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기 시작한 발원지에서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면 강의 생명은 끝나는 것 같지만, 바다에 합쳐져 순환의 다른 고리로 넘어간다.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지만, 순환을 통해 다시 발원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도 거스를 수 없이 흘러가 생을 마감하지만, 여러 흔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도 하고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즐겁게 살다가 가뿐하게 죽을 뿐!

 

 

[본문발췌]

 

 

키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삶은 뒤돌아봐야만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앞을 보며 살면서,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하여 살아가야 할지라도 말이다. 

 

 

카를로 미켈슈테터가 썼듯이, 확신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인격을 늘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순간을 빨리 태워버리려 하고, 가능한 한 빨리 올 미래의 시각에서 순간을 사용하며, 삶이 송두리째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매 순간을 파괴하고자 하는 미친 듯한 열망에 흔들리지 않고,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사는 능력이 확신이다. 확신 없는 사람은 언제든 올 것 같은데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며 자신의 인격을 허비한다. 현재의 어려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독감이 떨어지기를, 시험에 합격하기를, 결혼식을 올리거나 이혼 도장을 찍기를, 일이 끝나기를, 휴가가 오기를, 의사의 진단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무화되는 결핍, '없음deesse'으로서의 삶인 것이다.

 

 

목숨이 최상의 가치는 아니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 해처럼 삶을 밝고 뜨겁게 만드는 무엇을 위해 헌신할 때 삶이 더 사랑스럽고 유쾌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그들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것은, 이 세상의 원칙이 이미 심판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 확신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 사이의 딜레마는, 단지 제3제국의 독일에서만 여러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난 게 아니다. 우리의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가치체계들 사이의 모순들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했다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일반적인 세상 법칙과 경제의 객관적인 숫자, 그러니까 생산, 실업, 평가절하, 물가, 봉급 등의 숫자가 진짜 주인공들이 된다. 그것들은 환영에 불과하지만 고대 비극의 폭군들처럼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실질적으로 협박한다.

 

 

토마스 만이 말했듯, 삶을 부정한 모든 책은 삶을 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것은, 강은 그 강을 따라가는 사람처럼 하류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흘러와 섞이는 물이 어디서 왔는지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가계도 100퍼센트 순수 혈통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의 뇌로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이질적인 것은 일일이 분명한 출생증명서를 보여줄 수 없다. 그러므로 강이 어디서 왔으며 진짜 이름이 인 강인지 아니면 다뉴브 강인지 혹은 어떤 다른 강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며 어떻게 끝날지는 안다.

 

 

많은 걸 겪었어도 이룬 건 하나 없어라. 즐겁게 살다 가뿐히 죽었네. - 페르디난트 자우터의 묘비명. 

 

 

그는(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질적인 것들, 최후의 것들을 숭배했다. 사람은 그 사람이 믿는 가치로 형성되고, 그가 믿는 가치들이 고귀한가 아니면 저속한가하는 표시가 그의 얼굴에 찍힌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영혼은 그 영혼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로 염색되며, 각자의 가치는 각자가 중요성을 두는 가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번뜩이는 직관이며, 인간의 역사와 천성을 읽는 중요한 열쇠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 우리가 우리 정신 안에 살게 한 신들이다. 숭고하건 미신적이건 이 종교는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들고, 우리 모습과 몸짓에 새겨지며, 우리의 존재방식이 된다.

 

 

내 모든 힘이 다하고 / 나는 늙고 약해졌도다. / 죽음이 내 방문을 두드리는구나. / 나 두려움 없이 문을 여노라. / 하늘이여, 감사를 표합니다! / 내 삶은 / 한 편의 조화로운 노래였구나.

 

 

신학자는 명확하게 밝히고 싶어하고 법을 만들고 싶어하고 우주 만물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정의하고 싶어한다. 법보다는 삶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코드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발적인 창조성의 편에 서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그러나 시는 형식 없는 모호함보다는 단테의 3행시에서 더 진가를 나타낸다. 도덕적인 창조성은 법을 찾고 자유롭게 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삶의 모순들의 흐름 안에서 질서를 만드는 힘만이 그 모순들에 정당성을 준다. 모순이 지나치게 왜곡될 때가 있는데, 우리가 모순 안에서, 그 흔들리는 불명확성 안에서 존재의 숭고한 진실을 보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 모순을 정신의 활동으로 착각할 때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철학의 이름으로 모든 제스처와 행동을 같은 면 위에 올려놓고 혼합할 때, 판단은 흐려지고 생명력 자체는 거짓과 섞여 시들게 된다. 법의 의미와 엄정함은, 열정을 억누르는게 아니라, 열정에 힘과 현실성을 준다.

 

 

과거에는 미래가 있다. 미래를 바꾸는 변화가 있다. 현실이 그렇듯, 현실을 살아가고 현실을 바라보는 나 역시 복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30년 전 그 서사적인 기사들에 표시된 장소들을 따라가면서, 보이지 않는 얇은 막들을, 여러 다른 현실이 켜켜이 쌓인 층들, 맨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현존하는 것들을, 역사의 적외선이나 자외선, 필름 감광판에 와닿을 수는 없지만 늘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와 순간들을, 만질 수 없지만 예민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전자들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이미지와 순간들을, 벗겨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강은 수원으로 되돌아간다. '검은 바다'라는 거창한 이름의 흑해 하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인생의 입구가 아닐까? 아마 모든 여행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무에서 자신의 얼굴을 불러낸 창조주의 의지를 찾아 기원으로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반복해서 자기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현실의 압박을 피해 자유와 미래, 다시 말해 아직 열려 있고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미래, 삶이 아직 그 앞에 있었던 어린 시절, 고향집을 찾는다.

 

 

인생은 시간이 소멸, 고장 나기 쉬운 기계 같다. 삶을 재는 시계처럼, 현실은 늘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몽타주의 연쇄, 영원히 반복되는 조직체, 톱니바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톱니바퀴가 맞물려들어가는 상호작용을 사랑하고, 멀리 섬 여행을 떠나는 것에 마음이 들뜰 뿐만 아니라, 여권 발급에 관계된 행정 수속에도 마음이 들떠야 한다. 일상의 일반적인 이 동원을 싫어하는 강한 신념은, 무언가 다른 것, 삶보다 위대한 무언가를, 휴식시간에도, 단전 때에도, 메커니즘이 멈췄을 때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세계는 텅 비어 있음, 부족, 부재를 의미하는 휴가 상태에 있고, 여름날 쨍쨍 내리쬐는 강한 빛만이 있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세상은 실재한다. 그런데 세상은 왜 그리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려야 했을까? 우리가 고작 해봐야 결국에는 뚱딴지 같은 항의 정도일 텐데 말이다. 말하자면 선생님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괜히 때때로 무단결석이나 해보는 정도 말이다.

 

 

 

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83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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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언론과 기자를 다룬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미디어의 영향력과 언론윤리에 대한 중요성을 생각하고, 2020년 9월의 우리 언론과 미디어의 상황에 한숨이 가시지 않는다.

 

작년 조국 전 장관 관련 검찰과 언론의 합작으로 쏟아내던 기사들을 보며 블로그에 남겼던 "한국 언론의 수준"이란 글에서(https://wanderingplus.tistory.com/173) 대한민국 언론이 세계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자유도는 중상위권(아시아 국가중에서 1위), 신뢰도는 최하위권이란 이야기를 했다.

 

2020년 조사결과를 업데이트 해보니,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20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전체 180개나라 중 한국은 지난해보다 1단계 하락한 42위를 기록했고(그래도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공개한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 신뢰도는 21%로 전체 조사국가 중 여전히 꼴찌에 있다.

 

기자가 쓴 확인되지 않거나 왜곡, 또는 사실이 아닌 기사에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펜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에게 그런 잘못된 기사를 쓰도록 하는 것은 권력과 재벌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냥감과 먹이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가 만든 영화 <더 포스트>나 <스포트라이트>는 언론이 권력의 잘못된 사용과 사회의 부조리를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면, <특종, 량첸살인기>와 <신문기자>는 한국과 일본의 언론이 얼마나 타락하고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지를 알려준다.

 

 

"뉴스란 게 그런거잖아. 뭐가 진짜고 가짠지 가려내는거 그거 우리일 아니야. 보는 사람들 일이지. 그들이 진짜라고 믿으면 그게 진실인거야." -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6007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믿고 의심하라! - 영화 <신문기자>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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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고립 공간이자, 드넓은 바다와 수평선,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본문발췌]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 앞으로 다가서면서도 (동시에 도망쳐)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그칠 사이 없는 움직임의 대가를 받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니,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 내 어린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 <공의 매혹>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 - 그러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 - 에 대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바는 너무나 잔혹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혁명에대한 희망은 물론 별도로 쳐야겠지만) 그것은 병에 걸리는 일뿐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질병과 사고가 그리도 많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것들이 그리도 많은 까닭은 매일매일의 노동에 지쳐버린 인간들이 그들의 남아 있는 영혼을 구해 내고자 할 때 기껏해야 질병이라는 저 한심한 피난처밖에는 다른 방도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병이란 여행과도 같은 값을 지닌 것이며 병원 생활이란 그 나름의 으리으리한 고대광실 생활이다. 만약 부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런 비참 속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시련 속에서, 만사에 대하여,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는 어떤 현실과 접촉하게 된다. 우리는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멈춰버릴 것만 같다. - <케르겔렌 군도>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각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들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질하는 그런 감각들 말이다.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 <행운의 섬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그 <자기 인식 reconnaissance>이란 반드시 여행의 종착역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자기 인식이 이루어지고 나면 여행은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장소, 그 순간에 우리가 바라본 어떤 고장의 풍경은, 마치 위대한 음악가가 평범한 악기를 탄주하여 그 악기의 위력을 자기 자신에게 문자 그대로 <계시하여> 보이듯이, 우리들 영혼을 뒤흔들어놓는다. - <행운의 섬들>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 생 피에르 섬에서 맛본 행복감에 대한 루소의 묘사..., <행운의 섬들>

 

 

나폴리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아침마다 만을 굽어보는 플로리디아나 장원을 찾아가서 시계가 정오를 칠 때까지 담배를 피우면서 이리저리 거닐곤 했다. 그 한가로운 무위의 시간들은 파이레서의 열에 들뜬 듯한 시간들보다도 더 내 가슴을 가득하게 해주었다. 이같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풍경 속에서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일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파리나 런던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태양과 바다가 영원히 지배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즐기고 고통하고 표현하는 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만물의 중심에 있는데 이 땅덩어리의 한 끝을 조금 움직여본들 무엇하겠는가? 천천히 시계가 정오를 치고 생텔름 요새의 대포 소리가 울릴 때 어떤 충만감이 - 행복의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전반적인 현존의 감정이 - 마치 존재의 모든 틈은 다 막혔다는 듯이 나와 나를 에워싼 모든 것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 <행운의 섬들>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 <행운의 섬들>

 

 

섬들을 생각할 때면 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되는 것일까? 난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스럽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 <격리된다 isole> - 섬 Ile의 어원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섬, 혹은 <혼자뿐인> 한 인간, 섬들, 혹은 <혼자씩일 뿐인> 인간들. <부활의 섬>

 

 

<상상의 인도>

  • 우리는 오로지 세계를 통해서만 세계로 갈 수 있고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로 갈 수 있다.

  • 우리들의 행동과 독립된 것으로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는 우리의 개성이 사실은 우리들 행동들의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미 어떤 과거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하나하나의 사건은 우리들의 존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구성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fieri가 esse 보다 먼저이며 더 상위의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한단 말인가? 

  • 전 우주가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죽음 같은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탄생이란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어서 그저 그 탄생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는 사고 방식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살아남는 것을 믿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신앙이 필요하듯이 저들에게는 생명이 꺼지는 것을 믿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 무케르지는 최근에 펴낸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그냥 순진하게 왜 윌슨은 피케 카드 노름에서 <14점> 패를 잡지 못했느냐고 간디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만약 한 점 한 점마다 각기 일 년씩 명상을 하고, 단식을 하고, 한 점 한 점마다 불멸의 생명을 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신에게 기도를 했다면?" 하고 간디가 그에게 반문하더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의한 사고의 전체적이고 완벽한 표현이다. 서양에서는 실용주의 덕분에 그 완벽한 표현의 위조 제품을 하나 얻어 갖게 되었으니 그것이 넌센스다(태도가 사고를 창조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고대 사람들의 이상이었던 그 완전한 표현(감옥과 죽음에서 도망치기를 거절하는 소크라테스, 의사가 자기에게 주는 약을 마시는 알렉산더 대왕)은 - 비록 고대 사람들이 성스러움이 아니라 예지의 한계속에, 경시가 아니라 명상의 한계 속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 된 나머지 우리는 언어라는 그 불완전한 (그러나 예술을 위해서는 그렇게도 중요한) 표현을 업수이 여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사람들이 문학같은 것은 집어치우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고는 아무런 실현이나 표현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 경우 출발점을 도달점으로 착각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프루스트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한 마디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가. <아마도 지적이고 정신적인 작업이 도달하게 된 경지는 예술적 장르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질을 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은 변할 수가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인간은 지금까지 변화밖에 한 것이 없다.

  • 탐구의 종착점이 <존재 l'Etre>냐 아니면 <무 le Neant>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탐구 같은 것은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대상은 매순간 발견되고, 하나의 사실이 여러 사실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 의하여 대치되듯이 현실이 진실에 대치되기 때문이다. 만약 서양 사람이 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아마도 그보다는 덜 위선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행복의 감정이 존재의 표시라면, 그렇다, 존재는 실제로 있다. 천분의 일 초 동안만 정신을 딴 데 팔아보면 distraire 충분하다. 쇠사슬은 끊어져 버린다. 183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은 오늘날의 낭만주의자들에 비해 본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낯선 풍경 속에 잠기려면 그저 딴 고장에 가보기만 하면 되었다(다만 네르발과 노발리스만이 예외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성을 지워버리고자 하고 삶의 경계선을 뛰어넘어 보려고 한다. 이 새로운 낭만주의자는 다만 그 방향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In fieri, 실현 과정의 유(有). in facto esse 사실 상태의 유와 대조. [네이버 지식백과] In fieri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 11. 25., 백민관)

 

한 살 더, 그러니까 살 날이 한 해 덜. 그리하여 그 생일날 나는 바캉스vacance를 가졌다. 바캉스란 일체의 행동이나 사고나 의사 교환이나 오락을 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그러니까 그것은 휴가vacances가 아니었다). 나는 진공을 만들려고 했고 시간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무슨 반성을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고 무슨 준비를 하자는 목적에서도 아니었다. 과거는 분명 죽었고 미래는 형태가 없는 상태였다. 언제나 손에 잡으려면 벗어나는 것이 그 본질인 현재가 아주 예외적으로 마치 기름에 의해서 잔물결로 변하는 파도처럼 질펀해져 버릴 수는 없을 것인가? 나는 <묵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이란 이 세계의 바탕과는 다른 바탕에서 여전히 계속되는 어떤 삶을 전제로 한다. 전진과 추락이 있고 또 무슨 방향이 있는 그것은 여전히 어떤 삶인 것이다. 나는 오히려 무가 되고 싶었다. 말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저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싶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라. - <사라져버린 날들>

 

 

바람에 펄럭이는 저 깃발을 보아라, 하고 입문하려는 제자에게 티베트의 승은 말한다. 펄럭이는 것은 그 깃발인가 바람인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입니다. 그날 내 정신을 펄럭이게 하던 것은 평소에 나를 괴롭히곤 하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쳇바퀴 같은 습관으로 타락하는 어떤 직업의 고역, 불가능해져버린 다른 사람과의 의사 소통, 같은 땅에 모여 살면서 서로 싸우는 가운데서가 아니라 서로 믿는 가운데서 자신의 힘을 인정해야 마땅할 이 백성들의 상호 몰이해 등 - 어떤 성질의 기쁨에 다른 사람들이 소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느껴야만 비로소 인생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한 이기주의자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그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 <사라져버린 날들>

 

 

여행을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거두어두자. 마죄르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밖에! 그럼 무엇을? 에 - 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냘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 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맞아주기에 족할 것이니...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들일 터이다. <보로메의 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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