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본문발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이유理由를 아는 것은 이치理致를 아는 것이라 할만하다. 존재하는 것을 물物이라 하면, 존재의 이유는 사물의 이치이고, 우리는 이것을 물리物理라 부른다. 
 
과거의 학자나 지식인은 세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세상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이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하늘은 우주와 법칙, 바람은 시간과 공간, 별은 물질과 에너지로 다가온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원자들은 서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어야 할 곳과 움직임 그리고 가야 할 곳에 대한 생각으로 섬세한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 종교 회의를 개최하지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방법으로 뒤섞이고 뒤범벅이 되는 끝없이 계속되는 그런 일에 의해서 서로 부딪히고 몰려다니면서 모든 가능한 움직임과 조합이 이루어진다. 결국 원자들은 이 우주가 만들어지는 데에 필요한 그런 배열을 갖추게 된다.' -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나'라는 원자들의 '집합'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나를 이루던 원자들은 다른 '집합'의 부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주의 일부가 되어 영원불멸한다.
 
 
'물질을 정복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고귀하고 경건한 한 편의 시이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원자 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과 일상을 설명하는 뉴턴 역학의 경계에 무엇이 있는지, 원자들의 집단이 어느 정도 크기가 되어야 일상의 물체처럼 행동하는지, 정말 크기가 중요한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이것은 '측정 문제'라는 양자역학 역사의 지긋지긋한 논쟁과 관련 있다. 
 
돌멩이의 낙하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으로 계산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돌멩이가 언제 떨어질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원자를 설명하려면 양자역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동을 원자로부터 이해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세포, 세포에서 인간으로 층위가 바뀔 때마다 이전 층위에서 없던 새로운 성질이 창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층위에 따라 다른 법칙을 적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많은 것은 다르다. More is different.
 
 
'나는 진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었다. 흙이 말한다. 왜 당신은 나를 건드리는가? 그대와 나는 둘 다 같은데. 비록 일부가 가라앉고 일부는 떠올라도 우리는 모두 단지 흙일 뿐이다.' - 오마르 하이얌.
우리는 죽으면 흙으로, 즉 지구로 돌아간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이다. 이렇게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거대한 것일수록 보다 더 작은 것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자들이 지배한다. 지구상 생물은 포도당 분자를 산화시켜 이산화탄소와 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이는 탄소, 산소, 수소 원자가 배열을 바꾸는 사건이다. 이때 원자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더구나 원자핵 내부에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
 
 
우주는 시공간상에서 물질이 운동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연극이다. 물질의 운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지구상 모든 물질이 운동하는 원인, 즉 에너지의 근원을 추적하면 태양에 다다른다. 태양은 원자핵의 융합에서 나오는 열로 불타오른다. 이렇게 우리는 별과 연결되고, 별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원자핵과 연결된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핵은 변하지 않는 물질의 토대가 되지만, 별의 원자핵은 쪼개지고 합쳐지며 우주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어떤 원자핵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는 또 다른 원자핵으로 만들어진 물질들의 움직임을 추동한다. 이렇게 우주는 원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다.
 
 
같은 원자들이 모여 배열하는 방식에 다라 세상의 온갖 다양한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많은 이가 동의하는 생명의 속성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며 번식을 통해 '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와 복제, 이 둘의 결합이 생명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잠시 생명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은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생명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닐까? 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며 생명은 더없이 경이롭고 삶은 더욱 소중하다. 이 기적 같은 찰나의 시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낭비하거나 남을 미워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이며, 진화란 이러한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Chance and Neccessity)
 
 
생명의 핵심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것이다. 복제, 번식, 진화도 일단 생존해야 할 수 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에서 자신을 보존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지구상의 동물은 호흡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걷고 숨 쉬고 생각하고 번식한다. 한때 이 에너지를 신비한 생명의 기운 같은 것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호흡으로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은 연쇄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 우리는 화학 반응이 이렇게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살아 있다고 말한다. 생명에 쓰이는 원자는 무생물에 쓰이는 원자와 동일하다. 생명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생물은 정교한 생화학 기계다. 이 기계는 수많은 원자로 되어 있고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 수많은 원자가 관여하는 이상 실수는 반드시 일어난다. 예측 불가의 불확실성은 원자 세계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에 내재된 본질적 특징이다. 제법 큰 규모의 원자 기계에서는 열역학적 요동이 실수의 이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류가 누적되고 고장이 잦아지다가 생화학 기계는 결국 작동을 멈춘다. 우리는 이것을 '죽음'이라 부른다.
 
 
생물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DNA, RNA, 단백질 모두 원자로 되어 있고, 이들 사이의 화학 반응은 양자역학에 따라 작동한다. 화학 반응을 지시하는 존재는 따로 없다. 충분히 많은 분자가 빠른 속도를 갖고 무작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원자 수준에서 이것을 위한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는듯하다 하지만 수많은 원자들이 모여 생명의 몸체를 이루는 순간, 외부 변화에 저항하며 자신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신의 복제품을 만드는 '것'이 탄생한다. 
 
 
생명은 자신을 복제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DNA에 저장하고 이것을 복제한다. 복제의 전 과정은 물리적이다. DNA로부터 자신을 만드는 과정 또한 물리적이다. 과정에 참여하는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열운동을 할 뿐이다. 모든 과정은 양자역학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생명이 왜 자신을 복제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복제하려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이런 원자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만들어진 원자 구조물이 복제의 특성을 얻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끝없이 복제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학은 우주에 의도나 목적이 없다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생명은 우연히 생겨난 자기 복제 기계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지구 밖에서 다른 생명체를 발견하는 날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외계 생명체의 화학 체계가 지구의 생명과 유사하다면 생명의 보편 원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세계관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다. 생명의 힘은 애초에 단 하나의 생물에 불어넣어졌을 것이다. 지구가 단순하고 변하지 않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질학적 순환을 하는 동안, 생명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체들이 무수히 진화했고 또 진화해가고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사랑은 하나의 점이다. 선이나 면처럼 이어져 존재하지 않고, 찰나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타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 사랑은 휘발되고 없다. ... 사랑의 시작을 여는 필수조건에는 '실수'가 있다. 그 실수를 우리는 '운명'이라고도 말하고, '필연'이라고도 말하지만,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실수일 뿐이다. .. 실수의 첫 발이 사랑을 점화시킨다. 그 실수는 이후, 가장 특별한 것, 가장 현명한 것, 가장 필연적인 것으로 미화된다. 미화하는 힘 자체가 사랑의 힘인 셈이다.' - 김소연, <마음사전>
 
 
'인생의 목표가 행복인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나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행복은 지속 가능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주는 일이야.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중요하고 사소한 약속들을 지켰다는 증거였다.' -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무한은 숫자가 아니라 과정이다. 끝없이 커져가는 과정이다. 점은 무한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존재다. 따라서 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사랑이 점이라면 사랑도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어떤 사건이 한 사건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간이 가진 특별함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생각, 형태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무형의 상상에 있다. 바로 인간의 문화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인간만의 문화를 만들었고, 문화를 통해 지구 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포유동물이 되었다. 인간다움은 문화에 있지만 문화의 이름으로 강요된 악습과 억압은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제 문화의 산물인 과학이라는 방법론은 인간이 상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도록 이끌고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인과적 설명을 끌어들이는 건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무언가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생각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미 일어난 진화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인과적 설명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주체가 인간이다 보니 진화사를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이 진화의 목표였다는 설명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언어를 이용할 수 있어 인간의 사회는 다른 동물의 사회보다 더 강력하고 정교한 소통이 가능하다. 인간은 더 깊은 공감, 더 강한 협력을 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읽기에도 능하다. 나아가 가상의 스토리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는 허구를 믿는 능력과 관련 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지폐'는 색칠한 종이 쪼가리다. 하지만 지폐가 가진 허구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 경제는 즉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도덕과 윤리도 그것이 왜 옳은지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지 않는 순간,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세상은 기본 입자에서 원자, 분자, 생물, 지구, 태양, 우주로 이어지는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다. 각 층위는 자기만의 창발된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의 층위를 그것을 구성하는 하위 층위의 특성으로 쉽게 환원할 수 없다. 각 층위의 개별 특성을 알고, 이웃한 층위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고, 전체를 조망할 때에만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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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보라, 분홍, 빨강, 핑크...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선물.
 
 
[본문발췌]
 
 
철쭉은 자신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절제'라는 꽃말을 갖게 되었다.
'지식과 절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무엇이 선한지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무엇이 나쁜지 알고 그것을 피하는 사람은 배움과 절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 <사상의 보고: 고대부터 현대 작가들의 인용구 백과사전> (1884)
 
 
멀리서 반짝이는 너는
예쁜 별과 같지.
네 머리 위 하늘의
많은 별들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하지만 반짝이는 투구 장식을 단 별처럼
가만히 쉬면서도 침착하게 균형을 잡는다.
너를 책망하는 누군가 있다면
그의 보금자리에 평화가 오지 않기를!
- 윌리엄 워즈워스, <데이지에게> (1837)
 
 
하늘의 무한한 초원에서 하나씩 하나씩 소리도 없이,
사랑스러운 별들, 천사들의 물망초들이 꽃을 피운다.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반젤린: 아카디 이야기> (1847)
 
 
'행복은 물건이 아니라 취향에 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걸 가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해진다.' - 프랑수아 드 로슈푸코, <잠언집> (1665)
 
 
그것은 허리 굽혀 예쁜 종처럼 꽃을 피운 히아신스다. 세포에서 나는 진한 향기로 꽃이 늘어졌고, 향기롭게 축 처진 그림자 가운데 기억 그 자체가 그림자가 되어 드리운다. - 레티티아 엘리자베스 랜던, <사랑스러운 꽃들>(1837) 중 '히아신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고
기억과 욕망을 한데 섞고
윤기 없는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일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를 줬어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죠."
-- 하지만 밤늦게 히아신스 정원에서
꽃을 한 아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다는 향량하고 쓸쓸하다(Oed' und leer das Meer).
- T. S. 엘리엇 <황무지> 중
 

황혼의 땅, 신비로운 꿈에서
어두운 오시리스가 일어서는 곳에서,
그것은 그의 신성한 시냇가에서 피었다.
세상은 아직 젊었다.
그리고 자연이 말한 모든 비밀은,
금빛 지혜의 힘으로,
여전히 연꽃 속 모든 접힌 곳에 둥지를 틀고 있고, ...
- 윌리엄 윈터, <방랑자들: 윌리엄 윈터 시 모음집>(1889) 중 '연꽃'
 
 
여기 당신을 위한 꽃이 있군요. 뜨거운 라벤더, 민트, 세이버리, 마조람. 그리고 태양과 함께 잠자리에 들며, 늘어진 채 태양과 함게 일어나는 마리골드. - 윌리엄 셰익스피어, <겨울 이야기> 4막 4장 103행
 
 
'분노에서 시작된 일은 결국 수치로 끝난다.' - 벤저민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
 
 
만병초여! 현자들이 어째서
너의 매력이 땅과 하늘까지 낭비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에게 말하라, 만약 눈이 무언가 보기 위해 존재한다면
그러면 존재에는 아름다움이 따라온다.
장미의 적수여, 어찌하여 거기 서 있는가!
물어볼 생각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지만
나의 단순한 무지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나를 그곳으로 데려온 똑같은 힘이 널 이리로 가져왔다.
- 랠프 월도 에머슨, <만병초>
 
 
꽃의 가장 좋은 면을 살펴보자. 당신은 장미의 가시를 불평하지만, 나는 장미에 가시가 돋쳤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신들에게 감사한다. - 알퐁스 카, <나의 정원에서 쓴 편지들>
 
 
섣부른 추측으로 겉보기에 쉽게 보이는 것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어려워 보이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 용기를 잃고 좌절해서도 안 된다. -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유니버설 매거진>(1765) 중 '도덕의 여러 주제에 대한 성찰'
 
 
'바람이 촛불을 끄고 불을 지피듯이 결핍은 작은 열정을 줄이고 큰 열정을 북돋는다.' -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잠언집>(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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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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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결핍은 그 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소중함을 알게해준다.
 
 
[본문발췌]
 
 
세상에 사랑하는 것들이 많으면 한때 사랑했던 것을 잃어도 다시 빈자리를 메울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실을 넘어서는 발전들이 이뤄진다.
 
 
복잡하고 흔치 않은 병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것이다. 내게는 절실한 대답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만큼 절실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급하다고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급해지지 않는다. 나의 곤경은 내게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나의 구원자들에게는 잠시 미뤄 둘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똑같이 다급한 사례들과 똑같이 간절한 탄원자들을 상대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그들의 냉담함에 대한 완벽한 변명은 못되더라도 최소한의 설명은 된다.
 
 
물론 내 이야기는 새벽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황혼에 관한 이야기다. 낮은 영원하지 않으며 빛은 가차없이 사그라든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이야기다. 인생의 정점에 이르러 우리는 어디선가 빌려온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이야기다. 너무도 달라진 온도와 분위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황혼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풍부하며 아름다울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내 세계는 흐릿해졌지만 동시에 예리해졌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내쉬었다. 나는 새로운 걱정들을 인사로 맞이하고 과거의 걱정들에 작별을 고했다. 한 친구는 내 상황을 재치 있게 한 줄로 요약했다. "한쪽 눈이 감기면 다른 쪽 눈이 뜨인다."
 
 
나는 한쪽 눈으로 더 열심히 더 오래 바라보았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전보다 정성껏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보고,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의례적인 질문만을 한다. 그들을 여러 조각으로 편집해 그중 가장 덜 복잡하고 가장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부분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우리가 충분히 추앙하지 않은 승리가 있다.
 
 
진정한 불운을 마주하고 나서 과거를 돌이켜보니 그 시간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 시간은 어리석은 분개로 점철되어 있었고 무의미한 앙심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게 열린 도로보다 닫힌 도로를 밟으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비뚤어진 시선 속에서 모욕으로 여긴 것들의 총계를 냈다. 시살 아무 걱정할 게 없을 때도 내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만이 있었다.
 
 
"삶이란 상실에 적응하는 일입니다." 삶의 도전은 상실에 적응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는 판단력과 품위를 키워서 상실은 불가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삶의 유일한 궤적임을 아는 것이다. 삶의 도전을 마주하고 가늠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있고 그중에는 위안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잘 살기 위한 비결, 가끔은 살아남기 위한 비결인 셈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실명을 짐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실명을 개성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외모에 만족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수도 있습니다. 키가 더 컸으면, 좀 더 날씬했으면 하고 바랄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 이대로의 내가 나입니다. 내게 실명은 정확히 그런 것이었습니다." 후안은 내게 말했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보이지 않음의 장점을 온전히 누려왔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통제력이 별로 없지만, 그 사건들 무엇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다. 후안 호세는 시력을 바로잡을 수 없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빚어낼 수는 있다. 후안은 만족감과 충만감, 자긍심을 위해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주제에 밑줄을 그을 수 있다. 후안은, 아니 우리 모두는 정확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고난에 처하는 방식에서 무엇을 얻을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각각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얻는다.
 
 
신체적 쇠퇴는 노화에 따라 가속화 한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운이 좋아서 장수한다는 것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나는 인생의 광고판 이론을 언급했다. 사람들이 어깨에 진 짐을, 그들이 억누르는 두려움을, 그들이 감추는 흉터를 잠깐만이라도 알아봐준다면, 우리는 각자가 경험하는 불운과 모욕감에 덜 사로잡힐 거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분과 잘못을 더 이해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야망에 쫓기는 일벌레가 되지 말 것이며 긴장을 풀고 한숨 돌릴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어떤 경험을 뒤로 미루는 것은 종종 그 경험을 결코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연만큼 우리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가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는 찬란함의 원천은 없다. 우쭐하고 득의만만한 우리 인간들이 이처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연히 여기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만큼 훌륭한 위안은 없다.
 
 
누군가를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가끔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알게 되어 행복했다. 누군가에게 평범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새로운 발견일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을 나누는 것이 삶을 끝없는 선물의 교환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되새기게 되어 행복했다. 
 
 
일과 사랑과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 다른 각도가 있다. 수많은 도로와 이동 수단이 있다. 한 가지가 닫히면 다른 것을 이용할 수 있고, 심지어 이견의 여지가 없는 희생조차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일종의 방향 전환일 수 있다. 이따금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내가 앞 챕터에서 언급했듯이 한계나 상실은 우리가 모색하지 않았을 실험, 우리가 습득하지 않았을 능력, 우리가 알지 못했을 통찰로 가는 관문이 된다. 우리는 그저 그러한 전망을 허용하고 그러한 관점을 우아하게 내것으로 취해야 한다.
 
 
"내 마음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빚으려는 노력을 멈추었습니다."
 
 
조너선 라우시는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에서 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 50세 이상의 사람들이 강점을 보이는 심리적, 정서적 습관을 열거했다. "현재에 살기.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긍정성의 진가를 음미하기. 부정적인 것을 덜 생각하기. 받아들이기. 과잉반응하지 않기.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기.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들이나 관계를 우선시하기." 이것들은 다양한 연령을 대상으로 자기 자신고 환경에 관한 느낌을 묻는 조사에서 나이 든 사람들이 말한 행복 쌓기 블록에 해당한다. "삶의 만족도에 평점을 매기라고 했을 때 60대와 70대 응답자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고 80대에서 살짝 감소했다." 라우시는 말했다.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심리학과 마케팅을 가르치는 노버트 슈워츠는 사람들의 행복은 신체 조건이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무엇을 중시하는지, 자신에게 허용된 가능성 내에서 무엇을 성취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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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원칙을 지키며 선택과 집중, 분산의 균형을 유지하고 완벽함 보다는 변동성을 즐기며 감정을 통제하는 시간 투자가!
 
 

[본문발췌]
 
수년간에 걸쳐 곱씹어본 이때 경험을 토대로 두 가지 원칙을 세울 수 있었다.
  • 첫 번째 원칙은 가치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점이다. 이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상품이나 주식을 매매할 때 그 가치가 오래 지속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 첫 번째보다 비중이 더 큰 두 번째 원칙은 시장 추세와 동향이 중요하기는 하나 투자 자원을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이다. 예측했던 시장 움직임이 정확히 언제 나타날지는 누구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시장 예측이 완전히 틀리기보다는 예측의 실현이 지연되곤 한다. 신중한 트레이더는 이렇게 예측 실현이 지연되는 상황을 감안해 매매 계획을 수립한다. 반드시 알아둬야 할 원칙 가운데 자금 관리에 관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 듣기에도 끔찍한 대실패는 대개 단일 매매에 쏟아부은 자금 규모가 너무 컸거나 손실 포지션을 너무 오래 유지한 데서 비롯됐다.
 
 
투기는 이기는 데 유리한 전략을 개발하고, 승산을 높이고, 승리 전략을 구사하고, 새로운 참여자 혹은 새로운 생각과 개념을 포함해 그 게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임이다. 투기 기술의 근간은 약간의 '관찰'과 상당량의 '보존'으로 이뤄진다.
 
 
매매 포지션의 규모가 너무 크거나 지분이나 계약의 수가 너무 많으면 사소한 손실로도 낭패를 볼 수 있다. 미래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은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승산이 별로 없는 게임을 시작할 때 이런 식이면 완패로 가는 지름길로 들어설 뿐임을 명심하라.
 
 
돈을 벌려면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에서 해야 하고 주사위 던지는 횟수도 되도록 줄여야 한다. 매매 횟수가 늘어날수록 투기적 농간에 휘둘릴 기회가 그만큼 늘어난다. 다시 말해 결정을 많이 할수록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나 투기 매매는 가격 변화에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분명하고 뚜렷해 보이는 주기는 매우 강력하고 유의미한 시장 요소다. 가격 변동폭이 클수록 이익이 날 가능성도 커진다. 가격 변화가 없거나 변동폭이 미미하다면 가격 추세라는 것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투기자가 시장에 들어갈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
 
 
시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격 변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나날에 좌절을 느끼며 평정심이 무너지기 쉽다. 가격폭이 점점 줄어들고 매매 기회가 다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잃고 거의 패틱 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한다. 대다수가 현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에 갑갑함을 느끼는 바로 그때 작은 가격폭이 큰 가격폭으로 전환되는 '마법'이 발생한다.
 
 
투자 이익의 보편적 규칙: 이익을 늘려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올바로 판단하고 게다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까지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 제시 리버모어
 
 
매매 방식은 항상 변화하지만, 올바른 매매 규칙은 항상 똑같다. 규칙에 어긋나거나 겸손함을 잃거나 게으름을 피울 때는 어김없이 손실이 난다.
 
 
가격 변동의 이유는 매수하고 매도하는 주식이나 선물 계약의 양 때문이 아니다. 그 양은 결국 균형을 이루게 마련이다. 가격 변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어떤 형식으로든 매도인과 매수인 중 한쪽에 생긴 공백 혹은 부재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등식에서 한쪽 항이 매매 포지션을 취하고 싶다면 가격 상승 시 매수하고 하락시 매도하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등식에서의 불균형이 가격 변동을 일으키는데 이때의 불균형은 매매량의 불균형이 아니라 '속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매매를 원하는 쪽, 그것도 급매매를 원하는 쪽이 가격을 상승 혹은 하락시키는 역할을 한다.
 
 
추세는 모든 매매 및 투자 이익의 기초다. 추세가 없으면 이익 발생원도 없다. 추세는 시간의 함수다. 즉, 시간이 만들어내는 기회다. 매매에 참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추세를 포착할 기회가 늘어난다.
 
 
시간 요소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펀더멘털의 뒷받침이 보이지 않으면 누가 뭐라 해도 시장에 진입하지 않는다. 좋은 매매 기회는 많다. 그러므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요소가 하나 있더라도 이 하나만을 믿고 매매에 나설 이유는 없다. 손실을 낼 확률만 높아질 뿐이니 말이다.
 
 
바보라도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싸움을 하는 것과 이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매매를 시작하기는 쉽다. 바보라도 시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익이 나는 지점에서 알맞게 포지션을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투자의 기술이란 결국 미래를 예측하는 작업에 관한 것이다. 미래는 애초에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모든 투자 예측은 선택, 타이밍(시점 포착), 관리 등 세 가지 요소를 수반한다.
 
성공적인 투기자는 기다리는 게임을 한다. 반면 대다수의 투자자는 기다리지 못한다. 그저 빠를수록 좋다면서 덤비는 사람이 태반이다. 노련한 투기자는 때가 왔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는 참고 기다리며 행동을 미룬다. 그래야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매매 관리는 자금 관리의 영역을 뛰어넘는다. 매매 포지션을 얼마나 유지하느냐, 이익을 얼마나 취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트레이더의 감정 조절 및 통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과다 매매 혹은 과소 매매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적절한 행동을 하고 매매하는 동안 감정 상태를 제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매매 방법을 안다는 것이 곧 매매에서 '이익을 내는' 방법을 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릇 매매의 기술은 선택과 시장 진입 기법을 자금 관리 요소와 결합하는 작업이다. 선택이나 개별 매매 기법도 중요하지만, 정말 뛰어난 트레이더는 이런 기법의 사용 및 통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매매 관리야말로 시장 이익을 극대화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너무 잦은 매매 횟수와 너무 많은 계약 수는 트레이더를 압살할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 부자는 거액을 베팅하지 않으며 매일 베팅하지도 않는다. 인내심은 조급함이나 허세가 아니라 진정 때가 왔을 때 행동하도록 흥분 수위를 조절해준다. 투기는 산탄총을 난사해서 한두 마리 얻어 걸리면 좋은 그런 게임이 아니다. 풀숲에 숨어 기다리다가 사냥감이 확실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단 한 발로 쏟아 맞추는 게임, 그것이 투기다. 인내심이 없는 트레이더는 헛되이 총알을 난사하며 돈도 감정도 소모해버린다. 그래서 막상 한 발이 필요할 때는 탄창이 비어서 쏠 수가 없다. 이보다 난감하고 속상할 때가 또 어디 있을까!
 
 
 
두려움과 욕심의 딜레마.
  • 욕심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주저하는 사람을 일으켜세워 경솔한 행동을 하게 하고, 매매 포지션을 너무 오래 보유하게 하고, 과도한 매수를 하게 하는 등의 적극적인 힘이 바로 욕심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 있으면 그런 감정이 혹여 보상보다 손실이 더 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시해야 한다.
  • 두려움은 다르다. 두려움은 욕심과는 정반대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요컨대 욕심은 시장에 진입하지 말아야 할 때 덤비게 하고, 두려움은 진입해야 할 때 주저하게 한다.
  • 두려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 왜 생기는가에 관한 부분이고 두 번째는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낳느냐에 관한 부분이다. 두려움의 원인은 '모름'에 있다. 뭐가 뭔지를 모른다는 데서 두려움이 생긴다. 두려움을 잠재우려면 미래를 전망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라. 그러면 시장 상황에 대해 반사적 반응이 아닌 효율적 대응을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두려움은 거짓을 낳는다. 트레이더는 특히 자신의 배우자에게 매매 결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부정과 거짓으로 꾸며진 꿈의 세상을 헤맨다. 이 사람들이 현실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적당한 두려움과 자신감에서 배짱이 나온다. 이익을 내는 성공적 트레이더는 대범하게 행동한다. 대범함은 자신감과 두려움, 배짱이 절묘하게 조합된 결과물이다. 이익을 노리고 뛰어든 투기 시장에서 정교한 계획을 세워 과감하게 추진하면 결국은 성공에 이르게 된다.
 
 
 
투기의 세계에서 큰돈을 벌려면 자신에게 유리한 게임 상황에서 들어가고, 그 유리함이 계속 이어져야 하며, 매매에 투여할 자금 규모에 대해 일관되고 타당성 있는 접근법을 활용해야 한다.
 
 
과도한 양을 너무 자주 매매하고 또 너무 과한 금액을 투자하면 최악의 시장 상황에서 버틸 때보다 더 큰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손실 매매가 많았던 이유는 시장 진입이 늦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빨리 진입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매매 결정에 감정이 많이 개입될수록 진입 시점이 잘못될 가능성이 커진다. 우리는 손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빨리 행동하는 우를 범한다. 그러니 먼저 충분히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라. 매매로 큰 돈을 벌 기회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너무 빨리 시장에 들어가면 손실 매매로 이어지는 상황을 막지 못한다. 큰돈을 벌고 싶은가? 그렇다면 기다리는 법을 배워라.
 
 
매매에 손절점을 사용하면 적어도 회생 불가한 지경으로 망할 일은 없다. 매매 건당 잔고의 30%만 사용한다면 잔고가 텅 비어버릴 일은 없다. 이성적 매매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은 손절점을 사용하고 매매당 잔고의 일정 비율만 사용하는 것이다.
 
 
욕심은 손실이든 이익이든 현재 취한 포지션을 너무 오래 보유하게 하는 부작용만 따른다. 손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포지션을 청산할 때보다 욕심 때문에 포지션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어서 발생하는 손실이 훨씬 크다. 통제력을 잃고 속도를 낼 때 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바로 욕심 때문에 행동을 머뭇거리는 일이다.
 
 
이익 트레이더는 자신이 '선호하는' 몇몇 시장에 집중한다. 그런데 손실 트레이더는 뭐든 바꾼다. 이 시장에서 저 시장으로 바꾸고 추종하던 권위자나 시황 정보지도 바꾼다. 이익 트레이더는 스스로 연구를 많이 하는 반면 손실 트레이더는 손실이 적게 나게 해줄 혹은 이익이 더 많이 나게 해줄 누군가를 이리저리 찾아다닌다. 이익 트레이더는 자신이 이익을 낼 수 있다고 항상 믿으면서 손실이 나더라도 이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태는 막으려 한다. 이들은 큰 손실로부터 자신을 막아줄 안전 보호막을 두른 채 시장에서 그저 어리석은 짓만 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
 
 
매매 업계에는 반박불가한 두 가지 진실이 있다. 1) 손실을 통제해야 한다. 2) 가격은 예측 불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손절점을 사용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쓰는 매매 시스템이 제몫을 다하지 못해 손실이 발생할 때 그 규모를 줄여 트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시스템이 손실을 발생시킬 위험은 항상 있다. 이런 잠재적 위험 요소가 존재하지 않으면 손절 기제도 필요가 없다. 손절점은 시장 자체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위험으로부터 트레이더를 보호하는 장치다. 매매라는 게임은 예측 불가능성이 매우 높은 행위라서 손절점을 너무 촘촘하게 설정하면 오히려 트레이더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요컨대 손절 기준점과 시장가 간의 간격이 좁을수록 손절점에 도달하는 횟수가 많아진다. 포지션을 더 자주 청산해야 하므로 트레이더가 정신적으로 너무 고달파진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그 누구도 가격 추이를 상세하게 예측하지는 못했다(가격 변동이 무작위로 이뤄지기 때문). 따라서 손절점을 설정할 때는 무작위성을 감안해 시장가와의 간격을 여유 있게 잡아야 한다.
 
 
우리의 매매 전략은 세 단계로 설명할 수 있다. 1) 우선 매매할 시장을 정하고, 2) 시장 진입 시점을 노린다. 3) 마지막으로 손절매, 추적 손절매, 목표 가격 등의 방식으로 포지션을 청산한다.
 
 
경제든 혁신이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지는 법이다. 인생사 모든 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나아진다. 내림세가 있더라도, 이보다 더 큰 폭의 오름세가 있는 법이다.
 
 
그 어떤 것이든 설명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절대 논리로 무장한 집단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시장 상황에 주목하지 않고 이 무적의 논리를 맹신한 채 엉뚱한 곳에 배팅한다는 점이다. 주식이나 상품이 알아서 제 할 일을 해주게 마련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라 시장에 집중하면, 즉 지금 시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둔다면 성공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완벽한 시스템이나 접근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매매를 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살아남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시장 환경이 조성됐고 그 환경이 자신의 매매 규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라. 그러나 규칙이 그 환경에 맞지 않거나 환경이 규칙에 어긋난다면 그냥 넘어가라. 매매를 매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매매를 매일 할 필요는 없다. 시스템이나 매매 규칙을 활용하는 목적은 가장 유리한 성과를 내기 위함이지 그런 도구의 노예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매매는 완벽한 게임이 아니다. 우리는 매매에 수학을 활용하고 또 수학은 완벽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수학을 사용한다고 해도 시장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시장에는 비이성적인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는데 뉴스 충격은 이중에서도 가장 큰 비이성적 사건이기도 하다.
 
 
자신이 바라는 진실과 진짜 진실을 혼동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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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는 소수의 특정 계층이 권력을 독점하고 다수의 자유와 평등, 행복 증진이 아닌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며 다수의 일반을 통제하고 고통과 상실, 비참함을 겪도록 하는 세상이다. 권력을 쥐고 주인 행세를 하며 보호자로서의 역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들은 농민 운동 지도자 자크 카이에의 연설에서 이야기하듯 강도짓에 길든 사나운 폭군, 못된 망나니, 탐욕스런 박해자들일 뿐이다.
 
 
[본문발췌]
 
필립 6세와 장 2세 치하에서 토지 예속은 전례 없이 잔인했다. 온갖 봉건적 권리가 횡행했다. 밀 10파운드를 수확한 농민은 영주와 사제에게 7파운드를 주었다. 전자에게 봉건 십일조, 후자에게는 성무 십일조를 바쳤다. 게다가 농민은 영주에게 현물세 혹은 농지 수입 5분의 1, 농노 각자에게 임의로 부과되는 정액 지대(地代), 종종 한 달에 10일 걸리는 부역, 무거운 조세 그리고 수많은 사용료를 바쳐야 했다. 밤에는 영주 저택을 지켰고, 4가지의 경우에는 영주에게 인두세를 바쳤다. 농노와 봉신은 영주의 볼모가 되어야 했고, 짐 나르는 짐승들처럼 매매되었다. 또한 14세기에는 성직자가 주교구에 말을 타고 부임했는데, 이때 시중드는 남자 3명과 여자 3명을 대동했다.
영주는 초야권을 누렸는데, 15세기 초까지 심지어 신부와 사제, 그리고 주교도 마찬가지로 그 권리를 행사했다. 그들은 소녀들에 대한 권리를 가졌으며, 이를 이용해서 미혼모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망나니권, 판매권, 측량권, 영지 매매권 등을 행사해서 영지에서 거래되는 모든 것의 일부분을 그들이 취했다. 잔재권으로 모든 유기 가축을 차지했고, 그들의 땅을 지나는 통로와 강에 대한 통행세, 겨울에 불을 지피는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인 호별세, 임의 몰수권, 사냥 및 어업세, 기타 잡세 및 인두세, 재미를 위한 농지 유린권을 행사했고, 무역을 가로막는 외국인 재산 몰수권 및 파선권 등을 가졌다. 백성은 죽기 전에 사제의 재산을 늘려주려 하지 않으면 교회 축성지에 묻힐 수 없었다. 혼례를 치르지 않고, 사제에게 결혼 음식을 바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었다. 엄청난 특권을 가진 성직자는 십일조를 정확히 납부하지 않은 사람, 교구를 위해 유산을 남기지 않은 사람, 그리고 수도사가 자식을 출가시키라는 명령을 전할 때 따르지 않는 사람을 파문할 수 있는 권리도 행사했다. 가문의 장자가 아닌 사람들은 장자권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다.
성관은 종종 강도들의 소굴이었다. 루이 성왕 시대에, 행인을 더 이상 강탈하지 않고 위조화폐를 더 이상 발행하지 않기로 했던 영주들은 모두 이전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토지 예속 농노들은 불행을 타고 태어난 초가집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법도, 치안도, 사법도, 풍습도 없어 프랑스에는 온통 강도짓과 미신, 광신, 특권 그리고 불행이 가득했다.
 
※ 4가지 인두세 : 1) 농민들은 영주가 성지순례를 떠나면 여행비용을 부담했다. 2) 영주가 감옥에 갇히는 경우 돈을 지불하고 그를 석방시켰다. 3) 영주가 어떤 기사단에 가입하면 그들의 옷값을 부담했다. 4) 영주 딸이 결혼하면 지참금을 냈다.
 
 

농락당하고, 지치고, 짓눌리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은 더욱 심하게 반발했다.  혼란은 극에 달했다. 각자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했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뒤엎었으며, 그런 것에 놀랄 필요도 없었다. 왕은 대중의 행복보다 자신의 권력을 더욱 키우는 데 몰두했고, 각자는 그런 왕의 본을 따랐다.
 

나는 내 아버지의 주인인 그 영주만 잔인한 괴물인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권층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은 한결같이 비정하고 야만적이었다. 영주가 농민을 대하는 방식을 가만히 보면, 정말로 각각은 피가 다르고 시원(始原)이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영주는 권력과 재산을 갖고 죄를 짓고도 당당한 데에 반해, 농민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하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선행을 베풀었다. 모든 농노는 물론 그들의 잘난 주인과 마찬가지로 내 아버지도 일자무식이었다. 하지만 선량했다.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은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오두막과 작은 경작지, 농기구, 아내, 자식들 그리고 아버지 자신 등 모든 것은 영주에게 속했다. 나는 아들 4명 가운데 막내였고, 아버지가 똑같이 애지중지하는 우리 아들 넷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토지에 딸린 종살이를 하며 살아야 하는 신세였다.
 
 
인간이란 사방의 비천한 것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스스로 대단해진다고 생각하고, 그가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천하게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비천해질 뿐이다.
 
 
"내가 살인이나 다른 비슷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가벼운 처벌만 받으면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을 행했고, 내가 복종하는 고위 성직자가 관심을 갖는 복수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무슨 이단 범죄를 저질렀다는 구실로 죽을 때까지 지하 감옥에서 지내거나 그보다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올바른 생각을 가졌다고 마음대로 상상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굴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이단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화형에 처해 버린다. 그들은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종족을 없애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무지의 시대에 배운 사람은 불행하고, 야만의 시대에 예민한 사람은 불행한 법! 하지만 내가 가진 지식과 내가 경험하는 연민의 감정은 무지가 낳을 수 없고 악한 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희열을 준다네. 나는 하느님이 나의 운명을 정하신다는 것을 알아. 고난의 순간 다음에 오는 무한한 행복을 알고 있지. 지상에 널려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애통해하지만 압제에 시달리는 것이 압제자가 되는 것보다 낫고, 또 다른 세상과 영원한 시대가 있다고 생각하며 곧 눈물을 닦는다네."
 
 
수 세기 전부터 우리는 땅의 노예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굴종 상태에 놓여야만 하도록 우리 조상은 무엇을 했으며, 우리는 무엇을 했습니까? 프랑스 전역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한 명의 영주 아래서 떨고 있습니다.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괴물이 우리의 재산을 몰수하고 우리를 극도로 힘든 노동에 시달리게 하며, 우리 아내들의 순결을 훔치고 그의 변덕에  따라 우리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오직 우리가 땅을 일구고, 오직 우리 손으로 불쌍한 우리 조국 사람들을 먹여 살리며, 오직 우리만 유익한 일을 하는 주민이며, 오직 우리만 압제에 시달립니다. 영주의 삶은 어떻습니까? 명령하고, 몰수하고, 처벌하고,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농노의 몫은 무엇입니까? 노동, 면죄부, 고통 그리고 처형입니다.
 
 
지금과 같은 처지라면, 우리와 프랑스 땅에서 신음하는 모든 농노를 포함한 우리에게 우리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강도짓에 길든 사나운 폭군, 못된 망나니, 탐욕스런 박해자들일 뿐입니다. 이 주인들은 보호자가 아니라 지옥에서 토해진 괴물을 닮았기 때문에, 복수를 위해 나섭시다. 우주의 조화를 파괴하고, 타고난 평등의 바탕을 뒤엎으며, 모든 인류를 학대하는 비겁한 적을 처단한들 우리가 하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리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의 고통과 여러분의 고통, 나의 상실과 여러분의 상실, 내가 겪는 비참과 여러분이 겪는 비참, 나의 복수와 여러분의 복수, 나의 자유와 여러분의 자유, 나의 행복과 여러분의 행복, 프랑스 전체의 고통과 비참과 복수와 자유 그리고 행복이 분명합니다.
 
 
나는 내 기억력을 발휘하여 전할만한 모든 것을 진실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영주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농노들이 노예 사슬 아래서 떨고 있는 한, 불행한 자크리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전쟁을 강도짓이라 덧칠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멋대로 비방할 수 있는 불쌍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카이에를 음모가이자 폭도로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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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다만 영웅을 찾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 결국엔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남는다. 그렇다. 영웅담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실 우리의 이야기다. 그는 애초에 떠났고, 우린 그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 우리 시대의 영웅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자를.' - <작품해설 중>에서
 
영웅은 이야기 속에 만들어진다.
 
 
[본문발췌]
 
나는 이 러시아인이 어쩌다 함께 살게 된 종족의 관습에 적응해 나가는 능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정신적 특성이 비난받을 만한 것인지 칭찬받을 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로 이 점이 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연하다는 것, 그리고 명확한 상식을 지녔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서 상식이란 악이 필요하다고 느껴지거나 그것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용서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사회적 인습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더 가까이 다가설 때에 그처럼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습득해 온 모든 것들이 영혼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그러므로 영혼이란 과거의 한 때와도 같은 것이 되며, 미래의 어느 날에도 또다시 이러한 모습이 될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삶이란 그다지 많은 걱정을 할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을....
 
 
"왜냐하면 일이란 건 그렇게 될 수 가 없는 거니까요. 평범치 않게 시작된 일은 반드시 평범치 않게 끝이 나죠."
 

아무리 악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영혼이 지나온 역사란, 온 나라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롭고도 유익한 것이다. 그것이 성숙한 마음의 견지에서 스스로를 관찰한 결과물이며, 동정심이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려는 야망 없이 쓰인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루소의 <고백록>은 그가 직접 이를 친구들에게 읽어 주었다는 점에서부터 진정한 고백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해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과거의 기억들을 훑어 보면서 나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나는 왜 살았을까? 무엇을 위해 태어난 걸까? 하지만 무엇이었건 간에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나의 종착지 역시 높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한한 힘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종착지를 짐작할 수 없었고, 공허하고 배은망덕한 열정에 매료되어 왔다. 나는 호된 시련을 통해 강철처럼 딱딱하고 차가워졌지만, 고귀한 열망이 지닌 열기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인생에서 피어나는 최고의 꽃을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무수히 운명의 손에 들린 도끼 역할을 했던가! 사형 집행인의 도구가 되어 불운한 희생자의 목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종종 아무런 원한도 없이, 늘 아무런 후회도 없이.... 내 사랑은 누구에게도 행복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 무엇도 포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기꺼이 사랑했다. 내 마음의 기괴한 욕구를 충족시켜왔을 뿐이다. 그것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과 고통을 게걸스럽게 삼켜 버리면서.... 여기엔 끝이 없었다. 이는 마치 배고픔과 피로로 지친 사람이 잠이 들면 풍성한 음식들과 거품이 이는 포도주를 보게 되는 것과도 같다. 그는 공상이 준 이 천상의 선물을 기쁘게 먹어 치운 뒤에 흡족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모든 환영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한층 더 배고픔과 절망뿐인 것을!
 
 
이 모든 일을 생각해볼 때, 과연 애써 산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렇지만 모두들 살아가는 것이다.  호기심 때문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기대하면서... 우습고 성가신 일이다!
 
 
내 기억 속의 과거는 얼마나 분명하고도 날카롭게 각인되어 있는가! 시간은 어느 한 개의 선, 어느 한 개의 얼룩조차 지워내지 못했다!
 
 
인생이라는 폭풍 속에서 저는 몇 가지 생각만을 해 왔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감정조차 없었어요. 오래전부터 저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열정과 행동에 엄격한 호기심의 잣대를 들이대고 그것들의 무게를 달고 분석해 왔지만, 한 번도 그 속에 참여한 적은 없었어요. 제 속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해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이었죠. 
 
 
이런 게 사람이다! 사람들은 다 똑같다. 어떤 행동의 나쁜 점에 대해 이미 다 알면서도 당신을 돕고, 당신에게 충고하고, 심지어 그런 행동에 찬성하기까지 한다. 다른 방식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중에는 발뺌을 하며, 모든 책임을 짊어질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분에 찬 모습으로 떠나 버린다. 사람들은 다 그렇다. 심지어 아주 선량하고 똑똑한 사람들까지도!
 
 
어떻게 자신이 무언가를 확신하고 있음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우리는 지각의 속임수라든지 이성의 실수를 확신과 혼동하는가? 나는 모든 일을 의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러한 경향의 마음이 성격상의 단호함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지 모를 때엔, 언제나 더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죽음보다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없으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바보인지 악당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도 불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벨라보다도 더요. 제 영혼을 세상이 버려 놓아서, 불안한 공상과 탐욕스러운 마음만이 남았습니다. 제겐 무엇이든지 모자라요. 저는 즐거움 만큼이나 슬픔에도 쉽사리 길들여지고, 제 삶은 날마다 더더욱 공허해지는 겁니다. 이런 저에게 남은 유일한 처방이라면, 여행을  떠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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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시야를 넓히고 문제의 본질과 근본 원인에 집중하며 다양한 대안을 고려해 최적의 선택과 결정에 도달하게 한다.
 
조직의 리더, 가르치는 선생님, 심지어 인공지능 chat-gpt도 무엇을 어떻게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발췌]

창의성은 고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아이디어의 융합에서 나온다. 
혼자 고립돼서 하는 작업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결국 몇가지 안 되는 선택지만 생각하거나, 같은 아이디어를 반복적으로 재사용하거나, 과거에 효과 있었던 익숙한 방식에만 의존하게 된다. 혼자 머리를 굴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만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모방은 호기심과 열린 태도를 자극해 그들이 자신의 작품을 뜻밖의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게 했다. 모방이란 어떤 완성물을 주의 깊게 관찰 및 분석해 핵심 요소를 파악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우리 두뇌에 평상시와 다른 놀라운 프로세스를 가동시킨다. 대상을 수동적으로 관람하거나 소비할 때와 달리, 모방을 하려면 고도의 집중력으로 미묘한 디테일과 숨겨진 기법을 찾아내야 한다. 


일반 경영자와 비교할 때 파괴적 혁신가는 호기심에 이끌려 행동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그것은 혁신 마인드를 가진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혁신적 창업가는 질문을 던지고, 평범한 관리자는 규칙을 따른다. 
창업가는 넓은 시야의 질문을 던지고('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일까?"), 
만일을 가정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며("만일 우리가 현금을 받는 시스템을 없앤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근본 원인을 캐내려고 애쓴다("고객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전적인 모방은 실패에 이르는 길이고 지나친 창의성은 퇴짜를 맞는다면, 해결책은 그 양극단을 모두 피하는 것이다. 즉 익숙한 것에 참신한 요소를 살짝 가미해 변화는 주는 것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카림 라카니는 이를 '최적의 새로움(optimal newness)'이라고 칭했다. 기존 공식에 약간의 변화를 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창작자들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런 접근법은 실제로 비생산적이다. 두고두고 회자될 작품을 만드는 비결은 오로지 창의성과 기발함만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검증된 공식을 이용하되 그것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기존 공식을 변주하는 전략
  1) 여러 영향 요소를 결합하기 
  2) 다른 분야나 업계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활용하기 
  3) 팀원이나 주변 사람의 구성에 변화를 주기(물리적이든 가상으로든)
  4) 정보를 선택적으로 소비하면서 영향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
  5) 배경에 묻혀 있는 요소를 가져와 중심 요소로 만드는 것. 이것은 기존 공식에 이미 들어 있는 어떤 요소를 포착한 후 그 지위를 높여 돋보이게 만드는 전략이다.
 

성공한 많은 창작자가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한 요소를 일부러 외면하거나 밀어낸다. 때로는 적게 섭취하는 것이 더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길임을 아는 것이다.


측정만 해도 변화가 일어난다. 수치화한 지표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은 더 나은 결정을 내리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목표를 향한 집중력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바로 측정이 발전을 낳는다는 '점수판 원칙'이다. 체중을 감량할 때든, 새로운 기술을 익힐 때든, 역설계로 알아낸 공식을 습득할 때든, 어떤 일에서든 발전을 위한 첫 단계는 끊임없이 점수를 기록하는 일이다.


효과적인 점수판을 만드는 몇 가지 방법
  1) '다양한 지표를 수집하는 것'이다. 한 종류의 수치(판매 실적, 좋아요 수, 투자자나 잠재 고객의 미팅 요청 수)에만 집중하면 다른 중요한 요인들은 제쳐두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2) 수집하는 지표의 종류에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행동과 결과를 함께 점검하기, 단기적/장기적 결과를 모두 반영하기, 바람직한 긍정적 지표와 바람직하지 않은 부정적 지표를 함께 수집하기
  3) 아무 생각없이 오래된 지표만 관리하지 말고 때때로 '지표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영역의 실력을 닦아나가다 보면 점검할 가치가 있는 항목이 변하기 마련이다. 어떤 지표는 추적하는 의미가 없어지고 다른 새로운 행동과 관련된 지표를 추가할 필요성이 생긴다. 자신의 점수판을 고정된 기준점으로 보는 대신, 실력이 향상되고 목표가 조금씩 변화함에 따라 조정 가능한 도구로 여겨야 한다.


단순한 반복만으로는 성장과 발전이 이뤄지지 않는다. 진정한 학습은 자신의 능력치를 약간 넘어서는 어려운 것을 시도하고 결과를 본 뒤 필요한 조정과 보완을 해나갈 때 이뤄진다. 적절한 리스크를 감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어떤 분야의 기술이나 능력을 갈고닦는 과정에서 자연히 결과물을 개선하는 것에 주력한다. 완벽한 글을 쓰고, 완벽한 웹사이트를 만들고, 완벽한 강연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때로는 완벽함 추구를 잠시 미뤄두고, 자신의 접근법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것인지를 먼저 타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다 완성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런 함정을 피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리스크를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은 완성물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뛰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다음 단계란 고객이나 관리자에게 아이디어를 판매하는 것이다. 이는 기업이나 창작자가 실패할 프로젝트를 미리 피하고, 성공 가능성을 더 빨리 판단하고, 훨씬 적은 리스크를 감수하게 해준다. 먼저 판매하고 나중에 만드는 전략의 가치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초반 피드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결국 그것은 배트를 더 많이 휘둘러서 성공 아이디어를 맞힐 확률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규모가 작은 청중을 상대로 테스트하기, 가명 활용하기, 먼저 아이디어부터 판매하기, 포트폴리오 다양화하기. 이들 전략은 실패에 따르는 대가가 작으면 리스크를 감수하기가 훨씬 더 쉽다는 원리에 기초한다. 성장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들 한다. 발전과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은 진취성을 발휘해 더 많은 리스크를 끌어안고 불편한 상황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려운 도전에 기꺼이 맞서는 것과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똑같은 일이 아니다. 능력을 연마해 최고 수준에 이르고자 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한 많은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 아니다. 리스크를 감수하되 그 리스크를 줄일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더 현명하다.


단점을 인정하고 해결하려고 애쓰다 보면, 자신의 행동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부족한 성과의 연관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불만족과 심리적 불편함은 새로운 해법을 찾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게 하는 동력이 된다. 따라서 성과의 도약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문가는 단순한 반복으로 고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약점을 정확히 공략해 개선하고, 도전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야만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을 넘어 성과를 낼 수 있고 자동성의 지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연습을 쉽지 않게 만들어 도전 의식을 북돋을 방법
1) 새로운 요소를 가미
2) 어려움을 높이는 것
3) 자기 분야와 완전히 다른 분야의 연습을 택하는 것


오늘날은 피드백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창작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요즘처럼 세세하게 얻을 수 있는 때는 없었다. 클리프 쿠앙과 로버트 파브리칸트는 컴퓨팅과 디자인의 진화를 분석한 <사용자 친화적인 디자인(User Firendly)>에서, 인터넷이 우리 삶에 미친 주요 영향을 멀리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이 발견되는 지점은 인터넷으로 인해 피드백이 비즈니스 거래의, 더 넓게는 인간관계의 중심 특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아주 간단한 거래 후에도 판매자나 제품을, 또는 서비스 제공자를 평가하거나 리뷰를 남기도록 요청받는다. 또 인터넷은 우리가 친구들의 포스팅에 '좋아요'를 누르도록, 리뷰 내용이 별로인 제품은 구매하지 않도록 훈련시켰다. 


오프라인의 일상생활에서는 친구나 동료, 가족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우리에게 솔직한 조언을 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리뷰가 흔할 뿐만 아니라 그런 리뷰일수록 주목받을 확률이 높다. 온라인 세상의 리뷰 작성자들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보이는 것에 집중하며, 똑똑하게 보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비판적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이 비판하는 상대방의 반응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선동적이고 악의,적이며 살벌한 리뷰가 그토록 넘쳐나는 것이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면전에서는 건네지 못할 피드백이 온라인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표현된다.


유용한 피드백의 핵심은 구체적이야 하고,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하며, 타깃 청중을 대변하는 이들에게 얻어야 하고, 적절한 시점에 얻어야 한다. 피드백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적절한 때 적절한 질문을 적절한 상대에게 던져야 한다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이 네 조건을 충족시키기는 어렵지 않다.


요즘 정치인들은 트위터를 통해 시사 이슈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얻는다. 얼핏 보기에는 긍정적인 현상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정치 양극화가 심해지는 데 일조했다. 트위터 사용자들, 특히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시간과 의향을 가진 사람들은 평균적인 유권자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이처럼 대표성이 결여된 청중의 피드백에 맞춰 자신의 정치 견해를 조정하는 정치인은 일반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게 된다. 피드백의 '양'이 많다고 해서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양은 많고 질은 낮은 피드백을 피해야 한다. 그런 피드백을 얻기가 편하다고 해도 경계해야 한다. 엉뚱한 청중에게서 피드백을 얻는다면 아예 피드백을 받지 않는 것만 못하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자연스럽게 시야가 좁아진다. 시야가 좁아지면 방어적이 되고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저항하기 쉽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작업을 뛰어넘어 시간을 두고 전체적인 목표를 떠올리면 멀리 보게 되고 비판에 너그러워진다. 


탁월함에 이르는 길
1) 수집가가 돼라. 
2) 차이를 발견하라. 
3) 설계도를 뽑아내라.
4) 모방하지 말고 한 단계 더 나아가라.
5) 비전과 능력의 격차를 받아들여라. 
6) 당신만의 점수판을 만들어라. 
7) 리스크를 최소화하라. 
8) 편안함을 경계하라. 
9) 미래와 과거를 이용하라. 
10) 똑똑하게 질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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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지면 더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지만 물질도 걱정과 불안도 비워야 행복이 더해진다. 
 

[본문발췌]
 

'인생의 시간과 공간을 내 의지대로 디자인할 수 있는 삶'


전대미문의 사건을 맞아 고독하고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며 나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다. 타인과 교류하고 다른 인간이나 생명체와 연결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우리 영혼의 충만감과 평화로움을 위해 자연만큼 훌륭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셋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은 행복의 필수조건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든 얼마나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었든 간체, 세상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불행한 삶이란 없으며 반대로 무언가 부족해도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 인간은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순례길을 걸으며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해서 가방에 넣었던 물건들 중에 실제로 필요한 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게를 좀 덜어내도 아무 문제 없다. 덜어낼수록 오히려 행복의 크기는 커질 수 있다.


도시인들은 빗방울 몇 개만 후드득 떨어져도 지붕 있는 곳으로 달아나거나 우산을 펴 드는 일에 익숙하다. 반면 순례자에겐 비를 맞으며 걷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란 없다. 비가 내리면 빗속을 걷고, 태양이 뜨면 햇살을 맞고, 바람이 불면 온몸으로 막아내야 한다. 전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버텨내야만 하는 것이다. 또 미끄러운 길에선 몸을 낮추고, 개울이 있으면 물에 빠질 각오로 건너는 수밖에 없다. 그저 내게 주어지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순응해야만 한다. 상황 탓, 컨디션 탓 하다 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자연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없다. 실패나 좌절이 두려워 멈추어 선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빗속을 걷는 일에 적응하는 것은 의외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를 맞으면 옷이 젖을 것이고 결국 춥고 불편해질 거라는 생각에 몰입되지 않도록 시야를 넓히고 '지금'에 집중하니 금세 모든 것이 달리 보였다. '비가 내리면 맞으면 되는데, 뭐가 그리 두려웠었지? 빗물에 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복구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비가 그친 다음 해가 나서 젖은 것들이 마르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일이니 말이야. 그저 태양이 다시 뜨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런 거였네.'


나는 순례자들이 그 길 위에서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얻어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걷는 이들도 자기의 인생 이야기를, 그 안에서 무르익는 생각을, 수많은 사연과 감정, 에너지를 그 길 위에 내려놓는다. 그것은 일종의 '작은 씨앗을 심는 과정'이며 길과 나누는 속 깊은 대화이다. 산티아고 길, 그곳에서 무엇을 얻을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나간 자리엔 무엇이 남겨질까 하는 것도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순례길은 세 단계로 나뉜다. 처음은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시간이고, 다음은 정신과의 싸움이며 앞의 두 과정을 잘 거치고 나면 마지막에 심장이 열리는 경험을 선물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벌어져야 할 일은 나를 지나치지 않을 거라는 거야. 내가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결국은 벌어지게 되어 있다는 거지. 과거는 이미 내가 알지만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알 길이 없으니 현재를 살아야 해. 그저 현재에 집중해 살면서 받아들이는 것, 그게 인생인 것 같아."


카미노는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대신 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을 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뭘 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네가 뭘 원하는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이 길이 어떤 것을 줄지 마음 편안하게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즐기는 것도 좋을 거야.


Despues de tanto tiempo, el sol nunca le ha dicho a al tierra, 'Estas en deuda conmigo'. Imagina lo que puede hacer un amor asi. 태양은 그토록 많은 따뜻함과 빛을 뿌려 준 후에도 땅에게 '넌 나에게 빚졌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랑을 그런 식으로 나눈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해 볼지어다.


산에 올라오면 이렇게 잠깐 서서 풍경을 감상할 여유를 갖곤 하잖아. 근데 인생을 살 때는 자기가 높이 오른 줄 모르는 것 같아. 계속 올라가려 하기만 하고 즐기지 못해. 이만하면 됐다 하고 멈추어서 자기가 있는 자리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 


인생이란 결국 그런 건가 보다. 누구나 가슴에 응어리 하나 정도 얹어 놓고 살아가는 것. 각자의 짐을 들고 걸어가는 것. 이제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카미노란 것이 그냥 발을 움직여 걷는 게 아니라는 것을, 카미노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다. 두 발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


인생에서든 순례길에서든 각자가 자기 선택에 책임을 지고 앞에 놓인 길을 즐겨야 한다. 가지 않은 길이 궁금하더라도 내 앞에 놓인 길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인생은 당장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기다리거나 미루지 말고요."


"운명이랄까, 뭐 그런 것이 우리 삶을 궁지로 몰며 힘들게 만들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예요. 가장 쉬운 길은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 이제 다 그만둘래, 희망이 없어, 라고 불평하며 힘들어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병이 만드는 한계 속에 스스로 갇히는 거죠. 내가 선택한 길은 병이 닥쳤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하면서 인생이 주는 선물을 계속 즐기는 거였어요. 물론 그런다고 병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갑자기 닥친 불행이 내 삶을 지배하게 두지 않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나의 결정과 선택으로 내가 주도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 두 가지 길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종착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든 생각은 '인생은 버텨내는 거구나.' 하는 것이다. 고난의 순간들이 있을 때 피하는 대신 버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고통을 이겨내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데에는 걸으면서 만나는 좋은 풍경이나 앞뒤에서 나처럼 힘든 것을 참고 걷는 사람들, 내 마음속에 피어나던 수많은 생각들이 도움이 되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육체적인 고통이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은 극복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얻었다. 어려움을 초월하는 큰 기쁨이나 목표가 있고 마음이 열릴 수 있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순례의 과정도 아픈 발만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시야를 넓혀 주변을 보니 버틸 만했던 것처럼 말이다. 700km를 걸었는데도 상태가 너무 좋아서 내가 정말 그렇게 오랜 시간 걸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매일 걷다 보니 체력도 좋아졌지만 세상을 보는 관점과 마음가짐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똑같은 일도 내가 어떤 태도와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로 빚어질 수 있다는 진리를 산티아고 길 위에서 배웠다. 힘든 상황을 견디고 버텨내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기억할 것이다.


실수하고 방황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은 곧 '인간'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받거나 슬픔을 느끼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거나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 역시 삶의 일부다. 우리 인생은 필연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기에 그것을 직시하든 외면하든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원하지 않는 혹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대신 그런 일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그저 짙은 슬픔으로만 묻어두는 대신 다른 빛깔의 옷을 입혀 간직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드리워지는 인생의 그림자를 고통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삶을 성숙하게 하는 고마운 경험으로 끌어안을 수 있기를, 그러한 나를 이 길의 끝에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40일을 걸었다. 


카미노가 주는 선물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800km를 걷고 나서 내가 알게 된 것은 결국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질문, 해답, 위로, 그리고 사랑. 모든 것이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산티아고 길을 걸어야 했고, 그 길을 걸었기에 이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행복하다는 느낌과는 또 다른 충만감, 모든 것을 다시 얻은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것을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을 하든 별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으로 온몸과 마음이 꽉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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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는 미지의 세계와 무지에 대한 불안에 신앙적 믿음으로 마음이 평화를 가져다 준다.

과학은 불완전한 조각들을 찾아 퍼즐을 맞추며 완벽에 가까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종교와 과학의 역할과 효용은 다르다. 서로 다투어 어느 하나가 승리한들 우주의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교와 과학은 대립이 아니라 양립해야 한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변화할지 이해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종교와 과학은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발췌]

중세는 단일하고 정합적인 철학 체계가 없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우주는 신이 만든 인형의 집이고 종교는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는 것이 당시 통념이었다.


좋은 모형
우아할 것, 자의적이거나 조정 가능한 요소들을 거의 포함하지 않을 것.
기존의 모든 관찰들에 부합하고 그것들을 설명할 것.
만일 틀렸을 경우에 모형을 반증할(모형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미래 관찰에 관한 상세한 예측들을 내놓을 것.


자연법칙들은 우주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려주지만, 우리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제시한 왜냐는 질문들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존재할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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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쉽지 않다.
시간과 공간의 불확정성은  새로운 역사, 새로운 가능성의 기회가 된다.


[본문발췌]

시공에 경계가 없다면, 경계 조건을 결정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초기 상태를 알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시공의 경계 조건을 결정하는 신이나 어떤 다른 법칙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는 지점인 시공의 가장자리는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경계 조건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우주는 완전히 자족적이고,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주는 다만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정말로 완전히 자족적이고, 경계나 가장자리를 가지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불분명해진다. 창조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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