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에 의한 기능적, 실용적인 면에서 시작한 건축은 질서와 복잡함의 모순 속에 예술적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 완성된다.

 

 

[본문발췌]

 

집은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성소가 되었다. 집은 정체성의 수호자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소유자들은 밖으로 떠돌던 시절을 끝내고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했다. ... 이 집이 거주자들의 수많은 병들을 치료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 방들은 행복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 행복에 건축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 소멸할 운명이라는 것, 겨울이 오면 사라진다는 것,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과 인간이 창조했거나 창조할 아름다움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유용하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것을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꾸는 일, 그것이 건축의 의무이다. -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

 

 

우리는 건물이 우리를 보호해 주기를 바란다. 동시에 우리는 건물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거나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을 이야기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 존 러스킨

 

 

우리는 건축이 우리가 분석하고 평가하는 개념들과 전혀 관련이 없는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건축은 말을 한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서 말을 한다. 건축은 민주주의나 귀족주의, 개방성이나 오만함, 환영이나 위협, 미래에 대한 공감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디자인된 물건은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심리적 또는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인상을 심어준다. 예를 들면 평범한 스칸디나비아의 도자기 세트와 장식이 화려한 세브르의 도자기에서는 서로 구별되는 두 가지 성취 개념을 느낄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 도자기는 민주적이면서도 우아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듯하며, 세브르의 도자기는 계급에 얽매여 격식을 차리는 기질을 드러내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디자인과 건축 작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그 내부나 주변과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다. 이 작품들은 그 거주자들에게 장려하고 또 유지하려고 하는 어떤 분위기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도우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라고 권유를 한다. 행복의 전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어떤 건축이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미학적으로 좋다는 뜻 이상이다. 그것은 이 구조물이 지붕, 문손잡이, 창틀, 층계, 가구를 통해서 장려하고자 하는 특정한 생활방식의 매력을 내포한다. 아름답다는 느낌은 좋은 생활이라는 우리의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되었을 때에야 얻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축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이고 신비한 시각적 선호에 거슬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올바른 존재감각과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건축이 어울리느냐를 두고 벌이는 논쟁이 종종 심각해지고 살벌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행복의 약속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아름다움의 양식도 다양하다. - 스탕달. 

 

 

건축이나 디자인 작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번영에 핵심적인 가치를 표현한다는 사실, 우리의 개인적 이상이 물질적 매체로 변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건축 양식은 자신이 이해하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그것이 구현하는 내적인 특질을 영원히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대상을 소유하면 자신에게 그것이 암시하는 미덕을 흡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음을 불현듯이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덕들이 자동적으로 또는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만 지나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와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왜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이 바뀔까? 1907년 독일의 젊은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그런 변화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해보려고 했다. 보링거는 인간의 역사에서 예술에는 오직 두 가지 기본 유형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추상적" 예술과 "사실적" 예술인데, 어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회에서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선호될 수도 있다. 수천 년간 추상예술은 비잔티움, 페르시아,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콩고, 말리, 자이레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바로 그가 살던 시대, 그러니까 20세기 벽두에 서양에서 다시 두드러진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추상예술은 대칭, 질서, 규칙성, 기하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조각이든 양탄자든, 모자이크든 도자기든, 파푸아뉴기니의 웨와크에서 바구니를 짜는 사람의 작품이든 뉴욕 화가의 작품이든 추상예술은 평평하고 반복적인 시각적 평면들을 바탕으로 고요한 분위기를 창조하려고 하며,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세상에 대한 암시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보링거는 이와 대조적으로 사실적 예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의 미학을 지배했으며, 르네상스부터 19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경험을 떨림과 색채로 손에 잡힐 듯이 전달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향의 예술가들은 위협적인 소나무 숲의 분위기, 인간의 피의 질감, 눈물의 솟구침, 사자의 잔혹성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보링거 이론의 가장 강력한 측면 - 회화만이 아니라 건축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측면 - 은 한 사회가 한 가지 미학적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 충성심을 옮기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보링거는 그것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회에 결여된 가치에 있다고 믿었다. 사회는 무엇이든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 찾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조화, 고요, 율동과 융합된 추상예술은 주로 차분함을 갈망하는 사회 - 법과 질서가 흔들리고, 이데올로기가 변하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 때문에 신체적인 위협을 강하게 느끼는 사회 - 에서 호소력을 발휘한다. ... 그러나 높은 수준의 내적, 외적 질서를 달성한 사회, 그래서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이 예측 가능하고 또 지나치게 안정적인 사회에서는 그와 대립되는 갈망이 생겨난다. 시민들은 일상과 예측 가능성의 숨 막히는 손아귀로부터 탈출하고 싶어하며, 심리적 갈증을 달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강렬한 느낌을 다시 확인하려고 사실적 예술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소유하지 못한 특질들을 집중적인 형식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찾아낼 때마다 그것을 아름답다고 부르게 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데려가고, 우리가 갈망하는 것으로 가까이 데려다줄 수 있는 양식, 우리에게 없는 미덕들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는 양식을 존중한다. 애초에 우리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거의 언제나 불균형의 위험, 우리의 극단들을 조절하지 못할 위험, 삶의 커다란 대립물들 - 권태와 흥분, 이성과 상상, 단순과 복잡, 안전과 위험, 내핍과 사치 - 사이의 중용을 놓칠 위험에 빠져 있다는 표시이다.

 

 

인간이 어느 시점에서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여 도시 설계의 걸작을 창조했다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세대도 똑같이 훌륭한 환경을 마음대로 꾸며낼 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가 마치 진귀한 피조물이나 되는 것처럼 경의를 표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초원이나 관목지를 개발할 때에 그 미덕을 얼마든지 다시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존이나 복원에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무능할 때에나 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베네치아의 강변을 위협하며 찰랑거니를 물에 위협을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 귀족의 궁전들을 바다에 내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아름다움에서 그 낡은 석조 건물들에 맞먹는 새로운 건물을 언제라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서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 노발리스

 

 

아름다움이 질서와 복잡성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배후에 위험이 존재해야만 안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듯이, 혼란과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건물에서만 우리는 질서를 세우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 수 있다.

 

 

건축가들이 쾌적한 환경을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생활의 다른 영역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나쁜 건축이란 결국 설계의 실패인 동시에 심리 파악의 실패이기도 하다. 건축에서는 이런 경향이 물질로 표현되지만, 다른 영역으로 가면 엉뚱한 사람과 결혼을 한다거나, 어울리지 않는 일자리를 고른다거나, 재미없는 휴가 예약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경향이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에 만족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건축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설명해줄 것을 찾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진부한 목표물에 눈길을 고정한다. 우리는 슬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낸다. 적당한 위생시설과 가로등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래된 거리를 그냥 부수고 만다. 우리는 만족의 근원을 이해하려고 헛된 노력을 하다가, 슬픔으로부터 그릇된 교훈을 배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곳들은 겸손과 끈기를 갖춘 보기 드문 건축가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욕망에 관해서 캐묻는다. 기쁨을 이해하면, 그것이 사라지기 전에 끈기를 가지고 논리적 설계도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겸손과 끈기가 결합되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요구까지 충족시키는 환경을 창조할 수 있다.

 

 

건축의 미덕 : 질서, 균형, 우아, 일치, 자기인식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1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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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은 우연과 불확실성을 법칙의 세계와 연결하고 논리적, 객관적 의사결정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그 부작용은 평균과 빈도를 따라 개별성과 다양성을 빼앗아 간다.

 

 

[본문발췌]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논리학적, 윤리학적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공정 결정, 위험 분석, 환경 영향의 평가, 군사전략은 확률의 관점에서 표현된 의사 결정 이론 없이는 수행될 수 없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

 

 

필자의 중점 과제는 철학적인 면에 있다. 즉, 현재 우리가 다음의 두 영역에서 지니고 있는 개념의 체계를 가능하게 해준 조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는 물리적 비결정론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 통제의 목적을 위해 발달한 통계 정보의 차원이다. 본 연구는 보다 일반적인 철학의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필자는 위에서 이미 그중 하나를 언급한 바 있는데, 즉 '만들어진 사람들'이라는 아이디어다. 필자는 계량화는 범주화를 필요로 하고, 통계적 목적을 위해 새로운 계급을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상상하는 방식과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우연을 법칙으로 끌어들이게 됨으로써) 세상은 이전보다 불확실하게 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덜 불확실하게 되었다.

 

 

'과학의 법칙으로부터 과학적 측정에 이르는 길은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계량적 규칙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칙성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가 명확해야 하고 규칙성을 찾기 위한 도구들 역시 그에 맞추어 고안되어야 한다.' - 토마스 쿤

 

 

확률이라는 개념은 빈도 측면과 믿음의 정도 측면 양쪽에서 탄생했다. 초기에는 확률이 지닌 두 측면에 대해 구분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라플라스의 젊은 시절에 확률은 그 영역을 크게 확장했지만, 우연적 사건, 출생, 혼인과 사망, 그리고 측정오차와 관련하여 사용되던 확률은 여전히 이전에 사용되던 빈도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객관적 빈도 또는 경향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자 라플라스는 다양한 결과들이 지니는 용이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가면서 가망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는 데 기꺼이 나서기는 했지만, 확률은 우리의 지식과 무지에 관련되는 주관적 개념이라고 정의내렸다.

 

 

빈도와 믿음이라는 용어로 각가 표현되는 '객관적'과 '주관적' 확률 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모형화modeling와 추론inference의 차이이다.

 

 

통계학자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공리주의적 개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통계학자들의 철학에 대해, 또는 그들의 철학이 현행의 사회적 문제들의 해결을 지칭하는 것에 대해 믿지 않았던 이들은 통계학자들을 미묘한 두려움이 뒤섞인 무시로 대했다. 푸아송의 선견지명 같은 말을 빌리자면, 숫자는 인간으로부터 개별성을 박탈해 버렸다(The Numbers did strip human beings of their individuality).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이는 공리주의자들은 정작 사람에 대해서는 디킨스 소설의 등장인물 그래드그린드처럼 무관심해져 갔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곤혹스러운 것이 있다. 즉 통계학자와 전문가들, 그리고 인간성의 애호자라는 분들이 인생의 밝은 면들을 나열하면서 어떻게 한 가지 특별한 점은 한결같이 빠트릴 수 있는 것인가? 자유롭고 구속 받지 않는 개인 의지, 즉 개인의 변덕(어느정도로 심하든 간에) 내지는 공상(때때로는 정신이상의 수준으로 격앙되기도 하지만)은 가장 큰 행복이자 가장 위대한 행복이며, 이는 어떠한 분류체계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으나 이것이 빠진 일체의 시스템이나 이론은 악마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Notes from Underground>

 

 

필자가 본서의 제목을 '우연을 길들이다The Taming of Chance'로 선택한 것은 19세기가 통계적 법칙의 구조 내에서 우연을 포착해 낸 방식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결실은 1860년까지는 완전하게 달성되지 않았다. 오차 법칙에 대한 케틀레의 비범한 가설, 즉 사람들의 신체적 도덕적 특성에 대한 표준 곡선은 법칙이라는 것을 인간성과 자유선택에 억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설은, 기저에 작용하여 정규분포를 생성해 내는 무수히 많은 결정론적 원인들이라는 허구를 통해 개념적으로 보강되었다. 따라서 케틀레의 통계적 법칙들은 자율성을 향한 도상 과정에 있었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법칙들이 부수적인 필연성을 유발하는 미세한 요인들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법칙으로 간주된 것은 보다 이후였다. ... 새로운 유형의 법칙이 무대에 오르면서 사람들과 세계는 덜 지배받기보다 더 제어받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우연이 길들여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기하려 들 것이 아니라, 이 통계 이론이 인간에게서 모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도리어 이 통계 이론을 따를 경우 사회적 현상의 출처를 개인에게서 찾는 경우에서보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덜 침해당한다. 실제로, 집단적인 현상이 지니는 규칙성의 원인이 무엇이든지간에 집단적인 현상은 발생지와는 무관하게 그 효과를 강제로 창출해 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상이 가져오는 효과가 무작위로 달라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고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원인들이 개인들에 내재되었다면 그러한 원인을 지니는 사람들이 누군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그 결과, 집단적 현상이 발현되는 원인이 개인에 내재되어 있다는 가정은 엄격한 결정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인구통계 데이터에 나타나는 안정성이 개인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엄격한 결정론이 필수는 아니다. 그와 같은 힘은 특정한 개인을 가려 가면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힘의 결과로 특정한 유형의 행위가 구체적인 횟수만큼 실행되지만, 그러한 행위를 누가 수행할 것인지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 힘에 저항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이 힘에 휘둘리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관념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의 명단에 기존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심리적 힘 이외에 사회적 힘 하나를 추가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기존의 힘들이 인간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힘 역시 인간의 자유를 방해한다고 볼 필요가 없다. 기존의 힘들과 사회적 힘에 대해 똑같은 조건을 가정하면 된다. 전염병이 발생하는 경우 병의 강도는 사망률을 미리 결정짓겠지만, 이에 의해 누가 전염될 것인지까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유발하는 풍조와 관련하여 자살의 희생자들이 처하는 상황 역시 마찬가지다. - 에밀 뒤르켐Durkheim, Suicide

 

 

정상인란 평균이다. 우리는 또한 정규분포의 평균값average에 대해 '평균me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평균적인 인간이라는 말의 어원은 프랑스어의 l'homme moyen이며, 이를 만들어 낸 이는 케틀레였다. 이 아이디어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가지 않는가? 그렇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평균'은 거의 '정상'만큼이나 짓궂은 단어이다. (묘사의 관점에서) 평균 또는 중간intermediate이 (평가의 관점에서) 훌륭한 것에 해당한다는 아이디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들 중 가장 낯익은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흄의 주장과 같은 상태/당위성의 구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용golden mean은 (널리 통용되는 이 어구의 의미에 따르면) 가장 바람직한(좋은) 것이며, (실제로) 양 극단의 사이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절묘하고 주의 깊었다. 그는 '미덕은 과도함과 부족함이라는 두 악덕 사이의 중용'이라고 썼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좀 더 난해하다. '존재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본질에 대해 기술하는 경우에는 미덕에 해당하는 것은 중용이지만, 좋음과 최선에 관한 문제가 걸려 있을 때 미덕에 해당하는 것은 양 극단들 중 어느 한쪽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02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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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이 넘어가는데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온 사회가 얼어붙은 듯하다. 시골 밭에는 홍매화, 백매화, 수선화도 피어나고 쑥 캐다가 버무리도 만들어 먹으며 어김없이 찾아온 봄소식을 맞이합니다.

 

서울집 베란다에도 군자란, 폭죽초(루셀리아)가 꽃을 피우고 무화과 순도 봄을 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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