조차 이러한 권리들을 갖는다면 일반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권리들을 갖게 될 것이다. 법제도, 독립적 사법부 그리고 법과 개인적 권리에 대한 존중은 바로 영구적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데, 이들 조건들이 계약권과 재산권을 보장한다. 재산과 계약과 관련하여 개개인의 권리가 확실하게 오랜 세대를 거쳐 계속 존속되는 것이 보장되는 사회만이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이다. 전제구주정의 경우 군주의 시계가 매우 짧으며 질서 있는 법적 권력승계가 없는 경우 현 군주가 사라질 때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불확실성이 크게 야기된다. 
 
 
무엇인가(something)와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경쟁할 때는 무엇인가가 다소 부족한 경우에도 승리하기 마련이다.
 
 
코즈는 협상에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는 사실 또는 협상이 이런저런 이유로 비용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협상비용이 엄청 높지 않는 한 외부효과가 내부화될 것이다. 거래비용 또는 협상비용이 없다면 모든 외부효과는 파레토 효율적으로 해결될 것인데, 이는 합리적 당사자들이 통합된 이득이 극대화될 때까지 협상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책상 위에 돈을 남겨 둘 리가 없다. 만약 최종결과가 파레토 효율적이 아니면 집어갈 돈이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거래비용 또는 협상비용이 없으면 파레토 효율적인 결과를 얻을 때까지 당사자간에 협상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외부효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자유방임이 파레토 효율성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피구적(Pigouvian) 논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문제가 통상 이런 식으로 서술되지는 않지만 코즈가 한 것은 본질적으로 상호이득 교환의 논리와 거래비용이 거래에 제한을 가한다는 생각을 기존의 시장실패 이론에 적용하고 그 이론에 결함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좋지 않은 나쁜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며 심지어 합리적인 사람들에게도 발생한다. 또한 정부와 정치가 분명히 일부 어처구니없는 비효율적 결과를 야기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아마도 전쟁이야말로 결과가 파레토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간단명료한 증거이다. 두 나라가 매우 희생이 큰 전쟁을 치를 때 서로 전쟁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득을 얻고 그 이득을 공유하여 두 나라 모두 더 나은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전쟁과 같은 대단한 결과를 포함한 합의, 그리고 전쟁을 하지 않아 얻는 이득을 나누는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지킴으로써 두 나라는 더 좋은 상태에 다다른다.
대안이론이 설명해내지 못하는 나쁜 결과의 다른 명백한 한 사례는 왜 일부 나라들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가난하느냐, 즉 잠재소득의 아주 작은 몫만큼밖에 이들 나라들이 벌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부자나라들의 1인당 소득은 가장 가난한 나라의 1인당 소득의 20배 이상이다. 모든 나라들이 최신의 기술에 접근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자본시장으로부터 자금을 빌릴 수 있다. 저자는 다른 논문에서 나라간 1인당 소득의 엄청난 격차를 토지나 자연자원의 차이로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각국 국민의 생산기술의 차이로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많은 나라들이 잘못 통치된다는 사실을 참작하지 않으면서 그들 나라가 극빈에 처한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분명히 잘못된 통치, 그리고 나라간 1인당 소득의 엄청난 격차가 나라간 거래비용의 격차로 그럴듯하게 설명될 수가 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부자나라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래에서 승강이를 하고 거래를 타결할 수 있다. 가장 발전된 기술을 기계에 체화시킨 기업들이 그들의 제품을 전 세계에 팔려고 안달하고, 그리고 자금관리자들이 최고의 수익률을 얻기 위해 지구 끝까지 자신들의 자본을 운용하는데, 도대체 왜 현대 기계장치를 두고 상호이득을 주는 거래가 엄청난 나라간 1인당 소득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는가? 빈곤국 사람들은 더 생산적으로 만들 기술과 자본이 쉽게 도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거래비용이 그렇게도 높아 지구상 사람들의 대다수를 빈곤에 빠뜨리고 있단 말인가?
 
 
공공재에 관한 정보에서 개인이 얻는 혜택은 그 정보를 얻기 위해 비용을 투입하는 개인에게 집중되기보다는 통상적으로 집단 전체 또는 나라 전체에 분산된다는 사실에서 많은 현상들이 설명된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뉴스가치가 있느냐 하는 기준에서 개가 사람을 문 경우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경우이다. 만약 공공정책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TV를 시청하거나 신문을 읽는다면 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비정상적 사건들은 무시되고 경제정책의 복잡한 부분과 공공문제의 계량적 분석 등이 강조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스가 크게 보아 거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분전환 또는 오락의 대안이 되는 경우에는 흥미로운 괴짜와 인간드라마 같은 것이 인기를 끈다. 마찬가지로 마음 졸이며 전개되는 사건들 또는 공인들간의 성추문 등을 언론매체가 놓치지 않고 잡는다. 국민이 내는 세금에 합당한 일을 하지 못하는 관리들도 그냥 잘 지내기도 하는데, 간단하나 눈에 띄게 뉴스거리가 되는 조그만 잘못으로 무너진다. 공공질서를 심하게 파괴하는지도 모르는 시위자들이 흥미로운 기사를 만들어 내고 달리 무시될 수 있는 주장을 주목하게 만든다. 선거인들의 합리적 무지, 따라서 대다수의 합리적 무지는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알아보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약탈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정책이 대다수 사람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허황된 주장에 설득당할 수 있다. 특수이익집단이 접하는 유인체제를 고려하면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좁고 작은 이해관계가 넓고 큰 이해관계를 대체한다. 정주형 도적은 자신에게 잡힌 사람들의 노력을 끌어내기에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데, 그는 사회 전체의 생산성 향상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사회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그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모하는 모임, 로비집단, 동업조합, 지역협회 등은 각자 사회 산출물의 아주 적은 부분을 얻기 때문에 각기 매우 협소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가격의 자의적 책정은 줄서기, 기다림, 재교환 등의 형식으로 추가적 손실을 초래한다. 이 손실들은 왜 자의적 가격책정이 바람직하지 않은지의 또 다른 이유이다. 만약 공식적으로 정한 가격이 너무 낮으면 대기선에서 기다리는 시간낭비가 발생한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필요가 있는 구매자들이 대기선의 맨 앞에 설 것이고 재구매하는 사람은 대기선에 선 사람들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구매할 것이다. 재화를 가장 싸게 생산하는 사람은 낮은 가격에 재화를 생산판매하려는 사람이다. 재화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면 그 상품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구입할 것이다. 가장 낮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공급자는 그 과도한 가격에 판매될 수 있는 최대의 수량을 공급하려 한다. 자의적으로 설정된 가격이 비합리적이긴 하지만 그 가격에서 시장은 거래량을 감소시킨 만큼 거래로부터의 이득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불확실성은 온 세상에 가득 차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동적이고 번창하는 사회는 수많은 다른 일들을 시도하는 사회이고 신용과 모험자본에 상대적으로 잘 접근하는 수없이 많은 기업가들을 가진 사회이다. 사회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다양한 기업가들을 보유하고 다양한 종류의 상호이득이 되는 거래를 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매우 다양한 선택을 그것도 한 개인이나 한 기관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잘 정의되고 안정적인 개인적 권리가 잘 보장될 때 자원을 낭비하는 활동으로부터 부를 증대시키는 활동으로 이전시키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만약 사회가 사회보험이나 또는 불운한 개인들을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을 가지고 있으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 개인적 권리가 부여된 사회에서는 기대 이상의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이나 자산에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예외적 이윤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
복권당첨자가 복권상금에 대해 권리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대 밖의 이윤을 창출하는 자산의 소유자는 권리에 기초한 민주체제하에서는 예외적 이윤에 대해 권리를 갖는데, 이는 그 이윤이 단순히 행운에 따른 것이라도 상관없다. 이러한 불균형한 이윤에 대한 권리 때문에 자원이 사회의 순산출물을 감소시키는 산업이나 기업에로 이전되는 것이 방지된다. 계약이행에 대한 권리 때문에 사회의 순산출물을 감소시키는 기업이 문을 닫게 되는 확률이 증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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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교류 양과 속도,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내 집단 편향(ingroup bias)에 갇혀 편견과 고정관념이 확대되고 생각의 정체(停滯) 된 사람들이 양극화와 혐오 사회를 조장한다.
 
 
[본문발췌]
 
수치심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구로,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 사바나를 무리 지어 돌아다닐 때부터 역할을 해왔다. 진화 심리학에 따르면 수치심은 고통과 아주 유사하게 우리가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고통은 불과 날카로운 칼날을 조심해서 쓰고 성난 말벌이 보이면 달아나라는 가르침으로 우리 몸을 보호해준다. 수치심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수치심은 하나의 집단이 불어넣는 것으로,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정신에 집단의 규율과 금기가 새겨진다. 그 목표는 개인의 생존이 아닌 사회의 생존이다. 이런 점에서 수치심은 개인의 욕망과 집단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내포한다.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우리 내면에 품고 다니는 것이다. 이는 신체, 건강, 습관, 도덕 등 관련 규범에서 파생하는 감정이다. 내가 기준에 못 미친다고 자각할 때, 또는 같은 반 친구나 동료, 슈퍼볼 광고가 기준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 수치심이 우리를 덮친다. 어떤 때는 그저 기분이 나쁜 정도겠지만 수치심으로 깊은 상처를 받으면 자아가 공허해진다. 인간 존엄성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며, 내 존재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수치심이 날리는 잔인한 펀치다.
 
 
수치심은 의지를 꺽고, 침묵시키며, 명료한 사고를 막아 편향성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수치심에 사로집히면 피해자는 체념하고 굴복한다. 그렇게 해서 피해자는 늘 굶주려 있는 수치심 머신을 거쳐 끝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수치심 산업에서 변함없는 한 가지는 선택이라는 개념이다. 약물 중독부터 빈곤 문제까지, 이들은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실패를 초래했다고 전제한다. 즉 부유해지고 날씬해지고 똑똑해지고 성공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고 본다. 잘못은 그들이 했으니, 자책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에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생겨도, 또 문제를 해결하고 정해진 구원의 길을 따라갈 기회가 있어도 대부분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강력한 수치심 머신이 새로 등장했다. 페이스북과 구글을 비롯한 여러 기술기업은 기계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대중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는 최적의 값을 꾸준히 찾고 있다. 이는 트래픽과 광고효과를 높여 엄청난 이윤을 낳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기업 가치를 자랑하는 이들은 그 부산물로 서로 헐뜯고 조롱하는 해로운 흐름을 낳았다. 기업들의 알고리즘은 상대를 혐오하고 악마화할 수록 보상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캔슬 문화cancel culture(유명인이 논란 발언이나 행동을 했을 때, SNS 팔로우를 끊고 배척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잃게 하는 행위)를 부추긴다. 이런 온라인에서의 삶은 현실 인식에 혼란을 주고 대중을 교란한다.
 
 
수치심의 감정 여정 : 상처 > 부정 > 수용 > 초월
 
 
수치심이 인간사에서 억압과 이윤, 통제의 도구로 쓰인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가난이라는 수치심을 없애려면 사회는 빈곤층을 아무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
 
 
거대한 수치심 머신은 비만, 약물 중독, 가난, 허약함을 이용하기 위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힘과 시장 지분을 얻는다. 일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을 돈벌이로 삼거나 일회용품으로 취급하면서 보통 두 가지 전술을 결합해 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릇된 전제를 복음처럼 받아들여 이 현상에 가담한다. 패배자는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자기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하고, 그렇게 충분히 후회해야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고 본다. 수치심은 강력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적이다. 강력한 수치심 산업에 맞서야 할 때다. 이들은 현재의 역기능을 영속화하고 이로부터 이윤을 얻지만 해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비만율이 치솟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가 도시와 시골에서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엄청난 수이 흑인 청년들이 교도소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금박 시대Gilded Age(남북전쟁 이후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미국이 누린 대호황기) 이후로 불평등이 극에 달했다. 수치심은 각각의 사회적 실패에 작용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각종 사회 문제를 겪을 때, 다음과 같이 안이한 충고를 자주 듣는다. '그런 끔찍한 선택만 하지 않았어도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을 텐데, 그러니 그들 잘못이다.' 이렇게 수치심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존엄성 침해를 자각하려고 애쓰는 것이 수치심 머신을 해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런 끝없는 말싸움 덕분에 소셜 미디어 기업은 트래픽을 끌어올리고 광고 수입을 넉넉히 챙길 뿐 아니라 값진 정보를 얻는다. 내가 동의하는 게시물을 공유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낼 때,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이 정보를 토대로 기업은 이용자를 더욱 정교하게 세분화할 수 있어서 훨씬 효과적이고 수익성이 있는 맞춤형 광고가 가능해진다. 그 결과 지난 10년 사이에 페이스북과 구글 등 회사는 주가가 급등하면서 자산가치가 수조 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라섰다. 디지털 거물 기업이 갈등에서 얻는 횡재는 그저 운 좋게 얻은 게 아니다. 이들은 돈이 되는 논쟁을 부채질하도록 자사 플랫폼을 설계한다. 또 이용자의 견해를 극단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그렇게 해야 논쟁이 과열되어 이용자가 쉽게 이탈하지 않는다.
 
 
디지털 거물 기업들이 여론을 작고 고립된 집단으로 쪼개는 일에 박차를 가하면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존중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온라인이든 사교모임이든 새로운 동질 집단은 그 집단을 넘어 시야를 확장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다. 동질 집단은 나의 정보 채널을 장악하고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는 어리석게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과 공유한 가치가 보편적이라고 믿어버린다.
 
 
수치심 네트워크는 우리를 부지런히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고, 그때마다 잠깐씩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옹졸한 권력감이나 분노, 복수심 같은 감정에 중독된다. 우리는 나한테 관심을 주는 듯한 소규모 커뮤니티에 상주하며 과도한 감정에 몰입하지만, 그 감정을 기계적으로 자극하는 허술한 시스템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 시스템은 바로 영속적으로 굴러가는 수치심 머신이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어른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수치심 네트워크에서 벗어나게끔 다른 선택지와 다양한 경로를 탐색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며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때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가 그 공간에서 빠져나올  때 사랑과 용서로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정치 지도자들이 선포한 다양한 '전쟁'들을 떠올려보자. 빈곤과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비만과의 전쟁 등이 있었다. 단호한 지도력과 지성, 충분한 자금만 있으면 이러한 사회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팡파르를 요란하게 울리며 각각의 전쟁을 시작했다. 사람도 달에 보내는 세상이니, 이런 사회 문제는 당연히 해결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비용도 꽤 든다는 게 분명해지자, 우리의 태도가 달라졌다. 피해자를 위해 시작한 전쟁이 피해자들을 겨냥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원대한 야망은 증발했고, 그 자리를 각종 재활시설과 약을 파는 업체, 처벌을 앞세우는 관료주의, 교도소가 대신했다. 어중간한 정책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또는 이런 난제를 고민하는 일이 지겨울 때, 우리는 비난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사회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뚱뚱하고 마약에 중독되고 가난한 자들은 사회의 해결책에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그러니 잘못은 그들에게 있다.'
도와주는 것보다 비난하는 게 훨씬 쉬운 법이다. 약자를 공격하는 담론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은 광범위한 생태계를 부추긴다. 피해자가 자책하고 그들의 노력이 실패할수록 사업가들은 부유해진다. 업체를 다시 찾는 고객은 황금알이다. 고객 각자가 겪는 처참한 실패는 수치심을 불어넣는 현실을 정당화한다. 이런 담론을 CEO든 정치인이든 쉽게 받아들이는데, 그 논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 비용도 절감되고, 더 나아가 시장에 훌륭한 돈벌이 수단도 제공한다. 한마디로 수치심은 유망한 사업이다.
 
 
불평등은 승자에게 상을 주고 패자에게 벌을 주며 끊임없이 서열화하는 사회에서 더욱 심화된다. 
 
 
분노하지 말자. 무의식적으로 약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분노할 일이 차고 넘친다. 분노는 중독성이 있다. 교도소 개혁에 힘쓰거나 유권자 억압에 저항하고 싶다면 뛰어들라. 그러나 종종 우리는 분노로써 행동을 대신하는데, 분노하면 속이 후련해지고 돈도 안 들기 때문이다. 분노는 모욕 행위를 부추길 뿐이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 화를 내는 건 아닌지 돌이켜보자.
 
 
공감은 꼭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회의 병폐를 바로 잡지 못한다. 대신 나름의 정당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되도록 다른 사람의 말을 믿으려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당사자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오해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보통 실수를 저질렀을 때 당사자만큼 속상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실수한 사람에게 내가 이를 망쳤을 때 받고 싶은 위로를 해주고,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주도록 하자. 
 
 
용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수치심의 이면이다. 수치심이 상처를 찢어놓는다면, 용서는 상처를 봉합하는 힘이 있다. 넬슨 만델라는 "용서가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용서가 두려움을 없앤다. 따라서 용서는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공감과 마찬가지로 용서는 힘든 일이며 일관된 기준을 세우기가 어렵다.
 
 
오늘날 수치심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사람들 스스로가 모두 실수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한 동에 책임을 지고 속죄해야 한다. 하지만 그 잘못 때문에 영원히 수치심의 늪에 갇혀야 하는가에 대해선 재고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없애는 것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는 저녁 식사 자리부터 복지사무소, 기업 이사회실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영역이든 개인적 영역이든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을 신뢰하고 존엄하게 대우하자고 요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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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색인가요? 나는 총천연색을 띄고,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
 
 
[본문발췌]

한정된 목적은 인생을 간결하게 한다.


사고란 수염 같은 것이다. 성장하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 볼테르


자신의 머리로 사고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학문적인 장에서 논하는 것은 원래 이론적 정의가 필요하죠. 이건 정말 귀찮은 이야기예요. 창의력이란 사려 깊은 모방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현실주의자 볼테르가 한 말이에요.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 또한 알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런 건 어차피 자네가 말했듯이 가설의 위태로운 연장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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