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본능의 결과다.

 

 

[본문발췌]

 

 

40억 년 전 스스로 복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이 곧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들은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것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 지어 마치 뒤뚱거리며 걷는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다. 그것들은 원격 조종으로 외계를 교묘하게 다루고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도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것들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을 짜 넣은 로봇 기계이다. 이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 뿐만 아니라 세대 간 그리고 암수 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볼 수 있다.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물의 이기적 행동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집단 내 이타주의는 집단 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기본 원리다.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가령 '살아 있다'라는 말이 사전에 있다고 해도 그 말이 반드시 현실 세계에서 무엇인가 명확한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고충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기의 자기 복제자를 '살아 있다'고 하든 하지 않든 그들은 생명의 조상이며, 우리의 선조였다. 

 

 

유성 생식을 하는 종에서 개체는 자연 선택의 중요한 단위가 되기에는 너무 크고 수명이 짧은 유전 단위다.

 

 

성과 교차로 인해 유전자 풀은 유동적이며 유전자는 부분적으로 뒤섞인다.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그 수가 늘어나고 또 어떤 유전자는 수가 줄어드는 과정이다. 

 

 

음의 피드백(negative feedback)

'목적 기계', 즉 의식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기계 내지 물건은 사물의 현재 상태와 자신이 '바라는' 상태의 차이를 측정하는 일종의 장치를 가지고 있다. 이 차이가 클수록 기계는 더 열심히 돌아가도록 만들어진다. 이렇게 해서 기계는 자동적으로 그 둘의 차이를 좁혀 가며(이 때문에 '음의 피드백'이라고 불린다.), 자신이 '바라는' 상태에 도달하면 작동을 멈춘다. 와트 증기 기관의 조속기에는 증기 기관의 힘으로 도는 한 쌍의 공이 있는데, 그 공은 각각 경첩이 있는 팔의 끝에 붙어 있다. 공이 빨리 돌수록 원심력이 세져 팔이 수평 위치로 밀려 올라가게 되는데, 중력이 그 움직임을 제한한다. 팔은 엔진에 증기를 보내는 밸브에 연결되어 있으며, 팔이 수평에 가까워지면 증기의 공급이 감소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엔진이 지나치게 빨라지면 공급되는 증기의 양이 줄고 엔진은 느려진다. 반대로 엔진이 너무 느려지면 밸브를 통해 자동적으로 더 많은 양의 증기가 엔진에 보내져 엔진은 제 속도를 되찾는다. 이와 같은 목적 기계는 종종 과다 반응과 시차 때문에 그 성능이 들쭉날쭉하기도 하는데, 이 성능의 변동 폭을 줄이는 부속 장치를 잘 만드는 것이 기술자의 몫이다. 

 

 

체스 게임이 그렇듯이 생명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우발적 사건이란 수없이 많기 때문에 도저히 그 모든 것을 예상할 수는 없다. 체스 프로그래머와 마찬가지로, 유전자는 생존 기계에게 생존 기술의 각론이 아니라 일반 전략이나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 선택은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도록 자기의 생존 기계를 제어하는 유전자를 선호한다. 이것은 같은 종이거나 다른 종이거나 상관없이 다른 생존 기계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도 포함한다. ... 여러 종의 생존 기계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생존 기계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일 수도 있고, 기생자와 숙주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희소 자원을 놓고 싸우는 겨쟁 관계일 수도 있다. 또 벌이 꽃가루 운반자로서 꽃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와 같이 특수한 방법으로 이용당할수도 있다.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프로그램된 행동 방침이다. 전략의 일례를 들어 보면,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그가 보복해 오면 도망쳐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가 전략을 의식적으로 고안해 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동물을, 근육을 제어하는 미리 프로그램된 컴퓨터가 조종하는 로봇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편의상 이 전략을 일종의 지시처럼 말로 쉽게 표현하는 것뿐이다. 어떤 불분명한 메커니즘에 의해 동물은 마치 이러한 지시를 따르는 것처럼 행동한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는 개체군에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일단 그 전략을 채택하면 다른 대체 전략이 그 전략을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어떤 개체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개체군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 개체를 제외한 나머지 개체들도 각각 자기의 성공을 최대화하려는 개체들이므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일단 그 전략이 진화하면 다른 어떤 전략도 그 전략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없는 그런 전략이다. 환경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면 잠시 동안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기간이 올 수 있으며, 개체군 내에서 변동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전략이 일단 ESS가 되면 그것은 계속 ESS로 남는다. 자연 선택은 이 전략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벌할 것이다.

 

ESS 개념은 우리가 제3장에서 뒤로 미뤘던, 좋은 팀워크를 필요로 하는 한 보트 안의 조정 선수들(한 몸 안의 유전자들에 해당)의 예에서 생긴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유전자는 혼자 있을 때 '좋은 것'이 아니라, 유전자 풀내 다른 유전자들을 배경으로 할 때 좋은 것이어야 선택한다. 좋은 유전자는 수 세대에 걸쳐 몸을 공유해야 할 다른 유전자들과 잘 어울리고 또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 식물을 잘게 씹는 이빨의 유전자는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내에서는 좋은 유전자지만 육식 동물의 유전자 풀내에서는 나쁜 유전자이다.

 

 

유전자 풀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들의 세트가 될 것이며, 이는 어떠한 새로운 유전자도 침입할 수 없는 유전자 풀로 정의된다. 돌연변이나 재조합, 또는 이입으로 생기는 새로운 유전자는 대부분이 자연 선택의 벌을 받아 즉시 제거되고 진화적으로 안정한 유전자 세트는 복원된다. 어떤 새로운 유전자가 그 세트에 침입하는 데 성공해 유전자 풀내에 퍼져 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불안정한 과도기를 거쳐 진화적으로 안정한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진다. 작은 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예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개체군에는 또 다른 안정점이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고 때때로 이쪽 안정점에서 저쪽 안정점으로 갑자기 펄쩍 뛰어넘기도 한다. 진보를 향한 진화는 꾸준히 올라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한 안정기에서 다음 안정기로 불연속적인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개체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자기 조절단위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착각은 유전자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선택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유전자는 그 '우수성' 때문에 선택된다. 그러나 그 우수성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세트, 즉 현재의 유전자 풀을 배경으로 했을 때 그 성과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기초하여 결정된다.

 

 

이기적 유전자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DNA의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원시 수프에서처럼, 그것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특정 DNA 조각의 모든 복사본들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적절한 용어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유전자가 마치 의식적으로 목적을 갖고 있는 듯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이 무엇인가 질문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은 유전자 풀 속에 그 수를 늘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에 프로그램 짜 넣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유전자가 다수의 다른 개체 내에 동시에 존재하는 분산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장의 핵심은 유전자가 남의 몸속에 들어앉아 있는 자신의 복사본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개체의 이타주의로 나타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이기주의에서 생겨난 것이다. 

 

 

개개의 부모 동물은 가족계획을 실행하는데, 이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손의 출생률을 최적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자기 새끼의 수를 최대화하려고 힘쓴다. 개체에서 너무 많은 수의 새끼를 가지도록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 계속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 종류의 유전자를 체내에 가진 새끼들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로서 자기 복제자. 밈(meme)

 

 

자기 복제자의 일반적 성질 - 장수,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

 

 

뇌에서는 아마도 저장 용량보다 시간이 중요한 제한 요인이며, 심한 경쟁의 대상일 것이다. 인간의 뇌와 그 제어를 받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어떤 사람의 뇌의 집중력을 독점하고 있다면 '경쟁자'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밈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광고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관의 서가 공간 등과 같은 상품에서도 경쟁하고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은,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동물의 행동'에 대해 썼지만 이 정리는 색깔, 크기, 형상 등 어떤 것에나 적용될 수 있다. 

 

 

자연 선택의 근본적인 단위로 생존에 성공 또는 실패하는 기본적인 것, 그리고 때때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수반하면서 동일한 사본의 계보를 형성하는 기본 단위를 자기 복제자라고 한다. DNA 분자는 자기 복제자다. 자기 복제자는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어떠한 이유로 거대한 공동체적 생존 기계, 즉 운반자 속에 모인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운반자는 우리 자신과 같은 개체의 몸이다. 따라서 몸은 자기 복제자가 아니다. 그것은 운반자이다. 지금까지 잘못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나는 이 점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다. 운반자 자신은 스스로를 복제하지 못한다. 운반자는 자기를 구성하는 자기 복제자들을 퍼뜨리기 위해 일한다. 자기 복제자는 행동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며 먹이를 잡거나 포식자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한다. 자기 복제자는 이와 같은 모든 것을 하는 운반자를 만든다.

 

 

진화는 유전적인 변화, 즉 돌연변이를 필요로 한다.

 

 

병목형 생활사가 왜 분명히 구분된 단위 운반자로서 생물 개체의 진화를 촉진하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살펴 보았다. 이 세 가지에는 각각 '제도판으로의 회귀back to the drawing board', '주기의 규칙성orderly timing-cycle', '세포의 동일성cellular uniformity'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다. 

 

 

불멸의 자기 복제자....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이라는 생명관의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나는 이것이 우주의 어떤 장소에 있는 생물에게도 적용되는 생명관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생명의 원동력이자 가장 근본적인 단위는 자기 복제자다. 우주에서 자신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자기 복제자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작은 입자들이 우연히 마구 부딪쳐서 출현한다. 자기 복제자가 일단 존재하면 그것은 자신의 복사본을 한없이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복제 과정도 완벽하지 않으며 자기 복제자들의 집단 내에는 몇 개의 다른 변이체가 생긴다. 이 변이체 중 어떤 것은 자기 복제 능력을 잃어서 자신이 소멸할 때 그 변종도 아울러 소멸하고 만다. 다른 변이체는 아직 복제를 할 수는 있으나 효율이 나쁘다. 또 다른 변이체는 새로운 묘법을 획득하여 자기의 조상이나 다른 변이체들보다 자기 복제의 효율이 훨씬 좋다. 그리하여 개체군 내에서 많아지는 것은 그들의 자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상은 가장 강력하고 재주 있는 자기 복제자로 채워진다. 또한 좋은 자기 복자제가 되기 위한 더욱 정교한 방법들이 서서히 발견된다. 자기 복제자는 자기 고유의 성질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상에 초래하는 결과 덕분에 살아남는다. 그 결과는 매우 간접적일 수도 있다. 필요한 단 한 가지 조건은 그 결과가 얼마나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것이든 간에 피드백을 통해 최종적으로 자기 복제자의 복제 성공률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지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즉 선제 조건에 달려 있다. 이런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자기 복제자와 이것이 초래하는 결과일 것이다. 영국인과 독일인 조정 선수의 예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이익을 주고받는 자기 복제자들은 양자가 존재할 때 그 수가 많아질 것이다. 지구 상의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 중 어느 시점에선가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자기 복제자가 모여 개체적 운반자 - 세포, 그리고 이후에는 다세포 생물체 - 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병목형 생활사를 가진 운반자가 번성하게 되었고 이들은 보다 더 개별적으로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고 운반자다워졌다. 생물 물질이 이처럼 개별 운반자 속에 포장되는 것은 뚜렷이 도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생물학자가 이 세상에 등장하여 생명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 그 질문 대부분은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관한 것이었다.

생물학자가 처음 인식한 것은 생물 개체였던 반면,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생물 개체가 사용하는 장치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생물학을 다시 올바른 길로 돌려, 역사상에서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의 측면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우선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명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이 점을 명심하는 하나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한 유전자가 표현형에 미치는 효과가 모두 그것이 위치하는 개체의 몸속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사실상 유전자는 개체의 체벽을 통과하여 바깥세상에 있는 대상을 조종한다. 그 대상 중 어떤 것은 무생물체고, 어떤 것은 다른 생물이며, 또 어떤 것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확장된 표현형의 힘이 방사상으로 뻗은 그물눈 중심에 유전자가 들어앉아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대상물은 여러 생물 개체 속에 들어앉은 여러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력의 그물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유전자의 긴 팔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 세상 전체가, 멀거나 가까운 표현형에 미치는 유전자의 영향을 잇는 인과의 화살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우연이라기에는 실제적으로 너무 중요하지만, 필연이라 하기에는 이론적으로 불충분한 사실을 하나 추가해 두자. 그것은 이들 인과의 화살이 뭉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복제자는 더 이상 바닷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지 않다. 이들은 거대한 군체, 즉 개체의 몸속에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뭉쳐진 자기 복제자가 표현형에 초래하는 결과는 세상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개체에 응집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 우리에게 이다지도 낯익은 개체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우주의 어떤 장소든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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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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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이 많은 것을 창조한 것 같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소비하여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편리함과 욕구를 충족시켰을 뿐이다.

 

소비를 최소화하고 효율화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환경을 인류 후손에게 물려주기위한 최선이 아닐까?

 

 

[본문발췌]

 

 

자연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크든 작든, 공공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모든 종류의 자연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절대 야생의 지대가 필요하다. 나는 어떤 장소에서든 인간경제와 관련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둘째, 자연은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도록 허용할 것인가? 셋째, 자연은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인가?

 

 

보호주의자들은 생태학적으로 번영한 상태에서 인간 역시 번영할 수 있으며, 그런 건강 상태의 기준과 지표는 야생생물들의 다양성임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의 잠재된 야생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아울러, 표토 속에 우글거리는 야생의 생물체들을 떼어놓고는 농업을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벌레, 박테리아, 기타 야생의 생물체들이 표토 속에서 분해, 부식토 생성, 수분 저장, 배수 등 제 나름의 역할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생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보존하는 길이다"라는 헨리 소로의 말은 내면의 진리일뿐만 아니라 현실이기도 하다. 

 

 

일찍이 그리스인들과 히브리인들은 스스로 모든 규칙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인간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네. 

 

 

일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지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산업경제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다. 일이 부적절하게 이루어진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값비싼 대가가 치러지게 마련이다. '경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 세대에게 계산서를 넘겨주는 것이 전부인데, 그 과정에서 고통스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가르침과 배움은 가치를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우리가 굳이 교육의 가격을 따진다면, 그 가치가 손상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그들이 받아 누리는 선물에 늘 따라다니는 책임들, 다시 말해 받은 것을 잘 이용하고 후세에 온전하게 물려줄 책임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상품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무기로 만드는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책임의식에서 멀어질 때 교육은 탐욕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로 인해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한 가지 원인은 그 비포용성 때문이다. 더욱이 산업경제는 자신에게 포함되지 않는 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으며, 무엇이 산업경제에 포함되느냐 포함되지 않느냐에 지나치게 연연한다. 이렇듯 산업경제에 대해 비판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고 폭넓게 받아들이는 경제는 없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길게 고민하지 않고도 하느님 나라의 첫 번째 원칙, 즉 만물을 아우른다는 원칙이 떠오른다. ... 두 번째 원칙은 생태학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원칙인데, 하느님 나라에 속한 만물은 그 나라와 그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에는 질서가 있다. 세 번째 원칙은, 인간은 하느님 나라에 속한 모든 생명체들에 대해서, 혹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완벽한 방식이나 규칙으로 그것들을 아우르는가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결코 알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즉 우리는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이 질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난해하다. 우리 처지가 어렵다는 것은 그 질서를 완벽하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섣불리 참견하고 침해한다면 엄중한 형벌을 받을것이라는 네 번째 원칙을 알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전통적인 지식이 허용하는 수준에서 완전하게 인간으로서의 우리 스스로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에 입각한 지식, 계산, 계략 등의 방법을 통해서 상당한 범위의 작은 인간경제에 참여한다. 위대한 경제에 참여할 때 역시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겸손, 연민, 인내, 관용, 이해력이 추가로 구비되어야 한다. 앞에서 암시되기는 했지만 두 경제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는, 인간 경제가 가치를 평가하고 분배하고 이용하고 또 가치 있는 것들을 보존할 수 있어도 가치를 직접 창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가치는 오로지 위대한 경제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의 것들에 가치를 덧붙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합판으로, 합판을 의자로 변형시키면서 만들어낸 각각의 물건에 가치를 첨가할 수 있다. 선한 인간경제에서 이 같은 변형은 적절한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 작업은 적절한 평가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선한 인간경제는 자신이 직접 만들지 않은 재료들과 힘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인간경제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며, 노동자의 지식과 재능도 만들지 않았다. 모든 단계에서 인간이 가미한 것은 인공적인 것이며, 기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교의 가치는 인간생활에는 중요할지 몰라도 어쨌거나 2차적인 가치일 뿐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출할 마음을 먹으면 맨 먼저 추상적인 가치를 만든다. 그 다음에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서 그릇되고, 압제적이고, 파괴적인 가치를 만든다. 예를 들어 돈의 가치는 의식주와 같은 생필품의 가치를 정당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때만 진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생필품들은 궁극적으로 보면 위대한 경제 안에서 창출된 것이다. 인간들 역시 금전적인 가치를 추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인플레이션과 폭리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생필품의 가치를 왜곡하고 자연과 인간 자원에 손실을 입힌다. 인플레이션과 폭리 그리고 이에 따른 손실은 어쩌면 인간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억지 부리는 데 대한 징벌쯤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기계적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흙은 그 기능을 살펴보면 복합적이고도 놀라운 활동을 한다. 예를 들어, 건강한 토양은 물을 보유하는 동시에 배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분수계(혹은 분수령. 내린 비가 각각 반대쪽으로 흐르는 경계선으로 하천의 유역을 나누는 경계선이 된다)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말할 때 이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또한 분수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용하는 '건강'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단순히 역학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건강한 토양은 죽어 그 속에 묻히는 생명체들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물을 저장하는 동시에 배출하는 토양의 이 이중적 능력은 우리에게 온갖 도움을 준다. 토양은 우리에게 좋은 작물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홍수 조절과 지속적인 수분 공급, 그리고 침식 조절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표토는 물을 배출하는 동시에 보유한다. 이처럼 다양성이 수용력을 증가시키는 점은 산업적인 논리와는 크게 다르다. 산업주의자들은 저수와 배수를 서로 다른 반대 기능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다양성을 산업적인 과정에 해로운 것으로 보고 한 가지를 희생해서 다른 한 가지를 활성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역을 확대함으로써 수용력을 확대하려는 절망적인 방법을 이용한다. 따라서 문제를 격리시켜 지나치게 간소해야만 효과가 나타나는 기계적인 해결책에 의존한다. 산업주의자들이 비난받는 이유는 발전이란 설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저수를 쉽게 하려면 분리대나 댐과 같이 전문화된 물 저장장치에 의지해야 한다. 또, 베수를 의해서는 배수관이 도랑이나 심토파쇄기를 이용해야 한다. 물론 내 분석이 지나치게 막연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예외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토양 보호의 책임이 원칙적으로 농부나 토양 관리인이 아니라 기술자에게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양 보호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땅을 파헤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의 이상은 '최소의 소비를 통한 최대의 복지' (E. F. 슈마허)가 되어야 하며,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인시키고 또 요구한다. 

 

 

작은 경제의 일들이 위대한 경제 안에 적절하게 배치될 때 이런 미덕들을 꼼꼼하게 배려하면서 그 원리를 실행에 옮길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 전문화를 필할 수 있다. 산업경제는 일에 대한 극도의 전문화, 다시 말해 일에서 그 결과를 분리할 것을 요구한다. 산업경제는 이익의 분배로 존속되는 데다가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구매자, 사용자와 노동자, 일하는 자와 일과 생산물, 원재료와 상품, 자연과 인공, 생각과 말과 행동 등이 서로 맺고 있는 근본적인 유대관계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유대관계에서 분리된, 전문화된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자신들을 '관찰자' 혹은 '객관적 관찰자', 즉 아무런 관련도 책임질 일도 없는 구경꾼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산업화된 예술과 과학은 거짓이며, 이러한 분리는 엄청난 오류이다. 결과의 전문화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경제 안에서는 바깥쪽도, 전문화나 보편성으로의 도피도, 휴식시간도 없다. 심지어는 무의미도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든 말든 상관없이 위대한 경제의 구성원들 모두가 하나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집하고 인내하지 못한다면 분해하고 파괴하는 것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범위 바깥에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그런 억측은 다른 구성원들과의 유대관계를 해칠 뿐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 산업경제에서 예술과 과학은 전문화된 '직업'인 데다 각각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의사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위대한 경제 안에서는 예술과 과학 모두가 그 구성원이다. 예술과 과학은 위대한 경제로부터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서로 통하는 공동체의 언어 또한 익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땅을 집약적으로 이용하려면 땅을 파괴하지 않는 직접적이고 친밀한 인간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흔히들 소유권을 지녔다고 하면 적절하게 보살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부재 소유권이 땅에 대한 저주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인되어온 사실이다. 기업의 소유자는 종업원의 무능력, 무책임 혹은 반감에 시달린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는 수로와 도로의 대중 소유권은 실제로 욕을 먹고 있다. 그러므로 땅은 소유권뿐만 아니라 소유자 개인이 참여하고 이용해주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땅을 가장 바람직하게 이용하는 길은 소유권을 가장 폭넓게 분배하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자기 것이라 생각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싸운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자발적으로 싸울 것인가는 의문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에는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열망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일시성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목적과 기준이라는 규정에 의해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다. 결혼, 혈연, 우정, 이웃의 정으로 맺어진 어떤 관계도 그저 편리에 따라 존재할 수는 없다.

 

 

산업사회의 방식에 따르면, 이상적인 인간의 거주는 거주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 곳이다. 남이 집을 지어주고, 설비를 갖추어주고, 장식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비해준다. 그곳에 사는 부부는 가능한 한 가족이나 집과 관련해서 생기는 힘든 일들을 직접 하지 않는다. 가정 내에서 그들이 하는 노동이란 주로 물건을 사고, 보관하고, 내다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조차 '열등한'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 '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산업사회가 지향하는 최종의 목표는 버튼만 누르면 모든 문제가 처리되는 '주택'이다. 그런 '주택'에 사는 부부는 서로에 대해 성적, 법적, 사회적 의미의 파트너이긴 하겠지만 협력자는 아니다. 그들은 공동으로, 혹은 서로에게 필요한 일들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들이 늘어놓는 말에는 자기 손으로 해내거나 만들어낸 것이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한 과거에는 본질적으로 장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기에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뿐이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대체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과정의 하나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동안 산업경제는 분리, 퇴화, 교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가 서로서로 분리되자 노동과 그 산물이 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의 생각이 타락하면 정신은 기계나 전문가들, 정부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 더욱이 산업화 과정을 통해서 공짜로 주어지던 것이 비싼 대용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신체적인 건강은 삶에 필요한 노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쓸모 없어진 신체를 대신해서 번영한 산업화 시대의 기계는 치명적이고 잔혹하리만큼 비싸다. 인간의 몸이 유용하던 시절에는 육체가 쓸모 없어지면 당연히 죽는 것이고, 죽음은 치유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에서 죽음은 점점 더 비싼 치료가 필요한 질병과 같이 멸시된다. 또한,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시골 마을과 도시 근교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밀집해서 살았다.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공짜로 주어지거나 싼값에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산업화 시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단순하고도 너무나 취약한 결합은 쉽게 붕괴되었으며 값비싸고 파괴적인 통신 및 운송 산업에 의해 대체되었다.

 

 

산업경제는 전형적인 채취산업으로서 가져오고, 만들고, 이용하고, 폐기한다. 다시 말해 소비로부터 오염에 이르는 과정을 거친다. 반면에 농업은 가져오고, 만들고, 이용하고, 반환해서 다시 채워 넣는 경제에 속한다.

 

 

농업적 시각에서 볼 때, 생산성보다 나은 말은 번영이다. 이 말에는 회계적인 충실도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영이란 말에는 생산적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생산 수단을 적절히 배려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자기 주변을 소중히 돌볼 줄 알아야 번영할 수 있다. 번영한다는 것은, 전체의 일부가 되어 함께 번영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번영할 수 없다. 자신의 땅, 작물, 동물, 장소, 공동체가 번영할 때에만 비로소 번영할 수 있다. ...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는 지속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지속성의 가치는 오로지 번영에 의해 드러난다.

 

 

정착생활 때문에 비만을 비롯한 기타 질병들의 전염이 횡행하고 '건강 증진 운동'이 다양하고 활발하게 실천되는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아직까지도 개발되지 못한 이용 가능한 에너지 공급원은 어쩌면 인간의 몸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경제가 할 일은 이런 에너지를 가치 있게 이용하고 그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손실과 수익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지리적 격차 때문이다. 농업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농장과 농장 공동체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석탄에 의한 수익이 주로 매장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발생하듯, 농업의 큰 수익들은 모두 도시에서 발생한다. 수익은 거의 손실을 자각할 압력이나 의무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 즉 잃어버린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차지한다. 소 때문에 토양이 침식된 데 따른 손실은 포장된 비프스테이크로 벌어들이는 수익에서 공제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켄터키 주 산악지대에 있는 삼림, 표토, 가옥이 유실된다고 해서 석탄 수익이 줄지는 않는다. 수익과 손실, 상품과 실비용 사이의 이런 특수한 격차는 우리가 곧 잘 사용하는 자원resource이라는 단어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 단어의 뜻은 부활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resurgere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자원은 의존할 만한 공급원이며, 퍼내도 퍼내도 금방 가득 차오르는 샘물처럼 되살아난다. 표토와 농사짓는 인간의 문화는 적절한 '가정 경영', 즉 적절한 경제 속에서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스스로를 재충전하며 땅만큼 태양만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적절한 경제는 자원과 부활하는 자원의 힘을 존중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한 그야말로 적절하다.

 

 

인간이 다른 생물체와 가장 다른 점은 그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져야 했다는 점, 즉 인간은 문화가 만든 인공물이라는 점이다. 문화적 단련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나 짐승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오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힘' 때문이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체들 간의 힘의 서열에 있어 우리는 최상위에 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현재 우리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홍수, 폭풍, 화산, 지진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인간, 즉 검약, 정의, 불굴의 의지, 인내를 비롯한 미덕들을 지닌 생명체로 만들 수 있는 문화를 가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문화의 제약, 규율, 개선에서 일탈할 인간들은 '자연적'이거나 '생각하는 동물'이거나 '털 없는 원숭이'가 아니라 마구잡이의 탐욕스런 살인자이며 파괴자인 괴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행위를 쉽게 저지르는 본성으로 따진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의 추종을 불허한다. ...문화와 자연의 회복은 농장을 잘 경영하는 방법, 숲을 보존하고 추수하고 재생하는 방법, 만들고 건설하고 이용하고 반환하고 부활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문화와 자연의 회복은 인간성도 회복시키며, 그 속에는 길들여진 것과 야생의 것이 영원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의무와 책임, 이 두 가지는 늘 어려운 데다 때로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분명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을 기준으로, 즉 자연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 문화는 자연을 파괴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괴한다. 문화가 자신이 이룩한 최고의 작업과 다른 문화들이 이룩한 최고의 작업들을 근거로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문화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결국 자연을 파괴할 것이다. 문화와 자연 간에는 대화가 있어야 하고, 조화는 그 대화의 한 가지 상황, 곧 바람직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인간은 의식적이고 진지하게 자기들의 일에 관해 이렇게 질문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좋은가? 이것은 우리의 장소에 좋은가? .... 야생은 지금 우리가 쌓아야 할 인간적인 이해와 관용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가 자연과 함께 보존해야 할 유일한 것은 문화이며, 야생과 함께 보존해야 할 유일한 것은 가정이다.

 

 

소유하는 것(집이나 직업, 배우자나 자동차)은 오로지 자기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교환될 수 있을 때에만 가치를 지닌다. 이는 끝없는 불만족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경제 과정이다. 

 

 

우리는 단일 작물만 심어진 광대한 밭에서 자연의 힘이 쇠약해져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일 부류만을 염두에 두어 획일적으로 개발되는 주택지를 보면서도 인간생활의 토대가 탄탄치 못함을 걱정한다. 산업문명이 가져온 획일적 문화에 젖은 우리는 마치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수많은 여백과 다양성을 가진 다목적 풍경이 보여주는 인간성과 자연성을 열망한다. 여백이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는 작업의 종류와 땅의 종류뿐만 아니라 부지를 나누기도 한다. 산울타리 사이의 좁은 길, 강가, 나무가 늘어선 울타리 등등의 여백들은 항상 야생이 소유했으되 인간의 의도에 따라 그 범위가 설정되는 것들이다. 이런 장소들은 동식물과 같은 야생의 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아이들이 야외에서 뛰어놀기에도 더없이 좋다. 이런 여백의 장소들로 인해서 인간과 야생 쌍방은 서로의 경계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이는 단일 재배의 풍경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명들에게 보다 안전한 조화의 풍경인 것이다. 우리는 단일 문화의 풍경이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반면에 조화의 풍경은 민주적이고 자유롭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농사와 관련된 여타 업종에서도 사업 규모를 제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규모가 적절해야만 노동과 관리의 균형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의 자유에는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이 따른다. 트랙터를 대신하는 말수레, 비료를 대신하는 분뇨거름, 제초제를 대신하는 사이갈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옥수수 경작에 대해 랜시는 "노동력을 판다"고 말한다. 즉, 경제적 의미에서 합리적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서 이런 합리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그는 희생자로 전락할 것이다. 랜시는 쟁기와 써레로 땅을 일구고 화학약품 없이 작물을 경작하면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노동력을 대신하여 고가의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그는 연료를 구입하는 대신 말이 끄는 수레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고, 고가의 장비를 구매하는 대신 말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석유를 대신하여 자신이 생산한 옥수수, 귀리, 건초를 사용하면서 시장가격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얻으며 사료를 판매하고 있다. 그와 그의 말들은 농장에 내리쬐는 햇빛을 공짜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태양에너지 전화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집에서 에너지와 비료를 생산하고 잡초를 제거한다. 그러나 다른 농부들은 그런 기능을 갖춘 장비들을 구입하느라 등골이 휜다. 산업생산 방식에 찌든 농부들은 생산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한다. 그들의 몰락으로 번영을 누리는 공급업자들에게 그들은 한낱 소비자에 불과하다. 국가경제에 관한 한 이런 유형의 농부들은 오로지 값싼 식품을 제공하고 농업 관련 기업들만 배불리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산업주의는 양심의 가책이란 게 없는 정신이다. 산업주의는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물건으로 취급하며, 물건은 궁극적으로 쓰레기로 취급하는 개념을 단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산업주의는 실용과 문화, 인간과 토지 간에 꼭 필요한 관계에 무관심하다. 인간생활의 기초 경제와 경제학에 무관심한 것이다. 우리 경제는 점점 추상화하고 문서화하고 있다. 사람들의 의식주를 결정하는 실질경제를 설명하지도 못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 경제는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적 활력과 행복의 기준으로 염원하는 거짓 경제 또는 공상적인 경제로 점점 더 변해가고 있다. 이른바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말해지는 이런 경제에는 그 자체로 기준이 없다. 산업경제로는 자연의 건강함에 의존하는 경제를 측정할 수 없다. 산업경제는 자연을 단지 '천연재료'의 공급원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로는 사람의 건강함에 의존하는 경제 또한 측정할 수 없다. 산업경제는 사람을 단지 '노동력'(즉, 도구나 기계의 일부) 또는 '소비자'로만 간주하기 때문이다. 산업경제는 오직 통화량에 의해 경제의 건강함을 측정할 뿐이다.

 

 

"오직 성공한 자만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 시스템은 실패한 시스템이다" - 마티 스트레인지 Marty Strange, "지속 가능 농업이 경제적 구조 The Economic Structure of a Sustainable Agriculture"

 

 

암만파(Amish)의 몇 가지 원칙들, 이 원칙들은 관리자와 주주 그리고 전문가들이 착취해대는 세상이 아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 가족과 공동체를 보존하고 있다.
  • 이웃과 정을 나누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 부엌과 정원, 가구와 농장에 딸린 농가의 가내 예술품들을 보존하고 있다.
  • 이용 가능한 인력이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동력(태양, 바람, 물 등에 의한 동력)을 멀리하지 않기 위해 기술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 이웃과 정을 나누는 관습과 저동력 기술의 최적화된 사용을 병행하기 위해 농장 규모를 제한하고 있다.
  • 앞서 언급한 관습과 기술의 제한을 통해 비용을 제한하고 있다.
  • 집에서 생활하고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자식들을 교육하고 있다.
  • 농사일을 실용적 기술이자 정신적 단련으로 여겨 존중하고 있다.

 

 

생활수준(얼마나 많은 돈을 소비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생활수준)은 향상되었지만 공동체의 삶은 여러모로 쇠퇴했다.

 

  

식민경제의 결점은 그것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식민경제는 현실을 왜곡한다. 사실상 그것은 착취이익의 장부에서 비용을 지워버리는 간단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착취이익에는 농촌이 배제되어 있다. 외국의 식민지나 진배없는 것이다. 이런 배제의 결과로 실질적인 생산 비용을 착취이익이 지불하지 않으면서 착취되는 토지와 농민에게 고통만 안겨주고 있다. 이국이건 자국이건 식민지는 생태계와 공동체가 단일하기 때문에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식민주의에서는 건실한 지역경제의 발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경제는 오로지 '천연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하는 구조만을 가지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식이다. 그런 시장은 식민지로부터 가치를 유출시킨다. 따라서 식민경제는 E. F. 슈마허가 주장하는 "지역의 자원을 가지고 지역에서 생산한 재화를 지역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이상의 실현과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다. 국가경제는 내부 식민지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공동체를 파괴한다. 즉, 지역경제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의 자급자족 원리까지 파괴한다.

 

 

지역경제는 문화적 지식과 태도 그리고 기술, 가족과 공동체의 밀접한 관계, 가족과 공동체의 노동력 그리고 재능, 겸손, 성실, 아량, 이웃간의 정과 같은 문화적, 종교적 원칙 등과 관련하여 가치 있는 무형 자산이 될 수 있다. 또한 동식물 및 인간의 신체를 일종의 '태양 에너지 전환기'로 이용하면서 동력을 공급할 수 있으며, 이웃과 지식 및 기술을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무상의 공급물을 경제적 이익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그런데도 지역경제는 대개 우선순위 목록에서 밀려나 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현재 공동체의 개념과 관련된 이런 경제적, 정신적 가치가 과거 공동체들의 경제적 자산이었으며, 경제적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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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 물건의 갯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초에 입지않는 옷을 비롯한 몇 가지를 물품을 정리해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한 갯수가 200여개 였다. 집에 남은 숫자는 그 몇배, 몇십배에 달할 것이다.

 

문요한의 <여행하는 인간> 중에 "'일본의 한 사진작가에 의하면 몽골인은 평생 가지고 있느 물품이 300여 개인데 비해 일본인은 한평생 6200여개를 갖는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을 여행하듯 사는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불필요한 욕망을 걷어내고 소유에 덜 연연할 수 있다. 그것은 자유의 지평을 한 차원 넓혀준다."라는 글에서 아 나도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있겠구나 생각했고 누군가 쓴 '물건은 기억해주는 주인을 잃을 때 가치도 함께 잃는다.'는 표현에서, 내 기억속에 사라졌지만 집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생각하면 잠깐의 편리와 만족을 위한 소비에 대한 반성을 한다.

 

파타고니아의 기업 철학과 활동을 엿보며 지속 가능한 환경을 위해 물건에 대한 소유와 소비태도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본문발췌]

 

 

"바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재사용하는 일은 적절한 이유에 따라 행해졌을 때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 - 우리의 안식처를 돌보는 일에 대하여' 중에서

 

 

"알고서 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 왕양명

 

 

글로벌 생태 발자국 네트워크(Global Footprint Network)는 현재 깨끗한 물 깨끗한 공기, 경작 가능한 토지, 풍부한 어장, 안정된 기후와 같은 필수적인 '서비스'의 사용량이 이를 공급하는 지구 역량의 150퍼센트에 달한다고 계산하고 있다.

 

 

대형 다국적 기업에게 조종을 받는 정부들이 운영하는 세계 경제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수익과 성장에 의존하고 있다. 좀 더 지속 가능하고 푸른 지구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 얻었던 성과들은 양적 성장에 모두 잡아먹히고 있다. 양적 성장은 아무도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다.

 

 

옳은 것을 선택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압도적으로 성공하는 법: 환경의 붕괴가 목전에 있다는 전 세계 과학자들의 보편적인 합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행동을 취할 의지가 부족하다. 우리는 무관심, 타성, 상상력의 부재로 인해 집단적인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파타고니아는 통념에 도전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책임 있는 기업을 보여 주려고 한다. 우리는 끝없는 성장을 필요로 하고 자연 파괴에 대해 책임져야 마땅한 자본주의 모델은 반드시 대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파타고니아와 2000명의 직원들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세상에 유익하면서도 수익성이 있는 기업을 만든다는 것을 전 세계 기업들에게 입증해 보일 수단과 의지를 갖고 있다.

 

 

'위험과 마주하는 것은 등반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기어오르는 상태 그 너머에서 일순간 느껴지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시험들 중 하나이다.' - 리오넬 테레, <쓸모없는 것을 정복하는 사람들>

 

 

항공기 뿐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하는 모든 산업 활동, 모든 계산과 추정, 사람들이 초안을 만들고 청사진을 그리는 데 보낸 모든 밤들은 하나의 원리로 수렴된다. '단순성'이라는 궁극의 원칙으로. 가구의 곡선이나 배의 용골이나 비행기의 동체를 다듬는다고 생각해 보자. 장인 정신을 담은 수 세대에 걸친 실험을 통해, 인간의 가슴이나 어깨의 곡선과 같은 궁극의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야 한다는 법칙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일에 임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완벽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적나라한 상태에 이를 때에 달성된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존 뮤어는 자신의 짐을 양철통 하나에 넣을 수 있는 정도로 제한하곤 했다. 묵은 빵 한 덩어리와 외투 한 벌로 말이다. 그것은 환경적인 고려이기도 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들은 만들어져서, 팔리고, 운송하고, 보관되고, 세탁되고, 결국은 버려지는 그 모든 단계에서 환경에 피해를 입힌다. 우리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기도 하고, 우리에게서 비롯되어 다른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자로서든 소비자로서든 무언가를 구입할 때에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구매가 필요한가? 요가를 하기 위해서 새로운 옷이 정말로 필요한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이 제품이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해낼 것인가?

 

 

전체에 대한 책임: 우리가 쓰는 것, 만드는 것, 그것을 만드는 방법, 버리는 것 모두가 사실은 윤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전체에 대한 무한대의 책임을 갖고 있다. 감당하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는 책임 말이다. 품질과 제품이 내구성을 유지하는 기간도 이런 책임의 일부이다. 고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고객과 사용자를 존중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수하는 방법이다. 사용법과 관리법을 익힌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고품질의 제품은 내구성이 훨씬 더 높아진다. 소유자, 곧 사용자에게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다 큰 전체, 지구와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일이다. 내구성의 향상은 우리가 덜 쓰고(원료와 에너지 소비가 감소하고), 적게 생산하고(더 중요하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일을 할 시간이 늘어나고), 적게 파괴한다(적게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랑스포스 브룩 AB

 

 

기능 중심의 디자인은 대개 미니멀하다. 브라운의 디자인 책임자인 디터 람스의 주장처럼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복잡하다는 것은 기능적 필요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신호이다.

 

 

합리적인 소비자이자 건전한 시민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책임감 있는 의류 구매 방법은 중고 의류를 구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드라이클리닝이나 다림질이 필요한 옷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탁은 찬물에 해야 하고 가능한 건조기 없이 건조대에 널어 말려야 한다. 셔츠는 하루 이상 입고 빤다. 여행 가방을 챙길 때는 100퍼센트 면직 의류보다는 더 빨리 마르는 대체품을 선택하는 게 좋다.

 

 

몬태나주립대학의 토마스 M. 파워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재화와 서비스에 쓰는 돈 가운데 생존에 필요한 것은 10~1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떤 문제를 고민할 때면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이 끝났을 때 그 해법이 아름답지 않다면 잘못된 답이다. - 리처드 버그민스터 퓰러 

 

 

세계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계 경제는 오로지 값싼 화석연료를 태우는 데만 의지하고 있다. 기차나 배를 통해 물건을 1킬로미터 운송하는 데 톤당 250T가 소모된다. 트럭 운송에는 톤당 2000BTU 이상이, 항공 화물은 1톤의 화물을 1킬로미터 옮기는 데 13,465BTU의 에너지가 든다. 카탈로그나 웹을 토해 쇼핑을 할 때는 메인에서 살아 있는 바닷가재를 주문하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당일 배송으로 하룻밤 사이에 도착하는 바지가 정말로 필요한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BTU(British termal unit, 영국의 열량 단위로서 1파운드의 물을 ㄷ기압 하에서 1F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의 에너지)

 

 

파타고니아의 이미지는 인간적인 목소리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신념에 대해 열정적인 사람들, 미래에 영향을 주고자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가공이 가해지거나 인류애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미지가 규범을 깨뜨리고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는 상정하고 있는 고객 이미지가 있다. 고객이 똑똑하다고만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이 쇼핑을 재미로 하지 않으며, '삶을 돈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며, 삶을 허접한 쓰레기로 만들지 않고 보다 깊고 단순하게 만들기를 원하며, 공격적인 광고의 표적이 되는 데 지쳤거나 무관심하다고 가정한다. 우리는 물론 고객에게도 가장 귀중한 조언은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주는 조언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삶의 기술에 통달한 사람은 일과 놀이, 노동과 휴식, 몸과 마음, 훈련과 오락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 무엇이 어떤 것인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그 안에서 탁월성에 대한 비저늘 추구할 뿐이고,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지 놀고 있는지에 대한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스스로에게 그는 항상 양쪽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 L. P. 잭스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지능이 높은 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다. - 찰스 다윈

 

 

나는 인간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영리한 동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이외의 어떤 동물도 자신의 보금자리를 더럽히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적인 행동의 장기적인 결과를 예상할 만큼은 똑똑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원자력, 텔레비전, 에탄올, 패스트푸드 같은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발하는 뛰어난 과학자나 기업가도 종종 자신의 발상이 가진 어두운 면을 보지 못한다. 문제는 상상의 실패이다. 호기심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그들은 종종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다. 맹목적 신념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지어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하는 작고 동질적인 사회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숨는 것이 불가능하다. 동료 집단의 압박이 있기 때문에 경찰, 변호사, 판사, 감옥이 필요치 않다. 개인은 자신과 부모의 '사회적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결정은 타협이 아닌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세상의 변화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당신 자신이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 - 마하트마 간디

 

 

소비자의 원래 정의는 "사용을 통해 파괴 혹은 소진하는 사람, 게걸스레 먹거나 헤프게 쓰는 사람"이다. 세계의 다른 사람들이 미국인과 같은 속도로 소비를 한다면 지구가 7개는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쇼핑센터에서 사들이는 것의 90퍼센트는 60~90일 내에 쓰레기 더미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제 시민 대신에 소비자라고 불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소비자는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정치가와 기업가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버리는 일을 기반으로 하는 현재의 세계 경제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인은 바로 우리다. 우리는 '써 버리고, 파괴하는' 소비자이다. 우리는 필요는 없지만 원하는 물건들을 계속해서 사들인다. 우리에게 만족이란 없는 것 같다.

 

 

사업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내가 싸워야 할 가장 큰 문제가 '안주'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는 항상 파타고니아가 지금부터 100년 후에도 이곳에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말은 목표까지 100년의 시간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성공과 수명은 빠르게 변화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위해서는 절박한 느낌을 유지해야 한다. 한가롭고 느긋해 보이는 파타고니아의 기업 문화에서는 특히 어려운 과제이다. 사실 내가 우리 회사 관리자들에게 주는 가장 큰 과제는 변화를 일으키라는 것이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생태계는 대재해나 자연선택을 거쳐 환경에 적응한 종을 지지한다. 건강한 환경이 작동하려면 성공적인 기업과 마찬가지로 다양성과 포괄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진 나머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상황이라고 해서 끝내 진창에 빠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브로워의 말대로 뒤로 돌아서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절제, 품질, 단순함과 같은 단어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이라면 다 좋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과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유한한 지구에서는 소비를 줄일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까 걱정인가? 어차피 자동화와 로봇 기술의 발달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만을 구입한다면, 다기능의, 내구성이 좋은, 수선이 가능한, 품질이 좋은, 유행이 없는 그리고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수 있는 것만을 산다면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일에 달인이 되는 길은 단순함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기술 대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많이 알수록 필요한 것은 적어진다.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려는 미미한 시도들을 통해 나는 보다 단순하게 살아야, 혹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해야 정말 중요한 모든 면에서 빈곤하고 결핍된 삶이 아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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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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