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에 충실해야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나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기준을 따라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본문발췌]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


비루함(ABJECTIO)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 :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정체성> 밀란 쿤테라,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AMOR) :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동풍서풍> 펄 벅,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담함(AUDACIA) : 나약한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 비밀, 
<1984> 조지 오웰,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대담함을 욕망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비범함을 발견하게 된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갈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모색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파괴력,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이었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한다.
 
 
탐욕(AVARITIA)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돈에 대한 갈망은 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박애(BENEVOLENTIA) :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연민(COMMISERATIO) :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
 

물은 꿈처럼 헛된, 사라지게 될 운명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의 전형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에서
 

욕망(CUPIDITAS)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추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동경(DESIDERIUM)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동경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절망(DESPERATIO)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호의(FAVOR)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호의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영광(GLORIA)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광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커다란 고독이 닥쳐오고 완벽한 정적에 휩싸이면,
몽상가의 마음에도 불꽃의 핵심에도 같은 평화가 존재한다.
그때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지키며 확고한 사상처럼
수직성의 운명을 향해 똑바로 내닫는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에서
 
 
감사(GRATIA)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감사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겸손(HUMILITAS) :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 "겸손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분노(INDIGNATIO)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일 될 때까지,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질투(INVIDIA)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두려움(METUS)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유령> 헨리크 입센,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MISERICORDIA)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동정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삶이 너무나 궁핍하고 남루하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우해 근사한 꿈을 꾼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군가가 꾸고 있는 현실 도피의 꿈을 응시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도피하려고 하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직감할 수 있다.
 
 
공손(AVERSIO)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미움(ODIUM)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도거나,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미움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운동이 존재를 창조하며
소용돌이치는 대기는 별들을 창조하고,
외침은 이미지를 낳고, 외침은 말을, 생각을 준다. -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에서
 
 
후회(POENITENTIA)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토머스 하디,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겁(PUSILLANIMITAS)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여명>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희망(SPES)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닌지.
 
 
오만(SUPERBIA)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오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소심함(TIMOR)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쾌감(TITILLATIO)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조르지 아마두,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인생이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인 셈이다.
완전한 기쁨은, 몸이나 마음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쾌감으로 전율할 때,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슬픔(TRISTITIA)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부와 사랑, 둘 중에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 테니까 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수치심(VERECUNDIA) :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린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필로그>
'선과 악(Good and Evil)'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good and bad)'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감정은 우리 삶의 속도만큼 충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감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속되는 그 감정의 목소리르 존중하라! 그것만이 당신이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감정을 순간적으로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은(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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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경험하고 써 내려 가는 것이 청춘이다.


[본문발췌]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된다. - 장조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두보 <곡강 이수>
   한 조각 꽃이 져도 봄빛이 깍이거니
   바람 불어 만 조각 흩어지니 시름 어이 견디리
   스러지는 꽃잎 내 눈을 스치는 걸 바라보노라면
   몸 많이 상하는 게 싫다고 술 머금는 일 마다하랴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제 몸으로 어둠을 지나오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어둡고 어두울 정도로 가장 깊은 어둠을 겪지 않으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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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가는 평생 섬세하고 정밀한 그림을 그리다가 눈이 먼다고 한다.
빛의 세계에 남긴 자신의 흔적을 다시 보지 못하고 암흑 가운데 오로지 기억을 더듬으며 회상할 뿐.


[본문발췌]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무한한 시간이 있었고, 내가 죽은 뒤에도 시간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무궁한 암흑과 암흑 사이에서, 잠시 빛을 발하며 살았을 뿐이다.
 
 
진정한 재능과 능력은 돈이나 명성에 의해 부패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이 믿는 원칙에 따르고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창조할 수 있네.
 
 
삶에서 추억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망각되는 것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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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것,

나를 비우는 것,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

 


[본문발췌]

여행은 비움의 과정이다.


그 기억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 여행지에서 타자와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행하는 것이니까요. 때문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서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주했던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재인식의 결과물입니다.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


기억을 관장하는 영역과 미래를 상상하는 영역이 겹쳐 있다. 즉,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도 상상하지 못한다는 뜻.


꿈이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든,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움직여본 경험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내 삶도 내가 의지하는 바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그 짤막한 문장을 통해, 하루하루 내 앞에 닥쳐오는 부질을 겸허히 받아들여 언젠가 단단히 제련된 주철을 두 손 가득 잡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의 마지막 문장을 되뇌어본다.
 life is magic. 삶은 곧 마법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내게 나눔이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퍼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 힘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이 더 이상 타의에 의해 가지지 못하게 되거나 힘없게 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세상을 함께 바꾸어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에빙하우스의 '보유곡선'은 '망각곡선',  '보유'와 '망각'의 골은 깊어 보인다. 하지만 그물을 볼 때 씨줄과 날줄을 보는 이도 있고, 그 사이의 공간을 보는 이도 있는 것처럼 그것은 같은 상황을 달리 받아들이고 해석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보유)은 누군가를 잊어가는 일(망각)인 셈이다. 그리움으로 치환된 기억.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망각'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평화는 비싸지만, 제아무리 값싼 전쟁도 가장 사치스러운 평화보다는 비싸다.


이념이 지향과 신념이 아닌 선호의 문제로 존재할 다가올 시간.


"평등해야 건강하다" - 리처드 윌킨슨
소득불평등은 유아사망률을 높이고, 살인율을 높이고, 구속 수감 인구를 늘리고, 학업성취도를 낮추고, 정신건강을 해친다. 여기에 사회구성원 간의 불신이 더해져 불평등을 강화한다.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안녕의 각종 지표들이 아래로 향한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이고 가는 짐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을까? 비록함께 걸어가는 것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고단하고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채근당하고 자극을 받기에,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웃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며 당신과 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질 때,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나하나 평화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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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뚤어 보아야 가치있는 발견이 있다.


[본문발췌]

바다에 데려간 날 아이가 말했다. "바다가 생각보다 얇네." 아빠가 받았다. "그래? 키가 크면 좀 더 두꺼워 보일거야." 그래서 아빠는 아이를 안고 바다를 보여주었다. - 박성우 시인과 그 딸


버릴 것 버리고, 내려둘 것은 내려두어야 신선의 흉내라도 내볼 텐데, 나도 여전히 속 좁은 인간으로 세상에 갇혀 산다. 삶의 껍질을 벗을 수 없으니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셔야 하나?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저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통찰력이 가미되어야 예술로서 요건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연어 - 문학동네>


"여기까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왔지만 여기서부터 나는 시속 1센티미터로 사라질 테다" <마흔, 김선우>


개발이라는 이름의 굴착기는 모퉁이를 지우는 일에 열심이다. 산모퉁이는 깎아내고 길모퉁이는 반듯하게 바로잡는다. 편리성과 합리를 앞세워 현대적인 것을 추구한다. 현대적인 것은 모퉁이가 없다. 모든 현대적인 것은 그래서 그리움을 용도 폐기했다.


혼자 잘나서 출세하고 이름을 얻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걸 착각하거나 망각하면 오만해진다. 겉은 멀쩡한데 영혼이 죽은 사람이된다. '너'가 없으면 '나'는 없다. '나'는 '너'로 인해서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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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보기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발전적 변화로 가는 시작이다.


[본문발췌]

익숙한 것, 친숙한 것으로부터 낯설기. 그것은 곧 다르게 생각하기와 패러다임 변화의 시작이죠. 매일 똑같은 생활과 반복되는 업무는 매너리즘을 동반하고 조건반사형 인간만을 만들어내죠. 우린 좀 더 우리 삶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낯설게 보기를 위해 우리는 공포에서 한 발짝 떨어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포의 대부분은 실체가 없는 비이성적 두려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번져가는 것은 잡념에 빠졌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생각은 타당하고 마땅한 절대수를 보여준다. 오직 한 길이다. 생각과 경험의 최선, 바둑에선 그것을 정석이라 부른다.


빤한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눈에 훤히 보이는 길을 너무 뻔해 마다해서 아쉽게 패한 많은 대국이 떠오른다. 사는 게 의외로 당연한 걸 마다해서 어려워질 수도 있는 것 같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어려워도 꼭 해야 하는 것. 쉬워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바둑에 그냥이란 건 없어.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또, 내가 무얼 하려고 할 때는 상대가 어떤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는지 파악해야 해. 그걸 상대의 '의중'을 읽는다라고 해. 왜 그 수를 거리에 뒀는지 말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네가 상대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형세를 분석한 너의 안목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야. 그냥 두는 수라는 건 '우연'하게 둔 수인데 그래서는 이겨도 져도 배울 게 없어진단다.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어. 실패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성공은 뭐냐에도 말할 수 있어야지. 취직해보니까 말야, 성공이 아니고 문을 하나 연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성공은?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문제 아닌가?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내 바둑이니까... -조치훈


들어주는 귀... 바둑을 수담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는 한 수 한 수는 곧 내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행복해야 해. 자기가 행복하지 않으면서 주는 사랑을 행복하게 받을 수 있을까? 


'꿈이 뭔가?', 뜻이 향하는 것. '지향'. 어떤 것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게 되는 근거는 '지향'에 있다. 무엇인가가 되고 싶고 갖고 싶어 그것을 향하게 되고, 그러다 당장의 자신을 배반하는 선택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지향하는 바를 위해 이렇게 저렇게 해도, 지향하는 대로 살기란 매우 어렵고, 지향하는 바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회한과 깊은 고독에 빠진다. 지향은 곧 길이고, 그 길을 걸을 뿐인 누군가는 길의 끝에서 거울을 마주하게 된다. 그 거울에서 소박하게 만족한 미소를 띤 누군가가 서 있을 수도, 괴물이 되어 있는 자신을 만날 수도 있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의 <고향> 중에서

어느 시인이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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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며 만나는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들이 사는 삶의 공간이 눈과 마음에 닿고 새겨지는 것은 길을 지나느 속도에 반비례한다.


[본문발췌]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신경준, <도로고(道路考)>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 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신경준의 지리책을 읽을 때, 집에서 길로 나가는 아침과 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은 본래 이처럼 신선하고 새로워야 마땅하다. 신경준의 도로 인식에는 속도의 개념이 빠져있다. 그의 길은 가야 할 곳을 마침내 가는 그 '감'을 도덕으로 인식하는 길이다.


풍수에서, 길의 상징과 물의 상징은 같다. 그것은 모두 공적 소통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길의 표정은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이 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넘는다는 일은 삶의 전환과 확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고갯마루는 그 전환의 통과의례로서 괴기스런 전설과 민담을 빚어낸다. 
문경새재는 여러 변방 오지에 흩어진 인간의 삶이 당대 현실과 관련을 맺으려 할 때 반드시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로서 영남대로의 중허리를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그 마루턱은 늘 구름에 가려 있는데, 그 너머 아득한 북쪽이 서울이며, 거기가 당대의 핵심부이고, 현실을 만지고 주무르고 죽이고 살리는 일들은 모두 문경새재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영남 유림들에게, 문경새재는 자아와 현실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상처의 고지였다. 그들은 새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갔고, 다시 새재를 넘어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의 지붕은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다. 검박하지만 가난하지 않고, 여유롭지만 넘쳐나지 않는다. 이 단순성은 위대하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에 내린 눈발처럼, 그의 마지막 말은 "매화에 물 주어라"는 당부였다.


하회마을 집들은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고 비스듬히 외면하고 있다. 존재의 품격은 이 적당한 외면에서 나온다. 그래서 마을의 길들은 구부러져 있다. 길은 그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가 각 집의 대문에 닿는다. 
담장은 차단이고, 길은 연결이다. 길은 낮은 흙담을 따라 굽이친다. 차단과 연결이 함께 길을 따라 흐른다. 길은 대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의 모퉁이를 돌아서 대문에 당도한다. 인간의 삶은 감추어져야 하고 또 드러나야 한다.
하회의 집들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집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이다. 길이 여러 집을 에돌아서 대문에 당도할 때, 그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 길은 익명성에 매몰되어 다만 기계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하회의 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웃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길이다. 다시 대도시로 돌아가는 고속도로는 체증에 막혀 있었고, 교통방송의 내용은 막힘뿐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 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 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버렸으며 인간은 더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련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마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아파트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추사秋史는 대청마루 위에 '신안구가新安舊家'라는 편액을 걸었다. '늙음'이 스며들어 있는 집이 좋은 집이다. 집은 새것을 민망하게 여기고, 새로워서 번쩍거리는 것들을 부끄럽게 여긴다. 추사의 '구가' 속에는 그가 누렸던 삶의 두께와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오래된 살림집은 깊은 공간을 갖는다. 우물과 아궁이는 깊고 어둡고 서늘하다. 불을 때지 않을 때 아궁이 앞에 앉으면 굴뚝과 고래가 공기를 빨아들여서 늘 서늘한 바람기가 있다.
 
물과 불은 삶의 영속성을 지탱해주는 두 원소이다. 이 두 원소는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다. 두레박으로 길어올린 물은 그 물을 퍼올린 사람의 생애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가 깊은 곳에 줄을 내려서 거기에 고여 있는, 갓 태어난 원소를 지상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 물은 아파트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익명성의 물과는 수질이 다르다. 아궁이는 땅속과 하늘을 연결하는 바람의 통로이다. 그 통로의 입구이다. 불길은 고래를 따라서 흐르다가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른다.
불길은 흩어져서 없어지고 방바닥에는 온도가 남는다. 그 온도 위에서 사람들은 자식을 낳고 기른다. 사람이 눕는 방바닥 밑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하고, 그 통로를 따라 불길이 흐른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 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이것은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누워 있는 방바닥 밑 땅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과학현상이다.
 
안방은 물, 불, 밥, 생명 같은 원형질의 공간이다. 안방은 땅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밑으로는 하늘과 통한다. 마루는 어떤가. 마루는 고래의 불길이 닿지 않고, 땅으로 부터 일정한 높이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마루는 서늘하고, 불길이 닿지 않아도 습기가 없다. 마루는 안방보다 훨씬 더 사회적인 공간이고, 공적으로 진화한 공간이다. 마루는 움집의 추억이나 땅속의 원형질로부터 먼 거리를 진화해 왔다.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내용은 그 서늘함에 깃든 공적 개방성이다. 그리고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정도는 마루와 땅 사이의 거리, 그 빈공간의 높이다. 사람이 신발을 벗지 않고도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높이에서 마루의 진화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개들은 마루 밑에 들어가서 땅에 배를 깔고 자는 것이 마땅하다.
 
마루 위를 지나는 대들보와 마루 천장에 드러난 서까래는 이 공적 개방성의 공간 위에 논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루는 세상을 맞이하는 공간이며, 더 넓은 공간과 소통되는 공간이다. 비록 작은 평수의 마루라 하더라도, 마루는 그 열려짐의 크기로 세상 전체를 향한다. 그렇게 해서, 안방에서 문지방을 넘어서 마루로 나올 때 우리는 더 크고 더 넓은 삶의 새로운 질감 속으로 들어선다.
 
오래된 살림집이 문짝들은 공간을 구획하고 차별화하지만, 결절시키지는 않는다. 미닫이문을 열고 드나들 때 사람들의 공간감각 속에서는 이쪽과 저쪽이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충돌하지 않는다. 미닫이 문을 닫을 때, 문밖의 공간은 제거되거나 격절되지 않는다. 문밖의 공간은 당분간 저쪽으로 밀쳐질 뿐이다. 미닫이문은, 열려 있을 때나 닫혀 있을 때나 언제나 문이 갖는 소통의 기능을 수행한다. 미닫이문은 옆으로 포개지면서 열리고 닫힌다. 미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만든 통로가 아니다. 미닫이문은 애초로부터 통로로 태어난 문이다. 이 문이 소통과 구획을 동시에 수행한다.
 
호텔이나 아파트의 여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뚫은 문이다. 이 여닫이 문짝은 문밖의 공간을 완벽히 차단하고 제거한다. 차단 기능이 클수록 좋은 문짝으로 꼽힌다. 아파트의 도어는 사람이 드나드는 순간에만 문이고 닫혀 있을 때는 벽이다. 그러니 문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깝다. 드나들어야겠다는 욕망과 외부를 차단해야 한다는 욕망이 그 문짝 속에 기묘하게도 뒤엉켜 있다. 평생을 이 철벽 같은 문짝 안에 갇혀서 살아왔다. 아름다운 것들은 이제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세상과 떨어져 있다. 이 그림을 다시 삶 속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는 것인가. 그저 뒷짐지고 들여다보기만 해야 하는 것인가. 집 살 때 꾼 돈 이잣날은 흥부네 끼니 돌아오듯이 돌아온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안면의 옛집들을 기웃거릴 때, 오늘의 빈곤은 가슴 아프다. 이 아픔 속에 좀 더 좋은 미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믿어도 좋을 것인가.
 


전남 화순 동복호수에서 출발하여 무등산의 북쪽 산간도로를 따라서 담양 쪽으로 간다. 여기는 순한 땅이다. 산이 마을을 옥죄지 않고 품을 넉넉하게 열어서, 들과 마을은 산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작은 호수들이 많고, 넓은 들 한가운데 우거진 숲들이 많고, 400년이 넘은 오래된 정자들이 많다. 자전거는 정자마다 들러서 놀면서 천천히 가겠다.
16세기 호남의 이름난 누정들은 화순에서 무등산을 넘어 담양으로 가는 887번 지방도로 언저리와 그 인근 야산에 집중되어 있다. 식영정, 소쇄원, 취가정, 죽림재,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독수정, 환벽당...... 조선 중후기의 호남 시인들은 이 이웃한 정자들을 오가며 놀았고, 호남 시단의 문학적 에콜은 정자들을 중심으로 피어났다. 정자는 현실의 중압이 빠져나간 자유의 공간이다. 정자는 삶과 격절된 자리도 아니고 살의 한복판도 아니다. 정자의 위치는 세상을 깔보지도 않고, 세상을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정자의 내부구조와 원림 내의 공간 배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않고,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도 않는다. 정자와 세상과의 관계의 본질은 서늘함이다. 정자는 그 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자의 것인 동시에,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자의 것이다. 정자는 '본다'는 행위가 갖는 시선의 일방성을 넘어선다.


대나무의 삶은 두꺼워지는 삶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이다. 대나무는 죽순이 나와서 50일 안에 다 자라버린다. 더이상은 자라지 않고 두꺼워지지도 않고, 다만 단단해진다. 대나무는 그 인고의 세월을 기록하지 않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왕대는 8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듯이 흰 꽃이 핀다. 꽃이 피고 나면 대나무는 모조리 죽는다. 꽃 속으로 모든 힘이 다 들어가서 대나무는 더 살 수가 없다.


기솔리 쌍미륵 목에는 삼도 세줄이 굵고 선명하다. 삼도는 미혹한 생존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중생의 고통이다. 이치와 현상에 대한 미혹이 번뇌도이고, 번뇌가 가져오는 그릇된 언행과  생각이 업도이며, 업도의 과오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이 고도이다. 미망과 고통은 서로 손짓해 부르고, 부르면 달려온다.


'태초에는 해도 달도 없어서 세상은 캄캄했다. 인간들은 캄캄해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남방국 일월궁에서 청의동자가 태어났다. 청의동자는 앞이마에 눈이 두개, 뒤이마에 또 눈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옥황상제의 수문장이 지상으로 내려와 청의동자의 눈을 취하여 축수하니 청의동자의 눈이 하늘로 올라가 해가 되고 달이 되었다. 세상은 비로소 밝아졌다.' 
- 제주 서사무가의 얼굴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에 뜨는 달이 모두 인간의 눈빛이며 그 눈빛이 세상의 어둠을 걷어내는 힘이다!


얼굴은 내면의 풍경이고 외계로 향한 창구이다. 얼굴의 언어는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언어이다.


자본주의적 대량유통의 특징은 재화의 흐름을 관리하는 기능이 권력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통은 생산과 소비 사이에 끼여서 그 양쪽을 연결시키는 작용일 뿐 아니라, 끼면서 그 양 쪽 위에 군림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 간격이 클수록 유통의 이윤은 더욱 커진다. 유통은 생산보다도 민첩하고 소비를 향하여 소비를 이끈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격은 유통이 거두어가는 이윤의 밭이지만 그 간격에 숨어 있는 위험을 유통은 생산과 소비 양쪽으로 재빨리 전가시킨다. 유통의 권력은 제1차 산업의 생산물에 대해서 더욱 지배적인데 농업과 어업에서 생산은 노동이고 유통은 권력이다.
모란시장이 보여주는 유통의 풍경은 권력화되지 않은 교역의 모습이다. 모란시장의 유통은 생산과 소비 양쪽에 대해서 대등하고 그 대등함으로 유통의 활력을 삼는다. 모란시장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잡다하고, 냄새나고, 교역의 신명으로 넘쳐난다. 모란시장은 권력화되지 않은 유통의 활기를 보여준다.


그 옛 모습의 원형이라는 것은 오직 군더더기가 없고 단출한 것이다. 그리고 결핍 속에서 우아한 것이다. 그것이 허소치가 말했던 법法이다. "법이 있어야 아름다울 수가 있고 아름다워야 신묘하게 될 수가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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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극복은 직접적인 물질적 지원보다는 자생 시스템과 기반 인프라를 만들도록 도와야 한다.
 


[본문발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자선활동의 수혜자가 아닌 소비자로 보기 시작했고, 이들을 위한 디자인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기업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투자를 늘려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벌써 자축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몇몇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투자가 우리가 목표로 하는 큰 규모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일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많은 투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고객으로 여기지 않고 자선이나 '사회적 책임'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오직 극소수만이 이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의 형태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충분한 돈이 없기 때문이다.
  2. 전 세계 절대빈곤 인구 대부분이 1에이커 농지를 생계 수단으로 삼는다.
  3. 과일이나 채소를 제철이 아닌 시기에 재배하는 것과 같이 노동집약적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작물을 재배하고 판매할 방법을 찾게 된다면 훨씬 큰돈을 벌 수 있다.
  4. 그러기 위해서는 빈민들은 아주 저렴한 소규모 농지용 관개시설, 품질 좋은 종자와 비료, 그리고 작물을 내다 팔 시장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실용적인 문제 해결의 열두 단계

  1. 현장으로 가라.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와 대화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
  2. 문제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 각 마을의 구체적 환경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다 모으지 않고서는 실용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3. 크게 생각하고 크게 행동하라.
  4. 아이처럼 생각하라. 뻔한 방법을 찾고 실행하라.
  5. 누군가 이미 발명했다면 다시 할 필요가 없다.
  6. 측정과 확장이 가능한 접근법을 취하라. 
  7. 적어도 100만 명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의 삶을 눈에 띄게 개선하는 방법을 찾아라.
  8. 비용을 계산할 수 있고, 전보다 개선된 결과를 가져오며,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프로젝트만이 시행할 가치가 있다.
  9. 구체적인 목표 원가 및 가격을 설정하라. 실용적인 3개년 계획을 따르라.
  10. 고객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워라.
  11.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라. 
  12. 다른 사람의 생각에 흔들리지 마라.


 
 
빈곤 문제에 대한 세 가지 허구

  1. 기부를 통해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 교육, 도로, 보건에는 공공투자가 필요한 것처럼 가난한 농촌에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문제든 해결책을 찾을 때는 시장의 힘을 발휘하도록 할 방법을 찾는 단계를 먼저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빈곤퇴치에 보조금보다 더 큰 걸림돌이 되어온 것이 하나있다면 바로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기부를 통해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을 벗어나려면 그들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빈곤을 탈출하는 길은 제3세계의 사업자들이 힘을 발휘하는 데 있다. 다행히도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농들은 이미 탁월한 사업가이고, 작업장, 상점, 수리점을 운영하는 수천 명의 소규모 사업가들을 주위에 두고 있다. 이들 모두가 저렴한 비용으로 수익을 낼 기회만 얻을 수 있다면 돈을 버는 데 투자할 용의와 능력이 있다. 무엇보다 극빈층이 스스로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저렴하고 매력적인 기회를 활용해 수익을 늘리도록 돕는 것만이 빈곤을 퇴치할 현실적인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다.
  2.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빈곤이 사라질 것이다. 놀라운 성장률을 보여온 개발도상군인 중국과 인도의 인구 중 약 5억7,500만 명이 아직도 절대빈곤에 시달리며, 그중 대다수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겠는가? 그 이유는 바로 세계 빈곤인구의 대다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한 산업성장의 물결에서 소외되기 쉬운 변두리 외딴 지역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도시지역의 산업성장으로 인해 1인당 국내총생산은 높아지지만, 일반적으로 작은 농지에서 생계를 꾸리며 외딴 지역에서 살아가는 전 세계 빈곤 인구의 4분의 3은 이로부터 소외된다. 물론 변두리지역에서 가난한게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며, 실제로 도시에서 일자리르 찾기도 한다. 하지만 그 중 다수가 빈민가에 거주하게 되며 원래 거주하던 지역에 괜찮은 일자리가 생기는 즉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빈곤을 없애기 위해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두리 1에이커 농지에서의 경제성장이지, 도시 산업화를 통한 1인당 국내총샌상의 성장이 아니다. 도시의 빈곤을 없애기 위해서는 도시 빈민가에서 경제성장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며 빈민가에 기반을 둔 소규모 사업체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대기업이 빈곤을 없애줄 것이다. 분명히 대기업은 빈곤퇴치에 크게 이바지하고 이를 통해 굉장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놀라운 기회를 활용하려면 이들의 사고방식과 사업방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고객으로 삼기 위해 제품 및 서비스의 디자인, 가격설정, 보급 방식 등에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빈곤층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업모델은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따라야 한다.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고객을 만족하게 할 효과적인 모델에 최우선순위를 둔다.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은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고객이 시장에서 보조금 없이 정당하게 사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책정되어야 한다.구매 후 일 년 이내에 투자금액 회수가 가능하며 소득을 증대시키는 도구 및 전략을 고안하고 시장에 보급하는 데 최우선순위를 둔다.빈곤완화에 측정 가능한 효과를 내는 것이 경제성 있는 사업 계획의 핵심 요소이다.빈곤 고객 100만 명까지 사업 확장가능성을 갖추는 것이 경제성 있는 사업계획의 핵심 요소이다.
     


 
현재 개발분야 전문가들의 해결방안은 앞서 설명한 '기부를 통해 사람들이 빈곤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과 같은 허구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은 스스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다. 바로 소득의 불충분이다. 그들은 또한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 취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확고한 생각이 있다. IDE는 이를 받아들여 차별화되고 노동집약적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수익작물, 예를 들면 다양한 과일, 채소와 허브에 투자하도록 소규모 농가를 독려해왔다. 또한 민간부문의 공급망을 개발해, 저렴한 관개시설, 종자, 비료가 보급되도록 했다. IDE와 미국의 비영리단체 테크노서브TechnoServe를 비롯한 여러 단체는 1에이커 농부들이 민간부문의 가치사슬을 통해 수확물을 팔 수 있도록 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앞서 설명한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IDE는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250~300만의 가구가 연간 순수익을 크게 증대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물론 각 가정은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다.
  
권력의 부재, 질병, 교육 미비, 교통인프라 부족 모두 빈곤의 중요한 원인임은 확실하지만, 빈곤을 없앨 가장 직접적이고 비용효과적인 첫 번째 단계는 가난한 사람들이 소득을 높일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빈곤의 원인 중 어떤 것을 해결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소득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들이 생계를 이어가는 현장에서 풀뿌리 사업, 즉 농촌의 소규모 농지나 도시 빈민가의 소규모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수익성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소외된 90퍼센트를 위한 디자인 : 적정기술
전 세계 디자이너의 90%가 부유한 상위 10%의 수요를 충족시킬 제품을 개발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 혁명을 통해 이런 말도 안 되는 비율을 뒤집고 소외된 90%의 소비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루에 2달러 이하를 버는 전 세계 27억 명에게는 적정한 가격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 양수 높이는 개선되고 가격은 낮춘 개량형 페달펌프관계용 자동 와셔 펌프 (Rope and washer pump)
  • 저가형 태양열에너지와 풍력에너지 시설개량형 저가 우물굴착 시설
  • 1000~3만 리터 용량의 다양한 저가 밀폐형 저수시설
  • 100달러 가격의 4분의 1마력 초소형 디젤엔진 펌프점적기가 설치된 대형 저가 점적관개시설
  • 저가형 저압 스프링클러 시설관개로를 이용한 저렴한 소형 지표관개시설
  • 쌀, 옥수수, 밀 수확을 위한 15달러짜리 대형 낫
  • 수확 후 가공 : 에센셜오일 증기증류장치, 열발생용 가스화 장치, 저가형 태양광 건조기, 태양광 손전등, 가정용 정수필터.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의 원칙 : 소형화, 무자비한 가격적정성 추구, 무한한 확장가능성
 
포기의 원칙

  •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빈민 25명과 열린 자세로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면, 포기하라. 
  • 진행 중인 디자인이 사용 1년 안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없는 제품이라면, 포기하라.
  • 완성한 후 적어도 100만 개의 제품을 가난한 고객들에게 보조금없이 팔 자신이 없다면, 포기하라.
  • 작은것은 여전히 아름답다. 싼 것도 아름답다. 도구의 무게를 최소화하라. 남는 양을 줄이라.
  •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디자인으로 진보를 이루어라. 저렴한 가격에 최적화된 디자인은 오늘날의 기술을 낳은 역사를 거꾸로 돌릴 때 쉽게 찾을 수 있다. 최신 소재를 사용하여 구닥다리 제품에 변화를 주어라. 장난감 블록처럼 무한한 확장이 가능하게 만들어라.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의 실용적인 단계 : 어떤 고객의 제품에 적용해도 비용을 50% 이상 낮출 수 있는 기본원칙

  • 구체적인 목표가격을 설정하라.
  • 기술의 효과를 분석하라.
  • 비용상승의 핵심원인을 확인하라.
  • 양보할 요소를 적절하게 찾아 비용상승 원인을 제거하라.
    - 노동자본 : 노동력으로 대체하는 대신 가격을 낮출 수 있는 방법
    - 품질 대비 가격 : 항상 현금이 부족한 소농들은 2년짜리 제품을 우선 쓰고 나서 그 제품으로 벌어들인 추가소득으로 7년 쓸 수 있는 제품을 구매
  • 시제품을 다량 제조하라.
  • 현장테스트를 기초로 수정하라. 
  • 다른 지역에 적용할 때는 현지적응단계를 거치라.
     


 
앞으로는, 돈이 여기 있으니까. 수십억 명의 가난한 고객들을 위한 거대한 시장이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디자이너와 디자인 회사는 그들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다. 이는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며 이미 뿌리 깊은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헨리 포드가 나타나기 전, 자동차 제조업자에게 어째서 부잣집 도련님들이나 좋아하는 덩치 크고 비싼 맞춤형 차만 만드는지 물어봤더라면, 아마도 월리 서튼과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돈이 거기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돈은 절대 그들에게 있지 않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하기 전에, 아이비엠의 최고경영자에게 왜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큰, 200만 달러짜리 컴퓨터만 만드는지 물었다면, 그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돈이 거기 있으니까."
 

 
세계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부국의 역할에 대한 질문에 '부유한 국가들이 비상시 식량을 원조해야 하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은 식량생산에 혁명을 가져오는 것이며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자급적 소규모 농가에 혁명이 필요하다'라고 대답했다. 그럼으로써 식량증산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잉여생산물을 판매해 새로운 소득을 창출하고 일자리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작은 농가가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각 농업기후지대에 적당하고 건기에 재배할 수 있는 네다섯 가지의 부가가치가 높은 과일 혹은 채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지속적인 시장 수요가 있어야 하고 4분의 1에이커에서 집중적으로 경작하고 관개할 때 잘 자랄 수 있는 작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각 농업기후지대에 따라 작물재배에 필요한 저가 관개시설, 투자, 기술, 그리고 작물을 시장에서 판매하고 이익을 얻는 데 필요한 교통수단이나 거래망에 소농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민간부문의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실용적인 단계가 필요하다.
 

 
기업가는 시장의 비효율성을 이용해 부를 창출하며 시장은 기업가의 활동을 이용해 효율성을 유지한다. 시장과 기업가 사이의 활발하고 변화무쌍한 상호작용이 이 둘의 활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왜 개발도상국 시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개발도상국 시장을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요소들)

  1. 희망의 부재 :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너무 익숙해져서 변화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어버림.
  2. 흐려진 안목 : 생각해 본적이 없었고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
  3. 지적재산권 보호 부재 : 좋은 제품일수록 모방제품이 빨리 등장하기 때문에 혁신가들은 좋은 제품을 고안하는데 시간과 돈을 쏟지 않는다.
  4. 보조금 : 보조금은 언제나 새로운 제품과 기술의 보급을 촉진한다기는커녕 방해한다.
  5. 부정부패
  6. 지리적 고립
  7. 정보 부족 : 수요나 가격에 대한 정보가 전무
  8. 신용대출 이용의 제약


 
가난한 고객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 빈민들이 노동집약적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 및 판매하여 소득을 높일 수 있게 된다. 또한, 새 시장 창출에는 더욱 많은 이점이 있다. 즉 보건, 교육, 교통, 주택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도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하루에 1달러로 살아가는 농부들과 도시 빈민들은 이미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사업가이기 때문에 적당한 가격과 높은 이윤, 낮은 위험성만 보장된다면 시장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이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재료,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민간부문의 공급사슬이 필요하며, 생산한 제품을 팔아 이윤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민간부문의 가치사슬이 필요하다. 소득이 올라가면서, 이들은 저렴한 안경, 주택, 태양광 조명, 의료 서비스, 교육 등의 소비자로 변모한다. 가난한 고객을 위한 새로운 시장은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수백만 명에게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디자인 분야에 혁명이 일어나 다양한 소득창출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도시 빈민가 노동자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간부문 공급사슬을 만들어, 박물관 도기의 복제품, 결이 고운 실크 스카프, 파리에 수출할 지갑, 수공예로 장식한 문을 비롯한 노동집약적이며 부가가치가 높은 수많은 제품들을 생산하는 빈민가 기업들에 적당한 가격의 재료, 도구, 디자인 및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라.민간부문 가치사슬을 만들어 빈민가거주민들이 만든 제품을 판매하고 품질기준을 충족시키도록 하라.대출 기회를 제공하라.빈민가에서 만든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 및 서비스를 구매할 능력과 용의가 있는 부유한 고객과 접촉할 기회를 제공하라.
 
 
 
소규모 농가의 번영이 지구온난화, 인구증가, 생태다양성, 보건, 교육 문제를 해결한다.
빈곤퇴치가 그 자체로 현재 가난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보건, 교육, 교통, 식수 및 위생시설, 주택, 에너지 서비스 등의 부족을 다 채워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굉장한 이바지를 할 수 있다. 수백만 명의 극빈층을 빈곤에서 구제하면, 인구가 급성장하는 근본원인을 제거하고 빈곤의 다른 원인에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전 세계가 앞으로 50년간 맞닥뜨리게 될 많은 주요 과제에 실용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개발원조단체가 빈곤퇴치 프로그램에 기금을 제공하는 두 가지 큰 결함
전체 기금의 80%가 개발도상국 정부에 직접 전달되며, 결국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눈에 띄는 성과를 가져오지 않는 프로그램이나,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확장시킬 수 없는 프로그램에도 투자하고 있다.
  
측정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사업에 기금 조달하기 :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이 프로젝트 기금지원 결정 원칙, 프로젝트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현재 상황을 얼마나 눈에 띄게 개선할지 또 어떻게 목표를 이룰지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투자하지 않는다.실현 가능한 목표를 제시한다 하더라도, 다수에 영향력을 끼칠 만큼 확장될 가능성이 없다면 투자하지 않는다.
 
 
 
개발원조단체가 할 수 있는 일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생활 및 노동환경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있다면, 이들이 현재 소득수준에서 감당할만한 정도로 가격을 설정해 판매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라. 만약 그들이 구매하지 않는다면, 계획을 수정하거나 포기하라.가난한 사람들은 자선활동의 수혜자가 아닌 상품과 서비스의 고객으로 대하라. 무상원조를 중단하고, 정부나 원조단체의 보조금에 반대하라.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득창출의 기회로 삼아 연간 300%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설계하고 보급하라.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공정한 시장 가격에 판매될 수 있도록 민간 공급사슬을 창출하라. 또한 이들이 생산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높은 이윤을 붙여 판매할 수 있도록 민간 가치사슬을 만들라.신용대출 기회를 제공하라.
 
 
 
IDE는 절대 빈곤의 배경이 되는 문제, 즉 인프라 부족, 질병, 전쟁에 맞서 싸우며 성과를 이룩해내고 있다. 직원 90%를 현지인으로 고용한 IDE는 이 책에서 설명한 기업가적인 접근법을 활용해 기존의 개발 모델이 실패한 현장에서 성공을 이끌고 있다. IDE는 고객, 즉 농촌 빈민들이 자신이 필요에 대해 가진 생각에 귀 기울이며, 이들의 소득을 증대하기 위해 적정수준의 저렴한 솔루션을 개발한다. 예를 들면, 물 보급/관리기술의 개발 및 상용화, 교육 및 기술지원, 시장 접성 강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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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며 재미있게 일하고, 매사에 감사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소박하게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이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본문발췌]

"세상이 복잡한가, 머릿속이 복잡한가?"
세상이 참 어렵고 복잡해졌다고들 말합니다. 세상을 탓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에 제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대낮에도 세상이 깜깜하게만 느껴진 이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복잡다단한 세상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 속에서 희망의 요소들을 찾아 하나하나 적어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니 반드시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중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과 눈앞에 바로 보이기에 빨리 얻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 웃음, 사랑, 행복이 전자라면 돈, 명예, 권력 같은 것이 후자일 듯합니다. 그동안 미뤄왔지만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 이제 중요한 것 먼저 선택합시다. 우리의 인생은 매우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생김새나 겉모습, 일상적인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군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말입니다. 정답이 있을까요? 아마도 명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가치가 다 똑같지 다를리 있겠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사람마다 보험료가 달리 책정되듯이 사회적 가치면에서 판단하면 서로 가치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가격이 다른 것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을 잃거나 갈등에 시달리곤 합니다.
열등감이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들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갈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적 가격이 낮다고 여기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곤 합니다. 권력, 명예, 재물, 인물, 학연, 지연, 가족 등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낮춰 보고 주눅이 들거나 보잘것없다고 지탄하곤 합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하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끌고 가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사실 열등감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두 가지 모순된 욕구를 한꺼번에 채우려는 데서 커지는 것이지요. 공부는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 노력도 안 하고 성공하려는 것, 잘 웃지 않으면서 푸근한 인상을 주려는 것,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으려는 것, 밥은 많이 먹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허리둘레 줄어들길 바라는 것, 이런 게 바로 욕심입니다.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열등감에는 예방주사가 없습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무엇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는 것은 스스로의 목에 목걸이(강아지 목걸이)를 채우고 슬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목걸이에 끌려다니겠습니까?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엄함을 인정한, 자존심 있는 사랍입니다. 반면, 세상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 든 사람입니다.
 
 

행복의 기준
우리를 늘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명예, 권력, 학연, 지연, 인맥, 비싼 집과 좋은 자동차, 내 뜻에 잘 따르는 가족과 내가 원하는 것들에 끌려다니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 100개 중에 한두 개만 이루어져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90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갈구해서 얻어지길 기대한다면 그게 바로 세상에 끌려다닌 것입니다.
돈, 명예, 권력, 비싼 집과 좋은 차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주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것들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며 인생의 가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원하는 걸 갖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나보다 많이 갖거나 크게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속앓이를 합니다.
세상은 뱃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며 산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지만, 헤쳐나가야 할 미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할 우리의 것입니다.
 
 

당장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 있고 지금 당장 천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가능성을 예견하기에 오늘의 고통과 힘겨움과 갈등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풀어 말하면 '행복'이란 낱말이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살 만한 것은 자신의 일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열정은 자기 인생만 바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세상을 바꾸며,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열정의 놀라운 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열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열정은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교훈 중에 사람이 죽어 신에게 불려가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결정하는 질문 두 마디가 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남에게 기쁨을 주었는가?"
스스로 기쁘고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람 있게 살고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열정을 바치는 것입니다. 열정은 곧 창의력이고 지혜이며 기쁨이자 보람이고 희망입니다.
어느 기업 광고에 인생을 80년 산다면 26년 잠자고 21년 일하고 9년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뿐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화내는 데 5년, 기다리는 데 3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기쁨의 시간이 곧 웃는 시간일 텐데 팔십 평생 겨우 20일 정도만 기뻐하는 건 자신의 존재가치를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화내는 시간을 반쯤 뚝 잘라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 15초만 웃어도 수명을 이틀이나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니라 팔십 평생을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줄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내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잠시 기쁠 뿐입니다.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고 명예가 커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행복의 제조자인 자신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붙잡고 더디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세월을 더디 가게 하는 묘책입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합니다. 두 번 살 수 없습니다. 두번 살 수만 있다면 한 번은 연습처럼 살겠지만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니 살아 있는 동안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기에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인 듯 최선을 다해 살고 지금이 생애 최고의 순간인 듯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나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우주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기쁘게 웃을 수 있지만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여기면 세상에 즐겁고 기쁜 일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누리고 불행은 버리는 것입니다.
   소망은 좇는 것이고 원망은 잊는 것입니다.
   기쁨은 찾는 것이고 슬픔은 견디는 것입니다.
   건강은 지키는 것이고 병마는 벗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끓이는 것이고 미움은 삭이는 것입니다.
   가족은 살피는 것이고 이웃은 어울리는 것입니다.
   자유는 즐기는 것이고 속박은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고 울음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숨을 쉬지 않고 참아보면 그제야 비로소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숨을 쉬려고 노력했습니까? 훗날 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숨을 쉴 때야 비로소 숨 쉬는 게 참으로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미 행복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일구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지 않고 숨이 끊기지 않는 기적을 매일매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나지 말고 20초 정도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읊조리듯 말하십시오.
  첫째, 오늘도 살아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둘째, 오늘 하루도 즐겁게 웃으며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셋째, 오늘 하루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왜 사십니까? 불행하기 위해, 슬퍼하기 위해, 아프기 위해, 고통스럽기 위해, 짜증내기 위해 살아서는 당연히 안 됩니다. 행복하고 즐겁게 웃고 즐기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그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은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밖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행복을 돈, 권력, 명예, 학벌, 큰 아파트, 고급 승용차, 능력있는 가족,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자녀 등 대체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행복은 정말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내 가슴에, 내 영혼에, 오늘에, 지금 바로 내 옆에 가까이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거나 황홀하거나 아름답거나 짜릿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은 지금 내 마음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숨을 쉬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숨 쉬며 살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지금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으로 가면서 당신이 무엇을 가져갈까요? 따라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과연 가져갈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가져갈 수 없는 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사용하고 돌려줘야 할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평균 수명만 믿고 자신이 80세까지는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크나큰 오산입니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고 보장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80세 전에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내 인생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행복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영혼
내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얽매여 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 뿐이어서 저 홀로 설 수 없고 페달을 돌려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면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고 뒤를 잡아주던 사람이 손을 놓아도 놓은 줄 모르면 한참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달린다는 걸 아는 순간 놀라 넘어지게 됩니다. 다치는 게 두려워 계속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두 바퀴를 굴리며 저 너른 세상을 달려가려면 자기 인생은 자신이 조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적절히 돌려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많이 돌려서도 적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몸과 자전거가 균형을 유지할 만큼만 돌려야 합니다.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힘들 때는 힘든 쪽으로 집중하고, 고통스러울 땐 고통스러운 쪽을 살피고, 사랑할 때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시험 볼 때는 공부에 치중하고, 병들었을 때는 치료에 정성을 다하고, 갈등에 싸였을 때는 얽힌 타래를 풀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자존심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도 귀하게 여기고 행하는 것입니다. 나만 귀하다고 여기는 생각과 행실인 자만심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사랑, 용서, 베풂, 희망이 모이면 곧 자존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사람다운 정신이 자존심입니다.
 
 

색안경 낀 사람들의 세상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검거나 푸르거나 붉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세상을 보려면 색안경을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법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로 '더불어 사랑' 때문인 듯합니다. '더불어 사랑'은 나를 사랑하듯 나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신입니다.
보시란 주기만 하고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풂이나 봉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유해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미생물도 많습니다. 사람에게 유익한 미생물만 있으면 좋을것 같지만 유해한 미생물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물며 사람임에야!
 

 
인간의 향기
자비는 다른 이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심성이고, 자애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건 자애이고, 아픈 이를 조건 없이 보살피는 건 자비입니다. 바로 자애와 자비를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고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꽃이 아무리 어여뻐도 질 때는 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질 때가 훨씬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지는 사람의 특성은 곧 사랑과 베풂입니다. '사람답다'는 말은 배려, 사랑, 용서, 베풂을 뜻합니다.
사랑과 베풂은 단순히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결코 주는 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받는 이가 있어 주는 이가 더욱 행복에 겹고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복은 받는 것이고 덕은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풂의 진정한 의미는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거나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덕을 베푸는 게 아니라 '거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옛말에 복을 받으려면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온도는 섭씨 100도가 넘어 자칫 델 수도 있지만 덕의 온도는 36.5도로 사람의 온기와 같다고 합니다. 차갑거나 뜨겁지 않아 누구라도 끌어안을 수 있고 누구에게 주어도 불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고 간 사랑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베풂은 너그러움이고 너그러움은 곧 자유로움입니다. 반대로 받기만을 원함은 욕심이고 욕심은 곧 구속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인들 구속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베풀지 않고 받기만을 갈구하면 스스로의 영혼을 구속하는 셈이 됩니다. 베푼 사람은 승리자가 되고 빼앗은 사람은 패자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더 깊이 세상을 살펴보면 부드러운 것이 강한 걸 이기고 기쁨이 슬픔을 이기고 희망이 좌절을 이기고 베풂이 욕심을 이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마중물
인생이 힘에 부칠 때는 스스로 자신을 살피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동반자가 필요하고 스승, 벗, 이웃, 동료를 비롯한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의 성공사례를 살펴보면 혼자서 해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가 도왔거나 격려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여럿이 가라." - 아프리카 속담
인생을 잘 살려면, 첫째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야 하고, 둘째 어려울 때 함께할 수 있는 벗을 사귀어야 하며, 셋째 다사로운 동반자를 두고, 넷째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바쳐야 합니다.
얼음은 차가운 물을 부으면 잘 녹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야 잘 녹습니다. 뜨거운 물은 사랑이고 배려이고 베풂이고 나눔이고 어울림이고 동행이고 감사이고 기쁨입니다. 뜨거운 물이 될 수 있어야 진정한 벗을 얻습니다.
 

 
억겁의 우연끝에 만난 살람들
그렇게 고귀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세상이 존재하려면 남녀가 만나고 암술과 수술이 만나고 암컷과 수컷이 만나고 음과 양이 만나고 햇빛, 물, 강, 바다 풀, 나무 흙, 미생물이 얽히고 설켜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어울려야 합니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도 곱고 뜨거워서 인류가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귀한 가치로 존재할 것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분별심 때문에 스스로 악연의 싹을 틔운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감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디어졌더라도 두 사람의 만남을 선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뢰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미움을 포기하는 법
용서는 이러저러한 조건 없이 그냥 관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입니다. 육신의 강자는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정신의 강자는 용서로 해결하고 웃습니다. 용서는 내 기쁨이 분명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쏜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와 꽂히는 독 묻은 화살 같아서 나를 해코지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용서는 내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가슴을 주욱 펴게 하며 나를 향기나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애써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미움을 포기할 수는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듯 버리십시오. 나를 괴롭히고 마음 상하게 한 사람이 곧 내 영혼의 쓰레기를 청소하게 해준 셈이니 도리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에 박힌 가시
미움, 분노, 질시, 화, 슬픔, 괴로움은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습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눈에 보여 쉽게 뽑을 수 있지만 영혼에 박힌 큰 가시는 보이지 않아 자신을 끝없이 괴롭힙니다. 일이 잘못되어 날카로운 송곳이 몸에 박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박힌 가시를 굳이 뽑아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100세가 된 현역 최고령 한의사의 무병장수 비결은  첫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둘째, 남의 허물을 잊고 용서하며 셋째, 소식하고 운동하라.
남의 허물을 잊어버리거나 그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박힌 가시를 제거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베풂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나누어주는 묘약입니다.
 
 

용서의 위대함
화, 분노, 미움, 걱정 따위는 쌓아두지 마십시오. 쌓아둘수록 자신의 상처가 그만큼 깊어질 뿐입니다. 원망, 핑계, 가슴앓이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가슴에 맺히면 결국 그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핑계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핑계를 대어 잠시,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겠지만 화평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건 사기이지만 자신을 속이는 건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날
욕심을 채우고 또 채우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며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나무 마디처럼 온갖 고뇌를 딛고 자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 어찌 고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고뇌는 우리의 멘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뇌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미래를 개척해 주며 우리에게 살아갈 만한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바람을 마주 보고 맞으면 역풍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이 된다"는 어느 대기업 사장의 말처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바뀌고 상대가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씩 바뀌기를 바랍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그리도 평온한 것을,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묶어놓고 질질 끌려다녔기에 분별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돈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명예를 잃으면 아주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꿈에서 깨면 그 모두가 거짓이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욕심이 과한 것도 환몽이고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슬픔이 없기를 바라는 것도 환몽입니다. 꿈에서 탁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실제 상황에 닥치면 깨어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꿈속을 헤매며 두려워하기보다는 탁 깨어나 환몽임을 아는 게 행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늘 고통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사람에게 강한 생명력을 줍니다.
 
 

소박하게 산다는 것
<맹자>를  보면 품격 있게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어짊의 실마리로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
   둘째, 의로움의 실마리로 세상살이를 하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
   셋째, 예의의 실마리로 사양할 줄 알고 늘 겸손한 태도를 갖는 사양지심.
   넷째, 지혜의 실마리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
남을 측은히 여기는 어짊이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로움, 사양하고 겸손한 예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 가운데 그 어디에도 혼자 누리고 많이 갖고 받으려고만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법륜 스님이 사람들에게 일러준 행복하게 사는 삶의 자세 일곱가지
  첫째, 웃으며 즐겁게 살자.
  둘째, 소박하게 살자. 내가 먼저 절약해야 합니다. 소박하게 먹어 몸을 가볍게 하고, 소박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편케 해야 합니다.
  셋째, 나누며 살자.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합니다. 복을 지어야 덕을 보게 됩니다. 나누면 나와 이웃과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넷째, 감사할 줄 알자.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다섯째, 희망을 갖자.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느냐고 물으면 '물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봄이 온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사람이 가진 최고의 자산입니다.
  여섯째,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자.
  일곱째, 보람 있게 살자. 웃고 즐기고 건강하게 살며 남을 기쁘게 하면 절로 보람 있게 살게 됩니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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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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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옮겨 담은 화폭을 방안에서 보는 즐거움, 여유로운 삶.


[본문발췌]

'읽고 생각하는 즐거움' 못지않게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은 높고 높아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초목이 살고, 뭇 생명이 자리 잡고, 새와 짐승이 무리 지어 살고, 달리는 짐승이 쉬며, 보배로운 것들이 번성한다. 기이하게도 만물을 키워내면서도 지치지 않고 사방으로 뻗쳐 끝이 없도다. 
물이라는 것은 군자의 덕에 비유된다. 두루두루 흐르고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으니 덕을 닮았고, 이르면 생명을 살려내니 어짊을 닮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순리대로 하니 의로움을 닮았다. 얕으면 흐르다 깊으면 헤아릴 수 없게 되니 지혜로움을 닮았고, 낭떠러지에서 주저 없이 흐르니 용기를 닮았고, 가는 물줄기로 구석진 곳까지 이르니 성찰함을 닮았고, 오물을 받아도 사양하지 않으니 포용을 닮았고, 더러운 곳에 들어가 맑게 하여 나오니 세상을 교화시키는 것을 닮았고.....' 
- 유향, <설원> "잡언" 편 중에서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노자, <노자>, 제 8장 중에서


'숲과 못으로 들어가 너른 들에 살며 고요한 곳에서 낚시하고 무슨 일도 일삼지 않을 뿐이다. 이는 강해의 사람이며 세속을 피한 사람이니 여유로운 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 <장자> "각의" 편 중에서


중국 산수화의 흐름,
송대의 산수화는 화원 화가들에 의해 주로 그려지면서 경외의 존재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전이되었고, 이와 함께 문인의 뜻을 그리는 문인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원대에 들어서는 서예적 필법을 담은 문인산수화가 발전했고 명대에 들면 송대의 화원화풍을 계승하는 절파와 원대 문인화의 기법을 계승하는 오파의 두 개 화파가 전개되면서 이들은 각각 이상공간과 경험공간을 그리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청대에는 오파 계열의 문인산수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여말선초에 주로 그려지고 감상된 산수화 즉 청산백운, 사시팔경, 소상팔경, 몽유도원 등은 실제 산수 공간에서 초연히 벗어난 초월의 시간, 영원한 질서 속에 드러나는 순간을 관념화시킨 산수 이미지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말선초의 문사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산수의 참된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산수의 참된 이미지는 청산백운, 소상팔경, 사시팔경의 대표경으로 그들 관념 속에 정형화되었다. 이는 새 왕조의 주역이 누린 산수관이었다. 이러한 산수관은 그들의 낙관적 현실관과 부합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수를 현실로 끌어들여 혼연히 향유할 수 있었다.
  

해 비추는 향로봉에 붉은 안개 피어 오르고 / 멀리 보니 폭포수가 시내 앞에 걸려 있네 / 나는 듯 쏟아지는 삼천 척의 물줄기 /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하수인가 - 이백의 시 <여산관폭>


조선 중기의 산수 인물도들이 기려, 어부, 수면, 관폭 등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무장된 은자의 고차원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하였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다.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가 철리적 사유를 추구하였다면, 조선 후기의 시의도는 감상적 정감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철리적 사유가 보편적 당위성의 원칙을 중시한다면, 감상적 정감의 표현은 개인적 경험을 기억시켜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산수 표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산수인물도류에는 강호, 폭포, 등의 대상 산수가 암시적, 상징적으로 간솔하게 표현되어 산수화 속 인물은 산수경 자체보다 더욱 높은 사유 세계를 누리는 것으로 펴현된다. 그러나 시의도의 산수 속에는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 매우 섬세하게 처리된다. 그 지점에는 꽃이 피거나 지고, 낙엽이 지거나, 새가 날거나, 구름이 피어오른다. 시인이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제시한 장면이다. 이는 산수 표현에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산수 속 인물이 이러한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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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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