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의 혁명은 돌을 갈아 정교한 도구를 만듦으로 이루어 것이다. 정교한 도구의 사용과 함께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식도 차츰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명이 발달한 지방에는 사냥도구, 농기구, 무기 등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고,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자연에 대한 여러가지 지식들이 축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석기 혁명 시기에 정교한 도구를 다루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구분되었다. 결국 식량생산에 의해 생긴 여유는 마침내 전문기술자를 낳게 되고 또한 계급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산업혁명의 발생 요인을 경제적으로는 크게 수요적 요인과 공급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수요적 요인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그에 따른 소득과 수요의 증가, 중상주의 시대의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수요의 증가이다. 공급적 요인으로는 인구증가에 따른 노동력 확보와 식민지 개척에 따른 풍부한 원료 공급 등이 있으며, 기술의 발달과 제도의 변화 또한 산업혁명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산업혁명 중 영국에서는 중소농민이 몰락과 노동자의 증가, 농업혁명, 기계의 발명 등과 공장제의 출현, 교통과 상업이 발달되었다. 여기에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이 형성되고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생산방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생산량 증가로 인하여 결국 농업(1차 산업) 중심의 사회에서 제조업(2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의 사회 및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정보화의 혁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능력의, 차이에 따라 정보력의 격차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정보력의 격차에는 새로운 문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과학기술의 적응도와 맞물려 있다. 이것은 정보에의 접근을 불평등하게 할 가능성이 높으니 이미 빈부격차로 연결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정보격차에 대한 이러한 우려가 아직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 뚜렷한 징후가 포착되고 있지는 않지만 근래 정보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 한 국가 내의 지역 간의 정보격차 문제, 선진국과 후진국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TDF(Transboader Data Flow)논쟁의 심각성을 고려할 경우, 정보 격차 문제를 단지 특정 국가차원의 문제에만 한정시키기는 어렵다.
우리 인류는 불을 자연에 대한 기본적인 발전력을 극대화하는데 사용하였다. 우선 제1의 불인 '자연적 불'을 생산하고 다루는 과학기술을 습득한 인간은 여타의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또한 제2의 불인 '전기의 발견'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을 에너지로 어디에서나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하게 해주었다. 또한 매우 적지만 가장 불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원자력은 제3의 불이라 불릴 수 있는 현대적 의미의 에너지이다. 이러한 불과 에너지에 관한 과학기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역사였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미래의 에너지 자원에 대한 고갈의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 인류로 하여금 자연적 한계에 대한 인간만의 거대한 도구를 마련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다니엘 카라한, 인간의 존엄성에 포함된 중요한 요소 5가지
인간 종족의 보존으로 이것은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경우, 여기에 더하여 인간이라는 종의 존재 자체가 가치롭다는 신념이 부가된다. 즉,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가치롭기 때문에, 그 종 자체를 보존한다는 것이 가치 있다는 것이다.
가계의 보존. 인간이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사회의 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고,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사회의 구성원이 될 때에만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성. 인간에게는 타인을 보호함으로써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 생명을 파괴하거나 그 가치를 저하시킬 사회적, 경제적, 의료적 조건을 부당하게 만들어낼 권리는 주어져 있지 않다.
인간의 자유의지. 자유가 있다는 것은 물리적인 자연법칙에 종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고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질 의무도 부과되어 있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불가침성. 어느 누구도 자신의 허락 없이 한 개인의 신체나 일부분에 대한 어떤 강요를 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모든 지적 호기심의 근원적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의 어원을 살펴보면 영어로는 필로소피(philosophy)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사랑을 의미하는 여러 말들 중에 친구와의 우정을 말하는 필로스(philos)와 지혜를 말하는 소피아(Sophia)의 합성어가 '필로소피아'인 것이다. 풀이하자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한자로 풀이해도 철학(哲學) 자체가 '슬기로울 철(哲)'자와 '배울 학(學)'자로 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슬기로움에 관한 학문'으로 정의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 것인가?" 과연 "지혜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당연히 우리가 부수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사실 지혜란 슬기, 즉 지식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지닌다. 지식과 지혜 모두는 우리의 인식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세계 전체를 의미 있게 하는 근거와 관계되는 통일적인 지식으로 사물의 이치나 사람 행위의 선악을 분별하는 정신적 작용이라 하겠다. 우리 인간은 세계에서 다양한 것들과 관계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과도 관계를 형성하는 그런한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그냥 그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의 배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왜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는지를 다시금 되물어가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A. 레플레는 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철학의 근원은 자신의 내적 외적 세계가 가지는 수수께끼의 틈바구니에서 길을 찾으며, ... 개별적인 것들의 변화무쌍한 망원경에서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기본 노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으로부터 온다.'
이러한 고대과학철학은 곧 두 가지 입장으로 정리되어 발전되고 철학적 과정으로 전개된다. 그 하나는 플라톤을 중심으로 한 이상주의적 과학관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적 과학관이라고 하겠다. 우선 이상주의적 과학관을 정립한 플라톤은 이전의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요소와 수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윤리와 덕론을 중심으로 자신의 철학을 정립해 나아간다. 그의 과학에 관한 저서로는 <티마이오스>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기존의 자연철학을 정리하고 창조신화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우주창생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세계를 기하학적 모형으로 표현함으로서 이원론적인 과학을 형성하는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기하학으로 우주를 해석하려는 그의 과학관은 16세기 과학혁명의 하나인 천문학적 혁명(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로 이어지는)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을 제공하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반면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과학의 기본적인 입장을 형이상학적에서 경험주의적 과학으로 집대성한 철학자이다. 그는 플라톤과는 달리 자연현상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경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만물의 변화와 운동의 문제를 자신의 중심적인 문제로 다루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성되며 달라진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네 원인은 형상인(Formal Cause), 질료인(Material Cause), 작용인(Efficient Cause), 목적인(Final Caus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종대왕 동상을 구성하고 있는 청동은 '질료인'에 해당되며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대왕의 모습은 '형상인'에 소한다. 또한 동상 제작자가 청동을 재료로 대왕의 모습을 제작하는 과정을 '작용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구상한 제작자의 아이디어는 '목적인'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이후 과학을 하는 방법론적으로 실험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의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찰과 실험에 입각한 생물학은 그의 과학철학을 잘 보여주는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집결되는 고대의 과학과 철학은 그 의미가 현대과학의 발전에 비교되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2000년 동안 서양의 과학과 철학을 지배해 온 기틀이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도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서양과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 근세 자연과학의 방법으로서 귀납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근대 과학철학의 아버지인 베이컨이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강조되어 왔던 연역논리를 배척하고 그에 대응되는 귀납논리를 강조하였다. 베이컨은 과학적 사고는 사물의 진정한 원인을 밝힘으로서 인간 이성의 힘을 증대시키며 나아가 자연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베이컨은 원인들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에 해당되는 원인은 과학적 사고에서 배제시키기로 하였다. 이는 비물질적인 원인들을 배제하는 사고방식만이 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자신의 저서 <새로운 논리학>에서 정신이 빠지기 쉬운 오류를 네 가지 우상론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우선 그가 말하는 첫 번째 우상(Idola)은 '종족의 우상(Idola of the Tribe)'이다. 이것은 정신의 자연적 결함으로서, 일종의 나태와 타성에 도래되는 것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점성술과 같은 미신을 좋아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항성이 원운동을 한다고 주장하는 고대천문학의 견해나 그 당시 영국에서 새로 나온 플루드의 카빌라와 같은 사이비 과학도 매한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이 종족의 우상은 결국 과학에 있어 실험도구를 사용하여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동굴의 우상(Idola of the Den)'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인용하여, 습관의 반복과 정신이 감옥에 갇혀서 받은 교육에서 오는 것이라 하였다. 결국 과학자들은 자신의 주관적 경향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과학자들은 보다 엄밀한 과학을 주장하기 위해서 상호비판과 협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시장의 우상(Idola of the Marketplace)'이란 언어가 사물들을 분류하기를 바라지만, 얼마나 언어들이 혼동된 의미를 지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단어들이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응하는가를 말한다. 통속적 언어는 자신의 분류들 자체가 서로서로 대립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언제나 실험에 근거를 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Idola of the Theatre)'이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적 이론의 특권에서 오는 것, 또는 최악의 경우는 소피스트들의 이론에서 오는 경우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학적 권위의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납법과 자연사적인 방법이 과학적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 작업과 발견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형이상학적 지침서 개념, 다시 말해 대칭성, 보존량 개념 등은 초창기 현대 과학철학자의 담론에서 제외되었다. 과학자에게 과학이 경험적이라는 말은 경험을 통합 설명한다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겠지만, 철학에서 그 말은 관찰 영역 속에 구속된 과학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더욱이 과학은 관찰 영역 속에서 다른 분과와 분리된 자율성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 자율성은 오로지 철학에서만 의미 있을 뿐이다.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과거 자연철학의 담론은 과학적인 것과 과학적이지 않는 것의 경계 짓기 담론으로 전환되었고, 실제 과학 이론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발견의 메커니즘은 과학철학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현대 과학철학의 주류는 20세기 귀납주의와 귀납주의의 비판자를 자처하는 칼 포퍼의 반증주의라 할 수 있다. 포퍼에게 있어서 과학의 반증가능성은 과학과 과학 아닌 것을 구별하는 구획기준으로 제시된 주요개념이다. 사실 모든 가능한 사태가 하나의 이론과 맞아 들어간다면, 어떠한 현실적 사태, 관찰들, 실험 결과들이 그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이를테면 어떤 과학이론이 참인 경우와 거짓인 경우의 경계점에 서있는데 관찰적 증거들이 그 차이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그 이론은 종국에 아무런 과학적 정보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론이 반증이 될 수 있는 어떤 관찰적 증거의 가능성이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러는 경우에 한해서 그 이론도 시험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시험 가능한 이론만이 진정한 과학적 이론이 되는 것이다.
토마스 쿤은 과학이론의 법칙과 실험방법 등을 과학자 집단의 사회적 수용 방식으로 취급했으며, 그러한 법칙과 실험방법을 포함한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와 해답을 제공해 준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유성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동양이 신비주의든, 동양 사상이든 기존 과학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이 과학적 위상을 획득하고 과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획일성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해 과학적 위상을 부여하는 것은 고유성, 다양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는 신과학적 경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다양한 인간의 지식과 지혜, 아이디어 등이 어떻게 해서든지 과학적 위상을 획득하고자 할 때 고유성 다양성은 상실된다.
괴테는 뉴턴의 수학적, 실증적, 분석적 방법을 통해 이룩한 과학을 전면 거부하고, 그것은 살아있는 자연을 죽여서 보여주는 잘못된 과학이라고 혹평하였다. 그에 따르면 참된 자연의 진리는 분석이 아니라, 자연과의 유기적인 교감 안에서 전체적인 연관에서 자연을 이해하고자 관찰과 이해를 통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관념의 낭만주의적인 변화에 근거하여 이상적 자연으로 복귀하려는 열망에서 고전시대가 재평가되고, 그리스 신화의 농업공동체인 아르카디아(Arcadia)가 이상향으로 설정되었으며, 물질지향적인 개발을 거부하는 '전원도시운동', '도시탈출운동', '야생자연 보존운동' 들이 시작된 것도 낭만주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또한 낭만주의 영향에 따른 '노동의 상품화 거부'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은 이것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사건이며, 그러한 만남을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 교통하고,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정신 계획을 자연물에 실현하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주체적, 능동적 존재로서 확인하는 자아의 실현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대량생산과 시장경쟁체제 하에서의 '분업적 노동'을 통해 노동이 갖는 본질적 의미를 훼손시키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즉, 노동의 정신적인 의미는 폐기되고, 물질적 생산성에 의해 노동의 값어치가 매겨지고, 그 노동의 주체인 인간 역시 가격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되는 상황을 낳게 된다. 하지만 낭만주의에서는 대량생산 체제와 시장경제체제에 의해서 야기된 노동의 상품화에 대항하여,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거부하고, 노동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생물학적 나이의 어느 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무모함의 함량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시기가 나의 청춘이었다."
하고 있는 일에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고, 그 일의 결과물로 다른 사람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청춘을 보내고 싶다.
[본문발췌]
해결이 된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 지나간 것뿐이다.
오랜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살면서 필요한 웬만한 것들은 60리터 배낭에 다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며칠 푹 쉬다 보면 세상에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에쿠니 가오리의 말처럼 내 인생과 무관하게 세상은 무사히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핀다는 건 참 싱그러운 느낌이야. 글쎄, 어차피 필 거라면 난 누군가가 봐주었으면 해. - 마스다 미리, <주말엔 숲으로>
일은 잘하는 것보다 제 시간에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두 시간 동안 끙끙대며 마무리짓지 못한 원고를 한 시간 더 잡고 있어봐야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정해진 시간 안에 마무리해서 넘기는 것이 우선이다. 고치는 것은 그 다음에. 때로는 그렇게 넘긴 원고를 좋다고 하기도 한다. 보는 눈과 취향은 제각각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안자이 선생의 "대충 한 게 더 나은 사람도 있다"라는 말은 이 뜻일 것이다. 그리고 십년, 이십 년 같은 일을 계속 해온 사람은 '대충'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줄 안다. 그게 프로다. 재능에는 '한 가지 일을 계속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능률이다. 안자이 선생 또한 능률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잔업을 하기에 잔업은 질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놀러 나간다고.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떤 순서로 일을 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느냐가 때로는 일의 성공에 더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
레몽 드파르동의 사진들은 "무엇을 바라보려면 고독해야 한다"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준다. 이 말은 오랫동안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생각해야 하며, 오랫동안 사랑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오랫동안' 해야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완전한 것만이 고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마음에 드는 문장을 쓰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내가 충분히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리버 색스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어떤 다른 사람도 결코 나와 같을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구멍을 하나씩 남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왜, 그 사람과 즐겁게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 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제프 다이어,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아야 하고, 운명은 강처럼 흘러가며, 사랑은 생의 유일한 약점이라는 것, 사막을 등지고 집으로 들어온 낙타처럼, 생을 등지고서 비로소 생을 안을 수 있다는 것.
소중함을 모르다가 곁에서 없어지니 얼마나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제야 사무친다. 그래서 후회가 된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 한 조각에도 멀어져가는 봄이 느껴지고 살이 아프다. 열 달 뒤면 봄은 다시 오겠지만 그 봄은 지금의 봄과 다를 것이다. 지난해의 봄이 그 전 해의 봄과는 달랐던 것처럼. 아프고 슬펐던 것처럼.
오베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59세. 까칠하고 고집 세고 융통성 없는 남자입니다. 이웃과도 담을 쌓고 지내는 그런 남자죠. 하지만 이런 남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운명이란 다가올 '무언가'가 아니라 만나게 될 '누군가'라고 생각할 만큼. 돌처럼 단단하고 순정한 마음도 가지고 있죠. 그에게는 소냐라는 예쁜 아내도 있습니다. "흑백으로 보이는 세상에 그녀만이 유일한 색깔"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특별한 존재죠.
그 많은 돈으로 무얼 하시나요? 자유, 자유를 사고, 내 시간을 사요. 그게 가장 비싼 거죠. 인세 덕에 돈을 벌 필요는 없게 됐으니 자유를 얻게 됐고, 그래서 글 쓰는 것만 할 수 있게 됐죠. 내겐 자유가 가장 중요해요.- 무라카미 하루키 인터뷰 중에서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 코엘료
이 세상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 <인생의 낮잠>
아이야, 행복이라는 건 인간의 수만큼 많단다. 다른 이의 행복을 부러워하지 말거라. 너에게는 네게 꼭 맞는 행복이 있을테니까.
누군가를 잃어서 슬픈 것은 그 사람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모습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외로움이다. - 히라노 게이치로, <TED x Kyoto 2012> 강연에서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장차 큰 사명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몸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케하여,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그 성질을 참게 하여,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맹자>, 고자 하 편중에서
타협은 인생을 편하게 해주지만 나중에 반드시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한다.
"르 주에 람 들 라 메카니크 Le jeu est l'ame de lamecanique!"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하자면 '틈은 기계의 영혼'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뤼크는 그것이 그의 핵심 규칙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어떤 것이든 너무 꽉 죄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특히 낡은 피아노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모든 부품에는 틈이 있어야 해요.' - 사드 카하트,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청춘이라는 단어를 생물학적 나이의 어느 한 시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정과 무모함의 함량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시기가 나의 청춘이었다.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파스칼, <팡세>
여행을 하며 깨달은 건 삶은 모험이라는 것. 모험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이백, <장진주> 중에서..... 여행을 하며 깨달은 단 하나의 진리라면 이것이다. 황하의 물이 바다로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청춘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스물한 살이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두 살이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마흔세살인 것이다. 두보 역시 "봄을 마음껏 보려고 하나 꽃잎은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라고 했던가. 어쨌든 인생이 그런 것이다. 불과 아침과 저녁 사이만큼 순식간에 지나간다. 일을 하다 보면, 도대체 이 일을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의 인생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매일의 결기 어린 다짐이 아니라, 어제에 대한 회의와 내일에 대한 의심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하기 싫은 일이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우주는 점점 팽창하고 있고,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고, 우리는 우물쭈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버나드 쇼는 묘비명에 이렇게 써놓아다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니까 사랑을 하든, 여행을 하든 뭐라도 합시다.
야자수 그늘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으면 오래 생각한다고 반드시 좋은 생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해결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때로 너무 신중해서, 너무 심각해서 일을 그르치곤 했지. 서두르지 말것.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것. 비난하지 말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우리 인생이 뭔가 비뚤어지고 어긋난다고 느낄 땐 낮잠을 잘것. 여행하고 또 여행할 것.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고,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 따위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하고 늙어갈 뿐이다. 코엘료 역시 단호하게 말한다.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건 피로하다는 느낌.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뿐이지"라고. 맞다. 그리고 이 또한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어도, 때볕이 내리쬐는 사막을 걷고 있어도 우리는 어차피 늙어가고 있으니까.
나는 꽃내음을 맡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 채 서 있었고 나의 밤은 향기로 물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의 심정을 나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성벽들을 쌓아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 장 그르니에, <섬>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 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 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호텔에 대한 불평, 음식에 대한 불만, 국민성에 대한 불신, 날씨에 대한 혹평, 교통편에 대한 피로감, 풍경에 대한 회의.... 사실, 여행의 대부분은 이것들의 연속 아니겠는가. 이 감정들 사이사이 우리는 아주 짧게 찬탄하고 즐거워할 뿐이다. .... "텔레비전은 고장 났고, 욕실에 세수하러 갔을 때는 배관이 심하게 떨면서 전쟁 영화에서처럼 소리가 탕탕 나" 더라도, "줄을 설 때는 끼어드는 사람을 막기 위한 곡괭이가 필요"할지라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간신히 눈치로 알 수 있을 뿐이며,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가 없"을 지라도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한다. 삶 역시 마찬가지. 되는 일도 하나 없고, 생활은 뒤죽박죽이고, 당신과는 오해만 쌓이더라도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삶에서 잠시 멀어지는 것이다.
'사랑'을 '여행'으로 바꿔보았습니다. "여행이 없으면 사는 게 얼마나 밋밋하겠어요? 여행은 우릴 흥분시키고 즐겁게 해주죠. 여행을 하면 삶은 모험의 연속이 되고, 만남은 순간순간 아찔한 경이가 된답니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전 여행이 현대 생활의 가장 큰 불행, 즉 권태로부터 우릴 지켜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이긴 하지만 우린 지나칠 정도로 보호받으며 살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에게 여행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모험이지요. 우릴 늘 젊게 만들어주는 여행만세예요." - 프랑수아 를로르, <꾸뻬 씨의 사랑 여행>