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 많을수록 선택과 움직임의 제한이 생기고 자유도가 낮아진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는 가르침! 

 

 

[본문발췌]

 

 

단순하면서도 가난하되,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삶, 그것이 내가 스님의 처소에서 받은 첫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물건 더미와 장식물을 자랑하는 '풍요로운 감옥'들에 대한 서늘한 깨우침이 아닐 수 없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조그마한 데서 찾아온다. 조그만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 때 그것이 행복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우주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닫고 옹졸하게 산다면 그만큼 비좁아지고 옹색해진다. 마음을 활짝 열고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사랑한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선한 기운으로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면 내 자신이 기뻐지고, 누군가를 언짢게 하거나 괴롭히면 내 자신이 괴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메아리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옛말에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다.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은 밖으로 부자가 되는 일에 못지 않게 인생의 중요한 몫이다. 인간은 안으로 충만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 잡념 없이 기도를 올릴 때 자연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는 삶의 고민 같은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아름다움과 살뜰함과 사랑스러움과 고마움에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산길을 지나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서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또 다정한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전화 한 통화를 통해서도 나는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이다. 꼭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복잡한 것을 다 소화하고 난 다음의 어떤 궁극적인 경지이다.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텅 비어 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그 뜻이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청빈은 그저 맑은 가난이 아니라, 그 원뜻은 나눠 가진다는 뜻이다.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이다. 한자로 '탐貪'자는 조개 '패' 위에 이제 '금'자이고, 가난할 '빈貧'자는 조개 패 위에 나눌 '분'자이다. 탐욕은 화폐를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가난함은 그것을 나눈다는 뜻이다. 따라서 청빈이란 뜻은 나눠 갖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만일 가난이 없었다면 나눠 가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우리 이웃의 가난, 어려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게 긍정적으로 일이 풀린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고 거기서 다시 또 뭔가를 하려고 하면 자기 앞에 돌아온 몫까지도 걷어차 버린다.

 

 

어떤 것에도 스스로 소유당하지 말며, 자신의 삶을 살되 삶에 휘둘리지 말라.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다. 남보다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 새겨 두기 바란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투철한 자기 억제와 자기 질서를 가져야 한다.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은 듣지 말고, 읽지 않아도 좋을 것은 읽지 말며, 먹지 않아도 좋은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가려 가면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입고, 적게 먹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지고 승화될 수 있다.

 

 

보다 적은 것이 보다 귀한 것이고, 결과적으로도 넉넉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생활 태도를 소극적인 생활 태도라고 잘못 알아선 안 된다. 그것은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행복의 조건은 결코 크거나 많거나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일을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저녁 노을을 보면서도 하루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데서, 큰 데서, 야단스러운 데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런 행복도 놓치고 만다. 행복의 조건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 속에 있다. 우리가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니고 자기 자신답게 살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다. 

 

 

잡다한 정보와 지식의 소음에서 해방되려면 우선 침묵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침묵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그런 복잡한 얽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자신이 침묵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일상적으로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는가. 의미없는 말을 하룻동안 수없이 남발하고 있다. 친구를 만나서 얘기할 때 유익한 말보다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말은 가능한 한 적게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충분할 때는 두 마디를 피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람답게 살다간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과 고독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을 우리들 자신마저 소음이 되어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으나,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발견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든간에 그 내부는 비어 있다.

 

 

불교 경전은 말하고 있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전부 말해 버리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는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메아리가 없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은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을 안해서 후회되는 일보다도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다.

 

 

나는 지금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곳에 살고 있다. 물론 내가 사는 환경이 궁핍하고 거의 원시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은 못 되지만 우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잠시 있을 뿐이다. 나그네처럼 있는 것이다. 수행자에게 영원한 거처가 어디 있는가. 나그네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작은 선이라도 좋으니 하루 한 가지씩 행해야 한다. 작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남이 알아 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의 질서이다. 하루 한 가지씩 작은 선이라도 행해야 한다.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룻동안에 한 가지 착한 일을 듣거나 행할 수 있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것이다. 참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는가,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덕이 되는 행동을 했는가 안했는가에 의해서 그날 하루를 잘 살았는가 못 살았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

 

 

친절과 사랑은 우러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친절과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해라, 여러 말이 있지만 친절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미덕이다.

 

 

'당신의 오늘 일은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마음으로부터 인사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명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 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소유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것만큼 편리한 것도 있지만 소유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측면이 있다. 부자유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 파손됐거나 또는 잃어 버렸을 때 정신적인 상처도 동시에 뒤따른다. 가진 것만큼 집착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당연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이다.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제대로 건널 수 있다. ...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은 곱으로 늘어난다. 반대로 괴로운과 슬픔을 나눠 가질 때, 그 괴로움과 슬픔은 몇 곱으로 줄어든다. 나눔에는 이렇듯 미묘한 율동이 따른다.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관계가 우리들 자신을 만들어간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든다. 세상의 유행을 좇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중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새롭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 피어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 하지 말라.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게 된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이다. 그것이 가난이고 결핍이다.

 

 

크고 많은 것, 그것은 허한 것이다. 소유를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적게 가져야 더 많이 얻는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이다. 그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가을은 잎이 가지를 떠나고, 열매가 나무를 떠나는 계절이다. 사람이 길을, 먼 길을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다시 말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계절이다. 따라서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기보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가끔은 자기 살던 곳을 떠나 볼 일이다. 떠나 보면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새삼스럽게 자기 존재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다.

 

 

떠난다는 것은 곧 새롭게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다면 떠남도 무의미하다. 출가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을 수 있다. 크게 버리지 않고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을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버리면 어중간하게 얻는다. 이것이 소유의 법칙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온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가진 것만큼 속박을 당한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릇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오늘날의 시대를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로 가득찰 때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과 고통은 함께 있따.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과 고통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예수가 죽은 날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사랑은 고통이 포개어져 있음을 비로소 체험한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역시 포근하고 따뜻한 것인 동시에 그 속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다. 그것이 자비慈悲이다. 자애로움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이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자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 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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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내 삶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단순하고 작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행복은 내 안에 있다.

 

 

[본문발췌]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몰두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다. 제프리 밀러에 의하면, 신체적 특성뿐 아니라 고차원의 정신적인 특성도 이 '생존의 도구'의 역할을 한다. 피카소는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 산것이 아니다. 보다 진화론적인 해석은 피카소라는 한 생명체가 그의 본질적인 목적(유전자를 남기는 일)을 위해 창의력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마음의 정신적 산물들은 사실 몸의 번성을 위한 도구인 것이다.....행복감 또한 마음의 산물이다. 창의력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생존을 위한 중요한 쓰임새가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의견이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마치 피카소의 창의성 같은?

 

 

쾌의 느낌에 우리가 붙이는 명칭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기쁘다, 재미있다, 통쾌하다, 즐겁다, 신난다, 좋다.... 그러나 모두 쾌가 원료인 경험이고, 이들은 행복감의 가장 기초적인 재료가 된다. 이런 쾌의 전구가 켜지며 발생하는 여러 세세한 감정을 묶어 심리학에서는 '긍정적 정서'라고 한다. 반대로 불쾌에 바탕을 둔 여러 감정(분노, 슬픔, 두려움, 외로움 등)을 묶어 '부정적 정서'라고 부른다.

 

 

문화,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의 감정은 쾌 혹은 불쾌의 두 바구니 중 하나에 반드시 담긴다. 그래서 희랍시대의 철학자부터 오늘날 행복 연구자들까지 쾌와 불쾌의 상대적인 비율을 행복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한다.

 

 

행복은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많은 현대인의 삶이 행복과녁을 제대로 못 맞추는 이유가 쾌락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것은 물론이고,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 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시간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운다.

 

 

범위 빈도 이론(range-frequency theory) : 극단적인 경험을 한 번 겪으면, 감정이 반응하는 기준선이 변해 그 후 어지간한 일에는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행복한 이들은 공연이나 여행 같은 '경험'을 사기 위한 지출이 많고, 불행한 이들은 옷이나 물건 같은 '물질' 구매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타인중심적인 생각은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 살며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판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을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 된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 - 알베르트 카뮈

 

 

행복은 나를 세상에 증명하는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잣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누구와 우위를 매길 수도 없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이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필요나 목적 때문에 만나는 자리)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이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첫째, 이 둘은 같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선택과 관심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잣대가 필요하고, 많은 경우 그 잣대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지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내 선택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다. 내가 지금 좋고 즐거운 것보다 남들 눈에 사려 깊고 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앞에서 설명했듯 여기서 행복은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행복은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쾌락에 뿌리를 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경험은 본질적으로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을 자주 하라는 처방을 내리는 의사는 없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지침들은 대부분 그렇다. "불행하다면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생각을 바꾸라는 것은 손에 못이 박힌 사람에게 "아프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 하는 것과 비슷하다. 생각을 통해 바뀌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생각이다. 행복의 핵심인 고통과 쾌락은 본질적으로 생각이 아니다.

행복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이라는 동물이 왜 쾌감을 느끼는지를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 쇼팽과 세익스피어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더 넓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온다. 진화의 여정에서 쾌감이라는 경험이 탄생한 이유 자체가 두 자원(생존과 번식)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먹을 때와 대화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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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의한 기능적, 실용적인 면에서 시작한 건축은 질서와 복잡함의 모순 속에 예술적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 완성된다.

 

 

[본문발췌]

 

집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 이 집이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들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 겨울이 오면 사라진다는 것,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했거나 창조할 아름다움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건축의 의무이다. -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

 

 

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바란다. 동시에 우리는 건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거나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존 러스킨

 

 

우리는 건축이 우리가 분석하고 평가하는 개념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건축은 말을 한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서 말을 한다. 건축은 민주주의나 귀족주의, 개방성이나 오만함, 환영이나 위협, 미래에 대한 공감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예를 들면 평범한 스칸디나비아의 도자기 세트와 장식이 화려한 세브르의 도자기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성취 개념을 느낄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도자기는 민주적이면서도 우아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듯하며, 세브르의 도자기는 계급에 얽매여 격식을 차리는 기질을 드러내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과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이 작품들은 그 거주자들에게 장려하고 또 유지하려고 하는 어떤 분위기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라고 권유를 한다. 행복의 전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어떤 건축이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으로 좋다는 뜻 이상이다. 그것은 이 구조물이 지붕, 문손잡이, 창틀, 층계, 가구를 통해서 장려하고자 하는 특정한 생활방식의 매력을 내포한다.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에야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축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이고 신비한 시각적 선호에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올바른 존재감각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건축이 어울리느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종종 심각해지고 살벌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양식도 다양하다. - 스탕달.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건축 양식은 자신이 이해하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그것이 구현하는 내적인 특질을 영원히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대상을 소유하면 자신에게 그것이 암시하는 미덕을 흡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음을 불현듯이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덕들이 자동적으로 또는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만 지나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와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왜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이 바뀔까? 1907년 독일의 젊은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런 변화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해보려고 했다. 보링거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 유형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추상적" 예술과 "사실적" 예술인데, 어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선호될 수도 있다. 수천 년간 추상예술은 비잔티움, 페르시아,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콩고, 말리, 자이레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바로 그가 살던 시대, 그러니까 20세기 벽두에 서양에서 다시 두드러진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추상예술은 대칭, 질서, 규칙성, 기하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조각이든 양탄자든, 모자이크든 도자기든, 파푸아뉴기니의 웨와크에서 바구니를 짜는 사람의 작품이든 뉴욕 화가의 작품이든 추상예술은 평평하고 반복적인 시각적 평면들을 바탕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창조하려고 하며,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세상에 대한 암시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보링거는 이와 대조적으로 사실적 예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의 미학을 지배했으며, 르네상스부터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경험을 떨림과 색채로 손에 잡힐 듯이 전달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향의 예술가들은 위협적인 소나무 숲의 분위기, 인간의 피의 질감, 눈물의 솟구침, 사자의 잔혹성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보링거 이론의 가장 강력한 측면 - 회화만이 아니라 건축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측면 - 은 한 사회가 한 가지 미학적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 충성심을 옮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보링거는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고 믿었다. 사회는 무엇이든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 찾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조화, 고요, 율동과 융합된 추상예술은 주로 차분함을 갈망하는 사회 - 법과 질서가 흔들리고, 이데올로기가 변하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 때문에 신체적인 위협을 강하게 느끼는 사회 - 에서 호소력을 발휘한다. ... 그러나 높은 수준의 내적, 외적 질서를 달성한 사회, 그래서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이 예측 가능하고 또 지나치게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그와 대립되는 갈망이 생겨난다. 시민들은 일상과 예측 가능성의 숨 막히는 손아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며, 심리적 갈증을 달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강렬한 느낌을 다시 확인하려고 사실적 예술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특질들을 집중적인 형식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찾아낼 때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게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데려가고, 우리가 갈망하는 것으로 가까이 데려다줄 수 있는 양식, 우리에게 없는 미덕들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는 양식을 존중한다. 애초에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거의 언제나 불균형의 위험, 우리의 극단들을 조절하지 못할 위험, 삶의 커다란 대립물들 - 권태와 흥분, 이성과 상상, 단순과 복잡, 안전과 위험, 내핍과 사치 - 사이의 중용을 놓칠 위험에 빠져 있다는 표시이다.

 

 

인간이 어느 시점에서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여 도시 설계의 걸작을 창조했다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세대도 똑같이 훌륭한 환경을 마음대로 꾸며낼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가 마치 진귀한 피조물이나 되는 것처럼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초원이나 관목지를 개발할 때에 그 미덕을 얼마든지 다시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존이나 복원에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무능할 때에나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베네치아의 강변을 위협하며 찰랑거니를 물에 위협을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 귀족의 궁전들을 바다에 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아름다움에서 그 낡은 석조 건물들에 맞먹는 새로운 건물을 언제라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서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 노발리스

 

 

아름다움이 질서와 복잡성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배후에 위험이 존재해야만 안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듯이,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 수 있다.

 

 

건축가들이 쾌적한 환경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생활의 다른 영역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나쁜 건축이란 결국 설계의 실패인 동시에 심리 파악의 실패이기도 하다. 건축에서는 이런 경향이 물질로 표현되지만, 다른 영역으로 가면 엉뚱한 사람과 결혼을 한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를 고른다거나, 재미없는 휴가 예약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경향이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에 만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건축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설명해줄 것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진부한 목표물에 눈길을 고정한다. 우리는 슬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낸다. 적당한 위생시설과 가로등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래된 거리를 그냥 부수고 만다. 우리는 만족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다가, 슬픔으로부터 그릇된 교훈을 배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곳들은 겸손과 끈기를 갖춘 보기 드문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 캐묻는다. 기쁨을 이해하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끈기를 가지고 논리적 설계도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겸손과 끈기가 결합되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건축의 미덕 : 질서, 균형, 우아, 일치, 자기인식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1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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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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