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며 재미있게 일하고, 매사에 감사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소박하게 나누며 더불어 사는 삶이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본문발췌]

"세상이 복잡한가, 머릿속이 복잡한가?"
세상이 참 어렵고 복잡해졌다고들 말합니다. 세상을 탓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에 제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대낮에도 세상이 깜깜하게만 느껴진 이유를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복잡다단한 세상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그 속에서 희망의 요소들을 찾아 하나하나 적어보십시오. 
당신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니 반드시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중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과 눈앞에 바로 보이기에 빨리 얻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건강, 웃음, 사랑, 행복이 전자라면 돈, 명예, 권력 같은 것이 후자일 듯합니다. 그동안 미뤄왔지만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 이제 중요한 것 먼저 선택합시다. 우리의 인생은 매우 소중하고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것은 생김새나 겉모습, 일상적인 것을 알기 위함이 아닙니다. 당신의 근원과 본질이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해 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군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말입니다. 정답이 있을까요? 아마도 명답은 있을지언정 정답은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가치가 다 똑같지 다를리 있겠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교통사고를 당하면 사람마다 보험료가 달리 책정되듯이 사회적 가치면에서 판단하면 서로 가치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가격이 다른 것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사회적 가격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을 잃거나 갈등에 시달리곤 합니다.
열등감이란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들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고 괴로워하는 갈등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적 가격이 낮다고 여기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곤 합니다. 권력, 명예, 재물, 인물, 학연, 지연, 가족 등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낮춰 보고 주눅이 들거나 보잘것없다고 지탄하곤 합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상대가 변했다고 생각하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입니다. 
 
 

끌고 가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사실 열등감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두 가지 모순된 욕구를 한꺼번에 채우려는 데서 커지는 것이지요. 공부는 안 하면서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 노력도 안 하고 성공하려는 것, 잘 웃지 않으면서 푸근한 인상을 주려는 것,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으려는 것, 밥은 많이 먹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서 허리둘레 줄어들길 바라는 것, 이런 게 바로 욕심입니다.
소유하려는 욕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보다 많이 갖지 않아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더없이 존귀하기에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박하게 살면서도 만족하고 행복해합니다.
열등감에는 예방주사가 없습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무엇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는 것은 스스로의 목에 목걸이(강아지 목걸이)를 채우고 슬퍼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목걸이에 끌려다니겠습니까?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엄함을 인정한, 자존심 있는 사랍입니다. 반면, 세상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 든 사람입니다.
 
 

행복의 기준
우리를 늘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명예, 권력, 학연, 지연, 인맥, 비싼 집과 좋은 자동차, 내 뜻에 잘 따르는 가족과 내가 원하는 것들에 끌려다니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 100개 중에 한두 개만 이루어져도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90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기도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갈구해서 얻어지길 기대한다면 그게 바로 세상에 끌려다닌 것입니다.
돈, 명예, 권력, 비싼 집과 좋은 차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편리함과 여유로움을 주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것들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며 인생의 가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원하는 걸 갖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나보다 많이 갖거나 크게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며 속앓이를 합니다.
세상은 뱃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끌려다니며 산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지만, 헤쳐나가야 할 미래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할 우리의 것입니다.
 
 

당장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 있고 지금 당장 천사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가능성을 예견하기에 오늘의 고통과 힘겨움과 갈등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 희망을 풀어 말하면 '행복'이란 낱말이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어렵더라도 우리가 살 만한 것은 자신의 일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열정은 자기 인생만 바꾸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세상을 바꾸며,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립니다.
 
 

열정의 놀라운 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열정'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열정은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인들의 교훈 중에 사람이 죽어 신에게 불려가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결정하는 질문 두 마디가 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남에게 기쁨을 주었는가?"
스스로 기쁘고 또한 남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보람 있게 살고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열정을 바치는 것입니다. 열정은 곧 창의력이고 지혜이며 기쁨이자 보람이고 희망입니다.
어느 기업 광고에 인생을 80년 산다면 26년 잠자고 21년 일하고 9년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뿐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조사에 따르면 화내는 데 5년, 기다리는 데 3년을 소비한다고 합니다. 기쁨의 시간이 곧 웃는 시간일 텐데 팔십 평생 겨우 20일 정도만 기뻐하는 건 자신의 존재가치를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화내는 시간을 반쯤 뚝 잘라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루 15초만 웃어도 수명을 이틀이나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니라 팔십 평생을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줄까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내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잠시 기쁠 뿐입니다. 재산이 많고 권세가 높고 명예가 커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행복의 제조자인 자신이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을 붙잡고 더디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즐겁게 사는 것이 세월을 더디 가게 하는 묘책입니다. 우리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합니다. 두 번 살 수 없습니다. 두번 살 수만 있다면 한 번은 연습처럼 살겠지만 한 번밖에 살 수 없으니 살아 있는 동안 참으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기에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인 듯 최선을 다해 살고 지금이 생애 최고의 순간인 듯 행복해야 합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나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우주에서 오직 하나뿐인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기쁘게 웃을 수 있지만 스스로 보잘것없다고 여기면 세상에 즐겁고 기쁜 일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은 누리고 불행은 버리는 것입니다.
   소망은 좇는 것이고 원망은 잊는 것입니다.
   기쁨은 찾는 것이고 슬픔은 견디는 것입니다.
   건강은 지키는 것이고 병마는 벗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끓이는 것이고 미움은 삭이는 것입니다.
   가족은 살피는 것이고 이웃은 어울리는 것입니다.
   자유는 즐기는 것이고 속박은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웃음은 나를 위한 것이고 울음은 남을 위한 것입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기적
숨을 쉬지 않고 참아보면 그제야 비로소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숨을 쉬려고 노력했습니까? 훗날 병원에 입원해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숨을 쉴 때야 비로소 숨 쉬는 게 참으로 행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미 행복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적을 일구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지 않고 숨이 끊기지 않는 기적을 매일매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나지 말고 20초 정도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읊조리듯 말하십시오.
  첫째, 오늘도 살아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둘째, 오늘 하루도 즐겁게 웃으며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셋째, 오늘 하루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다.
왜 사십니까? 불행하기 위해, 슬퍼하기 위해, 아프기 위해, 고통스럽기 위해, 짜증내기 위해 살아서는 당연히 안 됩니다. 행복하고 즐겁게 웃고 즐기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지금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그저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은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고 대답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밖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행복을 돈, 권력, 명예, 학벌, 큰 아파트, 고급 승용차, 능력있는 가족,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자녀 등 대체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행복은 정말 어디에 있을까요? 행복은 내 가슴에, 내 영혼에, 오늘에, 지금 바로 내 옆에 가까이 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거나 황홀하거나 아름답거나 짜릿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은 지금 내 마음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숨을 쉬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숨 쉬며 살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지금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으로 가면서 당신이 무엇을 가져갈까요? 따라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과연 가져갈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가져갈 수 없는 건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사용하고 돌려줘야 할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평균 수명만 믿고 자신이 80세까지는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크나큰 오산입니다. 그때까지 살 수 있다고 보장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80세 전에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내 인생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에 행복해야 합니다.
 
 

깨어 있는 영혼
내 인생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연히 내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얽매여 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 뿐이어서 저 홀로 설 수 없고 페달을 돌려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주면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고 뒤를 잡아주던 사람이 손을 놓아도 놓은 줄 모르면 한참을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달린다는 걸 아는 순간 놀라 넘어지게 됩니다. 다치는 게 두려워 계속 의지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전거를 탈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두 바퀴를 굴리며 저 너른 세상을 달려가려면 자기 인생은 자신이 조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적절히 돌려야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많이 돌려서도 적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몸과 자전거가 균형을 유지할 만큼만 돌려야 합니다.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힘들 때는 힘든 쪽으로 집중하고, 고통스러울 땐 고통스러운 쪽을 살피고, 사랑할 때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시험 볼 때는 공부에 치중하고, 병들었을 때는 치료에 정성을 다하고, 갈등에 싸였을 때는 얽힌 타래를 풀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자존심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도 귀하게 여기고 행하는 것입니다. 나만 귀하다고 여기는 생각과 행실인 자만심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사랑, 용서, 베풂, 희망이 모이면 곧 자존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사람다운 정신이 자존심입니다.
 
 

색안경 낀 사람들의 세상
색안경을 쓰고 보면 세상이 검거나 푸르거나 붉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세상을 보려면 색안경을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더불어 사는 법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는 바로 '더불어 사랑' 때문인 듯합니다. '더불어 사랑'은 나를 사랑하듯 나 아닌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신입니다.
보시란 주기만 하고 받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풂이나 봉사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유해하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미생물도 많습니다. 사람에게 유익한 미생물만 있으면 좋을것 같지만 유해한 미생물이 사라지면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를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모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하물며 사람임에야!
 

 
인간의 향기
자비는 다른 이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는 심성이고, 자애는 다른 이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건 자애이고, 아픈 이를 조건 없이 보살피는 건 자비입니다. 바로 자애와 자비를 행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고 가장 멀리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꽃이 아무리 어여뻐도 질 때는 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질 때가 훨씬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지는 사람의 특성은 곧 사랑과 베풂입니다. '사람답다'는 말은 배려, 사랑, 용서, 베풂을 뜻합니다.
사랑과 베풂은 단순히 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결코 주는 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받는 이가 있어 주는 이가 더욱 행복에 겹고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복은 받는 것이고 덕은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풂의 진정한 의미는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보상을 바라거나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는 것은 덕을 베푸는 게 아니라 '거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옛말에 복을 받으려면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온도는 섭씨 100도가 넘어 자칫 델 수도 있지만 덕의 온도는 36.5도로 사람의 온기와 같다고 합니다. 차갑거나 뜨겁지 않아 누구라도 끌어안을 수 있고 누구에게 주어도 불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고 간 사랑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
베풂은 너그러움이고 너그러움은 곧 자유로움입니다. 반대로 받기만을 원함은 욕심이고 욕심은 곧 구속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인들 구속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베풀지 않고 받기만을 갈구하면 스스로의 영혼을 구속하는 셈이 됩니다. 베푼 사람은 승리자가 되고 빼앗은 사람은 패자가 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더 깊이 세상을 살펴보면 부드러운 것이 강한 걸 이기고 기쁨이 슬픔을 이기고 희망이 좌절을 이기고 베풂이 욕심을 이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마중물
인생이 힘에 부칠 때는 스스로 자신을 살피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동반자가 필요하고 스승, 벗, 이웃, 동료를 비롯한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꿈을 이룬 사람들의 성공사례를 살펴보면 혼자서 해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가 도왔거나 격려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여럿이 가라." - 아프리카 속담
인생을 잘 살려면, 첫째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야 하고, 둘째 어려울 때 함께할 수 있는 벗을 사귀어야 하며, 셋째 다사로운 동반자를 두고, 넷째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바쳐야 합니다.
얼음은 차가운 물을 부으면 잘 녹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을 부어야 잘 녹습니다. 뜨거운 물은 사랑이고 배려이고 베풂이고 나눔이고 어울림이고 동행이고 감사이고 기쁨입니다. 뜨거운 물이 될 수 있어야 진정한 벗을 얻습니다.
 

 
억겁의 우연끝에 만난 살람들
그렇게 고귀한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세상이 존재하려면 남녀가 만나고 암술과 수술이 만나고 암컷과 수컷이 만나고 음과 양이 만나고 햇빛, 물, 강, 바다 풀, 나무 흙, 미생물이 얽히고 설켜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인연이 되어 어울려야 합니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도 곱고 뜨거워서 인류가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귀한 가치로 존재할 것입니다.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는 분별심 때문에 스스로 악연의 싹을 틔운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감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디어졌더라도 두 사람의 만남을 선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서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뢰하고 배려하고 존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미움을 포기하는 법
용서는 이러저러한 조건 없이 그냥 관대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입니다. 육신의 강자는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정신의 강자는 용서로 해결하고 웃습니다. 용서는 내 기쁨이 분명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증오는 쏜 사람에게 반드시 되돌아와 꽂히는 독 묻은 화살 같아서 나를 해코지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용서는 내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가슴을 주욱 펴게 하며 나를 향기나게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애써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미운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미움을 포기할 수는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듯 버리십시오. 나를 괴롭히고 마음 상하게 한 사람이 곧 내 영혼의 쓰레기를 청소하게 해준 셈이니 도리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에 박힌 가시
미움, 분노, 질시, 화, 슬픔, 괴로움은 영혼에 박힌 가시와 같습니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눈에 보여 쉽게 뽑을 수 있지만 영혼에 박힌 큰 가시는 보이지 않아 자신을 끝없이 괴롭힙니다. 일이 잘못되어 날카로운 송곳이 몸에 박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박힌 가시를 굳이 뽑아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100세가 된 현역 최고령 한의사의 무병장수 비결은  첫째,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둘째, 남의 허물을 잊고 용서하며 셋째, 소식하고 운동하라.
남의 허물을 잊어버리거나 그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영혼에 박힌 가시를 제거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베풂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쁨을 나누어주는 묘약입니다.
 
 

용서의 위대함
화, 분노, 미움, 걱정 따위는 쌓아두지 마십시오. 쌓아둘수록 자신의 상처가 그만큼 깊어질 뿐입니다. 원망, 핑계, 가슴앓이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가슴에 맺히면 결국 그것들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핑계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핑계를 대어 잠시,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 있겠지만 화평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속이는 건 사기이지만 자신을 속이는 건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은날
욕심을 채우고 또 채우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홀로 서 있게 됩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틈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며 빈자리가 있어야 누군가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대나무 마디처럼 온갖 고뇌를 딛고 자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정신 멀쩡한 사람이 어찌 고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고뇌는 우리의 멘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뇌가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고 미래를 개척해 주며 우리에게 살아갈 만한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바람을 마주 보고 맞으면 역풍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이 된다"는 어느 대기업 사장의 말처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바뀌고 상대가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씩 바뀌기를 바랍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그리도 평온한 것을,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묶어놓고 질질 끌려다녔기에 분별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돈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명예를 잃으면 아주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꿈에서 깨면 그 모두가 거짓이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욕심이 과한 것도 환몽이고 실패와 좌절과 고통과 슬픔이 없기를 바라는 것도 환몽입니다. 꿈에서 탁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실제 상황에 닥치면 깨어나지 못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꿈속을 헤매며 두려워하기보다는 탁 깨어나 환몽임을 아는 게 행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늘 고통을 나누어줍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사람에게 강한 생명력을 줍니다.
 
 

소박하게 산다는 것
<맹자>를  보면 품격 있게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 마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 어짊의 실마리로 남을 측은히 여기는 측은지심.
   둘째, 의로움의 실마리로 세상살이를 하며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
   셋째, 예의의 실마리로 사양할 줄 알고 늘 겸손한 태도를 갖는 사양지심.
   넷째, 지혜의 실마리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
남을 측은히 여기는 어짊이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의로움, 사양하고 겸손한 예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 가운데 그 어디에도 혼자 누리고 많이 갖고 받으려고만 하는 욕심은 없습니다.
 

 
법륜 스님이 사람들에게 일러준 행복하게 사는 삶의 자세 일곱가지
  첫째, 웃으며 즐겁게 살자.
  둘째, 소박하게 살자. 내가 먼저 절약해야 합니다. 소박하게 먹어 몸을 가볍게 하고, 소박하게 생각하여 영혼을 편케 해야 합니다.
  셋째, 나누며 살자.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들어줘야 합니다. 복을 지어야 덕을 보게 됩니다. 나누면 나와 이웃과 세상이 행복해집니다.
  넷째, 감사할 줄 알자. 지금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다섯째, 희망을 갖자.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느냐고 물으면 '물이 된다'고 하기보다는 '봄이 온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사람이 가진 최고의 자산입니다.
  여섯째,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자.
  일곱째, 보람 있게 살자. 웃고 즐기고 건강하게 살며 남을 기쁘게 하면 절로 보람 있게 살게 됩니다.
 
웃으며 즐겁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멋스럽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은 진정 건강하며, 나누며 사는 사람은 덕을 짓는 자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겸손하여 복을 받고, 희망을 갖는 사람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재미있게 일하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아름답게 성공한 자이며, 보람 있게 사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자입니다. 희망은 결국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가장 사람다운 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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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옮겨 담은 화폭을 방안에서 보는 즐거움, 여유로운 삶.


[본문발췌]

'읽고 생각하는 즐거움' 못지않게 '눈으로 보고 감상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산은 높고 높아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초목이 살고, 뭇 생명이 자리 잡고, 새와 짐승이 무리 지어 살고, 달리는 짐승이 쉬며, 보배로운 것들이 번성한다. 기이하게도 만물을 키워내면서도 지치지 않고 사방으로 뻗쳐 끝이 없도다. 
물이라는 것은 군자의 덕에 비유된다. 두루두루 흐르고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으니 덕을 닮았고, 이르면 생명을 살려내니 어짊을 닮았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순리대로 하니 의로움을 닮았다. 얕으면 흐르다 깊으면 헤아릴 수 없게 되니 지혜로움을 닮았고, 낭떠러지에서 주저 없이 흐르니 용기를 닮았고, 가는 물줄기로 구석진 곳까지 이르니 성찰함을 닮았고, 오물을 받아도 사양하지 않으니 포용을 닮았고, 더러운 곳에 들어가 맑게 하여 나오니 세상을 교화시키는 것을 닮았고.....' 
- 유향, <설원> "잡언" 편 중에서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노자, <노자>, 제 8장 중에서


'숲과 못으로 들어가 너른 들에 살며 고요한 곳에서 낚시하고 무슨 일도 일삼지 않을 뿐이다. 이는 강해의 사람이며 세속을 피한 사람이니 여유로운 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 <장자> "각의" 편 중에서


중국 산수화의 흐름,
송대의 산수화는 화원 화가들에 의해 주로 그려지면서 경외의 존재에서 감상의 대상으로 전이되었고, 이와 함께 문인의 뜻을 그리는 문인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원대에 들어서는 서예적 필법을 담은 문인산수화가 발전했고 명대에 들면 송대의 화원화풍을 계승하는 절파와 원대 문인화의 기법을 계승하는 오파의 두 개 화파가 전개되면서 이들은 각각 이상공간과 경험공간을 그리는 차이를 보여주었다. 청대에는 오파 계열의 문인산수화가 하나의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여말선초에 주로 그려지고 감상된 산수화 즉 청산백운, 사시팔경, 소상팔경, 몽유도원 등은 실제 산수 공간에서 초연히 벗어난 초월의 시간, 영원한 질서 속에 드러나는 순간을 관념화시킨 산수 이미지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여말선초의 문사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산수의 참된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산수의 참된 이미지는 청산백운, 소상팔경, 사시팔경의 대표경으로 그들 관념 속에 정형화되었다. 이는 새 왕조의 주역이 누린 산수관이었다. 이러한 산수관은 그들의 낙관적 현실관과 부합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수를 현실로 끌어들여 혼연히 향유할 수 있었다.
  

해 비추는 향로봉에 붉은 안개 피어 오르고 / 멀리 보니 폭포수가 시내 앞에 걸려 있네 / 나는 듯 쏟아지는 삼천 척의 물줄기 / 하늘에서 떨어지는 은하수인가 - 이백의 시 <여산관폭>


조선 중기의 산수 인물도들이 기려, 어부, 수면, 관폭 등 철리적 이상으로 완전무장된 은자의 고차원적 달관의 세계를 지향하였다면, '시의도'에서는 시적이고 서정적인 감상 혹은 세속에 얽힌 개인 정감도 표현하려 한다. 
조선 중기의 산수인물도가 철리적 사유를 추구하였다면, 조선 후기의 시의도는 감상적 정감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철리적 사유가 보편적 당위성의 원칙을 중시한다면, 감상적 정감의 표현은 개인적 경험을 기억시켜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산수 표현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산수인물도류에는 강호, 폭포, 등의 대상 산수가 암시적, 상징적으로 간솔하게 표현되어 산수화 속 인물은 산수경 자체보다 더욱 높은 사유 세계를 누리는 것으로 펴현된다. 그러나 시의도의 산수 속에는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지점이 매우 섬세하게 처리된다. 그 지점에는 꽃이 피거나 지고, 낙엽이 지거나, 새가 날거나, 구름이 피어오른다. 시인이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제시한 장면이다. 이는 산수 표현에서 간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산수 속 인물이 이러한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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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 정보의 양과 유통 속도가 급격히 발전했지만  사회적으로 정보의 질과 편협(향)성도 증가했다.

사실을 판단하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는 정치인과 언론의 개소리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본문발췌]

“사실이 아닙니다.” “근거가 없습니다.”라고 점잖게 말하는 기성 언론의 팩트체크 기사보다 개소리들이 훨씬 더 재미있고 귀에 쏙쏙 박힙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이를테면 같은 게임에서 맞서 싸운다고 해보자. 각자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이 이해한 대로 반응한다. 물론 한쪽은 진실의 권위에 따라 반응하고, 다른 쪽은 그 권위를 거부하고 권위의 요구에 응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개소리꾼은 이런 요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 달리 진실의 권위를 거부하지도, 이에 맞서지도 않는다. 전혀 신경쓰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진실의 더 큰 적은 거짓말보다 개소리다. 다시 말해 개소리꾼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유리한 발언을 할 뿐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개의치 않는다.
 

기자 한 명이 오랜 시간을 들여 주장을 검토한 후 사실을 토대로 신중히 기사를 작성하면 비용은 더 들고 클릭 수는 줄어든다. 이보다 더 쉽게 수익을 늘리는 방법이 있다. 원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서둘러 기사로 내보내서 그 주장에 대한 분노와 반박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내는 것이다. 폭로 기사는 다른 언론사가 쓴 기사를 그냥 베끼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관련 기사가 예닐곱 개 나오는데 그중에는 서로 모순되는 내용도 있을뿐더러 직접 취재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가짜뉴스는 신뢰의 부재를 낳은 원인이라기보다, 이를 보여주는 현상에 가깝다. 개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의 적이다.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 없이는 절대로 정치적 성향을 넘어 토론할 수 없고 그저 상반된 담론을 향해 고함치는 데 그치고 만다.


정보 제공자가 맞춤형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용자에게 편향된 정보만 도달하는 필터 버블 현상도 큰 과제였다. 내 친구들은 나와 정치적 견해가 매우 비슷한 만큼 서로 동의할 기사만 공유할 확률이 높다. 우리가 뉴스 대부분을, 아니면 어느 정도라도 페이스북 피드에서 접한다면 결국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개소리의 힘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해서 전문가의 말이나 실제 벌어진 사건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더 신뢰한다. 필터 버블은 사람들이 진실을 더 쉽게 무시하도록 자극해 탈진실 사회를 부추긴다.
 

트래픽이 높아진다는 것은 당연히 해당 사이트의 수익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제목은 나중에 바꾸더라도 일단 기사부터 올리면 트래픽이 올라가지만 시간을 들여 사실을 확인한 후 아무 기사도 올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자원이 줄어든 편집실에서는 보통 안전한 대책을 찾는다. 대학을 갓 졸업한 미숙한 기자가 정치 논쟁을 보도한다고 할 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 후보가 한 말을 그냥 보도한 후 상대 후보의 반박을 싣는 것이다. 내용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생략한다. 현실 풍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이게 현실이다. 특히 기사가 다수 매체의 일반적 보도 지침인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만족할 때 이렇게 보도한다. 한 후보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해도 마찬가지다. 자원이 풍부하고 숙련된 기자가 있는 편집실에는 정치 논쟁을 조목조목 따질 역량과 자신감이 있다. 그런 기자들이 부족한 편집실에서는 정치 논쟁을 제대로 문제 삼지 못한다.
 

수 세기 동안 미디어는 정부와 정치인에게 책임을 묻는 역할을 했다. 19세기 들어 미디어를 일컫는 ‘제4계급’이라는 별칭이 생겼는데, 이는 미디어의 권력 견제 기능을 공식화한 용어였다. 미디어가 영향력과 신뢰를 잃으면 권력에 책임을 묻는 능력도 약해진다.
 

정치는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도 공공정책을 논하는 순수하고 열띤 토론의 장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무관심과 냉소주의에도 안전한 범주와 해로운 수위가 있으며, 정치 전략에도 다른 것보다 더 유해한 방식이 있다. 정치 행위자가 미디어와 피드백 회로를 형성해 얄팍한 근거나 사실만으로도 공론화가 가능해지면, 정치권에 대한 신뢰는 더욱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살폈다. 하나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증거를 찾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증거가 내 주의를 끌더라도 이를 믿거나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확증 편향이 적극적인 정보 탐색을 가로막듯이, 역화 효과도 내게 들어오는 정보를, 나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정보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신념을 의심하기보다 고수하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필터 버블 때문에 서로 다른 의견에 가까워지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도적 관점에서 더욱 멀어진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에 순응하고, 그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신호를 보내며, 집단을 통해 성향이 양극화한다. 소속 집단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정확하고 검증 가능한 정보보다, 정체성을 한층 더 견고하게 하는 개소리 정보를 더 반기는 이유다. 정체성이 한층 단단해지는 또 다른 상황은 바로 다른 집단과 대립을 할 때다. 이를 일컬어 내집단, 외집단 행동, 또는 현실 갈등 이론이라고 한다. 우리는 집단에 대한 진짜 소속감을 다른 집단에 대한 경쟁의식, 심지어 적대감을 통해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정치적 신념과 맞는 구절을 보면 쉽게 믿고, 거의 반사적으로 공유하려고 한다. 반면 잠깐이나마 출처를 살피고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어느 정도 노력이 든다. 전자는 시스템1 행동에 해당한다. 후자는 시스템2를 발동한 것으로 공유하기 전에 정보를 더 신중히 검토해보자는 결단이 필요하며, 노력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보를 대강 훑을 때 나오는 순간적인 사고를 누르고 의식적으로 다른 방식의 사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스템2 사고를 작동시키는 것은 자기통제 행위로, 때로 ‘자아 고갈’이라고 부를 만큼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만 의식적이고 신중한 사고와 자기통제가 없으면 우리는 개소리에 노출될 것이다.
 

주류 언론이 개소리에 대응하는 주요 무기는 사실 검증팀을 띄운 것이었다.
 
정치인,언론, 대중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는 풍토가 우려될 때, 우리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사실 검증을 활성화할 수 있다. 허위 정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정치인이나 미디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내 주장의 진위를 가려주는 균형 있고 공정한 정보만 한 게 어디 있겠는가?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진실이 신발을 신을 때, 거짓말은 이미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라는 오랜 격언은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한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을 보면, 우리는 사실 검증팀이 정보를 꼼꼼히 모으고 제대로 된 글을 써서 신속히 공개해도 개소리를 쉽게 억제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테다. 개소리는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의 신념을 강화하며, 남들과 공유하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확증해주는 정보를 믿는 편이고, 사실에 근거한 기사보다 자극적인 기사에 더 솔깃한다. 우리는 사실 검증을 하더라도, 전부터 의심한 사실 정도만 확인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의심하고 습관처럼 사실을 확인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개소리는 만들긴 쉬워도 그에 맞서긴 어렵다. <가디언>의 미디어 편집자 재스퍼 잭슨Jasper Jackson은 “이 싸움은 비대칭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말했다. 언론 조직은 정보 유통에 절대적 지배력이 있는 만큼, 전쟁 포로의 인권을 규정한 국제협정인 제네바협약에 상응하는 보도 원칙에 제약을 받는다. 그렇지만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자들은 그런 제약이 없으므로 보도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부담이 전혀 없이 언론사들의 약점을 파고든다.
 

인터넷의 허위 정보와 싸우는 일은, 하나같이 빠르게 움직이는 여러 개의 과녁에 총을 겨누는 것과 같다. 


전부 거짓은 아니기에 더 위험한 나쁜 뉴스
<스놉스>를 만든 두 설립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미컬슨David Mikkelson은 2016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온 후 일주일 정도 지나 “우리에게는 가짜뉴스가 아니라 나쁜뉴스가 문제다”라는 논평을 올려 이 문제를 언급했다. “온라인 세상에는 나쁜 뉴스가 참 많지만 그 모두가 가짜는 아니다”라면서, <스놉스>가 대적하는 당황스러운 허위 정보를 열거했다. 진짜 뉴스를 가져다가 왜곡이 심한 낚시 기사로 둔갑시키는 당파적인 정치 사이트가 있다. 예전에 나온 뉴스를 마치 지금 떠도는 정보처럼 포장하는 사이트도 있다. 출처가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기사들을 모아 놓은 사이트도 있다. 주로 건강과 과학 분야에서 말이다. 자기 딴에는 타당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나, 정보를 모으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정확성이 매우 떨어지는 사이트도 있다. 이런 형태의 뉴스는 어떻게 보든 하나같이 나쁜 뉴스지만, 모든 정보를 가짜뉴스라고 한데 묶어버리면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이슈를 더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우리 모두는 이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검토 없이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검증하지도 않고 글이나 사진, 영상을 공유할 때마다 이 생태계에 잡음을 키우고 혼란을 부추긴다. 이 생태계가 너무 혼탁해진 만큼 우리는 온라인에서 접하는 정보를 독자적으로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능적 반응과 거리를 두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콘텐츠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거나 내 관점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우쭐거린다면, 다른 관점을 취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탈진실을 문제 삼을 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대중과 권력자가 부쩍 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우리 모두와 관련한 문제다.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직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대중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응답자들이 하원의원에게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진실을 등한시하는 태도는 문제다. 나라를 통치하고자 한다면 진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탈진실 방식으로 캠페인 활동은 가능했더라도 언제까지나 탈진실 방식으로 통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디어 그리고 탈진실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담론이 맞선다. 우리는 사람들의 기존 신념을 자극하는 감정적 담론이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가 높고, 가장 많은 대중에게 전달되며, 대중의 믿음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앞서 짚었다. 이는 사실 검증 문화와 거의 대조적이다. 사실 검증은 공명정대하고 신중한 자세를 보이려 하고, 논쟁에서도 당파적 입장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주목받은 사실 검증 기사조차, 이들이 대적하려는 가짜뉴스나 개소리보다 도달률이 훨씬 떨어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단 몇 초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개소리를 공유할 확률이 훨씬 낮아진다. 
내가 믿는 담론을 믿지 않는 담론만큼 의심해보자. 우리는 이런 편향에서 빠져나와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운동 조직이나 후보가 받는 비판도 믿어보려고 해야 한다. 다른 정치인이나 세력의 입장에서 기사를 읽어보고, 내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시도는 쉽지 않다. 내 정치적 입장을 제쳐놓고 어떤 스캔들을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어떻게든 해내면 사실과 증거를 제대로 판단하는 능력이 향상된다.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왜 우리가 흘려듣는 스캔들에 흥분하는지, 반대로 상대방이 무시하는 스캔들에 왜 우리는 열띤 반응을 보이는지 알게 된다.
 

명확성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혼란은 독재자의 도구다. 저질 정보, 망상, 허위 정보는 민주주의를 손상시키고 정보 스모그를 만들어서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합의하려는 시도를 소모적으로 만든다. 사회 전반에 이런 불확실성이 커지면 독재자와 전제군주, 선동꾼이 힘을 얻는다. 구소련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정보 전략 목적이 정치 선전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불확실성을 낳아 푸틴이나 그 어젠다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담론이 나오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탈진실 사회의 접근법은 독재자의 접근법이다. 소모적인 캠페인 때문에 정부와 사법기관, 미디어 등 각종 기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대중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담론이 떠돌 뿐이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감정을 자극하고 이목을 끄는 과감한 주장을 내세우는 쪽이다. 보통 그런 주장은 역사가 보여주듯 소수집단들을 악마로 몰아간다. 이런 접근법을 러시아만 쓴 것은 아니다. 조직적이고 악랄한 체제의 결정판인 나치독일의 핵심 전략도 혼돈과 혼란이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에게 말을 건네기보다 나와 생각이 맞는 사람과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며(혹은 호들갑을 떨며),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관한 최악의 사실만 믿고, 그들을 악의적으로 표현한 정보를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공유한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음모론보다 더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확실한 증거가 나오려면 훨씬 오래 기다려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만화책에 나오는 악당이나 우리가 쉽게 무찌를 수 있는 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를 무수한 원인이 얽힌 복잡한 문제, 모두가 개입된 문제로 보는 쪽보다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대하거나 안 좋게 바라보려는 충동, 사실이었으면 하는 정보만 믿으려는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고 개소리보다 진짜 정보를 다뤘을 때 정치인과 미디어가 더 유익한 결실을 얻을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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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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