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기 시작한 발원지에서 강을 거쳐 바다에 이르면 강의 생명은 끝나는 것 같지만, 바다에 합쳐져 순환의 다른 고리로 넘어간다.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지만, 순환을 통해 다시 발원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삶도 거스를 수 없이 흘러가 생을 마감하지만, 여러 흔적으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도 하고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도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즐겁게 살다가 가뿐하게 죽을 뿐!
[본문발췌]
키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삶은 뒤돌아봐야만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앞을 보며 살면서, 말하자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하여 살아가야 할지라도 말이다.
카를로 미켈슈테터가 썼듯이, 확신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인격을 늘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순간을 빨리 태워버리려 하고, 가능한 한 빨리 올 미래의 시각에서 순간을 사용하며, 삶이 송두리째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매 순간을 파괴하고자 하는 미친 듯한 열망에 흔들리지 않고, 매 순간을 깊이 있게 사는 능력이 확신이다. 확신 없는 사람은 언제든 올 것 같은데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결과를 기다리며 자신의 인격을 허비한다. 현재의 어려운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독감이 떨어지기를, 시험에 합격하기를, 결혼식을 올리거나 이혼 도장을 찍기를, 일이 끝나기를, 휴가가 오기를, 의사의 진단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무화되는 결핍, '없음deesse'으로서의 삶인 것이다.
목숨이 최상의 가치는 아니며, 목숨보다 더 가치 있는 무엇, 해처럼 삶을 밝고 뜨겁게 만드는 무엇을 위해 헌신할 때 삶이 더 사랑스럽고 유쾌해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두려움 없이 그들이 조용히 죽음을 맞았던 것은, 이 세상의 원칙이 이미 심판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 확신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 사이의 딜레마는, 단지 제3제국의 독일에서만 여러형태로 위장되어 나타난 게 아니다. 우리의 문명을 움직이게 하는 가치체계들 사이의 모순들은 아직도 극복되지 못했다고 막스 베버는 진단했다.
일반적인 세상 법칙과 경제의 객관적인 숫자, 그러니까 생산, 실업, 평가절하, 물가, 봉급 등의 숫자가 진짜 주인공들이 된다. 그것들은 환영에 불과하지만 고대 비극의 폭군들처럼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며 실질적으로 협박한다.
토마스 만이 말했듯, 삶을 부정한 모든 책은 삶을 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분명한 것은, 강은 그 강을 따라가는 사람처럼 하류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흘러와 섞이는 물이 어디서 왔는지 밝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가계도 100퍼센트 순수 혈통을 보장하지 못한다. 우리의 뇌로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이질적인 것은 일일이 분명한 출생증명서를 보여줄 수 없다. 그러므로 강이 어디서 왔으며 진짜 이름이 인 강인지 아니면 다뉴브 강인지 혹은 어떤 다른 강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며 어떻게 끝날지는 안다.
많은 걸 겪었어도 이룬 건 하나 없어라. 즐겁게 살다 가뿐히 죽었네. - 페르디난트 자우터의 묘비명.
그는(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질적인 것들, 최후의 것들을 숭배했다. 사람은 그 사람이 믿는 가치로 형성되고, 그가 믿는 가치들이 고귀한가 아니면 저속한가하는 표시가 그의 얼굴에 찍힌다는 것을, 황제는 알고 있었다. 영혼은 그 영혼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들로 염색되며, 각자의 가치는 각자가 중요성을 두는 가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번뜩이는 직관이며, 인간의 역사와 천성을 읽는 중요한 열쇠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 우리가 우리 정신 안에 살게 한 신들이다. 숭고하건 미신적이건 이 종교는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표시를 만들고, 우리 모습과 몸짓에 새겨지며, 우리의 존재방식이 된다.
내 모든 힘이 다하고 / 나는 늙고 약해졌도다. / 죽음이 내 방문을 두드리는구나. / 나 두려움 없이 문을 여노라. / 하늘이여, 감사를 표합니다! / 내 삶은 / 한 편의 조화로운 노래였구나.
신학자는 명확하게 밝히고 싶어하고 법을 만들고 싶어하고 우주 만물에 대한 확실한 개념을 정의하고 싶어한다. 법보다는 삶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코드보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발적인 창조성의 편에 서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그러나 시는 형식 없는 모호함보다는 단테의 3행시에서 더 진가를 나타낸다. 도덕적인 창조성은 법을 찾고 자유롭게 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삶의 모순들의 흐름 안에서 질서를 만드는 힘만이 그 모순들에 정당성을 준다. 모순이 지나치게 왜곡될 때가 있는데, 우리가 모순 안에서, 그 흔들리는 불명확성 안에서 존재의 숭고한 진실을 보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고를 무시한 채 그 모순을 정신의 활동으로 착각할 때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는 철학의 이름으로 모든 제스처와 행동을 같은 면 위에 올려놓고 혼합할 때, 판단은 흐려지고 생명력 자체는 거짓과 섞여 시들게 된다. 법의 의미와 엄정함은, 열정을 억누르는게 아니라, 열정에 힘과 현실성을 준다.
과거에는 미래가 있다. 미래를 바꾸는 변화가 있다. 현실이 그렇듯, 현실을 살아가고 현실을 바라보는 나 역시 복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30년 전 그 서사적인 기사들에 표시된 장소들을 따라가면서, 보이지 않는 얇은 막들을, 여러 다른 현실이 켜켜이 쌓인 층들, 맨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현존하는 것들을, 역사의 적외선이나 자외선, 필름 감광판에 와닿을 수는 없지만 늘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와 순간들을, 만질 수 없지만 예민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전자들처럼 그렇게 존재하는 이미지와 순간들을, 벗겨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강은 수원으로 되돌아간다. '검은 바다'라는 거창한 이름의 흑해 하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인생의 입구가 아닐까? 아마 모든 여행은 자신의 얼굴을 찾아, 무에서 자신의 얼굴을 불러낸 창조주의 의지를 찾아 기원으로 떠나는 건지도 모른다. 여행자는 반복해서 자기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현실의 압박을 피해 자유와 미래, 다시 말해 아직 열려 있고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미래, 삶이 아직 그 앞에 있었던 어린 시절, 고향집을 찾는다.
인생은 시간이 소멸, 고장 나기 쉬운 기계 같다. 삶을 재는 시계처럼, 현실은 늘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몽타주의 연쇄, 영원히 반복되는 조직체, 톱니바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톱니바퀴가 맞물려들어가는 상호작용을 사랑하고, 멀리 섬 여행을 떠나는 것에 마음이 들뜰 뿐만 아니라, 여권 발급에 관계된 행정 수속에도 마음이 들떠야 한다. 일상의 일반적인 이 동원을 싫어하는 강한 신념은, 무언가 다른 것, 삶보다 위대한 무언가를, 휴식시간에도, 단전 때에도, 메커니즘이 멈췄을 때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세계는 텅 비어 있음, 부족, 부재를 의미하는 휴가 상태에 있고, 여름날 쨍쨍 내리쬐는 강한 빛만이 있다.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세상은 실재한다. 그런데 세상은 왜 그리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려야 했을까? 우리가 고작 해봐야 결국에는 뚱딴지 같은 항의 정도일 텐데 말이다. 말하자면 선생님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괜히 때때로 무단결석이나 해보는 정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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