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 비움, 만족, 작고 적고 단순한 조화와 균형 잡힌 삶. 오십에 다시 마음을 다잡아본다.


[본문발췌]


<도덕경>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삶의 지혜는 '멈춤'이다. 걸음을 멈출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바삐 걸을 때는 길가에 핀 민들레와 제비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너무 작아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선 결코 볼 수 없다.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 멈출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고 오래 간다." 이 구절을 금언으로 삼아 인생 후반전을 느리게 천천히 살아가리라 마음먹고 있다.

일손을 놓고 잠시 쉬는 건 게으름이나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 꼭 필요한 멈춤이고 가장 우아하게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배운 또 다른 삶의 지혜는 '용서'할 줄 아는 용기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 무렵의 나는 "그때 내가 왜 그랬지" "그랬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심할 경우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자책했다. 인생 전반전의 내 삶에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한 건 결국 '욕심' 때문이다. '나 정도면 그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는데."라는 나에 대한 과신, 오만한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다. 과한 욕심이 집착을 낳았고 집착은 괴로움이 되었다. 노자를 만난 후 나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대신 "그만하면 충분해."라는 말로 나를 격려하고 응원한다. 낙오자라는 열등감과 패배감을 갖고 살았는데 이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 전반기 내 삶은 '채움'을 지향했다. 실적, 성과, 재물, 명예를 채우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그러나 채우려 할수록 영혼은 더 큰 허기를 느꼈다. 빼곡하게 채운다고 채웠는데 '공허'에 시달렸다. 그러면 더 많은 걸 채우고자 나를 몰아세웠고 나는 더 힘들어졌다. 그러다 노자를 만난 후 존재의 본질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유와 욕망, 생각을 비우면 비울수록 삶이 더 충만해진다는 역설을 노자에게서 배웠다 


공자는 <논어>에서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하고 육십을 '이순(耳順)'이라 했다. 나이 오십에는 천명을 깨닫고, 육십에는 자연의 섭리에 맞게 살아간다는 의미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명과 섭리의 현실적 규범으로서 '지지(知止)'와 '신퇴(身退)'를 제시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뒤로 물리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가르침이다. 천명과 자연의 섭리에 맞게 사는 삶의 모습이다.


'한 걸음만 더'하는 순간 멈추는 지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치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知足不辱(지족불욕) 知止不殆(지지불태)' - 도덕경 44장 중


바람 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사는 삶. 하늘은 도를 법으로 삼고 도는 자연을 법으로 삼는다. '天法道(천법도) 道法自然(도법자연)' - 도덕경 25장 중.  

순리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자연을 통해 깨닫는다. 욕심을 내려놓고, 서두르지 않고, 분수와 자리에 맞게 하루하루를 여유롭고 너그럽게 살아가는 게 자연을 닮은 삶이다.


사람은 대체로 나이가 들면 부드러워진다. 세월이 그렇게 만든다. 바닷가 조약돌을 부드럽게 만드는 건 영겁의 세월 동안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파도다. 파도에 실려 오는 세월의 힘이 조약돌을 부드럽게 만들 듯 사람도 세월의 힘으로 유연해진다. 인생은 억지로 붙잡으려 한다고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순리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


누가 능히 탁한 걸 고요하게 해 서서히 맑아지게 하고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걸 움직여 서서히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 도덕경 15장 중. 
let it be. 무위와 서청의 지혜, 삶의 물이 탁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조급한 마음에 휘젓지 않고 서서히 맑아지길 기다리는 지혜.


나는 예수의 산상수훈 중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간다.'라는 말씀을 특히 좋아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하는 '비움'의 가르침과 의미가 같기도 하거니와, 인생을 살 만큼 살아 보니 마음속에서 타욕을 비우는 일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곧은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이 걷기도 편하고 탈도 없다. 샛길을 탐하다가 인생 후반기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전설적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의 노랫말처럼 각자가 자신의 방식대로 원칙대로 정도를 지키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이제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 인생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습니다. 내가 해온 그 모든 일을 생각해보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난 부끄럽게 살지 않았어요."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크로노스이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는 해와 달이 뜨고 지면서 생기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고 카이로스는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 즉 내 마음속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뜻한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기록된 날짜처럼 고정된 것이라 사람이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없다. 하지만 카이로스는 내가 느끼는 마음의 시간이므로 사람이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마음이 초조하면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고, 마음이 즐거우면 긴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


"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작은 싹에서 나오고 구층 누대도 한 줌 흙이 쌓여 올라가고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억지로 하면 실패하고 집착하면 잃는다." - 도덕경 64장


도리스 컨스 굿윈이 쓴 링컨 전기 <권력의 조건>을 읽으며 삶의 토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링컨은 절친 죠슈아 스퍼드에게 자신이 가장 큰 장점이 단단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정신이 단단한 강철과도 같아 그 위에 뭔가를 새겨 넣기도 힘들지만 일단 새긴 다음에는 문질러 지워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당나라 시절 처세의 달인이라 불리던 풍도는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고, 혀는 몸을 베는 칼'이라고 했다.


세상 지식이라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남을 알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마음의 눈[心眼]'을 갖고 있어야 했는데 내겐 그런 눈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밝지 못했고 강하지도 못했다. 내가 정한 삶의 좌표라는 건 남들이 설정해놓은 기준을 모방하고 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결핍은 정신의 덫이다. 물질보다 정신이 사람을 결핍된 존재로 만든다.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테라피는 간단하다. 이걸로 충분하다는 말 한마디면 된다. 간단하지만 힘은 무척 세다.


“성인은 쌓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베풀지만 더욱더 많이 가지게 되고 사람들과 더불어 쓰지만 더욱더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 도덕경 81장


사람도 자연처럼 무위한 채로 살아가면 세상은 저절로 평화로워질 것이다. 무위하다는 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욕심을 비우면 남의 것을 탐하지 않게 되고 다툴 일이 없어진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안분지족한 삶을 살면 분쟁이 사라지고 싸울 일이 없어진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 간의 관계도 그렇다.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드러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는다. 훌륭한 승자는 맞서지 않는다.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춘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덕이라고 하고 용인의 힘이라고 하고 하늘을 짝으로 삼는 지극한 일이라고 한다." - 도덕경 68장


"가지 굵은 나무 같아라. 의연한 산 같아라. 또 고독한 야수 같아라. 가끔은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별 같아라.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항상 나 자신으로 있으라." - 헤르만 헤세, <청춘은 아름다원> 중 '클라인과 바그너'


爲者敗之(위자패지) 執者失之(집자실지), 하고자 하면 실패하고 잡고자 하면 잃는다. - 도덕경 29장 중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것이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산책을 하다 보면 산책자의 온몸에서는 눈부신 감각이 열리며 찬란하고 고귀한 생각이 떠오른다. 산책을 통한 자연의 명상이 없다면 나긋하면서도 엄중하게 경고하는 자연의 탐구가 없다면 나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낄 것이고 또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산책자는 오직 바라보고 응시하는 행위 속에서 자신을 잊을 줄 알아야 한다." - 로베르트 발저, <산책>


"만물을 만들고도 공치사하지 않으며 모든 걸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生而不有 爲而不恃). 일을 하고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룬 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머물지 않기에 자리를 잃는 일도 없다." - 도덕경, 2장


남은 인생을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소유에의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무위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소유를 줄이고, 일을 줄이고, 생각을 줄이고, 그로써 번뇌를 줄여 간소하게 사는 게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어 천하의 표준으로 삼는다." - 도덕경 22장


일상을 소박하고 간소하게 만든 후 꾸준하게 실천하는 게 삶의 도를 실천하는 지름길이다. 만물의 시작은 하나다. 이 간단한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의상대사는 <법성계>에서 말한다. "하나 속에 모든 게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행복의 비결은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복잡해진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고민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세상은 한없이 단순해지고 고민거리도 줄어든다.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기술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까 결정하는 기술이 행복에 더 필요하다. 이것저것 많은 걸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현명해지는 기술은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를 아는 기술이다." - 윌리엄 제임스


단순하게 사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집중에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신을 것, 사는 곳을 최대한 단순하게 줄이면 진짜 좋아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불필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쓰고 에너지를 덜 쓰면 중요한 일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그만큼 더 많아진다. 대다수의 사람은 세상이 너무 복잡하기에, 당연히 해결책도 복잡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무력감에 빠지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두를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립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이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 ‘맑고 향기롭게 운동본부’ 발족식에서 법정 스님


“나는 가난하지 않다. 단순하게 살 뿐이다. 사람이 사는 데는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나에게 가난한 자란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은 도무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예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삶은 앞에 있는 그 무엇이다. 태양은 매일 새로 떠오르니까.” -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전 대통령


"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고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족함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족함이다." - 도덕경 46장


"말이 많으면 처지가 궁색해진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것만 못하다. 多言數窮(다언삭궁) 不如守中(불여수중)" - 도덕경 5장. 

말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을 아끼는 법, 침묵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말을 참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침묵하는 법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비움이 지극하면 고요하고 돈독함을 지킬 수 있다. 영원한 걸 알면 너그러워지고 너그러워지면 공평해진다. 하늘은 곧 도가 되고 도는 영원하니 죽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 도덕경 16장


자신의 일을 타인에게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건 스스로 너그럽고 공평하다는 증거다. 마음의 품이 넓지 못하면 타인을 믿지 못하고, 일을 맡기지 못한다. '이 일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라는 생각은 오만함의 발로다. 타인을 나와 대등한 인격을 가진 성숙한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과 바다가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이다. 백성들 위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겸양함으로 스스로를 낮춰야 하고 백성들을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그 뒤에 둬야 한다." - 도덕경 66장


우주는 조화와 균형이 기본이다. 극단은 예외이고 조화가 깨지면 스스로 알아서 균형점을 찾아간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세상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곧 다시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평화로운 일상이 파괴되고 자유를 빼앗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원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그런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삶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우는 것이다. 그래야 연꽃처럼 꺾이지 않는다. 하루에 하나씩 비우자는 비움의 결심이 없다면 노년은 외로워 죽고 고독해 죽는다. 넘치는 욕망을 비우지 못하면 절대 고독과 소외를 느끼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된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는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죽으면 말라비틀어진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다. 그래서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이고 만다.” – 도덕경 76장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그것들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아(세르바나테스의 <돈키호테>에 나오는 이상향)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 두자.” – 장 그르니에, <섬>


“절대적으로 올바른 건 없다. 올바름이 변해 그른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변해 요망한 것이 된다. 사람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도를 깨우친 사람은 곧지만 방자하지 않고 빛나지만 눈부시게 하진 않는다.” – 도덕경 58장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지 않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사람은 도드라지지 않는다.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 도덕경 24장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에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겨울이 가면 또 다른 봄이 온다. 그렇다고 봄을 시작이라 말하고 겨울을 끝이라고 말할 순 없다. 순환 고리에서 보면 봄이 끝일 수도 있고 겨울이 시작일 수도 있다. 삶에서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도 그렇다. 우주 만물의 이치에 기대 생각해보면 반환점을 돈 지금의 내 인생은 새로운 시작이다.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약함이 도의 쓰임이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 도덕경 40장


"50년을 살아보니 49년이 후회더라. 行年五十(행년오십) 而知四十九年非(이지사십구년비)" - 회남자


"내 나이 예순,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둬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고 내 본분을 돌아보며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 정약용, <자찬묘지명>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소유에 집착하지 마라.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爲而不恃)

너무 꽉 채우려 하지 마라. 조금은 빈틈이 있어야 아름답다. 허이불굴(虛而不屈) 동이유출(動而愈出) 

가졌으면 더 채우려 하지 마라. 필요한 것은 하나로도 족하다. 지이영지(持而盈之) 불여기이(不如其已)

흘러간 시간에 집착하지 마라. 오늘이 최고의 선물이다. 집고지도(執古之道) 이어금지유(以御今之有)

흙탕물 휘젓지 마라. 가만두면 절로 맑아진다. 숙능탁이(孰能濁以) 정지서청(靜之徐淸)

만족할 줄 알아야 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오래간다. 지족불욕(知足不辱) 가이장구(可以長久)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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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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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높은 벽에 둘러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영화 <매트릭스>와 소설 <페스트>를 떠오르게 하는 구조와 스토리.
 
 
[본문발췌]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할지,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잖아."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네, 이해하시겠습니까?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나이 차이도, 시간의 시련도, 성적 경험의 유무도 대단한 요건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게 백 퍼센트인가 아닌가, 중요한 건 그뿐입니다."
 
 
"가끔 저 자신을 알 수 없어집니다. 혹은 잃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 인생을 저 자신으로, 저의 본체로 살고 있다는 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그저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 때면 제가 그저 나 자신의 겉모습만 흉내내서, 교묘하게 나인 척하며 살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고야스 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 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을 수 있으면 나아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 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氣球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러니 매어둔 고리를 풀고 이 세계를 영원히 떠나버리는 일에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제가 생각하기에 도시를 둘러싼 벽이란 아마 선생님이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의식일 겁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유롭게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빙산과 같아,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건 극히 일부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 가라앉아 감춰져 있습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 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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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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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하는 어떤 행동도 잘못되거나 의심스럽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나와 내가 속한 특정 집단은 완전하다는 사람들,
나를 다 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
사회를 병들고 망가뜨리는 毒이다.
 

[본문발췌]

우리의 목표는 사람을 내면적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유로운 상태에서 잠재력을 최고로 개발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억제는 감정과 생각과 행동의 자발성을 저지한다. 곡예사가 줄에서 춤을 추고자 한다면 계획적인 자발성만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신경증적 경향이 있는 사람이 정해진 경계를 침범당하면, 줄타기 곡예사가 발을 잘못 디딘 경험 만큼이나 극심한 공황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므로 각 신경증적 경향은 특정한 불안을 낳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유형의 행동, 자기와 타인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 특정한 자부심, 특정한 종류의 취약성과 특정한 억제까지 발생시킨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사람이 단 한 가지 신경증적 경향이나 종류가 비슷한 경향들의 조합만을 가진다고 가정하면서 문제를 단순화했다.
자기 삶을 동반자에게 위탁하려는 경향에는 애정에 대한 전반적인 욕구와 삶을 좁은 영역으로 국한하려는 경향이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을 갈망할 때는 명성을 갈망하는 욕구가 빈번하게 동반되어 각각의 경향이 같은 경향의 두 가지 측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완전한 독립과 자족을 고집하는 경향은 이성과 선견지명을 통해 삶을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과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시에서처럼 다양한 경향이 공존한다고 해서 그림이 복잡해지는 것은 아니다. 존경 받고자 하는 욕망이 지배하려는 욕망과 충돌하듯이 서로 다른 경향이 때로는 상충하기도 하지만 두 경향의 목적이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신경증적 경향은 저마다 그 자체로 갈등의 싹을 품고 있다. 비슷한 종류의 경향들이라면 개인의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하지만 억압과 회피 같은 방식들로 갈등을 처리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에게 조화되지 않는 성격을 띠는 여러 가지 신경증적 경향들이 발달했다면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그 사람은 두 명의 주인을 섬기는 하인과 비슷한 입장이 된다. 두 주인은 모순되는 명령을 내리면서 둘 다 맹목적인 복종을 기대한다. 순응하려는 욕구가 완전한 독립의 욕구와 똑같이 강박적이라면 그는 어떤 제한이나 한계가 없는 해결책도 허용되지 않는 갈등에 갇힌 기분일 것이다. 그는 절충한 해결책을 모색하겠지만 충돌은 불가피하다.
한 가지 욕구는 대립하는 다른 욕구를 끊임없이 훼방하기 마련이다. 독재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강박적 욕구가 타인에게 기대어 의존하려는 욕구와 만날 때도 똑같은 교착 상태가 발생한다. 또한 타인을 이용하려는 욕구는 그 사람의 생산성을 막고 해치는데, 이런 욕구가 우월하고 방어적인 천재성으로 찬양 받고자 하는 욕구와 같은 강도로 공존할 때도 같은 상황이 된다. 사실상 모순되는 경향들이 함께 존재하면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


공포증과 우울증, 알코올중독과 같은 신경증적 '증상'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갈등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실을 더 철저히 인식할수록 증상을 직접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덜 하게 될 것이다. 여러 경향이 갈등하면서 비롯된 결과가 증상이라면 먼저 근본적인 구조를 파악하지 않고 증상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쓸모없는 일이 된다.


신경증적 경향이 당사자에게 더 불가피하고, 실질적 가치가 더 의심스러워질수록 그는 더욱더 격렬하고 완고하게 경향들을 방어하고 정당화한다. 마치 정부가 자기 활동을 방어하고 정당화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정부일수록 비판을 견디기 어려워하고 자기 권리를 더 강하게 내세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자기 정당화를 '이차적 방어'라고 일컫는다. 자기 정당화의 목적은 이런저런 의심스러운 요인을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경증적 구조 전체가 유지되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마치 신경증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지뢰를 설치한 것과 같다. 세부적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자기 정당화의 공통분모는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옳고, 선하고, 바꿀 수 없다는 신념이다.


독선의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권력욕이 옳고 합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옹호할 뿐만 아니라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하는 어떤 행동도 잘못되거나 의심스럽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제 정신적 장애의 중심에는 신경증적 경향이 있다는 처음 주장으로 돌아가야겠다. 물론 이 진술은 개인이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장애가 신경증적인 경향이라는 뜻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개는 신경증적 경향이 자기 삶에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또 신경증적 경향이 모든 정신적 문제의 궁극적인 발원지라는 뜻도 아니다. 그 경향 자체는 이전에 발생한 장애, 즉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갈등의 산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증적은 구조 전체의 초점이 내가 신경증적인 경향이라 칭한 것에 맞춰져 있다는 뜻이다. 신경증적 경향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계에 장애가 있어도 삶을 감당할 수 있다고 약속하면서, 초기의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하지만 세상과 자기에 대한 착각, 취약성, 억제, 갈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장애를 새롭게 만들어 내기도 한다. 즉 신경증적 경향은 초기의 갈등을 해결할 방법인 동시에 이후의 방해를 만들어내는 원천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적 이해의 단계:
1) 신경증적 경향을 인식하는 단계,
2) 어떻게 원인이 발현되고, 겨로가로 이어졌는지 발견하는 단계,
3) 다른 성격과의 상호 관계, 특히 다른 신경증적 경향과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단계,
이렇게 세 단계가 각각의 신경증적 경향을 파악할 때 실행되어야 한다. 한 단계를 진행할 때마다 구조 일부가 분명해지다가 마침내 전체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항상 나열된 순서대로 단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향 자체가 제대로 인식되기 전부터 경향의 발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환자가 직면한 과제는 크게 세 가지다. 당연하게도 첫 번째 과제는 가능한 한 전적으로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힘과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신과의 관계, 주변 세계와의 관계를 방해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 첫 번째 과제인 완전한 자기표현은 자유로운 연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유롭게 연상한다는 것은 환자가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사소하거나, 핵심에서 벗어나 있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비이성적이거나, 무분별하거나, 서투르거나, 당황스럽거나, 굴욕적으로 보이더라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순서대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글자 그대로 전부를 의미한다는 점을 덧붙여야 겠다.
  • 두 번쩨 과제는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무의식적이었던 요소들을 인식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것처럼 단순한 지적 과정에 그치지 않는다. 인식은 지적인 경험인 동시에 감정적인 경험이다. 속된 표현을 쓰지만 인식은 '뼛속 깊이까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 세 번째 과제는 최상의 발달을 방해하는 내면의 요인들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이는 공연, 창의적 작업 협력, 성적 행위를 하는 능력을 얻거나 되찾는 것, 혹은 공포증이나 우울증 성향을 버리는 것처럼 행위나 행동의 큰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석에 성공하면 이러한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성격 변화에서 비롯되기에 주요한 변화로 취급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를테면 자기 강화와 자기 비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대신 자신에게 더 현실적인 태도를 갖는 것, 무기력과 두려움 대신 활동성과 주장과 용기를 얻는 것, 목적 없이 표류하는 대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 과도한 기대와 과도한 비난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대신 자신 안의 무게 중시을 찾는 것, 광범위하게 방어적으로 적대감을 품는 대신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친근감과 이해를 얻는 것 같은 변화들이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공공연한 활동이나 증상 같은 외부적 변화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분석가의 일반적인 임무는 환자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도록 돕고, 환자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한에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할 대 분석가가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서, 분석가의 일은 대략 관찰, 이해, 해석, 저항에 대한 도움과 일반적인 인간적 도움 등 다섯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분석가는 성격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자 해야 하며, 부분들의 연관성과 그 정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고 흡수해야 한다.


꿈은 감정이나 의견에 대한 사실적이고 정적인 그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로 경향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꿈이 깨어 있을 때보다 더 분명하게 우리의 진실한 감정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부분에서 억압된 사랑, 증오, 의심 또는 슬픔을 꿈에서는 제약 없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말했듯 꿈의 더 중요한 특징은 희망적인 사고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꿈이 반드시 의식적인 소망을 나타내거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상징한다는 뜻은 아니다.
'희망적 사고'는 명확한 내용을 제시하기보다 의도일 가능성이 크다. 즉 꿈은 우리의 노력과 욕구에 목소리를 내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그 순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표현하곤 한다. 꿈은 사실의 진술이기보다는 감정적인 힘의 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모순되는 관계를 만드는 강력한 노력 두 가지가 충돌하면 '불안한 꿈'anxiety dream을 꿀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사람이 꿈에서는 반항적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나온다면, 꿈이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숨겨진 의견을 드러낸다고 속단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꺾으려는 우리의 욕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어떤 환자가 꿈에서 자신을 수리하지 못할 폐허가 된 집으로 나타낸다면 분명 절망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여 그가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꿈은 그런 꿈을 꾸도록 만든 현실의 자극과 연결짓기 전까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가령 꿈에서 일반적인 경멸의 감정이나 보복하려는 충동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꿈은 자극에 대한 반응이므로 그 반응을 일으킨 자극에 대해서 항상 의문을 가져야 한다. 만약 이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위협이나 모욕을 나타내는 경험의 정확한 유형과 그것이 불러오는 무의식적인 반응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연상을 글로 적는 데는 여지 없는 확실한 이점이 있다. 모든 연상을 짧은 쪽지나 중요 항목으로 적는다는 규칙을 세우면 생각이 쉽게 옆길로 세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요점에서 벗어나는 것은 더 빨리 알아차릴 것이다. 종이에 모든 이야기를 적다 보면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생각이나 감정을 건너뛰려는 유혹도 줄어들 수 있다.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은 나중에 기록을 다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눈에 보았을 때는 연상의 연관성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놓치기 쉽지만 나중에 기록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발견이나 대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다시 기록을 들추다보면 생각이 되살아날 수 있다. 또는 오래된 발견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이 눈에 띄는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여전히 몇 달 전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마지막 두 가지 경우는 설령 기록과정 없이 어떤 발견에 이르렀다고 해도, 발견한 것과 그 발견으로 이어지는 주요 과정을 적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들이다. 생각이 펜보다 빠르다는 사실은 글쓰기에서 주요한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이럴 때는 중요 내용만을 적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분석 작업 대부분을 글쓰기로 수행한다면 일기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자세하게 비교해보면 분석 작업의 특성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기가 사실적인 사건에 대한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적 경험과 동기를 진실하게 기록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때 글쓰기와의 유사성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분명 차이점도 있다. 잘 쓰여진 일기는 의식적인 감정과 생각, 동기를 정직하게 기록한 것이다. 일기의 특성이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내느 것이라면, 이는 작성자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험이기보다는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감정적인 경험을 나열했다는 것이다.
루소가 <고백록>에서 자신의 마조히즘적 경험을 털어놓으며 정직성을 자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단지 비밀로 간직하던 것을 알렸을 뿐이다. 설령 일기에 동기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해도 이런저런 느슨한 추측 이상의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일기를 쓸 때 대개 의식 수준 아래로 파고들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기나 자서전에 대해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일기와 자서전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매체 본질상 자아를 탐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도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서 마음이 자유로운 연상으로 흘러가도록 할 수는 없다.

일기는 종종 미래의 독자를 염두에 둔다. 독자는 일기를 쓴 사람일 수도 있고, 광범위로 분포된 사람들일 수도 있다. 후세를 의식한 곁눈질은 필연적으로 정직성이 지닌 순수한 가치를 훼손한다. 독자를 의식하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작가는 어느 정도 수정을 하게 되어 있다. 특정한 요소들은 완전히 생략하고, 자신의 단점을 축소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다른 사람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다. 자유 연상을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조금이라도 감탄하는 청중이나 독특한 가치를 가진 걸작을 창조하려는 생각에 기웃거린다면 같은 결과가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유 연상의 가치를 훼손하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종이에 무엇을 적든 자기 인식이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분석은 자아 안에 상반된 관심사를 가진 두 집단의 요인들 사이에 힘이 작용하도록 촉발하거나 이 작용을 강화한다. 한 집단의 관심은 신경증적인 구조가 제공하는 환상과 안전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집단의 관심은 신경증적인 구조를 뒤집어엎음으로써 내면의 자유와 힘을 얻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강조했듯이 이러한 이유에서 기본적으로 분석은 고립된 지적 연구의 과정이 아니다. 지성은 그 순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어떤 관심사를 위해 봉사하는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
해방에 반대하고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힘은 신경증적 구조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모든 통찰에 도전을 받고, 도전에 대항해 어떻게든 진전을 막으려 한다. 이는 분석 작업에 대한 '저항'resistaances으로 나타난다.
저항은 결코 분석적 상황에서만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외적인 조건에서 살지 않는 한 삶 자체는 분석가의 존재만큼이나 신경증적은 구조에 대한 큰 도전이다. 삶에 대한 은밀한 주장들은 절대적이고 경직된 성격을 띠고 있는 탓에 번번이 좌절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을 공유하지 않고, 의심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상처를 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세워둔 치밀하고도 위태로운 수단에 대한 침입을 막을 수 없다. 이러한 도전들이 건설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분석에서처럼 처음에는 불안과 분노로, 그다음에는 신경증적 경향을 강화하면서 도전에 반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경우에 따라서 더 내성적이거나 지배적이거나 의존적이 될 수 있다.


전문적인 분석에서 저항의 표현 방법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극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싸움, 두 번째는 방어적인 감정 반응, 세 번째는 방어적인 억제 또는 회피적인 전술이다.


우리는 마치 저항이 성마른 어리석음이나 고집을 나타내는 것처럼 저항하는 우리 자신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싶어진다. 그러한 태도는 이해할 만하다. 최선의 이익을 위해서 원하는 목표에 향하던 중 스스로가 만든 장애물에 부딪히면 짜증이 나거나 심지어 화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저항에 대해 스스로 책망하는 것은 정당성도 없고 심지어 어떤 의미도 없다. 그는 저항 뒤에 있는 힘의 발달에 책임이 없으며, 게다가 저항이 보호하려고 하는 신경증적 경향은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했을 때 그에게 삶을 살아가는 수단을 주었다. 반대하는 힘을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요소로 간주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나는 그 힘들을 자신의 일부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저항의 힘을 존중한다고 해서 이를 승인하고 멋대로 할 수 있도록 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기적인 발달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에게 더 공정할 뿐만 아니라 저항에 대처하기 위한 훨씬 더 나은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만약 그 힘들을 짓밟겠다는 적대적인 결의로 접근한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인내심과 의지를 갖지 못할 것이다.
저항이 건설적인 의지보다 강하지 않은 한 저항에 대한 대처가 제시된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저항이 이해되고 극복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완전한 분석은 없다. 확실히 분석이 더 명료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 질 있고, 자유를 더 많이 얻을수록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 그러나 완성된 인간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은 주제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강하게 마음을 끄는 매력도 없다. 삶은 투쟁이고 노력이며 발전이자 성장이다. 분석은 그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긍정적인 성취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력하는 것 자체에도 가치가 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했듯이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신경증적 경향
 

  • 애정과 인정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무차별적인 욕구
    • 반사적으로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는 삶
    • 무게 중심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그들의 소망과 의견만을 중요하게 여김
    • 자기주장에 대한 두려움
    • 다른 사람들의 적의나 자기 내면의 적대감에 대한 두려움
  • 삶을 책임져줄 '동반자'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무게 중심이 전적으로 '동반자'에게 있음. 동반자는 삶의 모든 기대를 완수해주거나 선과 악을 책임지며, 그의 성공적인 조종이 지배적인 임무가 됨
    • '사랑'을 과대평가하고 사랑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여김
    •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
    •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 협소한 경계 안에서 삶을 제한하려는 신경증적 욕구
    • 요구하지 않고 작은 것들에 만족하며 물질적인 것에 대한 야망이나 소망을 제한해야 할 필요성
    • 눈에 띄지 않게 지내고 두 번째 자리로 가야 할 필요성
    • 기존의 능력과 잠재력을 과소평하고, 겸손을 최고의 가치로 여김
    • 소비하기보다는 절약하려는 욕구
    • 무엇이든 요구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좋은 상태나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소망을 품거나 주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 권력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지배에 대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배함
    • 대의명분이나 의무, 책임에 대한 헌신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긴 하지만 원동력은 아님
    • 다른 사람들, 그들의 개성, 존엄성, 감정에 대해 근본적으로 무시함. 유일한 관심사는 그들의 복족임
    • 이 욕구와 관련된 파괴적인 요소들은 그 정도에서 큰 차이를 보임
    • 힘에 대한 무분별한 숭배와 약함에 대한 경멸
    •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 무력함에 대한 두려움
  • 이성과 선견지명을 통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신경증적 욕구(권력을 직접적이고 공공연하게 행사하기에는 너무 억눌려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나타난다.)
    • 지성과 이성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
    •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을 부정하고 경멸함
    • 선견지명과 예견에 극단적인 가치를 부여
    •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선경지명이 있다고 느낌
    • 자기 안에 세워 놓은 지적이고 우월한 이미지보다 뒤처지는 것은 모두 경멸함
    • 이성의 힘에 객관적 한계가 있다고 인정하기를 두려워함
    • '어리석음'과 서투른 판단에 대한 두려움
  • 의지의 전능함을 믿으려는 신경증적 욕구(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다른 사람과의 과도한 접촉으로 여기는 매우 고립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 (소원 반지를 소유한 양) 마법 같은 의지를 믿으며 불굴의 힘이 솟아남
    • 소망이 좌절되면 비참해짐
    •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망을 포기하거나 제한하고, 관심을 철회하려는 경향
    • 순수한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그들을 능가하려는 신경증적 욕구
    •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혹은 쓸모가 있는지를 주로 고려함
      아이디어, 성생활, 가정, 돈(흥정은 열정과 마찬가지다) 등 착취 대상은 다양함
    • 착취하는 기술을 가진 것에 자부심을 느낌
    • 이용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용당하여 '어리석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권력에 대한 갈마과 결합할 수도 있고, 결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 무생물, 돈, 사람, 자신의 고유한 자질, 활동, 감정 등 모든 것이 오직 위신과 관련된 가치로 평가됨
    • 자기 평가는 전적으로 대중의 인정에 달려 있음
    • 질투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전통적인 방식이나 저항적인 방식의 사용에 차이가 있음
    • 외부적 환경 때문이든 내부적 요인 때문이든,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굴욕')에 대한 두려움
  • 개인적 존경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자기에 대한 과장된 이미지(나르시시즘)
    • 자신이 가진 것이나 대중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상상 속 자신이 존경 받고자 하는 욕구
    • 자기 평가는 이 과장된 이미지에 맞추어 사는 것과 이미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존경에 달렸음
    • 존경을 잃는 것('굴욕')에 대한 두려움
  • 개인적 성취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는 욕구
    • 자기 평가는 최고가 되는 것에 달려 있음. 특히 자기 생각에 최고의 연인이나 최고의 운동선수, 최고의 작가, 최고의 직원이 되어야 하지만 타인의 인정이 필수적이며 인정받지 못하면 분노함
    •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자 하는) 파괴적인 성향들은 빠지는 법이 없지만 강도는 다양함
    • 끊이지 않는 불안감, 더 큰 성취를 위해 한계 없이 자기를 몰아붙임
    • 실패('굴욕')에 대한 두려움
  • 자족과 독립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절대로 아무도 필요로 하지 말아야 하거나 어떤 영향에도 굴복하지 않아야 할 필요성. 혹은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아야 하고, 노예화할 위험이 있는 어떤 친밀함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할 필요성
    • 거리 두기와 분리는 안전 보장의 유일한 원천임
    • 타인을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유대감, 친근감, 사랑에 대한 두려움
  • 완벽함과 철저함에 대한 신경증적 욕구
    • 끈질기게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함
    • 발생할 수 있는 결점에 관해 반추하고 스스로를 질책함
    • 완벽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우월감을 가짐
    • 자기 안에서 결점을 발견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 비판이나 책망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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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아픔을 치유하고 감각을 일깨우며 생각을 새롭게 한다.


[본문발췌]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 : 기억, 희망, 슬픔, 균형회복, 자기이해, 성장, 감상
 
 
좋은 작품은  중요한 핵심을 못으로 박아 강조하는 반면, 나쁜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명백히 일깨운다 해도 본질이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며,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유쾌함은 멋진 성과이고, 희망은 축하할 일이다. 낙천주의가 중요하다면, 이는 우리가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이 노력은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다. 이 진실은 재능을 좋은 인생의 기본 조건으로  보는 엘리트적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많은 경우에 성공과 실패는 다름아닌, 무엇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 그리고 자신의 정당한 몫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쏟아부을 수 있는 에너지로 가름된다. 우리의 운명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희망의 부재가 결정할 수 있다.
 

인생의 고난을 깨닫게 될 때, 아름다움은 더 깊이 이해된다.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외로 중요한 기능들 중 하나는, 고통을 보다 잘 견디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있다.
예술에서 승화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경험이 고상하고 세련된 경험으로 변환되는 심리적 변형 과정을 가리킨다. 슬픔이 예술을 만날 때 일어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승화란 고통이 아름다움으로 변형되는 과정이다. 많은 경우,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볼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제공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숭고에 대한 자각은 대게 찰나에 이루어지고 무작위로 찾아온다. 예술은 그러한 무작위와 우연을 줄여준다. 예술은 믿을 만한 기초 위에서 유용한 경험을 이끌어내는 도구이며, 그래서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다가도 고개를 들 수만 있다면 언제나 숭고의 경험에 계속해서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은 우리가 잃어버린 성향을 농축된 형태로 내놓아, 우리의 기울어진 자아의 적당한 균형을 회복시켜준다. 예술은 인성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를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어준다.


예술에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그런 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타인과 소통하게 해주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주변에 어떤 예술작품을 둘 것인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모든 장소, 모든 시대에 우리 앞에 진열되어 있진 않다.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예술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모든 것을 전면에 내놓음으로써 바로 그 선입견에 당당히 맞선다. 예술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인생을 이끌어야 할 때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다.


예술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술과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예술이 우리를 도와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아로 이끌어준다는 확신이다. 예술은 기념하고, 희망을 주고, 고통에 존엄하게 공감하도록 하고, 균형 회복과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자기 이해와 소통을 돕고, 감상을 고취하고 그 지평을 넓히고자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작품을 좋게 보는 이유는 그 작품이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무언가를 얻었다면 이는 그 예술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탐구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응해 언제라도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게 여겨지지 않는다. 망각, 희망의 소실, 존엄 추구, 자기 이해의 어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같은 우리의 약점을 얼마나 보완해주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좋거나 나쁘게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에 다가가기에 앞서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자신이 무엇을 위안하고 되찾으려 하는지 안다면 유용할 것이다. 


사랑은 당연히 인생의 큰 즐거움이어야 하지만,  나와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위대한 예술에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사랑할 줄 아는 건 감탄하는 것과 다른다. 감탄에는 왕성한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능력이 필요치 않다. 문제는 두 사람이 삶을 공유하려 할 때 고개를 든다. 집, 자녀, 사업 및 가계 운영을,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땐 감탄스러웠던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에게는 저절로 툭 튀어나오는 법이 거의 없고, 연습을 안하면 좀처럼 도움이 안 되는 자질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말에 예의바르게 귀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과 같은 것 말이다. 예술은 그런 자질들로 인도하는 유능한 길잡이다. 성공한 예술작품의 요소들이 관계를 아름답게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요소들과 유사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찬찬히 보다보면 더 나은 연인으로 거듭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는 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판 데르 휘스가 붓꽃의 그림자에 세심하게 마음을 썻듯, 우리 성격의 미세한 면, 신체의 움직임, 엉뚱한 지리학적 이해에도 그렇게 마음을 써줄 사람을 찾게되길 갈망한다. 


리처드 롱의 물줄기들은 사랑의 현실적인 유지와 성장에 기본이 되는 특질, 즉 좋은 연인 관계는 인내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말다툼에서 이기기, 상대방에게 죄책감 안기기, 내 고집대로 하기)을 버려야 한다. 그런 포기들이 물방울처럼 모이고 쌓일 때 연인들은 그들의 순례를 마칠 수 있다. 


호기심은 무지를 진지하게 여기고, 모르는 상태를 인정할 만큼 자신만만하다. 호기심은 모름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모든 연인 관계에는 상대방이 나를 올바르게 탐사하기보다는 오해하고 마음대로 상상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숨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겪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아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을 짚을 때 우리는 심란해진다. 상대방은 진실을 알려 하지 않고, 내가 겪는 상황의 본질을 세심히, 애정을 기울여 알려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경험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바라보고, 세계의 다양성과 개체성을 존중하는 태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가르쳐준다. 


관능은 촉감과 움직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이성(또는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면 합리성)은 좋은 연인이 되는 것과 무관하고 심지어 그에 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랑을 지적 성취라기보다 하나의 감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사람은 단지 논리에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다. 차갑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배려와 갈망을 계산과 분석으로 대체하는 사람도 아니다. 합리적이라는 건 정확한 설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속단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단단하고 건설적인 주체가 되려면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 정확한 사고, 신중한 주장, 명확한 설명, 여러 요소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친한 사이에서는 고충과 좌절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감정적인 상황에서는 고통의 책임을 가장 뚜렷한 대상에게 전가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쉽게 생겨난다. 배우자 또는 부모가 그런 대상이다. 


연인 관계에서 나타나는 대단히 우울한 양상은, 처음 알았을 땐 더없이 감사하다고 느꼈던 사람에게 너무사 빨리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손목이나 어깨만으로도 우리를 흥분시켰던 사람이 눈앞에 벌거벗고 누워 있어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습관과 타성 밑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면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행은 장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따르는 위험을 알아야 하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예술의 도움으로 우리는 어려움에 대한 인식과 소중한 것을 거머쥐는 성공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파악한다. 우리의 문화는 빙하의 바다를 항해할 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솔직하면서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더없이 감상적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너무 편향적이다. 예술은 사랑의 교훈을 담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우리의 마음 앞에 붙들어놓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에서 생각, 습관, 태도, 통찰은 항해에서 닻, 육분의, 기타 장비에 해당한다. 미래의 이상적인 문화에서는 먼저 올바른 장비를 손에 넣고 그 사용법을 익히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의 들판에 나서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생명의 동인이자 죽음으로 이끄는 힘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를 젊음의 열정과 햇빛의 아름다움에 내맡기는 것은 물론이고, 가을과 내리막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함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들은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며칠, 그리고 강렬하거나 혹은 멍한 몇 시간 동안은 아주 크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사소해져 기억조차 희미한 하찮은 과거의 일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간에 구속된 동물이라는 사실을 그리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느끼게 해 현재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침착히 판단하게 하려는 큰 뜻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봐도 현재는 무가치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 가치가 증가한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노력에 우리의 삶을 바칠 필요가 좀더 분명해지고, 현재 이 순간 더욱 확실하고 강력해진다. 


우리는 인간 공통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느낄 수 있지만,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운명적인 죽음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면 다가울 일에 마음이 보다 정밀하게 조율되고, 그에 따라 우리는 가진 것에 감사하고 그 가치를 더 깊이 느끼게 된다. 


우리의 문화는 고통과  소멸을 부인하지만, 예술은 고통과 소멸을 예견하는 문화로 우리를 인도한다. 


미술가는 반드시 자연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을 재현해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다. 미술가는 우리가 자연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을 보다 즉각적이거나 유의미한 방식으로 직접 볼 기회를 창조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미술가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경험을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도 있는 경험을 안무하는 사람이 된다.

예술은 자연의 기념물을 창조하거나 재현하는 행위에서 자연을 더 가깝게 또는 더 의미 있게 지각하는 기회를 창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그림을 보는 대신 이제는 실물을 본다. 하지만 미술가의 역할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경험은 창조적인 마음의 통찰력과 상상력이 빚어나고 조직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미술가로 간주하는 기준은 그가 예술의 참된 역사적 사명, 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감각적으로 더 잘 이해시키는 사명에 관심이 있느냐다. 미래의 미술가는 예술이 항상 전념해왔던 가치들을 증진하는 사건의 기회를 창조할 것이고, 그 범주에는 탑, 분화구, 만찬, 유치원이 포함될 수 있다. 예술은 여전히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지 하는 기본적인 사명에 매진할 테니...


돈을 버는 기술 못지않게 잘 쓰는 안목도 중요하다. 메디치가는 경제적 자원을 이용해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고상한 수준의 건물들을 창조했다. 중요한 문제는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돈을 현명하게 쓰는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믿을 만한 경험에 기초해 평가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수고해본 적이 없고, 다소 공황 상태에서 단지 현재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행을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비평은 눈에 보이는 장면 뒤로 들어가 진정한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연봉이 높고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의미 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불완전한 내면의 욕구를 더욱 정확히 알려주는 일을 찾아 떠나곤 한다. 직업에 의미가 있어지기 위해선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한 듯하다. 첫째, 사람들은 크든 작든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에게 기쁨, 이해, 위안을 안겨주어 이 세계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고 느낄 수 있는 직업을 원한다. 두번째이자 좀더 도전적인 면에서, 의미 있는 직업은 본인의 가장 깊은 재능 및 관심과 일치한다고 느껴져야 한다. 그런 직업은 우리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소중한 능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주고, 그래서 우리가 한 일을 되돌아볼 때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에게 나의 가장 성실하고, 진정하고, 가치 있는 특질을 말해준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수년을, 특히 사회에 첫발을 들였을 때 자신의 삶으로써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술의 임무는 또한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자부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있다.


우리의 바람직한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대개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의 부족이다.


"우리는 미를 추구하고 사치를 피한다. 우리는 배움을 찬미하고 현학에 무감하다. 우리에게 부는 사용 가치를 위한 목표일 뿐, 공허한 자랑거리가 아니다. 또한 가난의 굴욕은 가난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태만함에서 온다." - 아테네, 페리클레스


'정치'의 두가지 의미. 한편으로  정치는 입법, 통치, 정책 연설문, 선거, 정당이며... 이는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모습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는 폴리스, 즉 도시에서 날마다 펼쳐지는 집단생활이다.


인간 조건의 해묵은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이 자신을 정확하고 참을성 있게 보는 눈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는 우리의 성가신 친구다. 이 심리적 약점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이며, 여기에는 동시대 사람들과 문화의 도움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그 필요성을 줄이는 데 있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다루는 가치, 즉 아름다움, 의미의 깊이, 좋은 관계, 자연의 감상, 덧없는 인생에 대한 인식, 공감, 자비 등에 냉담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이 나타내는 이상들을 흡수한 뒤, 아무리 우아하고 의도적이어도 단지 상징적으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 목표는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해지는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예술의 의제는 어떤 초자연적인 목적이 아니라, 엄격히 인간적인 목표에 집중될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당당하고 교육적인 사명, 즉 인류가 자기 이해, 공감, 위안, 희망, 자아수용, 충족을 찾는 데 일조하라고 권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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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아무리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 한다. 


[본문발췌]


사실 '평범한 행복을 유지하는 삶'이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이란 진정한 용기와 마음의 자유를 지닐 때 비로소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고생 스토리가 아무리 끝이 없다 할지라도, 이중섭 세대야말로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 이전 세대 서양화가들은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화가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가가 오늘날 조금의 성공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행운이 아니라 과거에 불우하게 끝마친 모든 선인(先人)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 철학자는 말했는데, 그것은 어느 세대에나 적용되는 원리 같다.


유영국이 존경했던 화가 몬드리안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비극이 일어난 것은 인간이 낭만적인 서사에 빠져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그런 우매함에서 빠져나와, 수학적 직관을 통해 자연이 지닌 완전한 균형과 질서를 표현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를 회화뿐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시각 영역에 적용시켜야 한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을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 자손들을 무엇을 주어 살리잔 말이오?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 나혜석


그러나 결국 오지호의 말년 작품은 다시 환해졌다. "어떠한 추악함이나 증오 속에서도 미(美)를 향해 나가는 흐름이 있을 때 비로소 회화 세계는 존재한다"는 것이 오지호의 굳은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어떠한 고난이 와도 삶은 총체적으로는 "환희(歡喜)"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환희를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인간 삶의 영역에서도 예술에서도,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일도 쉽지 않다. 2022년 작고한 이어령은 본인의 삶을 '실패'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진정 자신을 잘 아는 가족과 친구, 삶의 동행자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스로 늘 애정 결핍 속에서 살았다는 고백이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내면의 풍경'을 지닌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부러운 삶이 자기 자신에게는 완전히 공허할 수도 있다.

88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수많은 경구를 남긴 이어령은 그의 '마지막 수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어찌 보면 이대원의 삶이야말로, 바로 이 경구를 실천하여 성취해 낸 결과물이다. 행복이란, 남의 신념대로 살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방황하고 길을 잃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무엇'인가 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자화상>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에 오색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그냥 고독'은 외롭지만, '완전 고독'은 외롭지가 않다. 고독은 어찌보면 타인과의 비교에 따른 상대적 개념인데, 그러한 세속적 비교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완전한 고독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완전 고독'은 어쩌면 '자유'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때, 인간과는 소통에 불편을 느꼈던 자아가, 자연과는 풍요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들녘은 때맞춰 노랗게 흔들리고, 개와 새는 자신을 따르지 않는가.


이렇게 허무한 게 인생이다. 바로 그 허무함 때문에,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을 내려놓은 채 우리 곁에 있는 작고 여린 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파릇파릇 있는 힘을 다해 자라는 나무, 사이좋게 떼지어 하늘을 나는 새들, 아무런 편견 없이 사람을 따르는 삐쩍 마른 동네 개, 작고 가난한 집에 옹기조기 모여 사는 나의 가족.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장욱진은 흙탕물 같은 세상 속에서 그렇게 작고 소소하고 사랑스러운 것들만을 말갛게 건져 올려 세상을 내놓고 사라졌다.


‘이 세상에 절대적 진리란 없다’는 것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라고 믿었고, 이 모순된 문장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김병기는 온갖 모순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관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용기가 예술가의 멈추지 않는 도전을 가능케 한 힘이다. 김병기는 잭슨 폴록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기 전에 나는 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알지 못한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 않나. 다만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서도, 하루하루 용기를 내어 도전할 뿐! 그것이 인생이니까.


"예술은 언제나 공허하고 죽을 만큼 지루하게 영원한 반복 속에 갇혀 무엇인가 기다릴 것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변시지는 썼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지독한 고독의 정체,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신들에게 다가가 그 빛을 인류에게 퍼뜨리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 베토벤의 말이다. 1903년 로맹 롤랑이 쓴<베토벤의 생애>에 수록된 문구이다. 베토벤에 따르면, 예술가란 신들의 영역과도 같은 높은 차원의 경지를 인간에게 언뜻 느끼게 하는 메신저이다. 이들은 지상에 발 디디고 있으면서도, 영원을 좇아 불멸을 꿈꾸는 이들이다.


권진규-허명회-허준이. 한 인터뷰에서 허준이는 수학을 공부하는 원동력이 “아름다움의 추구”에 있다고 말했다. 수학 이론은 현실에서 경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암시하기 때문에 마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매우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학자의 내적 동기는 예술가의 그것과 같다.”고 그는 말했다. 음악가, 조각가, 수학자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 너무나도 먼 응시!


문신의 ‘시머트리(대칭)’는 땅에 단단하게 발 딛고 선 어떤 존재가 어떻게든 중력을 거슬러 자라는 동안 생겨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위로 자라면서도 옆으로도 좌우 균형을 유지하려고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견고한 안정감과 극도의 긴장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태어나는 존재라고나 할까. 생은 바로 그런 극단적인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형감각이다. 그러하기에 우주에 던져진 어떤 존재에게나, 생은 그만큼 어렵고, 신비롭고, 기적 같고,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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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가진 것 보다 다양한 경험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기를,
빠르고 효율적인 것보다 느리더라도 주변을 살피며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단순 소박한 느린 삶의 미학.
 

[본문발췌]
 
인생이 갈림길과 선택, 그리고 거래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일분일초를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선택하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사야 하고 어떤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려준다. 그 속에서 길을 잃으면 결국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세상은 진짜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허구의 모습을 만들어내라고 종용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기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충분한'. 자신의 직감에 생각과 마음을 열면, 삶의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 변화시킬 힘이 생긴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낯선 것을 통해 자신이 변화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계속 호기심을 갖고 마음을 열고 성찰하며 변화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변화에 설레기도 한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저항에 맞닥뜨리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더 원하는지에 달려 있다. 익숙한 삶을 원하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와 다르고 낯설지만 놀라움과 가능성을 지닌 삶을 원하는지. 무엇보다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마음가짐, 삶을 대하는 태도, 심지어 사소한 습관이라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되기 전에 꽃을 피우라고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늦게 꽃을 피우는 나무가 가장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저마다 속도가 다르다. 몇 분 만에 생기는 변화도 있고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변화될 수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변화의 시작이자 핵심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니멀리즘은 삶에 가치를 더하지 않는 모든 것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었고, 슬로 라이프는 삶의 속도를 줄여 안정되고 명료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생을 천천히, 좀 더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옳다고 여겼다. 
 
 
버릴수록 자유로워진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운동이다. 미니멀한 삶은 우리를 짓누르고 방해하는 과잉을 없애는 것이다. 내 삶에서 지나친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미니멀한 삶에는 가치 있는 것들만 가득 찬다.
 
 
빠르게 돌아가는 라이프스타일에 지친 사람들이 느긋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통해 삶의 속도를 줄일 수 있기에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천천히 산다는 것은 일상을 즐기고 소소한 순간들에 감사하는 것이다. 슬로 라이프는 아이들과 함께 걸어서 등교하거나,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거나, 수입이 적더라도 일을 줄여서 자유 시간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삶은 단순했고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한평생 짊어지고 사는 물건의 양이 늘어났다. 늘어난 물건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리는 우리의 집과 생각과 삶을 채우고 있는 잡동사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쓸모 있는 것들만 남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기준은 곧 나를 향한 것이다. 모든 판단과 지적, 공개적으로 나누는 모든 의견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굉장히 자기 비판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비판적이지만 자신에게 공감하고 친절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푼다.
 
 
심리학자 바브 마크웨이(Barb Markway)는 가치를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경을 통해 인내하게 하는 원칙"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어 창의성, 공동체, 재정적 안정, 모험, 성공, 가족, 사랑, 연결, 가정, 사려 깊음, 진실, 단순성 등이다.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우리가 늘 변화하고 성장하듯이 가치도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와 개인이 정한 가치의 순위가 늘 일치하지 않는데,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가치다. 다른 사람의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만든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과 같다. 늘 불편하게 끼워 맞추는 느낌이다. 반대로 나의 가치에 따라 살면 마음 깊이 옳다는 느낌이 들고 내 집처럼 편안하다. 문제는 자신의 가치와 주위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할 때이다.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무너지기 쉽다. 
 
 
모든 사람들의 기질과 경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보편적인 가치에 맞춰 살기란 매우 어렵다. 각자의 개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가치 목록을 작성하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고, 단순하게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단순하게 살기란 절대 쉽지 않다. 단순해지려면 포함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빼야 할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위한 결정이 나중에는 큰 가치가 있다고 해도 매우 감정적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핵심 가치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할지 여행을 떠날지 결정하기 어려운가? 약속이 너무 많아서 몇 개는 포기해야 하는가? 이러한 것을 정리할 때 가치가 중심을 잡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도 있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도 않다.
 
 
나의 가치에 맞춰 살면 진정한 내가 되는 느낌이 든다. 나의 결정이 정당화되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만 남게 된다. '이 선택이 나의 가치에 맞는가?'라고 질문하면 훨씬 쉽게 결정하고, 즉시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나의 핵심 가치를 알면 더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향한 로드맵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기쁨 목록은 시작 단계에서 유용하지만, 내가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므로 훨씬 큰 동기부여가 된다.
 
 
사용하지 않거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물건을 남겨둔다고 해서 돈을 다시 찾을 수는 없다. 실수로 산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정신적 부담까지 안게 된다. 이사하면서 옮기는 데 필요한 노력, 보관하는 데 필요한 공간과 비용을 생각해보자. 물건을 버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팔거나 기부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이 풍부한 시대를 살면서 끊임없이 잡동사니가 쏟아진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의 양을 줄이고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들만 남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나 집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잡동사니 때문에 지구가 버거워하고 있다. 우리가 잡동사니를 없애거나 재활용하고 있지만 애초에 불필요하고 잘못 생산된 물건들이 너무 많다. 잡동사니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건을 사는 것을 줄이고, 무엇을 살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책임감 있게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도 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로 웨이스트 라이프(low waste life)를 계속 실천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한다는 의미다. 물질이 우리에게 공간을 채우고 욕망을 좇으라고 말하듯이 사회는 우리에게 친구나 가족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라고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우리를 조종한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반면, 자신이 모르는 점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하고, 불확실한 삶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이라는 폭풍을 지날 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
 
 
올바른 선택이란 항상 그 당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생은 성취하는 것보다 정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정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면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거나 압도되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사방에서 쏟아지기 때문이다. 출세를 위한 사다리에 오르고 집 평수를 늘리고 꿈에 그리던 드레스룸을 갖는 것은 잘 알려진 성공 사례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며, 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중요한 자원을 어디에 쓰는지 평가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은 비물질적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적인 잡동사니는 정리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준다.
 
 
스크린을 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안감과 우울감은 높아지고 자존감은 낮아진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을 인스타그램의 화려하게 꾸며진 삶과 비교하며 현실을 왜곡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시간, 공간, 돈이 풍족해졌다.
 
 
소유물에 따라 내 자존감이 결정되지는 않으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게 소유해도 행복할 수 있고, 잡동사니는 해야 할 일 목록과 같았다. 하지만 물건의 양이 많든 적든, 그것이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현재 내가 가진 것으로 행복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영영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통찰력을 얻었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버리는 연습을 해야 했다. 반드시 물질을 버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물건을 버리는 데 선수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훨씬 더 버리기 어려운 감정적인 잡동사니를 정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삶의 외적인 부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적인 부분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고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정한 행복을 모르게 된다. 행복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은 없다. 우리는 뭔가를 가지거나 달성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내면과 넘치는 자기애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이나 물질로 나를 증명할 필요 없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우리를 평생 지탱해주는 행복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행동을 바꾸기 쉽다. 인생이 도로이고 생각, 느낌, 행동이 도로 위에 있는 자동차라고 하자.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도로 위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앉아 차량을 보는 것이다. 나의 생각, 느낌, 행동을 명확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진리로 가는 길에 단 2가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끝까지 가지 않는 실수와 시작조차 하지 않는 실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긍정적인 것만 찾고 부정적인 것은 모두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 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모두에서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 행복을 찾는 것보다 만족감을 찾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목표이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때도 있고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오늘 하루가 안 좋은 날이든, 평범한 날이든, 비극적인 날이든 여전히 당신에게 소중한 날이며, 여느 다른 날 만큼이나 감사해야 한다. 내일을 향해 급하게 나아가지 말고 과거의 아픔에 머물지 말자.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와 미래뿐이다. 가능한 모든 순간을 만끽하자.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내가 영향을 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을 탓한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만들고 치유할 때까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고통스럽고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신념은 계속 반복된다.
 
 
자기 확신과 자기애, 안정감이 부족하면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려고 든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 한다. 그래야 삶에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을 훨씬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삶은 무작위로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 시간이 됐든 돈이 됐든 에너지가 됐든 무엇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지에 따라 삶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내 삶에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충분함을 정의하고, 이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려면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 저마다 충부함의 기준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충분함이 다른 사람에게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지금 느끼는 충분함이 내년에는 부족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만능 공식은 없다. 우리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내가 꿈꾸는 성공, 행복, 만족감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공허함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채우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적게 원하고 단순함을 즐기고 자신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워진다.
 
 
우선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점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더욱 의도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 없고, 돈이 얼마나 있어야 진정으로 행복할지,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얼마만큼의 물건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있다. 나의 가치를 확실히 세우고 글로 적어서 매일 마음속에 간직한다.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면 그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적절한지 알 수 있다.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자신에게 도움되지 않는 것은 정리한다. 정리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부엌에 있는 나무 주걱과 같은 물건부터 친구를 포함한 사람이나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걱정 등 삶의 일부를 분리해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한 후에 계속 가지고 있을지 버릴지 결정한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정리하기 쉽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가치 있고 풍성하고 의미 있다.
 
 
삶에서 성취하는 것, 사는 집 평수, 입고 있는 옷 브랜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 유일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이해 뭔가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고, 숨 쉬고,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행복하든 아파하든, 사랑이 넘치든 상처받든, 승리하든 패배하든 나라는 것은 변함없다. 나의 가치는 내 안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나는 이미 충분한 존재다. 부족하거나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 없다. 부족함과 불완전함도 나의 일부이다. 나의 연약한 부분도 다른 부분만큼 공감과 인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듯 나 자신을 사랑하면 내가 얼마나 용기 있고 강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
 
 
속도를 늦추면 우리가 만끽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다. 어디에든 느리게 사는 삶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계획, 일, 또는 라이프스타일까지 천천히 몰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속도를 늦추면 감각이 살아나고,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시간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느림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이 드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는 찾아오고, 변화의 흐름에 따라 예전의 모습을 벗고 새로운 모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해본다. 나만의 충분함을 찾아라. 마음을 충분히 쉬게 하라. 기대치를 낮추자. 낮은 기대치야말로 만족감을 얻는 비결이다. 특히 자신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균형 잡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다고 해도 나 자신을 더 가치 있고 사랑스럽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 삶은 선택의 갈림길과 버리는 것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길을 찾아가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우아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더욱 단순하고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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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주적 시공간에서 보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또한 많은 결정과 선택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외부 존재의 힘에 의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은 모든 것이 옳고 완벽 하기에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따르기를 바란다. 자기애는 넘치면서 공감과 배려는 부족한 사람.
 
 
[본문발췌]

오늘 아침에 내가 그 백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인데 그는 들으려 하지 않더군. 사람은 요청 받은 걸 해 주지 않겠다고 거절할 수는 있지만 요청 받는 것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잖아. 그런데 백인의 나라에는 그런 종류의 속담이 없는 것 같네.
 
 
에제울루의 단 한 가지 잘못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니까 아내, 친족, 자녀, 친구, 심지어는 적들까지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살아생전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에제울루에게 감히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의 적이 되었다. 만약 자신과 아주 똑같이 행동하는 친구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독하게 살 것이라고 했던 원로들의 말을 에제울루는 잊고 있었다.
 
 
혼잡한 시장을 지나갈 때는 극도로 조심해서 걷는다 해도 그의 옷깃이 다른 사람의 상품을 뒤엎거나 깨트릴 염려가 있다. 그런 경우 손해를 벌충할 책임은 옷이 아니라 옷을 임은 사람에게 있었다.
 
 
그는 우선 극도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싸울 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먼저 극한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아프리카 독사가 무서운 까닭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도발도 견뎌 낼 것이고 심지어 적이 자신의 몸통을 짓밟아도 내버려 둘 것이다. 일곱개의 어금니가 하나씩 하나씩 모두 다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자를 향해 말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노라!
 
 
"타! 은와누!" 귀신이 버릇없는 어린아이의 귀에 대고 소리치듯 울루 신이 그의 귀에 대고 외쳤다. "이게 네 개인적인 싸움이라고 누가 너한테 말했느냐?" 에제울루는 시선을 마룻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 마음에 맞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다니, 누가 너한테 이게 너의 개인적인 싸움이라고 말했느냐? 너에게 야자 술을 가져다 준 친구들은 구해 주고 싶으냐, 헤헤헤헤헤!" 오로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만이 메마르고 해골 같은 웃음을 웃어 대는 신들의 협박과 조롱에 때때로 다가갈 수 있었다. "나와 내 희생자 사이에 끼어들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때릴 마음은 전혀 없는데도 네가 대신 주먹을 맞을 수도 있을 테니! 두 마리 코끼리가 싸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느냐? 넌 어서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이데밀리와의 싸움은 나한테 맡겨라. 시기심으로 가득한 이데밀리는 그의 비단뱀이 다시 한 번 권좌에 오르도록 나를 파멸시킬 방도를 찾고 있다. 이제 네 생각을 나한테 말해 보렴. 난 어서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나와 이데밀리는 끝장날 때까지 싸울 거란다. 누가 누구를 쓰러뜨리건 간에 승자가 상대방의 발찌를 벗길 것이다!" 그다음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성스러운 비단뱀을 믿는 질투심 많은 종교 의식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방법을 인간에 불과한 에제울루가 어떻게 감히 자신의 신에게 알려 준단 말인가? 이건 신들의 싸움이었다. 에제울루는 신의 활시위에 걸려 있는 화살에 불과했다. 에제울루는 야자 술 같은 이런 생각에 취해 있었다. 새로운 생각들이 서로 뒤엉켰고 과거의 사건들이 새롭고도 흥미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어째서 오두체는 상자 속에 비단 뱀을 가두었을까? 그것은 백인의 종교에서 저주받은 동물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었나? 오두체 또한 울루의 손에 들린 화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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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한 언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한 인식이 섬세하다는 의미"라 하고, 어휘력이 많으면 생각과 지적 능력, 창작 능력에 도움이 되듯이,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사회, 사람을 경험하는 것도 사람이 생각과 상상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본문발췌]

1. 빛은 한반도로부터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대하고, 자기에게 질문하는 사람에게만 예술은 속삭일 뿐이다." - 아르놀트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노동에는 생산의 만족이 있고, 예술에는 창착의 기쁨이 있다. 좋은 조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거기서 한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좋은 노동조건, 좋은 창작여건은 기대만큼, 아니 그 이상의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에 근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예(藝)에 노닐라.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2.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일정한 규범이나 전통에서 홀연히 벗어나는 것은 문화의 자기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이야기다. 자신감이 부족할 때는 주어진 규범에 충실할뿐이다. 오직 자신있는 자만이 전통에서 벗어나서 그 전통의 가치를 확대해간다.


"온몸에 강함이 너무 지나치다. 그 강함을 깎아내려라, 좀더 약하게 말이야." - 미야모토 무사시 중 닛칸 스님


 

3.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노력해서 안다. 그러나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다. - <중용>


헤이안 신궁의 신원.
'빼어난 모습은 온통 신궁을 채색한 붉은빛의 수많은 늘어진 벚꽃나무들이다. '참으로 이곳의 꽃을 빼고 낙양(교토)의 봄을 대표할 것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에코는 신궁의 입구에 들어서자 만개한 벚꽃의 붉은 색깔이 가슴 밑바닥까지 스며들어와, '아아, 올해도 낙양의 봄을 만났구나!'하며 선 채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고도> 중...


명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고 대답한 명구가 있다. 이말은 1969년 <뉴욕타임즈>가 독일의 건축가 미즈 반 데어 로에의 사망 기사를 쓰면서 인용하여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명구의 연원은 독일인 미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먼저 한 말이었다고도 하고, 또 그전엔 프랑스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좋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Le bon Dieu est dans le detail)라고 먼저 말했다고도 한다. 그런에 이 말이 현대로 내려오면서는 바뀌어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이로하 노래 - 홍법대사
꽃은 화려해도 지고 마나니
우리의 인생살이 누구인들 영원하리.
덧없는 인생의 깊은 산을 오늘도 넘어가노니
헛된 꿈 꾸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으리라.


"평등이란 서로 다른 개성이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것이 평등입니다." - 평등원 주지 가미이 몬쇼 <평등원 이야기>


"스님은 홀로 깨치기를 좋아하고 남을 가르치기엔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산길을 가는데 한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우친 자가 나중 깨칠 사람을 위하여 가르치는 데 소홀히 하면 안 된다'라고 꾸짖고 홀연히 사라졌다" - 최치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
나는 이것을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말해주는 경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정확히 알아야 남에게 말해줄 수 있고 내가 확실히 봐야 답사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언젠가를 위해 오늘 고산사로 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4.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 문화를 무시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미를 말하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미학을 말했지만, 일본은 화려할 때는 더없이 화려하고 또 검소할 때는 더 없이 검소한 극단을 보여준다. 이 '극과 극의 공존'이야말로 일본미의 해답을 찾아가는 하나의 '문화적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형식을 규정하는 것은 내용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형식은 다음 내용을 규정한다고. 그리고 과도한 형식은 내용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예술은 자기를 표현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자기 자체의 변신이다" (not as a vehicle for self expression, but self alteration) - 존 케이지


오유지족이라! 직역하면 '나는 오직 족함을 알 뿐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남긴 마지막 가르침을 담은 <유교경>의 "족함을 모르는 자는 부유해도 가난하고, 족함을 아는 자는 가난해도 부유하다"(不知足者 雖富而貧 知足知人 雖貧而富)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불확정적 비움의 공간
우리의 마당은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든지 삶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린이들이 놀든, 잔치를 하든, 제사를 지내든, 그 행위가 끝나면 다시 비움으로 돌아온다. 그거야말로 불확정적인 비움이죠.
안동 의성김씨 종가의 마당, 병산서원의 마당, 봉정사 영선암의 마당, 선암사 무우전 마당, 우리 집 앞마당.
일본에는 선의 정원인 석정이라는 뛰어난 관조의 공간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삶의 내용을 다 받아내는 마당이 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 훌륭한 공간을 갖고 살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일본 사람들처럼 개념화, 논리화, 형식화해 발전시켜간다면 '불확정적 비움'의 공간이 이보다 더 잘 구현될 수 없을 것 같다. 용안사 경용지를 지천회유하도록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관조의 공간으로서의 일본의 석정과 삶의 공간으로서의 우리의 마당이었다.
 

이런 일본 형식의 정원은 없지만 우리 식의 명원은 많죠. 궁궐 정원은 창덕궁 부용정이 제일이고, 은거지 정원으로는 보길도 부용정, 담양 소쇄원이 압권이고, 저택과 함께 어우러진 정원으로는 성북동 성낙원, 강릉 열화당, 영양 서석지 등등...
사찰 정원으로는 순천 선암사, 서산 개심사, 안동 봉정사 영선암이 멋있조. 우리나라 정원은 일본 정원과 콘셉트 자체가 아주 달라요. 일본 정원은 보시는 바와 같이 자연을 재현한 인공적 공간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없잖아요. 이에 비해 우리 정원은 자연공간 안에 인공적인 건물이 배치되고 나무가 심어지고 화단이 만들어집니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일본과는 정반대이고, 사람이 그 속에 파묻히죠. 그래서 일본은 정원이고, 우리나라는 원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야야 할 핵심 사항

  • 사회 구성에는 천황, 공가, 무가, 불가
  • 사상에는 신도, 밀교, 선종
  • 건축에는 침전조와 서원조
  • 정원에는 마른 산수, 석정
  • 미술에는 장벽화, 후스마에
  • 역사적 인물로 천황 중에는 헤이안으로 천도한 간무 천황, 원정을 펼친 삼십삼간당의 고시라카와 천황, 남북조시대를 낳은 대각사의 고다이고 천황
  • 무사와 귀족 중에는 최초의 쇼군인 청수사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육바라밀사의 다이라노 기요모리, 평등원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천륭사의 아시카가 다카우지, 금각사의 아시카가 요시미쓰, 은각사의 아시카가 요시마사
  • 승려로는 동사의 공해, 연력사의 최징, 육바라밀사의 공야, 지은원의 법연, 고산사의 명혜, 건인사의 영서, 천륭사의 몽창 국사

 
 
사물에 대한 언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한 인식이 섬세하다는 의미지.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雪)을 표현하는 단어가 60가지나 된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가 분청사기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미시마, 하케메, 호리미시마, 고히키, 가타데라고 말하고 잡기인 막사발을 고모가이, 아마모리, 이도, 긴카이 등으로 미세하게 분류하여 부른다. 언어는 열심히 사용하고 많이 쓸수록 발전하고 파생한다. 여름에는 잘 식으라고 대접 모양 다완을 쓰고, 겨울에는 따뜻함을 잘 간직하라고 통형 다완을 쓴다.


이도 다완이 느낌
형태는 순박하고, 빛깔은 은은하고, 촉감은 강한 듯 부드럽고, 기품엔 범접하기 힘든 고상함이 있는 것, 그러나 무언가 아쉬움이 남은 듯한 미련이 있어 손에서 놓지 않고 자꾸 매만지게 되는 것. 그것이 와비차의 이도 다완이다.


명작의 3대 조건 : 정신, 재력, 기술
 1) 그 시대를 관철하는 심오한 미학(정신)
 2) 패트론(patron)의 풍부한 재력(경제적 지원)
 3) 장인(예술가)의 뛰어난 솜씨(기술)....
 
고보리 엔슈가 가쓰라 이궁을 건설할 때 제시했다는 세 가지 요구사항
 첫째,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 것.
 둘째, 재촉하지 말것.
 셋째, 비용에 제한을 두지 말 것.
 가쓰라 이궁은 와비사비의 다도가 있었고, 왕가의 재력이 있었고,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가 있었다.


히에이산 연력사 비석.
'천가지 구석 중에 한 가지만 비추어도 이것이 곧 국보이다.' (照千一隅 此則國寶)
이것은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고 그런 장인정신을 높이 사줄 줄 아는 사회를 만들자는 일종의 표어이다.

 
 
아스카, 나라 , 교토 3박 4일 추천 여행 코스
 1일차) 법륭사, 아스카사, 아마카시 언덕. 가시하라 숙소
 2일차) 흥복사, 동대사, 삼월당, 우지 평등원, 우지 강변 산책 및 대봉암 찻집, 후시미 이나리 신사. 교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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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소유, 더 편리한 생활의 흔적은 자연과 환경, 미래 세대에게 주는 피해를 남기기에 균형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배려와 절제가 필요하다.

 

 

[본문발췌]

 

'소외된 90%'가 직면한 다양한 주거, 보건, 식수, 에너지, 교육, 환경, 농업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가장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전 세계의 고질적인 수많은 문제들에 접근하는 창의적인 접근을 소개한다. 적정기술이라 해서 '구닥다리 기술의 개발도상국 전수'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동안 화려하게 진보한 기술이 결코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굵직굵직한 국제문제에 도전한다는 의미다. 이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학 교수가 언급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의미하며, '아래쪽을 향한 위대한 도약'(Great Leap Downward)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에게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하는 일은 국제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인간의 얼굴을 한 발전'을 꿈꾸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그 이야기에 어떤 배역과 역할을 가지고 참여할지의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의 근간이 되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의 시조는 비폭력운동의 창시자, 인도의 간디이다. 간디는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값싼 직물이 인도에 들어오면서 인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자, 직접 물레를 돌려 직물을 몸소 생산했다. 인도 고유의 전통적인 직물방식은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누구든지 원하는 만큼 쉽게 만들 수 있고, 더구나 외부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마냥 좋은 제품들, 최고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제품이나 디자인, 서비스라 해도 장기적으로 또한 결과적으로 그것을 누리는 개개인에게 '소외감'과 '의존성' 그리고 '생존의 역량'을 박탈할 수 있음을 간디는 간파한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사상은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를 쓴 영국의 대안경제학자 슈마허를 통해 확대발전하였다. 196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개발을 위한 과학기술회의'에서 슈마허는 대량생산 기술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희소한 자원을 낭비한다며, 근대의 지식과 경험을 잘 활용하고 분산화를 유도하며 재생할 수 없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을 제안했다. 그는 이 기술이 저개발국의 토착기술보다는 휠씬 우수하지만 부자들의 거대기술에 비해서는 값싸고 소박하다며 이를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고 명명했다.



적정기술이란 '해당 기술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그 사용이 환경이나 타인에게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진보를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란 물건이나 개념에 미, 기능 그리고 비용, 이 세 가지의 속성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었는지에 기반을 두어 정의된다. '최고의' 디자인은 대개 높은 가격과 동일시되며, 특권과 차별성을 가진 디자이너의 이름은 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동등한 특권을 부여한다.


우리는 진정한 필요라기보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돈을 쓰고, 욕구를 탐닉하며, 욕구를 실현하는 문화를 위해 디자인된 것들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인간은 깨끗한 물, 집, 음식, 교통수단, 의료 지원과 정보에 대한 접근의 기본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이것들을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행운과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에게는 거의 얻을 수 없거나 좀처럼 얻기 어려운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고, 지속가능하며, 인도주의적인 디자인을 만들기 위한 운동. 디자인의 초점이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인구들에게로 옮겨지고, 이 관점에서 보는 디자이너들은 최종 사용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들과 직접 일을 하고, 이를 토대로 비용이 적게 드는 기술을 개발하여 지역의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한다.


적정기술이란 단순하고 저렴하며, 생산과 분배가 쉽고, 직접적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술이어야 한다.


소형화, 저렴한 가격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 무한한 확장성 이 세 가지가 저렴한 디자인의 원칙이다.


그들에게 수익을 안겨줄 디자인을 하라.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가장 기업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선이 아니라 기회를 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다. 대다수 빈곤층은 시간과 노동력이 부족하지 않다. 금전절약형 장비들은 가격이 쌀 때만 통용된다. 나중이 아닌 지금의 소득,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제 해결하기.

  • One Laptop per Child...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에게 배움, 정보,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도구.
  • 신뢰할 수 있고 재생 가능한 지역 에너지. 인도 SELCO, 해리시 한데
  • 구르는 물통 큐드럼, 피터 핸드릭스
  • 이동 전등
  • 카트리나 가구 프로젝트
  • 모두를 위한 청각, solar aid 태양광 충전기, 보청기, 배터리, Godisa technologies. 보청기에서 가장 비싼 부분이 배터리이며, 배터리는 계속 교체해주어야 한다. 전 세계 인구의 10%가 청각장애가 있고, 이들 중 80%는 개발도상국에 거주.

 



소외된 90%에 대한 통계 : 주거(shelter), 물과 위생(water and sanitation), 식량(food), 에너지(energy), 건강(health), 교육(education), 교통(transport)

  • 전 세계 인구의 약 절반인 28억 명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부적절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은 노숙으로 분류된다.
  •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전한 식수에 접근할 수 없고,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본 위생시설 없이 살고 있다.
  • 전 세계적으로 8억 4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있다.
  • 매년 250만 명의 사람들이 실내에서 연료연소 후 생긴 분진 때문에 사망한다.
  • 개발도상국 인구 중 70%가 집에 전기가 없으며, 의료기관과 학교가 없다.
  • 매년 100만 명의 사람들(그중 대부분은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 최소 13억 명의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다.
  • 전 세계적으로 1억 2천만 명의 아이들이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다.
  • 아프리카 시골지역의 여성들은 연료나 물 등을 남자보다도 세 배나 더 많이 머리에 이고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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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사회와 환경의 확장, 유지를 위해서는 인간의 ‘공감’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하지만 현실 세계는 생태계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양극화, 국가주의, 지역주의, 개인과 집단 이기심과 소유욕, 소비 조장, 분쟁 등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상황은 걱정이다.


[본문발췌]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야생과 친해지려는 동료 의식을 유전적으로 타고났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은 자연에서 고립될수록 심리적 박탈감은 물론 신체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성은 자율, 즉 혼자만의 섬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의식과 애정과 친밀함을 추구한다. 자의식과 자아 인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이때 우애적 유대감을 만드는 수단이 바로 공감이다.

우리 인간에겐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을 추구해가며 보다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여정은 이러한 인간의 경향과 우주를 지배하는 에너지 법칙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시작한다. 인류사의 근간을 이루는 변증법은 공감을 확장하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 사이에 놓인 끊임없는 피드백의 고리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자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환경을 그 자신과 자신의 씨앗으로 바꾸려고 한다."라고 지적했다. 자연의 분류 체계에서 진화가 잘된 종일수록, 자신의 비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에너지도 많고 살아 있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엔트로피도 많다.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는 모든 유형의 생명은 비평형 질서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 환경에서 더 큰 무질서(흩어진 에너지)를 초래한다는 말이 된다. 에너지는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며, 높은 수준에 있는 시스템으로 들어가 그 시스템을 소모하여 더 낮은 상태의 시스템으로 만든다.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 매커디는 <인간의 기원>에서 인간의 경험을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실제 사용량이 늘어나는 진화 과정으로 본다.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나 집단이 이룩한 문명의 정도는 에너지를 인간의 발전과 필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도 대부분 이런 견해에 동조한다. 가령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를 모든 인간 문화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로 사용한다. 그는 한 문화의 업적이 높은지 낮은지는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의 기능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화이트를 위시한 인류학자들은 거듭 강조한다.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방정식을 바꾸어 왔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소위 지휘-통제 메커니즘이 되어, 문명의 에너지 흐름을 편성하고 조직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가령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인은 처음으로 농업에 정교한 관개시설을 도입했다. 광합성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품은 채 저장된 곡물은 1차 에너지가 되어 인구를 크게 늘리고 계약 노동량을 증가시켰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에너지 제도를 다루려면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필요했다. 최초의 기록 문서에 새겨진 수메르인의 설형문자는 곡물을 생산하고 저장하고 분배하는 데 있어 수력 기술의 발명에 못지않게 중요한 발명이었다. 설형문자는 복잡하고 거대한 관개 체제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지휘-통제 메커니즘의 등장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장부 기록은 그날 그날의 곡물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을 포함하여 수메르인의 모든 조업 업무를 체계화해 주었다.

근대 초기의 인쇄-출판-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석탄, 증기, 철도와 결합하여 1차 산업혁명을 낳았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전화, 라디오, 전동 타자기, 계산기 등 1세대 전기 통신은 석유 생산 및 내연기관과 맞물려 20세기 내내 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사회와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문헌에 나타난 관개농업 문화의 의식은 고대 구전 문화의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근대의 인쇄 혁명과 집약적인 1세대 전기 통신은 다양한 종류의 의식을 낳았다. 아울러 각 단계에서 새로 나타나는 의식은 앞선 의식의 잔재를 한편에 지니면서도 보다 성숙한 공감 본능을 확대시켜 갔다. 새로운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식의 구조는 인간이 평형상태와 멀리 떨어진 상태에 있을 때 번창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각 단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복합체는 인구를 유지하고 세대 간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의 흐름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그들의 영속성은 환경에서 전체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지구에서 35억 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수많은 생물들 중에서 인간은 가장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고 잇달아 나타나는 각각의 사회적 구조의 질적 변화는 이전의 사회구조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대며 더 많은 엔트로피를 생산했다.


새로워지고 복잡해진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식 구조 덕분에 인간은 시간을 절약하고 공간을 좁힐 수 있다.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이다.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 반사회적 이상성격자, 자폐적 불구자들로 가득 찬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가? 사회는 사교적이어야 하고 사교적이 되려면 공감이 확대되어야 한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자아의식은 더 확실해야 하고 다양한 종류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많아야 하며 공감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공감을 인식하는 과정과 세계적 차원의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파괴가 충돌하는 인류 여정의 중대한 교차로에 서 있다. 우리의 공감의 정도가 높아 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엔트로피로 인한 손실도 매우 불길하다. 인간이 본래 철두철미하게 물질주의적이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을 해결할 가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에 민감하고, 우애를 갈망하고, 사교적이며, 공감을 넓히려는 성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공감-엔트로피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내어 생물권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부모가 정적인 애착과 독립적인 탐구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마련해 주어 둘 사이의 바람직한 균형을 잡아 주면, 아이는 자아의식을 건강하게 발전시키고 정서적으로 성숙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포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지 못하거나 세상을 탐구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하면, 아이의 자아의식은 억눌리게 되어 커서도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보다 안정적인 애착 관계에 있는 아기가 커서도 보다 사교적인 성인이 된다. 이 아이들은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협동심이 높으며 친밀한 관계를 많이 만들었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공감 의식이 잘 발달되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줄 수 있을까? 공감은 가르치거나 훈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감해 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가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공감의 잠재력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나 놀이의 본질적 특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우선 놀이는 본질적으로 철저히 참여적이다. 놀이는 자아가 마음으로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환상이다. 놀이는 다른 사람과 무언가에 몰두하는 행동이다. 놀이는 혼자만의 쾌락이기보다 하나의 공유된 즐거움이다. 순수한 놀이는 수단이기보다는 본질적 의미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다.
  • 개방성과 관용은 놀이 환경의 본래적 부분이다. 행동에 따른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자신을 드러낸다. 또 놀이에는 늘 용서가 뒤따르기에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당할지 모른다. "그냥 장난으로 그런 거야."라는 말은 용서를 당연시하는 아이들이 발뺌할 때 써 먹는 상투어이다.
  •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놀이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놀이는 또한 실용성과는 별개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놀이 공간'은 안전한 피난처이고 '현실 세계'에서 독립된 장소이다. '놀이 공간'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들이 임시로 공유하는 가상의 장소이다.
  • 놀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는 것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다. 경험 그 자체는 '가상pretense'이어서 놀이라는 경험에 초월적인 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느낌으로는 다른 현실을 갖고 있다.
  • 놀이 환경은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교실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페르소나, 다른 역할, 다른 상황에 대입하여 상상력을 펼치고 저 사람이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여자아이와 사내아이가 소꿉장난이나 병원 놀이를 하고 개나 말, 엄마나 아빠, 형제, 학교 선생님, 대통령이 될 때, 그 아이들이 하는 것은 바로 공감의 확장이다.
  • 놀이가 없는 공감 발달은 상상하기 어렵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 정의한 것도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위징아는 모든 문화는 놀이에서 생겨난다고 간파한다. 그는 "이런 놀이를 통해 사회는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드러낸다."라고 말한다.
  • 사회화 과정에서 놀이가 그렇게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놀이가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 주기 때문이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대체 현실을 끝없이 만들어 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대체 현실을 탐구한다. 우리는 거대한 타자, 즉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존재의 무한한 영역을 헤치는 탐험가가 된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다른 현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실체적인 경험과 정서와 추상적 사고를 하나의 종합적인 앙상블, 즉 공감적 마음으로 모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정서적일 뿐 아니라 인지적이다. 우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동시에 추상적 사고를 창조한다.
  • 순수한 놀이는 또한 인간 개발이 가장 잘 구현되는 현장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1795년에 쓴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인 한에서만 놀이를 하고, 놀이할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는 인간의 유대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적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놀이를 한다. 놀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가장 심오한 행위이다. 놀이는 집단적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놀이하는 사람은 경계심을 풀고 잠깐이나마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함께 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자유와 놀이 역시 교집합을 갖는다. 진정한 놀이는 항상 자발적으로 시작한다. 놀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를 좋아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놀이에 빠진다. 목표는 즐거움과 생명 본능의 재확인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를 경험함으로써 사람은 동료 인간과 동등하게 마음을 열고 참여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몰입한다. 순수한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면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로 이해하고 그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때 그는 놀이를 한다."라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다. 놀이할 때보다 더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가? 그때 놀이는 시시한 장난이 아니다. 놀이는 공감 의식을 확장하여 진정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수단이다.

 

화해는 주로 사회적 조화를 되찾으려는 욕구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위로는 다른 의도 없이 순전히 공감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으로, 단지 상대방의 곤경을 인정하고 달래기 위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면 상대방의 느낌을 읽고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적 유대감을 형성하기가 더 쉬워진다.


말과 글과 인쇄, 그리고 이제 전기 통신 등의 발전으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또 보다 밀집된 인구와 복잡한 사회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사회적 진화의 각 단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일차적 기능은 공감의 확장을 통해 신뢰감, 친밀한 관계, 사회적 결합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서로 털을 골라 주든 인터넷을 통해 가십을 퍼뜨리든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단을 통해 동료와 교류하려는 깊은 욕구와 사회적 본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감적이며 이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공감적 배려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다.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좀 더 깊이 공감할수록 참여의 정도가 강해지고 넓어지며, 그럴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영역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보편적이 된다. 얼마나 마음을 열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현실을 이해하는 폭도 달라진다. 경험은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보편적이 된다. 우리는 세계인이 되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권 인식biosphere consciouness'의 시작이다.



진리는 찾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체적 철학의 틀에서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새로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현실은 공유된 경험을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공통의 이해에 관한 설명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거대한 도식 속에 모든 관계가 썩 잘 들어맞는 방법을 통째로 알려고 한다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보다 더 큰 그림을 우리가 속해 있는 방법과 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진리는 자율적 사실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진리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다. 그때 모든 진리는 우리의 현존하는 관계와 공통으로 공유된 이해를 체계화하는 것이다. 존재는 관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존재의 진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적, 철학적 접근은 우리의 경험적 존재를 무시하는 신앙과 이성과의 근본적인 결별이다.


실체적 경험을 내세우는 철학자에게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한 존재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가능한 한 폭넓게 그 경험을 구가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차이는 자유에 관한 관념을 바꾸어 놓는다. 자유는 이성의 시대에 핵심 개념이었다. 합리주의자들은 자유롭다는 것을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자율적인 상태로 정의했다. 근대의 자유는 노동을 통제하고 재산을 확보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쾌락을 최대화하고 행복해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또한 정치 무대에서 대표권, 그리고 시장에서 선택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개개인 각자가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의 주권자라고 소리를 높였다. 고전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에게는 물질 세계에서 자신의 이익을 마음 놓고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주권과 경제적 권리 모두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본 것이다. 이성적 양식으로 볼 때 자유는 부정적인 자유, 즉 배제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혼자 고립될 수 있는 자유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냉정하고' 자족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이들과는 상반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인생의 충만한 잠재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충만한 삶이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보다 깊고 보다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성을 찾는 삶이다. 공감적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양육되고 성장할 때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확장된 공감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평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유일한 인간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할 때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는 바로 그런 행동이 평등 의식의 궁극적 표현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신분에서 상대방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다르고 낯설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실감하기 어렵다. 상대방에게 동정을 느낄 수도, 안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과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그들이 나 같다는 느낌과 반응이 있어야 한다.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고 오직 '나'와 '너'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 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공감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초월한다. 실체적 경험이 현세적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허약함을 인정하고 삶을 최대한으로 누림으로써 초월한다. 완벽함에 대한 충동은 물러나고 자아실현에 대한 탐구가 들어선다.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최대화하려 한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칭송하는 자, 삶을 넓힌다." 프리드리히 헤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근본적인 존재로서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 탄생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다."라고 상기시킨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삶을 긍정한다.


괴테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인간에게는 특별히 삶을 음미할 수 있는 고양된 의식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청지기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도 그런 맥락에서 보았다. 자연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판단을 보류한 채 자신의 삶을 꾸려 갔다. 그가 아는 자연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대상이거나 실용적이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상호성이 지배하는 살아 숨쉬는 공동체였다. 인간은 자연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보다 큰 전체와 연결된다. 이런 관계를 심화시키려면 다른 존재의 고유한 개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다른 존재가 우리를 어떻게 경험하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다른 존재의 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세상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래서 세상에 '말을 거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인이다." - 괴테


낭만주의자들에게 개인은 창조적 잠재력을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었다.


다른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공감의 낭만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면 공감도 있을 수 없고 지상의 초월을 위한 낭만적 탐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존 러스킨은 낭만주의자들이 상상력에 부여한 의미를 이렇게 지적했다. "인간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본능적으로 배려하게 된다." 낭만주의 운동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이유로 공감 의식의 진화라는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공감적 영감을 진전시킨 주역은 다른 아닌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시야말로 다른 사람에 대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갇혀 있던 공감의 충동을 풀어헤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외감, 생명의 나약함, 존재의 고통, 잘살아 보려는 투쟁, 그리고 친교의 기쁨을 이처럼 시를 통해 환기시킨 예는 일찍이 없었던 현상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존재의 적을 소유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저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가 우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존재와 멀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만다. 


착한 성격이 멋진 개성으로 바뀌는 과정에는 또 다른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람마다 개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 개인의 나약함이나 그들만의 포부에 보다 민감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착한 성격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으로만 구분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분류하고 판단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정서적, 정신적 나약함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호감을 받는 것이 존재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애정이나 우정에 대한 갈망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한층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세계의 도시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엔트로피 흐름의 엄청난 증가였다. 도시의 사회구조는 지구의 이용 가능한 에너지와 물질을 더 많이 퍼내어 인간의 생활을 평형 상태에서 멀리 떼어 놓는다. 인프라의 중심부에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지만, 가장자리와 외부에서는 더 많은 엔트로피 폐기물을 쏟아 낸다.
생활이 도시화되면서 인프라는 더욱 복잡하게 작동하여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르고, 차별화와 개인화가 심해지고 자의식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게 되고, 그러면서 공감적 유대는 더욱 확장된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서로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남과 교류에 비례해서 공감의 표현이 확장될 가능성도 증가한다. 여행은 공감적 감수성을 넓혀 줄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는 누가 가장 강력한 리더가 되고, 누가 가장 훌륭한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며, 누가 경제를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등의 항목이 포함되는 것이 보통이다. 2008년에는 색다른 질문이 하나 추가되었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선택을 제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답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감을 대통령의 자질로 끌어들인 여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정치학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정치가나 여론조사 기관, 그리고 대중들은 그 질문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끌 가장 좋은 후보를 결정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고 타당한 질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선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며 공감을 넓혀 간다. 자의식이 분명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훨씬 너그러워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외부의 존재를 두렵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강한 결속력을 가진 작은 집단의 유대감에서 해방되어 보다 느슨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교제를 확대해 가면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지고 개방적이 되어 공감을 확대시킬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의 태도와 가치를 추적한 후에, 로널드 잉글하트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생존이 불투명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을 때, 외부인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 갈 위험한 국외자로 인식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예측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 구분과 성별 기준을 고수한다. 거꾸로 생존이 당연시되기 시작할 때,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은 흥미롭고 자극을 주기 때문에 긍정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이들 조사의 핵심은 “개인의 안정성이 공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소외 집단을 인정하고 각양각색의 다른 사람들과 공감적 유대를 넓혀 가는 새로운 현실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개인의식이 활성화되고 자기 표현이 두드러지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거대한 조직망에서 서로 관계를 주고받는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된, 복잡하고 글로벌하게 구조가 짜여진 문명은 개방 의식, 비판단적 견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정,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의 기반을 발견하려는 갈망 등을 요구한다. 범위를 넓혀 가는 공감의 연대감은 수많은 사람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어 주는 접착제이다.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 이상으로 부의 추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부의 소유는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소유해 버려,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행동만 하고, 모든 사람과 사물을 자신의 부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한다.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결국 나는 주변의 애정과 우정으로부터 고립된다. 남는 것은 소외감뿐이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다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진다. 물질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할수록 사람을 못 믿게 된다. 또한 물질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모르고 너그럽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기심이 늘면 이타심은 줄어들었다. 물질적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 물질주의자는 세상은 얻지만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동, 즉 공감적 유대를 발휘하는 일에는 서툴다.


인류의 절반은 안락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화석연료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소모하고 있고, 그 이상으로 부가 늘어날 때마다 불행도 증가하게 된다. 또 한쪽 절반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최소한의 안락한 수준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다. 하지만 부유한 나라의 호사스러운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주고, 30억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석유와 그 밖의 화석연료나 핵전력에 필요한 우라늄은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최소한의 안락을 보장해 주는 분기점까지는 경제가 향상되어야 공감도 따라서 개발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분산에너지는 뒷마당에서 찾을 수 있는 에너지이다. 햇빛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 바람은 매일 지구 곳곳에서 분다. 우리는 쉬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시골에 사는 사람은 농업과 임업 폐기물을 이용할 수 있다.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밀물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있다. 지열 에너지는 지표면 아래에 있고 물은 수력발전을 제공한다. 이들 에너지를 우리는 분산 에너지라고 부른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처럼 일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엘리트 에너지와는 달리,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어디서나 다양한 규모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가능하게 한 정보통신 기술은 세계의 파워그리드(power grid: 전력망)의 형태를 바꾸어 놓고 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 사무실, 가게, 공장, 기술 단지에서 스스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모아 전략을 생산할 수 있고, 그것을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듯,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를 통해 P2P 방식으로 공유한다. 기업들은 이미 업계 리더들이 말하는 소위 ‘분산 자본주의’를 위한 시장과 인프라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3차 산업혁명의 첫 두 기둥인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발전소 건물’을 도입하려면 3차 산업혁명의 세 번째 기둥까지 함께 도입해야 한다. 다름 아닌 재생 가능 에너지의 저장법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들 에너지원을 모아 필요할 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저장법을 개발해야 한다. 배터리나 분화양수기 등은 저장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널리 사용할 수 있고 비교적 효율적인 저장 매체가 하나 있다. 수소는 공급 면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고, 전력 생산뿐 아니라 차량에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이 재생 가능 에너지를 ‘저장하는’ 보편적 매체이다. 

인터넷 망을 따라 파워그리드의 형태를 바꾸는 네 번째 기둥은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전력 회사에서 실험 중에 있다. 네 번째 기둥이 세워지면 업체와 가정은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다. 
다기능적 전력 교환망인 스마트 인터그리드smart intergrid는 가정과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하나로 이어 준다. 가정과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미니그리드minigrid로 태양전지, 풍력발전, 소형 수력발전, 동식물 폐기물, 쓰레기 등 지역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하여, 그것을 각자 필요한 전력 생산에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스마트미터링smart metering 기술을 활용하면 지역 생산자로부터 그리드를 통해 전력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를 메인 파워그리드에 효율적으로 되팔아 에너지의 쌍방향 유통을 원활하게 해 준다.

스마트그리드 기술의 다음 단계는 센서와 칩을 그리드 시스템 곳곳에 끼워 넣어, 모든 가전제품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소프트웨어를 통해 그리드의 어떤 곳에서 언제 얼마나 전력을 소모하는지 전체 파워그리드에 알린다. 이런 상호 연결 시스템으로 전력 사용의 최고점과 최저점에서 에너지 사용과 흐름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고, 심지어 매순간 전력의 가격 변동에도 연동하여 사용량을 조절할 수 있다.

인터그리드는 전력의 폭넓은 재분배를 가능하게 해 준다. 중앙으로 집중된 하향식 에너지 유통은 점점 더 퇴화되고 있다. 앞으로 기업과 시 자치제와 일반 가정은 자신의 에너지에 대한 소비자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분산 발전distributed generation’이다. 이처럼 분산된 스마트그리드는 또한 석유로 가동하는 내연기관을 전기나 수소 연료전지 플로그인plug-in 차량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한다. 플러그인 전기차와 수소 연료전지 차량 또한 20킬로와트 이상의 용량을 발전하는 ‘달리는 발전소’이다. 자가용, 버스, 트럭은 주차 시간이 길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집이나 사무실이나 주요 쌍방향 네트워크에 플러그인하여 필요한 전기를 공급받은 다음, 남는 전기를 다시 그리드에 되돌려줄 수 있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와 수소 연료전지 차량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3차 산업혁명의 인프라에 필적하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다. 3차 산업혁명은 민족과 국가를 전례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협력 관계로 끌어들여 전력이 널리 분산되는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다. 지난 10년에 걸친 분산된 통신 혁명으로 네트워크 사고방식, 오픈소스 공유, 통신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 민주화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생활 방식을 실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갖추는 세계를 그리기 시작할 때이다.



재산권에서 접속권으로.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만큼이나 낡은 고전적 경제 패러다임과 새로운 분산 자본주의 모델이 상충하는 곳도 없다. 전통적 사업 계획에서 특허권과 저작권은 하나의 성역이다. 그러나 협업 경제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오픈소스로 내놓는 것이 협업의 출발점이다. 지식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은 협업을 가로막는 일차적 장애이다.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변환은 사업체들이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에도 극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존의 시장은 본질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재산 교환에 초점을 맞추는 사업 모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에너지의 비효율을 줄이고 엔트로피의 흐름을 늦출 인센티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엔트로피를 줄이면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적어도 에너지 비용이 오르기 시작하고, 정부가 탄소 총량 제한 및 배출권 거래제carbon cap-and-trade와 재활용법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최근까지는 그랬다. 그것은 일단 구매자와 제품을 교환하고 나면, 생산자는 더 이상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필립스라이팅Philips Lighting 같은 기업은 전구 제품에서 서비스로 운영 방식의 일부를 바꾸기 시작했다. 
필립스는 소비자와 소위 ‘성과 계약performance contract’이란 것을 개시했다. 예를 들어 필립스는 보다 효율적인 소형 형광등과 대도시 지역의 LED 옥외 조명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와 계약을 한다. 필립스는 조명과 설치를 제공하는 것을 비롯하여 이 계획에 들어가는 자금 일체를 부담한다. 그러면 도시는 필립스에게 협의한 일정 시간 동안 절약된 에너지에서 비롯된 수입을 필립스에 되돌려준다. 거래되는 형광등은 단 한 개도 없다. 형광등은 여전히 필립스의 소유이기 때문에 필립스는 공급자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이다. 성과 계약은 새로운 에너지 시장에서 표준 요금이 되고 있다. 새로운 사업 모델에서, 필립스 같은 제공자는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능률적이고 지속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할 새로운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 제품을 파는 방식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에너지 효율과 보다 긴밀한 자원 관리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흐름을 줄이는 문제는 모든 기업 운영의 핵심 관건이 될 것이다.



협동 사회에서는 비물질적 가치, 특히 자아 완성과 인격적 변화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충만한 인생’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 즉 접속의 권리는 가장 중요한 재산 가치가 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재산은 “개인이 충만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해 줄 탄탄한 관계에 참여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맥퍼슨은 주장한다.


서열을 하찮게 여기고, 네트워킹 방식으로 사람이나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협력이 체질화되어 있고, 자율과 배척보다는 접속과 포함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다양성에 감수성이 강한 밀레니엄 세대는 역사상 가장 공감적인 세대가 될 확률이 크다. 분산적이고 협동적이고 비위계적인 사회가 곧 공감적인 사회이다.



최근에 들어와 삶의 질은 20세기 경제 이론의 많은 핵심 가설을 다시 검토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목록의 정점에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국내총생산이 있다. GDP는 오랫동안 미국과 다른 나라의 복지를 가름하는 잣대로 확고한 권위를 누려 왔다. 
GDP는 1930년 대공황에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상무부가 고안해 낸 개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GDP가 12개월 동안에 생산된 경제적 재화와 용역의 총량의 가치만을 측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GDP는 실제로 사회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 활동과 그와 반대되는 부정적 경제 활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늘어나는 교도소 신축, 경찰력 확대, 군비 확장, 오염 처리 비용, 흡연과 음주와 비만에서 비롯되는 의료 비용 증가, 그리고 그 밖에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가공식품과 기름진 패스트푸드를 먹으라고 부추기는 데 들어가는 광고 비용 등, 모든 형태의 경제 활동이 GDP에 포함된다.

여러 해 동안 GDP를 대체할 만한 지표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다. 지속 가능한 경제복지지수(ISEW: 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 참진보지표(GPI: Genuine Progress Indicator), 포드햄 사회건강지수(FISH: Fordham Index of Social Health), UN의 인간개발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 경제적 웰빙지수(IEWB: Index of Economic Well-Being) 등이 대표적인 것드리다. 이들 지표들은 ‘진정한’ 경제적 향상을 인간의 복지에서 찾으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ISEW는 먼저 개인의 소비 지출로 시작하여 보수를 받지 않는 가사 노동을 더한다. 그런 다음 범죄와 오염과 사고에 들어간 금액 등, 일차적으로 손실을 완화하기 위한 활동을 뺀다. ISEW는 또한 소득 불균형과 고갈된 천연자원도 반영한다. 참진보지표는 많은 부분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만, 지역 사회의 자원 봉사 가치를 보태고 여가 시간의 손실을 빼는 점이 다르다. 포드햄사회건강지수FISH는 유아 사망률, 아동 학대, 유아기 빈곤, 10대 자살, 마약 남용, 고등학교 중퇴율, 평균 주급, 실업, 의료보험의 적용 범위, 노인층 빈곤, 살인, 주택, 소득 격차 등 사회적, 경제적 지표 열여섯 개 항목을 측저한다. 경제적 웰빙지수IEWB는 가족저축률, 주택스톡(housing stock: 이동주택을 포함한 모든 주거 단위의 총합) 등 미래의 안정감을 측정할 수 있는 항목을 고려한다.


경쟁보다 협동이 대세를 이루고 접속권이 재산권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삶의 질이 개인의 재정적 성공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각되는 분산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를 잡으면, 공감적 감수성도 번영할 여지를 마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욕, 사리사욕, 실익을 인간 경험의 중심에 놓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배타성의 경계, 그리고 위계질서는 더 이상 공감적 감수성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이 관계적이고 또 정체성이 수많은 관계에 묻혀 존재하는 연극적 의식의 시대에, 접속을 거부당한다는 것은 고립된다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1년 열두 달 하루 24시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고립과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계속 줄어들어 이미 제로에 접근하고 있다. 시간에 굶주린 사회에서 모든 여분의 나노초는 ‘또 다른 접속’을 이루는 기회가 된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의 시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모든 종류의 관계가 우리의 중심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인본주의 심리학자의 “나는 참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이제 새로운 명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한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적 유대나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면, 이런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은 공감적 인식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문제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학생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참지 못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패를 맛보았을 때 그 실패를 쉽게 처리하거나 극복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는 일에도 서툴다.


지난 10년 동안의 조사 결과는 스크린 앞에서 자란 젊은 세대의 소통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어휘는 곤두박질 쳤고, 독해력과 의사 소통 능력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런 요소들은 공감의 능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구전에서 필사로, 다시 인쇄로 이어지는 이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어휘도 따라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렇게 늘어난 어휘는 치밀하고 풍부한 은유와 언어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어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복잡하고 정교한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공감의 영역도 넓혔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느낌과 의도와 서로에게 거는 기대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분명한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역설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인터넷 망은 인류에게 무한한 지식과 소통의 통로를 제공하지만,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때문에 이해와 의미와 공감적 유대감을 높여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현저하게 줄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에도, 형편이 어려운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생활 방식을 단순화시켰고, 많이 가지는 것보다는 인간관계의 질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찾아내려 한 것을 그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수입 이상의 재산 축적은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경제 상황 탓에 사람들이 알아서 삶의 규모를 줄여 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돈보다는 더 의미 있는 관계로, 또 시장경제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행복의 기준과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지만 않다면, 어려운 시절은 시민사회를 쇄신하고 공감의 물결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서로를 배려하고 실제로 서로 보듬고 돕고 베푸는 일에 참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자연의 부를 평등하게 분산시키면 그동안 탐닉과 방종으로 혜택을 남용했던 선진국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체제로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고, 못사는 나라들은 그들의 처지를 개선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선진국들이 선진화되지 못한 나라의 삶의 수준과 복지를 향상시키는 책임을 맡는다면 인류 문명은 균형을 잡으면서 자연의 재생 능력을 되살리는 쪽으로 인간의 소비 습관을 정돈해 줄 것이다. 분산된 3차 산업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지구 어디에나 있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누구나 공평하게 원하는 만큼 사용하면서, 모든 인류가 하나의 품안에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해 준다는 점에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제 지역 분산 방식으로 복합적인 인류 문명을 수립하고 엔트로피의 수치를 낮추면서 공감의 범위를 넓힐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정점에 이른 글로벌 경제에서 인류는 생물권 인식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에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답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생물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지만, 바로 생물권이 기후 변화로 위협받으면서 이제 모든 종을 위험에 빠뜨리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망치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겐,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일 것이다."


자연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기계적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고정적이 아니라 임기웅변적이며 다른 현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변한다. 과학과 기술이 가속도와 위치의 문제에 매여 있었을 때는, 뉴턴의 기계적 법칙도 얼마든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따로 떼어 놓고 시간을 재고 측정하여 엄격히 계량화되는 현상만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환원주의나 기계론적 개념은 한계가 뚜렷해서 자연의 내재성을 포착할 수 없다. 사회나 자연을 이해하려면 구성 부품의 속성뿐이 아니라 현상과 현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과학자들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공감의 성숙도는 특히 비판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상충하는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다의적인 사고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은 비판적 사고를 포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서적 요소이다.


협력적 학습 환경에서는 과정이 결론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위계적인 학습 모델보다는 각자의 지식을 짜 맞추는 네트워크 방식이 더 유리해진다. 학습은 훈련을 통해 학생의 두뇌에 전문적인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협력하고 비판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내는 과정이다. 협력적 학습의 효과를 높이려면, 집단이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해 주고 상대방이 관점과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기탄없이 비판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전체 집단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협력 학습은 배려, 조화, 비판단적 상호 작용, 개인의 고유한 공헌, 참여의 중요성, 관계를 통한 공동의 의미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감을 가지고 참여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과학적 방법은 우리 자신의 본성과 세계의 본성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과 사실상 전혀 맞지 않는다. 과학적 방법은 현실의 관계적 측면을 부인하고 참여를 막기 때문에, 공감적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성의 시대에도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법론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괴테가 그런 경우였다. 괴테는 자연은 사심 없는 방관자로서 보다는 참여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식물학자가 형태학을 연구할 때는, 지구의 생명체부터 시작해야 한다. 
괴테는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가장 내부 지향적인 방법으로 그 자체를 대상과 동일시하고, 그렇게 하여 실질적인 이론으로 성립하게 되는 민감한 경험주의”라고 정의했다.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은 베이컨과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괴테는 그의 “생각의 힘이 대상과 합일을 이루는 순간 활성화되고, 그때 생각은 대상에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괴테는 진정한 통찰력은 초연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현상에 깊이 참여할 때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은 130여 년 동안 묻혀 있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많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인츠 코후트는 처음으로 과학적 조사에 대한 참여적 접근이라는 생각을 손질했다. 코후트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은 ‘원격 체험experience-distant’이어서 실제적 관찰과 거리가 있다며 대안적 경험론을 주장했다. 그것을 그는 공감과 내관으로부터 직접 나온 자료이기 때문에 ‘근접 체험experience—near’이라고 불렀다. 
정신분석이 과학적 사고에 기여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공감과 결합시킨 점”이라고 코후트는 생각했다. 공감을 “하나의 관찰 도구로서” 과학에 접목시키면 “과학적 원리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의 깊이와 폭을 증가시킨다.”라고 코후트는 말한다. 더욱이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공감을 적용하는 문제는 과학적 추구가 “인간의 생활과 유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코후트는 주장했다. 코후트는 냉정하고, 사심 없고, 합리적인 방식만 고집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20세기에 야만적인 전체주의 체제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런 방법론은 “세계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목적”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매슬로의 ‘배려하는 객관성caring objectivity’이라는 개념은 그가 두 번째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요구에 처음 반영한 이후로 반세기 동안 더욱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영장류 동물학자 제인 구달처럼 신세대 공감적 연구자들은 과학적 탐구에 대한 공감적 접근 방법인 ‘근접 체험’을 사용하여 기존의 사심 없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적 방법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연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을 이끌어 냈다. 생물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려면 자연에 얼마나 깊숙이 다시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연에 다시 참여하기로 한 이번의 결정은 인간이란 종의 초기 진화를 특징짓는 원래의 참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과거에 자연과의 관계는 의지에 의한 참여가 아니라 운명적인 참여였다. 그때는 자의식적인 선택을 할 만큼 자아가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구석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의존했던 것만큼이나 자연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따라 자연과의 관계를 규정해 갔다. 이제 자유의지로 자연에 기꺼이 다시 참여하는 것은 생물권 의식을 이전이 모든 의식과 구별해 주는 기준이다.


세상을 소유하려는 탐색은 우리를 보다 복잡한 경제적 구조로 몰아넣었고, 이런 구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더욱 몰아세우고 사람과 물건으로 채웠다. 이제 우리는 이 지구의 곳곳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여 인류를 하나의 품으로 연결하는 진정한 글로벌 문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울러 그 대가로 우리는 인류의 전멸을 예고하는 엔트로피 수치를 손에 받아 들었다.


‘공감의 문명empathic civilization’이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감싸는 거대한 생명권과 전체 인류에게로 공감의 범위를 빠르게 넓혀 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감적 유대 관계를 다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후 변화와 대량살상무기의 증식이라는 형태로 무섭게 속도를 올리고 있는 엔트로피라는 괴물과 충돌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제때에 지구촌의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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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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