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가진 것 보다 다양한 경험과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기를,
빠르고 효율적인 것보다 느리더라도 주변을 살피며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단순 소박한 느린 삶의 미학.
 

[본문발췌]
 
인생이 갈림길과 선택, 그리고 거래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일분일초를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선택하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사야 하고 어떤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는지 알려준다. 그 속에서 길을 잃으면 결국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세상은 진짜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허구의 모습을 만들어내라고 종용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기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고 '충분한'. 자신의 직감에 생각과 마음을 열면, 삶의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 변화시킬 힘이 생긴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낯선 것을 통해 자신이 변화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해서 계속 호기심을 갖고 마음을 열고 성찰하며 변화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변화에 설레기도 한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이 저항에 맞닥뜨리겠지만 자신이 무엇을 더 원하는지에 달려 있다. 익숙한 삶을 원하는지 아니면 지금까지와 다르고 낯설지만 놀라움과 가능성을 지닌 삶을 원하는지. 무엇보다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마음가짐, 삶을 대하는 태도, 심지어 사소한 습관이라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준비되기 전에 꽃을 피우라고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에 맞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늦게 꽃을 피우는 나무가 가장 좋은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저마다 속도가 다르다. 몇 분 만에 생기는 변화도 있고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변화될 수도 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다. 변화의 시작이자 핵심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미니멀리즘은 삶에 가치를 더하지 않는 모든 것을 없애는 데 도움을 주었고, 슬로 라이프는 삶의 속도를 줄여 안정되고 명료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인생을 천천히, 좀 더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옳다고 여겼다. 
 
 
버릴수록 자유로워진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 운동이다. 미니멀한 삶은 우리를 짓누르고 방해하는 과잉을 없애는 것이다. 내 삶에서 지나친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따라서 미니멀한 삶에는 가치 있는 것들만 가득 찬다.
 
 
빠르게 돌아가는 라이프스타일에 지친 사람들이 느긋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통해 삶의 속도를 줄일 수 있기에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천천히 산다는 것은 일상을 즐기고 소소한 순간들에 감사하는 것이다. 슬로 라이프는 아이들과 함께 걸어서 등교하거나,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거나, 수입이 적더라도 일을 줄여서 자유 시간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삶은 단순했고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되었다. 인간이 진화하면서 한평생 짊어지고 사는 물건의 양이 늘어났다. 늘어난 물건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리는 우리의 집과 생각과 삶을 채우고 있는 잡동사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쓸모 있는 것들만 남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기준은 곧 나를 향한 것이다. 모든 판단과 지적, 공개적으로 나누는 모든 의견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굉장히 자기 비판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비판적이지만 자신에게 공감하고 친절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푼다.
 
 
심리학자 바브 마크웨이(Barb Markway)는 가치를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경을 통해 인내하게 하는 원칙"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어 창의성, 공동체, 재정적 안정, 모험, 성공, 가족, 사랑, 연결, 가정, 사려 깊음, 진실, 단순성 등이다. 가치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우리가 늘 변화하고 성장하듯이 가치도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와 개인이 정한 가치의 순위가 늘 일치하지 않는데, 더 중요한 것은 개인의 가치다. 다른 사람의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만든 틀에 자신을 맞추는 것과 같다. 늘 불편하게 끼워 맞추는 느낌이다. 반대로 나의 가치에 따라 살면 마음 깊이 옳다는 느낌이 들고 내 집처럼 편안하다. 문제는 자신의 가치와 주위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할 때이다.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거나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무너지기 쉽다. 
 
 
모든 사람들의 기질과 경험, 성격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보편적인 가치에 맞춰 살기란 매우 어렵다. 각자의 개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가치 목록을 작성하면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고, 단순하게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단순하게 살기란 절대 쉽지 않다. 단순해지려면 포함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빼야 할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위한 결정이 나중에는 큰 가치가 있다고 해도 매우 감정적이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핵심 가치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할지 여행을 떠날지 결정하기 어려운가? 약속이 너무 많아서 몇 개는 포기해야 하는가? 이러한 것을 정리할 때 가치가 중심을 잡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할 수도 있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중요하지도 않다.
 
 
나의 가치에 맞춰 살면 진정한 내가 되는 느낌이 든다. 나의 결정이 정당화되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만 남게 된다. '이 선택이 나의 가치에 맞는가?'라고 질문하면 훨씬 쉽게 결정하고, 즉시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나의 핵심 가치를 알면 더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향한 로드맵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기쁨 목록은 시작 단계에서 유용하지만, 내가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이 우리의 삶과 정체성에 관한 것이므로 훨씬 큰 동기부여가 된다.
 
 
사용하지 않거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물건을 남겨둔다고 해서 돈을 다시 찾을 수는 없다. 실수로 산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정신적 부담까지 안게 된다. 이사하면서 옮기는 데 필요한 노력, 보관하는 데 필요한 공간과 비용을 생각해보자. 물건을 버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은 가지고 있는 것보다 팔거나 기부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이 풍부한 시대를 살면서 끊임없이 잡동사니가 쏟아진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의 양을 줄이고 유용하고 의미 있는 것들만 남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나 집을 정리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잡동사니 때문에 지구가 버거워하고 있다. 우리가 잡동사니를 없애거나 재활용하고 있지만 애초에 불필요하고 잘못 생산된 물건들이 너무 많다. 잡동사니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건을 사는 것을 줄이고, 무엇을 살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책임감 있게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 균형을 이루면서도 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로 웨이스트 라이프(low waste life)를 계속 실천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한다는 의미다. 물질이 우리에게 공간을 채우고 욕망을 좇으라고 말하듯이 사회는 우리에게 친구나 가족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라고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거나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우리를 조종한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반면, 자신이 모르는 점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변하고, 불확실한 삶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이라는 폭풍을 지날 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
 
 
올바른 선택이란 항상 그 당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생은 성취하는 것보다 정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정리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면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거나 압도되거나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사방에서 쏟아지기 때문이다. 출세를 위한 사다리에 오르고 집 평수를 늘리고 꿈에 그리던 드레스룸을 갖는 것은 잘 알려진 성공 사례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되며, 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중요한 자원을 어디에 쓰는지 평가해야 한다. 물질적인 것은 비물질적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신적인 잡동사니는 정리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준다.
 
 
스크린을 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불안감과 우울감은 높아지고 자존감은 낮아진다.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일상을 인스타그램의 화려하게 꾸며진 삶과 비교하며 현실을 왜곡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자 시간, 공간, 돈이 풍족해졌다.
 
 
소유물에 따라 내 자존감이 결정되지는 않으며,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게 소유해도 행복할 수 있고, 잡동사니는 해야 할 일 목록과 같았다. 하지만 물건의 양이 많든 적든, 그것이 행복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현재 내가 가진 것으로 행복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영영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통찰력을 얻었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버리는 연습을 해야 했다. 반드시 물질을 버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물건을 버리는 데 선수가 되었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훨씬 더 버리기 어려운 감정적인 잡동사니를 정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삶의 외적인 부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적인 부분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는 행복을 찾으려고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진정한 행복을 모르게 된다. 행복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은 없다. 우리는 뭔가를 가지거나 달성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지만, 진실을 보지 못하는 끝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내면과 넘치는 자기애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이나 물질로 나를 증명할 필요 없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며, 우리를 평생 지탱해주는 행복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행동을 바꾸기 쉽다. 인생이 도로이고 생각, 느낌, 행동이 도로 위에 있는 자동차라고 하자.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도로 위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 앉아 차량을 보는 것이다. 나의 생각, 느낌, 행동을 명확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진리로 가는 길에 단 2가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끝까지 가지 않는 실수와 시작조차 하지 않는 실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긍정적인 것만 찾고 부정적인 것은 모두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 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모두에서 만족감을 찾을 수 있다. 행복을 찾는 것보다 만족감을 찾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목표이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때도 있고 절망감을 느낄 때도 있다. 오늘 하루가 안 좋은 날이든, 평범한 날이든, 비극적인 날이든 여전히 당신에게 소중한 날이며, 여느 다른 날 만큼이나 감사해야 한다. 내일을 향해 급하게 나아가지 말고 과거의 아픔에 머물지 말자. 우리가 가진 것은 현재와 미래뿐이다. 가능한 모든 순간을 만끽하자.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내가 영향을 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을 탓한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만들고 치유할 때까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고통스럽고 부정적이고 감정적인 신념은 계속 반복된다.
 
 
자기 확신과 자기애, 안정감이 부족하면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려고 든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면서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어 한다. 그래야 삶에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을 훨씬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삶은 무작위로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믿는지, 시간이 됐든 돈이 됐든 에너지가 됐든 무엇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지에 따라 삶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내 삶에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충분함을 정의하고, 이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을 구성하려면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 저마다 충부함의 기준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충분함이 다른 사람에게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지금 느끼는 충분함이 내년에는 부족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만능 공식은 없다. 우리는 자신만의 공식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내가 꿈꾸는 성공, 행복, 만족감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공허함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채우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적게 원하고 단순함을 즐기고 자신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워진다.
 
 
우선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점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더욱 의도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 없고, 돈이 얼마나 있어야 진정으로 행복할지,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얼마만큼의 물건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있다. 나의 가치를 확실히 세우고 글로 적어서 매일 마음속에 간직한다.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면 그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 적절한지 알 수 있다.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자신에게 도움되지 않는 것은 정리한다. 정리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부엌에 있는 나무 주걱과 같은 물건부터 친구를 포함한 사람이나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걱정 등 삶의 일부를 분리해서 당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판단한 후에 계속 가지고 있을지 버릴지 결정한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정리하기 쉽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가치 있고 풍성하고 의미 있다.
 
 
삶에서 성취하는 것, 사는 집 평수, 입고 있는 옷 브랜드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 유일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이해 뭔가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존재하고, 숨 쉬고, 또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행복하든 아파하든, 사랑이 넘치든 상처받든, 승리하든 패배하든 나라는 것은 변함없다. 나의 가치는 내 안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치 있는 존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움츠러들게 한다 해도 나는 이미 충분한 존재다. 부족하거나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 없다. 부족함과 불완전함도 나의 일부이다. 나의 연약한 부분도 다른 부분만큼 공감과 인정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듯 나 자신을 사랑하면 내가 얼마나 용기 있고 강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을 조심스럽고 상냥하게 대해야 한다.
 
 
속도를 늦추면 우리가 만끽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얻을 수 있다. 어디에든 느리게 사는 삶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계획, 일, 또는 라이프스타일까지 천천히 몰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속도를 늦추면 감각이 살아나고,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며, 시간이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느림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이 드는 것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는 찾아오고, 변화의 흐름에 따라 예전의 모습을 벗고 새로운 모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해본다. 나만의 충분함을 찾아라. 마음을 충분히 쉬게 하라. 기대치를 낮추자. 낮은 기대치야말로 만족감을 얻는 비결이다. 특히 자신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균형 잡혀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자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다고 해도 나 자신을 더 가치 있고 사랑스럽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 삶은 선택의 갈림길과 버리는 것의 연속이지만, 우리가 충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길을 찾아가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여행을 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우아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더욱 단순하고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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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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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주적 시공간에서 보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또한 많은 결정과 선택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외부 존재의 힘에 의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서도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은 모든 것이 옳고 완벽 하기에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거나 따르기를 바란다. 자기애는 넘치면서 공감과 배려는 부족한 사람.
 
 
[본문발췌]

오늘 아침에 내가 그 백인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인데 그는 들으려 하지 않더군. 사람은 요청 받은 걸 해 주지 않겠다고 거절할 수는 있지만 요청 받는 것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잖아. 그런데 백인의 나라에는 그런 종류의 속담이 없는 것 같네.
 
 
에제울루의 단 한 가지 잘못은 모든 사람들이, 그러니까 아내, 친족, 자녀, 친구, 심지어는 적들까지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살아생전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에제울루에게 감히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의 적이 되었다. 만약 자신과 아주 똑같이 행동하는 친구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독하게 살 것이라고 했던 원로들의 말을 에제울루는 잊고 있었다.
 
 
혼잡한 시장을 지나갈 때는 극도로 조심해서 걷는다 해도 그의 옷깃이 다른 사람의 상품을 뒤엎거나 깨트릴 염려가 있다. 그런 경우 손해를 벌충할 책임은 옷이 아니라 옷을 임은 사람에게 있었다.
 
 
그는 우선 극도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싸울 때 두려움을 주는 것은 먼저 극한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아프리카 독사가 무서운 까닭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도발도 견뎌 낼 것이고 심지어 적이 자신의 몸통을 짓밟아도 내버려 둘 것이다. 일곱개의 어금니가 하나씩 하나씩 모두 다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자를 향해 말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노라!
 
 
"타! 은와누!" 귀신이 버릇없는 어린아이의 귀에 대고 소리치듯 울루 신이 그의 귀에 대고 외쳤다. "이게 네 개인적인 싸움이라고 누가 너한테 말했느냐?" 에제울루는 시선을 마룻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 마음에 맞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다니, 누가 너한테 이게 너의 개인적인 싸움이라고 말했느냐? 너에게 야자 술을 가져다 준 친구들은 구해 주고 싶으냐, 헤헤헤헤헤!" 오로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만이 메마르고 해골 같은 웃음을 웃어 대는 신들의 협박과 조롱에 때때로 다가갈 수 있었다. "나와 내 희생자 사이에 끼어들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때릴 마음은 전혀 없는데도 네가 대신 주먹을 맞을 수도 있을 테니! 두 마리 코끼리가 싸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느냐? 넌 어서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 이데밀리와의 싸움은 나한테 맡겨라. 시기심으로 가득한 이데밀리는 그의 비단뱀이 다시 한 번 권좌에 오르도록 나를 파멸시킬 방도를 찾고 있다. 이제 네 생각을 나한테 말해 보렴. 난 어서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 나와 이데밀리는 끝장날 때까지 싸울 거란다. 누가 누구를 쓰러뜨리건 간에 승자가 상대방의 발찌를 벗길 것이다!" 그다음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성스러운 비단뱀을 믿는 질투심 많은 종교 의식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방법을 인간에 불과한 에제울루가 어떻게 감히 자신의 신에게 알려 준단 말인가? 이건 신들의 싸움이었다. 에제울루는 신의 활시위에 걸려 있는 화살에 불과했다. 에제울루는 야자 술 같은 이런 생각에 취해 있었다. 새로운 생각들이 서로 뒤엉켰고 과거의 사건들이 새롭고도 흥미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어째서 오두체는 상자 속에 비단 뱀을 가두었을까? 그것은 백인의 종교에서 저주받은 동물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었나? 오두체 또한 울루의 손에 들린 화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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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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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대한 언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한 인식이 섬세하다는 의미"라 하고, 어휘력이 많으면 생각과 지적 능력, 창작 능력에 도움이 되듯이,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사회, 사람을 경험하는 것도 사람이 생각과 상상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본문발췌]

1. 빛은 한반도로부터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침묵으로 대하고, 자기에게 질문하는 사람에게만 예술은 속삭일 뿐이다." - 아르놀트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노동에는 생산의 만족이 있고, 예술에는 창착의 기쁨이 있다. 좋은 조건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거기서 한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좋은 노동조건, 좋은 창작여건은 기대만큼, 아니 그 이상의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도(道)에 뜻을 두고, 덕(德)에 근거하고, 인(仁)에 의지하고, 예(藝)에 노닐라.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2. 아스카 들판에 백제꽃이 피었습니다.

일정한 규범이나 전통에서 홀연히 벗어나는 것은 문화의 자기화가 이루어진 다음의 이야기다. 자신감이 부족할 때는 주어진 규범에 충실할뿐이다. 오직 자신있는 자만이 전통에서 벗어나서 그 전통의 가치를 확대해간다.


"온몸에 강함이 너무 지나치다. 그 강함을 깎아내려라, 좀더 약하게 말이야." - 미야모토 무사시 중 닛칸 스님


 

3.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알고, 어떤 사람은 배워서 알며, 어떤 사람은 노력해서 안다. 그러나 이루어지면 매한가지다. - <중용>


헤이안 신궁의 신원.
'빼어난 모습은 온통 신궁을 채색한 붉은빛의 수많은 늘어진 벚꽃나무들이다. '참으로 이곳의 꽃을 빼고 낙양(교토)의 봄을 대표할 것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에코는 신궁의 입구에 들어서자 만개한 벚꽃의 붉은 색깔이 가슴 밑바닥까지 스며들어와, '아아, 올해도 낙양의 봄을 만났구나!'하며 선 채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고도> 중...


명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라고 대답한 명구가 있다. 이말은 1969년 <뉴욕타임즈>가 독일의 건축가 미즈 반 데어 로에의 사망 기사를 쓰면서 인용하여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명구의 연원은 독일인 미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가 먼저 한 말이었다고도 하고, 또 그전엔 프랑스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좋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Le bon Dieu est dans le detail)라고 먼저 말했다고도 한다. 그런에 이 말이 현대로 내려오면서는 바뀌어 다음과 같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


이로하 노래 - 홍법대사
꽃은 화려해도 지고 마나니
우리의 인생살이 누구인들 영원하리.
덧없는 인생의 깊은 산을 오늘도 넘어가노니
헛된 꿈 꾸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으리라.


"평등이란 서로 다른 개성이 함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그것이 평등입니다." - 평등원 주지 가미이 몬쇼 <평등원 이야기>


"스님은 홀로 깨치기를 좋아하고 남을 가르치기엔 마음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산길을 가는데 한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우친 자가 나중 깨칠 사람을 위하여 가르치는 데 소홀히 하면 안 된다'라고 꾸짖고 홀연히 사라졌다" - 최치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
나는 이것을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말해주는 경구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정확히 알아야 남에게 말해줄 수 있고 내가 확실히 봐야 답사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언젠가를 위해 오늘 고산사로 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4.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 문화를 무시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미를 말하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미학을 말했지만, 일본은 화려할 때는 더없이 화려하고 또 검소할 때는 더 없이 검소한 극단을 보여준다. 이 '극과 극의 공존'이야말로 일본미의 해답을 찾아가는 하나의 '문화적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형식을 규정하는 것은 내용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형식은 다음 내용을 규정한다고. 그리고 과도한 형식은 내용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예술은 자기를 표현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자기 자체의 변신이다" (not as a vehicle for self expression, but self alteration) - 존 케이지


오유지족이라! 직역하면 '나는 오직 족함을 알 뿐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남긴 마지막 가르침을 담은 <유교경>의 "족함을 모르는 자는 부유해도 가난하고, 족함을 아는 자는 가난해도 부유하다"(不知足者 雖富而貧 知足知人 雖貧而富)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불확정적 비움의 공간
우리의 마당은 언제나 비어 있지만 언제든지 삶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어린이들이 놀든, 잔치를 하든, 제사를 지내든, 그 행위가 끝나면 다시 비움으로 돌아온다. 그거야말로 불확정적인 비움이죠.
안동 의성김씨 종가의 마당, 병산서원의 마당, 봉정사 영선암의 마당, 선암사 무우전 마당, 우리 집 앞마당.
일본에는 선의 정원인 석정이라는 뛰어난 관조의 공간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삶의 내용을 다 받아내는 마당이 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 훌륭한 공간을 갖고 살면서도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일본 사람들처럼 개념화, 논리화, 형식화해 발전시켜간다면 '불확정적 비움'의 공간이 이보다 더 잘 구현될 수 없을 것 같다. 용안사 경용지를 지천회유하도록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관조의 공간으로서의 일본의 석정과 삶의 공간으로서의 우리의 마당이었다.
 

이런 일본 형식의 정원은 없지만 우리 식의 명원은 많죠. 궁궐 정원은 창덕궁 부용정이 제일이고, 은거지 정원으로는 보길도 부용정, 담양 소쇄원이 압권이고, 저택과 함께 어우러진 정원으로는 성북동 성낙원, 강릉 열화당, 영양 서석지 등등...
사찰 정원으로는 순천 선암사, 서산 개심사, 안동 봉정사 영선암이 멋있조. 우리나라 정원은 일본 정원과 콘셉트 자체가 아주 달라요. 일본 정원은 보시는 바와 같이 자연을 재현한 인공적 공간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없잖아요. 이에 비해 우리 정원은 자연공간 안에 인공적인 건물이 배치되고 나무가 심어지고 화단이 만들어집니다. 자연과 인공의 관계가 일본과는 정반대이고, 사람이 그 속에 파묻히죠. 그래서 일본은 정원이고, 우리나라는 원림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야야 할 핵심 사항

  • 사회 구성에는 천황, 공가, 무가, 불가
  • 사상에는 신도, 밀교, 선종
  • 건축에는 침전조와 서원조
  • 정원에는 마른 산수, 석정
  • 미술에는 장벽화, 후스마에
  • 역사적 인물로 천황 중에는 헤이안으로 천도한 간무 천황, 원정을 펼친 삼십삼간당의 고시라카와 천황, 남북조시대를 낳은 대각사의 고다이고 천황
  • 무사와 귀족 중에는 최초의 쇼군인 청수사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육바라밀사의 다이라노 기요모리, 평등원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천륭사의 아시카가 다카우지, 금각사의 아시카가 요시미쓰, 은각사의 아시카가 요시마사
  • 승려로는 동사의 공해, 연력사의 최징, 육바라밀사의 공야, 지은원의 법연, 고산사의 명혜, 건인사의 영서, 천륭사의 몽창 국사

 
 
사물에 대한 언어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대한 인식이 섬세하다는 의미지.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雪)을 표현하는 단어가 60가지나 된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가 분청사기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미시마, 하케메, 호리미시마, 고히키, 가타데라고 말하고 잡기인 막사발을 고모가이, 아마모리, 이도, 긴카이 등으로 미세하게 분류하여 부른다. 언어는 열심히 사용하고 많이 쓸수록 발전하고 파생한다. 여름에는 잘 식으라고 대접 모양 다완을 쓰고, 겨울에는 따뜻함을 잘 간직하라고 통형 다완을 쓴다.


이도 다완이 느낌
형태는 순박하고, 빛깔은 은은하고, 촉감은 강한 듯 부드럽고, 기품엔 범접하기 힘든 고상함이 있는 것, 그러나 무언가 아쉬움이 남은 듯한 미련이 있어 손에서 놓지 않고 자꾸 매만지게 되는 것. 그것이 와비차의 이도 다완이다.


명작의 3대 조건 : 정신, 재력, 기술
 1) 그 시대를 관철하는 심오한 미학(정신)
 2) 패트론(patron)의 풍부한 재력(경제적 지원)
 3) 장인(예술가)의 뛰어난 솜씨(기술)....
 
고보리 엔슈가 가쓰라 이궁을 건설할 때 제시했다는 세 가지 요구사항
 첫째,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 것.
 둘째, 재촉하지 말것.
 셋째, 비용에 제한을 두지 말 것.
 가쓰라 이궁은 와비사비의 다도가 있었고, 왕가의 재력이 있었고,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가 있었다.


히에이산 연력사 비석.
'천가지 구석 중에 한 가지만 비추어도 이것이 곧 국보이다.' (照千一隅 此則國寶)
이것은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서 살아가고 그런 장인정신을 높이 사줄 줄 아는 사회를 만들자는 일종의 표어이다.

 
 
아스카, 나라 , 교토 3박 4일 추천 여행 코스
 1일차) 법륭사, 아스카사, 아마카시 언덕. 가시하라 숙소
 2일차) 흥복사, 동대사, 삼월당, 우지 평등원, 우지 강변 산책 및 대봉암 찻집, 후시미 이나리 신사. 교토
 3일차) 광륭사, 천륭사, 사가노의 죽림, 도월교 강변, 용안사, 금각사, 이총, 야사카 신사, 마루야마 공원, 기온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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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소유, 더 편리한 생활의 흔적은 자연과 환경, 미래 세대에게 주는 피해를 남기기에 균형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배려와 절제가 필요하다.

 

 

[본문발췌]

 

'소외된 90%'가 직면한 다양한 주거, 보건, 식수, 에너지, 교육, 환경, 농업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가장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전 세계의 고질적인 수많은 문제들에 접근하는 창의적인 접근을 소개한다. 적정기술이라 해서 '구닥다리 기술의 개발도상국 전수'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동안 화려하게 진보한 기술이 결코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굵직굵직한 국제문제에 도전한다는 의미다. 이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학 교수가 언급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의미하며, '아래쪽을 향한 위대한 도약'(Great Leap Downward)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에게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하는 일은 국제문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인간의 얼굴을 한 발전'을 꿈꾸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그 이야기에 어떤 배역과 역할을 가지고 참여할지의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의 근간이 되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의 시조는 비폭력운동의 창시자, 인도의 간디이다. 간디는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값싼 직물이 인도에 들어오면서 인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자, 직접 물레를 돌려 직물을 몸소 생산했다. 인도 고유의 전통적인 직물방식은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누구든지 원하는 만큼 쉽게 만들 수 있고, 더구나 외부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마냥 좋은 제품들, 최고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제품이나 디자인, 서비스라 해도 장기적으로 또한 결과적으로 그것을 누리는 개개인에게 '소외감'과 '의존성' 그리고 '생존의 역량'을 박탈할 수 있음을 간디는 간파한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사상은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를 쓴 영국의 대안경제학자 슈마허를 통해 확대발전하였다. 196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개발을 위한 과학기술회의'에서 슈마허는 대량생산 기술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희소한 자원을 낭비한다며, 근대의 지식과 경험을 잘 활용하고 분산화를 유도하며 재생할 수 없는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대중에 의한 생산기술을 제안했다. 그는 이 기술이 저개발국의 토착기술보다는 휠씬 우수하지만 부자들의 거대기술에 비해서는 값싸고 소박하다며 이를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이라고 명명했다.



적정기술이란 '해당 기술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그 사용이 환경이나 타인에게 가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인간의 진보를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란 물건이나 개념에 미, 기능 그리고 비용, 이 세 가지의 속성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었는지에 기반을 두어 정의된다. '최고의' 디자인은 대개 높은 가격과 동일시되며, 특권과 차별성을 가진 디자이너의 이름은 그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동등한 특권을 부여한다.


우리는 진정한 필요라기보다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돈을 쓰고, 욕구를 탐닉하며, 욕구를 실현하는 문화를 위해 디자인된 것들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인간은 깨끗한 물, 집, 음식, 교통수단, 의료 지원과 정보에 대한 접근의 기본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이것들을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행운과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 세계의 수많은 사람에게는 거의 얻을 수 없거나 좀처럼 얻기 어려운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고, 지속가능하며, 인도주의적인 디자인을 만들기 위한 운동. 디자인의 초점이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인구들에게로 옮겨지고, 이 관점에서 보는 디자이너들은 최종 사용자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들과 직접 일을 하고, 이를 토대로 비용이 적게 드는 기술을 개발하여 지역의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빈곤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한다.


적정기술이란 단순하고 저렴하며, 생산과 분배가 쉽고, 직접적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술이어야 한다.


소형화, 저렴한 가격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 무한한 확장성 이 세 가지가 저렴한 디자인의 원칙이다.


그들에게 수익을 안겨줄 디자인을 하라.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가장 기업가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선이 아니라 기회를 원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다. 대다수 빈곤층은 시간과 노동력이 부족하지 않다. 금전절약형 장비들은 가격이 쌀 때만 통용된다. 나중이 아닌 지금의 소득,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제 해결하기.

  • One Laptop per Child...니콜라스 네그로폰테.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에게 배움, 정보,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적 도구.
  • 신뢰할 수 있고 재생 가능한 지역 에너지. 인도 SELCO, 해리시 한데
  • 구르는 물통 큐드럼, 피터 핸드릭스
  • 이동 전등
  • 카트리나 가구 프로젝트
  • 모두를 위한 청각, solar aid 태양광 충전기, 보청기, 배터리, Godisa technologies. 보청기에서 가장 비싼 부분이 배터리이며, 배터리는 계속 교체해주어야 한다. 전 세계 인구의 10%가 청각장애가 있고, 이들 중 80%는 개발도상국에 거주.

 



소외된 90%에 대한 통계 : 주거(shelter), 물과 위생(water and sanitation), 식량(food), 에너지(energy), 건강(health), 교육(education), 교통(transport)

  • 전 세계 인구의 약 절반인 28억 명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 전 세계 1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부적절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은 노숙으로 분류된다.
  •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전한 식수에 접근할 수 없고, 2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본 위생시설 없이 살고 있다.
  • 전 세계적으로 8억 4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있다.
  • 매년 250만 명의 사람들이 실내에서 연료연소 후 생긴 분진 때문에 사망한다.
  • 개발도상국 인구 중 70%가 집에 전기가 없으며, 의료기관과 학교가 없다.
  • 매년 100만 명의 사람들(그중 대부분은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사망한다.
  • 최소 13억 명의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인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다.
  • 전 세계적으로 1억 2천만 명의 아이들이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다.
  • 아프리카 시골지역의 여성들은 연료나 물 등을 남자보다도 세 배나 더 많이 머리에 이고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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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사회와 환경의 확장, 유지를 위해서는 인간의 ‘공감’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하지만 현실 세계는 생태계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양극화, 국가주의, 지역주의, 개인과 집단 이기심과 소유욕, 소비 조장, 분쟁 등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상황은 걱정이다.


[본문발췌]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야생과 친해지려는 동료 의식을 유전적으로 타고났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은 자연에서 고립될수록 심리적 박탈감은 물론 신체적 박탈감까지 느끼게 되며 그것이 인간에게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성은 자율, 즉 혼자만의 섬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의식과 애정과 친밀함을 추구한다. 자의식과 자아 인식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깊이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이때 우애적 유대감을 만드는 수단이 바로 공감이다.

우리 인간에겐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을 추구해가며 보다 복잡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여정은 이러한 인간의 경향과 우주를 지배하는 에너지 법칙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시작한다. 인류사의 근간을 이루는 변증법은 공감을 확장하고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 사이에 놓인 끊임없는 피드백의 고리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일종의 제국주의자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환경을 그 자신과 자신의 씨앗으로 바꾸려고 한다."라고 지적했다. 자연의 분류 체계에서 진화가 잘된 종일수록, 자신의 비평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에너지도 많고 살아 있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엔트로피도 많다.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는 모든 유형의 생명은 비평형 질서 상태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전체 환경에서 더 큰 무질서(흩어진 에너지)를 초래한다는 말이 된다. 에너지는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며, 높은 수준에 있는 시스템으로 들어가 그 시스템을 소모하여 더 낮은 상태의 시스템으로 만든다.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 매커디는 <인간의 기원>에서 인간의 경험을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실제 사용량이 늘어나는 진화 과정으로 본다. "어떤 시대, 어떤 민족이나 집단이 이룩한 문명의 정도는 에너지를 인간의 발전과 필요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늠할 수 있다." 인류학자들도 대부분 이런 견해에 동조한다. 가령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를 모든 인간 문화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로 사용한다. 그는 한 문화의 업적이 높은지 낮은지는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화의 기능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화이트를 위시한 인류학자들은 거듭 강조한다.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방정식을 바꾸어 왔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소위 지휘-통제 메커니즘이 되어, 문명의 에너지 흐름을 편성하고 조직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가령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인은 처음으로 농업에 정교한 관개시설을 도입했다. 광합성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품은 채 저장된 곡물은 1차 에너지가 되어 인구를 크게 늘리고 계약 노동량을 증가시켰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에너지 제도를 다루려면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필요했다. 최초의 기록 문서에 새겨진 수메르인의 설형문자는 곡물을 생산하고 저장하고 분배하는 데 있어 수력 기술의 발명에 못지않게 중요한 발명이었다. 설형문자는 복잡하고 거대한 관개 체제 전체를 관리할 수 있는 지휘-통제 메커니즘의 등장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장부 기록은 그날 그날의 곡물을 저장하고 분배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을 포함하여 수메르인의 모든 조업 업무를 체계화해 주었다.

근대 초기의 인쇄-출판-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석탄, 증기, 철도와 결합하여 1차 산업혁명을 낳았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전화, 라디오, 전동 타자기, 계산기 등 1세대 전기 통신은 석유 생산 및 내연기관과 맞물려 20세기 내내 2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다.

에너지와 커뮤니케이션 혁명의 결합은 사회와 사회적 역할의 관계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의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문헌에 나타난 관개농업 문화의 의식은 고대 구전 문화의 의식과는 전혀 다르다. 근대의 인쇄 혁명과 집약적인 1세대 전기 통신은 다양한 종류의 의식을 낳았다. 아울러 각 단계에서 새로 나타나는 의식은 앞선 의식의 잔재를 한편에 지니면서도 보다 성숙한 공감 본능을 확대시켜 갔다. 새로운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식의 구조는 인간이 평형상태와 멀리 떨어진 상태에 있을 때 번창할 수 있는 수단이다. 각 단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복합체는 인구를 유지하고 세대 간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의 흐름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그들의 영속성은 환경에서 전체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지구에서 35억 년이란 세월을 살아온 수많은 생물들 중에서 인간은 가장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고 잇달아 나타나는 각각의 사회적 구조의 질적 변화는 이전의 사회구조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대며 더 많은 엔트로피를 생산했다.


새로워지고 복잡해진 에너지-커뮤니케이션-의식 구조 덕분에 인간은 시간을 절약하고 공간을 좁힐 수 있다.


공감의 확장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적 교류와 인프라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접착제이다. 공감이 없는 사회생활이나 사회적 조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 반사회적 이상성격자, 자폐적 불구자들로 가득 찬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가? 사회는 사교적이어야 하고 사교적이 되려면 공감이 확대되어야 한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자아의식은 더 확실해야 하고 다양한 종류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이 많아야 하며 공감이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져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공감을 인식하는 과정과 세계적 차원의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파괴가 충돌하는 인류 여정의 중대한 교차로에 서 있다. 우리의 공감의 정도가 높아 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엔트로피로 인한 손실도 매우 불길하다. 인간이 본래 철두철미하게 물질주의적이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존재라면,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을 해결할 가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정에 민감하고, 우애를 갈망하고, 사교적이며, 공감을 넓히려는 성향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적어도 우리는 공감-엔트로피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내어 생물권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부모가 정적인 애착과 독립적인 탐구 분위기를 번갈아 가며 마련해 주어 둘 사이의 바람직한 균형을 잡아 주면, 아이는 자아의식을 건강하게 발전시키고 정서적으로 성숙하게 되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려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포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지 못하거나 세상을 탐구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하면, 아이의 자아의식은 억눌리게 되어 커서도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
보다 안정적인 애착 관계에 있는 아기가 커서도 보다 사교적인 성인이 된다. 이 아이들은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협동심이 높으며 친밀한 관계를 많이 만들었다. 이 아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공감 의식이 잘 발달되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줄 수 있을까? 공감은 가르치거나 훈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감해 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이가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가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공감의 잠재력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물러나 놀이의 본질적 특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 우선 놀이는 본질적으로 철저히 참여적이다. 놀이는 자아가 마음으로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환상이다. 놀이는 다른 사람과 무언가에 몰두하는 행동이다. 놀이는 혼자만의 쾌락이기보다 하나의 공유된 즐거움이다. 순수한 놀이는 수단이기보다는 본질적 의미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다.
  • 개방성과 관용은 놀이 환경의 본래적 부분이다. 행동에 따른 결과가 있기는 하지만,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자신을 드러낸다. 또 놀이에는 늘 용서가 뒤따르기에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당할지 모른다. "그냥 장난으로 그런 거야."라는 말은 용서를 당연시하는 아이들이 발뺌할 때 써 먹는 상투어이다.
  • 놀이에는 한계가 없다. 놀이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놀이는 또한 실용성과는 별개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놀이 공간'은 안전한 피난처이고 '현실 세계'에서 독립된 장소이다. '놀이 공간'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사람들이 임시로 공유하는 가상의 장소이다.
  • 놀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일어나지만 시간과 공간 개념이 없는 것으로 경험되는 경우가 많다. 경험 그 자체는 '가상pretense'이어서 놀이라는 경험에 초월적인 특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현실적이면서도 느낌으로는 다른 현실을 갖고 있다.
  • 놀이 환경은 공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교실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페르소나, 다른 역할, 다른 상황에 대입하여 상상력을 펼치고 저 사람이면 이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여자아이와 사내아이가 소꿉장난이나 병원 놀이를 하고 개나 말, 엄마나 아빠, 형제, 학교 선생님, 대통령이 될 때, 그 아이들이 하는 것은 바로 공감의 확장이다.
  • 놀이가 없는 공감 발달은 상상하기 어렵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 정의한 것도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위징아는 모든 문화는 놀이에서 생겨난다고 간파한다. 그는 "이런 놀이를 통해 사회는 삶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드러낸다."라고 말한다.
  • 사회화 과정에서 놀이가 그렇게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놀이가 상상력의 고삐를 풀어 주기 때문이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대체 현실을 끝없이 만들어 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대체 현실을 탐구한다. 우리는 거대한 타자, 즉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존재의 무한한 영역을 헤치는 탐험가가 된다. 놀이를 통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다른 현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실체적인 경험과 정서와 추상적 사고를 하나의 종합적인 앙상블, 즉 공감적 마음으로 모은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상상력은 정서적일 뿐 아니라 인지적이다. 우리는 정서를 표현하고 동시에 추상적 사고를 창조한다.
  • 순수한 놀이는 또한 인간 개발이 가장 잘 구현되는 현장이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1795년에 쓴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인 한에서만 놀이를 하고, 놀이할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는 인간의 유대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적 교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놀이를 한다. 놀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하는 가장 심오한 행위이다. 놀이는 집단적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놀이하는 사람은 경계심을 풀고 잠깐이나마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면서 함께 있다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자유와 놀이 역시 교집합을 갖는다. 진정한 놀이는 항상 자발적으로 시작한다. 놀이를 강요할 수는 없다. 놀이하는 사람은 '놀이를 좋아 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놀이에 빠진다. 목표는 즐거움과 생명 본능의 재확인이다. 문화적 영역에서 순수한 놀이를 경험함으로써 사람은 동료 인간과 동등하게 마음을 열고 참여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몰입한다. 순수한 놀이에 몰입하지 못하면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을 자유로 이해하고 그의 자유를 사용하고 싶을 때... 그때 그는 놀이를 한다."라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다. 놀이할 때보다 더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가? 그때 놀이는 시시한 장난이 아니다. 놀이는 공감 의식을 확장하여 진정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는 수단이다.

 

화해는 주로 사회적 조화를 되찾으려는 욕구와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위로는 다른 의도 없이 순전히 공감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행동으로, 단지 상대방의 곤경을 인정하고 달래기 위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잘되면 상대방의 느낌을 읽고 의도를 이해하고 공감적 유대감을 형성하기가 더 쉬워진다.


말과 글과 인쇄, 그리고 이제 전기 통신 등의 발전으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또 보다 밀집된 인구와 복잡한 사회 환경을 조성했다. 하지만 사회적 진화의 각 단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일차적 기능은 공감의 확장을 통해 신뢰감, 친밀한 관계, 사회적 결합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서로 털을 골라 주든 인터넷을 통해 가십을 퍼뜨리든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수단을 통해 동료와 교류하려는 깊은 욕구와 사회적 본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감적이며 이타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공감적 배려의 가장 성숙한 표현이다.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좀 더 깊이 공감할수록 참여의 정도가 강해지고 넓어지며, 그럴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영역은 더 풍요로워지고 더 보편적이 된다. 얼마나 마음을 열고 참여하느냐에 따라 현실을 이해하는 폭도 달라진다. 경험은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보편적이 된다. 우리는 세계인이 되고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생명권 인식biosphere consciouness'의 시작이다.



진리는 찾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체적 철학의 틀에서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새로운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현실은 공유된 경험을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공통의 이해에 관한 설명이다. 궁극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거대한 도식 속에 모든 관계가 썩 잘 들어맞는 방법을 통째로 알려고 한다는 말이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보다 더 큰 그림을 우리가 속해 있는 방법과 속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진리는 자율적 사실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 진리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다. 그때 모든 진리는 우리의 현존하는 관계와 공통으로 공유된 이해를 체계화하는 것이다. 존재는 관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존재의 진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체적, 철학적 접근은 우리의 경험적 존재를 무시하는 신앙과 이성과의 근본적인 결별이다.


실체적 경험을 내세우는 철학자에게 인생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능한 한 존재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가능한 한 폭넓게 그 경험을 구가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차이는 자유에 관한 관념을 바꾸어 놓는다. 자유는 이성의 시대에 핵심 개념이었다. 합리주의자들은 자유롭다는 것을 남에게 의존하거나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자율적인 상태로 정의했다. 근대의 자유는 노동을 통제하고 재산을 확보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쾌락을 최대화하고 행복해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는 또한 정치 무대에서 대표권, 그리고 시장에서 선택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개개인 각자가 공적인 영역에서 하나의 주권자라고 소리를 높였다. 고전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에게는 물질 세계에서 자신의 이익을 마음 놓고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주권과 경제적 권리 모두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본 것이다. 이성적 양식으로 볼 때 자유는 부정적인 자유, 즉 배제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혼자 고립될 수 있는 자유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냉정하고' 자족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이들과는 상반된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는 인생의 충만한 잠재력을 최대화할 수 있는 것이고, 충만한 삶이란 우정과 애정과 소속감의 삶이며, 보다 깊고 보다 의미 있는 개인적 경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 가능성을 찾는 삶이다. 공감적 기회를 보장해 주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양육되고 성장할 때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확장된 공감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평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유일한 인간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할 때 구별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고군분투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하는 바로 그런 행동이 평등 의식의 궁극적 표현이다.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으면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신분에서 상대방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다르고 낯설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기쁨이나 슬픔을 자신의 것처럼 실감하기 어렵다. 상대방에게 동정을 느낄 수도, 안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과 진정으로 공감하려면 그들이 나 같다는 느낌과 반응이 있어야 한다. 공감을 하는 순간에는, '내 것'과 '네 것'이 없고 오직 '나'와 '너'만 있을 뿐이다. 공감은 같은 영혼이라는 공동 의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초월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공감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초월한다. 실체적 경험이 현세적 성격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허약함을 인정하고 삶을 최대한으로 누림으로써 초월한다. 완벽함에 대한 충동은 물러나고 자아실현에 대한 탐구가 들어선다.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최대화하려 한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칭송하는 자, 삶을 넓힌다." 프리드리히 헤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근본적인 존재로서 죽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 탄생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이다."라고 상기시킨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삶을 긍정한다.


괴테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인간에게는 특별히 삶을 음미할 수 있는 고양된 의식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청지기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도 그런 맥락에서 보았다. 자연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판단을 보류한 채 자신의 삶을 꾸려 갔다. 그가 아는 자연은 타락하고 더럽혀진 대상이거나 실용적이고 착취할 대상이 아니라 상호성이 지배하는 살아 숨쉬는 공동체였다. 인간은 자연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보다 큰 전체와 연결된다. 이런 관계를 심화시키려면 다른 존재의 고유한 개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다른 존재가 우리를 어떻게 경험하고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봐야 한다. 다른 존재의 눈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게 된다. 


"세상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래서 세상에 '말을 거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인이다." - 괴테


낭만주의자들에게 개인은 창조적 잠재력을 부여받은 고유한 존재였다.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삶이었다.


다른 사람과 '상상력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은 공감의 낭만적 표현이다.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능력이 없다면 공감도 있을 수 없고 지상의 초월을 위한 낭만적 탐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존 러스킨은 낭만주의자들이 상상력에 부여한 의미를 이렇게 지적했다. "인간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한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본능적으로 배려하게 된다." 낭만주의 운동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상상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이유로 공감 의식의 진화라는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공감적 영감을 진전시킨 주역은 다른 아닌 시인들이었다. 그들은 시야말로 다른 사람에 대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갇혀 있던 공감의 충동을 풀어헤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외감, 생명의 나약함, 존재의 고통, 잘살아 보려는 투쟁, 그리고 친교의 기쁨을 이처럼 시를 통해 환기시킨 예는 일찍이 없었던 현상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존재의 적을 소유라고 생각했다. 20세기 저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가 우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존재와 멀어진다. 우리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만다. 


착한 성격이 멋진 개성으로 바뀌는 과정에는 또 다른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감정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람마다 개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 개인의 나약함이나 그들만의 포부에 보다 민감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착한 성격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으로만 구분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분류하고 판단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정서적, 정신적 나약함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호감을 받는 것이 존재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실존적 외로움과 애정이나 우정에 대한 갈망을 보고 그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한층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세계의 도시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엔트로피 흐름의 엄청난 증가였다. 도시의 사회구조는 지구의 이용 가능한 에너지와 물질을 더 많이 퍼내어 인간의 생활을 평형 상태에서 멀리 떼어 놓는다. 인프라의 중심부에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지만, 가장자리와 외부에서는 더 많은 엔트로피 폐기물을 쏟아 낸다.
생활이 도시화되면서 인프라는 더욱 복잡하게 작동하여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르고, 차별화와 개인화가 심해지고 자의식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게 되고, 그러면서 공감적 유대는 더욱 확장된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서로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남과 교류에 비례해서 공감의 표현이 확장될 가능성도 증가한다. 여행은 공감적 감수성을 넓혀 줄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경선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전통적으로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는 누가 가장 강력한 리더가 되고, 누가 가장 훌륭한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며, 누가 경제를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등의 항목이 포함되는 것이 보통이다. 2008년에는 색다른 질문이 하나 추가되었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선거에서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선택을 제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답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감을 대통령의 자질로 끌어들인 여론에 별다른 반응을 보인 정치학자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정치가나 여론조사 기관, 그리고 대중들은 그 질문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끌 가장 좋은 후보를 결정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고 타당한 질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선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사람들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며 공감을 넓혀 간다. 자의식이 분명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고, 사람들을 신뢰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훨씬 너그러워질 수 있다. 자신의 존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외부의 존재를 두렵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강한 결속력을 가진 작은 집단의 유대감에서 해방되어 보다 느슨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과 교제를 확대해 가면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도 높아지고 개방적이 되어 공감을 확대시킬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전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의 태도와 가치를 추적한 후에, 로널드 잉글하트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생존이 불투명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을 때, 외부인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 갈 위험한 국외자로 인식된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예측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 구분과 성별 기준을 고수한다. 거꾸로 생존이 당연시되기 시작할 때,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은 흥미롭고 자극을 주기 때문에 긍정적인 가치를 갖게 된다.’ 이들 조사의 핵심은 “개인의 안정성이 공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소외 집단을 인정하고 각양각색의 다른 사람들과 공감적 유대를 넓혀 가는 새로운 현실은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개인의식이 활성화되고 자기 표현이 두드러지는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거대한 조직망에서 서로 관계를 주고받는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된, 복잡하고 글로벌하게 구조가 짜여진 문명은 개방 의식, 비판단적 견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인정,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의 기반을 발견하려는 갈망 등을 요구한다. 범위를 넓혀 가는 공감의 연대감은 수많은 사람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어 주는 접착제이다.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의 경제적 요건 이상으로 부의 추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부의 소유는 결국 사람의 마음까지 소유해 버려, 부를 추구하는 행위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행동만 하고, 모든 사람과 사물을 자신의 부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한다. 다른 사람은 더 이상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일 뿐이다. 결국 나는 주변의 애정과 우정으로부터 고립된다. 남는 것은 소외감뿐이다.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다 보면 나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진다. 물질주의자들은 자신의 이익밖에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할수록 사람을 못 믿게 된다. 또한 물질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모르고 너그럽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기심이 늘면 이타심은 줄어들었다. 물질적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다. 물질주의자는 세상은 얻지만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동, 즉 공감적 유대를 발휘하는 일에는 서툴다.


인류의 절반은 안락한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화석연료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소모하고 있고, 그 이상으로 부가 늘어날 때마다 불행도 증가하게 된다. 또 한쪽 절반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애를 쓰고 최소한의 안락한 수준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다. 하지만 부유한 나라의 호사스러운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주고, 30억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석유와 그 밖의 화석연료나 핵전력에 필요한 우라늄은 충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최소한의 안락을 보장해 주는 분기점까지는 경제가 향상되어야 공감도 따라서 개발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다. 


분산에너지는 뒷마당에서 찾을 수 있는 에너지이다. 햇빛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춘다. 바람은 매일 지구 곳곳에서 분다. 우리는 쉬지 않고 쓰레기를 만들어 낸다. 시골에 사는 사람은 농업과 임업 폐기물을 이용할 수 있다.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밀물에서 생산되는 에너지가 있다. 지열 에너지는 지표면 아래에 있고 물은 수력발전을 제공한다. 이들 에너지를 우리는 분산 에너지라고 부른다. 석탄, 석유, 천연가스, 우라늄처럼 일정 지역에서만 발견되는 엘리트 에너지와는 달리, 재생 가능한 에너지는 어디서나 다양한 규모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을 가능하게 한 정보통신 기술은 세계의 파워그리드(power grid: 전력망)의 형태를 바꾸어 놓고 있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 사무실, 가게, 공장, 기술 단지에서 스스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모아 전략을 생산할 수 있고, 그것을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듯, 스마트그리드smart grid를 통해 P2P 방식으로 공유한다. 기업들은 이미 업계 리더들이 말하는 소위 ‘분산 자본주의’를 위한 시장과 인프라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3차 산업혁명의 첫 두 기둥인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발전소 건물’을 도입하려면 3차 산업혁명의 세 번째 기둥까지 함께 도입해야 한다. 다름 아닌 재생 가능 에너지의 저장법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들 에너지원을 모아 필요할 때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저장법을 개발해야 한다. 배터리나 분화양수기 등은 저장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널리 사용할 수 있고 비교적 효율적인 저장 매체가 하나 있다. 수소는 공급 면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하고, 전력 생산뿐 아니라 차량에도 이용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이 재생 가능 에너지를 ‘저장하는’ 보편적 매체이다. 

인터넷 망을 따라 파워그리드의 형태를 바꾸는 네 번째 기둥은 유럽, 미국, 일본,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전력 회사에서 실험 중에 있다. 네 번째 기둥이 세워지면 업체와 가정은 필요한 에너지를 스스로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다. 
다기능적 전력 교환망인 스마트 인터그리드smart intergrid는 가정과 중소기업과 대기업을 하나로 이어 준다. 가정과 중소기업과 대기업은 미니그리드minigrid로 태양전지, 풍력발전, 소형 수력발전, 동식물 폐기물, 쓰레기 등 지역의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하여, 그것을 각자 필요한 전력 생산에 독립적으로 사용한다. 스마트미터링smart metering 기술을 활용하면 지역 생산자로부터 그리드를 통해 전력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를 메인 파워그리드에 효율적으로 되팔아 에너지의 쌍방향 유통을 원활하게 해 준다.

스마트그리드 기술의 다음 단계는 센서와 칩을 그리드 시스템 곳곳에 끼워 넣어, 모든 가전제품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소프트웨어를 통해 그리드의 어떤 곳에서 언제 얼마나 전력을 소모하는지 전체 파워그리드에 알린다. 이런 상호 연결 시스템으로 전력 사용의 최고점과 최저점에서 에너지 사용과 흐름의 방향을 재조정할 수 있고, 심지어 매순간 전력의 가격 변동에도 연동하여 사용량을 조절할 수 있다.

인터그리드는 전력의 폭넓은 재분배를 가능하게 해 준다. 중앙으로 집중된 하향식 에너지 유통은 점점 더 퇴화되고 있다. 앞으로 기업과 시 자치제와 일반 가정은 자신의 에너지에 대한 소비자일 뿐 아니라 생산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분산 발전distributed generation’이다. 이처럼 분산된 스마트그리드는 또한 석유로 가동하는 내연기관을 전기나 수소 연료전지 플로그인plug-in 차량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한다. 플러그인 전기차와 수소 연료전지 차량 또한 20킬로와트 이상의 용량을 발전하는 ‘달리는 발전소’이다. 자가용, 버스, 트럭은 주차 시간이 길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집이나 사무실이나 주요 쌍방향 네트워크에 플러그인하여 필요한 전기를 공급받은 다음, 남는 전기를 다시 그리드에 되돌려줄 수 있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와 수소 연료전지 차량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3차 산업혁명의 인프라에 필적하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한다. 3차 산업혁명은 민족과 국가를 전례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협력 관계로 끌어들여 전력이 널리 분산되는 새로운 사회적 비전을 실현시킬 수 있다. 지난 10년에 걸친 분산된 통신 혁명으로 네트워크 사고방식, 오픈소스 공유, 통신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것처럼, 3차 산업혁명은 에너지 민주화의 선례를 따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생활 방식을 실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힘을 갖추는 세계를 그리기 시작할 때이다.



재산권에서 접속권으로. 지적재산권이라는 개념만큼이나 낡은 고전적 경제 패러다임과 새로운 분산 자본주의 모델이 상충하는 곳도 없다. 전통적 사업 계획에서 특허권과 저작권은 하나의 성역이다. 그러나 협업 경제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오픈소스로 내놓는 것이 협업의 출발점이다. 지식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것은 협업을 가로막는 일차적 장애이다.


소유에서 접속으로의 변환은 사업체들이 에너지와 천연자원을 관리하는 방식에도 극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존의 시장은 본질적으로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재산 교환에 초점을 맞추는 사업 모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에너지의 비효율을 줄이고 엔트로피의 흐름을 늦출 인센티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엔트로피를 줄이면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적어도 에너지 비용이 오르기 시작하고, 정부가 탄소 총량 제한 및 배출권 거래제carbon cap-and-trade와 재활용법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최근까지는 그랬다. 그것은 일단 구매자와 제품을 교환하고 나면, 생산자는 더 이상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필립스라이팅Philips Lighting 같은 기업은 전구 제품에서 서비스로 운영 방식의 일부를 바꾸기 시작했다. 
필립스는 소비자와 소위 ‘성과 계약performance contract’이란 것을 개시했다. 예를 들어 필립스는 보다 효율적인 소형 형광등과 대도시 지역의 LED 옥외 조명을 제공하기 위해 도시와 계약을 한다. 필립스는 조명과 설치를 제공하는 것을 비롯하여 이 계획에 들어가는 자금 일체를 부담한다. 그러면 도시는 필립스에게 협의한 일정 시간 동안 절약된 에너지에서 비롯된 수입을 필립스에 되돌려준다. 거래되는 형광등은 단 한 개도 없다. 형광등은 여전히 필립스의 소유이기 때문에 필립스는 공급자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이다. 성과 계약은 새로운 에너지 시장에서 표준 요금이 되고 있다. 새로운 사업 모델에서, 필립스 같은 제공자는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능률적이고 지속 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할 새로운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 제품을 파는 방식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기업이 늘어나면서, 에너지 효율과 보다 긴밀한 자원 관리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흐름을 줄이는 문제는 모든 기업 운영의 핵심 관건이 될 것이다.



협동 사회에서는 비물질적 가치, 특히 자아 완성과 인격적 변화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충만한 인생’에서 배제되지 않을 권리, 즉 접속의 권리는 가장 중요한 재산 가치가 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재산은 “개인이 충만한 삶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해 줄 탄탄한 관계에 참여할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맥퍼슨은 주장한다.


서열을 하찮게 여기고, 네트워킹 방식으로 사람이나 세상과 관계를 맺고, 협력이 체질화되어 있고, 자율과 배척보다는 접속과 포함에 관심이 있고, 인간의 다양성에 감수성이 강한 밀레니엄 세대는 역사상 가장 공감적인 세대가 될 확률이 크다. 분산적이고 협동적이고 비위계적인 사회가 곧 공감적인 사회이다.



최근에 들어와 삶의 질은 20세기 경제 이론의 많은 핵심 가설을 다시 검토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 목록의 정점에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국내총생산이 있다. GDP는 오랫동안 미국과 다른 나라의 복지를 가름하는 잣대로 확고한 권위를 누려 왔다. 
GDP는 1930년 대공황에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평가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상무부가 고안해 낸 개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GDP가 12개월 동안에 생산된 경제적 재화와 용역의 총량의 가치만을 측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GDP는 실제로 사회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경제 활동과 그와 반대되는 부정적 경제 활동을 구분하지 않는다. 늘어나는 교도소 신축, 경찰력 확대, 군비 확장, 오염 처리 비용, 흡연과 음주와 비만에서 비롯되는 의료 비용 증가, 그리고 그 밖에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가공식품과 기름진 패스트푸드를 먹으라고 부추기는 데 들어가는 광고 비용 등, 모든 형태의 경제 활동이 GDP에 포함된다.

여러 해 동안 GDP를 대체할 만한 지표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가 있었다. 지속 가능한 경제복지지수(ISEW: Index of Sustainable Economic Welfare), 참진보지표(GPI: Genuine Progress Indicator), 포드햄 사회건강지수(FISH: Fordham Index of Social Health), UN의 인간개발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 경제적 웰빙지수(IEWB: Index of Economic Well-Being) 등이 대표적인 것드리다. 이들 지표들은 ‘진정한’ 경제적 향상을 인간의 복지에서 찾으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ISEW는 먼저 개인의 소비 지출로 시작하여 보수를 받지 않는 가사 노동을 더한다. 그런 다음 범죄와 오염과 사고에 들어간 금액 등, 일차적으로 손실을 완화하기 위한 활동을 뺀다. ISEW는 또한 소득 불균형과 고갈된 천연자원도 반영한다. 참진보지표는 많은 부분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만, 지역 사회의 자원 봉사 가치를 보태고 여가 시간의 손실을 빼는 점이 다르다. 포드햄사회건강지수FISH는 유아 사망률, 아동 학대, 유아기 빈곤, 10대 자살, 마약 남용, 고등학교 중퇴율, 평균 주급, 실업, 의료보험의 적용 범위, 노인층 빈곤, 살인, 주택, 소득 격차 등 사회적, 경제적 지표 열여섯 개 항목을 측저한다. 경제적 웰빙지수IEWB는 가족저축률, 주택스톡(housing stock: 이동주택을 포함한 모든 주거 단위의 총합) 등 미래의 안정감을 측정할 수 있는 항목을 고려한다.


경쟁보다 협동이 대세를 이루고 접속권이 재산권만큼이나 중요해지고 삶의 질이 개인의 재정적 성공에 대한 갈망만큼이나 두드러지게 생각되는 분산 자본주의 경제가 자리를 잡으면, 공감적 감수성도 번영할 여지를 마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탐욕, 사리사욕, 실익을 인간 경험의 중심에 놓는 인간 본성의 개념과 배타성의 경계, 그리고 위계질서는 더 이상 공감적 감수성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한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이 관계적이고 또 정체성이 수많은 관계에 묻혀 존재하는 연극적 의식의 시대에, 접속을 거부당한다는 것은 고립된다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1년 열두 달 하루 24시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 고립과 구분되는 개념으로서의 시간은 계속 줄어들어 이미 제로에 접근하고 있다. 시간에 굶주린 사회에서 모든 여분의 나노초는 ‘또 다른 접속’을 이루는 기회가 된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의 시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모든 종류의 관계가 우리의 중심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와 인본주의 심리학자의 “나는 참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이제 새로운 명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한 사람의 진정한 자아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적 유대나 관계를 맺게 도와준다면, 이런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은 공감적 인식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문제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학생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참지 못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실패를 맛보았을 때 그 실패를 쉽게 처리하거나 극복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표현하는 일에도 서툴다.


지난 10년 동안의 조사 결과는 스크린 앞에서 자란 젊은 세대의 소통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 어휘는 곤두박질 쳤고, 독해력과 의사 소통 능력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런 요소들은 공감의 능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구전에서 필사로, 다시 인쇄로 이어지는 이전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어휘도 따라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렇게 늘어난 어휘는 치밀하고 풍부한 은유와 언어 구조를 가능하게 했다. 어휘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복잡하고 정교한 생각을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공감의 영역도 넓혔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느낌과 의도와 서로에게 거는 기대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분명한 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역설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인터넷 망은 인류에게 무한한 지식과 소통의 통로를 제공하지만,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 때문에 이해와 의미와 공감적 유대감을 높여 깊이 있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현저하게 줄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에도, 형편이 어려운 많은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생활 방식을 단순화시켰고, 많이 가지는 것보다는 인간관계의 질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찾아내려 한 것을 그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수입 이상의 재산 축적은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려운 경제 상황 탓에 사람들이 알아서 삶의 규모를 줄여 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돈보다는 더 의미 있는 관계로, 또 시장경제에서 사회적 자본으로 행복의 기준과 방법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지만 않다면, 어려운 시절은 시민사회를 쇄신하고 공감의 물결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서로를 배려하고 실제로 서로 보듬고 돕고 베푸는 일에 참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자연의 부를 평등하게 분산시키면 그동안 탐닉과 방종으로 혜택을 남용했던 선진국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체제로 생활 방식을 바꿀 수 있고, 못사는 나라들은 그들의 처지를 개선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선진국들이 선진화되지 못한 나라의 삶의 수준과 복지를 향상시키는 책임을 맡는다면 인류 문명은 균형을 잡으면서 자연의 재생 능력을 되살리는 쪽으로 인간의 소비 습관을 정돈해 줄 것이다. 분산된 3차 산업혁명의 진정한 가치는 지구 어디에나 있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누구나 공평하게 원하는 만큼 사용하면서, 모든 인류가 하나의 품안에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해 준다는 점에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제 지역 분산 방식으로 복합적인 인류 문명을 수립하고 엔트로피의 수치를 낮추면서 공감의 범위를 넓힐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정점에 이른 글로벌 경제에서 인류는 생물권 인식의 출발점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를 통합할 수 있는 중차대한 시점에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답은 너무도 분명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들과 더불어 공유하고 있는 생물권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지만, 바로 생물권이 기후 변화로 위협받으면서 이제 모든 종을 위험에 빠뜨리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망치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겐,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일 것이다."


자연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기계적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고정적이 아니라 임기웅변적이며 다른 현상에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주변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변한다. 과학과 기술이 가속도와 위치의 문제에 매여 있었을 때는, 뉴턴의 기계적 법칙도 얼마든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따로 떼어 놓고 시간을 재고 측정하여 엄격히 계량화되는 현상만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의 입장에서 보면 환원주의나 기계론적 개념은 한계가 뚜렷해서 자연의 내재성을 포착할 수 없다. 사회나 자연을 이해하려면 구성 부품의 속성뿐이 아니라 현상과 현상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과학자들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공감의 성숙도는 특히 비판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상충하는 감정과 생각을 받아들이고, 다의적인 사고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은 비판적 사고를 포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서적 요소이다.


협력적 학습 환경에서는 과정이 결론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위계적인 학습 모델보다는 각자의 지식을 짜 맞추는 네트워크 방식이 더 유리해진다. 학습은 훈련을 통해 학생의 두뇌에 전문적인 지식을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협력하고 비판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찾아내는 과정이다. 협력적 학습의 효과를 높이려면, 집단이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존중해 주고 상대방이 관점과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기탄없이 비판하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고, 전체 집단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협력 학습은 배려, 조화, 비판단적 상호 작용, 개인의 고유한 공헌, 참여의 중요성, 관계를 통한 공동의 의미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감을 가지고 참여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과학적 방법은 우리 자신의 본성과 세계의 본성에 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과 사실상 전혀 맞지 않는다. 과학적 방법은 현실의 관계적 측면을 부인하고 참여를 막기 때문에, 공감적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성의 시대에도 프랜시스 베이컨의 방법론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괴테가 그런 경우였다. 괴테는 자연은 사심 없는 방관자로서 보다는 참여자로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식물학자가 형태학을 연구할 때는, 지구의 생명체부터 시작해야 한다. 
괴테는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가장 내부 지향적인 방법으로 그 자체를 대상과 동일시하고, 그렇게 하여 실질적인 이론으로 성립하게 되는 민감한 경험주의”라고 정의했다.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은 베이컨과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괴테는 그의 “생각의 힘이 대상과 합일을 이루는 순간 활성화되고, 그때 생각은 대상에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괴테는 진정한 통찰력은 초연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현상에 깊이 참여할 때 얻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은 130여 년 동안 묻혀 있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많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인츠 코후트는 처음으로 과학적 조사에 대한 참여적 접근이라는 생각을 손질했다. 코후트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은 ‘원격 체험experience-distant’이어서 실제적 관찰과 거리가 있다며 대안적 경험론을 주장했다. 그것을 그는 공감과 내관으로부터 직접 나온 자료이기 때문에 ‘근접 체험experience—near’이라고 불렀다. 
정신분석이 과학적 사고에 기여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을 공감과 결합시킨 점”이라고 코후트는 생각했다. 공감을 “하나의 관찰 도구로서” 과학에 접목시키면 “과학적 원리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의 깊이와 폭을 증가시킨다.”라고 코후트는 말한다. 더욱이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공감을 적용하는 문제는 과학적 추구가 “인간의 생활과 유리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코후트는 주장했다. 코후트는 냉정하고, 사심 없고, 합리적인 방식만 고집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20세기에 야만적인 전체주의 체제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런 방법론은 “세계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비인간적인 목적”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했다.


매슬로의 ‘배려하는 객관성caring objectivity’이라는 개념은 그가 두 번째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요구에 처음 반영한 이후로 반세기 동안 더욱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영장류 동물학자 제인 구달처럼 신세대 공감적 연구자들은 과학적 탐구에 대한 공감적 접근 방법인 ‘근접 체험’을 사용하여 기존의 사심 없고 가치 중립적인 과학적 방법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연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발견과 통찰을 이끌어 냈다. 생물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려면 자연에 얼마나 깊숙이 다시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자연에 다시 참여하기로 한 이번의 결정은 인간이란 종의 초기 진화를 특징짓는 원래의 참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과거에 자연과의 관계는 의지에 의한 참여가 아니라 운명적인 참여였다. 그때는 자의식적인 선택을 할 만큼 자아가 제대로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구석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자연에 의존했던 것만큼이나 자연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따라 자연과의 관계를 규정해 갔다. 이제 자유의지로 자연에 기꺼이 다시 참여하는 것은 생물권 의식을 이전이 모든 의식과 구별해 주는 기준이다.


세상을 소유하려는 탐색은 우리를 보다 복잡한 경제적 구조로 몰아넣었고, 이런 구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더욱 몰아세우고 사람과 물건으로 채웠다. 이제 우리는 이 지구의 곳곳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는 데 성공하여 인류를 하나의 품으로 연결하는 진정한 글로벌 문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울러 그 대가로 우리는 인류의 전멸을 예고하는 엔트로피 수치를 손에 받아 들었다.


‘공감의 문명empathic civilization’이 이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지구를 감싸는 거대한 생명권과 전체 인류에게로 공감의 범위를 빠르게 넓혀 가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공감적 유대 관계를 다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기후 변화와 대량살상무기의 증식이라는 형태로 무섭게 속도를 올리고 있는 엔트로피라는 괴물과 충돌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제때에 지구촌의 붕괴를 피하고, 생물권 의식과 범세계적인 공감에 이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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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로봇 자동화 및 휴머노이드, 뉴럴링크의 뇌에 심는 컴퓨터칩으로 뇌와 연결-통제를 통한 질병치료, 스페이스X의 발사체로 스타링크를 구축하여 지상 통신망이 없는 곳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하고 행성간 우주선을 개발하여 화성으로의 여행과 이주를 꿈꾸며, 태양광 지붕으로 자가발전을 하고 스마트그리드와 연결하여 분산 에너지 혁명을 이끌고 있는 일론 머스크.
 
AI, 에너지 전환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사업들에 트위터(X)까지 더한 커뮤니케이션 혁신까지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본문발췌]

로로프 보타는 말한다. "기업가는 사실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기업가는 리스크를 완화하는 사람이에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번창하려 하지도 않고 리스크를 증폭시키려 하지도 않죠. 대신 통제 가능한 변수를 파악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지요." 
하지만 머스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리스크를 증폭시키고 우리가 물러설 수도 없게 배를 불태워버리는 데 몰두했어요." 보타가 보기에 머스크의 맥라렌 사고는 그런 성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가속페달을 있는 대로 밟고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보려다 난 사고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항상 리스크를 제한하는 데 집중하던 틸과 머스크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리스크 중독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도록 사람들을 이끈다는 면에서는 유용할 수도 있었다.
호프먼은 말한다. "머스크는 놀랍도록 성공적으로 사람들이 사막을 가로질러 행진하게 만들곤 하지요. 그는 모든 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칩을 테이블에서 거두지 않고 계속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 그것은 그의 인생의 주제가 되었다.


"내가 간과했던 것은 일론은 사명으로 일을 시작해서 나중에는 그것을 재정적으로 성공시키는 방법까지 찾아낸다는 점이었어요. 바로 그런 면이 그를 경외감이 들 정도의 강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지요." - 리드 호프먼


공장을 설계할 때 머스크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제조 팀이 모두 함께 모여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따랐다. "조립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디자이너나 엔지니어를 붙잡아 세우고 '대체 왜 이런 식으로 만든 거요?'라고 따질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머스크가 뮬러에게 설명했다. "가스레인지 위에 자기 손을 올려 놓으면 뜨거워지자마자 바로 떼어내지만, 다른 사람의 손이 올라가 있으면 무언가 조치를 하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마련이지요."


"머스크에게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냥 해보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잘 안되면 그 이유를 설명하면 되는 겁니다." - 톰 뮬러


머스크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했다. "엔지니어처럼 생각하는 디자이너와 디자이너처럼 생각하는 엔지니어를 창출하겠다는 비전이 있었던 겁니다." 폰 홀츠하우젠의 말이다. 이것은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가 애플에 주입한 원칙, 즉 디자인이 단순한 미학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진정한 산업 디자인은 제품의 외관과 엔지니어링을 연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 결과다. 잡스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디자인은 겉모습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디자인의 의미에서 멀어질 수 있는 개념은 없습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의 근본적인 영혼이며, 결국 그 영혼이 겉모습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머스크의 생산 알고리즘

  1. 모든 요구사항에 의문을 제기한다. 
  2. 부품이든 프로세스든 가능한 한 최대한 제거하라. 나중에 다시 추가해야 할 수도 있다. 사실, 10퍼센트 이상 다시 추가하지 않게 된다면 충분히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3. 단순화하고 최적화하라. 
  4. 속도를 높여 주기를 단축하라. 
  5. 자동화하라. 

 
레고 조각은 10미크론(100만분의 1미터) 이내의 정확성과 동일성을 자랑하는데, 이는 어떤 부품이든 다른 부품으로 쉽게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 부품도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머스크는 말한다. “정밀도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요. 정밀도는 대부분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얼마나 신경을 쓰느냐의 문제이거든요. 정밀하게 만들고 싶으면, 정밀하게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소유물은 사람을 짓누르며 공격의 빌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에서 돌아와 직접 로켓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한 이후 머스크는 자체적으로 ‘바보 지수idiot index’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부품의 총 비용에 대한 원자재 비용의 비율을 계산해 뽑는 지수였다. 바보지수가 높은 부품(예커내, 원자재인 알루미늄 가격은 100달러에 불과한데 그것으로 만든 부품은 1,000달러에 달하는 경우)은 설계가 복잡하거나 제조공정이 너무 비효율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머스크는 사람들이 안락과 여가를 우선시하고 싶어지면 회사를 떠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사람을 관찰해서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범용 로봇으르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경제를 엄청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도 있겠지요. 일은 선택이 될 수 있고요.” 머스크는 약간 더듬거리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옵티머스를 테슬라의 자율주행차 계획 및 도조 슈퍼컴퓨터와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는 옵티머스가 코드로 지시받을 필요 없이 직접 작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처럼 관찰을 통해 스스로 학습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의 경제는 물론이고 삶의 사고방식까지 혁신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새로운 엔진의 개발로 건너뛴 조치의 요점은 모든 관계자를 대담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위대한 모험을 위한 엔진입니다.” 머스크가 팀원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성공 확률이 0보다 높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실행에 옮기세요! 우리가 바꿔놓은 것이 너무 모험적인 것으로 드러나면, 그러면 후진하면 됩니다.” 기본 지침은 군더더기 없는 ‘린lean’ 엔진을 만드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가죽을 벗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죽을 벗긴 후의 모습이 어떠할지 아는 것입니다. 정답은 근육질만 남은 멋진 모습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연결 부위는 실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의 장치로 가야 해요.” 낙담한 뉴럴링크 엔지니어들에게 머스크가 말했다. “전선도, 연결도, 라우터도 없는 하나의 우아한 패키지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오.” 모든 기능을 하나의 장치에 담는 것을 막는 물리 법칙이나 기본 원칙은 없었다. 엔지니어들이 라우터의 필요성을 설명하려 하자 머스크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제거하시오.” 그가 말했다. “제거, 제거, 제거”


“나는 그저 스페이스X를 통해 사람들을 화성에 보내고, 스타링크를 통해 정보의 자유를 구현하고, 테슬라를 통해 지속 가능한 기술을 가속화하며, 사람들을 운전의 고단함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가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도 확실이 어느 정도 좋은 의도로 포장될 수 있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나쁜 의도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는 선하다는 얘기였다.


머스크에게 CEO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정말 다정한 것”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격언 중 하나는 경영자가 호감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일련의 규칙을 따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하여 기술을 습득한다. 그것이 바로 앨런 튜링이 1950년 논문 <컴퓨팅 기계와 지능>에서 구상했던 머신러닝에 대한 접근방식이었다.


슈로프는 신경망 플래너가 규칙 기반의 접근방식보다 더 효과적인 사례를 머스크에게 보여주었다. 슈로프가 준비한 데모 영상에는 쓰레기통과 쓰러진 트래픽콘, 이런저런 파편 등으로 뒤덮인 도로가 등장했다. 신경망 플래너의 안내를 받은 자동차는 그런 장애물을 피해 자선을 넘고 필요한 경우 몇 가지 규칙까지 어기며 주행했다. “이것이 바로 규칙 기반에서 네트워크 경로 기반으로 전환하는 경우 일어나는 상황입니다.” 슈로프가 그에게 말했다. “이 기능을 작동하면 체계가 없는 환경에서도 차가 충돌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대한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는 능력은 자율주행 자동차부터 옵티머스 로봇, 챗GPT 유형의 봇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AI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머스크는 이제 자율주행차에서 수집되는 영상과 매주 트위터에 올라오는 수십억 개의 게시물이라는 두 가지 강력한 실시간 데이터의 원천을 보유했다.


컴퓨터의 지능의 양은 스테로이드를 맞은(즉 강화된) 무어의 법칙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생물학적 두뇌 능력이 디지털 두뇌 능력에 비해 보잘것없어 보이게 될 것이 자명했다. 더욱이 새로운 AI 머신러닝 시스템은 스스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고, 결과물을 생성하는 방법을 스스로 학습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자체이 코드와 기능을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었다. ‘특이점singularity’은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과 공상과학 작가 버너 빈지가 인공지능이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여 인간을 뛰어넘는 기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였다. 머스크는 낮고 불길한 어조로 “그런 일이 예상보다 빨리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문명이 쇠퇴하는 방식이에요. 더 이상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 거 말이에요. 그렇게 리스크 감수를 멈추면 동맥이 굳어지게 돼요. 매년 심판은 많아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줄어드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은 더 이상 고속 철도나 달에 가는 로켓 같은 것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성공을 너무 오래 향유하면 리스크를 감수하려는 욕구를 상실하게 되지요.”


머스크로 하여금 장대한 위업에 도전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의 대담성과 자만심이다. 그렇다면 그런 대담성과 자만심은 그의 나쁜 행동 방식과 냉담함, 무모함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개자식처럼 구는 겨우에 대한 변명까지 될 수 있을까? 물론 대답은 ‘아니오’이다. 
누구든 사람의 좋은 특성은 존경하고 나쁜 특성은 매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닥들이 어떻게 함께 엮여 있는지,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단단히 엮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천 전체이 실을 풀지 않고는 어두운 부분을 제거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모든 영웅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결점은 비극을 낳고 어떤 결점은 극복된다. 우리가 악당으로 보는 인물도 복잡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가장 훌륭한 사람조차도 “결점으로 주조된다”라고 썼다.


과연 절제된 머스크가 구속되지 않은 머스크만큼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 여과되지 않고 얽매이지 않는 것이 머스크라는 인물의 본질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는 아닐까? 안정적이든 혼란스럽든 그의 모든 측면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로켓을 궤도에 올릴 수 있고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때때로 위대한 혁신가들은 배변 훈련을 거부하고 리스크를 자청하는 어른아이일 수 있다. 무모하고,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고, 때로는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미치광이일 수도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미친 사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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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편리함 속에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은 줄고 점점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본문발췌]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똑똑하고 편리해진 시대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걸 돈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해진 세계에서, 그들은 내 안에
처음부터 있었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의 모습이다. 

조용한 시간,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를 듣는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실패투성이 인간이고 앞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만, 내가 정의하는 실패는 단 하나다.
인생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 살지 못하는 것!
진정으로 나를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나는 알고 있다. 간절하게 길을 찾는 사람은 이미
그 마음속에 자신만의 별의 지도가 빛나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진정한 나를 찾아 좋은 삶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다른 길이 있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은 다 공짜다.
 


씨알을 심는 농부는 기다림을 산다.
 기다림은 씨앗이 땅에 심기었다는 믿음,
 지금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믿음,
 어둠 속 대지에서 하루하루 커나간다는 믿음.
 나에게 진정 간절한 기다림이 있는가.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오직 희망이 있을 뿐.
 


돈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큰 사람들.
 창조란 가장 단순한 것으로
 가장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



탐욕의 그릇이 작아지면 삶의 누림은 커지고
 우리 삶은 '이만하면 넉넉하다'.

 

아이들아, 너는 이 지구별에 놀러 왔단다.
 더 많이 갖기 위한 비교경쟁에 인생을 다 바치기엔
 우리 삶은 너무나 짧고 소중한 것이란다.
 너는 맘껏 놀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라.
 그리고 네 삶을 망치는 모든 것들과 싸워가거라.
 인생은 수고의 놀이터이니 고통받기를 두려워 말고,
 고통을 공깃돌 삼아 저마다의 삶을 누리며 행복하라.
 


수많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나 홀로 버려져 있다는 느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세상을 다 가졌어도 진정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은 비와 바람과 태양이 길러준
 대지의 선물을 허리 숙여 거두는 날.
 우리는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
 태양으로 길러지고 빛나는 것으로만 확인될 뿐.
 사랑 또한 볼 수 없고 단지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덕분에' 살려지고 있으니.

 

집이란 이렇게 사고 파는 부동산 가치가 아니라
 내 삶의 무늬를 새기며 오래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지상의 단 하나뿐인 기억과 소생의 장소이니.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결핍이 아니다.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다 사르지 못하고 
 자기 존재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 
 '잉여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고통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이 아무 의미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종자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 매달아진다.
 수백 수천의 옥수수 알들은 단지
 한 톨의 씨앗에서 비롯되었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대지에 파묻혀 썩어 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 마라.



오늘 무슨 일을 했는가 못지 않게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가 중요하지요.
 모든 것은 물결처럼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남아 가슴으로 이어져 흐르겠지요.



만족滿足이란, 발이 흙 속에 가득히 안기는 것,
 대지에 뿌리박은 삶에서 행복이 차오르는 것이니.

 

시작은 짜이
 꽃 농장 인부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짜이를 끓여 마시며 담소 중이다.
 이들의 하루는 짜이와 함께 시작된다.
 "내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고
 동료 간에 우애의 감정이 돌아야
 내가 가꾸는 꽃들도 향기를 건네겠죠.
 삶을 위해 일하고 웃기 위해 돈 버는 건데
 일과 돈이 사람의 주인 노릇 하면 되나요."
 일터는 '돈터' 만이 아닌 '삶터'이자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수행터'이고,
 동료란 경쟁 관계가 아닌 '좋은 벗'인 것을.
 아침 해와 함께 멋진 하루를 열어주는 짜이 한잔.



선물 받은 하루의 생을 다 소멸시키며, 텅 빈 충만의 정신적 풍요를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이 지상에 잠시 천막을 친 자이니, 삶도 초원의 꽃처럼 남김없이 피고 지고 하루하루 사랑으로 나를 살라가는 생의 도약을 이루기를...
 


남김 없이 피고 지고
 야크 젖을 짜던 스무 살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천막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지상에 잠시 천막을 친 자이지요.
 이 초원의 꽃들처럼 남김없이 피고 지기를 바래요.
 내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새 풀이 돋아나고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아이들이 태어나겠지요."
 충만한 삶이란, 축적이 아닌 소멸에서 오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 삶의 목적은 선물 받은 하루하루를 남김없이 불살라
 빛과 사랑으로 생의 도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던가

 

나날이 새롭게
 여명은 생의 신비다.
 우주의 순환은 날마다 한 번 해가 뜨고 한 번 해가 지고
 우리는 오직 하루 치의 인생을 새로이 선물 받는다.
 이 대지의 삶은 순간이고 미래는 누구도 모른다.
 하여 삶은 일일일생一日一生이니
 오늘 하루의 생을 남김없이 불사르고
 지금 여기서 자신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는 것
작지만 끝까지 꾸준히 밀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삶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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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기대와 시선에 맞춰 사느라 자신의 인생을 즐기고 누리지 못하지는 않는지?
가끔은 멈춰 쉬고, 가끔은 천천히 음미하며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본문발췌]

다 다르다
...
삶은 숫자가 아니라고 
행복은 다 다르다고 
사람은 다 달라서 존엄하다고



유산
...
너는 미래의 먹이로
오늘 네 삶을 던져주지 마라

 

거대한 착각
나만은 다르다
이번은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
 


보험
삶을 살 줄 모르는 자는 죽을 줄도 모른다
 


성숙이 성장이다
멈출 때를 모르면 성장이 죽음이다
그리하여 성숙이 참된 성장이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왜 이렇게 삶을 서둘러 멀어져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내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이 악물고 공부해라
좋은 사무실 취직해라
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
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

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
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
스무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꿈을 찾는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
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
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거예요
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
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
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
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끝에서 떠밀려
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
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
돈 없으면 죽는구나
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겨져야 하는
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거나 죽여버리겠어요
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
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
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
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
가슴 펴고  살아가라고

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
누가 뭐라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
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
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
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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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하는 것 만큼이나 존재하는 것도 지독하다'
사랑, 돈, 권력.... 결국은 우리의 탐욕과 분별심 때문이 아닐까?
 
 
[본문발췌]
 
나는 어떻게 노인들이 먼지와 끈적거림, 경미한 수준의 오물과 곰팡이 핀 수건에 익숙해지는지 이해하게 된다. 꼭 눈이 침침하거나 몸이 약해져서 이런 문제를 어쩌지 못한다기보다는, 그저 지금껏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들을 전부 땅에 묻은 마당에, 커피잔의 립스틱 자국이나 다시는 못볼 사람의 사진 액자에 내려앉은 먼지에 어떻게 일일이 흥분하겠는가? 사랑했던 아내와 형제를 땅에 묻은 마당에, 의자 등받이의 (이제는 거의 구멍이 날 지경인) 닳은 곳을 어떻게 심각하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관록은 유용하다. 그래서 열여덟 살로 돌아가라면 다들 싫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관록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안 좋은 점은,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쓰는 게 도무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오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나는 부재하는 것 만큼이나 존재하는 것도 지독하다는 걸 알게 된다.

 
'육신은 무엇인가? 인내다. 사랑은 무엇인가? 감사함이다. 우리 가슴속에는 무엇이 숨어 있나? 웃음이다. 또 다른 건? 연민이다.' - 루미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빠르지만 너무 빠르지는 않게) - 비스와바 아나 심보르스카

삶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이토록 비옥할 수가 없고,
개구리처럼 개굴대거나 지빠귀처럼 지저귀거나
개미집처럼 집채만하거나 새싹처럼 싹틀 수 없다

나는 삶의 환심을 사려 애쓴다
삶의 총애를 받으려,
삶의 변덕을 예상하려
늘 제일 먼저 허리 굽혀 인사하며,
늘 잘 보이는 곳에 서 있다
겸손하고 존경어린 얼굴로,
환희의 날개로 날아오르며,
경이의 파도 아래 떨어지며

아, 이 풀벌레는 어찌나 푸르른지
이 열매알은 또 어찌나 영그는지
이 행을 결코 잉태하지 못했겠지
이 생에 내가 잉태되지 않았다면!

삶이여, 너는 참으로 알지 못한다
너를 어느 것에 견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솔방울을 하나 만들고 나서
똑같은 솔방울을 하나 더 만들 수 없으니

나는 너의 독창성을 찬양한다
관대함과 유연함과 정확성을,
그리고 정연함을-가히 마법과
마력에 가까운 선물들을

나는 너를 언짢게 하고 싶지 않다
놀리거나 화나게, 성가시게, 귀찮게도.
수천 년간 나는 노력했다
내 미소로 너를 달래려고

나는 삶의 잎자락을 붙잡고 매달린다
제발 날 위해 한 번만 멈춰주겠느냐
무엇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는지
잠깐이나마 망각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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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이 건강하고 균형적인 삶의 길일지도!


[본문발췌]

"모든 죽음은 폭력적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잠자다가 조용히 생애를 마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고 싶어하지만, 그런 상상과 달리 자연사 같은 것은 결코 없다. 나는 그런 것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 클로드 란즈만


종으로서 보면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나은 삶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가 사는 햇수는 늘어났지만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늘어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살 만한 삶 자체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대다수는 100세까지 살게 될지를 생각할 때면 여전히 "그런 일은 없기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지막 수십 년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아 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시간에 결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소 호흡기와 온갖 약물. 엉덩뼈 골절과 기저귀. 화학요법과 방사선요법. 수술 또 수술. 그리고 의료비. 맙소사, 그 엄청난 의료비.


생물의 몸이 이기적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하는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는 세계에서는 자연선택이 불멸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개체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모든 종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에 가용 자원을 번식이나 수명 중 어느 한쪽에 할당되도록 진화해왔다. 양쪽에 다 투자할 수는 없다.


노화의 징표들 :  영양소 감지 교란, 단백질 항상성 상실, 세포 내 의사소통 변형, 줄기세포 소진, 텔로미어 마모,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 세포 노화, 후성유전학적 변형, 유전체 불안정(DNA)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장수 유전자들을 활성화할 수 있는 스트레스 요인들이 많다. 특정한 유형의 운동, 간헐적 단식, 저단백질 식단, 고온과 저온 노출 등이 그렇다. 이렇게 약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몸이나 세포가 반응해 활성을 띠는 현상을 "호르메시스hormesis"라고 한다.  호르메시스가 일어나면 장수 유전자들이 활성화할 때 생기는 약간의 스트레스가 몸 방어 체계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숨죽이고, 보존하고, 좀 더 오래 생존을 도모하라고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장수의 출발점이다.


인간과 효모는 진화적으로 10억 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효모는 우리와 유전자의 약 70퍼센트가 같다. 그리고 효모가 그런 유전자로 하는 일은 우리가 똑같은 유전자로 하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처럼 효모 또한 거의 언제나 2가지 중 하나를 하려고 시도한다. 먹으려고 하든지 번식하려고 애쓴다. 즉 늘 먹이를 추구하거나 번식을 추구하느라 바쁘다. 효모도 사람과 흡사하게 늙어 가면서 행동이 굼떠지고 더 커지고 둥글어지고 번식을 덜 한다. 그러나 인류가 이 과정을 수십 년에 걸쳐서 거치는 반면 효모 세포는 일주일 안에 겪는다. 그래서 효모는 노화를 이해하려는 연구의 좋은 출발점 역할을 한다.


"후성유전적 잡음epigenome noise"은 바로 이 같은 유형의 혼란을 일으킨다. 이 혼란은 대체로 DNA가 끊기는 일처럼 세포에 심한 손상이 일어남으로써 생긴다. 마그나 수페르스테스의 원초적 생존 회로에, 그리고 번식 능력을 잃은 늙은 효모 세포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혼란이다. 그리고 '노화의 정보 이론'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늙는 이유다. 머리가 세는 이유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며, 관절이 아프기 시작하는 이유다. 나아가 줄기세포 소진과 세포 노쇠에서부터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과 텔로미어의 빠른 단축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노화의 징표가 나타나는 이유다.

젊음 -> 끊긴 DNA -> 유전체 불안정 -> DNA 포장과 유전자 조절(후성유전체)의 교란 -> 세포 정체성 상실 -> 세포 노화 -> 질병 -> 죽음


우리는 노화가 중년에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무렵이 되면 몸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바스 시계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째깍거리기 시작한다. 


노화의 이 모든 증상들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DNA 손상 신호의 결과로 나타난 후성유전적 변화 때문에 생기고 있었다.
서투인을 비롯한 후성유전 인자들이 유전자를 떠나 DNA가 끊긴 자리로 가서 수선을 한 뒤에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늙게 하는 원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곳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들이 늘어난다. 아이스 생쥐를 다룰 때 말했듯이 DNA를 끊어서 생존 회로가 대처하도록 만들어 후성유전체를 교란할 때, 우리는 잡음을 도입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경관을 침식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쥐의 몸은 잘못 안내되어서 기능 이상이 일어난 세포들의 키메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노화다. 이 정보 상실이 바로 우리 모두를 심장병, 암, 통증, 쇠약, 죽음의 세계로 이끈다.


노화는 갈수록 높이가 높아지고 간격도 점점 짧아지는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면서 빠르게 달리는 장애물 경주에 더 가깝다. 우리는 결국 이 장애물 중 하나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또다시 넘어질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질 뿐이다. 장애물 하나를 치운다고 해서 앞에 놓인 길이 실제로 덜 위험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 질병의 치료에 초점을 맞춘 현행 해결책들이 우리의 건강수명을 늘리는 쪽으로 큰 발전을 이룬다는 측면에서는 효과가 거의 없을뿐더러 비용만 많이 드는 이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장애물을 쓰러뜨릴 의학이다.


50세에 다다르면 우리는 머리가 세고 주름이 늘면서 자신이 부모와 닮아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65세에 다다랐을 때 아직 질병이나 장애가 없다면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80세까지 산다면 어떤 질병에 시달리느라 삶이 더 힘겹고, 덜 편안하고, 덜 즐거울 것이 거의 확실하다. 85세에 남성은 평균 4가지 질병, 여성은 5가지 질병에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심장병과 암, 관절염과 알츠하이머병, 신장질환과 당뇨병 등이다. 또 대부분은 고혈압, 허혈심장병, 심방세동, 치매 등 아직 진단을 받지 않은 질병을 몇 가지 더 지니고 있다. 노화는 이 모든 것들을 일으키는 어떤 위험 요인이다. 아니, 실제로 '바로 그' 위험 요인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온갖 요인들은 사실 하찮다. 흡연이 암에 걸릴 위험을 5배 증가시키지만 50세가 되면 암에 걸릴 위험이 100배 증가한다. 70세가 되면 100배로 증가한다. 이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확률은 심장병에도 적용된다. 당뇨병에도 적용된다. 치매에도 적용된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세계에서 국민이 노화와 싸우는 일을 돕기 위해 의미 있는 수준으로 자원을 쓰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것이 거의 없는 듯한 세상인데, "인생은 본래 그런 거야"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듯이 보인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법

  • 적게 먹어라. 절식(단식) -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우리 대부분이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몸을 결핍 상태로 두는 것 - 은 분명히 우리의 건강과 장수에 좋다.
  • 간헐적 단식 또는 주기적 단식. 
  • 육식을 줄여라.
  • 땀을 흘려라.
  • 몸을 차갑게 하라.
  • 후성유전적 경관을 흔들지 마라.



건강을 증진시키는 다른 많은 분자들과 그 화학적 유도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에서 다량 생산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포도에서 레스베라트롤을,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을, 갈레가(프랑스 라일락)에서 메트로포르민을, 녹차에서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를, 과일에서 케르세틴을, 마늘에서 알리신을 얻는다.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은 인간이 그것들을 감지해 자신의 생존 회로를 투입시키도록 경보를 발령하는 이종호르메시스 분자들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 가장 색깔이 선명한 것을 고르자. 이종호르케시스 분자는 노란색, 빨간색, 주황색, 파란색을 띠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이 하나 더 있다. 그런 것들은 대개 더 맛있다. 세계 최고의 포도주는 피노누아르처럼 스트레스에 민감한 품종이나 햇볕이 강하고 메마른 토양에서 생산된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런 포도주에는 레스라트롤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가장 맛좋은 딸기는 물이 부족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잎채소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다 알듯이 열기와 추위 모두에 노출된 양상추가 가장 잘 자란다. 흔히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조건에서 기르는 유기농 식품이 왜 몸에 더 좋은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3가지 주요 장수 경로. 역경을 겪는 동안 생존 메커니즘을 활성화함으로써 몸을 보호하도록 진화한 경로들이다. 저열량이나 저아미노산 식단 또는 운동을 통해 이 경로들이 활성화되면 생물은 더 건강해지고 더 질병 내성을 띠고 더 오래 살게 된다. 라파마이신, 메트포르민, 레스베라트롤, NAD 증진제 등 저열량 식단과 운동의 혜택을 흉내 내어 이 경로들을 자극하는 분자들은 다양한 생물들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우리는 아날로그며, 그래서 늙는다. 노화의 정보 이론'은 세포가 젊음의 정보를 상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늙고 병에 잘 걸리게 된다고 말한다. DNA는 정보를 오래가는 디지털 형식으로 저장하는 반면, 후성유전체는 아날로그 형식으로 저장하기 때문에 후성유전적 "잡음"이 늘어나기 쉽다. 1990년대의 DVD 플레이어에 비유하면 딱 좋다. 정보는 디지털이다. 움직이면서 그 정보를 읽는 판독 장치는 아날로그다. 노화는 디스크에 점점 늘어나면서 정보를 제대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긁힌 자국과 비슷하다.


후성유전적 재프로그래밍은 늙은 생쥐의 시신경을 재생하고 시력을 회복시킨다. '노화의 정보 이론'은 노화가 돌연변이로 유전 정보를 잃어서가 아니라 후성유전 정보가 상실되어 일어난다고 예측한다. 생쥐에게 Oct4, Sox2, Klf4라는 재프로그래밍 유전자를 감염시켰을 때 일어나는 세포의 노화 역전에는 TET 효소가 관여한다. 이 효소는 DA에 붙은 메틸기 꼬리표 중 적절한 것들만 제거함으로써 노화 시계를 되감고 세포가 살아남아서 신생아처럼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어느 꼬리표가 젊을 때의 것인지를 이 효소가 어떻게 아는지는 수수께끼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클로드 새넌의 "관찰자", 즉 원본 데이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에 해당한다.


우리 세상을 더 친절하고 더 관용적이고 더 포용적이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한결같은 추친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너무 오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7년 사망하기 직전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편을 설득해 그들이 그 빛을 보도록 함으로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편이 결국은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진리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면서 이기는 것이다."


평등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갑부들이 자녀뿐 아니라 반려동물마저 가난한 사람의 자녀보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위태로운 세계가 정말로 출현할 것이다. 부자와 빈자가 단순히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인간 삶을 정의하는 방식 자체를 통해 분리되는 세계, 부자는 진화하도록 허용되고 빈자는 뒤처지지는 세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잠재력이 우리 세계의 가장 끔찍한 문제들 중 일부를 악화시킨다고 해도 -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젯거리들을 안겨줄 것이라고 해도 - 나는 낙관한다. 이 혁명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꿀 것이라고 여전히 낙관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노동 시장은 나눌 수 있는 조각이 한정된 피자가 아니다. 누구나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노동 시장에 참여하는 나이 든 남녀가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사회 보장 제도가 파산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최고의 처방이 될 수 있다. 사회 보장 제도를 잘 유지하는 과제의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더 오래 일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통해 목적을 추구할 기회와 활력을 수십 년 더 누리는 데 따르는 보상, 존경, 혜택을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숙련도가 좀 떨어지는 사람까지 포함해 생산력이 있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최고의 방법은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을 고용하는 기업을 만들거나 유치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번영을 누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원한다면 예산을 줄이고, 젊은이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퇴직 연령을 낮추고, 노령자의 의료비를 삭감하는 일을 하지 말기 바란다. 대신에 인구를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유지하고, 교육과 혁신의 장벽을 모두 타파하기 바란다.


"과거를 잊고,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아주 짧고 초조한 법이다." - 세네카. 
그는 삶을 음미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간이 "아주 값싸게 ...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라며 한탄했다.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한다."


미국이 노화 연구에 쓰는 예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라고해도 다른 대다수 선진국의 상황에 비하면 낫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지원조차 안 하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이 노화를 본모습, 즉 인구의 약 90퍼센트를 죽이는 질병이 아니라 삶의 불가피한 일부라고 보는 기존 견해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노화는 질병이다. 너무나 확실하기에 이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양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계속 하련다. 노화는 질병이라고, 게다가 질병일 뿐 아니라 만병의 어머니다. 우리 모두가 걸리는 질병이다.

미래를 살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려면 삶을 연장하고 보호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오용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모두가 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의사는 50세인 환자를 진료할 때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덜 아픈" 상태로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의료의 향방을 결정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 2가지가 있다. 나이와 경제력이다. 나이는 의사가 환자에게 알리고 논의하려는 치료법의 종류까지 제한할 때가 많다. 환자의 신체 활동이 줄어들고, 이미 얼마간 통증을 안고 살며, 시간이 흐를수록 몸 여기저기의 기능이 떨어질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은 논의를 더욱 제약한다. 어떤 치료법이 환자의 삶을 얼마나 개선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며, 더 나아가 마음을 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의료 체계는 연령차별에 토대를 둔다. 젊을 때는 나이 먹었을 때 건강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치료를 받지 않는다. 나이 먹었을 때는 젊을 때 의례 하던 치료를 받지 않는다.


현재 우리 대다수가 죽는 방식은 야만적이다. 우리는 긴 세월에 걸쳐 쇠퇴한다. 그리고 통증, 슬픔, 혼란, 두려움을 겪는 기간을 연장함으로써 더욱더 많은 통증, 슬픔, 혼란, 두려움을 겪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은 더욱 오래 슬픔, 희생, 동요를 느끼면서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직하면 사랑하는 이들은 안도할 때가 많다. 대다수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노화 연구를 하는 대대수는 노화와의 싸움이 죽음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건강한 삶을 연장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훨씬 더 나은 상태에서 - 사실상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빠르고 고통 없이. 준비가 되었을 때.


소비가 "자원과 생태계에 가하는 압력이 인구 성장보다 2배나 많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 조지 몬비오


우리가 소비 때문에 멸종한다면 더 길고 더 건강한 삶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수명을 늘리든 말든 간에 우리 생존은 소비를 덜하고, 혁신을 더 이루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는 데 달려 있다.


더 공감하고, 더 온정을 베풀고, 더 용서하고, 더 정의로워야 할 것이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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