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가난이 건강하고 균형적인 삶의 길일지도!


[본문발췌]

"모든 죽음은 폭력적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잠자다가 조용히 생애를 마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고 싶어하지만, 그런 상상과 달리 자연사 같은 것은 결코 없다. 나는 그런 것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 클로드 란즈만


종으로서 보면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있다. 그러나 훨씬 더 나은 삶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세기 동안 우리가 사는 햇수는 늘어났지만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늘어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살 만한 삶 자체는 그다지 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대다수는 100세까지 살게 될지를 생각할 때면 여전히 "그런 일은 없기를"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지막 수십 년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아 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시간에 결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소 호흡기와 온갖 약물. 엉덩뼈 골절과 기저귀. 화학요법과 방사선요법. 수술 또 수술. 그리고 의료비. 맙소사, 그 엄청난 의료비.


생물의 몸이 이기적 유전자를 후대로 전달하는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내는 세계에서는 자연선택이 불멸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개체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모든 종은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에 가용 자원을 번식이나 수명 중 어느 한쪽에 할당되도록 진화해왔다. 양쪽에 다 투자할 수는 없다.


노화의 징표들 :  영양소 감지 교란, 단백질 항상성 상실, 세포 내 의사소통 변형, 줄기세포 소진, 텔로미어 마모,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 세포 노화, 후성유전학적 변형, 유전체 불안정(DNA)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장수 유전자들을 활성화할 수 있는 스트레스 요인들이 많다. 특정한 유형의 운동, 간헐적 단식, 저단백질 식단, 고온과 저온 노출 등이 그렇다. 이렇게 약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몸이나 세포가 반응해 활성을 띠는 현상을 "호르메시스hormesis"라고 한다.  호르메시스가 일어나면 장수 유전자들이 활성화할 때 생기는 약간의 스트레스가 몸 방어 체계의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숨죽이고, 보존하고, 좀 더 오래 생존을 도모하라고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장수의 출발점이다.


인간과 효모는 진화적으로 10억 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효모는 우리와 유전자의 약 70퍼센트가 같다. 그리고 효모가 그런 유전자로 하는 일은 우리가 똑같은 유전자로 하는 일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처럼 효모 또한 거의 언제나 2가지 중 하나를 하려고 시도한다. 먹으려고 하든지 번식하려고 애쓴다. 즉 늘 먹이를 추구하거나 번식을 추구하느라 바쁘다. 효모도 사람과 흡사하게 늙어 가면서 행동이 굼떠지고 더 커지고 둥글어지고 번식을 덜 한다. 그러나 인류가 이 과정을 수십 년에 걸쳐서 거치는 반면 효모 세포는 일주일 안에 겪는다. 그래서 효모는 노화를 이해하려는 연구의 좋은 출발점 역할을 한다.


"후성유전적 잡음epigenome noise"은 바로 이 같은 유형의 혼란을 일으킨다. 이 혼란은 대체로 DNA가 끊기는 일처럼 세포에 심한 손상이 일어남으로써 생긴다. 마그나 수페르스테스의 원초적 생존 회로에, 그리고 번식 능력을 잃은 늙은 효모 세포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혼란이다. 그리고 '노화의 정보 이론'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늙는 이유다. 머리가 세는 이유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는 이유며, 관절이 아프기 시작하는 이유다. 나아가 줄기세포 소진과 세포 노쇠에서부터 미토콘드리아 기능 이상과 텔로미어의 빠른 단축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노화의 징표가 나타나는 이유다.

젊음 -> 끊긴 DNA -> 유전체 불안정 -> DNA 포장과 유전자 조절(후성유전체)의 교란 -> 세포 정체성 상실 -> 세포 노화 -> 질병 -> 죽음


우리는 노화가 중년에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무렵이 되면 몸에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바스 시계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째깍거리기 시작한다. 


노화의 이 모든 증상들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DNA 손상 신호의 결과로 나타난 후성유전적 변화 때문에 생기고 있었다.
서투인을 비롯한 후성유전 인자들이 유전자를 떠나 DNA가 끊긴 자리로 가서 수선을 한 뒤에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늙게 하는 원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곳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들이 늘어난다. 아이스 생쥐를 다룰 때 말했듯이 DNA를 끊어서 생존 회로가 대처하도록 만들어 후성유전체를 교란할 때, 우리는 잡음을 도입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경관을 침식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쥐의 몸은 잘못 안내되어서 기능 이상이 일어난 세포들의 키메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노화다. 이 정보 상실이 바로 우리 모두를 심장병, 암, 통증, 쇠약, 죽음의 세계로 이끈다.


노화는 갈수록 높이가 높아지고 간격도 점점 짧아지는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면서 빠르게 달리는 장애물 경주에 더 가깝다. 우리는 결국 이 장애물 중 하나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또다시 넘어질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질 뿐이다. 장애물 하나를 치운다고 해서 앞에 놓인 길이 실제로 덜 위험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바로 개별 질병의 치료에 초점을 맞춘 현행 해결책들이 우리의 건강수명을 늘리는 쪽으로 큰 발전을 이룬다는 측면에서는 효과가 거의 없을뿐더러 비용만 많이 드는 이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장애물을 쓰러뜨릴 의학이다.


50세에 다다르면 우리는 머리가 세고 주름이 늘면서 자신이 부모와 닮아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65세에 다다랐을 때 아직 질병이나 장애가 없다면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80세까지 산다면 어떤 질병에 시달리느라 삶이 더 힘겹고, 덜 편안하고, 덜 즐거울 것이 거의 확실하다. 85세에 남성은 평균 4가지 질병, 여성은 5가지 질병에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심장병과 암, 관절염과 알츠하이머병, 신장질환과 당뇨병 등이다. 또 대부분은 고혈압, 허혈심장병, 심방세동, 치매 등 아직 진단을 받지 않은 질병을 몇 가지 더 지니고 있다. 노화는 이 모든 것들을 일으키는 어떤 위험 요인이다. 아니, 실제로 '바로 그' 위험 요인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온갖 요인들은 사실 하찮다. 흡연이 암에 걸릴 위험을 5배 증가시키지만 50세가 되면 암에 걸릴 위험이 100배 증가한다. 70세가 되면 100배로 증가한다. 이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확률은 심장병에도 적용된다. 당뇨병에도 적용된다. 치매에도 적용된다. 이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세계에서 국민이 노화와 싸우는 일을 돕기 위해 의미 있는 수준으로 자원을 쓰는 나라는 한 곳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보이는 것이 거의 없는 듯한 세상인데, "인생은 본래 그런 거야"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듯이 보인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법

  • 적게 먹어라. 절식(단식) -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우리 대부분이 허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몸을 결핍 상태로 두는 것 - 은 분명히 우리의 건강과 장수에 좋다.
  • 간헐적 단식 또는 주기적 단식. 
  • 육식을 줄여라.
  • 땀을 흘려라.
  • 몸을 차갑게 하라.
  • 후성유전적 경관을 흔들지 마라.



건강을 증진시키는 다른 많은 분자들과 그 화학적 유도체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에서 다량 생산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포도에서 레스베라트롤을, 버드나무 껍질에서 아스피린을, 갈레가(프랑스 라일락)에서 메트로포르민을, 녹차에서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를, 과일에서 케르세틴을, 마늘에서 알리신을 얻는다.
스트레스를 받는 식물은 인간이 그것들을 감지해 자신의 생존 회로를 투입시키도록 경보를 발령하는 이종호르메시스 분자들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 가장 색깔이 선명한 것을 고르자. 이종호르케시스 분자는 노란색, 빨간색, 주황색, 파란색을 띠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혜택이 하나 더 있다. 그런 것들은 대개 더 맛있다. 세계 최고의 포도주는 피노누아르처럼 스트레스에 민감한 품종이나 햇볕이 강하고 메마른 토양에서 생산된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런 포도주에는 레스라트롤이 가장 많이 들어 있다. 가장 맛좋은 딸기는 물이 부족해서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잎채소를 길러 본 사람이라면 다 알듯이 열기와 추위 모두에 노출된 양상추가 가장 잘 자란다. 흔히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조건에서 기르는 유기농 식품이 왜 몸에 더 좋은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3가지 주요 장수 경로. 역경을 겪는 동안 생존 메커니즘을 활성화함으로써 몸을 보호하도록 진화한 경로들이다. 저열량이나 저아미노산 식단 또는 운동을 통해 이 경로들이 활성화되면 생물은 더 건강해지고 더 질병 내성을 띠고 더 오래 살게 된다. 라파마이신, 메트포르민, 레스베라트롤, NAD 증진제 등 저열량 식단과 운동의 혜택을 흉내 내어 이 경로들을 자극하는 분자들은 다양한 생물들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우리는 아날로그며, 그래서 늙는다. 노화의 정보 이론'은 세포가 젊음의 정보를 상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늙고 병에 잘 걸리게 된다고 말한다. DNA는 정보를 오래가는 디지털 형식으로 저장하는 반면, 후성유전체는 아날로그 형식으로 저장하기 때문에 후성유전적 "잡음"이 늘어나기 쉽다. 1990년대의 DVD 플레이어에 비유하면 딱 좋다. 정보는 디지털이다. 움직이면서 그 정보를 읽는 판독 장치는 아날로그다. 노화는 디스크에 점점 늘어나면서 정보를 제대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긁힌 자국과 비슷하다.


후성유전적 재프로그래밍은 늙은 생쥐의 시신경을 재생하고 시력을 회복시킨다. '노화의 정보 이론'은 노화가 돌연변이로 유전 정보를 잃어서가 아니라 후성유전 정보가 상실되어 일어난다고 예측한다. 생쥐에게 Oct4, Sox2, Klf4라는 재프로그래밍 유전자를 감염시켰을 때 일어나는 세포의 노화 역전에는 TET 효소가 관여한다. 이 효소는 DA에 붙은 메틸기 꼬리표 중 적절한 것들만 제거함으로써 노화 시계를 되감고 세포가 살아남아서 신생아처럼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어느 꼬리표가 젊을 때의 것인지를 이 효소가 어떻게 아는지는 수수께끼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일은 클로드 새넌의 "관찰자", 즉 원본 데이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에 해당한다.


우리 세상을 더 친절하고 더 관용적이고 더 포용적이고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한결같은 추친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너무 오래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7년 사망하기 직전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편을 설득해 그들이 그 빛을 보도록 함으로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편이 결국은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진리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면서 이기는 것이다."


평등을 확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갑부들이 자녀뿐 아니라 반려동물마저 가난한 사람의 자녀보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위태로운 세계가 정말로 출현할 것이다. 부자와 빈자가 단순히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인간 삶을 정의하는 방식 자체를 통해 분리되는 세계, 부자는 진화하도록 허용되고 빈자는 뒤처지지는 세계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잠재력이 우리 세계의 가장 끔찍한 문제들 중 일부를 악화시킨다고 해도 - 그리고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서 우리에게 새로운 문젯거리들을 안겨줄 것이라고 해도 - 나는 낙관한다. 이 혁명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꿀 것이라고 여전히 낙관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으니까.


노동 시장은 나눌 수 있는 조각이 한정된 피자가 아니다. 누구나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노동 시장에 참여하는 나이 든 남녀가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사회 보장 제도가 파산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 최고의 처방이 될 수 있다. 사회 보장 제도를 잘 유지하는 과제의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더 오래 일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통해 목적을 추구할 기회와 활력을 수십 년 더 누리는 데 따르는 보상, 존경, 혜택을 고려할 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숙련도가 좀 떨어지는 사람까지 포함해 생산력이 있는 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최고의 방법은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을 고용하는 기업을 만들거나 유치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번영을 누리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원한다면 예산을 줄이고, 젊은이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퇴직 연령을 낮추고, 노령자의 의료비를 삭감하는 일을 하지 말기 바란다. 대신에 인구를 건강하고 생산적으로 유지하고, 교육과 혁신의 장벽을 모두 타파하기 바란다.


"과거를 잊고,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아주 짧고 초조한 법이다." - 세네카. 
그는 삶을 음미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간이 "아주 값싸게 ...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겨진다."라며 한탄했다.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 못한다."


미국이 노화 연구에 쓰는 예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라고해도 다른 대다수 선진국의 상황에 비하면 낫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지원조차 안 하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이 노화를 본모습, 즉 인구의 약 90퍼센트를 죽이는 질병이 아니라 삶의 불가피한 일부라고 보는 기존 견해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점은 명확하다. 노화는 질병이다. 너무나 확실하기에 이 말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양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계속 하련다. 노화는 질병이라고, 게다가 질병일 뿐 아니라 만병의 어머니다. 우리 모두가 걸리는 질병이다.

미래를 살 가치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려면 삶을 연장하고 보호하는 연구를 지원하고 오용을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모두가 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의사는 50세인 환자를 진료할 때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덜 아픈" 상태로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의료의 향방을 결정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 2가지가 있다. 나이와 경제력이다. 나이는 의사가 환자에게 알리고 논의하려는 치료법의 종류까지 제한할 때가 많다. 환자의 신체 활동이 줄어들고, 이미 얼마간 통증을 안고 살며, 시간이 흐를수록 몸 여기저기의 기능이 떨어질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경제력은 논의를 더욱 제약한다. 어떤 치료법이 환자의 삶을 얼마나 개선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며, 더 나아가 마음을 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의료 체계는 연령차별에 토대를 둔다. 젊을 때는 나이 먹었을 때 건강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치료를 받지 않는다. 나이 먹었을 때는 젊을 때 의례 하던 치료를 받지 않는다.


현재 우리 대다수가 죽는 방식은 야만적이다. 우리는 긴 세월에 걸쳐 쇠퇴한다. 그리고 통증, 슬픔, 혼란, 두려움을 겪는 기간을 연장함으로써 더욱더 많은 통증, 슬픔, 혼란, 두려움을 겪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은 더욱 오래 슬픔, 희생, 동요를 느끼면서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직하면 사랑하는 이들은 안도할 때가 많다. 대다수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노화 연구를 하는 대대수는 노화와의 싸움이 죽음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건강한 삶을 연장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훨씬 더 나은 상태에서 - 사실상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빠르고 고통 없이. 준비가 되었을 때.


소비가 "자원과 생태계에 가하는 압력이 인구 성장보다 2배나 많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 조지 몬비오


우리가 소비 때문에 멸종한다면 더 길고 더 건강한 삶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 그러니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수명을 늘리든 말든 간에 우리 생존은 소비를 덜하고, 혁신을 더 이루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는 데 달려 있다.


더 공감하고, 더 온정을 베풀고, 더 용서하고, 더 정의로워야 할 것이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더 인간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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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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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놔두고 떠나는 여행, 생각과 삶을 자유롭게 한다.
 
 
[본문발췌]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능가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견고한 본질을 붙잡고 씨름한다.
 
 
모든 길의 끝에는 <승리의 여신>이 기다리고 있어.. 그런데 너는 항상 조급하게 굴다 끝내 용기를 잃고 돌아서 버리지. 대중은 <세이렌>을 보지 못해.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지 못하지. 눈멀고 귀먹은 채. 지상에 매인 자신들의 노를 젓느라 웅크리고 있을 뿐이야. 그러나 보다 정선된 인간인 선장은 자기 내면 - 자신의 영혼 - 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와 더불어 장엄하게 삶을 탕진하지. 너는 인생에 다른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엾은 인간들은 세이렌의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아. 조심스럽고 겁 많은 그들은 평생 금화 다는 저울로 <예-아니오>를 저울질하다가 죽는 거야
 

인간의 가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향한 몸부림에 있다.
 
 
우리의 기만, 우리의 위선, 우리의 비겁이 쓰디쓴 담즙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다.
 
 
'군주는 망설이다 그르치느니 주체할 수 없는 힘 때문에 그르치는 편이 낫다. 운명의 신은 여성이다. 따라서 그것을 정복하려면 과감하고 거칠게 대해야 한다.' - 마케아벨리
 
 
사상을 믿는 세 가지 부류

  1. 지난날의 미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편협하게, 광적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전투를 치른다.
  2. 지난날의 미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삶의 모든 단면에 매료되는 사람들. 따라서 그들은 삶의 최후의 얼굴 역시 덧없고 상대적이라는 사실-오늘날의 사상이다-을 잘 알고 있다. 식견이 많고, 감각이 예민하고, 피로에 지친 그들은 손을 접고 앉아 세이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3. 지난날의 미를 이해하고 사랑하여 무서우리만치 강렬하고 짧은 한순간 옛 노래에 도취되었다가도 억지로 몸을 떼어 내어, 세이렌의 노래를 기억 속에 묶어 둔 채 계속 여행하는 사람들. 그들은 필연적으로 오늘날의 상대적인 진실들을 절박하게 표명하고, 잠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처럼 기쁨을 맛본 후 첫 번째 부류처럼 투쟁을 계속한다.

 
 
미래는 다음의 두 가지를 결합시키는 민족의 것이다. 오늘날의 유럽은 첫 번째 요소를 가졌다. 동양은 두 번째 요소를 지녔다.

  1. 현대의 기술
  2. 하나의 신념. 이것은 종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말해 구심점과 깊은 뿌리를 가진 양심을 뜻한다.

 
 
<정신>에는 유물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담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에도 관념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다시 말해 대부분의 상황에서는-굶주림, 즉 경제적 요인이 일차적 동기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분로, 증오, 사랑, 생식의 본능 등등)의 일차적 동기는 정념이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가축, 땅, 생업 수단, 자신의 몸과 두뇌.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을 해방시켜 줄 의무가 있지요.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하고 계발함으로써입니다. 그것들을 해방시켜 주지 못하면 인간 자신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민족에게는 저 나름의 외연 - 땅, 전통, 사상 - 이 있고 그것이 해방을 원할 때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에게는 팔레스타인이 있지요.
 
 
바람처럼 떠돌던 무애인(無碍人) 조르바를 만남으로써 그는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집착의 원인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유의 최대의 걸림돌을 뛰어넘는다. 자유의 핵심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이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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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만한 바보가 권력을 잡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대한민국에 현재 진행형이다.


[본문발췌]


과학은 지식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태도이다.


'토론회에는 거만한 바보가 많았고,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바보는 나쁘지 않다. 대화할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거만한 바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직한 바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직하지 않은 바보는 골칫거리다! 나는 토론회에서 거만한 바보를 무더기로 만났고 아주 낭패했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 - <파인만!>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쉬었다. '난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렇게 인정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점검하는 습관을 익히면 되는 일이었다.


'거만한 바보'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다. 권력을 장악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악행을 저지른다. 문명의 역사는 세속권력이나 종교권력을 거머쥔 '거만한 바보'들이 자연과 인간에 관한 사실을 탐구하고 밝혀낸 과학자를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책을 불태운 사건으로 얼룩졌다.


사람은 정말이지 서로 다르다. 같은 종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을 정도다. 한겨울에 길고양이한테 물과 먹이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몰래 길고양이를 붙잡아 학대하고 죽이는 사람도 있다. 어떤 부모는 거리의 환경미화원을 가리키면서 아이한테 저분들 덕에 우리가 깨끗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부모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겁을 준다. 돈이 많아도 티를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부자도 아니면서 돈자랑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만 어떤 이는 자신에게 이로운지 여부를 먼저 따진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사람이 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만 관대한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을 '전향'이라고 하자. 전향 그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노선을 바꾸었는지에 따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전향을 좋게 또는 나쁘게 평가할 뿐이다. 나는 전향 그 자체를 비난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한다. 옳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을 때가 있다. 게다가 '자유의지'라는 것이 정말 있지 의심한다. 그런 것을 들어 누구에겐가 감정적 호오好惡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뇌에 깃든 우리의 자아는 단단하지 않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비틀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교정하고 보강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견딘다. 자유의지는 그런 자아가 지닌 것이다. 자아가 불안정한데 자유의지가 어찌 강고하겠는가. 모든 전향을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본다면 자아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자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보다는 뇌의 물리적 변화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때문에 달라질 가능성이 더 높다. 인문학보다는 뇌과학과 신경생리학이 전향이라는 행위를 더 잘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오래되면 성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 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은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 근육, 관절, 시력, 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과 데이터 증가 효과가 하드웨어 퇴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상쇄하는 동안은 더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화로 인해 하드웨어가 심하게 나빠지면 소프트웨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를 상실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신규 데이터 유입은 줄어든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 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 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분명 유전적 우연과 환경적 필연이 작용한 자연선택의 산물이고, 문명은 우리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본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명의 힘으로 본능을 어느 정도는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본성 그 자체를 역사의 시간에 바꾸지는 못한다. 한 종의 본성이 달라지는 데는 역사의 시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 진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개인들이 인종적, 경제적, 국가적 집단으로 뭉치면 힘이 허용하는 일은 무엇이든 한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더 이기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탄소는 왜 생명의 중심이 되었을까? 과학자들이 찾은 답을 정치학 언어로 번역하면, 탄소는 '유능한 중도'여서 성공했다. 중도는 좌우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가끔 치우치는 경우에도 슬쩍 편을 드는 정도에 그칠 뿐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 열정이 있어도 몰입하지 않으며, 원칙을 지녔지만 독선에 빠지지 않는다. 싸움을 먼저 걸지는 않아도 누가 싸움을 걸면 피하지 않는다. 무능한 중도는 극단에 휘둘리지만 유능한 중도는 좌우를 통합한다. 탄소는 유능한 중도의 대표 사례다. 사람으로 치면 성격이 온화하고 태도가 유연하다. 남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지만 필요할 때는 원만한 관계를 맺는다. 남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 무엇이든 되는 쪽으로 일을 만들어 나간다. 


의학자는 암을 고치고 유전 결함을 바로잡으며 잘린 신경을 수리한다. 문제가 하나같이 복잡해서 근본적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의학은 극적으로 진보한다. 세계의 수많은 연구 집ㅈ단이 정보를 공유한다. 신경생물학자, 미생물학자, 분자유전학자들은 경쟁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한다. 의학자는 분자생물학과 세포생물학을 토대로 건강과 질병을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준까지 내려가서 연구한다. 유기체에서 분자까지 생물 조직의 모든 수준에 적용할 수 있는 근본 원리를 사용한다. 의학은 통섭을 행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는 인종 갈등을 완화하는 방법, 개발도상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방법, 세계 무역을 최적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낙관적 전망이 부족하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이념투쟁 때문에 중요한 발견도 빛이 바랜다. 인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는 서로 이해하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과학을 통일하고 인도하는 지식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말한다. 혼돈 상태를 창조적 효소라 착각하고 이론을 당파적인 사회운동과 개인적인 정치철학에 얽어맨다. 예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사회다윈주의처럼 극단적인 이론을 수용했고, 지금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 극단적 사회주의까지 온갖 이념을 인정한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 삼는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까지 나왔으니 이념의 시장은 한없이 넓어졌다. 사회과학자들은 부족 충성심에 쉽게 속박당하고 이론의 창시자에게 구속된다. 사회과학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 이야기를 생물학과 심리학의 물리적 실재에 단 한번도 끼워 넣어 보지 않았고 심리학과 생물학의 발견을 무시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과대평가하고 인종주의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통괄적, 보편적 지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양한 학문이 넓고 깊게 발전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딜레마와 마주쳤다. 우리는 이제 세계를 전체로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 세계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진정한 목표를 영원히 상실하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불완전한 지식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여러 사실과 이론을 종합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다른 방법은 없다. 내가 말하려는 개념은 하나뿐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공간'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잠정적인 대답을 요약하면,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은 생물학의 사건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할 수 있을 것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그럴법한 이야기'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 인문학의 전통적인 언어로 바꾸어 보자.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을 시간을 조금 덜어 이 책을 썼다. 쓰는 동안 즐거웠다. 남들과 나누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게 전부다.


하찮은 수학은 유용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무용하다. '수학이 과학의 여왕이라면 가장 쓸모없는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연구의 무용성을 자랑삼는 수학자는 없다. 정수론으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한다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산술, 대수학, 유클리드 기하학, 미적분학과 대학의 공학, 물리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다. 일상의 일과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을 주는 수학,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쓰는 수학도 그렇다. 현대 기하학과 대수학, 정수론, 집합론, 함수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진정한 수학이다.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쓸모가 없다. 인류의 물질적 평안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 유용성을 기준으로 보면 진정한 수학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이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찮은 수학이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는 것과 달리 진정한 수학은 인간의 일상에서 떨어져 있다. 정수론이나 상대성이론이 전쟁 목적에 쓰인 경우는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수학자의 삶을 정당하게 여길 수 있다. - G. H. 하디, <어느 수학자의 변명>


수학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논리와 공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 난공불락의 진리를 찾아낸다. 수학적 증명은 영원불멸이다.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평면에 그려진 모든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한다. 수학자는 산을 오르거나 사막을 헤매거나 지하 동굴을 탐험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만으로 영원불멸의 진리를 선포한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 브라이언 그린, <엔드 오브 타임>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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